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3권 5화 – 내 노예가 될래?
내 노예가 될래?
술을 마시다 황홀한 음률에 끌려 산 정상으로 날아온 아르티어스. 그는 산 정상 근처 바위 위에 앉아 교교한 달빛을 받으며 금(琴)을 타고 있는 한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잘생긴 얼굴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길고 아름다운 수염. 자신의 아들 묵향만큼은 아니지만 놀라울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음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더군다나 저렇게 아름다운 음악까지 연주할 수 있다니.
한순간 아르티어스의 눈이 탐욕으로 빛났다. 마치 근사한 물건이라도 보는 듯이.
“정말 때깔이 그럴듯하군. 흐흐흐.”
필요에 따라 여러 종족들을 노예로 부려 본 경험이 있는 아르티어스다. 저놈은 엘프처럼 외모도 근사한 데다가 드워프처럼 뛰어난 능력까지 지니고 있다. 더군다 나 수명까지 꽤나 길 게 뻔하니 일석삼조라고나 할까.
상대는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하늘에 둥둥 떠 있는 장면은 처음 보는 모양이다. 급히 정신을 수습한 상대가 포권하며 말했다.
“귀하의 신법은 노부의 안계(眼界)를 새로이 넓혀 주는구려. 귀하의 존성대명을 알려 주신다면 영광이겠소. 세상 사람들은 노부를 만통음제라고 부르고 있소만.” 정중하기 그지없는 상대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너, 내 노예가 돼라.”
만통음제의 표정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지금껏 살아오며 이렇게 완벽하게 미쳐 있는 놈은 처음 만났기 때문이다.
“뭐, 뭣이? 1백 년 넘게 살았지만 그런 망령된 말을 노부에게 내뱉은 자는 귀하가 처음이구려. 대체 귀하는 누구시오?”
“뭐, 그건 나중에 자연히 알게 될 거고, 질문에나 대답해.”
“흥! 대답할 가치조차 못 느끼겠소.”
“크흐흣. 모두들 그런 식으로 떠들어 댔지만 결국은 얌전한 노예가 되었지. 너도 그렇게 될 거야. 너 자신이 얼마나 미천한 존재인지 깨닫고, 또 내가 너의 주인이 될 만큼 위대한 존재임을 직접 몸으로 확인해 봐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르지만 어른 주먹만 한 시뻘건 덩어리 한 개가 아르티어스의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걸 본 만통음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중원에서 열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뛰어난 고수였지만, 지금껏 그는 저렇게 괴이한 무공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 무슨 사술(邪術)을……?”
순간 시뻘건 덩어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점점 더 가속해서 날아왔기에 만통음제 주변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거의 빛과도 같은 빠르기로 변해 있었다. 그 시뻘건 덩어리가 만통음제의 몸을 관통하는 듯 보였지만, 어느 순간 그의 몸이 희뿌옇게 변하며 사라져 버렸다.
화경의 고수만이 시전 가능하다는 이형환위(形幻位)의 신법. 너무나도 빨리 그가 움직였기에 그곳에 아직까지 그의 잔상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시뻘 건 덩어리의 공격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마치 눈알이라도 달린 듯 크게 곡선을 그리며 만통음제에게로 다시 되돌아왔던 것이다.
한동안 꽁지에 불붙은 닭마냥 이리저리 후닥거리며 도망다니는 만통음제를 바라보던 아르티어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무래도 한 개 가지고는 재미없지?”
그와 동시에 아르티어스의 앞에 예의 그 시뻘건 덩어리가 세 개씩이나 더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들도 만통음제를 향해 날아갔다. 안 그래도 피하기 힘들 정도로 빠 른 속도로 움직이는 구체(球體)였는데, 그게 네 개로 늘어나니 만통음제는 정신없이 다리를 움직여 피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열심히 도망 다녀 봐. 내가 장담하건대 한대 맞으면 꽤나 아플걸?”
아르티어스의 빈정거림에 아무리 만통음제가 성인군자라고 해도 열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망할 자식! 도대체 나하고 무슨 원수가 졌다고 이런 짓을 하는 거냐?”
