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5권 14화 – 꼬인다, 꼬여

꼬인다, 꼬여

맹주는 뜻밖의 인물이 자신을 찾아왔기에 잠시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양성 무림인들의 총 책임자인 곤륜무황이 무림맹까지 홀홀단신으로 달려왔다니. 웬만한 일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맹주였지만, 수하의 보고를 믿기가 힘들 정도였다.

누군가와 의논이라도 해 본 다음에 만났으면 좋겠지만, 그럴 여유도 없었다. 옥화무제라면 숙소를 정해 주면서 나중에 시간이 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해도 상관 없겠지만, 곤륜무황은 그렇게 취급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정파 최고의 배분을 지닌 3황 중 한 명이었으니까.

“어서 들어오시라고 하게.”

서로 간에 정중한 인사가 오간 다음, 맹주는 자리를 권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시오이까?”

“맹주께 한 가지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이렇게 달려왔소이다.”

“허허,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기탄없이 말해 주시구려. 노부가 해 드릴 수 있는 거라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소이다.”

“혹, 마교에서 제안이 있었지 않았습니까?”

설마 곤륜무황의 입에서 교주 얘기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맹주였다. 그의 얼굴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지만, 곤륜무황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길게 얘기하지는 않겠소이다. 교주가 그토록 숙이고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거신 이유가 뭡니까? 그의 청을 거절하실 생각이십니 까?”

말도 안 되는 조건이라는 말에 맹주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분명 옥화무제에게 교주의 청을 허락하겠다고 답을 했는데, 이게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말인가. 그렇기에 맹주는 불쾌한 음색으로 대꾸했다.

“허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소이다.”

“모르겠다니요? 교주의 제안을 들어 주는 조건으로 지금껏 마교에서 약탈해 간 모든 무공비급의 원본을 돌려 달라고 하셨지 않소이까? 그것은 빈도가 생각해도 너무 지나친…….”

하지만 곤륜무황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말에 어리둥절하게 바뀐 맹주의 얼굴을 봤기 때문이다.

맹주는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다.

“허허, 거참. 노부가 약탈해 간 비급을 몽땅 다 돌려 달라고 했다고요?”

“그렇소이다.”

“대체 그런 소문은 누구에게 들었소이까? 혹, 교주가 그딴 소리를 합니까?”

곤륜무황은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니오이다. 현재 양양성을 책임지고 있는 관지 장로라는 인물이 교주의 친필 서한을 가지고 와서 빈도에게 하소연하더군요. 맹주의 처사가 너무 심하다고 말이오.”

그렇다면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로급 되는 인물이 교주를 사칭해 허튼짓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이런 중대한 사안을 가지고 말이다.

맹주는 수염을 손가락으로 꼬며 난처한 듯 중얼거렸다.

“허~, 그것 참…….”

“왜 그러시오?”

어이가 없는지 몇 번 헛웃음을 흘린 맹주는 재촉하듯 대답을 요구하는 곤륜무황의 질문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옥화 봉공께서 장난을 좀 치신 모양인데……. 그거 참…,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갑자기 옥화무제가 여기에 거론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외다.”

“교주가 협상을 위해 대리인으로 내세운 사람이 그녀이기에 그렇소. 봉공은 교주가 이번 일을 해 준다면, 지금껏 마교에서 노획해 간 모든 무공비급의 사본을 제 공하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했소이다. 절전된 것도 있겠지만, 아주 오래전에 제작된 각 무공의 초기형까지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아니겠소? 이런 제안을 어찌 노부가 마다할 수 있단 말씀이오. 곧바로 장로회의를 열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소이다.”

자신이 들었던 바와는 전혀 다른 맹주의 답변에 곤륜무황의 안색이 살짝 바뀌었다.

“그게 사실이오?”

“지금 밖으로 나가서 아무 장로나 붙잡고 물어보면 금방 들통 날 일인데, 왜 내가 그대에게 거짓말을 한단 말이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외다.” 곤륜무황은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옥화무제가 교주에게 그렇게 전한 이유는 뭘까요? 설마…, 그녀가 이번 계책이 성사되지 못하도록 중간에서 이간질을 하는 건 아닐 테고……?”

