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4권 13화 – 잠자는 용의 코털을 뽑다

잠자는 용의 코털을 뽑다

진팔은 마화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 내심 그가 두려워하는 묵향의 부탁이라고 마화가 말했기에 거절할 수도 없었지만, 소연에게 마음이 있는 진팔이 이런 달 콤한 제안을 거절할 리 없었다.

만현에 이르는 길은 뛰어난 경치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 명승지를 사모하는 그녀와 함께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진팔의 마음은 마냥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마화가 끌어들인 또 다른 인물은 패력검제의 아들인 폭풍검 서량이었다. 거의 진팔과 맞먹을 정도의 무예를 지닌 데다가 설취에게 흑심까지 품고 있다고 하니 더욱 꼬시기 좋았다.

물론 그가 설취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예전에 묵향과 만통음제가 술을 마시며 떠들던 걸 옆에서 우연히 들었었기에 알게 된 사실이다.

마화도 소연과 함께 동행하고 싶었지만, 최근 조직 재편성으로 인해 마교 내부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기에 잠시도 짬을 낼 수가 없었다. 묵향의 총동원령으로 인해 총단을 떠난 호법원과 염왕대, 자성만마대가 곧 도착할 예정이었다.

동행하지 못하는 마화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섯 명의 남녀들은 만현으로 향하는 즐거운 여행을 떠났다.

* * *

유람을 떠난 첫날, 서량과 진팔은 설레는 마음을 금치 못했다. 서량은 만현에 있는 설취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리고 진팔은 사모하는 사저와 이런 오붓한 시 간을 만끽할 수 있다는 기쁨에 한껏 들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진팔에게 은근히 마음이 있던 조령에게 있어 이런 전개는 결코 달가운 게 아니었다. 진팔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소연만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그녀의 마음은 우울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여기서 묶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가씨.”

주종관계로 묶인 것을 보여 주듯 쟈타르는 조령을 깍듯이 섬겼다. 특히 양양성을 벗어나자 그게 더욱 눈에 띄었다. 식사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 에 신경을 써 주는 것이다.

객잔에서 식사를 마치고 객실로 들어가자 탕 속 가득 뜨뜻한 물이 받아져 있었다. 여행을 하며 쌓인 피로를 목욕으로 풀라는 조령에 대한 쟈타르의 배려였던 것이 다.

하지만 이 자리에 여자가 조령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소연이라는 훨씬 연배가 높은 고수가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첫날은 조령도 아무 생각 없이 먼저 목욕을 했지만 가만히 눈치를 보니 그게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다음 날부터는 소연이 먼저 목욕하도록 양보를 했다.

그사실을 알게 된 쟈타르는 다음부터는 소연의 몫까지 목욕물을 함께 주문했다. 그 후로는 꽤나 편안하고 즐거운 유람이 되었다. 마치 능숙한 총관이라도 되듯, 자질구레한 모든 일은 쟈타르가 알아서 다 처리해 버렸기 때문이다.

비록 우락부락한 야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오랜 세월 조령의 수발을 들어와서 그런지 그의 일처리 솜씨는 꽤나 섬세하면서도 매끄러웠다. 그랬기에 만현에 도 착해서 설취를 만났을 때쯤에는 일행들은 은연중에 모든 잡무를 쟈타르에게 떠맡기게 되어 버렸다.

사부를 찾는 외로운 수색을 계속하고 있던 설취는 뜻하지 않은 지인들의 방문에 너무나도 기뻐했다. 특히 건강해진 소연의 모습에 설취는 그녀의 두 손을 잡고 자 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언니.”

“응, 많이 좋아졌어.”

“진 공자가 부상이 심하시다고 해서 걱정 많이 했었어요.”

“나는 오히려 동생이 걱정이야. 많이 수척해진 것 같네.”

“강하신 분이시니 돌아가시기야 했으려구요.”

하지만 말과 달리 그녀의 안색은 침울했다. 분위기가 갑자기 무거워지자 진팔이 눈치 빠르게 입을 열었다.

“자자, 오랜만에 만났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디 가서 회포라도 풀죠.”

그 말에 어느 틈에 둘러봤는지 쟈타르는 외진 곳에 있는 객잔으로 일행들을 안내했다. 조령을 위해, 이 근방에서 가장 경치가 뛰어난 곳에 자리 잡은 객잔을 알아 본 것이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탁자 위에 놓이고, 술병이 올라오자 모두들 술잔을 들어 올렸다. 설취는 자신을 위해 이곳 만현까지 와준 지인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를 위해 여기까지 와 주신 거 너무 감사해요. 자, 한 잔씩 건배를 하죠.”