“크크크, 내가 원하는 건 하나밖에 없지. 내 노예가 되는 것. 내 시중을 들고 나를 위해 싸우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그 괴상한 악 기를 연주하는 거야. 알겠냐?”
학문을 깊이 닦아 상스러운 말투는 입에 담지도 않는 점잖은 성격의 만통음제였지만, 그 말에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만통음제는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미친 새끼!”
“호오, 아직 주둥이를 놀릴 힘이 남아 있는 모양이군. 좋아. 나는 인자하고 너그러운 분이니, 네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 주마.”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네 개의 시뻘건 덩어리는 더욱 빠른 속도로 만통음제를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겨우 두 개의 구체를 피한 후 다른 구체가 접근하기 전에 얻어진 찰나의 시간. 만통음제는 그 시기를 놓치지 않고 아르티어스를 향해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그의 특기가 검법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장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만통음제의 손에서 발출된 시퍼런 강기 다발은 쏜살같이 날아갔고, 순식간에 아르티어스 의 몸에 격중되었다. 상대가 미처 피하지도 못하는 것을 보자, 만통음제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네까짓 게 호신강기를 믿는 모양이지만, 내 의제(義弟)라 하더라도 그렇게 맨몸으로 버틸 만큼 만만한 일격이 아니다.’
퍼퍼펑!
하지만 만통음제의 기대와는 달리 그가 발출했던 강기 다발은 아르티어스의 몸 근처에 접근하기도 전에 뭔가 강력한 막에 가로막히기라도 한 듯 커다란 폭발을 일 으키며 흩어져 버렸다. 맹세코 그건 상대의 호신강기에 부딪친 반응이 절대로 아니었다.
“뭐, 뭐지?”
의외의 상황에 너무나도 놀라 만통음제의 몸이 순간 멈칫했다.
펑!
“크윽!”
단 한 번의 실수는 그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 줬다. 다행히도 구체와 부딪치는 순간 급하게 호신강기를 일으켰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그 일격으로 목숨을 잃 어야 했을 정도로 시뻘건 구체는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미처 중심을 잡지 못한 상태에서 뒤로 튕겨 나가던 그의 몸에 또 다른 구체가 하나 더 날아와 격중했다.
펑!
“크윽!”
“자자, 어서 나를 주인님으로 모시겠다고 하지 그래.”
마치 놀리는 듯한 아르티어스의 말에 만통음제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의 입에서 거친 말투가 튀어나왔다.
“개소리하지 마라!”
어쩔 수 없이 만통음제는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행위, 즉 자신에게 음제(帝)란 칭호를 듣게 만든 금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강기를 통한 공격이 통하지 않는 상 대다. 웬만한 다른 공격들을 해 봐야 오히려 공력과 체력의 낭비일 뿐이다. 더군다나 지금 그의 몸은 정상도 아니지 않은가.
마음을 굳힌 만통음제의 손이 거칠게 금의 현을 뜯었다.
뚜따당!
이죽거리는 얼굴로 만통음제를 바라보던 아르티어스는 순간 뇌리 속을 파고드는 너무나도 강렬한 충격에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가 누 군가. 그는 재빨리 용언마법을 시전했다. 상대가 괴이한 악기를 퉁김과 동시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진 만큼, 상대와 자신의 사이에 얇은 진공의 벽을 만들어 음파( 波)를 완전히 차단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의 순간적인 선택은 옳았다. 그 후로 계속 만통음제가 금을 거칠게 뜯고 있었지만 더 이상의 충격은 없었기 때문이다. “거참, 별 괴상한 수법을 다 보겠군.”