심각한 곤륜무황과 달리 맹주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 그녀와 오랜 세월 상대하다 보니 이 정도쯤이야 애교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듯 이.

“어쩌면 협상의 방편일 수도 있겠지요. 처음부터 교주에게 절전된 무공의 사본을 돌려 달라고 한다면 교주가 바로 응하겠소? 가장 뛰어난 무공들 중 일부는 빼 버 리려고 하겠지요. 그런 만큼 처음에 원본을 달라고 했다가 사본 쪽으로 후퇴한다면, 교주에게 생색은 생색대로 낼 수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무림맹에는 엄청난 이 익을 안겨 줄 수 있다는 생각이었겠지요.”

충분히 말이 되었기에 곤륜무황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그 말만 믿고 양양성에서 여기까지 죽어라 달려오지를 않았는가. 그런데 알고 보니 옥화 무제의 협상 전략에 교주만이 아닌 자신까지 놀아난 꼴이 된 것이다.

입맛이 썼던 곤륜무황은 연신 헛웃음만을 흘리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허허, 그거 참…….”

“혹시 교주를 만나 이 얘기를 해 주실 생각이신 게요?”

맹주의 물음에 곤륜무황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해야지요.”

그러자 맹주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신다고 해서 좋을 건 없다고 생각되는구려. 교주와 친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건 그녀밖에 없지 않소. 만약 교주가 그녀에게 속은 걸 알고, 그녀를 아 예 내쳐 버린다면 곤란한 건 이쪽이라는 말이오.”

“물론 그 정도는 알고 있소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달려왔으니 교주에게 생색은 내야 하지 않겠소?”

씨익 미소 짓는 곤륜무황을 보며, 맹주는 변방의 산골짜기에 파묻혀 살긴 하지만 그가 결코 사고가 편협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말을 맞춰야 하지 않겠소? 옥화 봉공에게도 기별을 넣어 줘야 할 테고…….”

말을 맞출 것도 없다는 듯 곤륜무황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1시진 정도 빈도와 언쟁을 한 결과, 사본 정도로 합의를 본 것으로 합시다.”

곤륜무황의 말을 잠시 생각해 보던 맹주가 문득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소이다.”

“뭡니까?”

“곤륜파의 비급이야 교주에게 넘겨받더라도, 나머지는 본맹에 직접 넘겨 달라고 전해 주셨으면 하오.”

그제야 맹주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곤륜무황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흐음…, 맹주께서는 그녀의 목적이 바로 그거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구려.”

맹주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노부는 봉공이 본맹의 이익을 위해 그토록 큰 모험을 감행하고 계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소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곤륜무황은 맹주를 향해 제안을 하나 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노부가 교주와 만난 김에 이번 사안에 대해 깔끔하게 담판을 지어 버리는 편이 낫지 않겠소이까?”

잠시 생각을 하던 맹주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무황께서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요. 그럼 수고를 좀 해 주시겠소이까?”

속에 몇 마리의 능구렁이가 들어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옥화무제보다야, 오랜 세월 동안 같은 정파의 일원으로 지내온 곤륜파의 곤륜무황이라면 맹주 역시 안심이 됐다. 그렇기에 가능하다면 곤륜무황이 교주와의 연결 고리가 되는 것을 원한 것이다. 물론 옥화무제로서는 뒷골을 붙잡고 뒤로 넘어갈 일이겠지만….

* * *

옥화무제는 묵향이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무영문의 분타에 기거하고 있는 중이다. 적절한 순간을 노려 묵향을 만나려면 이게 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금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중이었다. 너무 빨리 묵향에게로 가면 그가 의심할 가능성이 있었다. 맹주와 오랜 시간 협상해서 겨우 양보를 얻어 냈다는 식의 공치사를 받으려면, 아무래도 상대방의 애를 바싹바싹 태우는 게 좋았다. 그래야 교주도 흔쾌히 자신이 내건 조건을 수락하게 될 테니까.

협상을 중개해 준 대가로 교주에게 어떤 걸 요구하는 게 좋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동안 노획한 무공비급의 사본까지 넘겨 줄 정도니, 그녀에게도 분명 아주 화끈한 대가를 지불할 게 틀림없다.

