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3권 11화 – 여우와 너구리

여우와 너구리

연공공의 마음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을 적도들에게 팔아넘긴 추린을 잡아들여 분근착골을 가해 놨지만, 그의 마음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추린을 제외한다 면 자신의 뜻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연공공은 포로로 잡아들인 거지들을 심문하면 많은 정보들을 얻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의 오산이었다. 사로잡은 자들 대부분이 워낙 밑바닥에 위치한 놈들이라 아는 게 거의 없었던 탓이다.

개방도 무림의 한 축을 이루는 단체인 만큼 직급이 높은 자일수록 무공 또한 강했다. 그런 자들을 황병들이 제압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대부분이 탈출해 버리거나 혹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처참하게 사살당했다. 그렇다 보니 분타의 상층부 인물들 중 사로잡힌 자들은 독두개처럼 극심한 부상을 당한 자들뿐이었다. 안 그래도 생 사가 오락가락하여 정신이 없는 놈들을 붙잡고 강도 높은 고문을 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3일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제대로 된 정보를 하나도 뽑아내지 못하자, 연공공의 명을 받고 포로를 심문하는 임무를 맡은 군관은 사색이 다 된 얼굴로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송구스럽사옵니다, 우상시 공공.”

“귀관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은 내 익히 알고 있다.”

“알아 주시니 감사하옵니다.”

“고문실에 추린의 시체가 있을 게다.”

연공공의 명에 따라 그동안 지독한 고문을 당하다 오늘 아침에야 숨이 끊어진 추린의 시체가 지하실 한켠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제 그의 목숨이 끊어졌으니 그 뒤 처리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귀관은 추린의 시체를 깨끗이 씻고, 잘 단장하여 그의 유족들에게 전해 주거라. 다행히 개방도들의 마수에서 구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미 시기가 늦어 살릴 수는 없었다고 하면서 말이다. 알겠느냐?”

“옛,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럼 즉시 시행하도록.”

“옛.”

군관을 내보낸 후, 연공공은 그의 뒤편에 시립하고 서 있는 환관에게 명했다.

“황사(黃蛇)를 불러오게.”

“예, 공공.”

환관은 재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가더니, 잠시 후 웬 흑의사내와 함께 들어왔다. 덥수룩한 수염을 하고 있는 꾀죄죄한 몰골의 사내였는데, 그런 몰골에 비해서는 꽤나 값비싸 보이는 고풍스런 장검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몰골만큼이나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찾으셨습니까? 공공.”

“황성사에 실력 있는 고문 기술자를 좀 보내 달라고 통보해라. 이쪽에는 쓸모 있는 놈이 없다고 말이야.”

“존명”

황사는 황성사에서 파견된 인물이었다. 황성사와 연공공을 연결해 주는 끈이면서 감시자라고 할 수 있었다. 연공공은 이미 추린의 처리에 대해 황성사의 허락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추린이 행한 배신 행위의 대가는 죽음이었다. 그리고 연공공은 그 집행권을 양도받았던 것이다.

“저 군관 놈도 쓸데없이 많은 걸 알게 되었는데 살려 두는 게 좋을까? 아니면…….

연공공은 살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방금 전 황사를 불러왔던 환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직은 쓸모가 있으니 처리는 나중으로 미루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공공.”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지선이라는 계집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지선이라는 말에 환관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후 자신이 제대로 알아들은 게 확실한지 확인했다.

“아미파의 지선 스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본관이 아는 계집들 중 그 계집 말고 또 다른 지선이 있더냐?”

“지선 스님을 잡아들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길 청하옵니다, 우상시 공공.”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했느냐?”

“예, 지금 아미파는 황궁을 방위하는 데 있어 큰 축을 담당하고 있지 않사옵니까?”

환관의 말에 연공공은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럼 네 말은 아미파가 겨우 그 계집 하나 때문에 황실과 척이라도 질 거라는 말이냐?”

“지선 스님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속하는 잘 모르오나, 공공의 명이시라면 아미파도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내놓겠지만 시기가 너무 좋지 않사옵니다. 그들은 무림에서 큰 축을 담당하는 대문파가 아니옵니까? 그들에게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는 바, 지금으로서는 될 수 있다면 너무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 듯하옵니다.” 과연 그럴 게 확실했다. 원래 무림인이라는 것들이 자존심 하나에 목숨을 던지는 족속들이 아닌가? 쓸데없이 자신의 분풀이 좀 한다고 척을 지기에 아미파는 아직 도 꽤나 쓸모가 있었다.

