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3권 7화 – 여기가 개방 분타야? 마교 분타야?

여기가 개방 분타야? 마교 분타야?

소팔개가 헐레벌떡 달려 들어왔을 때, 독두개는 개 다리를 하나 구워 놓고 그걸 안주삼아 열심히 술을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소팔개는 주위를 둘러본 뒤 사람이 없음을 확인했음에도 안심이 안 되는지 다급하게 전음을 날렸다.

<큰일 났습니다, 타주님.>

하지만 독두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는 마시고 있던 술잔을 마저 깨끗하게 비운 후, 탐탁치 않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큰일? 큰일은 무슨 놈의 큰일. 뭐 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그딴 거 알아서 뭐 해? 자네도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이리 와서 술이나 마셔.” 독두개는 아예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사발에 술을 가득 따르더니 소팔개에게 권하는 것이었다.

<타주님, 제발 정신 좀 차리십쇼.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누가 그걸 몰라? 꺽! 젠장. 그 망할 새끼가 추린을 납치해 이리로 끌고 와서 고문을 했는데, 내가 지금 제정신으로 있게 생겼어? 이 사실이 밖에 알려지면 나는…, 나는 끝장이라구!>

독두개는 도저히 자신이 처한 현실을 참을 수 없었는지 다시금 사발을 번쩍 들어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소팔개는 독두개가 더 이상 술을 마시지 못하게 그의 팔 을 잡으며 다급히 말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지금 놈이 누굴 납치해 왔는지 아십니까?>

“뭐! 또 잡아 왔어?”

<황궁의 실세 중 실세라는 연공공을 잡아 왔단 말입니다!>

독두개는 술이 번쩍 깰 수밖에 없었다.

“뭣이? 지, 지금 그놈은 어디에 있나?”

<어디긴 어디겠습니까? 지하 창고에 있습죠.>

하루 빌어 하루 먹는 거지들 주제에 무슨 창고가 필요하겠는가 싶겠지만,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창고의 필요성이 있었다. 구걸해 온 돈을 모아 두는 데도 이용되었 지만 여름에는 서늘했기에 술을 저장하는 데 딱 좋았고, 추운 겨울밤에는 모두의 숙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물론 이곳 남경은 지하 창고에까지 들어가 추위를 피해야 할 정도로 추운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소팔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독두개는 꽁지에 불붙은 닭마냥 지하 창고를 향해 달려갔다. 종5품 추린만 하더라도 하늘이 아득해질 정도인데 권력의 실세인 연 공공까지 납치해 오다니, 이건 개방의 존립마저 위태로울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달려가는 독두개의 입에서 마치 비명과도 같은 욕설이 흘러나왔다. “이, 이런 개새끼! 날 아예 말려 죽이겠다는 거야!!!”

지하 창고를 향해 달려가는 독두개는 정말이지 혀를 깨물고 죽고만 싶었다. 극악무도한 마교 교주가 이곳에 등장한 이래, 그는 이곳 개방 분타를 마치 마교 분타라 도 되는 듯 애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그 사실을 잘 숨겨 왔지만 그게 언제 들통 날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지하 창고로 들어가는 입구는 분타의 뒤편 으슥한 곳에 있었다. 독두개가 다가가자 창고 입구 근처에 쪼그리고 앉아 히히덕거리며 얘기를 나누던 거지 둘이 화들 짝 일어나 인사를 건네 왔다. 독두개가 아끼는 술독들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기에, 평상시에도 경비를 세워 둘 필요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이곳에서 행해 지고 있는 교주의 만행이 밖에 새나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타주님.”

“그래, 별 이상은 없었느냐?”

“조금 전에 부타주님께서 들어갔다 나오신 것 외에 다른 출입자는 없었습니다.”

“그래, 수고들 하는구나. 나중에 술독 하나 줄 테니 근무 끝난 후에 나눠 먹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타주님!”

경비를 서고 있는 거지들과 잠시 한담을 주고받은 후, 독두개는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으며 독두개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쓸모없는 새끼들. 교주가 주구장창 들락거리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있는 주제에 이상이 없다고? 저런 밥버러지 같은 새끼들에게 수고했다고 술까지 처먹여야 하다니. 에고, 내 팔자야.’

