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4권 12화 – 그런 사람 없다니까!

그런 사람 없다니까!

현천검제를 성문 앞까지 바래다 준 후 소연은 천지문으로 갔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제자들은 먼발치에서 그녀를 알아보고, 놀라서 달려와 인사했다. 지금까지 아 무런 소식도 없이 행방불명된 그녀였기에 그들의 놀라움은 더욱 컸던 것이다.

보고를 듣고 달려 나온 임연은 소연의 귀환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사매,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느냐? 많이 걱정했었다.”

설명을 하려면 말이 길어질 것 같았고, 또 어느 정도까지 말을 해야 할지 신경이 쓰였기에 소연은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사형께서는 언제 오셨어요?”

“그때 전투 이후, 문주님의 명을 받들어 네 대신 이곳의 문도들을 지휘하러 왔다. 여기 도착해 보니 네가 크게 다쳤다고 하더구나. 그래, 몸은 좀 어떠냐? 걱정과는 달리 크게 불편해 보이지 않아 우선은 안심이 된다만…….?

하지만 소연은 대답을 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사제는…….”

그러자 임연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말을 의도적으로 막았다.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 듯하구나. 안으로 들어가자.”

“예.”

임연은 집무실로 들어가 소연에게 자리를 권한 후, 시비들에게 차를 내오라고 일렀다. 그런 다음 전음으로 그간 사정을 빠른 어조로 설명해 줬다.

<그렇다면 사제를 내보내셨단 말인가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는 본문이 싫어서 떠난 걸로 되어 있어. 그런 그가 여기서 문도들을 이끌고 있었다는 게 알려진다면 자칫 문주의 권위가 흔들릴 수도 있음이야.>

진 사제의 팔자가 참으로 기구하다고 생각하며 소연은 슬픔을 감추기 힘들었다.

“그렇군요.”

“문주께서는 다시금 3백 명의 무사를 증파하셨다.”

“3백 명씩이나 말인가요?”

천지문은 전란이 일어나기 전에도 고작 2천 정도의 문도밖에 가지지 못한 중소규모의 문파였다. 그런데 이번에 5백이 죽어 나가자 새로이 3백을 증원했다니. 문주 의 의지는 명확했다. 그는 이번 전쟁을 통해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천지문이 온 무림에 인정받게 되길 꿈꾸는 모양이다.

“얘기를 들으니 무림맹에서 만수 장로라는 사람이 왔었던 모양이야.”

“수자 돌림이라면…, 현 무당파 장문인보다도 한 등급 높은 항렬이라는 말인가요?”

“맞아, 장문인의 사제라고 하더군. 그자가 와서 문주를 구워삶아 놓은 모양이야. 멋들어진 검 한 자루를 선물하며 ‘맹은 천지문이 흘린 피를 결코 잊지 않겠소’라 고 한 그 한마디에 문주는 이성을 잃은 거지.”

자신이 할 말은 다 했다고 생각했는지 임연은 착잡한 표정으로 소연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뭐, 우리로서야 문주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니. 그 얘기는 이쯤에서 접기로 하고…, 대체 지금까지 어디에 있다가 온 거냐? 녀석의 말로는 마교에 갔다고 하던데.”

“예.”

소연은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얘기하지는 않았다. 마교의 중지(重地) 중의 중지라는 천마동에 들어갔었던 일. 그리고 반쯤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신묘한 의술을 지닌 할아버지와의 만남 등등…..

이 모든 얘기를 하려면 교주가 왜 자신에게 그토록 엄청난 호의를 베푸는지를 먼저 밝혀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대충 꾸며서 임연이 납득할 수 있는 정도로만 얘기했다. 어딘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교 분타로 안내되어, 신묘한 의술을 지닌 마교 고수에게서 치 료를 받았다고 말이다.

* * *

천지문에 복귀한 소연은 시간이 날 때마다 마화를 찾아가 얘기를 나누며 놀았다.

지금까지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적당한 수준의 친분 관계만 유지했다면, 이제는 꼭 자매처럼 깊은 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소연은 마화가 자신의 아 버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몇 년 정도 그리워하다가 자신의 감정을 접어 버린 그녀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하기 힘든 사랑을 그녀는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런 말 없이 행방마저 묘연해져 버 린 아버지를 무려 20여 년씩이나 기다리고 있었다니…….

