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2권 8화 – 다시 시작되는 비무

다시 시작되는 비무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항상 정문 앞에는 두 명의 무사가 경비를 서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경비 무사의 제지를 받지 않고 그냥 들어가려니 아무 래도 찝찝한지, 조령은 다시 한 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적막한 상태로 봤을 때, 며칠 전까지 5백여 명이 넘는 문도들이 북적거렸던 장원이라고는 도무지 생각조차 하기 힘들다.

“왜 이렇게 사람이 없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살아서 돌아온 자가 겨우 50여 명 정도밖에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조차 중상자가 태반이니…….”

장원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가 너무 암울한 탓인지, 조령은 선뜻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어린애마냥 머리통만 대문 안쪽으로 집어넣어 두리번거 리며, 혹 아는 사람이 나오지 않나 살펴보고 있을 뿐이다.

이때 갑자기 그녀의 뒤에서 쟈타르의 경악성이 들렸다.

“아, 아가씨!”

“왜?”

무슨 일인가 싶어 뒤돌아서던 조령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젊은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차가운 눈동자. 그 눈동자와 마주치자 마자 조령은 본능적으로 솟아오르는 공포심에 몸을 부르르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조령이 장원으로 들어가는 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게 불쾌했는지 사내는 퉁명스 레 말했다.

“이봐, 꼬맹이.”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이따위로 말을 걸었다면 그녀는 아마 사생결단(死生決斷)을 내자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령은 상대가 자신을 모멸적인 말투로 대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내 앞에만 서면 흡사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찍소리도 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예? 왜 그러세요?”

“들어갈 거냐?”

조령은 황급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 아닌데요.”

젊은 사내는 아마 그런 조령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약간의 짜증이 묻어 나왔다.

“들어갈 거 아니면 빨리 비켜.”

조령이 화들짝 놀라 재빨리 옆으로 비켜서자, 사내는 별 괴상한 계집을 다 보겠다는 듯 그녀의 아래위를 힐끔 쳐다보더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쟈타르는 젊은 사 내의 등장이 불안하게 느껴졌는지 조령에게 돌아갈 것을 권했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마 교주도 진 소협을 만나러 오신 모양이니 말입니다.”

그렇다. 방금 그녀가 만난 젊은 사내는 바로 마교의 교주 묵향이었다. 그녀와 묵향과의 첫 대면이 워낙 파격적이었기에 그녀는 지금도 묵향 앞에만 서면 두려움에 질려 제대로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응, 빨리 돌아가자.”

묵향이 장원 안으로 들어서자 오고 가던 천지문도들은 감히 그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얼마 전에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 때, 자신들을 구해 주기 위해 달려와서 보여 줬던 그의 가공할 신위. 그 전에 껄렁거리며 돌아다닐 때는 몰랐는데, 그날 보여 준 묵향의 가공스런 무공은 천지문도들 가슴속 깊이 공포심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 다.

“진팔은 지금 어디 있느냐?”

묵향의 물음에 천지문도들 중 한 명이 다급히 앞으로 나서서 진팔의 위치를 가르쳐 줬다.

“저, 저쪽에 있을 겁니다, 교주님.”

묵향이 진팔이 있다는 방에 가 보니 그는 반쯤 얼이 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오랜 세월 형제와도 같이 지내던 수많은 동문들이 죽음을 당했다. 더군다 나 자신이 흠모했던 사저마저 생사를 알 수 없으니, 넋이 빠질 만도 했다. 초췌한 안색에 허옇게 부르튼 입술이, 그가 얼마나 깊은 상심에 빠져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런 진팔에게 연민의 눈빛이라도 보내 줄 만하건만, 묵향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그 전투 이후 처음 보는군. 몸은 괜찮나?”

“어, 어서 오십시오, 교주님.”

평상시에 묵향을 보는 진팔의 눈은 얼마간의 두려움과 존경심, 그리고 원망이 뒤범벅된 것이었다. 하지만 전투의 후유증이 얼마나 컸는지 묵향을 마주 보고는 있

지만 진팔의 두 눈은 공허하기만 했다.

