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5권 3화 – 꿩 먹고 알 먹고

꿩 먹고 알 먹고

옥화무제는 무림맹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묵향과 맹주 간의 비밀 협약이 맺어지도록 다리를 놔야 했기 때문이다. 옥화무제는 언제나 그렇듯 달리는 마차 안에 혼자 앉아 있었다. 비록 호위무사들을 거느리고 있긴 했지만, 모두들 마차 위에 있거나, 아니면 말을 타고 뒤를 따랐다. 감히 그녀와 함께 동석할 만한 위 치에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마차 안에 놓인 작은 다탁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던 옥화무제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써야만 했다.

“이런 절호의 기회가 제 발로 찾아올 줄이야.”

묵향의 속마음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옥화무제였다. 그런 그녀였기에 이번 기회를 잘만 이용한다면, 무영문이 무림 최강의 방파로 우뚝 설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가득 짙은 탐욕과 열망의 빛이 교차되며 떠올랐다. 오랜 세월 무림에서 잔뼈가 굵은 그녀로서는 이토록 자신의 감정이 밖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지만, 지금만큼은 도저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묵향은 그녀에게 맹주와의 협상에 있어서 전권(全權)을 맡겼다. 마지막 협상은 어차피 묵향과 맹주가 직접 만나서 하게 되겠지만, 그 도중에 자신이 농간을 부릴 만한 충분한 여지가 있는 것이다.

물론 금은보화나 신병이기 따위를 대가로 지급하게 된다면, 그녀가 도중에 끼어들 여지는 없다. 왜냐하면 목록에 써진 대로 고스란히 맹에 전달해야만 할 테니까. 하지만 대가가 무공비급이라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도중에 빼돌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사본을 만든 다음 전달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는가. “크흐흐…….”

냉철하기 그지없는 그녀가 이성을 잃을 정도로 광분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무림맹과 마교와의 거래다. 그런 만큼 무공비급 1~2권이 대가로 건네질 리 만무했다. 최소 수십 아니, 어쩌면 수백 권이 오갈지도 모른다. 그것도 각 문파들마다 문외불출(門外不出)로 꽁꽁 숨겨 두고 있는 최고의 비급들이 말이다.

만약 이번 협상이 잘 이뤄지기만 한다면 무영문으로서는 엄청난 무공비급을 챙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덤으로 얻는 것 역시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마교로부터는 중계를 성사시켜 준 대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고, 무림맹에서 역시 각 파의 절전비급들을 되찾아 준 은인으로서의 위치를 점하게 되지 않겠는가. 이건 그녀가 겨우 봉공따위의 직책을 얻는 것과는 천지 차이가 날 정도의 명성을 그녀와 무영문에게 안겨 줄 게 분명했다.

“객잔이 있는데 잠시 쉬어가시겠습니까?”

그때 마차 밖에서 경호 무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혼자 앉아 있었기에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탐욕으로 번들거리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무표정하게 바 뀌었다. 옥화무제는 창문을 가리고 있던 휘장을 살짝 걷으며 활기찬 어조로 말했다.

“갈 길이 급하니 다음 마을에서 쉬도록 하자꾸나.”

“존명!”

황성사의 요청에 맹주가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옥화무제가 무림맹을 방문했다. 옥화무제가 직접 찾아와서 자신과의 독대를 청한다는 말에 맹주는 고개를 갸웃하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직접 무림맹까지 찾아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맹주는 그녀와 혼자서 만나는 대신 감찰부주를 동석시키기로 했다. 그러는 편이 노회하기 그지없는 옥화무제를 상대하기 훨씬 수월했기 때문이다.

“노부와 독대를 원했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인지 얘기해 보시구려, 옥화 봉공.”

옥화무제는 곧바로 답하지 않고 잠시 감찰부주를 지긋이 쳐다봤다. 그걸 본 맹주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시고 말씀하셔도 상관없소이다.”

그래도 신경 쓰인다는 듯 감찰부주를 다시 한 번 쳐다봤지만, 결국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본론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묵향이 자신에게 제안한 비밀 작전에 대해서 말이다.

이미 감찰부주를 통해 가설에 따른 추론들을 검토해 본 후였기에, 맹주는 교주가 뭔가 행동을 취할 거라고는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생 각해낼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그들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하지만 노회한 맹주는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느긋함을 가장한 어조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교주는 우리가 흑살마왕과 결탁하는 척해 달라는 것이오?”