오랜만에 모두들 무탈한 상태로 만났기에 흥겨운 주연이 시작됐다. 비록 만통음제가 실종되었다고는 하지만 중원 최강자들 중 한 명인 그가 변고를 당했을 거라고 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묵향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이들에게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알려 준다고 해서 바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걱정을 하는 건 혼자만 해도 충분한 것이다.

사람들은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과 서로 간의 우정을 위해서, 또 만통음제가 무탈하기를 빌며 술잔을 나눴다. 그러던 차에 가장 무공이 낮은 조령이 먼저 대취해 술 상에 머리를 처박았다.

쿵!

“이런, 아가씨께서 술을 너무 드신 것 같군. 내가 안으로 모실 테니, 모두들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들게나.”

쟈타르는 조령을 부축해서 옆방으로 가 버렸다. 쟈타르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설취도 머리를 탁자에 박듯 엎어져 버렸다.

그녀가 정신을 잃자 모두들 안색이 바뀌었다. 설취가 아무리 조심성 없이 술을 마셨다고 해도, 그녀 정도의 고수가 대취해서 쓰러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독인가? 아니면 몽혼약?”

많은 역경을 경험해 본 진팔의 대처가 그들 중 가장 빨랐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가운데 그는 필사적으로 품속을 뒤져 해독약을 꺼냈다.

진팔은 해독약을 소연과 서량에게 건넨 다음, 자신도 한 알 입속에 털어 넣고 질근질근 씹어 삼켰다. 몽혼약이라면 몰라도 제한된 종류의 독약이라면 해독이 가능 했다.

하지만 특이한 재료로 만든 독약도 많았기에 그들은 누가 말을 꺼낸 것도 아니었지만 각자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상대가 사용한 약 기운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그 걸 몸 밖으로 몰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일행들의 노력은 헛수고로 끝났다. 한 명씩 한 명씩 무공이 약한 순서대로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 중 가장 긴 시간을 버틴 것은 소연이었다.

사라져 가는 의식을 악착같이 붙잡고 있던 그녀 앞에 낯선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소연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걸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 계집이 진짜로 천지문 출신이 맞아?”

“그렇다는구먼.”

“허, 정말 믿어지지 않는군. 그따위 문파에서 저런 엄청난 고수를 배출했다니.

“그게 아니라 그 반역도의 딸이라잖아. 그러니 천지문에 보내기 전에 좋은 영약이라는 영약은 다 처먹였겠지. 아마 묵령환의 약 기운을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일 거야.”

고수들을 제압하기 위해 개발한 묵령환은 강력한 몽혼약의 일종이었다. 독약이 아니었기에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그 약효를 피해 갈 도리가 없었다. 사내들은 몽 혼약의 약효를 철썩같이 믿고 있는지 긴장감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번쩍!

어느 틈에 일어섰는지 소연이 검을 뽑아 들고 사내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몽혼약의 약효가 펴져서인지 검에는 전혀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으윽, 이런 빌어먹을 계집이!”

방심을 하다 받은 일격이었기에 사내들 중 한 명이 욕설을 내뱉으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상당히 깊게 찔렸는지 그의 팔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또 다른 사내가 재빨리 검을 뽑아 들고 소연을 공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챙! 챙!

몇 합이 채 지나기도 전에 소연은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약효에 취해 몸을 제대로 지탱하기도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사내가 상당한 고수였기 때문이다. 그나 마 자신을 인질로 잡기 위해서인지 사내가 손속에 사정을 봐주고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눈치 챈 소연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만약 자신이 이들의 손아귀에 떨어진다면? 그리고 자신을 인질로 삼아 아버지인 묵향에게 협박을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소연은 잠시 갈등을 하다 갑자기 검을 거꾸로 들고 자신의 배를 향해 찔러 넣었다. 평생 자신을 돌봐 준 묵향에게 폐가 되기는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소연의 시도는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헉!”

어느 틈에 옆으로 접근했는지, 처음에 팔에 부상을 입고 뒤로 물러섰던 사내가 소연의 혈을 집은 것이다.

“빌어먹을! 마귀 같은 놈의 딸내미라서 그런지 이년도 정말 독하기 이를 데 없군.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다니 말이야.”

그러자 또 다른 사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젠장, 한 알이면 황소도 한 방에 뻗어 버린다는 묵령환을 먹고도 이렇게 발악할 수 있는 년이 있는 줄이야……”

팔에 부상을 입은 사내는 창밖으로 신호를 보내 수하들을 불러들였다.

