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5권 5화 – 어긋난 여인의 사랑

어긋난 여인의 사랑

조령은 양양성에 도착한 그날부터 마교와 제령문을 들락거리며 납치된 동료들의 안위를 묻고 다녔다. 심지어는 작은 규모의 무사들의 이동만 있어도 혹시 구출 작 전이 시작된 것이냐며 집요하게 물었다. 처음에는 귀찮아하며 잘 대꾸도 해 주지 않던 무사들도 차츰 그녀의 정성에 감복하여 어지간한 것은 대꾸를 해 주기에 이르 렀다. 납치된 동료의 안위를 걱정하는 조령의 마음이 와 닿았기 때문이다.

조령은 오늘도 아침을 먹자마자 마교와 제령문을 들락거리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객잔으로 돌아왔다. 그동안의 마음 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오동통하던 조령의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방 안에 앉아 쉬려할 때 쟈타르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박쥐 한 마리가 처마 밑에 날아들었습니다, 황녀님.”

“들라 하세요.”

두 사람의 뜻 모를 대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검은 야행복으로 전신을 감싼 한 사내가 방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정말 고생이 많으십니다, 황녀 마마.”

“어서 오세요.”

가벼운 인사가 끝나자마자 조령은 오늘 자신이 마교와 제령문에서 보고 들은 것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현재 양양성에 파견된 편복대를 총괄하는 이철륜은 조 령의 얘기를 다 듣고 난 뒤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교주를 최근 보지 못했다는 말씀이시옵니까, 황녀 마마?”

“본녀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어요. 이렇듯 중요한 시기에 모습이 보이지 않다니……. 하지만 아무리 캐물어도 아무도 대답을 해 주지 않아요.”

“흠, 사실 저희가 가장 원하는 것은 바로 그자의 행방이옵니다. 황녀 마마.”

“최대한 알아낼 수 있도록 힘을 써 볼게요.”

현재 편복대가 수집하기를 원하는 최우선 정보는 묵향과 황도를 습격한 무사 집단의 행방이었다. 편복대가 양양성 인근을 샅샅이 뒤졌지만, 마교와 관련된 흔적은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곳 양양성에 와 있는 흑풍대는 정상적인 마교 세력이 아니다. 마교의 주력은 마공을 고도로 익혀, 무시무시한 마기를 뿜어대는 극강의 고수들이다. 그리고 그런 만큼 그들의 기척을 찾아내기는 아주 쉬워야만 했다. 하지만 어찌된 노릇인지, 양양성 인근을 아무리 뒤져도 그들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을 정리하던 이철륜은 조령을 향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 외에 다른 특별한 사항은 없었습니까?”

조령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을 하다 뭔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아, 오늘 흑풍대원들과 곤륜파 도사들이 싸우는 걸 봤어요.”

“예? 싸우다니요? 자세히 말씀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정식으로 첩보 교육을 받지 못한 조령이기에 정보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랬기에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보고 들은 것을 최대한 이철륜에게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철륜으로서는 조령의 말에서 뭔가 쓸만한 정보가 될 것 같다는 냄새를 맡은 것이다.

“오늘 점심을 먹으러 가던 길에 금룡각이라는 객잔 뒷골목에서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 걸 봤어요. 그런데 그중에서 몇 사람이 안면이 있더라구요. 바로 흑풍대 무 사들 말이에요.”

“상대는 곤륜파 도사들이 맞습니까?”

“모두들 도복을 입고 있었는데, 소매에 태극 문양이 그려진 건 곤륜파 도사들이 맞잖아요. 그런데 하두 흑풍대, 흑풍대 하길래 굉장히 싸움을 잘하는 줄 알았더니 곤륜파 도사들에게 줘터지고 있더라구요.”

흑풍대의 저력을 익히 알고 있는 이철륜이었기에 조령의 말에 긍정을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현재 동맹이라는 명분하에 손을 잡고는 있지만, 언제 뒤집어질지 모르는 관계라는 점을 말이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오랜 세월동안 피 터지는 전투를 계속해 왔던 두 단체가 어느 날 갑자기 사이가 좋아질 수야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 후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곤륜파 쪽은 모르겠지만 마교에 가 보니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였어요. 얻어터지고 왔으니 위에 보고는 못 하고, 나중에 두고 보자며 단단히 벼르고 있던데요.”