그러다 뭘 생각했는지 주춤 묵향 곁으로 다가섰다.

소연이 어떻게 되었는지 묻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차마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혹시 그녀가 잘못되었다는 대답을 교주가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 었다. 묻자니 두렵고, 묻지 않으려니 답답했다. 진팔은 복잡한 눈빛으로 묵향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 채 입만 뻐끔거렸다.

묵향이 소연의 문제로 자신을 두들겨 팬다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 어디 하루 이틀 맞았는가? 온몸이 노곤해 질 정도로 두들겨 맞아도, 아니 그러다 자신이 죽는 한 이 있어도 그녀만 무사하다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진팔이었다.

묵향은 그런 진팔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예전엔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놈이 약을 먹었는지 감히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말이다. 성질 같아서는 사 지를 부러트려 아예 병신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지만, 소연이 아끼는 사제인지라 성질대로 할 수도 없었다.

물론 진팔이 왜 이렇게 멍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이 됐다. 아마도 소연의 생사에 대한 근심 때문일 것이다. 묵향은 이미 소연이 회복했다는 보고를 들 었음에도 진팔에게 알려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옆에서 소연을 지키라는 뜻으로 귀찮은 무공 대련까지 마다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소연이의 힘을 빌려 목숨을 연명 하지 않았는가. 소연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려 주어 진팔이 희희낙락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은 묵향은 조금이라도 더 진팔이 괴로움에 몸부림치도록 놔두려는 것이 다.

물론 비무를 가장한 구타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묵향은 시치미를 뚝 떼고, 평상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사내자식이 겨우 한 번 죽을 뻔했다고 이렇게 풀이 죽어 있어서야 쓰나. 이럴 때일수록 모자란 자신의 무공을 갈고 닦는 게 좋아. 빨리 가서 대련할 준비를 갖추고 나오너라.”

그런 묵향이 진팔은 너무나 고마웠다. 언제나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닌 것이다. 자신이 실의에 빠져 있자 일부러 찾아와 이렇듯 따스 하게 배려를 해 주고 있지 않은가.

맞는 말이다. 멍하니 앉아 있는 다고 죽은 사문의 제자들이 살아오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앞으로 남은 전투를 위해 무공에 전념할 수 있도록 비무를 해 주겠다니. 어쩌면 자신의 무공을 높여주기 위해 비무를 해 준다는 그 말도 안 되는 말이 진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 진팔이었다.

“그러실 필요까지는……..”

여기까지 말하던 진팔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하다 묵향의 매서운 눈매를 보니, 대련을 안 하겠다는 말을 하면 그 뒤에 어떤 사태가 뒤따를지 뻔히 보였던 것이다.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준비하고 나와!”

고마움에 잠시 잊고 있었던 묵향에 대한 공포심이 진팔을 휘감았다. 진팔은 정신없이 방 안에 나뒹굴고 있던 목검 한 자루와 자신의 애도를 주워들었다. 그게 바로 대련에 필요한 준비물이었으니 말이다.

묵향은 대련에 앞서 진팔이 가져다 준 목검을 잡고 한 가지 검법을 천천히 펼쳐 보이며 물었다.

“이 검법을 본 적이 있느냐?”

묵향이 펼쳐 보여 주고 있는 초식을 보던 진팔은 경악감을 감추기 힘들었다. 확실히 진팔도 알고 있는 검법이었다. 천마혈검이 아니라 목검으로 펼쳐서 그런지 패 도적인 맛이 많이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팔이 이 검법을 몰라볼 리 없었다. 자신에게 한없는 공포와 절망감을 안겨 줬던 검법이었으니까.

“이건 본교 최강의 검법 중 하나인 천강혈룡검법(天降血龍劍法)이라는 거다. 천마혈검대원들이라면 필히 이 검법을 익히지. 너도 이번에 한 놈 상대해 봤으니 약 간은 눈치 챘겠지만, 도가 계열의 검법들과는 추구하는 바가 완전히 다른 검법이다. 그걸 알지 못하면 목숨을 내놔야 해.”