“뭐라고 서두를 꺼낼까? 당신이 고마워하는 마음을 표현해 줘요? 아냐. 그건 너무 밋밋해.”

이때, 갑자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상문주님. 속하, 최창이옵니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최창 분타주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요?”

“본문에서 급전이 도착했사옵니다.”

옥화무제는 분타주가 건네는 작은 대롱을 받아들었다. 대롱에는 특1급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옥화무제는 서둘러 대롱을 개봉하고, 전서를 읽어 내려갔다. 난해하 기 짝이 없는 암호문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서서히 해독되었고, 그녀의 눈에는 놀랍다는 빛이 떠올랐다.

212조장 이진덕의 보고서를 읽으며, 그녀는 개방에도 제법 뛰어난 인물들이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그녀의 수하들에 비하면 훨씬 급이 떨어지지만. 하 지만 획득한 정보를 상부에 전달하기 위해 어떤 희생이라도 불사하는 그들의 모습에 옥화무제가 감명을 받은 건 사실이다.

“개방도 제법이로군.”

이때, 밖에서 또다시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타 내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 있는 것은 겨우 분타주 정도다. 그렇기에 이 문 두드리 는 소리는 분타주를 찾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걸 잘 알기에 옥화무제 옆에서 조용히 시립해 있던 분타주의 인상이 왈칵 일그러졌다. 태상문주님을 만나는 중인데 감히 그걸 방해하는 놈이 있다니. 잠시 실례 하겠다는 말도 못하고 그저 눈치만 살피고 있을 때, 옥화무제의 말이 들려왔다.

“뭘 하고 있죠? 최 타주를 찾는 모양인데, 나가 보세요.”

“송구하오나, 잠시 실례하겠사옵니다.”

잠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분타주가 허겁지겁 다시 들어왔다.

“맹에서 이게 도착했다고 하옵니다.”

방금 전에 분타주가 들고 들어왔던 것과 같은 모양의 대롱이었다. 특3급의 인장이 찍혀 있었지만, 발신처가 무림맹이었기에 그녀는 황급하게 봉인을 뜯고 전서를 읽기 시작했다. 무림맹에 파견되어 있는 지부장이 발신할 수 있는 최고의 비밀 등급이 특3급인 만큼, 아주 중요한 내용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옥화무제는 분타주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맹에 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해 주세요.”

“옛, 태상문주님.”

분타주가 밖으로 달려나간 후, 옥화무제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맹주가 왜 나를 보자는 거지?”

교주와의 협상에 대한 맹주의 허락은 이미 떨어진 상태였다. 맹주가 자신을 찾는 것은 그 외에 다른 일거리가 생겼다는 뜻일 텐데, 옥화무제로서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자신을 급히 찾을 만큼 화급한 사안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옥화무제를 태운 마차가 무림맹에 도착한 것은 석양이 질 무렵이었다. 날이 늦었기에 그녀는 이튿날 맹주를 만나보고 싶다는 청을 넣을까 하다가, 저쪽에서 급히 찾았던 터라 곧바로 청을 넣었다. 정말 급한 일이라면,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맹주는 자신을 만나려고 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곧 장 맹주에게로 안내되었다.

“어서 오시구려, 옥화 봉공.”

“급히 저를 찾으셨다면서요?”

“그렇소. 자, 앉으시구려.”

맹주는 자리를 권한 후, 급히 그녀를 찾은 것 치고는 너무나도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기에 옥화무제는 맹주가 왜 자신을 급히 찾은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 이 더욱 커져만 갔다.

“허허, 봉공께서 바쁜데 뵙자고 청한 건 아닌지 모르겠구려.”

“안 그래도 이 근처에 올 일이 있었던 참이었으니, 그리 걱정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일이 있으셨던 게로구려. 그래, 언제 출발하시려고?”

“내일 오전에 출발할 예정이에요.”

“그럼 좋은 용정차가 새로 들어왔는데, 다향을 맡으며 담소를 나누는 게 좋지 않겠소?”

그녀의 속이 궁금증으로 새까맣게 타 들어가는 걸 즐기며, 맹주는 이런 저런 쓸데없는 대화로 시간을 끌었다. 그게 맹주 나름대로의 복수였으니까. 그녀가 맹주에 게 질문을 던질 만한 여유를 얻을 수 있었을 때는, 그 망할 용정차를 한 모금쯤 마신 후였을 때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급히 찾으셨는지.. .?”