“자,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빨리 이들을 옮기세. 밤이 길면 꿈도 길다고, 이러다 비마대 놈들이 눈치 채겠네.”

잠시 후, 사내들이 사라지고 난 뒤 탁자 위에는 빈 술잔만이 나뒹굴고 있었다.

* * *

관지의 급보를 받은 묵향은 기절초풍하듯 놀라 만사를 다 제쳐 두고 양양성으로 달려왔다.

“소연이가 납치되었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그게 만현에 도착하신 후 갑자기 실종되셨습니다.”

“만현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마화는 고개를 푹 쉬이며 조령이 소연에게 설취도 만날 겸 만현으로 바람이나 쏘이러 가자는 말을 했고, 그게 좋을 것 같아 자신이 허락했다고 대답했다.

“그럼 호위대를 붙였어야 할 거 아냐!”

마화는 자신도 그렇게 생각해 진팔과 패력검제의 아들인 폭풍검 서량까지 소연과 함께 가도록 조치했다고 말했다. 잠시 머리를 굴려 본 묵향은 그 정도 전력이라 면 천마혈검대 정도는 투입해야 어찌해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경이 쑥대밭이 된 지금 장인걸이 만현에까지 고수들을 보낼 여력은 없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어떻게 된 게 만현에만 가면 족족 사라지는 거야? 그놈의 만현에 마가 끼었어. 어째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그곳에 가면 변고를 당하게 되는 건 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묵향은 관지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전 흑풍대를 만현으로 투입해. 거기를 완전히 뒤집어엎는 한이 있더라도 소연이를 찾아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때, 밖에서 임충이 달려 들어오며 외쳤다.

“조령 소저와 쟈타르를 발견했답니다. 쟈타르는 꽤나 깊은 중상을 입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답니다.”

순간 묵향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쟈타르가 중상을 입었다면 단순한 실종이 아닌 것이다. 불안한 마음에 묵향은 임충에게 다급히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라고 하던가?”

“조 소저의 증언에 따르면 만현 인근에서 적들의 습격을 당했답니다. 그중 몇 명은 엄청난 마기를 뿜어내는 고수들이었다고 하는데…….” 천마혈검대가 분명했다. 묵향은 이빨을 갈며 외쳤다.

“장인걸 이 새끼!”

“도중에 적들의 추격을 피해 헤어졌는데, 다행히 자신들 쪽으로는 마교 고수들이 따라붙지 않는 통에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깟 계집은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 그렇다면 소연이뿐만 아니라 설취까지 위험해. 지금 즉시 철영에게 전서구를 보내라. 호법원 녀석들을 지금 당장 만현으로 보내서 샅샅이 뒤지라고 해.”

“존명!”

묵향은 마화에게 차가운 어조로 외쳤다.

“만현 인근에 있는 비마대 놈들을 철저하게 족쳐. 천마혈검대 놈들이 어슬렁거리는데, 그렇게 지독한 마기도 눈치 채지 못하다니. 썩을 놈들!”

얼마 전에 벌어진 전투를 미루어 생각한다면 보고를 들음과 동시에 묵향이 노하구를 향해 검을 뽑아 들고 달려가는 게 아닌가 걱정했던 마화였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과 달리 묵향의 반응은 꽤나 냉철한 것이었다. 묵향도 얼마 전에 있었던 대전투로 인해 홧김에 달려가는 것은, 그 어떤 해결책도 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 던 것이다.

* * *

소연과 그 일행을 찾기 위해 양양성에 있는 흑풍대 본부가 발칵 뒤집어진 뒤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아무런 소득이 없었기에 묵향의 속은 바싹바싹 타들어가고 있 는 중이었다.

“뿌, 뿌, 뿌우~~?

감시병의 급박한 뿔나팔 소리가 들려오자 병사들은 혹시 적의 습격인가 해서 창을 움켜쥐고 성문 쪽으로 부산히 달려갔다. 멀리서 뿌연 먼지를 가르며 수백 기의 기마대가 양양성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백기를 휘날리며 접근해 오고 있었는데 군장으로 봐서 금나라 기마병임에 확실했다.

잠시 후, 험악하게 생긴 장수가 성문 앞에 말을 멈춘 뒤 자신들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는 병사들을 향해 거만한 표정으로 외쳤다.

“본인은 완옌 렌지에 대원수 합하(閤下)의 명을 받들어 금나라의 사신으로 왔노라!”

