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5권 12화 – 죽음을 각오한 탈출 작전
죽음을 각오한 탈출 작전
며칠의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어느 정도 부상을 치료한 진곡추와 이진덕은 시간이 날 때마다 머리를 맞대고 탈출 계획을 짰다. 하지만 말이 좋아서 탈출 계획이었 지, 그들은 모두가 다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 거라고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들이 최우선적으로 생각한 것은 살아나가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획득한 정보가 상부 에 전해지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그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놈들의 속셈을 알 수가 없군. 왜 공격해 들어오지 않는 걸까? 동생은 혹시 짐작 가는 게 있나?”
발 빠른 제자를 시켜 밤에 슬쩍 주위를 둘러보게 하자, 우이 마을을 중심으로 촘촘히 포위망이 구축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문제는 적들이 포위망을 구축만 하고 있을 뿐, 그 어떤 도발도 해 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진덕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그놈들 속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들을 단숨에 해치우지 않고 가짜 패력검제까지 접근시킨 걸 보면,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건 확실한데 말입니다.”
“그러게 말일세. 그놈이 우리에게 물은 것이라고는 용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게 있냐는 정도였으니, 거참……..
“크크, 그거야 형님이 갑자기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된 것이냐고 물으니까 당황해서 떠벌인 소리겠죠. 이쪽에 잠입을 시키려면 좀 똘똘한 놈으로 보낼 것이지, 그런 어설픈 놈을 보내다니.”
“하긴 하지만 그 덕분에 그가 가짜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지 않았는가?”
두 사람은 어설픈 가짜 패력검제를 떠올리며 연신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이진덕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으득, 쫓길 때 전서구들만 죽지 않았다면 벌써 본부에 연락해 지원군을 요청했을 텐데…….”
그 말에 진곡추 역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짜 섬전수가 공격이 개시되기 전에 이미 비둘기 우리에 손을 썼던 것이다. 놈이 무슨 독약을 먹여 놨는지 모르겠지만, 멀쩡하게 보였던 비둘기들이 우리에서 꺼 내자 전혀 날지를 못했다. 그리고 적의 공격이 시작되자, 전서구를 가지고 있는 제자들이 가장 먼저 공격 목표가 되었다.
이진덕이 가짜 섬전수를 죽이기는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해 봐야 뭣 하겠나? 그런데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놈들이 선수를 치기 전에 탈출하는 게 최선일 것 같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짠 계획대로 탈출을 시도하세. 동생만 믿겠네.”
이진덕은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진곡추의 두 손을 덥썩 움켜잡았다.
“형님, 소제에게 무슨 복이 있어 이렇게 훌륭한 형님을 만나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하늘이 도와 우리 두 사람이 모두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제 평생을 형님 만을 위해 살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이 사람이 무슨 말을. 나야 천하에 피붙이 하나 없는 홀몸이지만, 동생은 부모님과 마누라가 있지 않는가. 그러니 내가 미끼가 되어 자네라도 살리는 게 훨 씬 이익인 셈이지.”
두 사람이 며칠 동안 짠 계획은 이랬다. 먼저 진곡추가 가짜 패력검제와 함께 탈출을 시도하며 적들의 이목을 모으면, 이진덕은 그나마 부상이 적은 개방도들과 적 의 포위망이 헐거워지는 틈을 타 발 빠르게 탈출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세부적인 계획을 점검한 후, 진곡추는 패력검제가 묵고 있는 객잔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동안 푹 쉬셨는지요, 대협.”
본의 아니게 발목이 묶인 패력검제의 마음이 결코 편할 리가 없었다.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이들을 외면하고 그냥 떠날 수도 없었다. 자신이 없 으면 죽을 게 뻔했으니까.
“도대체 구원 부대는 언제 오는 건가?”
“아마 틀린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직접 갔다 오겠네. 그게 최선일 것 같으니 말일세.”
물론 화경급 고수가 한밤중에 몰래 지원군을 요청하러 간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긴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자가 적이 보낸 첩자라는 데 있었다.