묵향은 진팔이 관찰할 수 있도록 느릿하게 다섯 번 정도 천강혈룡검법을 펼쳐 보여 주며, 검법의 초식과 변초가 어떤 것인지 알려줬다.

“전체적인 초식들의 모양은 기억할 수 있겠느냐?”

“예, 그런대로…….?

“그럼 이제부터 본좌는 천강혈룡검법만으로 너를 공격하겠다. 재주껏 막거나 피해 보거라. 그렇게 둔한 놈은 아니니 며칠 두들겨 맞다 보면 이 검법을 상대할 방 법을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진팔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삼류검법이라도 묵향의 손에서 펼쳐지면 막기가 힘들다. 그런데 몇 번 본 것만으로 마교 최강의 검법 중 하나라는 천강 혈룡검법을 막으라니. 당연히 진팔로서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사정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저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고수들인데, 파훼법이라도 가르쳐 주신다면 몰라도…….”

묵향은 기가 막힌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파훼법? 웃기고 있군. 동등한 실력쯤 되어야 파훼법이 통하는 거다. 수많은 초식들 중에서 어떤 게 날아올지도 모르고, 또 어떤 식의 조합으로 공격해 올지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파훼법을 알아봐야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나? 지금 네가 할 일은 이 초식을 피하는 것을 머리통이 아니라 몸으로 익히는 일이야. 그 후에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거다.”

아닌 게 아니라, 그날 이후 진팔은 시도 때도 없이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시뻘건 장검을 들고 미친 듯 맹공을 퍼붓는 마인. 막을 방법도, 막 을 수도 없었다. 너무나 무력했던 그 순간이 하나의 공포로 각인되어 그의 뇌리에 새겨져 있을 정도로 천마혈검대원들이 펼치던 검법은 가공하기만 했다.

그날 이후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무공을 떠올리며 상대할 방법을 찾아봤지만 방법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무력감은 더욱 커져 가기만 했다. 그래서인지 지

금도 악몽을 꾸면 당시에 느껴지던 그 지독한 공포와 무력감이 떠올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곤 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자 묵향이 펼치는 검법은 그자가 펼치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목검으로 천천히 펼쳐서 그런지 패도적인 맛이 하나도 없었고, 신기하게도 공포나 절망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팔에게 있어서 마교 최고수라는 묵향이 펼치는 검법이 그때 그자가 펼친 것보다 훨씬 더 만만하게 보인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막상 한 수 교환해 본 뒤 진팔은 깨달았다. 묵향 쪽이 훨씬 더 수준 높은 검식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그때 그자의 검은 소연과 함께 어떻게 막거나 피하는 게 가능했었지만, 이번 경우는 아예 그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대련을 하던 진팔은 서서히 가슴속에 차오르는 공포에 몸을 떨어야 했다. 그 공포의 원인은 무력감에 치를 떨어야 했던 천강혈룡검법 따위가 아니었다. 한동안 잊 고 있었던, 도저히 반항조차 해 볼 수 없는 묵향의 존재 때문이다. 비무가 끝날 때까지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 허우적거려야 할 거라는 원색적인 두려움, 그리고 왠지 이런 고통이 계속 지속될 것 같다는 절망감이 합쳐진 공포였다.

그리고 이런 재수 없는 예감은 의외로 잘 들어맞았다.

빠각!

“크으윽!”

“조금 전에 말했지? 도가의 검법과 그 궤를 달리한다고 말이야. 자, 빨리 일어서!”

마음은 이대로 뻗어 버리고 싶었지만, 어느새 묵향에 의해 길이 잘 들어 버린 진팔의 몸은 생각과는 달리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괜히 꿈지럭거리다 더 매몰차게 두들겨 맞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퍽!퍽!

우당당탕.

기를 쓰고 막는다고 막아 보지만 목검은 살아 있는 생명체라도 되는 양 유유히 진팔의 애도를 헤집고 들어와 여지없이 두들겨 댔다. 그럴 때마다 진팔은 이리저리 나뒹굴고 널브러져야 했다.