소연의 조언에 따라 마화의 옷차림은 조금씩 여성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며칠 전, 묵향이 자신을 바라보며 기겁초풍한 걸 보면서 그녀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묵향 도 목석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아름답게 꾸미면, 그걸 묵향도 알아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이후 그녀의 옷차림은 중이 고기 맛을 보면 빈대까지 잡아먹는다는 말처럼, 때에 따라서는 짙은 화장까지 불사할 정도로 무서운 변신을 하고 있었다.

조령 역시 그런 마화에게 자주 찾아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조령은 부잣집 딸답게 옷이라든지 장신구에 대한 안목이 무림인인 그녀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탁 월했다.

무조건 처바르기만 하면 좋은 줄 알았던 마화의 화장술도 조령의 조언에 의해 훨씬 맵시있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그녀들과 조령의 사이가 한층 가까워지 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봄기운이 완연해져 겨우내 얼어붙어 있던 나무들이 꽃봉오리를 피우기 시작하자, 조령은 소연에게 설취를 만나러 가지 않겠느냐며 꼬드겼다.

설취는 그때까지도 만현에 남아 사라진 사부의 흔적을 찾기 위해 주변을 샅샅이 뒤지는 중이었다. 만통음제를 장인걸이 납치해 구금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묵향은 소문이 그녀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차단해 버렸다.

그래서 설취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지금까지 사부를 찾기 위한 수색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찾아가는 길에 빼어난 경치까지 구경할 수 있으니 일 거양득이 아니냐는 조령의 제안은 참으로 달콤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돌아온 상태라……”

요즘 가족 간의 정이라는 것을 듬뿍 느끼고 있었던 소연이 그 말에 응할 리 없었다. 만현까지는 꽤나 먼 길이다. 설취를 만나고는 싶었지만, 그곳에 갔다 오려면 묵 향과 한동안 헤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마화가 조령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소연에게 만현으로 바람이나 쏘이고 오라며 권했다.

사실 지금 묵향은 양양성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전투단의 재편성 작업부터 시작해 해야 할 일이 태산만큼이나 널려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대별산맥으로 갈 날짜를 차일피일 미루며 아직까지도 양양성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고 있었다.

그 원인이 바로 소연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마화였기에 만현으로의 유람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이다. 소연을 멀리 보내 버려야 묵향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화는 즉시 소연을 호위할 고수들의 인선 작업에 들어갔다. 조령은 물론이고 쟈타르조차 소연에 비해 무공이 훨씬 떨어졌다. 그런 하수들을 믿고 소연을 보낼 수 는 없었다.

물론 자신의 수하들을 딸려 보낼 수도 있지만, 그러면 괜히 사람들의 이목만 쏠리게 될 것 같아 망설여졌다. 흑풍대원들은 떨어지는 무공을 말과 두터운 갑주로 보 완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렇다고 갑주를 벗기자니 상대적으로 무공이 떨어지기에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적에게 취약할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소연이 마교도들과 가깝다는 걸 공개적으로 드러낼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한동안 머리를 굴리던 마화는 이윽고 결정을 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화는 진팔을 찾아 천지문 파견대가 기거하고 있는 장원으로 갔다. 천지문 파견대의 정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무사는 처음에는 정중한 어조로 마화에게 질문을 던 졌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진팔 공자를 만나러 왔습니다.”

「예,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하는 대답까지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무사의 반응은 마화의 기대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경비무사는 마치 무슨 소리냐는 듯 어 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한 것이다.

“헛걸음을 하신듯합니다. 진 공자께서는 여기 안 계십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계신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러자 갑자기 경비무사는 뭘 생각했는지 삐딱한 눈길로 마화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퉁명스레 말했다.

“진 공자께서는 몇 년 전 홀연히 본문을 떠나신 후, 여태 연락이 두절된 상태입니다. 그런 분이 여기 계실 리 없지 않습니까? 혹시 다른 사람을 착각한 게 아닙니 까?”

마화가 자세히 보니 정문에 서 있는 경비무사들의 얼굴이 낯설었다. 아무리 자신이 천지문에 자주 온 것은 아니라지만, 그전에 있던 경비무사들은 자신의 신분을 말해 주지 않았어도 알아서 기었다.

사실 마교의 흑풍대 부대주라는 지위는 그리 가볍게 볼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보충된 무사들이라면 자신을 몰라보는 건 이해할 수 있겠는데, 문제는 이놈들이 뭘 잘못 처먹었는지 자신의 위아래를 음탕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마화는 자신의 옷차림을 살펴봤다. 조령의 권유로 입게 된 옷이 문제였다.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날 만큼 꽉 낄 뿐만 아니라, 너무 화려해 일반 여염집 여인은 쉽게 입기 힘든 옷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요즘 들어서는 조령의 잔소리 때문에 점차 화장기가 옅어지고는 있었지만 마화의 화장발은 아직까지도 보통보다

꽤나 짙은 편에 속했다.

