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4권 10화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철영이 끌고 온 2개 전투단에 꽤나 커다란 타격을 가했을 뿐 아니라, 습격해 온 적의 전력에 비했을 때 자신이 입은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기에 장인걸은 꽤나 기 분이 좋았다.
더군다나 그 불쾌하기 짝이 없는 꼬락서니를 하고 있던 옥관패 놈까지 처치해 버렸으니 더욱 기분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와중에 연경에서 구양운 장로가 1천에 달하는 고수들을 이끌고 탈출해 왔다. 그의 전과를 보고받은 장인걸은 너무나도 기분이 좋아 즉석에서 주연(酒宴) 을 베풀었을 정도다.
군중이라 무희(舞姬)를 불러들일 수 없다는 점이 아쉽기는 했지만, 몇몇 고수들이 지닌 바 무공을 자랑하며 흥취를 돋웠다. 묵향을 없애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 었지만, 놈이 이끄는 최정예를 절진으로 끌어들여 거의 몰살시켜 버렸다고 하니 축배를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좋던 그의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데는 채 며칠도 걸리지 않았다. 혼전의 와중에 황제가 행방불명되었다는 편복대의 보고를 전해 들은 장인걸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즉시 구양운 장로 이하 소수의 수하들만을 거느린 채 연경으로 달려갔다.
연경에 도착한 장인걸은 묵향 일당이 저질러 놓은 참상에 놀라움을 감추기 힘들었다. 근위병들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봉황로를 중심으로 연경의 4 분에 1에 가까운 면적이 불에 탔다.
그 와중에 수많은 백성들은 물론이고, 고관대작들까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놈들의 무자비한 공격에 재수 없게 휩쓸리면 그걸로 생을 마감해야만 했던 것이다. 장인걸은 일단 구양운 장로가 황제를 민가 쪽으로 피신시켰다고 했기에 그 일대의 폐허들을 집중적으로 파헤치도록 지시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사방에 널려 있는 시체들을 치우는 작업을 병행해야만 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죽었고, 무엇보다 사지가 뒤틀린 채 고통스런 얼굴로 죽은 근위병들의 시체가 온 사방에 널려 악취가 진동을 했기 때문이다.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이었지만 장인걸은 이런 모습에 새로운 가능성을 깨달았다.
“혹시 제령단을 사용했나?”
장인걸의 물음에 구양운 장로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교주님. 될 수 있으면 사용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속하의 얕은 소견으로는 병사들이 겁에 질려 날뛰면 도저히 제대로 된 전투를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 하여, 제령단을 병사들에게 배포하라고 지시를 내렸사옵니다.”
“흠, 이게 바로 제령단의 힘인가?”
혈교도 제령단을 사용하기는 했었지만, 이렇듯 중무장을 한 군인들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죽창이나 낫, 도끼 따위를 든 백성들을 이용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장인걸은 제령단을 후유증만 심한 형편없는 약물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편복대주가 제령단을 양산하겠다고 말을 꺼냈을 때도 괜한 짓을 한 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그런데 오늘 전투의 흔적을 보니 그게 아닌 것이다. 장인걸은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지 마치 그 당시 이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짐작할 수 있었다. 뭘 생각 했는지 혀를 끌끌 차던 장인걸은 옆에 서 있는 구양운 장로에서 슬쩍 물었다.
“자네 중무장한 병사 1천 명과 싸워 승리할 수 있겠나?”
갑작스런 질문에 구양운 장로는 어리둥절했지만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쉬운 일이옵니다, 교주님. 몇 명만 죽여 없애도 나머지는 다 도망칠 게 뻔하지 않사옵니까?”
“만약 그들에게 제령단을 먹였다면 어떻겠나?”
이번에는 조금 어려운 문제였는지, 구양운 장로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어렵기는 하겠지만…….”
“그렇다면 병사들이 1만 명이라면?”
