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3권 4화 – 의문의 실종 사건

의문의 실종 사건

황도에서도 방귀깨나 뀐다는 고관대작들의 고래등 같은 저택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등천로(登天路)다. 예전부터 남경을 다스리는 왕부에서 일하던 신하들이 이 일대에서 살아왔기에, 황도의 그 어떤 곳보다도 치안이 잘 잡혀 있는 곳이다.

밤이 되면 등천로 일대는 황군들이 철통같은 경비망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고관들의 저택이 많은 만큼, 잘못해서 어떤 집에 도둑이라도 드는 날에는 제아무리 위 세 좋은 황군 교두라 해도 하루아침에 찍소리도 못 내고 모가지가 날아갈 게 분명했다.

특히 오늘 아침에 웬 무장괴한이 검문소를 뚫고 시내로 잠입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만큼, 평소에 비해 두 배나 많은 병사들이 배치되어 경비를 펼치고 있는 중이었 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행동을 비웃기라도 하듯 간 크게도 소부경(少府卿) 추린(秋潾) 대인의 저택 담장을 뛰어넘는 자가 있었다. 저택 내에 50여 명에 달하는 사병 들까지 있어 철통같은 경계를 하고 있었지만 괴한은 마치 도둑이 빈집이라도 털 듯 여유롭게 저택을 헤집고 다녔다.

괴한이 향한 곳은 추 대인이 깊이 잠들어 있는 침소였다. 얼마나 잘 먹고사는지 젖살이 축 늘어질 정도로 비대한 그는 첩의 옆에 누워 요란하게 코를 골며 잠을 자 고 있었다. 괴한은 추 대인을 깨우려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멈칫했다. 아무래도 추 대인을 그냥 깨우는 데는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깊은 생각에라도 잠긴 듯, 잠시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던 괴한은 처음 이곳에 나타났던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 그 괴한이 다시금 추 대인의 방에 나타났을 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디서 들쳐 업고 왔는지 꽤나 덩치가 장대해 보이는 장정 하나를 들고 (?) 들어왔던 것이다.

괴한은 장정을 방바닥에 눕힌 후, 자세를 적당히 잡은 다음 무슨 일인지 미동도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 것일까? 한참 시간이 지나자 추 대인 의 코 고는 소리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보통 코 고는 사람들이 똑같은 음정을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소리가 변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시적인 현상일 테지만 추대인의 코 고는 소리가 조금씩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아주 작게 바뀌었을 때,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괴한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 순간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 추 대인의 코 고는 소리는 딱 멈췄고, 대신 방바닥에 누워 있는 장정이 코를 골더니 그 소리를 점차 높여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코 고는 소리를 내는 사람이 바뀐 만큼, 뭔가 미묘한 소리의 변화가 있긴 했다. 하지만 주위에 포진하고 있는 추 대인의 부하들은 그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넘 어가 버렸다. 아마도 그들은 ‘아, 쓰펄! 돼지 같은 새끼. 조금 잠잠하나 싶었더니, 또다시 골아 대기 시작하네’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잠시 주위의 동정을 살피던 괴한은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추 대인에게로 다가가 그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 하고 쳤다. 슬쩍 친 것처럼 보였지만, 맞은 추 대인이 느낀 충격은 달랐던 모양이다. 비대한 살집 사이로 감춰져 있던 추 대인의 새까만 눈동자가 번쩍 떠졌고, 벌떡 일어나 앉아 머리통을 감싸 쥐며 끙끙거렸 기 때문이다.

“하이고…, 머리야.”

한동안 이마를 비벼 대던 추 대인은 어둠 속 저편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자가 바로 코앞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추 대인이 그를 한 참 뒤에야 발견한 것은 잠이 번쩍 깰 정도의 고통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괴한은 시커먼 옷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얼굴 부위까지 복면으로 가 리고 있어 어둠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괴한을 발견한 순간, 조그마하던 추 대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더 이상 커지기 힘들 정도로 확장됐다. 그런 그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허억! 누, 누구냐?”