남경 분타의 지하 창고는 꽤나 널찍했지만 바닥에 여러 가지 쓸모없는 것들이 널려 있어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 등잔이 요요한 빛을 뿜는 가운데, 누군가의 신음 성이 음산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끄으으윽, 끄응~”

신음성 사이로 음침한 교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비 대장군은 지금 어디에 있지?”

곧이어 남자의 목소리도 아니고 여자의 목소리도 아닌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기괴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그걸 네놈에게 말해 줄 이유가 없다.”

“호오, 아직 맛을 덜 본 모양이군.”

교주가 무슨 짓을 했는지 곧이어 뾰족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끼아아아악!”

“버텨 봤자 네놈만 손해야. 살아서 나가고 싶으면 빨리 불어. 혹시 대장군의 위치를 잘 모른다면, 저기 있는 돼지처럼 나한테 진실을 대신 말해 줄 사람을 알려 줘 도돼.”

교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처참한 비명성이 울려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을 즐기는지 교주의 말투는 음침하긴 했지 만 상당히 편안한 편이었다.

“어때, 이젠 말할 생각이 들었나? 버텨 봤자 소용없어. 그래 봐야 네놈 몸만 상한다니까…….’

“크흑! 네놈이 이러고도 무사할 성싶으냐?”

곧이어 교주의 그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오래 살고 싶지 않으니 제발 좀 죽여 봐. 지금껏 네놈과 같은 소리를 한 놈들은 엄청 많았는데, 단 한 놈도 실행을 하지 않고 있으니, 원….

그 말에 독두개는 자신이 능력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 교주의 머리를 박살 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어쩌다 한 번씩 이렇게 이죽거리는 말투로 말할 때는 정말 울화병이라도 생길 정도로 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그때 안쪽에서 교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들어왔으면 이리 올 것이지, 거기 서서 뭐 하고 있나?”

독두개는 어쩔 수 없이 교주에게로 갈 수밖에 없었다. 교주는 독두개가 고이 모셔 놓은 술독을 열어 입술까지 축이며 연공공을 닦달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 자 횃불 아래로 드러나는 전경은 참혹했다.

연공공은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손톱이 뽑혀 버린 것도 모르고, 그 손으로 땅바닥을 긁어 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누군가 접근하자 연공공은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그리고 새로 등장한 인물이 누구인지 곧바로 기억해 냈다. 황성사의 간부들 중 하나인 그가 이 곳 황도의 개방 분타주 독두개에 대한 보고를 받지 않았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연공공의 얼굴을 보고 있던 독두개는 그의 묘한 표정 변화에서 상대가 자신을 알아봤음을 느꼈다. 정보를 취급하는 단체에 오랜 시간 종사해 온 그였기에, 이런 부 분에 매우 민감한 신경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독두개로서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한 공포심을 느꼈다. 만약 저 망할 교주가 나중에 연공공을 풀 어 준다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회한 독두개는 짐짓 시치미를 떼고 느긋한 어조로 교주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셨습니까? 교주님. 원하시던 일에 대한 성과는 좀 있으셨습니까?”

얻어맞을까 봐 감히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독두개가 자신의 존재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묵향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독두개가 갑자기 살갑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자 놈의 저의를 알 수 없었던 묵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꽤 질긴 놈이라 아직까지는 성과가 없군.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걸 실토할 거야.”

“만약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하면 또다시 황궁에를?”

“그거야 알 수 없지.”

지금껏 당한 게 있었던 연공공은 독두개가 던진 먹이를 덥석 물었다. 사실 장시간 지독한 고문을 당한 연공공이 평정심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을 리 만무했다. “교주? 지금 교주라 했느냐? 그렇다면 네놈이 마교(敎)라는 단체의 수장이더냐?”

그 말에 묵향은 이죽거리며 대꾸했다.

“이런이런, 황성사의 정보력이 형편없는 모양이군. 마교가 아니라 천마신교(天摩神敎), 즉 마교(摩敎)지. 이쪽의 명칭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니, 가소로운 것들.” “큭! 이런 육시할 놈 같으니라구. 너 같은 극악무도한 놈이 교주로 있으니, 마교(魔敎)로 불리는 것이 아니겠느냐?”

