묵향 22권 3화 – 무영문과 개방의 협력
무영문과 개방의 협력
해가 떠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 총관은 옥화무제를 찾아가 아침마다 하는 정기 보고를 올렸다. 그녀는 아침에 일출을 보는 것을 즐겼기에, 언제나 일출을 본 직후에 총관을 만났던 것이다.
총관의 보고 내용은 대부분 금나라와 관계된 것이었다. 금군의 위치가 변경된 것이 있는지, 그리고 현재 장인걸의 움직임은 어떤지, 또 변방 부근에서 벌어지고 있 는 첩보전에 대한 것도 있었다. 요즘 들어 장인걸이 거느린 편복대와 무영문의 첩보조들 간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편복대 쪽이 훨씬 많은 인명 피해 를 당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무영문 쪽의 인명 피해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금나라에 대한 정보 보고가 끝나자 총관이 마지막으로 보고한 것은 마교에서 양양성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일단의 고수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전에 말씀드렸던 마교의 고수들 말입니다.”
“90명의 행방은 찾았나요?”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보다 열한 명의 마교도들에 대한 겁니다만…,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의 이동로에서 꽤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습니 다.”
“사건들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예, 그 근방의 두 개 문파가 멸문당했습니다.”
옥화무제는 흠칫했다. 순간적으로 총관이 한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곧이어 정신을 수습하여 질문했다.
“설마…, 그들이 그 일을 벌였다는 말은 아니겠죠? 다른 문파들이라면 몰라도, 지금 장인걸을 잡느라고 정신이 없을 마교에서 그런 일을 벌일 이유가 없잖아요.”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은밀히 따르며 감시하라고 붙여 놓은 162조에서 보내온 보고에 따르면, 그들 중 세 명이 영안문을 멸문시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설마…….”
금나라를 등에 업은 장인걸을 상대하기 위해 무림맹과 손까지 잡은 마교다. 그런 그들이 무림에 아무 영향력도 없는, 이름도 없는 작은 문파들을 왜 멸문시키겠는 가. 더군다나 마교의 교주인 묵향과 오랜 시간 거래를 해 왔던 옥화무제였기에 최근 연이어 벌어지는 혈겁이 마교의 짓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실이 밝 혀지기까지 마교 역시 용의선상에 둬야 했다.
그렇다면 가장 시급한 것은 혈겁이 벌어진 이유부터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올해 혈겁을 당해 갑작스럽게 멸문당한 문파가 몇 개나 되죠?”
“작은 문파까지 모두 다 합한다면 28개입니다, 태상문주님. 그중 몇 개는 장인걸이 벌인 일로 추정되고, 화산파는 마교가 멸문시켰고, 또 인근 문파와 이권다툼으 로……..
옥화무제는 총관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직까지 흉수를 파악하지 못한 혈겁들만 따로 모아서 조사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뭔가 연관성이 있나 찾아보시구요.”
“그걸 모두 조사하자면 비영단이 최소한 10개 조는 필요합니다, 태상문주님.”
옥화무제가 대답을 하지 않자, 총관은 그녀의 눈치를 힐끔 살피며 물었다.
“금나라 쪽에서 뺄까요? 아니면 중원의 다른 지역에 있는 조들을 그쪽으로 돌리는 것이 좋을까요?”
옥화무제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입을 열었다.
“비영단 조장 중 가장 인상이 좋고 넉살 좋은 조장이 누구죠?”
그녀의 엉뚱한 말에 총관은 아연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그건 왜…….”
“본문 단독으로 조사하는 것보다 개방을 이용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제야 옥화무제의 말뜻을 이해한 총관은 재빨리 한 인물을 생각해 내어 천거했다.
“212조 조장 이진덕(李振德)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성격이 둥글고 넉살이 좋아 거지들하고도 잘 어울릴 겁니다.”
“좋아요, 212조를 그쪽으로 보내도록 하세요.”
“존명!”
“그리고 마교 고수들의 뒤를 쫓고 있는 비영단에게는 절대 가까이 접근하지 말고, 원거리에서만 관찰하라는 명령을 다시 한 번 내리도록 하세요. 우리들이 그들을
쫓는다는 사실을 몰라야 쓸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이에요.”