추 대인은 깜짝 놀라 겁에 질린 표정으로 식은땀을 줄줄 흘려 댔지만 비대한 살집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연신 영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 그건 알 필요 없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추 대인은 목에 힘을 주고 엄포부터 놓았다.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것도 있었고, 밖에 대기하고 있을 경비병이나 공동파 고수들을 불러들이기 위한 행동이 었다.

“네 이놈! 감히 본관이 누군 줄 알고!”

하지만 오라는 부하들은 꿈쩍도 않고, 대신 추 대인의 눈앞에 괴한의 손이 어른거리더니 또다시 불꽃이 번쩍였다.

빠각!

“크흐윽!”

“한 번만 더 헛소리를 나불거리면 아예 머리통을 박살 내 버리는 수가 있어. 알겠나?”

추린은 머리통을 감싸 쥔 채 다급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저택을 경비하는 사병의 수는 거의 50명에 달한 다. 그중에서도 10여 명은 뛰어난 무예를 지닌 장정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의 주위에는 무공을 지닌 호위 한 명이 20보 이내에 은밀하게 숨어 있는데, 추린이 황성사의 간부로 임명되었을 때부터 그의 그림자가 된 인물이었다.

언제나 듬직하게 여겼던 그조차도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이 이렇게 큰 소리를 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추린으로서는 작금의 현 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네놈이 소부경 추린이 맞나?”

욱신거리는 머리를 주무르고 있던 추린의 손이 딱 멈췄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그의 숨까지 멈췄다. 그는 너무나도 놀랐던 것이다. 좀도둑이라고 생각했던 괴한이

알고 보니 정확히 자신을 알고 침입해 온 것이다. 그렇다면 재물을 훔쳐가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인데……. 추린은 등골이 오싹해 옴을 느꼈다. 괴한은 황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자신에게 뭔가 목적이 있어 찾아온 것이다.

“맞아? 틀려? 그것부터 빨리 말해.”

얼핏 들으면 도저히 협박을 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낮으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다. 마치 친한 지기와 대화라도 나누는 것처럼 말이다.

“…..”

추린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자, 괴한은 그에게 다가서며 중얼거렸다.

“흠, 좀 멍청해 보이기는 하지만 이놈이 맞는 것 같군.”

그리고 또다시 눈앞에 불꽃이 번쩍 하며 추린은 의식을 잃어야 했다. 그 와중에도 추린은 현 상황이 분명 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철통같은 경비를 뚫고 괴한이 자신 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새벽, 소부경 추린 대인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추대인의 애첩이었다. 그녀는 잠결에 침상을 더듬거리다가 추 대인이 곁에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귓청을 울리는 코 고는 소리는 어디서 들려오고 있다는 말인가?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억지로 눈을 떴다. 그리고 발견했다. 방 중앙에 드러누워 코를 골아 대고 있는 낯선 사내를 말이다.

“꺄아아악!”

그녀의 비명 소리가 들리자마자, 곧이어 문짝이 부서지며 흑의를 입은 무사 한 명이 날아 들어왔다. 어느 결에 뽑아 들었는지 흑의무사가 뽑아 든 장검에서는 싸늘 한 예기가 뻗어 나와 실내를 난도질할 듯했다. 하지만 곧이어 흑의무사의 표정은 낭패감으로 일그러졌다. 아무리 둘러봐도 장검을 휘두를 대상이 없었던 것이다. “추 대인은 어디에 계십니까?”

첩을 향해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는 그에 대답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문짝을 부수고 달려 들어온 외간 남자로 인해 더욱 놀란 상태였다. 필사적으로 이불을 잡 아당겨 자신의 알몸을 가리기에 급급해하는 그녀에게 사내의 질문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무사들이 실내로 달려 들어왔을 때, 흑의무사는 첩에게 말을 거는 것을 포기하고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사내를 깨우려고 노력하는 중이었 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게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내는 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니라 점혈을 통해 정신을 잃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무슨 짓을 해 놨는지 모르겠지만 코를 요란하게 골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진(陣) 위사.”

경비무사들의 책임자는 흑의무사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주저없이 그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한동안 해혈을 하기 위해 이리저리 노력하 던 그는 이윽고 한숨을 푹 내쉬며 일어섰다. 아직까지도 사내가 요란하게 코를 골아 대고 있는 것을 보면, 진 위사의 시도는 실패한 모양이다. 그때서야 사내의 얼굴 을 자세히 볼 수 있게 된 경비무사의 책임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니 이놈은 장원에서 잡일하는 하인 놈인데 왜 여기에 있지?”