육시(戮屍)란 이미 죽은 사람의 시체를 여섯 조각 내어 소금에 절여 각 처에 돌리는 극악한 형벌이다. 물론 그런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묵향이 아니다. 그는 곧 장 연공공의 얼굴을 밟고 지그시 힘을 가하며 으르렁거렸다.

“네놈이 아직까지도 자신의 처지를 잘 모르는 모양인데……. 본좌를 육시하기 전에, 본좌가 네놈을 먼저 육시할 수 있음을 명심해라.”

으지직.

얼굴이 땅바닥에 반쯤 파묻힐 정도의 엄청난 힘이었다. 연공공은 얼마나 고통이 심했는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렇게 말한 묵향은 잠시 연공공의 면상을 지 그시 노려보더니 툭 한마디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고문 도중에 죽어 버리면, 육시를 해서 그 조각들을 황궁에다가 뿌리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군.”

지금까지도 묵향에게 당하고 있는 분근착골 때문에 죽을 지경인데 그런 말까지 들으니 연공공으로서는 모골이 송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독두개가 구미가 당기는 듯 끼어들었다. 안 그래도 뒷탈이 염려스러운데 교주가 연공공을 죽여 준다니 기꺼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연공공의 목을 자르실 겁니까?”

“왜? 자네가 자르고 싶나? 뭐, 평상시에 맺힌 게 많았다면 육시하는 것쯤은 자네에게 양보하도록 하지. 지금 하는 꼴 보니, 몇 시진 안 기다려도 놈의 몸을 토막칠 수 있을 게야.”

연공공의 겉모습은 처참했지만 그보다 오랜 시간 가해 놓은 분근착골의 영향으로 인해 그의 근골은 더욱 엉망진창인 상황이었다. 아마 이곳에서 살아나간다고 해 도 과거의 무위를 되찾기 위해서는 최소한 6개월은 정양해야 할지도 몰랐다.

독두개로서야 자신의 정체를 알아본 연공공이 이곳에서 살아나가기를 원치 않기에 묵향의 제안에 구미가 당기는 듯 반색을 하며 물었다.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런 그들을 보며 연공공이 분통을 터뜨렸다.

“이, 이런 악독한 거지 새끼! 내가 네놈과 무슨 원수가 졌다고 그렇게 악랄하게 구는 것이냐?”

이왕에 엎질러진 물이었다. 독두개는 능청스레 말했다.

“교주님, 저놈은 척 봐도 절대로 비밀을 발설할 놈이 아닙니다. 그냥 죽여 없애 버리시죠. 제가 술술 불 만한 다른 놈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럴까? 안 그래도 워낙 입이 질긴 놈이라 짜증나던 참이었는데…….”

묵향이 슬그머니 자신에게 다가오자 연공공은 다급히 외쳤다.

“잠깐! 만약 내가 알고 있는 걸 모두 실토하면 살려 주겠느냐?”

묵향은 연공공의 몸에 가해 놨던 분근착골을 해제하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내가 보고 들은 바에 따르면 추밀사(樞密使)가 이번 일을 벌였다고 들었다.”

“추밀사?”

묵향은 독두개에게 고개를 획 돌리며 물었다.

“추밀사에 대해 알고 있는 대로 말해 봐.”

별로 말해 주고 싶은 심정은 아니었지만, 독두개는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알려 줬다. 추밀사가 명목상 군부의 수장이긴 하지만 실권은 거의 없다는 점, 현재 그의 입김으로 움직일 수 있는 군대라면 황군이 전부일 것이라는 정도였다.

“추밀사가 대장군을 없애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할 이유가 있을까?”

“그야 군권을 과거처럼 추밀원으로 집중시키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대장군일 테니까요. 악비 대장군이야말로 최대의 군벌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자신은 군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휘하의 장졸들이 모두 추밀원의 명령보다는 대장군의 명령만 듣고 있죠. 그게 바로 군벌이 아니고 뭐란 말입니까?”

“이제야 확실하게 꼬리를 잡았군.”

원하는 정보를 모두 얻은 묵향은 더 이상 이곳에서는 볼일이 없다는 듯 어딘가로 휙 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지하에는 연공공과 추린, 그리고 독두개만이 남았 다.

