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3권 14화 – 복수를 하고 싶은가?

복수를 하고 싶은가?

묵향 일행이 양양성에 도착했다는 것이 곧바로 유광세(世)상장군에게 보고됐다. 상장군은 즉시 대장군을 수행한 호위대장을 불러들였다. 호위대장은 황성을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로 부상을 당한 상태였지만, 절룩거리면서도 상장군을 찾아가 사건의 전말을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자세하게 보고했다.

보고를 들은 상장군은 크게 놀랐다. 그리고 분노했다. 가만히 들어 보니 대장군은 누군가에 의해 이미 살해당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황군으로 호위대 전체를 없 애버림으로써 양양성에 그 소식이 전해지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다. 황군을 움직일 정도였으니 이 사건의 주모자는 권력의 상층부에 있는 자일 것이다. 어쩌면 재상 진회일 수도 있었고 최악의 경우 황제의 뜻일 수도 있었다.

그 음모의 주재자가 누구이든 간에 명백한 것은 자신들의 정신적인 구심점이었던 악비 대장군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상장군은 당장 부관으로 하여금 악가군의 상층부에 해당하는 장수들을 모두 소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악가군의 존립이 위태로울 수 있는 사안이었기에 긴급회 의를 하려는 것이다. 부관이 밖으로 뛰어나가자 잠시 군막 안을 이리저리 서성거리던 상장군은 여유 시간을 이용해 묵향부터 먼저 만나 보기로 마음먹었다. 호위대 장을 통해 들은 것만으로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호위대장의 말에 따르면 그곳에서의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알아 본 인물이 묵향이었고, 악비 대장군의 죽음 역시 그의 입을 통해 들었다고 하지 않은가.

마교에 할당된 장원에 도착한 유광세 상장군은 묵향이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이번 일에 교주께서 발 벗고 나서 주셔서 감사하기 이를 데 없소이다. 예를 차릴 정신이 없는지라 거두절미하고 묻겠소. 호위대장에게 들으니 대장군께서 돌아가 셨다고 하셨다던데…, 그게 사실이오?”

질문을 던지는 시커먼 수염 사이로 보이는 상장군의 얼굴에는 이미 묵향의 대답을 알고 있었기에 짙은 슬픔과 분노가 어려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사실이오. 수하들의 보고를 받은 즉시 황성으로 달려가 백방으로 찾았으나 내가 대장군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목이 잘린 후였소.”

“그, 그렇다면 시신은……..”

이미 죽어 버린 시신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슬픔에 잠긴 상장군의 얼굴을 보니 차마 그런 식으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묵향은 대충 얼버 무리듯 말했다.

“안타깝게도 시신을 제대로 수습할 상황이 아니었소. 그것보다는 상장군께서는 앞으로 어찌할 생각이시오?”

“그건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남경에서 대장군을 구금하고 있던 추밀사라는 놈을 족치다 보니 대장군 제거에 대한 명령을 내린 자가 참지정사(參知政事) 섭평(平)이라는 걸 알아냈소.” 뿌드드득!

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원독에 가득 찬 상장군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참지정사, 이 쳐 죽일 놈!”

그 모습에 묵향은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문제는 섭평이 하수인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오. 대장군이 재상을 만나러 가자마자 재상은 지방 순시를 핑계로 급히 황성을 떠난 걸로 알고 있소. 그 후 섭 평이 이런 일을 벌였다면 재상에게 모종의 지시를 받고 움직였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소?”

참지정사 섭평은 재상 진회의 심복 같은 인물이었으니 당연히 재상 진회의 명이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으으, 기어이 재상 그놈이…….”

“어떻게 하시겠소? 대장군의 복수를 위해 황성으로 진격하겠다면 도와줄 수는 있소.”

잠시 분노에 온몸을 떨며 이를 북북 갈아 대던 상장군은 곧이어 그 말뜻이 가지는 의미를 깨달았는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곧 반란을 일으키라는 말 이 아닌가? 그는 급히 좌우를 둘러보며 혹 엿들은 자가 없는지 확인부터 했다.

“바, 반란을 일으키라는 말씀이십니까?”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내 말은 반란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오. 순수하게 복수를 말하는 거요, 복수. 황성으로 쳐들어가 대장군의 죽음에 관련된 모든 자들의 목을 쳐 버리란 말이외다.”

“하, 하지만 황상 폐하의 명 없이 군사를 움직인다는 것은…….”