“뭐! 잡일하는 하인이라고?”

“예, 확실합니다.”

흑의무사는 눈썹을 찡그리며 뭔가를 생각하다 경비무사들의 책임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흠, 총관에게는 기별을 넣었는가?”

“예, 지금 이쪽으로 오고 계실 겁니다.”

그 말에 흑의무사는 경비무사들까지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오자 아예 이불을 뒤집어쓰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추 대인의 애첩을 가리키며 말했다.

“작은 마님께 다른 숙소를 마련해 드리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 주변을 철저히 경비하되, 쓸데없이 돌아다녀 소중한 증거가 될 수 있는 발자국 따위를 없애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부하들에게 단단히 주의시키도 록 하게.”

“예.”

“그리고 공동파에 사람을 보내어 추 대인께서 납치당하셨음을 알리도록 하게.”

그런 흑의무사의 말에 경비 책임자는 깜짝 놀라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지만 추대인의 비대한 모습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그의 안색은 핏기를 잃어버리 고 새하얗게 변했다. 하필이면 그가 당번을 서고 있을 때 추 대인이 실종되다니. 혹시라도 나중에 무사히 추 대인이 돌아온다 해도 경비를 잘못 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알기에 그의 안색은 침통할 수밖에 없었다.

“저, 납치당하셨다면 공동파가 아니라 형부(刑部)에 먼저 고하는 게 순서가 아닙니까?”

“형부 쪽에서 취급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닐세. 무림의 고수가 연관되어 있어. 형부보다는 공동파 쪽이 훨씬 도움이 될 걸세.”

“무림인이라구요?”

흑의무사의 말에 경비 책임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황도에 무림인이라니. 잠시 망연한 표정으로 코를 골며 자고 있는 하인을 바라보던 경비무사들의 책임자 는 다급히 부하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렸다.

“장삼, 넌 공동파로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려라! 그리고 넌 이 방 안으로 그 누구도 들어서지 못하도록 철저히 경비하도록!”

평온하던 등천로의 아침은 경비무사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소란스럽게 깨어나기 시작했다.

* * *

공동파 무사들이 추 대인의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진 위사는 어디론가 떠나 버린 후였다. 세 명의 무사들을 이끌고 이곳에 도착한 노련해 보이는 중년 무사는 공 동파의 1대제자 유정길(劉停吉)이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총관과 경비무사들의 책임자를 불러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자세한 정황을 물었다.

“그러니까 추 대인이 납치당한 것이 틀림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물론이오.”

총관의 대답에 유정길은 경비 책임자에게로 시선을 돌려 허락을 구했다.

“현장을 좀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럼 안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후, 유정길은 자신이 데려온 무사들에게 시선을 돌려 명령했다.

“너희들은 이분의 뒤를 따라가서 현장을 철저하게 조사해라. 뭔가 증거가 될 만한 것이 있는지 말이다.”

“옛!”

경비무사들의 책임자와 무사들이 떠난 후, 유정길은 다시금 총관에게로 시선을 돌려 물었다.

“추 대인의 방에서 발견되었다는 그 하인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자신의 방에 옮겨 놓은 후, 보초를 세워 뒀습니다.”

“옮겨 두었다구요? 그렇다면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겁니까?”

“예, 이상한 것이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계속 요란스럽게 코를 골며 자고 있습니다.”

총관은 일부러 진 위사에 대한 말은 생략했다. 진 위사는 황실의 비밀 기관에 소속된 인물이다. 그런 그의 존재를 허락도 없이 외부인에게 발설할 수는 없었던 것 이다.

“그쪽으로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럽시다. 노부를 따라오시구려.”

과연 총관의 말대로 그가 안내한 방 안에는 장대한 체구의 하인 한 명이 요란하게 코를 골며 단잠에 취해 있었다. 유정길은 지체치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가, 하인의 혈도부터 만져봤다. 과연 자신의 짐작대로 하인의 혈도는 누군가의 공력에 의해 제압되어 있었다. 그런데 혈도를 제압한 놈이 무슨 장난을 쳐 놨는지, 하인은 정신 을 잃은 와중에도 요란하게 코를 골고 있었다.