구양운 장로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때 구양운 장로도 깨달았다. 그 엄청난 대폭발에서 탈출한 묵향 이하 마교도들의 몸 상태를 추 정해 본다면, 제령단을 복용한 5만에 달하는 근위병들과의 싸움은 그야말로 그들을 극한의 상황으로까지 몰아붙였을 거라는 걸 말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전투를 피해 도망칠 수도 없었다. 중상자들이 워낙 많았을 테니까. 물론 그 중상자들을 모두 포기한다면…, 그랬다면 이토록 처절한 전투가 연경 시내에서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장인걸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탈출할 게 아니라 여기 남아 동정을 살폈어야 했어.”
구양운 장로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장인걸은 아쉬움에 혀를 차면서도 계속 입을 열었다.
“쯧쯧, 근위병들과의 전투에 지친 그들을 덮쳤다면, 어쩌면 놈의 목을 벨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군.”
충분히 가능한 말이다. 일반 병사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제령단을 복용하여 두려움과 공포를 잊은 병사들을 앞세워 끝없이 압박하다 보면, 놈들을 전멸시키는 것 도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놈들이 신이 아닌 이상 치열한 전투에 언젠가는 지칠 것이고, 무엇보다 놈들은 모두 다 크고 작은 부상을 입지 않았던가.
구양운 장로는 자신이 평생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한 기회를 어이없이 놓쳤음을 깨달았다.
“속하의 우둔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구양운 장로의 모습에 장인걸은 아쉬운 표정을 애써 감추며 입을 열었다.
“아닐세. 제령단의 위력을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소득은 있었던 일전이었네.”
이미 끝난 일을 가지고 계속 수하를 책망하기 뭐해 이런 식으로 말하는 장인걸이었지만, 그의 가슴에는 진한 아쉬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연경에서의 시가전이 남긴 피해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채 피신하지 못한 수많은 고관대작들이 난전의 와중에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국가의 중추를 맡 고 있던 인재들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것이다.
병사들도 많이 죽었지만 그건 다시 징집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국정을 운영하던 이들의 빈자리는 그렇게 쉽게 메울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런 혼란을 틈타 권력을 쥐어 보겠다고 기어 나오는 놈들로 인해 장인걸은 더욱 미칠 지경이었다. 지방에서 계집 엉덩이나 두드리고 있던 놈들이 어떻 게 연경 참사의 소식을 알았는지, 연경으로 달려와 은근슬쩍 주저앉아 세를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구다 황제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물론 예전에는 몇 명 더 있었지만 권력의 암투 중에 사라져 갔고, 지금은 세 명만이 살아남았다.
황제가 실종되자 권력의 냄새를 맡은 간신배들은 그 황자들에게 빌붙었고, 그들은 각자 마치 자신이 황제라도 된 듯 거들먹거리며 노골적으로 세력전을 펼치기 시 작했다. 아직 황제의 시신도 찾아내지 못한 상황에서 말이다.
성질 같아서는 몽땅 다 목을 베어 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놈들의 중심에는 아구다 황제의 부인들과 아들들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는 장인걸 대원수라고 해도 황족만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던 것이다.
수색을 시작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장인걸의 정신이 아득해질 비통한 보고가 전해져 왔다. 드디어 황제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불에 반쯤 타 버렸기에 생전의 모습을 알아보기는 어려웠지만, 시체가 지니고 있는 소지품을 통해 그가 황제라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
보고를 받은 장인걸은 처음에는 멍하니 있다,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며 한 서린 신음 소리를 흘려냈다.
“크흐흑! 벗이여, 그토록 자네가 살아 있기를 바랐건만. 이런 망할 새끼! 네놈이 끝까지 나를 괴롭히는구나.”
장인걸은 친우의 죽음에 비통함을 금치 못했지만, 편복대주는 냉철하게 작금의 현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장인걸이 황제의 죽음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이, 만약 장인걸과 사이가 좋지 못한 아구다의 아들들 중 하나가 황제로 옹립되기라도 하면 큰일인 것이다.
편복대주는 장인걸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황제 폐하의 죽음에 슬퍼하시는 교주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송구스러우나, 지금은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할 때이옵니다.”
너무나도 기가 막힌 탓이었는지 장인걸은 평소와 달리 절제력을 잃어버리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크윽! 비명에 간 친우를 위해 술 한 잔 바칠 시간조차 낼 수 없다는 말이냐?”