“하, 하지만 대협께서 안 계신 동안에 적들이 공격해 들어온다면…….”
진곡추가 이렇게 말한 건, 가짜를 이용해 탈출 계획을 세웠는데 그가 없으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그러자 패력검제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야. 어떤 방식으로든 움직여야겠어. 여기에 계속 죽치고 있어 봐야 상황만 더욱 악화될 뿐이야.”
“안 그래도 부분타주와 제가 짜 놓은 탈출 계획이 한 가지 있습니다.”
진곡추는 손가락으로 물 잔에서 물을 찍어 탁자 위에 우이 마을과 그 주위를 그려 놓고, 자신들이 짠 탈출 계획을 설명했다.
“오늘 밤, 묘시 초쯤에 이쪽을 돌파하는 겁니다.”
묘시 초라면 새벽 5시 무렵으로 하루 중 가장 많은 피로가 몰려오는 시간이기도 했다. 당연히 포위망을 구축하는 적들의 신경 또한 느슨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중상자들은 어떻게 할 건가?”
진곡추는 짐짓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마을에 놔두고 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겠지요. 괜히 데리고 가 봐야 짐만 될 뿐이니까요.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출발할 때 각자 다른 방 향으로 탈출하는 척하면서 적들의 혼란을 야기시킬 생각입니다.”
“알겠네. 그럼, 이따 보기로 하세.”
“예, 대협.”
가짜에게는 북쪽으로 난 산길을 통해 모두 다 도망갈 거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진곡추는 몸 상태와 무공을 중심으로 4개의 조로 나눴다. 1조에 속 한 운신이 불가능한 부상자들은 데려갈 수 없었으므로 우이 마을 곳곳에 숨겼다. 운이 좋다면 한두 명쯤은 살아남을 수도 있을 거라는 게 그들의 바램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를 모아 3개의 조를 만들었다. 이진덕과 진곡추가 계획한 탈출 작전의 핵심은 가짜와 함께 움직일 2조의 희생을 통한 3, 4조의 탈출이었다. 물론 탈 출 작전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서 마을 곳곳에 상부에 전달할 정보를 숨겨 놓았다. 설혹, 놈들이 마을을 통째로 불사른다고 해도 그걸 다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탈출 작전의 개요는 이랬다. 가짜에게 북쪽으로 도망칠 거라고 말해 놓으면, 당연히 그 정보가 새서 외곽에 포위하고 있는 적들에게로 전해질 것이다. 적들이 북쪽 을 중심으로 두텁게 포위망을 치고 있을 때, 가장 무공이 뛰어난 고수들로 구성된 3, 4조가 포위망이 헐거워진 남쪽으로 탈출을 하는 것이다.
만약 적들이 많아 도저히 탈출이 힘들 것 같으면, 3조가 적들의 이목을 끄는 동안 4조는 우회하여 탈출한다. 은신술이 뛰어난 무영문도들인 만큼, 3조가 놈들의 이 목을 끌어 주기만 한다면 충분히 탈출에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게 이진덕의 생각이었다.
두 사람은 가짜가 외부와 연락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일부러 그에 대한 감시를 풀었다. 적들이 마을 주변에 구축하고 있는 강력한 포위망을 흔들기 위해서 는, 자신들이 건넨 정보가 그쪽에 전달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마을을 탈출하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난 후, 진곡추는 이진덕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부디 살아서 정보를 상부에 전달하기 바라네.”
진곡추는 이진덕에게 어떤 방식으로 탈출할 것인지 아예 묻지 않았다. 자신은 미끼가 되기 위해 움직이는 만큼, 죽거나 놈들의 포로로 사로잡힐 확률이 높았다. 죽 는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사로잡혀 고문을 당하다 보면 3, 4조의 탈출로를 놈들에게 말하게 되는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진곡추의 마음을 익히 아는 이진덕의 심정은 결코 편안하지 못했다. 처음에 진곡추에게 뭔가 정보를 얻어 내기 위해 자신이 일부러 접근한 것이 아니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곡추는 진짜 형제와도 같은 정을 자신에게 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목숨을 버려 가며 자신의 탈출을 도우려고 하는 것이다. 이진덕은 눈물이 흘 러내릴 것만 같아 입술을 꽉 깨물며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마음 놓으십시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맹에 정보를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떠날 시간이군. 가능하면 모두들 다시 살아서 만나세.”
