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4권 8화 – 지루한 소모전
지루한 소모전
장인걸의 발목을 잡는 데 만족하지 않고, 남양의 군량미를 몽땅 불사르겠답시고 만용을 부렸었던 철영은 되려 매복에 걸려 된통 뜨거운 맛을 봐야만 했다. 더군다나 적들이 보도 듣도 못 한 신무기들까지 써 대니 그 피해는 더욱 가중되었다.
하지만 마교 고수들은 곧바로 평상심을 회복했다. 마교가 자랑하는 최정예들인 만큼, 지금까지 오직 무공만을 벗 삼아 고련에 고련을 거듭한 그들에게 그런 얄팍 한 잔재주가 계속 통할 리는 없었던 것이다.
철영은 더 이상 정면 대결을 해 봐야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판단이 들자, 전투를 산발적으로 진행하면서 수하들을 천천히 후퇴시켰다. 숫자가 적은 만큼 적들에게 포위당하면 힘든 싸움을 치러야 한다는 걸 잘 아는 철영은 퇴로 확보에 가장 많은 신경을 썼다.
철영은 일차적으로 성벽이 있는 곳까지 수하들을 후퇴시킨 후 점차 뒤쪽으로 빠져 처음의 돌격선이 있는 곳까지 물러섰다.
일단 마교도들이 숲이 있는 곳까지 물러서자, 장인걸은 병력을 뒤로 물렸다.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이 가득한 숲 속에서 대규모 병력을 운용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 * *
토성으로 돌아온 장인걸은 썩 기분이 좋지 못했다. 놈들이 계속 숲 근처에서 무력시위를 한다면, 그들을 토벌할 대책이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여기저기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걸 바라보며, 장인걸은 자신에게 좀 더 많은 고수들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 각했다. 만약 그랬다면 놈들이 숲 속으로 후퇴했다고 해도 끝까지 추격해서 격멸해 버릴 수 있었을 게 아니겠는가.
“안색이 어두우시옵니다, 교주님.”
편복대주의 말에 장인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회라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 줄은 내 익히 알고 있으나 오늘 놈들의 용맹스런 모습을 보니 너무나도 한스럽구먼. 만약 저들이 내 수하였다면, 진작에 중원 전체를 무릎 꿇려 버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제대로 된 고수가 없어, 놈들이 숲 속에 숨었다고 후퇴해야만 하는 신세가 되다니……. 너무나도 통 탄스럽구먼.”
묵향에 의해 마교 교주 자리를 빼앗긴 것에 대해 자괴감을 곱씹는 장인걸을 편복대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교주님. 놈들이 무공에서 앞서 간다고 하지만, 결국은 무림이라는 우물 속의 개구리일 뿐이옵니다. 어찌 대 금제국의 힘을 등에 업고 계신 교주님만 하겠사옵니까?”
“흠,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자네는 뭔가 생각해 둔 게 있는 모양이군.”
“수하들에게 일러 야습을 준비하라고 지시해 뒀사옵니다.”
마교의 전술을 잘 아는 장인걸은 상대방이 다음에 취해 올 행동을 뻔히 예측하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 밤이 되면 은밀히 공격을 해 올 것이다. 그런데 방어가 아닌 공격이라니….
“야? 놈들이 야습해 올 걸 생각하면 골치가 아프거늘, 어찌 우리 쪽에서 야습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고수의 수를 봐도 저쪽이 월등하게 많다. 더군다나 양쪽 다 마공을 익혀 서로의 위치를 빤히 알 수 있는 상황이다. 놈들이 기습을 가해 온다면 몰라도, 이쪽의 고수 들을 동원해서는 기습작전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편복대주는 그런 모든 것을 이미 감안하고 있다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에게는 진천뢰가 있지 않사옵니까? 이미 수하들에게 지시를 해 뒀사오니 교주님께서는 결과만 지켜보시옵소서.”
일단 위치를 파악한 이상, 마기를 풀풀 풍기는 마교도들의 위치를 편복대가 놓칠 리 없었다. 지금 그들의 행동은 편복대원들에게 철저하게 감시당하고 있는 상태 였다.
장인걸 휘하에 있는 다른 고수들과 달리 편복대원들은 정파의 무공을 익혔다.
내공의 발전 속도가 형편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마기 때문이다. 마공을 익혀 자신의 위치를 상대가 훤히 알 수 있다면 첩자 로 써먹을 수가 없지 않은가.
편복대주에게 기습 공격 명령을 하달받은 편복대원 다섯 명은 마교도들보다 조금 더 높은 장소에 자리 잡았다. 저 아래쪽에 야영 중인 마교도들은 아주 느긋한 자 세로 저마다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사방에 경계를 세워 놨기에 적의 고수들이 접근해 온다든지 아니면 궁수들의 저격을 받을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궁수가 마공을 익혔다면 금방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테고, 일반 병사가 화살을 날려 봐야 자신들에게 그 어떤 피해도 주지 못할 테니까.