“송구스럽지만 시기가 너무 좋지 않사옵니다.”
편복대주의 말에 장인걸은 냉정을 되찾았다. 힘이 있어야 복수도 할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장안걸에게 있어서 가장 큰 힘은 금나라였다.
묵향에 대한 복수심에 이를 으드득 갈며, 장인걸은 차가운 표정으로 편복대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본좌가 해야 할 일이 뭐냐?”
“지금 당장 우퀴마이(吳乞買) 발극렬(勃極烈)을 만나시는 게 좋겠사옵니다.”
완옌 우퀴마이는 아구다의 동생이었다.
“그의 아들들이 없는 것도 아닌데 우퀴마이를 황제로 삼자는 말이냐?”
“황자들은 교주님을 좋아하지 않사옵니다. 예전부터 교주님께 너무 많은 권력을 주는 게 아니냐고, 걸핏하면 선황제께 푸념하지 않았사옵니까? 그들 중 하나가 황 제가 된다면 사사건건 간섭해 올 게 뻔하옵니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명목을 들어 교주님의 권력을 축소하려고 들겠지요.”
지금까지 봐온 황자들을 떠올리자 그럴 가능성이 아주 컸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장인걸은 이윽고 마음을 굳혔는지 편복대주에게 명령을 내렸다.
“알겠네. 지금 당장 우퀴마이 발극렬에게 사람을 보내어, 오늘 밤 은밀히 본좌가 만났으면 한다고 전하도록 하게.”
“존명!”
고개를 조아린 후 밖으로 나가려고 하던 편복대주는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다시금 뒤돌아왔다.
“묵향 그놈에 대한 복수는 속하에게 맡기시고, 교주님께서는 혼란한 정국을 최대한 빨리 수습하시는 데 전념을 다하시옵소서.”
그 말에 뭔가 느껴지는 게 있었는지, 장인걸은 기대에 찬 시선으로 편복대주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비록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편복대주지만
복수심이라는 감정에 휘둘리는 자신의 모습을 수하에게 보이기 싫었던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
“눈에는 눈이라고 했사옵니다. 놈이 교주님의 가장 아끼시는 친우를 죽음으로 몰고 간 만큼, 교주님께서도 놈이 가장 아끼는 것을 없애는 것이 가하지 않겠사옵니 까?”
그 말에 장인걸의 고개가 편복대주에게로 획 돌아갔다. 그의 두 눈은 분노로 붉게 불타고 있었다.
“놈이 가장 아끼는 것?”
“예, 천지문에 있다는 놈의 딸을 납치하는 것이옵니다. 만통음제를 이쪽에서 잡고 있다는 말에 그토록 이성을 잃었으니, 딸을 납치해 온다면 과연 어떻게 되겠사 옵니까?”
순간, 장인걸의 눈동자가 무시무시한 광채를 뿜었다. 지금 심정 같아서는 묵향에게 복수만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손이나 다리를 잘라 달라고 해도 서슴없이 주고 싶 은 장인걸이었다.
“크크크,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로군.”
잠시 묵향이 딸을 잃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흡족한 웃음을 터트리던 장인걸은 불쑥 편복대주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놈이 자신의 딸내미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하지 않고 있을 텐데, 자신 있느냐?”
송나라의 핵심 전력이 몰려 있는 곳이 바로 양양성이다. 그리고 납치하려고 하는 소연이 있는 곳도 양양성이다. 그 말은 곧 소연을 납치한다는 것이 그렇게 녹록하 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복대주는 뭔가 복안이 있다는 듯 자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물론이옵니다, 교주님. 대신 한 가지 허락을 해 주셔야 할 게 있는데…….”
* * *
그 무렵 묵향이 갑작스럽게 일으킨 대규모 전투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옥화무제는 허탈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교주가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건 진작에 눈치 채 고 있었지만 설마 연경을 칠 줄이야…….
“이, 이게 사실인가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태상문주님. 교주가 직접 ‘1종대를 이끌고 연경을 쳤다고 합니다. 연경의 중심가인 봉황로 일대가 완전히 잿더미로 화했고, 미처 피신하 지 못해 죽은 고관대작도 한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황제까지 참살당했다는 정보도 있었습니다.”
