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5권 13화 –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너무나도 끔찍한 악몽에 독두개는 비명을 지르며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온 몸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흘리며 윗몸 을 일으키는 것조차 포기해야만 했다.
“크아아악!”
“여, 여기는……. 어디지?”
빠르게 주위를 둘러본 그는 자신이 꽤 근사한 침상에 누워있다는 걸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 형틀에 매여 지독한 고문을 당했던 것 같았는데…. 그게 모두 꿈이 었나? 몸이 아픈 상태에서 악몽까지 뒤섞이자 독두개의 머릿속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마치 아편이라도 한 듯 왠지 몽롱하면서도 어질어질한 것이 도저히 정상적인 생각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 건지 모든 게 불분명했다.
그 와중에도 독두개가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사실 한 가지는,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개방의 분타들 중 하나는 절대로 아니라는 점이다. 다 쓰러져 가는 폐가 (廢家)를 애용하는 개방의 분타에 이렇게 좋은 방이 있을 리 없으니까. 그러다 자신이 황성사의 고문 기술자에게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는 것을 간신히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감옥? 하지만 여, 여기는 아무리 봐도 감옥인 것 같지는……?”
그는 재빨리 몸속의 기를 움직여 봤다. 일단 내공이라도 쓸 수만 있다면, 최악의 경우 자살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혈도를 제압당했는지 단전에는 실낱 같은 기운조차 모이지 않았다.
독두개가 기를 쓰며 제압당한 혈도를 풀어보려 애쓰고 있을 때,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의생인 듯 보이는 중년인이 들어왔다. 독두개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 현 상 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의식을 되찾았다는 걸 상대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편이 탈출하기도 용이하리라. 중년인은 독두개를 진맥한 다음 이불을 들쳤다. 독두개의 몸에는 수많은 상처가 여기저기에 나 있었지만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깊은 상처는 하나도 없었다. 중년 인은 상처를 감싸고 있던 면포들을 벗겨 낸 다음, 새로이 약물을 바르고 깨끗한 면포로 다시 감싸 주었다.
중년인이 치료에 열중하고 있을 때,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중후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독두개는 사내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눈을 뜰 수는 없었다. 들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몸 상태는 어떤가?”
“예. 대단한 실력자에게 고문을 당했다는 게 오히려 행운이었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당했을지는 몰라도, 신체적인 손상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니 말입니다. 아마, 오늘 안으로 깨어날 테니 조장께서 걱정하실 필요까지는 없겠군요.”
“잘됐구먼.”
잠시 침묵이 이어지더니 조장이라 불린 사내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환자가 정신을 차리면 곧바로 내게 기별을 해 주게.”
“예.”
독두개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여유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곳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형부의 눅눅한 감옥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여기가 황성사란 말인가?”
그렇게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아무리 기억을 되새겨 봐도 놈들이 원하는 걸 해 주지는 않은 것 같았으니까. 아마 놈들은 고문이 통하지 않자, 자신을 황성사로 끌 고 온 모양이었다. 형부보다는 그쪽이 훨씬 더 다양한 고문 도구들이 갖춰져 있을 건 자명한 사실이니 말이다.
그 사람 같지도 않았던 놈의 기억이 떠오르자 독두개의 온몸에는 소름이 확 돋았다. 뼛속 깊은 곳까지 고통과 두려움이 각인되어 있을 정도로 놈의 고문은 지독했 다. 만약 또다시 그놈에게 고문을 당한다면, 이번에는 버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의 뇌리를 지배했다. 어쩌면 지금 이렇게 치료를 해 주는 것이 이번에 는 방법을 바꿔 약물로 자신을 마음대로 조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중후한 음성의 사내가 밖으로 나가고, 의생인 듯한 중년인 혼자만 방에 남았다. 그마저도 밖으로 나가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는 전혀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차가운 물수건으로 독두개의 몸을 닦아 주기도 하고,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씩 그의 몸 여기저기를 더듬는 게 느껴졌다.