“흠, 서신으로 전해도 큰 무리는 없는 일이겠으나, 그렇게 하는 건 지금까지 수고를 하신 봉공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하여 부른 것이외다.”

말을 듣던 옥화무제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예의가 아닌 것 같다니요?”

“지금껏 교주와의 협상을 위해 고생을 하셨는데, 이제 더 이상 그런 폐를 봉공께 끼칠 수는 없다고 생각이 되어서 말이외다.”

맹주의 폭탄 선언에도 불구하고 옥화무제의 표정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기절하기 일보직전인 상태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그녀는 맹주의 말을 단 한 마디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교주의 제안에 뭔가 문제가 있었습니까? 그건 제가 알아서 책임지고 반드시 대가를 받아낼 수 있도록 해 드리겠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허허, 그런 얘기가 아니오. 곤륜무황이 본좌에게 제안을 했소. 교주도 지금 양양성에 있으니, 자신이 이번 일을 처리하겠다고 말이외다. 사실, 가까운 거리도 아니 고, 멀리 떨어져 계신 옥화 봉공께서 고생스럽게 맹과 양양성을 오가며 협상을 중개하시는 게 못내 미안하던 참이었던 터라, 노부는 흔쾌히 곤륜무황의 제안을 받아 들였소.”

뻔뻔스러운 맹주의 말에 너무나도 화가 치밀어 손가락마저 부들부들 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옥화무제의 얼굴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가볍 게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흥, 무황께서 아무리 이번 일을 맡고 싶어 하신다고는 하지만, 과연 그분이 교활하기 짝이 없는 교주에게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어 낼 수 있으실까요?”

“허허, 그거야 무황께서 알아서 하시겠다고 하니 그저 믿고 있어야겠지요.”

너무나 능청스러운 맹주의 모습에 옥화무제는 약이 바짝 올랐다. 이건 의도된 수순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뭘 믿고 맹주 가 무황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인지 말이다. 예로부터 곤륜파와 마교는 악연으로 점철된 원수지간이 아닌가. 무슨 속셈으로 곤륜무황이 이 일에 끼어들었는지도 알 수가 없지만, 그걸 넙쭉 허락한 맹주의 속셈도 알 길이 없었다. 특히 지금처럼 그녀가 냉철함을 유지하기 힘들 때는 더욱.

그렇기에 그녀는 일부러 퉁명스레 말했다.

“맹주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본녀는 완전히 이번 일에서 손을 떼도록 하겠어요. 물론 마교의 입장을 전달하는 중계자의 역할까지도 말이에요. 만약, 차후 마 교와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본녀는 전혀 모릅니다.”

이런 식으로 강경하게 나간다면 약간이나마 찔끔할 것이라는 옥화무제의 예상과는 달리, 맹주는 자신이 바랬던 것이 바로 그것이라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막중한 임무에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을 테니 봉공께서도 좀 쉬셔야지요. 그리고 봉공께서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 곤륜무황께 협조를 요청한 것은 맹이 아니라 바로 마교에서였소.”

그 말에 옥화무제는 너무나도 황당해서 잠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좀 빡세게 조건을 제시했다고 하지만, 그 자존심과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교주 놈이 곤륜파에 손을 벌릴 줄이야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것도 양양성 내에서 패싸움까지 벌였을 정도로 견원지간(犬猿之間)인 상대에게 말이다.

분노에 치를 떨고 있던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자 일순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공포감에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문제는 그게 아니 었다. 자신이 교주에게 터무니없는 요구를 했다는 것을 맹에서 눈치 챈 것도 문제였지만, 재수없으면 교주에게로 이번 일에 대한 진실이 넘어갔을 수도 있는 것이 다.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 잔인하기 짝이 없는 교주의 성품을 잘 알고 있는 옥화무제였기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옥화무제가 교주의 존재가 주는 공포감에 질려 있을 때, 맹주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 봉공께서 너무나도 큰 수고를 해 주셨는데, 뭔가 해드릴 수도 없는 처지라 너무나도 미안하구려. 혹, 노부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라도 있다면 언제든 말해 주시구려. 노부의 힘이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도와 드리리다.”