놀라움에 옥화무제의 커다란 눈이 조금 더 커졌다.
“황제까지 말인가요?”
“예.”
옥화무제는 골치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지긋이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특급살수 몇 명 정도 보낼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완전히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네요. 지금까지 들어온 정보를 종합해 보면 처음부터 황제를 노린 것이었어 요. 하긴 그랬으니 황제에 대한 정보를 원했겠지만…….”
그 말에 총관은 놀라움을 감추기 힘든 모양이다.
“그렇다면 황제가 죽었다는 게 사실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에요. 교주가 어떤 인간인데 설마하니 그냥 돌아왔겠어요?”
이렇게 대답한 옥화무제는 갑자기 아름답게 세공된 부채를 꺼내 살랑살랑 부치며 계속 말을 이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마교의 단독 행동에 열기가 치미는 모양 이다. 한마디만 언질을 해 줬어도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을 텐데..
“며칠 전 마교의 ‘2종대’와 ‘3종대가 남양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다는 정보가 바로 그 때문인 게 분명해요. 그러니까 연경을 치기 위한 양동 작전인 셈이죠. 장인 걸이 연경 쪽으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러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총관은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을 표시했다.
“그 정도 전력을 투입할 거면서 왜 무림맹 쪽에는 협조를 구하지 않았을까요? 그게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 말이 나오자마자 ‘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옥화무제의 손에 쥐고 있던 부채가 박살이 나 버렸다. 짜증이 난 옥화무제가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준 것이다. “한마디라도 이쪽에 언질을 줬다면 장인걸에게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었는데…….”
그녀가 아쉬워하는 것은 바로 빈집털이였다. 장인걸의 모든 이목이 연경과 남양에 쏠려 있었기에, 그의 주력이 빠져나간 노하구는 그냥 방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마교와의 전투가 벌어졌을 때 양양성의 무림인들을 동원해 노하구를 치기만 했어도 손쉽게 엄청난 전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게 아닌가.
이런 절호의 기회를 두 눈 빤히 뜨고 그냥 놓친 옥화무제는 아쉽다 못해 화까지 치밀었다. 한참 동안 씩씩거리던 옥화무제는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난 듯 총관에게 물었다.
“무림맹에는 알렸나요?”
“예, 태상문주님. 문주님께서 정보를 입수하는 즉시, 무림맹에 알리라는 명령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그제서야 옥화무제는 썩은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호호, 보고를 받은 맹주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게 정말 아쉽군요. 내가 그렇게 왜군을 건드리지 말라고 조언했는데…….”
* * *
옥화무제의 예상대로 그 보고를 접한 맹주의 얼굴은 그야말로 똥색으로 변해 있었다.
“뭣이? 그 말이 정녕 사실이란 말이냐?”
노성을 지르는 맹주의 수염이 방금 자신이 들은 보고 내용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부르르 떨렸다.
보고를 올리던 감찰부주는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열었다.
“예, 맹주님. 처음 그 정보를 보내온 곳은 무영문이었는데, 워낙 정보의 내용이 황당하여 이게 사실인지 알아 보라고 지시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도 채 안되어 개 방 쪽에서도 같은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양쪽의 정보를 종합해 보면 연경의 절반이 날아갈 만큼 엄청난 전투였다고 합니다. 당시 전투로 인해 금의 중추를 이루고 있던 대신(大臣)들까지도 상당수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영문 쪽의 정보에 따르면 어쩌면 황제까지도 전란의 와중에 사망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답니다.” 그러자 청호진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 사제. 마교에서 황제를 암살할 거라는 정보까지 금나라에 은밀히 흘려줬건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혹시 정보가 제대로 그리 흘러가지 않은 게 아닌가?”
“교활하기 짝이 없는 마교 놈들이 남양의 식량 저장고를 치는 척하며 장인걸의 시선을 잡아 놓고는 그사이에 연경을 급습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지간한 전력으로는 연경 공략이 힘들었을 텐데…….”