“예, 맹주님.”

곧바로 감찰부주가 언성을 높이며 외쳤다. 그는 이 제안을 한 교주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혈족을 구하고자 하는, 혹은 복수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말이다. 상대 가 이렇게 다급한 상황이라면 뭔가 이쪽에서 혹할 수 있는 제안을 했을 텐데 아직 그런 내용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옥화무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를 쓰고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건 불가합니다, 맹주님. 겉으로 봤을 때는 꽤나 그럴듯한 제안이기는 합니다만, 위험 부담이 너무 큽니다. 만약 이 사실이 밖에 노출되어 보십시오. 매국노, 변 절자 따위의 오명을 뒤집어쓰는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혹, 흑살마왕의 세력이 너무 강해서 이런 추잡스런 계책이라도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변명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현 상황으로 봤을 때는 전혀 변명의 여지조차도 없습니다.”

맹주가 듣기에 교주의 제안은 무림맹에 아주 유리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감찰부주가 핏대를 세우며 반대하자, 일순 맹주는 그를 어이없다는 눈길로 바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맹주는 재빨리 자신의 표정을 관리했다. 사질이 그렇게 행동하는 데는 뭔가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게 분명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감찰부주의 반대에 옥화무제는 부드러운 어조로 항변했다.

“물론 감찰부주의 말도 옳아요. 하지만 결국 역사는 승자만을 기억한다는 점도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맹주님. 승리를 거둔다면, 그 과정에서 벌어진 사소한 잘못 따위는 아주 쉽게 감춰 버릴 수 있지요. 안 그런가요?”

“그건 봉공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이 계책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만들어진 치부(恥部)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그 교활하기 짝이 없는 교주가 알게 된다 는 게 문제지요.”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가 없다고 사료됩니다, 맹주님. 지금까지 교주는 단 한 번도 남의 약점을 쥐고, 그걸 이용해서 계략을 꾸민 적이 없어요. 제 말을 믿기 힘드 시다면, 개방 쪽에 물어보면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더군다나 그는 단 한 번도 배신을 한 적도 없었지요.”

“흐음…….?”

감찰부주가 왜 반대를 했는지 알 수 없었던 맹주는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팔짱을 꼈다. 그러자 옥화무제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이 상태로 나가다가는 전쟁이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어요. 마교의 경우 교주의 권세가 막강한 만큼, 그 권력이 아주 쉽게 무너질 수도 있다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 지요. 전쟁이 시작된 시점부터 시작해서 교주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양양성에서 보냈죠. 그러다가 요 근래 그의 모습이 양양성에서 사라진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 “까요?”

묵향은 지금 대별산맥에서 부하들과 함께 있었지만, 무림맹에서는 그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감찰부주나 맹주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옥화무제는 생긋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교주가 남양과 연경을 동시에 타격한 건 잘 알고 계시겠지요?”

맹주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금나라 황제를 살해했을 정도로 적들에게 큰 타격을 주기는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커다란 피해를 입기도 했어요. 우리 쪽에 확인된 것만 해도, 고루혈마(枯僂血 魔)라고 불리는 옥관패(玉冠覇) 장로가 사망했고…..”

옥화무제는 마교가 입은 피해에 대해 자신이 아는 바를 상세히 설명해 나갔다. 그 말을 듣는 맹주와 감찰부주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렇게 큰 희생을 치렀을 줄이야…….”

마교가 지닌 전력이 워낙에 엄청나서 그렇지, 웬만한 문파가 그 정도 고수의 손실을 입었다면 곧바로 멸문의 길로 들어섰을 것이다.

분위기가 자신이 의도한 대로 흘러가자, 옥화무제는 내심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교주는 십만대산에 가 있어요.”

그녀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교주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림맹에서는 절대로 모르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 면, 대별산맥에 마교도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도록 연막을 치고 있는 게 바로 자신의 수하들이었으니까.

“십만대산에는 왜?”

“너무나도 큰 피해에 그의 수하들을 다독거리기 위해서죠. 아무리 마교의 반도인 흑살마왕 일파를 척살하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마교 입장에서는 별 이익도 없 는 이 전쟁이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어요. 이건 교주의 개인적인 복수일 뿐, 권력 쟁탈에서 밀려나간 흑살마왕 일파를 반드시 척살해야만 할 이유는 없다는 거죠. 그 래서 교주는 이번에 장인걸을 끝장내기 위해 3개 전투단을 투입했지만, 결과는 방금 전에 설명드린 대로 너무나도 참담한 것이었지요.”