묵향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의 집무실에서 만현에 파견된 고수들이 소연의 행방을 찾았다는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마화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보고를 올렸다. 소연이 행방불명된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는지 마화의 안색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금나라에서 2백여 기의 인마(人馬)가 도착했답니다. 그런데 그들을 인솔해 온 장수가 교주님 뵙기를 청한답니다.”

“나를?”

그 순간 묵향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금나라 장수가 왜 자신을 만나자고 하는 것인지 곧바로 눈치 챘기 때문이다. 묵향은 노기 어린 어조로 외쳤다.

“만나고 싶지 않으니 돌려보내라고 해라.”

“소 소저 때문에 만나자는 것일 텐데요?”

“……”

묵향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자, 마화는 묵향을 설득했다.

“일단 만나는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쪽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야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으드득, 놈이 원하는 게 뭔지 나는 전혀 궁금하지 않아!”

상대의 비열한 수작에 이를 갈던 묵향은 치미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던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당장 가서 그놈 목을 베어 장인걸에게 돌려보내. 본좌의 대답은 그거라고 알려 주란 말이야!”

이때 옆에 서 있던 관지가 참다못해 끼어들었다.

“그자를 만나시는 게 좋겠습니다.”

“만나고 싶지 않다는데도!”

“지금까지 장인걸이 소 소저를 건드리지 않은 건, 교주님께서 철저하게 냉혈한처럼 행동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전에 장인걸이 소 소저를 납치했다가도 그냥 돌려보냈었던 것도 위협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고 판단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묵향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바뀌다니?”

“교주님께서는 만통음제 대협을 구출하기 위해 연경을 치는 무리수를 감행하셨습니다. 그걸 보고 장인걸은 깨달았겠지요. 교주님의 약점이 뭔지 말입니다.” “이런 젠장!”

쾅!

묵향의 주먹질에 애꿎은 탁자만 박살이 나 버렸다.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교주님. 아직 기회는 남아 있습니다.”

“기회? 기회는 무슨 얼어 죽을 기회! 이제는 허세가 전혀 먹혀들지 않을 텐데…

“일단 장인걸이 보낸 사신부터 만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쪽의 요구를 들어 본 후, 대비책을 강구해도 늦지는 않을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좋을 듯하자 묵향은 어쩔 수 없이 명령을 내렸다.

“그놈보고 들어오라고 해.”

“예, 교주님.”

금나라 장수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집무실에 들어왔을 때, 박살 난 탁자는 이미 말끔하게 치워지고 없었다. 장수는 오만한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본 후, 태사의에 앉 아 있는 묵향을 향해 간단하게 군례를 올리며 말했다. 어투는 정중한 듯했지만, 그의 행동에는 상대를 무시하고 있음이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었다.

“천마신교 교주님을 뵈오이다.”

금나라 장수는 군례를 올린 후, 가져온 상자를 두 손으로 바쳤다.

“완옌 렌지에 대원수 합하께서 교주께 이걸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협박을 하려면 서신만 보내도 충분할 텐데 왜 상자를 보냈지? 얄팍하게 독약이라도 넣어서 보냈나?’하는 실없는 생각을 떠올리며 묵향은 상자를 감싸고 있는 보 자기를 풀었다.

계집들이 화장품을 보관하는 상자쯤 되려나? 제법 아름답게 세공된 나무로 만든 상자가 나왔고, 그 위에 곱게 자리 잡은 봉서도 보였다. 묵향은 먼저 봉서부터 뜯 었다.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지만 장인걸이 원하는 요구 조건이 뭔지 너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미 묵향의 속마음은 웬만한 거라면 그냥 다 들어주고 소연을 빼 내는 게 어떨까 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서신을 읽던 묵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최대한 표정을 변화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기에 이 정도였지, 그렇지 않았다면 금나라 장수 놈에게 자신이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 들킬 뻔했다.

묵향이 급히 상자 뚜껑을 열자 퀴퀴한 썩는 냄새 같은 게 코를 찔렀다. 상자 속에는 하얀 소금이 가득 들어 있었고, 그 속에 묘하게 생긴 막대기 같은 것도 보였다. 가만히 보니 그건 소금에 절여놓은 손이었다.

소금 때문에 물기가 쫙 빠져 쭈글쭈글했지만, 뼈대가 굵은 것이 사내의 손이 분명했다.

묵향은 이 손의 주인이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바로 진팔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묵향의 미간에 노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퉁명스런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이따위 걸 선물로 보냈다니. 대원수는 본좌가 소금에 절인 고기보다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신선한 것을 더 좋아한다는 걸 잊은 모양이군.”