“지금까지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마교 교주가 직접 이 작전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특급 고수만 2천 명 이상이 동원된 듯합니다. 금나라가 큰 피해를 입었듯 마교 쪽 또한 그 피해가 상당하다고 합니다.”
그 말에 청호진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허, 도대체 교주 그놈이 미친 게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일을?”
청호진인이 어이없어 할 만도 했다. 사실 그 정도 규모의 대규모 전투를 계획하고 있었다면, 단독으로 할 것이 아니라 무림맹에 협조를 구했어야 옳았다. 그편이 훨씬 피해가 적을 건 당연한 이치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교가 혼자 움직인 것은 그 피해를 모두 감수하겠다는 의지였다. 더군다나 사지(死地)라 할 수 있는 연경에 교주가 직접 뛰어들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청호진인이 고개를 내젓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자 한쪽에서 잠자코 말을 듣고 있던 만수진인이 입을 열었다. 왜군을 전멸시키고 돌아온 그는 혹시 있을지도 모를 마교의 반격에 대비해 무사들을 해산시키고 않고 맹에서 대기 중인 상태였다.
“아니, 사형들. 마도 놈들끼리 서로 치고받고 싸웠는데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십니까? 양쪽 다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면 오히려 우리 쪽에서는 좋아해야 할 일 이 아닙니까?”
감찰부주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사제, 우리 정파의 근간이 뭐라 생각하는가?”
갑작스런 질문에 만수진인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너무나도 뻔한 질문이라 대답하기가 오히려 곤란했던 것이다.
“정(正)과…, 협(俠)이 아닐는지요.”
“협의니 정의니 말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대의명분(大義名分)일세. 현재 이 상황은 마교가 피 흘리며 공을 세우고 있을 때, 우리는 그런 동맹군의 뒤통 수나 치고 있었다는 말이 되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맹주는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이 소식이 밖으로 퍼져 나가지 못하도록 정보를 통제할 수는 없겠는가?”
하지만 감찰부주는 어두운 안색으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맹주님. 전투가 벌어진 연경은 본맹의 힘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곳입니다. 아무리 정보를 틀어막으려고 해도 전혀 방법이 없습니다.”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특급정보라면 오히려 틀어막는 게 쉬웠다. 그걸 알고 있는 사람들을 회유하거나, 그게 힘들면 없애 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연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또 그동안 연경을 들락거린 사람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을 텐데 그들을 모두 어떻게 처리한단 말인가?
“허허, 이거 참…, 일이 참으로 난감하게 되었구나. 그렇다면 마교의 반응은 어떻던가?”
무림맹에서 무사들을 보내 왜군을 친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아직까지 아무런 반응도 없습니다.”
사실은 마화가 의도적으로 묵향에게 전해지는 정보를 차단해 버려 아직까지 왜군에 대한 일을 보고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무림맹으로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는 마교의 태도에 답답함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무슨 반응을 보여야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을 게 아닌가. 동맹 관계를 깨고 적으로 돌아서든지, 아니면 황실의 압력에 어쩔 수 없었노라고 정중하게 사과를 하든 지 말이다.
한동안 회의를 계속하긴 했지만 마교의 반응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회의가 끝난 뒤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자 맹주는 머리가 아픈지 이 마를 짚으며 신음성을 흘렸다.
“끄응,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평생을 무공을 연마하며 살아온 태극검황이다. 더군다나 무당산에서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며 도를 닦는 데 정진해 왔던 그였기에 상대적으로 음모와 술수에는 취 약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빈도에게 검을 들고 싸우라고 한다면…….?
이 순간, 태극검황은 전대 맹주였던 옥청학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그는 공동파 출신이기는 했지만 속가 출신이었기에 이런 쪽에 꽤나 능수능란하게 대처했다. 그 때는 별거 아닌 것처럼 여겼었는데 막상 자신이 겪어 보니 보통 머리가 아픈 게 아닌 것이다.
상념에 잠겨 있던 맹주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옥진호 장로를 그때 쳐 버리는 게 아니었어. 이런 쪽에는 그가 꽤나 소질이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