마화는 경비무사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면서도 은연중에 솟아오르는 불쾌감을 그녀로서는 억누르기 힘들 었다. 그녀의 표정은 점점 더 싸늘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 책임자를 좀 불러 주세요.”

“어허, 보아하니 누가 술 마신 뒤 진 공자의 이름을 판 것 같은데, 그분은 이곳에 안 계시다고 그러지 않았소. 그러니 헛수고 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시오. 계속 이런 식으로 고집을 피우면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으니 말이오.”

마화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참았다.

“본녀는 천마신교 소속 흑풍대 부대주직을 맡고 있는 마화라고 해요. 다시 한 번 요청드리죠. 나는 진 공자를 만나러 왔어요. 당신들이 혹 모른다면 소연이를 불러 다 줘요.”

하지만 경비무사들의 반응은 마화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무슨 같잖은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이었던 것이다.

“에이, 정말! 진공자는 여기에 없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그리고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마교 고수를 들먹이는가 본데 쯧, 태생이 천하니 팔아먹는 것 도 사악한 마교의 계집을 팔아먹는군.”

소연의 체면을 생각해 지금까지 좋게 웃으며 말하던 마화의 머릿속에서 일순 뭔가가 뚝 하고 끊어져 나갔다. 마화는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녀의 두 눈은 차가우리만큼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과거 냉비화녀(冷飛花女)라는 명호를 괜히 얻은 게 아닌 것이다.

“내 소연이를 생각해서 대충 넘어가 주려 했건만……. 이런 망할 새끼들! 정말 지옥이 보고 싶단 말이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화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경비무사들 따위는 감히 감당할 수조차 없는.

“헉! 이, 이런…….?”

순간 경비무사들은 직감적으로 자신들이 상대를 오판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정도의 살기는 절대 술집여자 따위가 뿜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 자 잠깐!”

하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었다. 마화의 가차 없는 손길이 휘둘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손이 휙휙 움직일 때마다 짝짝 하는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지금까지 마화의 성질을 건드리고 있던 무사놈의 머리통이 이리저리 팩팩 돌아갔다.

“으아악!”

마화의 손에 자신의 동료가 점차 처참한 몰골로 변해 가는 것을 본 또 다른 경비무사의 얼굴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만약 저 여인이 진짜로 마교 흑풍대 부대주라면 자신이 달려들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재빨리 안으로 달려 들어가며 큰 소리로 외쳤다.

“자, 장로님! 빨리 나와 보십쇼. 마, 마교 고수가 습격해 왔습니다요.”

갑작스런 마교의 습격이라는 말에 천지문은 발칵 뒤집어졌다. 보고를 들은 임연은 기절초풍해서 자신의 애도(愛刀)를 집어 들고 정문으로 달려 나왔다.

나와서 보니 그곳에는 한 아름다운 중년 여인이, 자신이 보기에도 살벌하리만큼 무자비하게 경비무사를 쥐어 패고 있는 중이었다.

““머, 멈추시오!”

경비무사의 멱살을 움켜쥐고 거의 반병신을 만들어 놓고 있던 마화는 그제야 손을 멈췄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은 분노에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본녀는 천마신교 소속 흑풍대 부대주로 있는 마화라고 한다. 천지문은 제자들을 대체 어떻게 가르쳤기에, 찾아온 손님에게 이토록 무례할 수 있단 말이냐!” 그 말에 임연은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옷차림을 봐서는 술집에서 웃음을 파는 여인네인 듯한데, 풍기는 기세는 일파의 장로에 견줘도 손색이 없을 만큼 엄 청난 위엄을 내포하고 있다.

임연은 얼른 자신에게 보고를 하러 쫓아 들어온 경비무사를 노려봤다. 왜 이렇게 무례하냐는 그녀의 말에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망할 새끼들, 내 그렇게 찾아오는 손님들께 조심하라고 일렀거늘. 나중에 두고 보자!’