중년인의 눈치를 살피며 기회를 노리고 있던 독두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행동을 개시했다. 내공을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아예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아 니다. 의생이 또 뭔가를 하기 위해 그에게 바싹 접근했을 때, 독두개의 상체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끄윽!”
순간적으로 독두개에 의해 목이 졸린 중년인은 끅끅거리는 소리를 토해 내며 버둥거렸지만, 더 이상의 행동은 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움직임이 둔해 지더니, 곧이어 축 늘어졌다.
독두개는 중년인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손에서 힘을 뺐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간에 자신을 치료해 준 사람인 만큼, 죽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의생이 가지고 있던 보따리를 뒤지기 시작했다. 샅샅이 뒤졌지만, 아쉽게도 그가 원하는 걸 찾지는 못했다.
“젠장, 무슨 놈의 의생이 칼 한 자루도 안 가지고 다녀.”
방 안을 살피던 독두개는 투덜거리며 침상 위에 놓여 있던 면포들을 묶어서 길게 하나로 연결했다. 면포 세 개를 묶으니 자신이 원하는 길이만큼은 되었다. 그걸 손에 들고 독두개는 천장을 두리번거리며 뭔가 걸 만한 자리가 있는지 살폈다. 곧이어 그는 자신이 원하는 걸 찾아낼 수 있었다.
“한창때는 싸우다 죽는 걸 꿈꾼 적도 있었지. 하지만…, 젠장! 서까래에 목매달고 죽을 팔자였을 줄이야.”
그로서는 이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판에 탈출을 감행한다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몇 발자국 채 나가지도 못해서 곧바로 붙잡힐 게 뻔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두 번 다시 이런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
의자 위에 올라선 독두개는 서까래에 매단 면포에 목을 걸었다. 이제 의자를 발로 밀치기만 하면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리라. 하지만 그는 마지막 행동을 하지 못 하고 계속 머뭇거렸다. 그라고 해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고 싶겠는가.
“교주! 이 개새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남경분타주로 있으면서 배 두드리며 편안히 잘 먹고 잘살았던 독두개였다. 그런데 그놈의 교주 놈 때문에 이렇게 인생이 확 꼬여 버린 것이다. 자살을 하기 전, 자 신이 알고 있는 모든 욕설을 교주에게 퍼붓던 독두개는 이를 뿌드득 갈며 의자를 발로 차 버렸다. 잠시 허공에서 버둥거리던 독두개의 두 다리가 얼마 시간이 채 지 나기도 전에 축 늘어졌다.
* * *
“지급(至急)으로 도착한 전문입니다.”
문관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 들어오며 전서 한 장을 내밀었다. 전서에는 총관을 수신인으로 지정하고 있었으며, 수신자 외에 그 누구도 암호를 해독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보통 외부에서 날아오는 전서들은 모두 다 추밀단으로 보내져 해독된다. 정보를 수집하는 비영단(秘影團)과 그 정보를 해독하는 추밀단(諏密團)의 2원적 체계로 만들어진 이유는, 어느 한쪽이 의도적으로 정보를 왜곡하거나 차단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런 공식적인 정보 이동의 체계를 무시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전서의 내용이 기밀을 요한다는 표시였다. 추밀단에게까지도 숨겨야 할 정도로.
전서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암호로 기록되어 있긴 했지만, 총관은 책자 따위에 의지하지도 않고 단숨에 그걸 풀어 냈다. 머릿속에서 내용이 해석되어 나감에 따라 총관의 눈은 놀라움으로 인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이럴 수가 있나!”
총관은 전서를 꾸깃꾸깃 한 덩어리로 만들어서는 입속에 털어 넣은 다음, 밖으로 나가면서 자신의 수하들에게 말했다.
“약당으로 갈 테니 급한 일이 있다면 그쪽으로 기별을 하도록 해라.”
“옛.”