상장군은 난처하다는 듯 말했지만, 묵향은 별것 아니라는 투로 대꾸했다.

“상장군의 말대로 패하면 역적의 오명을 뒤집어쓰겠지요. 하지만 복수에 성공한다면 얘기는 달라질 거요. 뭐, 선택은 상장군이 하시오. 지금 당장 대답해 달라는 것은 아니오. 휘하 장수들과 충분히 의논해 본 뒤에 대답해도 좋소.”

그제서야 상장군은 고개를 들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묵 대인께서는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로서는 달라지는 게 하나도 없소. 금나라만 박살 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이니까.”

사실 묵향의 속마음이야 금나라가 아닌 장인걸 패거리였지만 유광세 상장군에게 솔직하게 말해 줄 필요가 없지 않은가.

묵향을 만나고 돌아오는 유광세 상장군의 머릿속은 정보를 얻기 위해 찾아갔을 때보다 오히려 더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악비 대장군의 죽음의 이면에는 송제국 의 2인자라 할 수 있는 재상 진회가 버티고 있었다.

만약 교주의 말대로 군사를 일으킨다면 황군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물론 상장군은 황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황군이 막강 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교주가 전폭적으로 도와만 준다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충성스런 군인으로 살아온 그의 삶이 군사를 일으키려는 그의 결정을 망설이게 만들고 있었다. 실패하면 반역자의 오명을 뒤집어써야 할 게 분명 하기 때문이다.

깊은 생각에 잠겨 상장군이 사령부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그를 발견한 부관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지금껏 상장군을 찾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었던 모양인 지부관은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상장군, 황성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전령이?”

자신을 찾아 부관이 여기까지 달려온 걸 보면 아마 그 전갈은 자신이 직접 받아야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인 모양이다. 상장군은 서둘러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황성에서 왔다는 전령은 상장군에게 군례를 올린 후 봉서(封書)를 바쳤다. 겉봉을 보니 봉서를 보낸 곳은 추밀원이 아니라 형부였다.

“이상하군. 형부에서 왜 나한테…….?

봉인을 뜯어 내용물을 살펴보자 황도에서 도주한 대장군 호위대를 전원 형부로 압송하라는 명령서가 튀어나왔다. 여기서 말하는 ‘대장군 호위대’라는 것이 대장 군을 호위하기 위해 움직였던 묵향과 그 수하들까지 포함한 것이었기에 상장군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명령서를 한참 읽고 있던 상장군은 고개를 갸 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령서 말미에 대장군 호위대의 죄목이 적혀 있었는데 방금 전 대화를 나눴었던 묵향이 한 말과 뭔가 미묘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 이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투덜거리던 상장군은 전령에게 물었다.

“이것 외에 다른 지시 사항은 없었느냐?”

“예, 상장군. 저는 이 명령서를 꼭 상장군께만 전달한 후 수령증을 받아 오라는 명령만을 받았습니다. 여기…….”

상장군은 전령이 내미는 수령증에 서명해 줬다.

“그래, 수고했다. 가 보거라.”

“옛.”

전령을 내보낸 후, 상장군은 얽힌 실타래마냥 혼란스럽기만 한 머릿속을 털어 버리고 싶은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장군에게는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 했던 것이다.

유광세 상장군은 긴급 소집한 장수들과의 회의에서 악비 대장군의 죽음을 밝히지 않았다. 뭔가 확실한 결론이 나기 전까지는 악비 대장군의 죽음을 묻어 두는 것 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오랫동안 감추어 둘 수는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상장군은 장수들에게 대장군의 실종에 흔들리지 말고 맡은 바 임무를 잘 수행해 달라는 당부로 회의를 끝맺었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장수들 중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순우기 장군에게 상장군이 슬쩍 손짓을 보냈다. 잠시 자신과 얘기를 나누고 돌아가라는 신호였다.

순우기 장군은 굵은 눈썹, 다듬지 않아 사방으로 뻗친 호랑이 같은 수염, 그리고 투박해 보이는 인상을 지닌 단순무식한 무장의 전형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겉모습과는 달리 수많은 병서를 읽은 아주 박식한 모사형(形)의 장군이었다. 그의 능력을 높이 산 악비 대장군 덕분에 이제 겨우 30대 초반임 에도 불구하고 장군으로까지 진급해 있었던 것이다.

둘만 남게 되자 상장군은 묵향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한 뒤 그다음엔 형부에서 보낸 명령서를 건네줬다.