보통 사람이라면 그 단 한 번의 공격에 귀의 평형중추가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을 테지만, 치료마법까지 통달한 아르티어스에게는 그 어떤 상처도 입히지 못하고 끝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는 만통음제의 얼굴은 침통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음파 공격에 저렇듯 끄떡도 하지 않았던 자는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 문이다. 저자가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모르지만, 무시무시한 탄금을 하면서도 만통음제는 자신의 공격이 적에게 전혀 먹히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걸 깨닫자 마자 만통음제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만통음제와 아르티어스의 사이에 붉은 궤적이 번쩍였다. 만통음제가 숨겨 놓고 있던 최후의 비책 혈영비(血影)가 날아갔던 것이다. 혈영비는 작고 앙증맞은 생 김새와는 달리 중원 10대 기병의 여덟 번째에 올라가 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닌 비수다. 일단 혈영비가 날아가면 기공(氣功)으로는 절대 막을 수가 없다. 막는 길은 오로지 쳐 내는 것뿐.
하지만 만통음제는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자신의 애병이 뭔가 보이지 않는 벽에라도 막힌 듯, 하늘에 둥둥 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호신강기라면 간단히 찢어발기고 들어갔어야 함에도 말이다. 혈영비를 이기어검술로 조종하고 있는 만통음제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더욱 공력을 밀어넣었다. 하지만 혈영 비는 요지부동,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만통음제의 행동에 아르티어스는 가소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
“큭큭큭, 제법 놀라운 공격을 해 대는 놈이로군. 과연 내가 탐을 낼 만한 놈이야.”
혈영비가 아르티어스의 주위에 쳐진 방어벽을 뚫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르티어스의 방어벽은 호신강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마법. 그 어떤 마법적, 물 리적인 공격도 그가 쳐 놓은 방어벽을 뚫고 들어올 수는 없었던 것이다.
“뭐, 호비트 따위가 까불어 봤자 결국에는 내 발바닥을 핥게 되겠지만 말이야. 크흐흐흣.”
만통음제가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아르티어스는 파이어 볼을 이용해 끊임없이 공격했다. 물론 죽일 생각은 없었기에 아르티어스가 하는 공격은 상대에게 치명상을 가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어떤 존재든 극한 고통과 공포를 안겨 주면 결국에는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르티어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일단 허물어지기 시작하면 자신의 노예로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만통음제라는 이놈은 생각보다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마스터급이라서 그런가? 꽤나 시간을 끄는군.’
만통음제를 향한 공격은 오랜 시간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르티어스는 때가 왔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또다시 한 방 크게 얻어터진 만통음제가 비실비 실 몸을 일으켰다. 여기까지는 지금까지와 똑같은 전개였지만, 그의 눈에는 이제 더 이상의 독기도 분노도 그리고 삶에 대한 의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자
포자기한 눈이었다. 이제 곧이어 모든 걸 포기하고 자신의 노예가 되겠다고 애걸할 것이다. 예전에 수없이 겪어 봤던 다른 놈들처럼 말이다.
“서로 간의 실력 차가 얼마나 큰지는 네놈이 더 잘 알 것이 아니냐? 이제 모든 걸 포기하고 내 종이 되거라. 그러면 네게……..
“큭, 부귀영화? 아니면 일인지하(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라도 약속하겠다는 것이냐?”
만통음제는 만신창이가 다 된 몸을 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단 한 가지는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만통음제는 기력이 다했는지 비틀비틀 간신히 서서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내 비록 힘이 없어 이 지경이 되었지만, 삶에 대한 미련은 없다. 그리고 내가 이리 된 복수는 반드시 내 동생이 해 줄 테니, 네놈에 대한 원망도 없다.”
“흥! 복수라고? 그게 가능이나 할까나……?”
이때 아르티어스의 머릿속을 번쩍하고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저놈이 그토록 믿고 의지하는 혈육이 있다면, 그놈을 인질로 잡으면 모든 게 해결되지 않을까? 아르티어스는 음흉한 속내를 감추며 짐짓 궁금하다는 투로 물었다.
