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2권 7화 – 현천검제의 생존과 개방
현천검제의 생존과 개방
진곡추는 자신이 본 것을 즉시 상부에 알렸고, 개방의 수뇌부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다급히 수뇌부 회의가 열렸다. 그만큼 마교의 무리들과 함께 하는 현천검제 가 가져온 파장은 컸던 것이다.
“이, 이게 사실입니까?”
취선개(醉腺) 장로의 경악성에, 방주는 옷섶 속으로 손을 넣어 맨살을 득득 긁으며 대꾸했다.
“진 타주는 확실한 인물이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미확인 정보를 보고했을 리 없소.”
“이게 말이 됩니까? 화산파가 누구에게 멸망당했습니까? 바로 마교놈들의 소행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 그가 마교도들과 한 패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건 틀 림없이 진 타주가 적들의 농간에 놀아났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 겁니다.”
취선개 장로의 말에 옆에 앉아 있던 비육걸개 장로도 거들었다.
“저도 취선개 장로의 말에 동감입니다. 혹시 인피면구를 뒤집어 쓴 가짜에게 속은 게 아닐까요?”
방주는 이런 대답까지 해 줘야 하는 게 별로 내키지 않는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보고는 정확하다고 노부는 생각하네. 진 타주는 분명히 현천검제가 자신에게 어기전성을 통해 나중에 본방을 찾아와 해명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고 했네. 어기전성은 화경급 고수만이 쓸 수 있는 비기야.”
방주를 바라보는 취선개 장로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현천검제는 명예롭게 은퇴를 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방주가 진곡추의 보고를 한 점 의심 없이 신 뢰한다고 한다면 그 근거가 있을 것이다.
“현천검제가 진짜가 맞다고 해도, 그가 마교도와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방주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별로 알리고 싶지 않았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공수개 장로가 노부만 알고 있으라며 은밀히 알려 준 게 있네.”
이렇게 서두를 뗀 방주는 무림맹에 나가 있는 공수개 장로가 자신에게 알려 줬던 화산파에 얽힌 비사에 대해 조용히 설명했다.
“현천검제가 마교의 밀정이었다는 겁니까?”
“그렇다네. 옥진호 장로가 직접 그를 만나 추궁했고, 며칠 후 그는 은퇴라는 형식을 빌려 화산파를 떠났다고 들었네.”
잠자코 말을 듣고 있던 비육걸개 장로가 허탈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은퇴한 이유가 그거였다니, 참내…….”
“그렇다면 무림맹은 그가 마교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겠군요.”
“그렇다고 봐야 하지 않겠나?”
답답한 듯 취선개 장로는 허리춤에 메어 둔 호로병을 뽑아 들고 벌컥벌컥 몇 모금 마신 후 내뱉듯 말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의 어조에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건 절대로 아닐 겁니다.”
“응? 그건 무슨 말인가?”
““방주님께서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방주님께서 마교에서 심어놓은 밀정이라고 가정하고, 그 사실을 우리들이 알아챘다고 합시다. 그러면 저희들이 방주 님을 그냥 놔 드릴 것 같습니까?”
방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비밀을 그토록 많이 알고 있는 첩자는 절대로 살려서 보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더군 다나 현천검제는 9파1방의 중추인 화산파의 장문인이었다.
옆에 앉은 비육걸개 장로가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현천검제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요? 도망친 건가?”
그 말에 몇몇 장로가 은연중에 고개를 끄덕여 찬성을 표했다. 사실 화경급 고수가 마음먹고 도망친다면 그걸 어떻게 잡겠는가?
“노부의 생각도 그러네.”
방주도 그 의견에 찬성했지만, 취선개 장로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더 말이 안 됩니다. 혹 현천검제가 죽었다면 몰라도, 그가 무사히 도망쳤는데 마교에서 화산파를 공격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더군다나 그 런 중차대한 사안을 밝히지 않고 묻어 두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방주는 그제야 자신이 뭘 놓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단전이 파괴되어 병신이 되어 있다면 혹 모르겠지만, 현천검제가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것과 화산파가 멸문 당했다는 사실이 공존할 수는 없는 일이다. 현천검제가 멀쩡하게 도망쳤는데, 마교가 화산파를 멸문시키는 초강수를 썼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부 수뇌부만 이런 사실을 알고 있지, 대외적으로는 은퇴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현천검제가 밀정이 맞다면 당연히 무림에 공표를 해서 또 다른 피해를 막아야 하는 게 당 연하다.
생각하다 보니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왜곡했음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왜곡시킨 당사자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공수개 장로가 누군가가 던져 준 엉터 리 정보에 놀아났다고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공수개 장로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왜곡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취선개 장로의 생각은 뭔가? 공수개 장로가 누군가의 역정보에 멍청하게 놀아났다는 건가?”
“그게 아닐 공산이 큽니다.”