그런데 설마, 진천뢰를 날릴 줄이야. 물론 진천뢰는 쇠로 만들어져 있기에 매우 무거워 멀리 던질 수가 없다. 편복대원들이 아무리 무공을 익혔다고는 하지만, 일 반인들보다 수십 배나 멀리 던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편복대원들은 적들보다 높은 위치를 점했던 것이고, 그들이 던진 진천뢰는 바닥에 떨어지면서도 데굴데굴 굴러서 밑으로 내려왔다.
뭔가 이상한 소음이 들려오자 쉬고 있던 마교도들은 어느새 무기를 움켜쥐고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그런 그들의 눈에 시커먼 쇳덩이가 자신들을 향해 굴러오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지?”
“어라? 낮에 봤던 그거 같은데?”
“꾸엑! 바로 그거다. 빨리 피해!”
낮에 벌어진 전투에서 진천뢰의 가공할 만한 위력에 혼줄이 난 마교도들은 저마다 경호성을 질러 대며 재빨리 사방으로 몸을 굴렸다.
사실 심지에 불을 붙여 던지는 진천뢰 따위로 그들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는 걸 편복대주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가 이런 짓을 시켰느냐 하면, 적들이 가만 히 휴식을 취하지 못하게 만들어 신경을 긁으려는 의도였다.
꽈꽈꽝!
일순 엄청난 굉음과 함께 수많은 철질려가 허공으로 비산했다. 놀라서 이리저리 피했던 마교도들은 진천뢰가 폭발한 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서는 편복대원들 을 찾아 산꼭대기로 내달렸다.
하지만 한밤중에, 그것도 꽁꽁 숨은 첩자들을 산속에서 잡아낸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느 구석에 숨어 들어갔는지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찾다가 찾다가 포기하고 다시 휴식을 취하려고 하면 또다시 날아오는 진천뢰.
철영은 이빨을 갈지 않을 수 없었다. 이토록 자신들을 만만하게 보다니. 철영이 직접 일어서서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가자, 한중평 장로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말렸 다.
“부교주님께서 손수 나서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조만간에 그 쥐새끼들을 잡아낼 겁니다.”
그 말에 철영은 약간은 짜증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언젠가는 잡아낼 거라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그래서는 대원들이 휴식을 취하기도 힘들어. 이런 때는 기척을 숨길 수 있는 본좌가 나서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 지.”
그리고 품속에서 복면까지 꺼내 덮어쓰자, 철영 부교주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똑같은 공격이 반복되면 아무리 바보 멍충이라도 적이 어디에서 나타날지 대략 예상할 수 있다. 더군다나 적들은 마교도들 중에서 극마급 고수가 끼어 있다는 사 실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철영이 숨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세 명의 흑의인들이 어디선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땅속에 굴을 파는 것이었다. 우선 숨을 자리부터 확 보해 두고, 공격을 가하려고 하는 생각이리라.
“그렇게 하니까 재미있냐?”
뒤쪽에 슬그머니 접근한 철영이 이죽거렸지만, 놈들은 그게 동료가 한 말인 줄 착각한 모양이다.
“물론 재미있지.”
“멍청한 새끼들! 여기 낙엽 속에 숨어 있는 줄도 모르고 허둥대는 꼴이란…….”
“이런 쳐 죽일 놈들!”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서야 그들은 자신들의 뒤에 서 있는 자가 동료가 아니라 정체 모를 괴한임을 깨달았다. 그들은 너무 놀라 숨소리조차 내지 못 했다. 철영은 순식간에 그들 세 명을 제압한 다음 끌고 내려갔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야. 멍청한 새끼들!”
그렇게 말하면서도 철영은 만약 자신이 없었다면 이들로 인해 큰 고생을 했을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이들을 보낸 놈은 꽤나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 분명했 다. 마교도들의 장단점을 제법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는….
“이놈들을 심문해라.”
포로 세 명을 던져 준 다음, 철영은 그들로부터 압수한 진천뢰들을 자세히 살펴봤다. 놈들이 사용하는 걸 봤기에 이것의 사용법은 이미 알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이런 엄청난 위력을 지닌 암기를 장인걸의 수하들이 가지고 있는지는 철영도 알지 못했다. 이런 암기는 난생 처음 봤으니까.
한참을 보고 있는데 옆으로 다가온 한중평 장로가 진천뢰를 보자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니, 이거 놈들이 던지던 진천뢰가 아닙니까?”