유정길은 일단 해혈을 하기 위해 곧장 자신의 공력을 주입했다. 하지만 하인의 혈도를 막고 있는 상대의 공력을 도저히 제압할 수가 없었다. 그는 신음성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인의 혈도를 풀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바로 혈도를 제압한 괴한의 내공이 자신보다 한 차원 높다는 증거였으니 말이다. 공동파의 1대제자인 자신 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을 지닌 자라면 결코 무명소졸일 리가 없다.

유정길은 해혈하는 것은 포기하고, 괴한이 흘려 놓은 공력의 기질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괴한이 익힌 무공의 근원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범인이 누군지 추측 해 내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괴한이 흘려 놓은 내공의 심층부에 파고든 순간, 유정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광폭한 기운을 느꼈던 것이다. 순식간에 등허리가 축축해질 정도로 식은땀이 솟아났다. 지금껏 강호를 돌아다니며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괴이한 기운. 이런 기운을 사용하는 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 가?

유정길은 추대인의 납치 사건에 개입된 인물이 보통 실력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곧이어 의구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납치된 인물은 소부경 추린이다. 관부에 대한 지식이 그다지 깊진 않아 소부경이라는 직책이 뭘 하는지는 몰랐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소부경 추린의 품계는 종5품밖에 안 된다는 것을. 비록 고관대작들이 몰려 살고 있는 이곳이지만 종5품은 그다지 높은 벼슬이 아니다. 복잡다단한 명칭을 지닌 벼슬도 하나의 체계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품계다. 정(正)으로 9단계, 종(宗)으로 9단계.

그 순서는 정1품, 종1품, 정2품, 종2품……. 이런 순서로 교차되며 총 18단계로 형성된다. 그렇게 따졌을 때 종5품이라면 중간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 위로 무 려 9단계가 더 있으니 말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이런 어중간한 중간관료를 납치하기 위해 직접 움직일 만한 인물은 결코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바로 이때, 엄청난 힘을 내포한 듯 느껴졌던 괴한의 기운이 흔적도 없이 흩어져 버렸다. 아마 상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자동적으로 해혈이 되도록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방금 전까지 귀청을 찢을 듯 코를 골아 대던 하인은 입맛을 쩝쩝 다시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낯선 사내를 보자 흠칫 놀랐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본 후 이곳이 자신의 방임을 확인하자 하인은 인상을 쓰며 거친 음성으로 물 었다.

“당신 누구야?”

“어젯밤에 무슨 일을 했었느냐?”

낯선 사내가 자신의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문책하듯 질문부터 퍼붓자, 하인은 처음에는 찔끔하는 듯하더니 곧이어 버럭 화를 냈다.

“어젯밤 내가 뭘 했건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하인은 얼굴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사내가 자신의 방에 들어와 강짜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노동으로 다져진 우람한 체격과 힘을 믿은 하인은 당연히 발끈하며 윽박지르듯 대꾸한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때, 그 사내의 뒤편에서 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놈! 헛소리하지 말고, 이 대협의 질문에 빨리 대답하지 못할까!”

사내에게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문 앞에는 총관 나으리가 서 있었던 것이다. 총관의 질책에 하인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떨떠름한 말투로 대답했다. “어제 저녁을 먹고 난 후, 총관 어르신께서 시키신 대로 쌀하고 포목 따위를 모두 다 내당 창고에 옮겨 뒀습니다요.”

“그 후에는 뭘 했나?”

“씻고 들어와서 잤습니다요.”

“허어, 거짓말 하지 말고 바른 대로 말해 보게.”

유정길이 혹시나 하고 찔러 본 것이지만 하인은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부릅뜬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총관의 눈치를 슬그머니 살피다 떠듬떠듬 실토하기 시작했다.

“그, 그러니까 일이 끝난 후 주방에 가서 술 한 잔…, 정말로 딱 한 잔만 마셨습니다요.”

“같이 일했던 모두와 마신 건가?”