말로만 공치사를 연발하는 맹주의 모습에 옥화무제는 하마터면 발작할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동원해서 겨우 참았다. 이 시점에서 맹주를 자극 해 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그가 독한 마음을 품고, 이번 사건의 전말을 교주에게 슬쩍 흘리기만 해도 자신은 죽은 목숨인 것이다. 아니, 어쩌면 무영문 자체가 박살이 날 우려마저 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이빨을 갈며 복수를 다짐해야만 했다.

‘두고 보자. 나중에 본녀의 발 앞에서 무릎 꿇고 싹싹 빌도록 만들어 주마, 감히, 이번 일에서 본녀를 배척하다니! 누가 이 일을 다 성사시켜 놨는데.’

이빨을 뿌득뿌득 갈면서 밖으로 나왔을 때, 기가 막힌 계책 하나가 옥화무제의 머릿속을 번쩍하고 스쳐 지나갔다. 교주에게 복수하거나, 혹은 그를 자신의 치마폭 안으로 끌어들이는 건 의외로 간단했다. 그가 계획하고 있는 일들 중 치명적인 정보 몇 가지를 표시 안 나게 장인걸에게 슬쩍 넘기기만 하면 될 테니까. 교주는 자신 을 무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맹주와 곤륜무황에게 복수할 만한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게 더욱 그녀의 분노를 부채질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맹주를 엿 먹일 만한 기가 막 힌 계책이 떠오른 것이다.

“맞아! 바로 그거였어.”

옥화무제는 자신의 숙소로 가는 대신, 무영문 무림맹 파견지부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맹에서는 꽤 높은 사람들과 접촉해야 했고, 또 그만큼 고급 정보를 취급해야 하는 만큼 무영문에서는 당주급을 그 지부장으로 파견해 놓고 있었다.

지부장실에 도착한 옥화무제는 품속에서 매미 날개처럼 얇게 가공된 작은 양피지 몇 장을 꺼내, 깨알 같은 글씨로 암호문을 기록했다. 그녀가 품속에서 꺼낸 대롱 의 수는 7개. 전서구 7마리를 동시에 날릴 만큼 중요한 내용이라는 뜻이다.

그녀는 대롱 속에 양피지를 똘똘 말아서 넣고, 촛농으로 완전히 밀봉한 다음 표식을 새겨 넣으며 옆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지부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섬서분타행 전서구는 몇 마리나 남아 있지요?”

“송구하오나 남은 게 한 마리도 없습니다. 태상문주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이곳은 총단과의 연락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몇몇 주요 분타들을 제외하고, 다른 분타 들과의 연락은…..”

옥화무제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녀는 특3급의 표식이 찍혀 있는 대롱 4개를 건네며 말했다. 특3급은 분타주급이 해석해 낼 수 있는 가장 높은 등급의 암호 문이었다.

“어떤 경로를 택하더라도 좋으니, 최대한 빨리 이걸 섬서분타주가 받을 수 있게 해 보세요.”

“존명!”

그리고 그녀는 특1급의 표식이 찍혀 있는 대롱 3개를 마저 내밀며 말했다.

“이건 총단으로 곧바로 보내도록 하세요.”

총단으로 직접 날아가는 비둘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영문의 총단인 만큼, 수많은 비둘기들이 들락거리게 될 게 뻔한데 그렇게 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여기에 무영문의 총단이 있다고 광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그렇기에 추밀단에서는 총단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몇 군데의 거점들을 마련해 놓고, 그곳들을 기점 으로 전서구를 분산해서 키우고 있었다.

“지금 당장 보내도록 하세요.”

해가 지려면 이제 1시진도 채 안 남았다. 비둘기가 밤에는 움직이지 않는 걸 감안한다면, 내일 새벽에 날리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나무 위에서 쉬고 있는 비둘기들 이 천적들의 공격을 받고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들 테니까. 하지만 이것은 한시가 급한 일이었다. 단 1분이라도 일찍 날리면, 그만큼 빨리 목적지에 도 착하지 않겠는가.