“한 장로는 이런 암기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글쎄요, 저야 워낙 총타 안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물정에 어두워서…….”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긁으며 대답하던 한중평 장로는 문득 뭔가 떠올랐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혹 사천당문에서 만든 게 아닐까요?”
“사천당문이 암기의 명가라는 얘기는 들었네. 한 장로 말대로 거기서 흘러나온 물건인지도 모르지. 어쨌건 교주님께 드릴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아.”
그 말에 한중평 장로는 방금 생각났다는 듯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새로워야 선물이 되겠죠. 교주님께서도 이미 이 녀석의 맛을 보셨을 가능성이 큰데…….”
“그렇구먼. 하지만 교주님께서 직접 가셨으니 무슨 일이 있겠는가? 되려 놈들이 교주님의 신위에 질려 혼비백산하겠지.”
그 후로도 쌍방은 몇 번이나 전투를 벌였지만 첫날처럼 그렇게 치열한 대접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의 장단점을 뻔히 아는 상황에서 무모한 충돌을 일 으킬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고, 묵향이 약속했던 시간이 다가왔다.
“오늘도 하루가 이렇게 끝나는군.”
철영은 짙은 잿빛으로 어두워지고 있는 서쪽 하늘을 바라봤다. 오늘 밤은 구름이 많이 끼어 칠흑과도 같은 어둠이 내릴 게 분명하다.
‘야습을 할까? 말까…….’
짙은 구름이 달을 가리는 만큼 저쪽도 야습에 대비할 게 분명하다. 더군다나 마기를 내뿜는 마교도들을 데리고 야습을 해 봐야 곧바로 저들이 눈치 챌 게 뻔하다. 그 때문에 그동안 몇 번이나 야습을 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시원찮았던 것이다.
“휴우~”
깊은 한숨을 내쉬는 철영을 보며 한중평 장로가 물었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내 마음이 편하게 생겼나? 옥패 장로는 전사했고 수하들도 많이 잃었네. 교주께서는 절대로 적과 정면충돌은 피하라고 신신당부까지 하셨는데, 내 욕심이 일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놨어. 교주님께서 돌아오실 때가 다 되어 가는 데…, 쩝, 내가 무슨 낯으로 교주님을 뵙겠나? 정말 막막하구먼.”
“피해는 컸지만 교주님께서 내린 임무는 완수해 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장인걸의 발목을 꽉 틀어잡고 있었으니까요. 아마 교주님께서도 그리 크게 문책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더군다나 놈들의 신무기를 입수하는 쾌거까지 이루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위로하기는 했지만 한중평 장로 자신도 교주의 문책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안색도 그리 밝지는 않았다.
“부상자들은 좀 어떤가?”
“모두 치료를 마친 후 운기조식에 들었습니다.”
이곳에 온 마교도들은 모두 창상(創傷)과 내상에는 익숙했기에 웬만한 상처는 자체적으로 치료가 가능했다. 하지만 상처가 아주 심할 때는 전문적으로 의술을 익 힌 의원에게 가야만 했다.
문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이곳에 의원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서 손을 쓰기 힘든 중상자들은 임시방편으로 치료만 한 뒤, 임무가 끝나 퇴각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습을 준비할까요?”
“오늘은 쉬기로 하지. 야습하기 딱 좋은 날인 만큼 저쪽도 대비를 충분히 할 거야. 오히려 밤보다는 새벽에 치고 들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
몇 날 며칠 동안 계속된 전투다. 양쪽 다 조건은 비슷했다. 이쪽은 무공이 뛰어난 만큼 체력이 좋고, 저쪽은 숫자가 많으니 교대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하지만 저쪽은 밤에 닥칠지도 모를 기습의 공포에 떨어야만 했고, 이쪽은 편복대의 쥐새끼들이 던져 대는 진천뢰 때문에 위쪽에 대한 경계를 엄중히 하다 보니 피 로가 가중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새벽에 계획대로 또다시 푸닥거리를 전개한 후였기에 모두들 상처를 치료하며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철영은 자신의 무능을 교주가 책망할 것도 두려웠고, 또 언제까지 계속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소모전 때문에 심신이 지쳐 있었다. 묵향이 언제 정확히 돌아온다고 약속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불편하니 잊고 있었던 장인걸에게 한 대 맞은 곳이 쓰라려 왔다. 독기를 내공으로 억누른 후, 나중에 살을 찢고 부패한 곳을 잘라 내 버렸기에 상처는 아주 깨끗하게 아물고 있었다.
하지만 꿰매 놓은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기에 한 번씩 쓰라려 왔다. 철영은 품속에서 금창약을 꺼내 상처 위에 바르며 투덜거렸다.
“이건 너무 불공평해. 나도 그 망할 흑살마공이나 익혔어야 하는 건데 그랬어. 이쪽은 한 대만 맞아도 목숨이 오락가락하는데, 그 새끼는 웬만큼 두들겨도 끄떡도 하지 않으니 원…. 이거 더럽고 치사해서 싸우겠나.”