그리고 그런 끔찍한 고통의 시간은 세 시진에 걸쳐 지속되었고, 진팔은 차라리 밤새 악몽에 시달리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들겨 터져야만 했다.

“아이고…, 흐윽…….”

땅바닥에 큰 대(大)자로 사지를 벌리고 볼썽사납게 널브러져서 신음을 흘리고 있는 진팔은 온몸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특히 오랫동안 교주와 대련을 하지 않다가 해서 그런지 몸이 아직 적응을 못 해 더욱 아팠다. 예전에 매일같이 두들겨 터질 때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차라리 부상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면 좋 았을 걸 하는 치기 어린 생각마저 들었다.

진팔이 절망감에 한숨을 내쉬든 말든 묵향의 생각은 달랐다. 소연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일 때야 진팔은 아무 쓸모가 없었기에 지금까지 그냥 내버려 뒀을 뿐이 다. 진팔의 몸이 회복되고 안 되고는 묵향의 관심 밖이다.

하지만 지금은 얘기가 달랐다. 소연이 살아났다는 보고를 들은 것이다. 완쾌한 소연은 다시 이곳으로 올 것이고, 그녀를 가까운 거리에서 호위할 사람은 천지문에 서는 진팔밖에 없다. 그런 만큼 놈을 더욱 강하게 만들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이번 대련에서는 좀 과하다 싶을 만큼 진팔을 몰아붙였다. 물론 두들겨 패다 보니 개인적인 감정까지 이입이 되어 힘이 조금 더 들어가기는 했지만 말이다. 요 근래 묵향은 뭔가 수상쩍은 팽선의 혐의점을 찾아내기 위해 매일 짜증나는 문서를 뒤적이고 있다 보니 신경이 곤두 서 있는 상태였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 분명 구린 냄새가 솔솔 나는데 딱히 이거다 하는 증거가 없는 것이다. 당연히 그런 짜증은 진팔과의 비무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온 몸이 노곤해질 정도로 맞는 진팔이야 죽을 맛이겠지만, 묵향은 그동안 쌓인 짜증이 이래도 안 풀리자 더욱 미칠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기를 쓰고 뭔가를 배우려고 노력을 해도 시원찮을 놈이 몇 대 맞지도 않았는데 아프다며 엄살을 피우니 쌓인 짜증이 폭발을 했다.

누워 있는 진팔이 채 일어서기도 전에 목검이 날아갔다. 이런 놈은 무공을 배우기 전에 근성부터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목검을 휘둘렀다. “꾸에엑~~~.”

그날 진팔은 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진팔은 침상 위에 엎어져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몸이 워낙 욱신거리며 쑤셔대니 다른 잡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금창약이 안 발린 곳이 있나 살펴보자 온통 시퍼렇게 멍든 것이 자신의 몸이지만 가관이 아니다.

“끄응…, 그 새끼는 왜 나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지랄이야, 지랄이. 누가 마교 교주 아니랄까 봐 어찌 그리 악독한지. 아이고, 내 팔자야.”

하소연을 해 봐야 소용도 없겠지만 하소연할 데도 없는지라 그저 끙끙거리며 앓아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잘 차려입은 중년 사내가 뛰 어 들어왔다. 과거 여자들의 가슴을 꽤나 울렁거리게 만들었을 법한 수려한 용모의 중년 사내였다.

“사매!”

방 안을 두리번거리던 중년 사내는 침상에 누워 있는 게 소연이 아니라 진팔이라는 것을 알자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 버렸다. 그리고 그 표정은 곧 짜증 어린 것으 로 바뀌었다. 금창약을 바르기 위해 웃통을 벗어젖힌 그의 온몸은 차마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푸르죽죽하게 멍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표정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진팔은 낑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서 사내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중년 사내가 바로 자신

의 사형이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임연(燕) 사형. 그런데 여기엔 갑자기 어쩐 일로.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것이냐?”