* * *

자신의 꿈이 한순간에 박살나 버린 탓에 옥화무제의 눈이 뒤집혀져 있을 때, 맹주의 방은 또 다른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허, 요 며칠 사이에 독대를 청하는 사람이 왜 이리 많노?”

짐짓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그냥 해 본 소리일 뿐. 장로급의 청을 거절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문관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오던 공수개 장로는 실내에 맹주 외 에도 감찰부주가 앉아있는 걸 보고 약간 난감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표정을 알아본 맹주는 허심탄회한 어조로 말했다.

“감찰부주는 노부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 중 하나니, 나와 독대한다 생각하고 기탄없이 얘기해 주기 바라네. 자, 이리 앉게. 차 한 잔 하겠는가?”

“예.”

자리에 앉은 공수개 장로는 자부심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옥화 봉공께서 도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미 봉공께 통보를 받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대단히 놀라운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공수개 장로의 말에 맹주는 장단을 맞춰 줬다. 아주 커다란 껀수를 물어 온 모양인데, 그에 따른 대접을 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허허, 자네가 독대까지 청한 걸 보면, 아주 대단한 것인 모양이구먼.”

“예.”

그리고 공수개 장로는 방금 전에 도착한 따끈따끈한 정보를 맹주에게 보고했다. 장인걸이 무림에 혼란을 야기하기 위해 어떤 교활한 계책을 쓰고 있었던 것인지 말이다.

무예를 수련하는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원초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장인걸의 계책에 맹주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꽤 오랜 시간 중원 여기저기서 혈겁이 벌 어지고 있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만큼 모든 군소방파들은 자신들의 몸을 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기 문파를 지키는 것도 벅찬 마당에 맹의 대의를 따라 양양 성에 무사들을 파견한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다.

만약 이 사실을 무림에 공포한다면, 지금까지 사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원인 모를 혈겁 때문에 두려움에 빠져 있던 군소방파들은 정상을 되찾을 것이다. 그리고 놈 들의 계책에 속아 넘어가 다른 문파를 공격하는 미친 짓거리 또한 사라질 것이다.

물론 장인걸의 수하들이 계속 유혈 사태를 일으키겠지만, 그건 곧이어 진압될 게 분명했다. 장인걸이 아무리 많은 수하들을 풀어놨다고 해도, 중원 여기저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혈겁을 일으킨다는 건 절대로 불가능할 테니까.

옥화무제가 먼저 보고했을 가능성이 컸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보고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일단 이번 일을 알아내는 데 있어서 개방도 일조했다는 걸 맹주에게 알 릴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공수개 장로는 암호가 해독되자마자 만사를 제쳐 놓고 이리 달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에 대한 보답을 받을 수 있었다.

맹주는 공수개 장로의 손을 덥썩 잡으며 치하했다.

“노부가 개방에 너무나도 큰 빚을 지게 되었구려. 정말 수고하셨소.”

“과찬이십니다, 맹주님.”

“분명, 적지 않은 희생을 치르고 얻어 낸 정보일 텐데….”

“수십 명에 달하는 형제들이 목숨을 잃긴 했습니다만, 무림의 안녕을 위한 일인데 그 정도의 희생이 대수겠습니까. 이 정보로 인해 무림이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설 수 있다면, 희생된 방도들도 그것만으로 큰 위안을 삼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공수개 장로는 우연히 그곳에 나타난 패력검제가 커다란 도움을 줬다는 말을 했다. 속마음 같아서는 이 모든 게 자신들의 공인 것처럼 말하고 싶었지만, 그 렇게 무시해 버렸다가는 훗날 커다란 후환이 뒤따를 수도 있었다. 이 얘기가 결국에는 패력검제의 귀에 들어갈 게 뻔한데, 자신의 공적이 쏙 빠져버린 얘기를 들으

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니까. 그렇기에 그는 패력검제의 도움에 대해 상세히 맹주에게 설명했던 것이다.

“허허, 원시천존님의 도우심이로다.”

맹주가 그렇게 감탄하고 있을 때,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듣고만 있던 감찰부주가 불쑥 끼어들었다.

“공수개 장로님. 맹주님과 담소를 나누시는 중에 끼어들게 되어 죄송합니다만, 처음에 무영문으로부터 통보받았을지도 모른다고 하신 말씀의 뜻을 알고 싶습니다 “만…….”