“과연 네 동생에게 그럴 능력이 있을까? 네 녀석의 실력을 보건대 네 동생 놈의 실력도 뻔한 것 같은데 말씀이야.”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틀거리던 만통음제의 몸이 일순 꼿꼿하게 펴졌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직하지만 확신에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내 동생의 이름은 묵향. 천마신교의 교주이며, 모든 사파의 지존이지. 비록 내 몸 상태가 나빠 이렇게 되었지만, 내 동생에게도 이런 행운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만통음제는 힘이 다했는지 앞으로 풀썩 쓰러져 버렸다. 척 보기에도 곧 죽을 거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만통음제가 입은 상처는 처참했다. 아마 아르티어스가 치료를 해 주지 않는다면 한 시진 내로 숨이 끊어져 버릴 것이 확실했다. 아르티어스가 비교적 약한 마법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장시간에 걸쳐 피해가 누적되다 보니 이제는 그의 생명이 끊어질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아르티어스는 만통음제를 치료해 줄 정신이 아니었다. 상대가 내뱉은 말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무, 묵향?”
화려한 마법들을 선보이며 상대를 농락하고 있었던 아르티어스는 기겁을 하며 허공에서 내려와 쓰러져 있는 만통음제 곁에 섰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자신 의 아들인 묵향에게 이렇게 괴상한 형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긴, 얼마 전에는 손녀라는 계집까지 치료해 주지 않았던가? 손녀가 있었던 만큼 형이 없으라는 법도 없다.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가족에게는 손톱만큼의 관심조차 없었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묵향일 뿐, 그 딸이나 형이라는 존재들은 그저 흔해 빠진 호비트나 마찬가지였 다. 문제는 이놈이 자신으로 인해 죽게 된 것을 사랑하는 묵향이 알게 되는 것이다. 순간, 아르티어스의 두 손에서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빛이 흐르며 만통음제를 뒤덮었다. 일단 이놈의 목숨만은 살려 놔야 했다.
대충 치료가 끝나 마음의 여유를 얻게 되자 아르티어스는 ‘이놈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궁리하며 주위를 서성거렸다.
“증거 인멸을 하고 아예 시치미를 뚝 뗄까? 흠, 그랬다가 만약 나중에 아들놈이 알게 되면 상당히 곤란한데……. 더군다나 이놈이 가진 재주 때문에 여기까지 와 서 이 개고생을 하고 있는 건데 그냥 죽이는 것도 좀…….?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아르티어스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산 아래쪽에서 누군가를 찾는 구슬픈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어르신~~, 어디에 계십니까? 어르신~~.”
* * *
왕지륜은 아르티어스가 술을 마시고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누각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푸짐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고, 그를 봉이라 생각했 는지 기녀가 옆에서 갖은 아양을 떨어 댔다. 하지만 왕지륜의 신경은 온통 아르티어스쪽을 향해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는지 왕 지륜은 술을 마시며 중얼거렸다.
“흐흐, 진작 이렇게 할걸. 돈은 좀 들겠지만 미인들로 하여금 시중을 들게 하니 아~주 조용하군. 덕분에 나도 오랜만에 즐겨 볼까.”
돈은 넉넉하게 있다. 더군다나 아무리 많은 돈을 쓴다고 해도 상부에서 뭐라 그러지 못할 게 분명하다. 까탈스러운 교주의 아버지를 수행하기 위해 돈을 쓰는데 누 가 감히 시비를 걸겠는가. 깐깐하기 그지없는 수석장로라고 해도 끽소리도 못할 게 분명했다. 만약 한소리한다면 그 말을 그대로 교주의 아버님께 전해 드리겠다는 응대로 되려 위협까지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술을 몇 잔 마시고 나니 뱃속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이 아주 기분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그 영감탕구의 비위만 잘 맞추면 이 짓도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교 에 있어 봐야 허구한 날 무공을 익히기 위해 비지땀을 흘릴 것이 아닌가. 그것보다는 가끔 쥐어터지긴 해도 어르신을 모시다 보니 이런 쏠쏠한 재미도 있지 않은가.
왕지륜은 기분 좋게 술을 마신 뒤 옆에 앉아 있는 기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총관이 신경을 썼는지 꽤나 미인이었다. 왕지륜이 관심을 보이자 기녀는 콧소리를 내 며 품 안으로 안겨 들었다.
“흐흐, 요 귀여운 것. 오늘 널 흐물흐물 녹여 주겠다.”
“정말 대인께서 소첩을 그리해 주실 수 있겠사옵니까?”