“그, 그게…….”

하인은 총관의 눈치를 힐끔 살피더니 풀이 죽은 어조로 대답했다.

“소인 혼자만…….”

드디어 꼬리를 잡았다고 생각한 유정길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누가 자네에게 술을 줬나?”

“추, 추월이가……. 매, 맹세코 술 한 잔 얻어 마신 것 외에 다른 일은 없었습니다요.”

다급히 변명하듯 대답하는 하인의 말에 유정길은 총관을 돌아보며 물었다.

“추월이가 누굽니까?”

유정길의 물음에 총관은 곧바로 대답해 줬다.

“주방에서 일하는 하녀일세.”

“그 하녀도 이곳으로 불러 주십시오.”

잠시 후, 예쁘장하게 생긴 하녀 하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무슨 일 때문에 자신이 불려왔는지는 몰랐지만 이미 충분히 겁에 질려 있었다. 유정길은 부드 러운 음성으로 어젯밤의 일을 질문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녀가 범인과 공모하여 하인에게 술을 먹였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추월이라는 하녀를 철저히 심문해 본 결과 전혀 그렇지 않았다. 먼저 꼬신 것이 추월 이가 아니라 그 하인 놈이라는 것과, 둘이 함께 술을 마시며 농탕한 수작을 주고받았다는 것 정도를 더 실토받았을 뿐, 하녀에 대한 심문은 완전히 시간 낭비였을 뿐 이다.

“이런 젠장!”

유정길은 투덜거리며 발길을 내실쪽으로 돌렸다. 그곳에 남겨 둔 제자들이 뭔가 단서를 잡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총관에게 들으니, 추 대인은 250근(약 150킬 로그램)은 족히 나갈 정도로 비대한 덩치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런 엄청난 덩치를 흔적도 없이 집 밖으로 빼돌리는 것은 제아무리 무림인이라고 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뭔가 단서를 찾은 게 있느냐?”

유정길의 질문에 열심히 방 안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던 제자들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사숙.”

“제대로 찾아보기나 한 거냐?”

2대제자들을 밀치고 유정길은 자신이 직접 범인들이 남겨 놓았을 법한 단서들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시진이 지난 후 유정길은 더 이상의 수색을 포기했다. 범인은 단서가 될 만한 단 하나의 것도 남겨 놓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유정길이 하인의 몸에 뭔가 금제가 가해졌었다는 것을 직접 확인해 보지 않았다면 총관을 비롯한 몇몇이 자신을 놀리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 거라고 생각할 만큼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사실 그만큼 추 대인을 납치한 자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반증일 것이다.

“대단한 실력의 전문가가 동원되었음이 틀림없어. 그러니까 최대한으로 잡아도 범인의 수는 세 명을 넘지는 않았을 거야. 숫자가 많아질수록 그만큼 실수를 할 확 률도 높아지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던 유정길은 도저히 자신의 손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깨닫고 분타로 돌아갔다. 분타주께 상황을 자세히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 * *

공동파의 남경 분타는 필요에 의해 단기간에 건설된 곳인 만큼, 제대로 된 분타와는 거리가 먼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대부분의 분타들이 적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어 장치들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이곳은 그런 것이 거의 없었다. 다만 이곳 남경에 파견된 수백에 달하는 공동파 제자들에 대한 효과적 인 지휘통제를 위한 장치들만이 마련되어 있을 뿐이다.

현재 남경 분타의 분타주로 임명되어 파견 나와 있는 사람은 공동파가 자랑하는 고수들 중 하나인 이평(平) 장로였다. 비호검(飛虎劍)이라는 명호를 얻을 정도 로 빠르면서도 패도적인 검법을 구사하는 그는 심기 또한 매우 깊어 모든 문도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런 이평 장로를 이곳 황도에 파견했을 정도로 공동파는 황실 및 조정에 연줄을 만드는 것에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등천로에 갔던 일은 어찌 되었느냐?”

“뭔가 수상한 냄새가 풍깁니다, 장로님.”

그렇게 운을 뗀 유정길은 추린의 저택에서 있었던 일들을 자세하게 보고했다. 보고 내용을 다 들은 이평 장로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납치된 자의 품계가 종5품이라고 했느냐?”