“그 말도 일리는 있구나.”

지금 연공공은 마교 교주를 칠 계획을 짜고 있었다. 마교가 지닌 전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연공공은 아직 잘 몰랐다. 현재 연공공이 확보한 정보는 황성사가 그동안 수집해 놓은 것과 공공파나 아미파를 통해 얻은 정보가 대부분이었다. 비록 정보가 많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마교라는 단체가 무림맹과 거의 쌍벽을 이룰 정도로 막강한 단체라는 것을 유추해 내는 데는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마교를 치려면 무림맹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이런 상황에서 계집 하나 때문에 무림맹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아미파와 척을 져 봐야 좋을 게 없지 않겠는 가. 하지만 그냥 이대로 넘기기에는 지선이라는 계집이 너무 괘씸했다.

이렇게 내심 고민하고 있을 때 환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공공께서 아직까지도 지선 스님의 처리를 결정하지 못하고 계신 것은 그녀가 쓸모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공공께서 내리신 결정은 언제나 틀림이 없었습 니다. 뭔가 걸리는 게 있다면, 그게 해소될 때까지 지선 스님의 처리는 뒤로 미루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연공공은 마음을 굳혔다. 지금은 악독하기 짝이 없던 그 마교 교주라는 놈을 먼저 잡아야 할 때다. 겨우 계집 하나 때문에 그놈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계집은 언제든 잡아들여 분풀이를 할 수 있는 상대였다.

“네 말이 옳구나. 아무래도 몸이 불편하다 보니 너무 마음이 앞서간 모양이야. 좋은 지적을 해 주었다.”

연공공의 말에 환관은 깊숙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소인의 말이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공공.”

동중랑장은 연공공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황도로 돌아왔다. 그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연공공은 동중랑장의 빠른 일 처리 속도에 몹시 흡족해 했지만, 곧이 어 그가 직접 찾아와 자신에게 사죄를 올리자 그의 눈썹은 분노로 인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올랐다.

“뭣이? 내 그대를 그리 보지 않았거늘.

“어쩔 수 없었사옵니다, 우상시 공공.”

그러면서 동중랑장은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단 한 번의 충돌로 서중랑장의 기마대가 괴멸당했다. 그것도 1백 기의 적도들을 상대로 말이다. 그래도 그 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추격했지만, 저녁이 다 되어 갑자기 나타난 대규모의 기마대 앞에서는 추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자들은 거기에서 동료들이 오기 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적도들의 수는 1천 기가 넘었습니다. 도저히 소장이 거느리고 간 기마대로는 상대를 할 수가…….”

“그래서 그냥 되돌아왔다는 말인가?”

동중랑장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뭔가 한마디 비꼬아 주려던 연공공은 마지막 순간에 생각을 바꿨다. 아직 동중랑장은 이용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 저들의 규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자네에게 일을 부탁한 내 잘못이니 말이야.”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허허, 자네의 잘못이 아니라는데도 그러는구먼. 자네의 보고대로라면 상대는 겨우 1만 기로 20만의 금군과 대적한 마교의 최정예가 아닌가? 괜한 만용 부리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게 나로서는 더욱 고맙구먼.”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소장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공공.”

연공공은 자신의 뒤쪽에 서 있는 환관에게로 고개를 돌려 슬쩍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환관은 자그마한 함을 하나 꺼내 연공공에게 건네줬다. 공공은 그걸 동중랑 장에게 건네주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이건 내 일을 열심히 수행해 준 작은 보답일세. 부하들하고 술이나 한잔 나누며 피로를 씻도록 하게나.”