“끄으으윽!”

신음성을 흘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연공공. 그를 보며 한순간 독두개는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를 죽여 입을 막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그렇지 않으 면 개방은 마교 교주의 하수인이라는 지독한 오명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독두개의 눈빛이 일순 악독하게 변했고, 그 표정은 차갑게 굳어졌다.

“귀하가 이곳에서 살아나간다면 본방에 크게 위해를 가해 올 것이 분명하므로, 부득불 귀하를 처치하는 수밖에 없겠구려. 원망하려면 나보다는 저 망할 교주 새끼 를 원망하도록 하시오. 모든 일은 그놈이 이곳 남경에 왔기에 시작되었으니.”

독두개가 공력을 끌어올리며 치명적인 일격을 준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공공의 안색은 전혀 변동이 없었다. 도저히 탈출할 방법이 없으니 이미 삶을 포기한 것일까? 더군다나 그는 오랜 고문을 당한 후라 몸도 마음도 엉망인 상태였다.

독두개의 손이 번쩍하고 연공공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가 시전하고 있는 것은 개방이 자랑하는 최강의 장법 강룡십팔장(降龍十八掌)으로, 그 한 수에 연공공의 목숨을 앗아 버리겠다는 굳은 의지를 담고 있었다.

슈아아악!

삶을 포기한 듯 가만히 서 있던 연공공의 몸이 옆으로 슬쩍 움직였고, 놀랍게도 그 작은 움직임만으로 독두개의 일격은 옆으로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 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한 독두개의 눈에 두려움이 짙게 깔렸다. 그는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지만 연공공은 자신보다도 훨씬 뛰어난 고수였다.

퍽!

단 일격에 독두개는 피를 토하며 쭉 뻗어 버렸다. 극심한 내상을 입은 것이다. 독두개의 실력이 그렇게 형편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상대가 교주의 고문으로 인해 파리 한 마리 때려잡을 힘도 남아 있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상대를 과소평가한 것. 그게 그의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쿨럭! 별 쓰레기 같은 것이 감히…….”

연공공은 우선 추린에게로 다가갔다. 추린도 자신과 같이 극심한 고문을 당한 상태라 함께 탈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추린은 무공도 익히지 않 은 몸이니 상태는 더 심각할 것이다.

“이봐, 어서 정신을 차려 봐.”

축 늘어져 있던 추린은 연공공의 채근에 억지로 눈을 떴다.

“우, 우상시 공공……?”

추린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연공공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의 입에서 예의 날카로우면서도 살기에 가득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본관이 머지않아 황병을 데리고 돌아올 것이니, 그때까지 죽은 척해서 저들의 눈을 피하고 있어라.”

“아, 알겠습니다.”

왠지 모를 한기를 느낀 추린은 연공공을 마주 보지 않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귓가에 다시 연공공의 말이 들려왔다.

“크크, 네놈이 예서 죽는다면 본관은 억울해서 잠도 못 잘 것이야. 반드시 돌아와 네놈의 주리를 틀고 말 것이다. 부디 꼭 살아남아 있어라.”

“그, 그게 무슨……?”

추린은 그제서야 자신이 연공공을 밀고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걸 연공공이 눈치 챘다는 사실도 추린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몸을 일으켜 무 릎을 꿇고 애걸하기 시작했다. 그가 알고 있는 연공공은 한 번 앙심을 품으면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상대를 파멸시키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제, 제발 용서를…….”

“이번에 아주 좋은 것을 배웠다. 분근착골이라는 것을 말이다. 본관이 직접 겪어 보니 네놈에게도 반드시 맛보여 주고 싶구나. 그런 연후 네놈의 시체를 갈가리 찢 어 버릴 것이다!”

연공공은 추린의 혈도를 짚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밀어 넣은 후, 재빨리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위에 도착한 그는 문에 난 틈새를 이용하여 밖을 살펴보려고 노력 했다. 하지만 문짝이 워낙 두껍고 튼튼하게 만들어진 것이라, 밖의 상황을 엿보기가 아주 힘들었다.

이때 밖에서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뭣 때문에 이렇게 오랫동안 나오지 않는 거지?”