“아, 제가 그렇게 말씀드린 건 무영문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서두를 시작한 공수개 장로의 얼굴은 아주 통쾌한 듯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영문에 뒤쳐질 수 없다는 일념 하나로 달려온 것이었는데, 이제 보니 맹주는 옥화무제로부터 이 건에 대한 보고를 받지 못한 듯이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유는 뻔했다. 무영문 패거리는 탈출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공수개 장로 는 벅차오르는 승리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공수개 장로의 설명을 다 들은 맹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무영문에서도 이 일을 다 알고 있다는 말이오?”

“글쎄요? 무영문의 이진덕 조장이 탈출에 성공했다면 알고 있을 테지만, 봉공께서 말씀 안 하셨다면 아마 그는 탈출에 성공하지 못한 듯합니다. 방금 전에도 설명 드렸듯이 몇 가지 오해로 인해 패력검제 대협을 적들의 첩자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때였기에, 진곡추 타주는 그들의 탈출에 모든 걸 걸었지요. 당시 측면 지원을 했 던 개방도들이 아무도 생존하지 못한 것을 보면, 아마도 그들 역시 탈출하지 못한 것으로 추측되는군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려.”

“마침 여기에 옥화 봉공께서도 와 계시니 나중에 제가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뜻밖의 제안에 맹주는 재빨리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거요. 봉공께서 내일 출발하실 거라고 들었는데, 그 전에 노부가 직접 전하고 위로하도록 하겠소. 그분도 우수한 수하들을 잃었으니 상심 이 크시지 않겠소.”

“아,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맹주님.”

“어쨌건 정말 수고하셨소. 그러고 보니 방주께서도 상심이 크시겠소이다. 아끼던 수하들을 많이 잃었으니 말이오. 노부가 직접 방주를 찾아뵙고 위로를 드리는 게 도리겠으나……..

공수개 장로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 마음만으로도 방주께 충분히 위로가 될 것입니다, 맹주님.”

“그럴 수는 없지요. 내가 직접 가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장로들 중 한 명을 보내 개방의 공로를 치하하고, 그 희생을 보답하도록 하겠소.”

공수개 장로는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감사하신 말씀이십니다.”

“패력검제는 지금 어디에 있소? 그도 큰 도움을 줬다고 하니 자그마한 사례라도 해야..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문에는 그분의 행방에 대해 기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분께서 지금까지 본방에 머물러 계실 가능성은 별로 없 지 않겠습니까?”

맹주는 귀중한 정보를 가져온 공수개 장로의 마음이 상하지 않을 정도의 시간을 할애하여 개방의 공적을 치하한 후에야 그를 돌려보냈다. 공수개 장로가 돌아가자 마자 맹주는 감찰부주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패력검제의 행방을 수소문해 보게.”

“그분께 이게 사실인지 확인을 하시려고 하시는 거라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개방에서 있지도 않은 정보를 만들어서 맹주님께 보고할 이유가 없지 않 습니까. 저는 오히려 그 사항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질을 주시지 않은 봉공이 더욱 수상쩍습니다.”

그 말에 맹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봉공이?”

“예. 개방도들에 비해 무영문도들의 무공 수준은 월등하게 뛰어납니다. 특히, 은신(隱身)과 잠행(行)에 있어서는 상대가 안 될 정도지요. 그런 그들이 개방도의 지원까지 받으면서도 탈출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말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그래서 맹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음성을 흘렸다.

“흐음…….”

“마침 봉공께서는 내일 떠나실 예정이시라고 하니, 맹주님께서 배웅도 할 겸 한번 만나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워낙 표정 관리를 잘하시는 분이시기는 하지만, 그래도 잘 찔러 보면 뭔가 대답을 얻으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전에 준비해 둔 선물은 어디에 있는가?”

“선물이라시면…, 진주 목걸이 말씀이십니까?”

교주와의 협상에 대한 사례로 옥화무제에게 주기 위해 맹주가 준비한 대가가 바로 그거였다. 완벽한 원형을 갖춘 진주는 매우 귀했다. 더군다나 알이 굵기까지 하

다면 그건 부르는 게 값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여인에 대한 선물로 그 이상 없을 거라는 게 감찰부주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걸 맹주가 옥화무제에게 선물하지 않고 끝내 버린 건, 그동안의 그녀의 소행이 너무나도 괘씸해서였다.