“예, 그렇습니다. 장로님.”

“흠, 품계가 그리 높지 않은데도 납치를 당하다니. 등천로 일대에는 그보다 훨씬 더 높은 품계를 지닌 자들이 수두룩한데 말이다. 혹 그자가 품계는 낮지만 하는 일 이 특별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소부경이라는 게 뭘 하는 직책인지는 알아 봤겠지?”

“예, 제자가 알아 본 바로는 황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소부(府)의 장(長)이라고 하더군요.”

그제서야 이평 장로는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흠, 그렇지. 황실의 재산이 엄청날 것은 당연한 이치. 그리고 그것을 관리하는 자라면 얼마나…….’

유정길은 이평 장로의 말이 길어지기 전에 재빨리 입을 열어 그의 생각에서 틀린 부분을 짚어 줬다.

“아뢰옵기 송구스럽습니다만, 제자가 조사해 본 결과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과거에는 소부경이 지닌 권세가 대단했었는지 모르겠지만, 워낙 오랑캐들의 발호가 거세다 보니 황실에 남은 재산도 별로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예전에 황도가 오랑캐들에게 함락되어 약탈당했고, 그 후 남경에서 새로운 황제가 등극한 지도 얼마 되 지 않았고… 그러는 와중에도 오랑캐들과 계속 전쟁을 벌여 댔으니 황실에 돈이 남아 있을 턱이 없지 않겠습니까?”

“흠흠…, 그건 네 말이 옳구나.”

“그런데 제자가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은 추 대인을 납치한 자들 중에 엄청난 고수가 끼어 있는 듯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인의 점혈을 푸는 과정에서 유정길이 겪은 것을 들은 이평 장로는 더욱 큰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가 흘려 놓은 실낱같은 내공의 한 자락만으로도 네가 공포심을 느꼈다는 말이더냐?”

“예.”

유정길은 공동파의 적전제자다. 더군다나 앞으로 공동파를 이끌어 갈 1대제자가 아닌가. 그런 그가 상대가 흘려 놓은 내공의 기운만으로 공포심을 느꼈다니. 이평 장로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상대는 엄청난 실력을 지닌 고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고수가 노리기에는 추린은 너무 작은 송사리였 다.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말해 보거라. 정녕 공포심이 맞더냐?”

유정길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워낙 짧은 시간에 벌어졌던 일이라서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만…, 원초적인 공포심이나 두려움이라고 할까요? 한순간 전신에 소름이 쫙 돋으며 한기가 느껴지는 것이…….”

지금껏 수많은 경험을 쌓은 이평 장로였기에, 그는 유정길의 신체적 반응을 공포나 두려움이 아닌 상대가 지닌 무공의 특이성으로 이해했다.

“네 말을 들어 보니 상대는 한빙 계열의 무공을 익혔을 수도 있다.”

“한빙 계열이란 말씀입니까?”

“그렇다. 한빙 계열의 내공을 쌓은 자가 점혈을 했다면 그 점혈을 푸는 과정에서 네가 말한 그런 현상을 경험할 수도 있다.”

유정길은 미처 그쪽으로는 생각해 보지 않았기에 퍼뜩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 표정을 보고 이평은 자신의 짐작이 옳았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하인을 제압해 놓은 자가 한빙 계열의 내공을 쌓았다면 모든 것이 설명된다. 어쨌거나 무림인이 이번 사건에 개입되었다면 우리 쪽에서도 좌시할 수만은 없는 일 이겠지. 그런데 어떤 간 큰 자가 이런 짓을 저질렀을꼬?”

아무리 소부경 추린이 종5품 직책의 그저 그런 관리라고는 하지만 고관대작의 호위를 주 임무로 맡고 있는 공동파로서는 무림인이라고 밝혀진 이 일의 범인을 반 드시 잡아야만 했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공동파를 믿고 호위를 맡기겠는가. 황실과의 연줄을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공을 들이고 있던 공동파로서는 이 일을 어설프 게 처리했다가 자신들이 지금까지 쌓아 온 공든 탑이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해서인지 유정길의 보고를 듣는 이평 장로의 안색이 그다지 밝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