“존명!”
총관이 명을 수행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자 옥화무제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뭔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거대한 음모가 시작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50여 식솔을 거느리고 있던 작은 문파 철륭방(鐵隆幇)이 멸문당했다는 소식은 별로 세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한 모든 사람들을 살해한 잔인 한 손속에 대해서는 모두들 눈살을 찌푸리며 성토를 해댔지만, 정작 그들이 왜 망했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무림에서 철륭방 같은 작은 문파 가 멸문당하는 것쯤은 너무나도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채 2주일도 지나지 않아, 철륭방 인근에 있는 영안문(永安門)이 멸문당하자 사정이 바뀌었다. 인근 지역의 맹주였던 영안문은 2백에 달하는 식솔을 거느리 는 제법 큰 문파였는데, 하룻밤새에 멸문을 당한 것이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철륭방이 멸문당했을 때만 해도 별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의 관심이 점차 영안문에 쏠리기 시작했다.
까악까악.
까마귀만이 먹이를 찾아 날아다니고 있는 영안문 내부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인물들이 있었다. 모두 다 허름한 옷을 걸치고 있는 거지들이다. 개방의 경우 워낙 그 수가 많기에, 웬만한 마을에는 모두 소규모의 분타를 설치해 놨다고 할 정도로 중원 구석구석을 아우르고 있다. 그렇기에 영안문에 변괴가 발생했을 때도 개방에 서 가장 먼저 그 사실을 알아챘다.
대부분의 거지들이 내부를 살펴본다고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을 때, 영안문의 정문에서 좀 떨어진 곳에 거지 하나가 주저앉아 한가로이 졸고 있었다. 혹시 관부(官 府)에서 사람이 나와 쓸데없는 충돌이 벌어질 수도 있기에 망을 보고 있는 것이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주저앉아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영락없이 졸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겉모습과 달리, 거지의 눈은 한 번씩 날카롭게 주위를 훑듯 움직이고 있었다.
이때, 거지의 시선에 낯선 사내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다. 비교적 푸짐한 살집을 지닌 인물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인상이 매우 유순해 보였다.
그는 문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거지에게로 곧장 다가오더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여어~, 수고 많으십니다.”
항상 구박과 경멸의 말투만 들었던 거지는, 상대의 익숙하지 않은 인사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자신의 뒤에 누가 서 있는 건 아닌지 뒤까지 돌아봤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사내는 어리둥절해 하는 거지의 모습이 재미있는지 빙글빙글 웃으며 다시 말을 건넸다.
“책임자께 안내 좀 해 주시겠습니까?”
거지는 자신이 개방 소속이라는 것을 상대방이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개를 잡는 타구봉에 허름한 거지꼴, 생각나는 방파는 개방뿐이 다. 문제는 상대방은 자신을 아는데, 자신은 상대방이 누군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거지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대꾸를 하는 거지의 말투 는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누구쇼? 보아허니 관원은 아닌 듯한데…….’
“이런, 제가 실례를 했군요.”
뚱뚱한 사내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명패를 꺼내 거지에게 건네줬다.
“무영문에서 나왔습니다. 저는 비영단 212조 조장 이진덕이라고 합니다.”
무영문과 개방은 오랜 경쟁 관계에 있는 집단이다. 그렇다 보니 무영문의 핵심 정보 단체인 비영단의 조장이라면 개방의 4결과 5결 제자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지 위라는 것을 웬만한 거지라면 다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감히 상대를 경시하지 못하고 공손하게 물었다.
“무슨 일 때문에 우리 타주님을 만나 보고 싶다는 겁니까?”
“하하, 상의를 드릴 일이 좀 있어서요.”
거지는 자신이 책임질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쩝, 저를 따라오십쇼. 타주님께서는 안쪽에 계시니.”
거지는 사내를 데리고 장원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호기심 때문에 쩍쩍 벌어지려는 입을 애써 닫아야 했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왜 이곳에 와서 타 주를 찾는 것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타주님, 무영문에서 사람이 왔는데요.”