곱지 않은 어조로 물은 것이었건만, 진팔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저도 천지문도의 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이런 중차대한 일에 어찌 손놓고 방관만 하겠습니까. 당연히 발 벗고 나선 것이지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임연은 진팔을 못마땅하다는 듯 쳐다봤다. 비록 무공이 높기는 했지만 진팔은 결코 천지문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있음으 로 인해 천지문에 분란만 조장될 뿐이다. 절정고수가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것은 어느 문파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임연이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천지문의 후계 구도 때문이었다.

만약 진팔이 문주가 될 야심이 있다면, 어쩌면 임연은 진팔을 지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봤을 때 진팔은 전혀 문주가 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물론, 문주가 될 혈통을 타고 났고, 자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주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로 인해 벌어진 문파 내의 심각한 분열이었다. 장손이 문파를 이어야 한다는 고루한 원로들과, 격변하는 무림에는 능력 있는 사람이 문주의 자리를 이어야 한다는 젊은 제자들과의 격렬한 대립으로 천지문은 지 독한 열병을 앓아야만 했다.

진팔은 문주가 되기에는 너무 마음이 여렸다. 일문을 맡기에는 좀 부족한 형을 밀어내는 것도, 그렇다고 자신을 따르는 젊은 제자들을 설득하여 힘을 하나로 모으 는 것도 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문주 자리를 둘러싼 내분 속에서 고민하던 진팔이 내린 결론은 훌쩍 떠나 자취를 감추는 것이었다.

진팔이 문파를 떠나던 날 벌어졌던 문 내의 혼란을 임연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노장파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안 될 것 같으니, 비열한 수단 을 써서 진팔을 내쫓았다며 소장파들의 원성이 자자했던 것이다. 그 이후, 격한 대립 양상을 보인 소장파와 노장파 간의 감정의 골은 회복하기 힘들 만큼 깊어졌다.

그런데 어디론가 사라진 줄 알았던 진팔이 이곳에 있을 줄이야. 소장파들의 구심점이었던 그의 행방이 묘연했기에 갈등이 표면화되지 않고 있을 뿐이었지, 만약 진팔이 이곳에서 크게 위명을 떨치고 본가로 귀환한다면 잠잠했던 소장파가 절대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최악의 경우, 문주직을 둘러싸고 유혈 사태로까 지 번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문이 그런 혼란의 도가니에 빠지면, 저놈은 또다시 도망칠 게 분명하다. 마치 이 혼란과 자신은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듯…….

그럴 바에는 욕심 많고, 능력이 떨어지더라도 현 문주가 진팔보다 백배 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임연의 생각이었다. 이렇듯 처음부터 진팔을 썩 좋지 않게 생각하 고 있는 그이다 보니, 진팔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고을 리 없었던 것이다.

“뭐? 사문의 일에 발 벗고 나섰다고? 젠장! 너하고는 할 말이 없으니 소 사매를 불러오너라. 사매는 지금 어디 있느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보고를 받은 문주는 임연을 이곳으로 급히 파견했다. 피해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기 위함이다. 임연으로서는 골칫덩이인 진팔보다 책임자인 소연을 찾는 게 당연했다.

“사저께서는 지금 여기에 안 계십니다.”

대답을 하는 진팔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애써 잊고 있었는데 임연의 질문으로 인해 소연의 생사가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모 르는 임연으로서는 진팔이 인상을 쓰자 내심 기분이 언짢았다. 사형인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여기 없다고? 그럼 빨리 기별을 넣어 내가 보잔다고 전하거라.”

“그럴 수가 없습니다. 교주가 사저를 치료한다고 데려간 후, 아직까지 소식이 없으니 말입니다.”

임연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지금까지 소연이 부상당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전투 중에 부상을 입는 일이야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 이 상한 것은 소연이 부상을 입었다면 양양성으로 데리고 와서 치료했어야지, 왜 마교 교주가 그녀를 데리고 갔단 말인가? 임연으로서는 진팔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 었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교주가 소연을 데려갔다니…, 자세히 말해 보거라.”