임연의 이글거리는 시선에 경비무사는 고개만 팍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물론 또 한 명의 경비무사는 마화의 손에 틀어 잡힌 채 거품을 물고 쭉 뻗어 있었 기에 전혀 대답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허허,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좀 진정하시고, 천천히 대화를 나눠 보도록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만약 마화의 말대로 그녀의 신분이 정말 마교 흑풍대의 부대주라면 문제가 될 소지가 아주 컸다. 그래서 일단 임연은 마화를 장원 안으로 안내하며, 사태를 파악하 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임연은 슬쩍 제자 한 명에게 전음을 보내 초기에 양양성에 파견 나온 고참급 제자를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예전에 있었던 전투로 인해 심각한 부상을 당한 제자들은 모두들 천지문으로 돌아갔지만, 천운을 타고 났는지 그 난리통에서도 비교적 멀쩡하게(?) 살아남은 자들 이 몇 있었다. 그런 제자에게 이 여인의 신분을 물어보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 아닌가.

장로급 인물이 저자세로 나오자 마화는 더 이상 화를 내기가 곤란했다. 성질 같아서는 천지문을 뒤집어엎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곤란해지는 건 소연이다. 마화는 멱살을 움켜쥐고 있던 경비무사를 거칠게 던져 버린 후, 임연을 따라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채 몇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임연의 부름을 받고 달려오던 무사 한 명이 마화를 보자마자 곧바로 포권을 하며 인사를 하였다. 예전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 을 때, 흑풍대를 이끌고 온 그녀의 도움으로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부대주님. 그런데 이곳엔 어쩐 일로?”

마화도 무사의 얼굴을 금방 기억해 냈다. 그녀는 무사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몸은 많이 좋아진 듯하네요.”

무사는 고개를 조아리며 격동에 찬 어조로 외쳤다.

“예, 그때 여협의 은혜로 목숨을 부지한지라, 하해와도 같은 그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마화는 환히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건강해 보이시니 정말 다행이군요. 참, 다른 게 아니라 교주님의 명령을 받고 진팔 공자를 찾아왔는데 어디에 계시죠?”

무사는 힐끔 임연의 눈치를 살폈다. 왜 진팔이 쫓겨났는지 그는 잘 알기 때문이다. 더불어 임연은 진팔에 대한 일은 일체 입 밖에도 내지말라는 함구령까지 내렸었 다. 하지만 그로서는 마화의 물음에 대답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마화에게 구명지은(求命之恩)을 입은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진팔을 찾는 것이 묵향이라는 그녀의 말 때문이었다.

그날 전투에서 보여 줬었던 묵향의 가공할 만큼 무시무시한 무공은 그의 머릿속 깊이 아로새겨져 지금까지도 공포심을 자아내고 있었다.

무사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마화에게 진팔의 위치를 상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임연의 안색이 일순 창백하게 질려 버린 것 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저 여인이 마교의 고수였을 줄이야……. 만약 그녀가 경비무사들이 무례를 범한 것에 대해 자신에게 따지고 든다면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다.

물론 그녀와 싸우는 게 두려운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녀의 배후였다. 엄청난 세력의 마교와 그리고 무엇보다 암흑마제라 불릴 정도로 잔인하다고 소문난 묵향이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임연의 걱정과는 달리 마화는 진팔의 위치를 알자 곧바로 발길을 돌려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많은 천지문의 제자들은 두세 명씩 모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진 공자께서 여기에 계셨었나?”

“그런데 왜 그걸 우리들은 몰랐지?”

제자들의 수군거림에 임연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기 어려웠다. 천지문에 진팔의 존재가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기에 그는 새로운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다급히 진 팔을 밖으로 내보낸 후 함구령까지 내렸었다.

그런데 그 사실이 이런 방식으로 문도들에게 알려지게 될 줄이야…….

마화의 뒷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임연은 문득 떠오른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무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교 교주가 진 사제를 찾는 이유가 뭔지 너는 아느냐?”

“무공을 가르쳐 주려고 그러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순간 임연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마교 교주가 왜 자신의 사제에게 무공을 가르킨단 말인가?

“뭐야? 무공을 가르친다고?”

“예, 그게 진짜로 무공을 가르치는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무사는 지금껏 있어 왔던 교주와 진팔의 일상에 대해 자세히 보고했다. 그리고 그걸 듣고 있던 임연의 표정이 점차 떨떠름하게 바뀌고 있었다.

진팔이 지닌 무공 내력에 대한 한 가지 단서가 지금 발견된 것이다. 너무나도 뛰어나게 발전한 그의 무공에 대해 오래전부터 구구한 억측이 오간 걸 임연도 잘 알 고 있었다.

그 헛소문들 중에는 진팔의 무공 바탕이 마교의 역혈심법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사실이었던 걸까?

임연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사매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두 시진쯤 전에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나중에 들어오면 나한테 들르라고 전해 다오.”

그는 소연에게 그 의문점들을 톡 까놓고 물어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