“그야 모르지. 안에서 한잔 꺾고 계신지 말이야.”

“빌어먹을! 타주님이 취해 버리면 약속하신 술 한 동이도 그냥 날아가 버리는 거 아냐?”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지 말고 네가 한번 들어가서 살펴 봐.”

“미쳤냐? 그러다 걸리면 경을 치게 될 텐데…….’

목소리로 봤을 때 문 앞에서 떠들어 대는 놈은 단 두 명. 둘뿐이라면 자신의 이런 형편없는 몸으로라도 어떻게 될 수도 있을 듯했다. 연공공이 문을 살며시 열었을 때 타구봉을 들고 문 앞에 서 있던 거지 두 명은 독두개가 나오는 줄 알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고개를 조아려 인사를 하였다.

“볼일은 끝나셨습……..

그리고 그것은 연공공에게 최고의 기회를 제공해 줬다. 연공공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거지들을 덮쳤다.

퍼퍽!

영문도 모르고 기습 공격을 당한 거지들의 몸이 쓰러지고 있을 때, 연공공은 이미 밖을 향해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 속도로 경공술을 전개하고 있었다.

* * *

황궁과 무림맹의 협정에 따라 웬만한 문파들은 다 남경을 떠났다. 공식적으로 무장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약육강식의 세계를 살고 있는 무림인들에게 꽤나 큰 부담 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불리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경에 남아 있는 문파들이 몇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무영문이다. 정보를 취급하는 무영문 이 이곳 남경을 포기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무영문의 남경 분타는 부호의 저택으로 위장되어 있었고,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이 저택이 왕 노야(老)라는 사람 좋은 은퇴상인의 집으로만 알고 있었다. 왕 노 야는 오랑캐들과 국경 무역을 통해 상당한 부를 쌓았으며, 지금은 사업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이곳 황도에 자리 잡은 뒤 만년을 보내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집에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려도 이웃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아무리 사업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정정했기에 음으 로 양으로 아들이 하는 사업을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저택의 주인으로 알려진 왕 노야는 후덕한 인상에 살집이 넉넉한 몸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무슨 급한 일이 있는지 저택 안 깊숙이에 위치한 별채를 향해 서둘 러 발걸음을 옮겼다. 별채 쪽으로 다가가자 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무사들이 재빨리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노야.”

왕 노야는 그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별채의 문을 열기 전에 다시 한 번 주위를 쓱 둘러봤다. 그의 타고난 조심성 때문에 이제는

습관처럼 되어 버린 행동이었다. 그는 문 앞에 입을 가져가 속삭이듯 말했다.

“왕 타주입니다.”

여인의 아름다운 음성이 안에서 가늘게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예.”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곱게 차려입은 중년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탁자에 쌓여 있는 문서를 훑어보는 중이었다. 중년 여인은 문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요? 왕 타주답지 않게 꽤나 서두르는 것 같던데..

별채 근처에서 왕 노야의 움직임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이런 소리를 하는 것으로 보아 별채 밖에서 서둘러 이쪽으로 걸어 들어온 그의 발걸음 소리를 들 은 모양이다. 겉보기와 달리 중년 여인은 상당한 고수였던 것이다.

“큰일 났습니다, 문주님.”

큰일이라는 말에 중년 여인은 문서에서 눈을 떼, 왕 노야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장군을 찾아냈나요?”

“그게 아니라 교주가 사고를 쳤습니다.”

“사고라니…, 그가 연공공을 죽여 버리기라도 했단 말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왕 노야는 방금 전까지 개방 분타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보고했다. 그의 보고 내용은 너무나도 정확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왕 노야가 바로 중원 최고 의 정보 조직이라고 불리는 무영문의 남경 분타주였던 것이다.

왕노야는 묵향이 이곳 남경에 도착했을 때부터 그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다른 곳 같았으면 아무리 그들의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묵향의 뒤를 밟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남경이다. 숨기 좋은 엄폐물도 많았고, 뭣하면 수많은 인파들 속에 섞여 들기만 해도 찾아내기 힘들었다. 더 군다나 묵향이 추격당할 가능성을 없앤답시고 장거리를 전력 질주할 공간도 없었다.