“감사합니다, 공공.”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환대를 해 주자 동중랑장은 감격을 금치 못했다. 동중랑장은 막사를 벗어나며 연공공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걸 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웃는 얼굴로 동중랑장을 돌려보냈지만 연공공의 속은 분노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놈에게 완벽하게 당한 것이다. 놈이 그토록 오만방자하게 까분 것도 다 믿는 구 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황도 외곽에 1천 기에 달하는 정예기마대를 숨겨 놓고 있었다니……

“으드드득! 멍청하기 짝이 없는 놈.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황병을 끌고가 제대로 한번 싸워 보지도 못하고 돌아오다니. 그나저나 이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이때 기가 막힌 계책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군.”

연공공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환관에게 명령했다.

“추밀사와 독대를 할 수 있도록 약속을 잡도록 해라. 최대한 빨리.”

환관은 잠시 멈칫하더니 급히 되물었다.

…류태청 말씀이십니까?”

“류태청 말고 또 다른 추밀사가 있던가?”

“류태청은 지금 금부에 투옥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연공공은 잠시 후 정신을 차렸다.

“뭣이? 어찌 그런 중요한 일을 내가 모르고 있었단 말이냐?”

“도중에 여러 일들이 겹쳐 미처 말씀드릴 기회가…….”

잠시 이리저리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던 연공공은 씨익 웃으며 물었다. 마치 류태청이 투옥된 것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듯.

“누가 류태청을 가뒀다고 하더냐?”

“참지정사 대인이라고 들었습니다.”

“참지정사? 허면, 참지정사와 독대를 할 수 있도록 약속을 잡아주게.”

“예, 공공.”

환관이 종종걸음으로 밖으로 나가자 연공공은 허공을 응시하며 이를 으드득 갈았다.

“교주 이놈! 내 반드시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릴 것이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크크크크.”

아무리 조정에서 크나큰 권세를 누리고 있는 참지정사 섭평이라고 해도, 황실의 숨은 실세인 우상시 연공공을 홀대할 수는 없었다. 연공공의 독대 요청을 받은 섭 평은 만사를 제쳐 두고 달려왔다.

기밀이 확실히 보장되는 밀실도 아니고, 병영 안에서 연공공을 만나야 했기에 섭평은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연공공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측근들이 철저하게 주위를 경계하고 있으니 참지정사께서는 마음을 편히 하셔도 무방합니다.”

섭평은 심중을 들킨 것 같아 찔끔하면서도, 그런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 위해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느긋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험험, 그런데 무슨 일로 공공께서 저를 찾으셨는지……?”

“이번에 참지정사께서 큰 분란을 일으켰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분란이라니, 무슨 그런 말씀을.. .? 혹 황상께 허락을 받지도 않고 류태청을 수감한 일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이오? 그 일이라면.

섭평의 말을 듣던 연공공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아아, 그 일이 아니라 악비를 없앤 걸 말하는 겁니다.”

그 말에 섭평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마치 자신이 큰 욕이라도 들었다는 듯 정색을 하며 따지고 들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시오? 연공공. 악비 대장군을 시해한 자는 류태청으로, 추밀원의 권위를 세우고 군벌을 타파하기 위해 행한 일이라는 자백까지 받아 냈소. 그 일에 대해서는 이미 황상께도 고한 일인데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시다니요.”

“참지정사, 본관은 바보 멍청이가 아닙니다. 이미 황성사에서 뒷조사가 끝난 일인데 계속 아니라고 우기신다면…….”

황성사라면 황실의 첩보, 감찰 기관이다. 그제서야 참지정사는 눈앞의 이 늙은 내시가 황성사의 간부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감히 황 성사를 입에 담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 늙은 내시가 이렇게까지 말을 할 정도라면 이미 황성사에서 확실한 물증을 확보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들은 그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가 자신에게 왜 이런 말을 꺼냈냐는 것이다. 오랜 세월 황궁에서 치열한 암투와 음모를 경험하며 이 자리에까지 올라온 참지정사의 머리가 빠 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더 이상 난 모르는 일이라고 우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노회한 참지정사는 정면으로 부딪치자고 마음을 굳혔다.

그렇게 마음을 먹게 된 이유는 이 늙은 내시 놈이 뭔가 자신에게 원하는 게 있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정체를 누설해 가며 접근해 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섭평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뭘 원하는 게요?”

그제서야 연공공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대화의 주도권을 쥐었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 이제는 자신의 입맛대로 천천히 요리를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연공공의 입에서 참지정사 섭평으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요구 사항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선 양양성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