이튿날, 옥화무제의 전용 마차가 그녀의 숙소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마차는 제시간에 출발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맹주가 감찰부주를 대동하고 갑자기 그녀의 숙 소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수고하신 것에 대한 노부의 감사의 표시외다. 노부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여성의 취향에 대해 그리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어서 말이오. 마음에 드 실지 모르겠소이다.”

맹주는 자개로 정교하게 장식된 작은 함을 옥화무제에게 건넸다. 함 속에는 영롱한 빛깔의 진주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그녀가 한 수고에 대한 대가로서 부족함이 없는 선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전혀 그녀의 눈에 차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몸에 밴 습관대로 깍듯이 인사를 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목걸이군요. 감사히 받겠어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구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맹주는 적당한 기회를 봐서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앞에 얘기하던 주제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기에 전혀 부자연스럽지가 않았다. 내심 맹주가 어떤 형식으로 얘기를 꺼낼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던 감찰부주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쉴 정도로 절묘한 것이었다.

“참, 그러고 보니 봉공께 위로의 인사를 드린다는 걸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구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방금 그 얘길 하다 보니 생각난 건데, 이번에 우이 마을에서 훌륭한 수하들을 많이 잃으셨다면서요? 공수개 장로에게서 보고를 받고도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소이 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일단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듯 시치미를 뗐지만, 맹주의 입에서 ‘우이 마을’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순간, 옥화무제는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뻔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맹주는 이 일에 대해 결단코 모르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일을 추진한 게 아니었던가. 그런데 맹주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을 줄이야. “당장 멈추라고 지시를 보내야만 해!’

순간적으로 옥화무제의 표정이 변하는 걸 감지한 맹주는 자신이 우려했던 점이 사실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맹주의 얼굴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옥화무제의 전용마차 안, 옥화무제는 자신이 어떻게 맹주와 작별 인사를 나눴는지조차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이번 일이 그녀에게 안겨 준 충격 은 대단한 것이었다.

속마음 같아서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당장 지부장을 찾아가 섬서분타주를 향해 전서구를 날리라고 명령을 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코앞에 서 있는 맹주는 자신을 배웅해 주기 위해 몸소 나와 있는 게 아닌가.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지만, 그녀는 일단 전용마차를 타고 무림맹을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옥화무제는 무림맹 지부에서의 연락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다른 분타까지 가서 전서구를 날린다면 너무 시간이 지체된다. 그런 만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림맹 지부에서 전서구를 날리는 수밖에 없었다.

마차 안에서 급히 암호문을 작성한 옥화무제는 자신의 호위대장에게 어기전성을 보냈다.

《지금 당장 처리할 일이 있어요.>

<하명하십시오, 태상문주님.>

《최대한 빨리 맹으로 돌아가서 이걸 지부장에게 전하세요.》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손으로 옮기기라도 하듯, 옥화무제가 쥐고 있던 5개의 작은 대롱이 슬며시 날아가 호위대장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말도 마차도 다음 행선지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만큼 그녀의 무공 수위가 높다는 증거리라.

《가용한 수단을 모두 쓰더라도 이것들을 최대한 빨리 섬서분타주에게 보내라고 하세요.》

“존명!”

호위대장은 능숙한 솜씨로 달리던 말을 조종하여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그 모습을 봤다면 마치 묘기라고 격찬했을 만큼 뛰어난 승마술이었다. 무림맹을 향해 미친 듯 내달리는 호위대장을 보며, 옥화무제는 간절히 빌었다. 제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 달라고.

하지만 그녀의 기도는 그렇게까지 간절한 것은 아니었다. 어젯밤 전서구를 날리기는 했지만, 밤에는 움직이지 않았을 테니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정 도 시간 차라면, 섬서분타주의 움직임을 저지하기에 충분하다고 그녀는 판단했다. 자신의 명령에 의해 섬서분타주가 출동 준비를 갖추는 데만 해도 꽤 시간이 걸릴 테니까.

<묵향>26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