분타주는 반백의 희끗희끗한 수염이 몇 가닥 난 50대 초반의 중년 거지였다. 얼핏 보면 워낙 비루한 인상이라 적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는데, 수 하의 보고를 듣자마자 매섭게 눈동자가 빛나는 것을 보면 괜히 분타주가 된 게 아닌 모양이다.
“무영문이라고?”
거지는 분타주에게 다가가 이진덕에게 받은 명패를 건네주며 말했다.
“비영단 소속 212조 조장 이진덕이랍니다.”
과연 거지의 말처럼 명패에는 ‘212’라는 숫자가 양각되어 있었다. 분타주는 명패를 자세히 관찰한 후, 그것을 이진덕에게 돌려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일대를 책임지고 있는 진곡추(陳哭秋)라 하오. 그런데 무슨 일로 날 찾아오셨소?”
“아, 진 타주셨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이진덕이라고 합니다. 초면에 이런 말씀드리기는 좀 멋쩍지만, 뭔가 알아내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뭔가 말하려던 진곡추는 이진덕을 안내해 온 거지가 아직도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귀를 쫑긋 세운 채 어정쩡하게 서 있는 것을 보자 화를 버럭 냈다.
“안 가고 거기서 뭐 하는 거야? 네놈은 문 앞이나 잘 지키고 있으라고 했잖아!”
“예, 예, 갑니다요, 가요.”
거지가 후다닥 밖으로 달려 나간 후에야 진곡추는 이진덕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은 집단이 바로 무영문이기는 했지만, 눈 앞의 이 사내는 인상도 좋았고 꽤나 사근사근한 것이 진곡추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영안문의 혈겁을 조사한 바를 말했다. 이번 일로 몇 가지 알려 준 뒤 친분을 맺어 두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글쎄올시다. 흉악무도한 집단이 이 일을 벌였다는 것 외에는 별로 알아낸 것이 없소. 어린애들까지도 일격에 죽여 버린 걸 보면…, 절대로 증인을 남겨 놓지 않겠 다는 생각인 모양이오.”
“얼마 전에 일어난 철륭방의 혈겁을 일으킨 자들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계속된 질문에 진곡추는 몇 가닥 남지 않은 수염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면서 의문을 계속 던지는 이진덕을 바라봤다. 개방과 맞먹을 정도의 정보력을 가진 무영문 이 뭐가 아쉬워 이런 질문을 해 대는지 의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진덕이 빤히 자신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흠, 그건 알 수가 없소. 흔적을 남길 정도로 멍청한 놈들이 아니었으니 말이오. 하다못해 시체에 나 있는 상흔으로도 흉수를 파악해 내는 데 실패했소.”
“되는 대로 휘둘렀습니까?”
이진덕의 물음에 진곡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웬만한 무림인이라면 다 알고 있는 그런 무공만을 사용했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철륭방에 손을 썼던 패거리에 비해서는 최소한 한 등급 이상 높은 실력을 지닌 자들인 것 같소.”
이진덕은 잠시 진곡추를 바라보더니,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미 몇 가지 단서를 잡으신 듯한데, 저에게도 조금만 좀 알려 주십시오. 저도 정보를 날로 먹으려는 건 아니니, 서로가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글쎄…, 무슨 말씀이신지?”
“요즘 중원 전역에 걸쳐 이것과 비슷한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진곡추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너스레를 떨었다.
“호오, 그렇게 잘 아신다면 이쪽에도 좀 알려 주시구려. 이쪽은 전혀 오리무중이니 말이오.”
이진덕이 진곡추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비록 개방이 무영문보다 정보의 질에는 한 수 뒤쳐진다고는 하지만, 중원 전역에 깔려 있는 엄청난 숫 자의 개방도들이 물어 오는 정보의 양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수준은 낮더라도 방대한 정보를 폭넓게 획득하는 데 있어서는 무영문보다 개방이 한 수 위라는 것을 이진덕은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쪽은 요 근래에야 냄새를 맡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에는 귀방은 우리보다 최소한 2주일은 먼저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이번 철륭방의 경우도 마찬가지지요. 진 타주께서는 이미 이곳을 샅샅이 다 훑어보셨겠지만, 저는 이제야 겨우 이곳에 도착했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거외다.”