개방도들은 한곳에 모여 서로 간에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거지들의 단체인 개방인 만큼, 방도들 간에는 다른 문파에서는 볼 수 없는 끈끈한 정이 흘렀다. 창고나 다름없는 허름한 거처에서 함께 뒹굴다 보니 없던 정도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제 헤어지면 다시는 못 만날지도 모른다. 그런 만큼 서로 굳게 잡은 그들의 손은 쉽사리 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진곡추는 객실의 문을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대협, 진곡추입니다.”
곧바로 안에서 가짜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정말 목소리 하나만큼은 진짜 뺨칠 정도로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며 진곡추는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탁자 위에 따뜻한 차가 반쯤 들어 있는 찻잔이 놓여 있는 것으 로 보아, 가짜는 차를 마시고 있었던 모양이다.
“무슨 일인가? 출발을 하겠다고 한 시간은 아직 먼 것 같은데 말일세.”
“조금 시간이 이르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 출발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가짜에게 정보를 받아 묘시에 자신들이 나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 적들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서 진곡추는 탈출 시간을 앞당긴 것이다. 설마 진곡추가 자신을 의 심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패력검제는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검을 집어 들며 밖으로 나갔다.
“가세.”
진곡추는 가짜 패력검제를 데리고 객잔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세 명의 방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긴장한 표정이다.
“출발하자.”
진곡추는 일행을 데리고 마을의 북쪽으로 이동했다. 행여 다른 사람들의 이목에 발각이라도 될새라, 그들의 움직임은 아주 은밀했다. 적들은 마을 외곽을 포위하 고 있을 뿐, 일정 거리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살금살금 전진하던 진곡추가 살짝 손을 들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적이 있다는 신호였다. 그와 동시에 그를 따르던 거지들의 걸음이 딱 멈췄다.
뒤를 돌아보며 진곡추는 낮은 어조로 속삭였다.
“각 조가 돌격선상에 도착할 때까지, 잠시 여기서 대기.”
그 말에 패력검제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진곡추에게 들었던 것과는 달리 탈출을 하기 위해 서너 명만 모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소 수정예로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겠다는 것이리라. 그리고 어쩌면 며칠 전에 보냈다던 전령이 벌써 구원 부대를 이끌고 근처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
무공을 고도로 익히면 칠흑과도 같은 어둠 속에서도 시간을 가늠할 수 있다. 몸속을 따라 흘러가는 생체의 리듬을 통해 시간을 읽어 내는 요령이 생기기 때문이다. 굳이 별을 보고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약속된 묘시 초가 되려면 시간이 꽤 남았다. 그런데 휴식을 취하면서 잠시 시간을 가늠하는 것 같았던 진곡추가 갑자기 손을 번 쩍 들며 낮은 어조로 말했다.
“준비!”
묘시초가 되려면 아직 1각(15분) 정도 여유가 있었지만,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개방도들은 각자 무기를 쥔 손아귀에 힘을 줬다. 그리고 진곡추가 손을 앞으로 쭉 내뻗자, 그 신호에 맞춰 개방도 세 명이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그 순간 가짜 패력검제 역시 앞으로 내달렸다. 개방도들이 언제 달려 나갈지 알 수 없었기에 한 박자 늦게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움직임에 맞춰 진곡추도 달 려갔다. 지금쯤 가짜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을 게 분명했다. 이쪽 방향으로 모두 다 탈출할 거라고 얘기했었는데, 실상 여기 모인 것은 자신을 포함해도 다섯 명밖에 안 되니 말이다.