주저하던 진팔은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말했다. 이번 전투에서 마교로부터 얼마나 큰 도움을 받았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 얘기를 듣는 임연의 표정은 점차 분노로 인해 일그러지고 있었다. 마교의 주구라는 오명을 씻어 버리라고 파견된 자들이, 되려 마교와 깊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음을 만천하에 알린 꼴이 되어 버렸다. 그것 도 피해는 피해대로 입은 상태에서 이런 결과라니, 그로서는 기가 막힐 뿐이었다.

정파의 명문으로 우뚝 서기 위해 엄청난 피를 흘렸건만 전혀 무의미한 희생이 되어 버렸으니, 이걸 문주에게 어떻게 보고하면 좋을지 임연으로서는 난감하기 그지 없었던 것이다. 답답한 듯 실내를 맴돌던 임연은 갑자기 탁자를 쾅 내리치며 소리쳤다.

“젠장, 마교의 도움은 무슨 일이 있어도 거절했어야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속 편하게 말하면 끝이냐? 왜 쓸데없이 마교와 엮이느냔 말이다.”

임연이 계속 신경질을 내자 진팔도 끝내 분노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마교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 양양성에 살아남아 있을 천지문의 제자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임연이 이번 전투에서 죽은 수많은 제자들과 소연의 생사에는 별 관심도 안 보이며, 문파의 평판이 나빠질 것에만 신경을 쓰니 진팔의 화가 폭발한 것이다.

“사형은 처참하게 죽은 제자들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단 말입니까? 사저가 어떻게 됐는지 걱정되지도 않아요? 그깟 무림의 평판이 동문들의 목숨보다, 사저보다 더 중요하단 말입니까?”

분노에 부르르 몸을 떠는 진팔의 모습에 임연은 당혹스러웠다.

“그, 그게 아니라. 내 말 뜻은 피를 흘리고도 마교의 주구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에…….”

“만약 교주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살아남아 있을 천지문의 제자들은 단 한 명도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교주가 도와주겠다는데 내가 뭐라고 합니까? 사 형이 한번 그렇게 해 보시죠. 씨알이나 먹혀 들어가는지.”

흥분한 진팔은 마교도들이 기거하는 숙소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놈의 교주는 저리로 가면 있습니다. 잘난 사형께서 가셔서 한번 따져 보시죠. 도움 따위 줄 필요도 없었는데 왜 도왔냐구요! 그리고 상처를 치료한답시고 데려 간 사저는 어떻게 되었냐구요!”

쌓인 것이 폭발하듯 외치는 진팔의 눈가에 옅은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질책을 당하고 있는 임연은 적이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질책을 당해야 할 사람이 누군데, 누가 누구를 향해 큰소리를 치고 있는 건가? 임연 은 당혹스러운 가운데 머리 꼭대기로 열기가 뻗치는 것을 느꼈다. 일처리를 제대로 못해서 사문에 큰 피해를 입혀 놓은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사형에게 따지느냔 말이다.

“지금 네가 사형인 나에게 대드는 것이냐?”

“대들도록 만든 사람이 누군데 계속 억지를 부리는 겁니까? 에이, 빌어먹을!”

씹어뱉듯 외친 진팔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임연은 절룩거리며 뛰쳐나가는 진팔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사나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무능한 놈 같으니. 무공만 높았지 머리를 쓸 줄 모르니 저 모양이지.”

임연은 시비를 불러 차를 한 잔 내오라고 이른 뒤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기 위해 한참을 노력해야 했다. 천지문이 정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그 얼마나 노력 했던가. 마교의 주구라는 소문에 노골적인 무시를 당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말이다. 임연 역시 동문들의 희생이 마음 편할 리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막대한 피를 흘리고도 정파로 인정받기는커녕 오히려 마교의 주구라는 오해가 더욱 깊어질 듯하니 어이가 없었다. 더군다나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부끄러워해야 할 진팔이 자신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소리치다니. 임연은 너무도 불쾌했다.

차를 마시던 임연은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밖에 대고 외쳤다.