딱 잘라 말한 진곡추는 가볍게 포권하며 말을 이었다.
“본인은 바빠서 이만 가 봐야겠소. 내 수하들에게 일러 놓을 테니, 귀하가 조사하는 데 방해하는 일은 없을 거다.”
진곡추가 사라지고 난 후, 그 자리에 남은 이진덕은 가볍게 투덜거렸다.
“이런 젠장, 좀 가르쳐 주면 어때서. 조만간에 이쪽에서도 알아낼 일인데…….’
이진덕은 뭔가 쓸 만한 것이 남아 있을까 싶어 주위를 기웃거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포기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개방 쪽에서 조사하고 남은 찌꺼기들뿐일 것이다. 그리고 뭔가 확실한 물증이 발견되었다면, 그런 중요한 증거물을 그 자리에 그대로 방치해 놨을 리 만무했다. 즉, 이곳을 아무리 뒤져 봐 야 헛수고라는 말이다.
“젠장, 저놈을 어떻게 요리해야 하나?”
잠시 궁리하던 이진덕은 조금 전에 자신을 이곳으로 안내해 줬던 거지를 찾아갔다.
“아,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
“뭡니까?”
“진 타주께서 좋아하시는 게 뭔지 좀 알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한동안은 여기서 귀방의 신세를 져야 할 듯싶은데, 진 타주님과 사이가 껄끄러우면 일
하기 힘들 게 아니겠습니까? 조금만 도와주십시오.”
그러면서 이진덕의 손은 어느샌가 그 거지의 주머니 속을 들락거렸다. 갑자기 자신의 주머니가 묵직해지자 깜짝 놀란 거지는 주머니 속에 얼른 손을 집어넣어 봤 다. 묵직하게 만져지는 은자 한 냥, 거지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뭐, 이런 걸 다…….”
“조사가 끝나고 동료 분들과 술이라도 한잔하시죠. 사건 현장을 이 잡듯 뒤지고 나면 모두들 피곤할 텐데, 이런 때는 얼큰하게 한잔하고 푹 쉬는 게 최고 아니겠습 니까?”
더럽기 그지없는 거지들과 함께 어울려야 한다는 것은 솔직히 내키지 않지만, 이진덕으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곳으로 보내진 비영단은 겨우 1개 조, 자신을 포함해서 다섯 명뿐이다. 단독 조사를 한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요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만큼 그는 개방과 공동 조사를, 아니 공동 조사라 는 명목 하에 개방의 정보를 왕창 빼내 오는 것만이 상부에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덕분에 조사는 뒷전이고, 진곡추를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고민스럽기만 한 이진덕이었다.
이진덕이 영안문 혈사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을 나온 지 1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지나갔지만, 좀처럼 혈겁의 단서가 잡히지 않았다. 이진덕은 진곡추에게 철썩 들러붙어 그가 좋아하는 술과 개고기를 대접하며 정보를 빼내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사실 쓸 만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혹시 자신을 속이고 정보 를 빼돌리는 건 아닌지 의심도 해 봤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딱히 단서라고 잡히는 것도 없었고, 중원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혈겁들과의 연관성도 찾기 어려웠다. 이진덕이 진곡추에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 혹 시간 낭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무렵, 갑자기 극진방戟塵幇)이 멸문당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두 사람은 수하들을 이끌고 극진방이 있는 곳을 향해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갔다. 이윽고 극진방에 도착하자, 담벼락 밖으로까지 피비린내가 물씬하게 풍겨 왔 다. 장원 안으로 들어서자 처참하게 살해된 시체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리 무림에서 밥을 먹고 있다고는 하지만 끔찍하게 살해된 시체를 보고 기분 좋을 사람은 없다. 수하들에게 장원 내부를 뒤져 흉수가 남겼음직한 단서를 찾게 한 뒤, 두 사람은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시체들을 한 구씩 세심하게 검사하기 시작했다.