방주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살짝 살기를 머금었다.
“그렇게 결론지은 이유는?”
“방금 이 사실을 들은 제가 생각해도 허점투성이인 정보입니다. 그런데 그걸 공수개 장로가 몰랐을 리 없습니다. 마교의 첩자인 현천검제가 은퇴했다고 공식적으 로 발표했다는 것은, 곧 그를 없앴다는 말이나 같은 거니까요.”
“그렇겠지. 그렇다면 그가 의도적으로 그랬다는 말인가?”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만약 제가 그런 정보를 획득했다면, 방주님만 알고 계시라면서 살짝 알려 드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이런 부분에서 이빨이 안 맞으 니 철저히 조사해 보고 결과를 알려 달라고 협조를 구했겠지요.”
“흠, 그렇구먼, 그래……..”
취선개 장로는 방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우선 이 사실에 대해 공수개 장로와 얘기를 나눠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이게 의도적인 거짓말이었다면 공수개 장로를 해임하고, 다른 사람을 무림맹에 파견해야 할 겁니다. 그를 무림맹에 파견한 것은 본방의 이익을 대변하라는 것이었지, 무림맹의 개가 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잠시 말이 없던 방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침통한 어조로 대답했다.
“자네 말이 백번 옳으이.”
현천검제의 등장은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루던 무림의 또 다른 파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 첫 번째는 개방에서부터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개방 방주는 공수개 장로에게 연락을 넣어 자신을 만나러 오라고 통고했다. 직접 무림맹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고 판단한 그는, 개방 총타와 무림 맹의 중간 지점쯤을 약속 장소로 잡았다.
약속 장소에 나타난 공수개 장로는 무림맹에서 다른 문파의 인물들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처지였기에 비교적 말쑥한 차림이었다. 사실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든지, 아니면 몸에서 이나 벼룩이 버글거린다면 다른 무림맹 인사들과 가깝게 지낼 수가 없을게 아닌가.
공수개 장로가 네 명의 호위를 거느리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방주는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방주는 비육걸개 장로와 함께 있었는데, 그 둘은 황구 한 마 리를 불에 구우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었다. 먹성이 좋은 비육걸개가 끼어 있어서 그런지 술병이 아니라 커다란 술독이 옆에 놓여 있었다.
“어서 오게. 자, 뭐 하는 겐가? 이리 와서 앉게.”
방주는 소탈한 어조로 공수개 장로에게 자리를 권했다. 개고기와 술을 나누며, 가벼운 대화로 시작했기에 처음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공수개 장로는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그 사건을 책임졌던 것은 옥진호 장로였습니다. 저는 그에게 들었던 내용 그대로 방주님께 전해 드렸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내 한 가지만 묻겠네. 현천검제는 화산파를 떠났나? 아니면 거기에서 뼈를 묻었나.”
순간 그들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방주는 굳은 표정으로 공수개 장로의 대답을 기다렸고, 비육걸개 장로는 투실투실한 살집에 가린 조그마한 눈으로 연신 공수 개 장로를 힐끔거렸다.
긴장한 공수개 장로는 식은땀이 흘러내려 등을 축축이 적시는 것을 느꼈다. 만약 조금이라도 자신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든다면 방주는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모든 잘못을 옥진호 장로에게 뒤집어 씌웠다. 그라면 이미 죽어 버렸기에 절대 자신에게 안 좋은 증언을 할 수 없 기 때문이다.
“옥진호 장로는 그가 화산파를 떠났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옥진호 장로의 표정이나 어감으로 봤을 때, 저는 그가 그곳을 떠나지 못한 게 아닌가 하 는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은밀히 그의 행방을 수소문해 봤었습니다만, 어디서도 그의 행방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화산에 뼈를 묻은 게 아니 었을까요?”
“그렇다면 그때 자네가 받은 느낌을 그대로 나에게 전해 줬으면 되었을 텐데, 왜 그 부분은 숨겼었나?”
“저로서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부분이었기에……. 나중에 확실한 증거가 발견되면 보고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방주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 후에 여러 가 지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고, 나중에는 화산파까지 멸문해 버려 그 일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습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방주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풀렸다. 일단 공수개 장로에게는 혐의점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좋아, 자네가 진실을 말했다고 믿겠네. 하지만 차후에도 이런 일이 다시 한 번 더 벌어진다면, 이번 일까지 합해서 크게 문책당할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방주님.”
“사실, 노부도 현천검제가 화산에서 뼈를 묻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네. 그 때문에 화가 난 마교가 화산파를 멸문시켰다고 말이야.”
방주는 잠시 공수개 장로를 지그시 바라본 후, 말을 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살아 있더군.”
“예? 살아 있다구요? 어디에 말입니까?”
“지금 양양성으로 가고 있다네.”