이때, 경계를 서고 있던 수하가 달려오며 외쳤다.
“교주님께서 오십니다.”
순간 철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하지만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던―그날이 온 것이다.
철영은 한중평 장로 등을 거느리고 재빨리 교주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철영은 교주 일행의 모습을 보는 순간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놀랍게도 혈랑대원들이 모두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장로들 중에서도 무 공이라면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동방뇌무 장로의 왼팔이 날아간 모습에는 정말이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지경이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엉망진창인 몰골을 하고 있는 피로한 듯한 교주의 모습을 보고, 철영은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껏 저런 묵향의 모 습은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해 본 적도 없었으니까.
“오, 자네 왔구먼. 지금까지 수고가 많았네.”
“아니, 어떻게 되신 겁니까? 교주님.”
묵향은 허탈한 듯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장인걸 그놈이 파 놓은 함정에 빠졌다네. 그래도 자네가 이곳에서 잘 싸워 준 덕분에 더 이상의 피해 없이 여기까지 후퇴할 수 있었지.”
철영은 지체하지 않고 무릎을 꿇으며 입을 열었다.
“임무를 잘 수행했다니, 속하는 그 칭찬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놈의 발목을 잡기는 했지만 초기에 기습을 당해 옥관패 장로까지 잃었습니다. 교의 인재를 허무하 게 잃은 속하를 벌하여 주십시오!”
“허, 옥관패 장로가 죽었다고?”
철영의 말에 묵향은 가슴이 쑤셔 왔다. 묵향과 꽤나 인연이 깊었던 장로가 바로 옥관패다. 처음 무림에 출도하여 부분타주로 일했을 때나 나중에 천지문과 불가침 조약을 맺을 때, 당시 옥관패 장로가 외총관이었기에 그와 함께 일을 했었다.
곱추인 데다가 흑수마공(黑手魔功)까지 익혀 기괴한 형상으로 변해 버린 시커먼 손을 가진 추악한 몰골의 인물이 옥관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향이 그를 좋 아했던 건 그가 외모 따위에 굴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니…….
묵향은 침울한 표정으로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 이를 으드득 갈았다.
“장인걸, 이 쥐새끼 같은 놈으로 인해 너무 많은 피해를 입었어.”
분노한 묵향의 모습에 철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어느 정도 분노가 가라앉은 묵향은 철영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장인걸 그놈이 이번 전투를 대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 뒀는지는 본좌도 잘 알고 있네. 그래도 자네가 지휘를 잘해서인지 이쪽은 그나마 피해가 덜한 듯하니 다행일세.”
초기에 당한 매복 기습으로 인해 철영 쪽이 입은 피해는 상당했다. 하지만 혈랑대의 몰골을 보면 자신들이 받은 건 피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정도였다. 거의 극마급에 근접한 특1급 고수들만을 선발해서 구성한 전투단이 혈랑대인데, 그중 절반에 가까운 42명이 전사했다는 건 정말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더 군다나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서도 절반 이상이 한동안 거동도 하기 힘들 정도로 지독한 중상을 입었으니…….
철영 부교주는 동방뇌무 장로를 나중에 따로 만나 그간의 얘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얘기에 따르면, 금군 병사들이 끈질기게 화살을 날리며 저항한 탓에 사망자가 더욱 늘었다는 것이다. 만약 연경의 절반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치열 하게 전개된 그놈의 전투만 벌어지지 않았더라도 사망자의 수는 최소한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을 거라는 말이다.
심각한 중상을 입은 혈랑대원들의 상당수가 운기조식 중 산공(散功)으로 인해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 갔다.
역천의 무공을 익힌 자들이 지닌 숙명이 바로 산공이다. 평상시에는 상관없지만 노화나 부상으로 인해 내공을 지탱할 만한 여력이 없게 되면, 고무풍선이 터지듯 지금까지 모아뒀던 내공이 일순간에 흩어지며 사망하게 되는 것이다.
연경을 탈출한 후 약간의 시간을 얻게 되자, 묵향은 내상이 심한 대원들의 운기조식을 도와 그들의 내공을 안정시켰다. 하지만 많은 대원들이 그걸 기다리지 못하 고 연경에서 이미 사망한 후였다.
그때의 치열했던 전투를 들으며, 철영은 자신이 연경으로 가지 않게 된 걸 하늘에 감사했다. 만약 자신이 갔다면 절반은커녕, 어쩌면 아예 연경에서 몽땅 다 뼈를 묻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처음에 뭣도 모르고 연경으로 보내 달라고 간청했던 걸 생각하면 뒷골이 서늘해지는 철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