한두 번 해 본 장사가 아닌지라 기녀는 살짝 앙탈을 부리며 대꾸를 했다. 그 말에 왕지륜은 짐짓 인상을 쓰며 무공을 익히느라 강철처럼 단련되어진 자신의 팔뚝을 쓰윽 보여 주었다.
“봤지? 그리고 시중 드는 것이 내 마음에 든다면 특별히 네 몫을 더 챙겨 주마.”
“소첩, 최선을 다해 대인을 모시겠사옵니다.”
콧소리를 내며 말을 하던 기녀의 옷고름이 어느샌가 풀어져 뽀얀 가슴이 살짝 보였다. 왕지륜은 음흉하게 웃으며 기녀의 가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었다.
“아악!”
아르티어스가 있는 곳에서 갑작스런 여인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왕지륜은 불에 덴 듯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아르티어스가 있는 쪽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방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르티어스는 보이지 않았고, 두 명의 기녀가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얼마나 호되게 맞았는지 볼이 퉁퉁 부어 있었다. “어찌 된 일이냐? 그리고 어르신은 어디 계시냐?”
급하게 묻는 왕지륜의 질문에 한 기녀가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갑자기 잘 안 들린다고 하시더니 소첩의 따귀를 때린 뒤 귀신처럼 사라져 버리셨습니다.”
“뭐야! 잘 안 들려?”
왕지륜은 아르티어스를 교주가 의부로 삼았을 정도로 엄청난 무공을 지닌 선배고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늙고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아르티어스가 한번 힘을 쓰자 철영 부교주가 묵사발이 나지 않았던가? 그가 마음먹고 신법을 전개한다면 일반인들의 눈에는 귀신처럼 사라지는 것으로 보일게 분명했다. 문제는 기녀 의 대답 중에 ‘잘 안 들렸다’고 한 점이다.
“누군가가 어르신을 불러낸 것일까?”
천하에 그 누가 아르티어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왕지륜은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교주의 아버지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 아마 자신은 갈가리 찢겨 죽을 것이다.
잠시 방안을 서성거리던 왕지륜은 불안감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는 마을 주위를 빠르게 수색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종적을 찾지 못한 그는 점차 수색 범위를 더욱 넓혀 나갔다. 그러다가 산 쪽으로 다가갔을 때, 정상쪽에서 뭔가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빛이 번쩍 빛났다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왕지륜은 죽을힘을 다해 산 정상 쪽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런 그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구슬픈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 다.
“어르신~~, 어르신 어디 계십니까? 어르신~~.”
아르티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증거 인멸을 하려면 저놈까지 죽여야 한다. 더군다나 자신의 시중을 들던 호비트 계집아이들까지 죽여야 할 것이다. 아니, 자신이 왕지륜이라는 놈과 함께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아는 모든 놈들을 없애 버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 많은 호비트들이 한꺼번에 사라진다면 누구라도 의문을 가질 수밖 에 없으리라.
죽여 없애는 것도 문제였고, 그냥 놔두자니 그것도 문제였다. 더군다나 아들놈의 의형이라는 놈을 증거 인멸이라는 이유로 그냥 죽이는 것도 좀 그랬다. 그리고 무 엇보다 모처럼 들은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놈이 아니던가.
아르티어스가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 왕지륜의 구슬픈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더 이상 고민하고 있을 시간 여유마저도 없어지자 아르티어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만통음제를 둘러메고 허공으로 꺼지듯 사라졌다. 어딘가로 공간 이동을 한 것이다.
아르티어스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지륜이 도착했다. 아르티어스와 수석장로에게 쥐어터지며 사는 처지이기는 했지만, 그도 마교 내에서 한가락 하는 실 력자다. 그런 그에게 이런 어둠 따위는 수색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못했다.
왕지륜은 산 정상에 도착해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누군가 혈투를 벌였음이 분명한 수많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 설마 어르신에게 뭔가 변고가?”
다급한 마음에 주변을 샅샅이 살펴보던 왕지륜은 더 이상 아무것도 찾지 못하자 산 아래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양양성에 있는 교주에게 이번 일을 아뢰고 지원을 요청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