“잘되었군요. 그를 만나 얘기를 나눈다면 화산파 멸문의 비밀이 풀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씁쓸한 표정으로 방주는 술잔을 비우며 말했다.
“아마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커. 왜냐하면 그는 지금 마교도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으니 말일세.”
그 말에 공수개 장로는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방주가 왜 자신을 이렇게까지 닦달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무림맹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을 정도의 엄청난 얘기였던 것이다.
방에 멍하니 앉아 있던 수라도제는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휴우~, 나 혼자 고민해서는 아무리 해도 끝이 나지 않는군.”
너무나도 깊게 사색에 잠겨 있던 그였기에 다른 사람들은 그가 정신이 나갔다는 억측까지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그가 마치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일어난 사람처 럼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는 침상 옆에 세워져 있던 자신의 애도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섰다.
갑작스럽게 수라도제가 방문을 열고 나오자, 그의 방 앞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두 명의 무사들은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급히 수라도제 에게 인사를 했음에도 수라도제는 그에 대한 화답도 안하고 어딘가로 바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경비 무사들은 급히 수라도제를 뒤쫓았다. 지금 어디로 가시는 건 지 묻고 싶었지만, 하급 무사 주제에 하늘과도 같은 태상가주께 그런 질문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수라도제는 날랜 걸음으로 실내를 빠져나온 후, 자신을 뒤따르던 경비 무사를 돌아보며 명령을 내렸다.
“가주에게 나를 찾을 필요 없다고 전하거라.”
“예?”
그 명령을 끝으로 수라도제는 전속력으로 경공술을 펼쳐 그들의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수라도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경비 무사들 중 한 명이 이윽고 정신을 차린 듯 동료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이봐, 방금 우리가 본 분이 태상가주님 맞지?”
“으응? 그나저나 태상가주님께서 갑자기 어디로 가신거지?”
그 말에 정신이 들었는지 경비 무사는 다급히 안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빨리 가주님께 보고를 드려야 해.”
수라도제가 칩거해 있던 방을 경호하던 경비 무사의 보고는 곧바로 몇 단계를 거쳐 서문길에게 보고되었다. 보고를 받은 서문길은 총관이 한 보고를 믿기 힘들다 는 듯 급히 되물었다.
“아버님께서 어딘가로 떠나셨다고?”
“옛, 가주님.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애도(愛刀)를 들고 나가셨답니다.”
수라도제가 오랜 칩거를 깨고 방에서 나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보고를 올리는 총관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그건 보고를 받는 서문길 또한 마찬가지였다. 잠시 말이 없던 서문길은 뭔가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다급히 물었다.
“그때, 아버님의 표정이 어떻다고 하던가?”
무장을 하고 나갔다고 하니, 혹시라도 묵향에게 다시 한 번 대결을 청하러 가신 게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에 물은 것이다. 그 빌어먹을 마교 교주 놈과의 기싸움 이 후, 혼이 빠진 듯 멍하니 방 안에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서문길은 마치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언제 그가 아버지의 이런 무력한 모습을 상상이나 해 본 적이 있었겠는가.
격렬한 비무를 한 것도 아니건만 묵향이 다녀가고 난 뒤 확연히 변해 버린 수라도제의 모습에 서문길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런 수라도제가 자 리에서 떨치고 일어나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하니 기쁨도 기쁨이지만 걱정이 앞서는 것도 당연했다.
“무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평상시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고 합니다.”
“혹시 모르니 마교도들이 주둔하고 있는 장원 쪽으로 사람들을 보내 철저히 감시하도록 하시오.”
“옛! 벌써 조치해 두었습니다.”
안 그래도 총관은 경비 무사들의 보고를 받자마자 첩자들을 대거 마교 쪽으로 보냈다. 서문길은 총관의 신속한 대처가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명령 을 내렸다.
“그리고 장원에 기거하고 있는 고수들은 전원 비상 대기하도록 준비하시오. 아버님의 행방이 밝혀지는 대로 출동할 수 있도록 말이오.”
“옛, 그대로 시행하겠습니다.”
수라도제가 자리에서 떨치고 일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문세가 전체가 들썩였다. 수라도제는 사실상 서문세가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더군다나 지금은 양 양성에 모인 정파무림을 이끌고 있는 중심인물이 아닌가. 언제 금나라와 치열한 전투가 전개될지 모르는 만큼 그의 존재 유무는 아주 중요했다.
총관이 자신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자 서문길은 초조한 듯 방 안을 서성거렸다. 그의 두 손은 불안감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굳게 쥐어져 있었다. “제발 아버님께서 괜찮으셔야 할 텐데. 만약 아버님께서 마음의 벽을 깨고 비상(飛上)을 준비하시는 거라면 천하에 군림하시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불길한 생각을 애써 떨쳐 버리기라도 하듯 고개를 흔든 서문길은 창밖을 망연히 바라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