그 말을 들은 이철륜의 눈이 번쩍였다. 곤륜파와 마교간의 뿌리 깊은 원한을 익히 알고 있는 그였기에 만약 여기에 조금만 더 기름을 부어 준다면 아예 사생결단을 내자고 덤벼들지도 모른다는 것을. 수하들을 풀어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 하겠다고 생각하며 이철륜은 조령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소중한 정보 감사드립니다. 황녀 마마께 이런 궂은 일을 부탁드리게 되어 너무나도 송구스럽사옵니다.”

“귀관이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없어요. 이건 본녀가 원해서 하고 있는 거니까요.”

말을 하던 조령은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아미를 찡그리며 언성을 높였다.

“참! 얼마 전에 마교로 진 공자의 손이 잘려서 왔다던데 그게 대체 무슨 말이죠? 본녀가 신신당부하지 않았나요? 진 공자의 털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융숭하게 잘 대접하라고 말이에요!”

묵향이 당시 진팔의 손을 상자에 담아 가져온 금나라 장수의 왼손과 귀를 잘라 쫓아 버린 뒤 마교에서는 입단속을 철저히 했다. 괜히 이런 일이 주위에 알려져 봐 야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조령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하급 무사들과 이야기를 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조령은 까무러칠 뻔했다. 자신이 얼마나 좋아하는 사람 이던가. 그런데 그런 사람의 손이 잘려 소금에 절여 보내져 왔다니. 보지 않아도 진팔 공자가 겪었을 고통과 좌절감이 느껴져 조령은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매섭게 이철륜을 추궁하는 조령의 눈가에는 벌써 눈물이 고여 그렁그렁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리둥절한 표정이던 이철륜은 뭔가 떠올랐는지 탄성을 지르며 되물었다.

“아! 진팔 공자의 손 말씀이시옵니까?”

꽝!

이철륜이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을 하자 화가 솟구친 조령이 탁자를 거칠게 내리쳤다.

“네놈이 감히! 본 황녀를 능멸하겠다는 게냐!”

의외의 큰소리에 쟈타르는 급하게 방 밖으로 나가 주위를 훑어보았다. 혹시 근처에 누군가가 있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철륜은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건 황녀 마마의 오해이시옵니다. 교주를 경동시키기 위해 진팔 공자와 비슷한 체형의 죄수의 손을 잘라 보낸 것일 뿐, 진팔 공자께서는 편히 지내고 계시옵니 다.”

“그, 그게 정말이더냐?”

“제가 어찌 감히 황녀 마마께 거짓을 고하겠사옵니까. 진팔 공자의 손이라는 표식을 내기 위해, 그분의 반지를 뽑아서 함께 붙여 보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걸 가지고 황녀 마마께서 착각하실 거라고는 속하도 예상치 못했사옵니다. 미리 말씀드려 마마를 안심시켜 드리지 못한 점 송구하옵니다.”

그제야 흥분이 가라앉았는지 조령은 차분히 자리에 앉아 이철륜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나가 보라는 뜻이었다.

“그럼 소인은 이만.”

이철륜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조령의 눈은 창밖을 향해 있었다. 진팔공자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들켜 버린 것 같아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조령의 마음 같아서는 하루라도 빨리 황도로 돌아가 진팔 공자의 안위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가 너무 답답하기만 했다. 사실 이 자 리에서 도망치고 싶을 만큼 지치기도 했다. 귀하게만 자랐던 조령이었기에 단순한 탐문 정도라고는 하지만, 심적으로 느끼는 불안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에게 이러한 부탁을 해 온 편복대주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만약 악적 묵향과 진팔 공자에 대한 연심이 없었다면 절대 이런 일을 맡지는 않았을 것 이다. 자신의 운명이 뒤바뀐 그때의 일이, 마치 어제 일어난 일인 것처럼 그녀의 눈앞에 떠올랐다.