총관은 전력을 다해 경공술을 전개해 달려갔다. 하지만 속도는 그리 빠르지 못했다. 오히려 총관보다는 그를 수행하고 있는 두 명의 무사들의 발걸음이 훨씬 더 안 정되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는 젊었을 때부터 행정직에 종사해 왔고, 어느 정도 높은 직책에 오른 후에는 너무 바빠서 무공 수련을 할 짬을 내기도 힘들 었다. 그가 총관에 임명된 것은 무공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정보를 처리함에 있어 특출난 능력을 보인 덕분이었다.
“수고가 많구만, 약당 당주.”
“총관님이 아니십니까. 정말 오랜만입니다.”
병에 걸리지 않는 이상 약당에 올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기에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차라도 한 잔 드시겠습니까?”
“성의는 고맙지만, 그럴 시간이 없구먼. 내가 당주를 급히 찾은 건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일세.”
“말씀하시지요.”
총관은 거의 습관적으로 주위를 쓱 한 번 둘러봤다. 비밀을 요하기 위해 자신을 호위하고 온 무사들은 처음부터 방 밖에서 대기하라고 지시를 내려두었기에 당주 의 집무실에는 총관과 약당 당주 단 두 사람뿐이었다.
<약에 대한 지식이 모자라, 몇 가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있기에 자네를 찾은 것이네.>
총관의 전음에 당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자네가 파견해 준 의생 있지 않나.>
<아, 예. 나이는 젊지만 실력이 아주 뛰어나다는 건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총관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방금 전에 전서에서 봤던 내용을 당주에게 들려줬다. 환자가 목을 맸는데, 마취약의 약효가 남아 있는 상태라는 게 한 가지 희망이라 는 것이었다. 그런데 약물에 문외한인 그로서는 목을 매다는 것과 마취약이 무슨 연관을 지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걸 알아야 상관에게 제대로 된 보고를 할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래서 체면불구하고 약당으로 달려온 것이다.
당주는 총관의 의문에 이해할 수 있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마취약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대상이 죽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전신(全身)에 작용하는 강력한 것이었지요.>
고문 중의 실수로 독두개가 죽은 것처럼 위장하여 그를 빼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알고 있네.>
<이 마취제는 대상이 죽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신체 활동을 극도로 저하시킵니다. 신체 활동이 저하되는 만큼, 신체의 각 부위가 필요로 하는 혈액의 양 또한 현격히 줄어들게 되죠.>
약당 당주는 손으로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 같은 모양을 취해 보였다.
<평상시보다 머리 쪽에서 필요로 하는 혈액의 양이 줄어드는 만큼, 여기가 이렇게 꽉 틀어 막혔다고 해도 뇌가 좀 더 버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야 이해가 가는지 총관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허, 자네 설명을 듣고 보니 상황이 아주 고무적이로구먼.>
<그렇게 고무적은 아닙니다. 어찌 되었건 마취약의 기운이 없을 때보다는 상황이 훨씬 좋은 건 사실이겠지요. 환자가 숨은 쉬게 되었다니 다행이기는 합니다만, 그 상태로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은 총관께서도 미리 인지하시고 계셔야 할 겁니다.>
<영영 못 깨어날 수도 있다고?>
<예. 만약 뇌에 충격을 받았다면 그 상태로 계속 누워만 있는 것이죠. 물론 목에 가느다란 관을 박아서 음식물을 조금씩 넣어 주는 등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한 여 러 가지 기법들이 있긴 합니다만, 그런 것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3개월 이상 생명을 유지시킨 전례는 없으니까요.>
약당 당주의 집무실을 나선 총관은 이 일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한동안 홀로 고민하던 총관은 이 일을 누군가에게 알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기 혼자만끙끙 앓고 있어 봐야 해결되는 건 전혀 없으니까 말이다. 잠시 고민하며 서 있던 총관은 부문주에게 이 일을 알리고, 조언을 청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 다. 이번 일을 지시한 것은 태상문주였지만, 지금 그녀는 이곳에 없었기 때문이다.