놈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들이 속고 있다는 걸 적에게 알리려고 할 게 분명했다. 진곡추가 한사코 이 죽음의 조에 남은 이유는 바로 그것을 저지하고자 해서였다. 정보가 적들에게 넘어가는 시간을 끌면 끌수록 성공 확률은 높아지니까. 비록 가짜라고는 하지만 화경급 고수의 행세를 하는 걸 보면 놈은 꽤 무공이 높을 게 뻔했 다. 그런 자를 없애는 걸 수하들에게 맡겨서는 도저히 안심이 안 됐던 것이다.
이때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밤하늘을 뚫고 울려 퍼졌다. 매복하고 있던 적들이 이쪽의 움직임을 포착한 것이다. 휘파람 소리는 그들의 앞에서도 울려 퍼졌고, 그 들의 등 뒤쪽에서도 아련하게 들려왔다. 아마 3조가 돌진해 들어가는 방향에서 들려오는 것이리라.
진곡추는 젖 먹던 힘까지 몽땅 다 끌어 올려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가짜의 뒤를 잡아야 놈을 해치우기가 용이하니까.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가짜와의 거리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앞서 달려갔던 개방도 세 명과의 거리가 점차 가까워지더니, 이제는 그들이 진곡추의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그만큼 가짜의 경공 속도는 놀라운 것이었다.
진곡추는 품속에서 수리검을 끄집어냈다. 도저히 가짜와의 거리를 좁힐 수 없는 만큼, 암기를 날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런 씨발! 예상보다 훨씬 더 무공이 고강한…….’
하지만 진곡추는 가짜를 향해 수리검을 던지지 못했다. 그 순간 사방에서 수많은 화살들이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흘리며 날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 는 화살을 피하거나 쳐 내야만 했다. 한순간이라도 다른 데 정신을 팔았다가는 목숨을 내놔야 하는 것이다.
이때, 그의 옆에서 둔중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크윽!”
고개를 숙인 방도의 등 뒤로 화살이 삐죽 솟아 나왔다. 화살이 폐를 꿰뚫은 것이다. 그를 구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판단한 진곡추는 다른 수하들을 향해 달려갔 다. 가짜를 없애는 건 이미 포기했다. 놈을 따라잡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남은 부하들도 화살의 밥이 될 게 뻔했기 때문에.
사방에서 쏟아져 오는 화살에만 온 정신을 쏟고 있던 진곡추는 상황이 조금 안정되자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서야 그는 적이 날리는 화살의 대부분이 가짜 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덕분에 아직까지도 그들이 살아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설마……?”
그때쯤 패력검제는 매복하고 있는 적들에게 도착했다. 그리고 그 순간 지금까지 쌓인 짜증스런 감정을 한순간에 폭발시키는 듯 무시무시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콰콰콰쾅!
패력검제를 중심으로 무시무시한 빛의 회오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아직 어두운 새벽이었기에 강기의 파편들이 뿜어내는 푸르스름한 빛은 너무나도 밝고 영 롱했다. 하지만 그것은 수많은 생명이 한순간에 소멸되는 것이기도 했다. 어둠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의 주위로는 피의 비(血雨)가 내리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진덕과 자신이 패력검제에 대해 엄청난 오판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패력검제는 가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진곡추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자신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탈출을 시도한 3, 4조원들이 그의 시야에 보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처절한 비명성을 터트리며 죽어 가는 수하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3, 4조가 위험해!”
뒤돌아선 진곡추가 채 몇 발자국도 내딛기 전에 수하들 중 한 명이 비명성을 터트렸다.
“크윽!”
천천히 앞으로 쓰러지는 그의 이마에는 화살 하나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어디선가 화살이 또 하나 날아와 그의 배에 박혔다. 하지만 더 이상 그의 신음 소리는 이어지지 않았다. 이미 숨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진곡추는 이제 하나 남은 수하에게로 달려갔다. 방금 수하 한 명이 쓰러지며 그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줬던 것이다. 그 혼자 3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봐야 시 체 한구를 더 늘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다는 걸 말이다. 그만큼 적들의 무공은 뛰어났다.