그때 뭔가를 떠올린 감찰부주가 황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봉공님의 말씀은, 교주가 이번에 획책하고 있는 전쟁이 마교의 마지막 혈전일 거라는 겁니까?”

“그래요, 장인걸에 대한 마지막 복수전이 되겠죠.”

“제가 이해를 하기 힘든 것은 그렇게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왜 마교 단독으로 싸우려고 한다는 말입니까? 그건 뭔가 앞뒤가 안 맞는군요.” 마치 예상했던 질문이 나왔다는 듯 옥화무제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답변을 했다.

“그렇지가 않아요. 이번 전투에서 장인걸은 신무기를 몇 개 꺼내 놨어요.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며 수많은 철질려를 사방으로 비산시키는 암기 같은 것이죠. 그 때 문에 마교가 예상외로 피해가 컸던 거예요. 그래서 교주는 대비가 완전히 갖춰져 있는 적의 본진을 치는 걸 포기하는 대신 밖으로 끌어내려는 거죠. 하지만 장인걸 이 밖으로 기어 나올 리 없으니, 무림맹에 협조를 구하는 것이구요.”

맹주는 이해할 수 있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흠, 봉공의 말은 잘 알겠소이다.”

그러자 옥화무제는 쐐기를 박듯 말했다.

“참, 교주가 본녀에게 이번 협상을 맡기면서 제시한 시간제한이 있어요.”

“시간제한이요?”

“교주는 원로원과 장로들과의 회의를 통해 올해 안에 전쟁을 끝내겠다고 선언했답니다.”

“만약 그게 이뤄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옥화무제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마도 짐 싸 들고, 십만대산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되겠죠.”

그 말에 맹주의 안색이 일순 침중하게 바뀌었다. 만약 현 상황에서 마교가 전력에서 이탈한다면, 금나라와의 전쟁을 치루는 건 거의 불가능할 테니까.

감찰부주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또다시 끼어들었다.

“절대로 그럴 리 없습니다, 맹주님. 겉으로 드러난 건 봉공님의 말씀대로지만, 교활하기 짝이 없는 교주는 뭔가 교묘한 함정을 파놨을 게 뻔합니다. 이쪽의 출혈을 강요할 그런 함정을 말입니다.”

감찰부주의 반론이 계속되자, 옥화무제는 상대가 왜 이렇게 나오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감찰부주는 이 기회를 통해 마교 쪽에서 뭔가를 얻어 내려 한다 생각하고 계신 모양이군요.”

“허,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럼 봉공님께서 한번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뭣 때문에 마교가 이렇게까지 무리수를 둬 가며 흑살마왕을 잡으려 하는지 말입 니다. 미흡한 제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답이 없어서 말이죠.”

감찰부주 역시 이런 쪽으로는 굴러먹을 만큼 구른 능구렁이였다. 자신의 내심을 상대방이 눈치 채자 재빨리 역공을 가한 것이다.

“그, 그건..

옥화무제가 일순 대답을 못 하자 감찰부주는 기가 산 듯 더욱 큰 소리로 다그치기 시작했다.

“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피는 자신들이 흘릴 테니, 우리는 그저 뒷짐만 쥐고 있다가 그 과실만 챙겨 먹으라니요? 다섯살 먹은 코흘리개도 아니고, 그따위 조건을 내걸면, 이쪽에서 ‘그렇게 좋은 조건이?’ 하면서 덥썩 물 줄 알았다니. 참내, 어이가 없어서……. 지금은 손을 잡고 있다고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 도 본맹과 치열하게 싸웠던 마교의 말을 우리보고 곧이곧대로 믿으라는 말씀이십니까?”

맹주가 노회하다고는 하지만 충분히 구워삶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옥화무제는 생각지도 못했던 감찰부주의 반론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옥화 무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교주에게는 숨겨진 혈육이 있지요. 그런데 이번에 장인걸 쪽 무사들에게 납치를 당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교주가 이런 식의 제안 을 하지도 않았을 테고 말입니다.”

“천지문의 그…….”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 중에 말을 꺼냈던 맹주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옥화무제가 그 말을 듣지 못했을 리 없다.