총관은 먼저 태상문주에게 이번 일의 경과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를 전서로 날렸다. 그런 다음 부문주실로 달려갔다.
“기별을 넣어 주게.”
집무실 앞에 서 있던 경비무사는 총관의 말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안에 상관운 장로께서 와 계십니다.”
상관운 장로는 태상문주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실세 중의 한 명이다. 독대를 청한다며 그에게 물러가 달라고 요청한다는 것은 총관으로서도 상당한 부담이었 다. 그렇다면 나중에 보고를 올리는 게 좋을까?
잠시 망설이던 총관은 다시금 마음을 잡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당장 부문주에게 보고를 해 두는 것이 좋을 듯싶었기 때문이다. 보고를 하지 않은 상황에서 만 약 일이 잘못된다면 혼자 그 책임을 다 덮어쓸 것이 뻔할 테니까.
“기별을 넣어 주도록 하게.”
경비무사는 이번에는 주저하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쳤다.
“부문주님, 총관께서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매영인과 상관운 장로는 다과를 함께 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던 모양이다. 몰래 엿들은 건 아니지만, 이 둘이 지금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지는 총관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의 정식 직책은 ‘무영문 총단 총관’으로, 총단의 각 부서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각 부서간의 업무를 조정하려면, 그쪽에서 어 떤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를 수가 없게 된다. 그러다 보니 각 부서를 책임지고 있는 당주나 장로급에 비해 시각의 폭은 더욱 넓었던 것이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부문주님.”
“급한 일인가요?”
“예, 부문주님. 태상문주님께서 지금 무림맹에 가 계신지라…….”
총관은 뒷말을 일부러 어물어물 흐리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뜻은 매영인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태상문주가 직접 관장하던 일인 만큼 특급 정보라는 말이다. 상관운장로라 하더라도 접근이 허용되지 않을 정도로.
매영인은 상관운 장로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공손하게 양해를 구했다. 상관운 장로 역시 자신이 들어서는 곤란한 정보라는 걸 눈치 챘는지 별 말 없이 문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관운 장로가 문 밖으로 완전하게 나간 후에야, 총관은 입을 열었다. 독두개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걸 말이다.
“독두개라고요? 어디서 들었던 이름 같은데.. .?”
총관은 매영인의 기억을 돕기 위해 재빨리 설명했다.
“독두개는 이번에 교주에 의해 벌어진 남경 참사에 연루된 개방의 남경분타주 이름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나는군요. 형부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들었었는데…….”
총관은 품에서 문서 몇 장을 내밀며 말했다.
“공식적으로는 황성사에서 파견나온 고문 기술자들에 의해 지독한 고문을 받던 도중 갑자기 숨이 끊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요?”
“황성사 측에서도 소중한 포로였던 만큼, 그가 죽을 정도로 무작스럽게 고문했을 리 없지요. 실제로는 그쪽에 잠입하고 있던 우리쪽 요원이 틈을 노리고 있다가 아주 강력한 마취약을 사용하여 그가 죽은 것처럼 꾸민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누구에게도 의심을 받지 않으면서도 그를 구출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매영인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그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왜 그 고생을 하면서까지 독두개를 빼내 온 거죠? 그가 그렇게 이용 가치가 큰 인물이었나요?”
매영인의 의문은 당연했다. 개방에도 무영문의 첩자들이 상당수 활동하고 있다. 그들을 통해서 웬만한 정보는 다 빼낼 수 있는데, 구태여 남경분타주를 포섭한답 시고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일이 잘못되면 황성사를 적으로 만들 수 있는 위험까지 있는데 말이다.
“태상문주님의 명령이었습니다.”
매영인은 의외인 듯 눈썹을 찡그렸다.
“할머니께서?”
“예. 지금 태상문주님께서 출타 중이시기에, 어떻게 대처를 하는 것이 좋을지 달려온 겁니다.”