“이, 이럴 수가!”
이제 그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패력검제였다. 하지만 패력검제도 지금 그리 한가한 상태가 아니었다. 적은 처음부터 패력검제와 정면 대결을 펼칠 생각이 없었던 듯, 이리저리 도망만 다니다 그와 거리를 벌린 다음 사방에서 화살만을 날리고 있었다. 패력검제는 엄청난 경공술을 발휘하며 적들 을 주살하고 있었지만, 그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진곡추가 자신의 오판으로 인해 수많은 수하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는 자책감에 젖어 있을 때, 패력검제는 앞쪽에 있는 적들을 완전히 제압해 버렸다. 천천히 검집에 패왕검을 집어넣고 있는 패력검제를 향해 진곡추는 허겁지겁 달려가며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짙은 자책감과 비통함이 깔려 마치 흐느끼는 듯 들렸다.
“대, 대협!”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군. 자, 가세.”
“그, 그게 아닙니다. 지금 당장 남쪽으로 가야 합니다.”
과연 마을 남쪽 저 멀리서 희미하게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성이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세.”
만약 패력검제가 의문을 표시했다면 진곡추는 작금의 사태에 대해 어떻게 변명을 해야 좋을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패력검제는 더 이상 묻 지 않고 마을 쪽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진곡추는 이렇듯 자신을 믿고 따라 주는 패력검제를 지금까지 의심했고, 또 그 때문에 일이 이렇 게까지 엉망진창으로 꼬인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책감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때, 진곡추의 뒤쪽에서 화살 몇 대가 날아왔다. 패력검제를 피해 도망쳤던 적들이 멀리서 화살을 날린 모양이었다. 놈들과의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기에 화살에 는 그리 많은 힘이 실려 있지 않아 진곡추는 별 어려움 없이 화살을 막아 냈다. 하지만 무공이 낮아 제일 뒤쪽에 쳐져서 달려오고 있던 거지는 그렇지 못했다.
“크윽! 타주님…….?
재빨리 뒤로 돌아가 쓰러진 수하를 일으켜 세운 진곡추는 상처가 아주 깊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화살은 수하의 등 깊숙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힘내라. 마을로 돌아가서 치료해 줄 테니 말이야.”
“저, 저는 괜찮습니다. 동료들을…, 동료들을 먼저…….”
진곡추는 수하를 업고 마을 안쪽으로 죽을힘을 다해 달려갔다. 이따금씩 적의 화살이 등 뒤로 날아오는 게 느껴질 때마다 돌아서며 쳐 내긴 했지만,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화살 한 대 맞지 않고 있다는 건 정말이지 자신이 생각해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제 조금만 참으면 돼!”
화살이 날아오기 힘든 담벼락 뒤쪽에 도착한 진곡추는 재빨리 수하를 내려놨다. 그리고 응급처치를 하려던 그의 몸이 흠칫 굳었다. 수하의 등에는 화살이 몇 대 더 박혀 있었고, 이미 숨이 끊어졌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
진곡추는 이를 갈며 봉을 꽉 움켜잡았다. 하지만 적들을 향해 달려가지는 않았다. 혼자서 달려가 봐야 놈들의 화살에 꼬치가 될 게 뻔했으니까. 지금은 딴 생각 하 지 않고 마을을 관통해 남쪽으로 달려 내려가는 게 최선책이다. 그쪽에는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수하들이 있을 테니까.
진곡추가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수많은 거지들의 시체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진곡추는 무너지듯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눈에는 이내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단 한 번의 오판으로 인해 형제와 자식과도 같았던 동문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는 그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이때 어디선가 화살 한 대가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흘리며 진곡추를 향해 날아왔다. 이미 이성을 상실한 진곡추는 화살을 막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순간 패력검제가 손을 뻗어 그 화살을 가볍게 잡아 냈다. 놈들은 영악하게도 패력검제를 향해 화살을 날리지는 않았다. 처음에 갑작스럽게 접전이 벌어졌을 때만 해도 그가 누군지 확인하지 못하고 다짜고짜 화살을 날려 댔지만, 그들도 이제 아는 것이다. 그때 봤던 화경급 고수가 바로 이 사람임을 말이다.