격렬한 수련을 끝마친 조령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객잔으로 돌아왔다. 땀에 흠뻑 젖어 온 몸이 끈적거렸지만, 이제 곧 시원한 물로 목욕할 걸 생각하면 기분만은 상쾌했다. 그리고 지금껏 나약하게만 살아왔던 자신이 이런 고행을 참고 견디고 있다는 것에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방문을 열자마자, 조령은 낯선 인물이 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쟈타르가 앉아 있는 걸 보면 아마도 쟈타르를 찾아온 손님인 모양이었다. 문득 조령은 짜증이 치솟았다. 매일 이맘때쯤 돌아왔고, 또 오자마자 자신이 목욕부터 한다는 걸 잘 알 텐데, 왜 손님을 아직까지 돌려보내지 않고 그대로 뒀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령이 쟈타르에게 뭐라고 톡 쏴 주려고 했을 때, 상대편에서 먼저 반응을 보였다.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깊숙이 고개를 조아리며 공손하게 말했다. 놀랍 게도 그 말은 그녀가 너무나도 오랜만에 들어 보는 언어. 즉, 여진어였다.

“처음 뵈옵니다, 황녀 마마.”

조령은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쟈타르와 그를 번갈아 바라봤다.

“소신(小)은 대원수부 휘하 편복대에 소속되어 있는 이철륜이라 하옵니다.”

쟈타르는 얼이 빠져 있는 조령을 이끌어 자리에 앉혔다. 의자에 앉자마자 조령은 두 사내를 둘러보며 두려운 표정으로 말했다.

“누가 여진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 여길 텐데…….”

조령의 걱정에도 이철진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황녀 마마, 오히려 이게 더욱 안전하옵니다. 하녀가 지나가다가 우연히 엿들었다고 해도, 그 내용을 모르는 이상 발뺌할 수 있는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을 테니까요.”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조령은 이철륜을 향해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떤 일 때문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바마마께서는 일향(向) 만강(滿康)하신지요?”

조령의 물음에 두 사내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안 그래도 이철륜은 이곳에 오자마자 그 일로 대화를 나눴기에 쟈타르도 내용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속하가 온 것이옵니다.”

“혹, 아바마마의 신상에 무슨 변고라도?”

“폐하께서 승하(昇遐)하셨나이다.”

말을 듣던 조령은 기절초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던가. 바로 천하를 호령하는 금나라의 황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승하하셨다니, 도저히 믿 기지 않았다.

궁에서 몰래 도망치기 전날, 우연을 가장해서 아버지를 찾아가 시치미를 떼고 담소를 나눴었다. 설마, 그게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 조령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궁에 그냥 남아 있는 건데…….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누구도 감히 짙은 슬픔에 빠진 그녀에게 말을 건네지 못했기에 침묵은 더욱 길어졌다. 한참 후에야 조령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 러내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자신을 그토록 사랑해 줬던 아버지가 죽었다는 걸 인식했다는 듯.

“건강하신 분이셨는데, 어쩌다가……?”

“악적 묵향이 황도를 습격하여 폐하를 시해했사옵니다.”

묵향이 그랬다는 말에 조령의 표정이 아연하게 바뀌었다. 진팔을 통해서 알게 된 희대의 고수. 조령에게 있어 묵향에 대한 평가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되어 버렸다니…….

“원래는 마마를 즉시 황도로 모시는 게 옳겠지만, 그 전에 이걸 한번 읽어 보시옵소서.”

이철륜은 품속에서 봉서를 꺼내 조심스럽게 건넸다. 봉서를 받기 위해 손을 뻗던 조령은 봉서를 받기 전에 움찔했다. 이게 뭘까? 혹, 아바마마께서 남긴 유서일까?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게…, 뭐죠?”

“그건 편복대주께서 마마께 올리는 서신이옵니다.”

“편복대주가……?”

조령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편복대주를 만나 본 적도 없는데, 그가 왜 자신에게 서신을 보낸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서신의 내용은 황제를 잃은 마마가 얼마나 상심할지 걱정이 된다는 따위의 말로 가득 차 있었지만, 쓸데없는 잡소리들을 다 뺀다면 단 한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 다. 바로 선황제 폐하의 복수를 하는 셈 치고 첩자 노릇을 해 달라는 것이다. 워낙 경계가 치밀해서 편복대에서는 마교 쪽에 첩자를 끼워 넣을 여지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령은 그걸 너무나도 쉽게 해 버렸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진팔과 만나, 우연한 기회에 묵향 주변에 머물게 된 조령이야말로 편복대로서는 최적의 첩자였던 것이다.