“그렇다면 연공공이 탈출했단 말인가요?”

“예, 교주가 어딘가로 사라지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갇혀있던 창고에서 탈출했다고 합니다. 그를 살려 둔다면 일이 복잡하게 꼬일 수도 있으니 없애 버리는 것 이 어떻겠습니까? 문주님.”

왕 노야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골똘이 생각에 잠기는 아름다운 여인. 이 중년 여인이 바로 옥화무제의 딸이며, 현 무영문의 문주인 매설란(梅雪蘭)이었다. 매설 란의 딸이 이미 중년의 여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변함없는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녀 역시 상당한 고수임에 확실했다.

한참 고심을 한 후, 결론을 내렸는지 매설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연공공은 황실을 수호하는 비밀 세력인 친황대의 수장이에요. 가뜩이나 황권이 취약한 상황에서 그를 죽일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만큼 지독하게 당했으니 교주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뽑아들겠죠.”

“그렇게 되면 교주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왕 노야의 말에 매설란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황실에 그만한 힘이 있을까요? 교주를 없애는 것이 그렇게 쉬웠다면 어떻게 그가 아직까지 살아 있을 수 있겠어요.”

“그렇다면 그가 살아서 황궁에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명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매설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도와줄 필요까지 있을까요?”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개방 분타에 있는 모든 개방도들이 지금 연공공을 척살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흐음….”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매설란이 마음을 굳힌 듯 고개를 들며 명령했다.

“사람들을 보내 연공공이 무사히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개방과의 충돌은…….”

“연공공 같은 인물을 이런 일로 죽게 놔둘 수는 없어요.”

“알겠습니다, 문주님.”

왕 노야는 서둘러 별채 밖으로 나가 대기하고 있던 분타원들 중 한 명에게 뭐라 지시를 내렸다. 그와 동시에 10여 명의 인물들이 어디론가 급히 달려갔다. 아마 연 공공의 탈출을 돕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리라.

왕 노야가 다시 방 안으로 돌아오자, 매설란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교주가 어디로 갔는지는 보고가 들어왔나요?”

“꼬리를 붙여 놓았으니 조만간 연락이 올 겁니다.”

이때 밖에서 약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왕 노야가 문을 열어 주자, 문사 차림의 사내 하나가 뭔가 보고를 한 후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교주가 추밀사의 저택으로 들어갔다는 보고입니다.”

사내의 보고가 매설란에게는 예상 밖이었던 모양이다.

“추밀사? 그렇다면 추밀사가 대장군을 납치했다는 말인가요?”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현재 최대의 군벌을 구축하고 있는 악비 대장군만 없어진다면, 지금의 군벌 체제를 타파하고 다시 한 번 과거와 같이 추밀원이 군권 을 움켜쥘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매설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확신 어린 어조로 대꾸했다. 악비 대장군이 실종되었을 때, 그녀는 그런 가능성에 대해서도 이미 조사를 했었던 것이다. “그건 말도 안 돼요. 만약 악비 대장군이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현재 추밀원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군권을 재편할 수 없어요. 오히려 대장군을 추밀원이 없앴다는 걸 군벌들이 안다면, 위협을 느낀 그들이 일제히 금나라로 넘어가 버릴 우려마저 있죠.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추밀원에서 일을 벌일 수 있을까요?”

그 말에 왕 노야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매설란도 왕 노야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마 연공공은 추밀사를 의심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가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매설란은 이번 악비 대장군 납치 사건을 황궁 쪽에서 일으킨 일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하지만 추측만 했을 뿐, 본격적인 조사를 지시하지는 않 았다. 왜냐하면 황궁에는 황성사라는 첩보 단체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혹시라도 무영문이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움직이다 황성사에 포착이라도 당한다면, 황궁과 상당히 껄끄러운 관계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심증은 있었지만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묵향이 황성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이내 온 황성 내를 휘저어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이용해 서 무영문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껄끄러운 황성사의 시선은 묵향에게로 집중될 것이 틀림없으니 그 틈에 악비 대장군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판단에 서였다. 덕분에 무영문은 꽤나 많은 정보를 끌어 모아 놓은 상태였다. 매설란이 내린 결론도 그런 정보들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