“자네, 이들의 죽음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고 싶은가?”
갑작스런 물음에 진곡추는 멍한 눈으로 패력검제를 바라봤다.
“전체적인 계책을 어떻게 세운 것인지 노부는 잘 모르겠으나, 이렇게 세(勢)를 분산한 건 단 한 명이라도 적의 저지선을 돌파하기를 바랬던 게 아니었나? 그런데 자네는 처음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헛되이 목숨을 버리려 하고 있으니 이해하기 힘들구먼.”
이를 갈며 진곡추는 주먹을 꽉 쥔 뒤 땅바닥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적들을 향해 막 달려가려는 순간, 패력검제의 손이 그의 어깨를 꽉 잡았다. “노부가 길을 열 테니, 자네는 뒤를 따르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패력검제의 신형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적들을 향해 달려갔다. 진곡추에게 있어서 말로만 들어왔던 화경이란 경지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가를 몸소 깨닫게 해 주며…….
이진덕이 지휘하는 212조는 개방도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다. 워낙 촘촘하게 포위망을 구축해 놓은 상태라, 개방도들이 그들의 이목을 끌어 주지 않았다면 탈출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무영문의 비밀 분타로 이동하는 즉시 총단을 향해 보고서를 날렸다. 그리고 그 전서를 해독한 추밀단에서는 작은 소란이 벌어졌다. 212조가 생각지도 못한 대어를 건져냈기 때문이다. 추밀단주는 그 정보를 즉각 태상문주와 문주에게 알렸다.
* * *
이곳은 대송제국 황도 남경. 무영문의 남경분타주는 허겁지겁 걸음을 옮겼다. 문주를 수신인으로 하는 총단에서 띄운 전서가 방금 전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계시느냐?”
왕 타주의 질문에 경비 무사는 낮은 어조로 대답했다.
“창(敞) 선생과 환담을 나누고 계십니다.”
창선생이라면 비영단주를 칭하는 은어였다.
“그래?”
평상시라면 그냥 돌아갔겠지만, 이번은 경우가 다르다. 전서구가 가져온 대롱에 찍힌 문장은 특1급을 나타내고 있다. 즉시 문주에게 전달해야만 했다. 문주가 임 시로 기거하고 있는 방에 다가가자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성사에서 문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이유는 뻔하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만나보는 게 좋겠지요. 아직은 이용 가치가 있으니까요.”
“그래도 문주께서 직접 가실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후한 음성의 주인공은 비영단주의 것이었다. 여기까지 정감 있게 말하던 비영단주의 목소리가 갑자기 차가워졌다.
“무슨 일인가?”
아직 문을 연 것도 아니건만, 왕 타주는 납쭉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총단에서 전서가 도착했습니다.”
“들어오게.”
“예.”
왕 타주는 자신의 무례를 사죄한 후, 방금 전에 도착한 급전을 문주에게 건넸다. 전서의 등급은 특1급. 남경분타 내에서는 그 누구도 전서를 해독할 수 없었다. 왕 타주가 다시 고개를 조아린 뒤 밖으로 나가자, 문주는 비영단주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 전서가 담긴 대롱을 개봉했다.
전서의 내용은 아주 놀라운 것이었다. 특1급이라는 등급이 붙여졌다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문주는 전서를 비영단주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아주 재미있는 정보로군요.”
문주에게서 전서를 받아든 비영단주의 눈매가 매섭게 빛났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 정보는 천금(金)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문제는 이 정보를 알고 있는 자들 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개방을 배제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
대답은 안 했지만 문주의 표정을 보니 자신의 제안에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이 정보를 혼자서 독식할 수만 있다면, 무림맹으로부터 엄청난 대가를 뽑아낼 수 있을 게 분명했으니까.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을까요?”