매영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옥화무제의 지시를 통해 구출해 온 인물이라고 하지만, 겨우 남경분타주 따위가 목을 매달았다고 해서 총관이 저렇게 초조한 안색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뭔가 아직 자신에게 보고 되지 않은 사항들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걸 알아야만 자신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있으리라. 매영인은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조언을 필요로 한다면, 모든 걸 솔직히 말해 주세요. 할머니께서는 그를 어디에다가 쓰려고 데려온 거죠?”
총관은 멈칫했지만, 어쩔 수 없었는지 자신이 아는 바를 모두 실토했다. 사실, 이 부분은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밝혀서는 안 되는 극비 사항이었다. 심지어는 문주 에게까지도 비밀로 하고 있을 정도로.
“교주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를 아무런 흔적도 없이 형부에서 빼내 오라는…….’
매영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그분이 왜 그런 요청을 한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군요. 독두개가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었나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총관은 남경에서 묵향이 독두개를 어떻게 이용해 먹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얘기를 듣고 있던 매영인이 문득 입을 열었다.
“죄책감…, 때문일까요?”
총관은 절대로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철혈의 세계에서 성장해 온 교주가 죄책감 따위를 가지고 있을 리 없지요.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직은 그가 교주에게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 까?”
“흐음,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를 살려서 교주에게 인계해 줘야 한다는 말이군요.”
“예, 부문주님. 교주에게 그가 필요한 존재인 만큼, 태상문주님께서도 이번 일을 처리해 준 이후에 뭔가 큰 대가를 받아 내실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계셨습니다. 교주는 지금까지 이런 부탁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거든요.”
“할머니께는 연락을 넣었나요?”
“예. 이리 오기 전에 전서를 띄웠습니다.”
“그렇다면 할머니께 연락이 오기를 기다…….”
여기까지 얘기하던 매영인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총관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교주께 공문을 띄우도록 하세요. 독두개를 구출하기는 했는데, 고문으로 인한 상처가 너무 깊어 그쪽으로 보내 줄 수가 없다고 말이에요. 그를 치료한 다는 핑계로 시간 여유를 얻으려면, 최대한 빨리 그분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게 좋겠어요. 며칠 지난 후라면 오히려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까요.”
“오, 정말 좋은 계책이십니다. 그렇게 해 놓으면 나중에 독두개가 깨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변명하기가 훨씬 편하겠군요.”
“그 뒤의 일은 할머니의 지시를 따르도록 하세요.”
“예. 즉시 양양성으로 전령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총관이 나가고 난 후, 매영인은 다시 한 번 총관이 건넨 보고서를 읽어 봤다. 아무리 교주의 요청이었다고는 하지만, 황성사에서 사람을 빼내 오다니. 만약 이 사실 이 밖으로 새나 간다면 황성사의 무시무시한 보복을 당할 수도 있었다. 교주야 황실을 두려워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무영문은 달랐다.
갑자기 그녀가 들고 있던 문서들이 확 하고 불타오르더니,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내공을 끌어올려 태워 버린 것이다.
“죄책감이라…….”
매영인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떠올랐던 것일까? 과거 교주의 밑에서 인질로 잡혀 있기까지 했었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그 당시 교주는 정파무림에서 섬서분타를 쳤을 때, 인질들을 일부러 그곳에 남겨 두려고 했었다. 그쪽에서 죽어 버린다면 오히려 정파 쪽에 올가미를 걸기 딱 좋았으니 까.
“그래…, 그분은 인정에 얽매이기보다는 실리를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었지.”
당시 그녀는 마화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하지만 나중에 인질에서 풀려난 후, 더욱 기억에 남았던 사람은 냉혹하기 짝이 없었던 교주였다. 그건 아마도 그녀가 그때까지 살면서 그토록 강렬한 인상을 남긴 사내를 만난 적이 없었던 탓이 컸을 것이다. 사실, 그녀는 그때까지만 해도 남자라는 동물을 하찮은 벌레쯤으로 생각하 고 있었던 콧대 높은 아가씨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