옥화무제는 상대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에 심장이 떨어질 정도로 놀랬다. 하찮다고 깔아뭉개고 있던 감찰부였기에 그 놀라움은 더욱 컸다. 하지만 노회 하기 그지없는 옥화무제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너구리 같은 놈들이라고 욕설을 퍼붓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화사한 미소를 내뿜고 있었던 것이다. “잘 알고 계시는 것 같으니 더 이상 말씀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맹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아이 때문에 교주가 이런 무리한 제안을 하게 된 거지요. 혈육을 살 리려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겠어요?”

맹주는 옥화무제에게 짐짓 화가 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다그쳤다.

“봉공께서 그런 정보를 알고 계셨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맹에 알리지 않았소?”

“그, 그건……. 교주와 약속을 했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의뢰인의 비밀을 지켜 줘야 할 의무가 저희에게는 있으니까요.”

옥화무제가 내심 당혹스러워하며 급히 변명을 했지만 그다지 설득력은 없었다. 하지만 맹주는 더 이상 그것을 문제 삼아 따지고 들지 않았다. 그로서는 지금까지 그토록 찾기를 원했던 진팔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옥화무제를 통해 얻게 된 사실에 크게 기뻐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맹주의 속마음을 알리 없는 옥화무제는 속이 타지 않을 수 없었다. 교주의 비밀까지 말해 줬음에도 불구하고, 맹주의 반응이 기대 이하가 아닌가. 그 렇기에 그녀는 조금 이르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마지막 패를 꺼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교주는 만약 자신의 제안을 받아 준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충분히 하겠다고 했어요.”

자신이 기다리던 말이 나왔다고 판단한 감찰부주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재물이야 맹에도 충분한데 대체 우리에게 뭘 주겠다는 말씀이신지요?”

미끼를 물었다고 생각한 옥화무제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교주에게 분명히 말했어요. 무림맹에 이런 부탁을 하려면, 이쪽이 그만큼 진지하다는 증거를 보여야 할 거라고 말이에요.”

잠시 뜸을 들이며 상대로 하여금 기대감을 갖게 만든 후, 계속 말을 이었다.

“교주는 맹주님께서 이번 일을 도와준다면, 지금껏 약탈해 간 무림맹에 속한 문파들의 무공비급을 돌려 주겠다는 제안을 했어요. 물론 원본은 안 되고, 사본을 말 이에요.”

그 말에 맹주와 감찰부주의 목젖이 심하게 요동쳤다. 오랜 수련을 쌓은 도인들이었지만, 그들도 교주의 그 커다란 배포에 갈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무인(人)에게 있어 재물(財物)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물건이다. 강대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는 한, 재물 따위는 언제든지 끌어모을 수 있는 것이었으니 까. 하지만 무공비급이라면 완전히 얘기가 달라진다.

“그, 그 말이 사실이오?”

깜짝 놀라 되묻는 맹주의 어투에서 옥화무제는 이번 회담이 자신의 생각대로 진행될 수 있겠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예, 맹주님. 이런 일을 제가 어찌 거짓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말은 거짓이었다. 실상, 비급을 원하는 것은 옥화무제였다. 그렇기에 상대 또한 그걸 원해야만 했다. 그래야 교주에게 가서 상대가 비급을 원하더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맹주님, 그건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이야 자신들이 다급하니 뭔들 못 주겠다고 하겠습니까. 이러다 일이 끝난 후, 만약 안면을 싹 바꿔 버리면 이쪽만 우습게 될…..”

감찰부주의 반론에 옥화무제는 정색을 하고 자신있게 말했다.

“그건 제가 책임지고 마교에서 받아 내어 맹에 전달하겠어요. 그것도 회담이 끝난 직후에 말이에요. 그렇게 한다면 문제가 없겠죠?”

“허, 봉공께서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만약 옥화무제의 말 대로만 된다면 무림맹으로서는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다. 그렇기에 맹주는 짐짓 인심 쓰는 척 허락하려 했다. 하지만 갑자기 옆에서 감찰부주가 끼어들었다.

“맹주님, 말씀을 가로막아 송구스럽습니다만, 이 정도 사안이라면 장로들의 동의를 얻어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맹주는 미소를 지으며 옥화무제에게 말했다.

“그렇구먼. 봉공, 노부에게 며칠 말미를 주시겠소? 이런 중요한 사안을 노부 혼자 결정할 수는 없을 듯하구료. 아무래도 장로들과 의논을 좀 해 봐야 할 듯싶으니 말이오.”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옥화무제 역시 방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급하게 재촉을 하면 탈이 나는 법이다. 어차피 상대는 절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옥화무제였기에 여유로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던 것이다.