곁에 서 있던 마화는 묵향이 지금 뭘 하려고 하는지 눈치 채자 급하게 전음을 날리며 말렸다.

<사신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교주님!>

하지만 묵향은 마화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안그래도 묵향은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안드는 저놈의 멍청한 낯짝을 두토막으로 만들어놓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느 라 손에 쥐가 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묵향의 손이 일순 번쩍 빛나는 순간, 피보라가 일며 금군 장수의 왼손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또다시 번쩍인 순간 귀가 떨어져 나갔다.

최악의 상황은 면했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마화는 급히 달려가 장수의 혈도를 찍어 지혈을 시켰다. 그녀가 움직인 후에야 금군 장수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깨 달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만심에 가득 차 있던 그의 얼굴은 공포감으로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본좌의 대답은 이거라고 전해라. 아참, 귀는 덤이다. 대접을 받았는데 그에 상응하는 대가만 지불한다면 너무 몰인정하다고 욕을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금군 장수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필사적으로 말했다.

“하,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절대 인질이 무사…….”

장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묵향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어조로 외쳤다.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 인질로 잡은 애들을 몽땅 다 죽이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해. 본좌는 절대로 양양성에서 철수할 생각이 없으니까.”

“후회하실 겁니다.”

자신이 돌아가면 인질들을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는 식으로 이죽거리는 장수의 말에 이성을 잃은 묵향이 마화를 향해 외쳤다.

“저 새끼 주둥이를 찢어 버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금군 장수는 덩치에 어울리지도 않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달아나 버렸다. 장인걸의 명대로 상자를 전한 만큼 자신이 할 일은 다 한 상태다.

사신으로 와서 왼손과 귀가 잘려 나간 것만 해도 억울한데, 이번에는 입을 찢어 버리겠다니……. 그로서는 여진족 이상으로 잔인무도하고 야만스러운 묵향의 행 태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장수가 밖으로 달아나고 난 후, 마화는 묵향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서신의 내용이 뭔데 그렇게 화가 나셨습니까?”

“직접 읽어 봐.”

서신을 받아 들고 읽어 보니 장인걸이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마교가 전쟁에서 손을 떼는 것. 인질들은 전쟁이 끝난 후 돌려주겠다고 쓰여 있었다. 만약 자신의 제안을 듣지 않는다면 한 명씩 목을 잘라 상자에 잘 포장해서 보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증거물도 함께 보낸다고 쓰여 있었다.

나무 상자 안을 들여다본 마화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도 그 손의 주인이 누군지 금방 알아본 것이다.

“진…, 공자의 손이군요.”

“가장 만만한 놈이 그놈밖에 없으니까. 서량은 패력검제를, 그리고 설취는 형님을 제어할 수 있어. 그리고 내가 아끼는 소연이의 손을 잘라 보낼 수도 없었겠지. 쭛! 불쌍한 놈.”

마화는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묵향이 소연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철수하실 건가요?”

“전혀! 놈이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 그리고 설혹 약속을 지킨다손 치더라도…. 놈이 중원을 완전히 장악한 후에는 본교의 힘으로 놈과 대적할 수 도 없을 거야. 승산이 있는 지금 결판을 내야지.”

그 말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마화는 소연을 생각하자 너무 가슴이 아팠다.

황제를 잃은 장인걸의 분노로 인해 절대 인질들이 무사하지 못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어진 지금에 와서는 더더욱.

“그렇게 하면…….”

묵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외쳤다.

“그만! 더 이상은 듣고 싶지 않다. 아마 소연이도 내 마음을 이해해 줄 거라고 믿는다.”

차갑게 말을 끊었지만 묵향의 마음 역시 편한 건 아니었다. 만통음제의 경우에는 구출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지만, 소연과 그 일행들은 구출할 수 있는 가능 성이 아예 없었다. 자신의 약점을 발견한 장인걸이 그들을 결코 호락호락 놔두질 않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인걸의 요구를 모두 들어준다고 해도 그들이 살아날 확률은 역시 적었다. 어차피 장인걸과 자신은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한다. 안 그러면 끝이 나지 않 을 게 분명하다.

그런 만큼 그들은 자신을 협박하기 위해 이리저리 이용만 당하다 죽을 운명인 것이다.

결과가 뻔히 보이는데 그 길로 갈 묵향이 절대로 아니었다. 실수는 연경을 치면서 한 것만으로도 족하고도 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