“형부에서는 황도에서 도주한 자들이 대장군 납치의 주범 혹은 주범들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크니 모두 다 체포하여 황도로 압송해 달라고 명령했네.”

명령서에 따르면 형부에서는 대장군의 실종 사건에 관련된 몇 가지 조사를 할 것이 있어 서중랑장에게 협조를 구해 대장군의 호위대를 불러 세웠다고 한다. 그리 고 그 부분은 호위대장의 보고와도 일치했다. 그런데 호위대는 조사에 불응하여 황군의 포위망을 뚫고 양양성 방향으로 도주해 버렸다고 쓰여 있었다.

물론 이것은 참지정사 섭평이 형부에 입김을 넣어 발송한 것이었지만, 그런 자세한 속사정까지 상장군이 알 리 없었다. 하지만 순우기 장군은 명령서의 밑바닥에 숨겨져 있던 핵심을 곧바로 파악해 냈다.

“흥! 이건 아주 치졸한 이간책입니다, 상장군.”

“이간책이라고?”

“예, 대장군을 시해한 섭평은 황군을 풀어 호위대가 이쪽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을 겁니다. 그렇게 해 놔야 대장군께서 돌아가셨다는 걸 우리들이 모를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게 실패하고 나니 이런 말도 안 되는 명령서를 보내 묵 대인과 우리들을 이간질하는 거죠.”

“귀관의 말이 옳구먼. 어쩐지 뭔가 찝찝하더라니.”

순우기 장군은 다시 한 번 명령서를 읽어 본 후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이거 일이 아주 고약하게 되었습니다. 검문에 불응하고 도주한 자들 모두를 당장 체포하여 형부로 압송하라고 했지 않습니까? 이제 시간 여유가 별로 없 습니다. 상장군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잠시 망설이던 상장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묵 대인은 행동하라고 권했었네.”

“행동이라면…, 혹 반란을 말씀하시는..

“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겐가?”

“…….?”

상장군은 급히 좌우를 둘러봤다. 혹 누가 엿듣는 자가 있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넓은 회의실에는 그들 단 두 사람뿐이었다. 상장군은 목소리를 한층 낮춰서 말했다.

“묵 대인의 말은 병력을 이끌고 황성(皇城)으로 쳐들어가 대장군의 죽음에 관계된 버러지 같은 간신배들을 처형한 후 양양성으로 회군하는 걸 말하는 거였네. 대 장군 같은 위대한 무인을 정적(政敵)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살해해 버린 놈들을 몽땅 다 때려잡고 제국의 정기를 바로 세우자는 말이지, 결코 반란을 일으키자는 게 아니라는 말일세.”

상장군의 말에 순우기 장군은 의외로 적극적인 찬성의 뜻을 표했다. 그는 황실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군문에 투신한 게 아니라, 악비 대장군을 존경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군대를 이끌고 가 간신배들을 소탕하자는 묵향의 의견에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저는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황실을 믿고 오랑캐 무리들과 싸울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황상의 존엄을 높이 세운다는 명분이라면 충분히 병사들을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상장군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황성으로 군대를 돌린다는 것 자체만으로 자칫 반역의 무리로 낙인이 찍힐 수도 있다는 걸 왜 모르나?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닐 세.”

상장군은 오랑캐와 싸우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지만 역적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죽기는 싫었다. 하지만 순우기 장군은 계속 상장군을 충동질했다.

“어차피 남아일생 아닙니까? 성공하면 영웅이 될 것이요, 실패하면 만고의 역적이 되겠지요. 제 생각으로는 묵 대인께서 도와만 주신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이제 그만! 그 얘기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말게.”

그 말을 끝으로 완고하게 입을 다무는 상장군의 모습에 순우기 장군 역시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그러다 문득 순우기 장군이 입을 열었다.

“하여튼 상장군께서는 앞으로 행동을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형부에서 이런 명령서까지 보낼 정도라면 황성사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아마 벌써 상장군 주위에 감시자들이 붙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대 장군을 감시했었던 자들이 상장군을 감시하는 것으로 임무 교대를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하겠죠.”

“그, 그렇겠군. 알겠네. 내 조심하도록 하지.”

“그럼, 저는 이만.”

예를 올리고 돌아서서 회의실 밖으로 나가는 순우기 장군의 머릿속에는 이미 자신들의 뜻을 지지해 줄 장수들을 어떻게 포섭해야 할지 계획이 하나 둘씩 짜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