옥화무제가 집무실 밖으로 나가자 감찰부주는 맹주를 향해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정말 절묘한 시점에 이런 제안이 들어오다니, 이것도 다 맹주님께서 평소에 쌓으신 은덕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허허, 사질은 무슨 소리를.”

맹주는 기분이 좋은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교주의 조건은 우리로서는 상당히 괜찮은 것 같았는데, 자네는 왜 시간을 달라고 한 게지?”

“교주의 숨겨진 혈육이 있다는 사실이 봉공의 입을 통해 확인된 이상, 이 제안은 충분히 매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파악한 교주의 약점이 확연 히 드러난 것이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이 계책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황성사의 압력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그렇지. 그렇기 때문에 노부는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일 생각이네만.”

맹주의 말에 감찰부주는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을 던졌다.

“저도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만, 봉공의 태도가 왠지 마음에 걸려서 그렇습니다.”

“옥화 봉공이? 왜 그런 생각을 갑자기 하게 된 게지?”

“맹주님, 봉공께서 맹의 일에 너무 협조적이라는 것이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의심하는 이유가 너무나도 황당한 것이라 맹주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허어, 그건 또 무슨 말인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맹의 봉공이야. 이 정도 일은 당연히 해 줘야지.”

하지만 감찰부주는 고개를 흔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을 한번 해 보십시오, 맹주님. 봉공께서는 교주의 의뢰를 받아, 교주 대신 협상을 하기 위해 이곳에 오신 겁니다. 그런데 교주가 이쪽에 보여 줄 수 있는 패를 처음부터 전부 다 보여 줬습니다. 저는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맹주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장 대답했다.

“지금껏 이익을 쫓는 행동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봉공 역시 정파의 일원이 아니겠는가?”

“문제는 정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지금까지 보아 왔던 봉공의 행동을 생각해 보면 상당히 무리가 있다는 점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철저하게 이익을 위 해서만 움직인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이번에는 너무 쉽게 마지막 패를 꺼내 보였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지금까지 봉공께서 협상을 하실 때, 자신의 패를 결코 다른 사람이 알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게 바로 자신의 이익과 직결되니까요.”

그 말에 맹주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마지막 패를 먼저 꺼내는 게 자신의 이익에 부합(符合)된다는 말이겠구먼. 그게 과연 뭘꼬?”

“저는 그게 바로 우리가 받기로 한 무공비급이 아닐까 하고 추론해 봤습니다.”

맹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반론을 말했다.

“허, 그건 너무 심한 억측이로구먼. 어떤 비급이 오갈 것인지 명세서가 따라붙을 건데, 봉공이 빼돌린다는 게 과연 가능하겠는가?”

맹주의 질문에 감찰부주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비급을 복사만 해도 충분할 텐데, 구태여 빼돌릴 필요가 없죠. 그렇기 때문에 봉공께서는 자신들이 책임을 지고, 비급을 받아 주겠다고 약속을 하신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말에 맹주는 고개를 주억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충분히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몰래 복사만 하는 거라면 전혀 표시가 날 리 없으니까 말이다.

“흠,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를 하는 게 좋을지 생각해 둔 것이라도 있나?”

“저도 갑작스럽게 이런 상황을 맞이하게 되서 아직 떠오르는 것이 없지만, 일단은 상황의 추이를 지켜보며 대처를 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정 안 되면 비급을 회 수하는 자리에 맹의 고수들을 파견해 직접 수령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겠지요.”

“그렇군. 일단은 교주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하고, 만약 뚜렷한 대처 방안이 나오지 않는다면 차라리 노부가 교주에게 요청을 하겠네. 비급을 받을 때 우리 측에게 직접 넘겨 달라고 말이야.”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봉공이 이 사실을 모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써는 교주와의 유일한 통로 역할을 해 주는 분이시 니까요.”

두 사람의 밀담이 끝났음에도 맹주는 일부러 옥화무제에게 연락을 보내지 않았다. 칼자루를 손에 쥔 쪽은 이쪽이었기에, 교주의 제안에 혹했다는 느낌이 들게끔 서두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 옥화무제와 다시 자리를 같이 한 맹주는 그다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교주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승낙했다. 물론 무림맹에 속한 문파들이 지금까지 마 교에 약탈당한 비급을 돌려받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