서찰을 다 읽은 조령은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첩자라니…,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이철륜은 탁자 위에 놓인 서찰을 집어 촛불 위에 올려놓았다. 화르륵 타오른 서찰은 순식간에 하얀 재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침통한 표정의 이철륜의 입에서 비 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마께옵서는 폐하의 죽음이 원통하지도 않으시옵니까? 그자를 파멸시키는 일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않느냐는 말씀이옵니다.”

“무, 물론 복수를 하고 싶어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옵니다. 마마께서는 마교 쪽 사람들과 친하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마화라고 하는 흑풍대 부대주하고 말입니다.”

조령은 힐끗 쟈타르를 쳐다봤다. 지금까지 그녀의 행적을 쟈타르는 낱낱이 위쪽에 보고했던 모양이다. 하기야 그걸 그녀도 탓할 수는 없었다. 그의 임무가 바로 그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쟈타르의 보고에 의하면, 천지문에 있는 소연이라는 여고수와 친분을 쌓고 계시다지요?”

조령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이철륜은 환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와 좀 더 가까워지도록 노력하십시오.”

얘기를 듣던 조령은 의아한 마음을 금하지 못했다. 마화와 친하게 지내라는 건 이해할 수 있겠는데, 왜 갑자기 여기에 소연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녀가 이해하건 말건, 이철륜의 말은 계속되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녀들과 나눈 대화를 저희들에게 모두 알려 주시기만 하면 되옵니다. 원래 중요한 정보는 소소한 것들이 집약되어 얻어지는 것이니까 요. 선황제 폐하의 복수를 하신다 생각하시고, 제발 저희들의 요청을 거절치 말아 주시옵소서. 마마.”

일급비밀을 빼내 오라는 것도 아니고, 대화 내용을 알려 주는 정도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아 조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이철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복을 하며 말했다.

“어려운 결정을 내려 주신 마마께 편복대주님을 대신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리옵니다.”

편복대가 조령에게 정보 수집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은 황제라는 그녀의 든든한 버팀목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황제가 살아 있다면 그가 총애하는 황녀 를 첩자로 써먹는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 아무리 들킬 확률이 낮은 안전한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는 쟈타르를 통해 찔끔찔끔 정보를 획득하는 것으로 만족했었던 편복대주였지만, 황제가 죽자 조령을 본격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철륜을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던 조령은 마치 기갈이라도 들린 듯 싸늘하게 식은 찻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자신에게 그토록 잘해 줬던 소연을 팔아넘긴 것 같아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 지금에 와서 후회해 봐야 뭐 하겠어. 벌써 다 끝난 일인데.’

아무리 아버지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라지만 악적 묵향도 아닌 소연 일행을 편복대가 납치할 수 있도록 조령이 협조를 한 것은 그녀의 마음이 독해서가 아니었다. 처음에 그러한 요청을 받았을 때에는 단호히 거절했다. 자신을 믿고 아껴 주는 소연에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소연은 자신이 연모의 정을 느끼고 있는 진팔 공자가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하지만 소연이 마교에서 돌아왔을 때 보여 준 진팔의 격렬한 반응을 본 조령은 질투에 눈이 뒤집혔다. 그 전에는 진팔공자가 소연을 따르는 것이 같은 동문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진팔이 소연을 향한 속마음을 잘 숨긴 것도 있었지만, 온실 속의 화초와도 같이 주위의 떠받듦 속에서 성장한 그 녀였기에 남의 눈치를 살피는 데 있어서 비교적 둔감했다. 그래서 진팔이 소연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질투심에 눈이 먼 그녀는 편복대의 요청을 받아들여 자신의 연적(戀敵)인 소연을 만현으로 유인하여 납치당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진팔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도 록 이철륜에게 신신당부해 놓았기에 그의 처우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불안하기 그지없는 첩자 생활에 지친 조령은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 진팔이 감금되어 있는 황도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진팔에게 자신의 진짜 신분을 밝힌 뒤 매달려 볼 생각이다. 남은 인생 동안 엄청난 부귀영화가 보장되는데 결코 자신을 거절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