완벽한 처리라는 말에 비영단주는 멈칫했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변수가 너무 많았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모든 가변 요소들을 검토해 본 비영단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군다나 이진덕 조장의 보고대로라면 212조가 무사히 그곳을 탈 출했다는 것 자체가 천행이라고 할 정도로 운이 좋았습니다. 만약 미끼가 되어 준 개방도들이 없었다면 탈출조차 불가능한 상황이었을 테지요. 제 판단으로는 그곳
에서 살아서 탈출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확신하듯 말하는 비영단주의 말투에 문주는 가볍게 놀라는 눈치였다. 언제나 신중하던 비영단주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이진덕 조장을 상당히 신뢰하시나 보군요?”
“겉보기와는 달리 화술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아주 용의주도한 녀석입니다. 무엇보다 아무리 사소한 것조차도 허투루 여기지 않고, 그 이면을 꿰뚫어보는 선천적 인 재능을 타고 났지요. 그 정도 나이에 조장에 임명된 사람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진덕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비영단주는 그의 보고를 완벽하게 신뢰했다. 그렇기에 그는 보고서 중간에 등장하는 가짜 패력검제 따위는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문주는 몇 가지 우려되는 점을 말했다. 비영단주가 그토록 신뢰하는 사람인 만큼, 그의 보고서가 틀림없다는 가정하에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본 것이 다.
“하지만 부상자들은 물론이고, 마을 여기저기에 비표들을 남겨 뒀다고 하는데, 모두 찾아 없앨 수 있겠어요? 만약 이진덕 조장이 개방도들이 어디에 비표를 숨겨 놨는지 모르고 있다면?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그 비표들 중 하나가 개방도들의 손에 들어간다면……?”
그렇다면 자칫 개방과의 무력 충돌로 이어질 위험이 너무 컸다. 하지만 비영단주는 별것 아니라는 듯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비영단주는 슬쩍 문주에게 조금 더 다가앉으며 낮은 어조로 말했다.
“마교 놈들은 212조가 탈출에 성공했다는 걸 아직까지 모르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마을에 남아 있는 개방의 부상자들과 비표들을 찾아내어 모든 흔적 을 지워 버린 뒤 최대한 빨리 그곳에서 벗어나려 할 겁니다. 그럼 우리는 놈들이 떠난 뒤 혹시라도 남아 있을 수 있는 흔적들만 없애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설혹, 나중에 개방에서 그 마을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 뭔가 눈치를 챈다고 하더라도 모든 혐의는 흑살마왕 쪽에서 뒤집어쓰게 되겠지요.”
비영단주의 말에 문주는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궁리하던 문주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교주와 무림맹 간의 중계를 통해 무영문 역사상 최대의 이익 을 볼 수 있는 건이 이제 막 성사되려는 시점에, 이런 것에 신경을 분산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깝기는 하지만 차라리 최대한 빨리 무림맹에 알리는 게 좋겠어요. 지금은 교주와의 건에 무영문의 전력을 기울여야 할 시기라고 생각되어지는군요.”
“그러지 마시고 태상문주님께 먼저 여쭈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무런 대가도 없이 맹에 넘기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정보이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노회하기 그지없는 옥화무제라면 이 상황에서 무영문이 최대한 이익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내리라는 굳은 믿음의 말이었다. 문주 역시 비영단주의 마음과 같았기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수하들을 출발시키는 게 좋겠습니다. 거기까지는 워낙 먼 거리니까요.”
옥화무제의 허락이 떨어지면 곧장 우이 마을로 달려가 모든 걸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그곳까지의 거리가 먼 만큼, 나중에 철수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먼저 부하들 을 출동시키겠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조심하도록 하세요. 이게 외부에 밝혀지게 된다면, 개방과 아주 껄끄러운 관계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핫핫!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심스런 문주의 말에 비영단주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호탕하게 대답했다. 비영단주는 밑바닥에서부터 온갖 험한 일들을 처리하며 성장해 이 자리에까지 선 사 람이다. 당연히 옥화무제의 딸로서 곱게 곱게 성장한 문주와는 그 배짱부터가 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