“밖에 누가 있느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제자 한 명이 들어왔다. 그가 이곳에 올 때 데리고 온 제자들 중 한 명이다.

“찾으셨습니까? 장로님.”

“너는 빨리 이번 전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제자를 찾아 노부에게 데리고 오너라.”

“옛.”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척 보기에도 상당한 중상을 입은 허일평(平)이 들어왔다. 이곳에 파견된 1대제자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였다. 잠시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임연은 질문을 던졌다. 본가에 보고를 하기 위해서는 피해 상황과 이번 전투가 어떻게 벌어졌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했다. 지금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전투가 벌어졌고,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사망자가 얼마나 되느냐?”

허일평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사망자보다는 생존자의 수가 훨씬 계산하기 쉽습니다, 장로님.”

그 대답에 임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최소한 절반 이상의 인원이 사망했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게 큰 피해를 당했을 거라고는 짐작도 못하고 있었던 그였기 에 표정이 딱딱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말해 보거라.”

“저까지 포함하여 46명이 돌아왔습니다, 임 장로님.”

행방이 묘연하다는 소연은 뺀 숫자일 것이다.

“…..”

임연은 눈앞이 캄캄했다. 이토록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니. 이때, 임연은 방금 전에 진팔이 왜 그렇게 화를 냈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심한 피해를 당한 그에게 찾아와서 문파의 위명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소리만 떠들었으니 화가 날 만도 했을 것이다.

“그중 24명은 워낙 상태가 중하여 더 이상 전장에 투입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장로님.”

“도대체 어떻게 싸웠기에 그렇게 막심한 피해를 입었단 말이냐? 상황이 불리하면 재빨리 도망이라도 쳤어야지. 쯧쯧, 그래 어찌 된 일인지 소상하게 말해 보도록 해라.”

“임 장로님의 말씀이 백번 지당하십니다만, 강이 가로막혀 있어 몸을 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서두를 꺼낸 허일평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의 과정부터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당시의 일을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보고를 듣는 동안 임연의 얼굴이 점차 일그 러져 갔다. 그 당시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보자 천지문의 제자들은 완전히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내몰아졌다는 것이 빤히 보였던 것이다. 진팔의 말처럼 만약 마 교 교주가 무시무시한 신위를 보여 구해 주지 않았다면, 전멸을 당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인 것이다.

보고를 마친 허일평을 내보낸 후, 임연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연은 그렇게 머리가 나쁜 사내가 아니다. 정황을 가만히 따져 봤을 때, 정파놈들은 치졸하게 도 차도살인의 계책을 써서 자신들을 사지로 내몬 것이 확실했다. 아마 진팔도 확실한 증거가 없는 만큼 자신들이 이용만 당했다는 것을 본문에 보고하지 못한 듯싶 었다. 정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 천지문에 증거도 없는 심증만으로 보고해 봤자 욕만 먹을 게 뻔했지만.

“젠장, 그런 새끼들을 위해서 피 흘려 싸울 필요가 있을까?”

현 천지문의 문주인 진수는 진팔의 형이다. 그는 실리보다는 헛된 공명심(功名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동생인 진팔의 영향이 컸다. 일문의 문주로 서 나이차가 꽤 나는 동생에게 무공에서 밀린다는 점. 그것도 문주에게만 전수되는 비전의 도법까지 익히고도 그 모양인 만큼,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아 닐 것이다. 더군다나 문내의 젊은 제자들에게서 무공이 고강한 진팔을 문주로 삼아야 한다는 소리까지 공공연히 나오고 있는 판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무공 말고 다른 부분에서 그가 동생보다 뛰어난 구석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뭔가 눈에 띄는 업적을 빨리 이룩해 문도들에게 문 주로서 인정받기 위해 과도하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임연이 그게 집착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진팔을 그렇게 질책해 놨으니, 이 일을 어쩐다? 거참 난감하구먼.”

씁쓸한 마음에 자리를 맴도는 임연의 머릿속에는 이미 진팔에 대한 미안한 감정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어떤 식으로 문주에게 보고를 해야 할지 복잡하기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