“사인(死因)은 전과 거의 비슷해. 시체들이 쓰러져 있는 모양으로 봤을 때, 한밤중에 기습을 당한 것 같아. 물론 이쪽에서도 어느 정도 대비를 하고는 있었던 듯한 데, 결국은 그냥 밀려 버렸군. 흔적으로 봤을 때, 흉수들과의 실력차가 너무 심하게 나는 데다가 숫자까지도 저쪽이 훨씬 더 많았던 것 같아.”
시체를 엎어 놓고 상처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진곡추는 내원 쪽을 힐끗 바라봤다. 내원 역시 시체들이 흘린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흠, 내실 쪽은 제법 격렬한 저항을 한 흔적이 보이는군. 아마 그때쯤 자고 있던 인물들이 깨서 합류한 것이겠지.”
진곡추의 말에 이진덕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사인은 비슷한 것 같지만, 흉수는 완전히 다른데요. 영안문에서 혈겁을 일으킨 자들은 꽤나 고수들인 것 같았는데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 영안문이 그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말이겠지.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기까지 말한 진곡추는 극진방 방주 조태식(趙太殖)의 시신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조 방주 정도 되는 실력자를 없애려면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된 것이 극진방의 방도들 외에 흉수의 시체는 단 한 구도 없다는 사실이야.”
상대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는 듯 이진덕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보를 빼내기 위해 진곡추에게 술과 개고기를 대접하다 보니 지금은 이렇게 건설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도 형님, 아우하면서 말이다.
진곡추의 성격이 그다지 까다롭지 않은 것도 도움이 되었지만, 겨우 2주일 만에 형님 동생이라 부를 정도로 신뢰를 얻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진덕의 피나 는 노력의 승리라고 봐야 했다. 워낙 게으른 진곡추다 보니 몸에 이가 바글바글 끓고 있었고, 술과 개고기를 대접할 때마다 진곡추의 몸에서 옮겨 오는 이 때문에 온 몸을 벅벅 긁어야 하는 끔찍함까지 웃으며 감내해야만 했던 것이다.
“시체를 모두 다 가져갔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님.”
“아마 그게 정답이겠지.”
“그렇다면 흉수는 몇 명 정도가 아닌 상당한 세력의 문파일 확률이 높겠군요.”
잠시 그동안 일어났던 혈겁을 생각해 보던 진곡추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초절정고수가 아니라면 이 정도 문파를 몰살시키려면 상당한 세력을 보유한 자들이 아니면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근방에 극진방을 칠 만한 규모의 문파들을 수배해서, 그들의 인원 이동을 알아보면 흉수를 파악해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흐음…….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 동생은 서로가 서로를 몰살시켰다고 생각하는 겐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거대 방파에서 고수들을 투입해 혈겁을 일으킨다는 가정보다는 그게 더 현실성 있는 추리 같은데요?”
여기까지 말한 이진덕은 조태식의 시체에서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상흔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상처들은 요 근래에 생긴 상흔들로서, 치료가 잘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아마도 어디선가 싸우다가 상처를 입은 후, 근처의 실력 있는 의생을 불러 치료를 받았 겠죠. 그런데 상처가 다 낫지도 않은 상태에서 또 싸웠으니, 본 실력을 다 발휘하기는 힘들지 않았을까요?”
이진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곡추는 옆에 서 있는 거지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예?”
“너는 빨리 이 인근에 있는 의생들을 수소문하여, 2주일 전쯤에 극진방에 상처를 치료해 주기 위해 방문한 적이 있는지 알아봐라.”
“옛.”
거지가 달려 나가고 난 후, 진곡추는 이진덕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자네 말대로 극진방이 영안문을 쳤다고 가정하세. 그런데 왜 쳤을까? 이 두 문파는 인접해 있지 않기에 서로 싸울 이유가 거의 없어. 더군다나 한밤중에 기습해서 상대편을 몰살시킬 정도로 원수질 일은 더더욱 없었지.”
“아무래도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게 최우선일 듯 합니다.”
“흠, 하지만 또 다른 제3의 세력이 이 모든 일을 저질렀을 가능성도 있으니, 거기에 따른 조사도 병행해야겠지.”
“물론이죠, 형님.”
언제부터인가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