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5권 8화 – 여우의 꼬리를 잡아라
여우의 꼬리를 잡아라
관지로부터 일주일간의 근신 처분을 받은 마화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방에만 처박혀 있어야 했다. 그런 그녀에게 조령의 잦은 방문은 너무나도 반가운 것이었 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는 조령의 언행에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필요 이상으로 마교에 대한 것을 꼬치꼬치 캐묻고 있지 않는가. 처음에는 납치된 소연 일 행에 대한 걱정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만약 마화가 근신처분을 받지 않았다면 일에 치여 눈치채지 못하고 넘겼을 수도 있었다. 하지 만 방에 처박혀 하는 일 없이 이 생각 저 생각 하며 지내다 보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눈에 보였던 것이다.
처음에 마화가 조령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된 것은 진팔에 대한 말이 나올 때마다 짓는 미묘한 표정 때문이었다. 그건 걱정과 근심이 아닌 아련한 그리움이었다. 마화는 진작부터 조령이 진팔을 은근히 사모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챘었다. 만약 진팔에 대한 연모의 정이 사라진 게 아니라면, 조령이 지어야 하는 표정은 그게 아닌 것이다.
마화는 아직까지도 20여 년 전, 묵향이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던 그 절망적인 시기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 당시 그녀는 마치 실성이라도 한 사람처럼 미친 듯 묵 향의 행방을 찾았었다. 그때 얼마나 애간장이 끓었는지 지금도 당시 생각이 문득 떠오를 때면 묵향의 그 뻔뻔스런 낯짝을 두들겨 패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의 조령을 보면 전혀 그런 절박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진팔은 행방불명된 것이 아닌 납치된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진팔 의 손이 잘려 상자에 담겨져 오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물론 자신과 조령의 성격이 많이 다르다는 걸 알기에 그러려니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그녀로서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이, 바로 조령의 묵향에 대한 태도였 다. 평소 부대의 이동이나 작전에 대해 은근히 물어보던 그녀가, 어느 날부터 묵향의 행방에 대해 집요하게 물어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조령의 눈빛 에서 강한 증오심을 엿볼 수 있었다. 묵향이 그녀를 꼴도 보기 싫어하는 걸 알기에 조령 역시 좋은 감정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조령이 보인 증오심은 그런 말로 설 명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조령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여진족이라는 그녀의 출신이었다. 그리고 은밀히 살펴보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부대의 작전이나 이동 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 납치된 동료를 걱정해서 하는 행동으로는 너무 지나친 감이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마화는 근신이 풀리자마자 무영문에 기별을 넣었다. 그냥 덮어 두기에는 조령의 행동이 너무 의심스러웠고, 혼자 은밀히 조사하기에는 자신의 역 량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비마대(秘魔隊)를 움직이자니 자칫 그 사실이 묵향의 귀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조령을 싫어하던 묵향이었으니 당장에 죽여 버 리겠다고 펄펄 뛸 게 분명했다. 만약 자신의 육감과는 달리 조령에게 아무 죄도 없다면, 자신의 입장만 난처해지지 않겠는가. 그래서 마화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 고, 무영문에 그 조사를 의뢰했던 것이다.
무영문과의 연락은 마화가 책임지고 있었기에 무영문 쪽의 연락책과 접선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화의 설명을 다 들은 무영문의 연락책은 의뢰 내용을 종이에 써 내려가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조령 낭자를 조사해 달라는 겁니까?”
“예, 혹시 모르니 조령과 쟈타르 둘 다 부탁해요. 그리고 이건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절대 그쪽에서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심해 주세요.”
마화의 부탁에 연락책은 불쾌감을 억누르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천하의 무영문을 어떻게 보고 그런 초보적인 주문을 한단 말인가. 기분이 상할 만도 했다. “그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수롭지 않게 자신의 의뢰를 받아들이는 연락책의 모습에 마화는 잠시 고민을 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무영문을 못 믿어서 이런 부탁을 하는 게 아니에요. 혹시 그들과 연관된 제3의 세력이 있을 수도 있기에 하는 말이지요. 만약 그들이 먼 곳에서 조령이나 쟈타르 를 항시 관찰하고 있다면, 어설프게 조사를 하다가는 금방 그들에게 들키지 않겠어요?”
순간 연락책은 눈빛을 빛내며 되물었다. 어쩌면 뭔가 큰 건수일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제3의 세력이라고 하시면……?”
곧바로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던 마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것은 순전히 제 추측일 뿐인데, 그녀가 장인걸과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조령과 쟈타르는 여진족 출신이거든요.”
전혀 예상도 못 한 마화의 말에 연락책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표정이다.
“그저 추측일 뿐이에요. 그래서 내 수하들에게 그들의 감시를 맡기지 못한 거죠. 잘해 줄 수 있겠어요?”
“물론입니다. 이렇게까지 말씀해 주셨는데 실수를 할 저희 무영문이 아닙니다. 최대한 주의해서 은밀하게 그들을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조사 결과는 저에게만 보고해 주세요.”
조사 결과는 의뢰주에게 통보되는 게 불문율이었고, 또 마교와 무영문 간의 정보 소통에 있어 마교쪽 당사자는 마화였다. 그렇기에 그런 주문을 하지 않더라도 결 국마화에게 결과가 통보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그런데 왜 새삼 그런 부탁을 하는 건지 연락책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워낙 중요한 일이라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면 안 좋을지도 모른다는 뜻일 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하겠어요.”
* * *
맹주와 1차 접촉을 가진 옥화무제는 곧장 묵향에게로 달려왔다. 그녀는 자신이 아주 힘든 일이라도 해 낸 듯 으스대며 말했다.
“맹주는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인 듯해요.”
“받아들일 거면 받아들이는 것이지, 받아들일 생각인 듯하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짜증 어린 묵향의 말에 옥화무제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흥, 그거야 당신이 그런 제의를 한 저의를 알 수 없으니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근래 당신이 무림맹에 한 짓을 한번 생각해 봐요. 하북팽가의 혼원패권 장로를 불구 자로 만들어 놓고, 황실을 들쑤셔 놓고.. 그토록 무림맹의 권위를 실추시켜 놓을 때는 언제고, 지금은 민감하기 짝이 없는 사안에 대해 협조를 구하고 있잖아요. 그런 요청을 맹주가 덥썩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거죠.”
묵향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옥화무제의 말이 백번 옳았기 때문이다. 확실한 증거도 없이 이리저리 나댄 게 문제였다. 묵향으로서는 옳다고 생각해서 행한 것이었지만, 이해 관계에 얽매여 있는 무림맹의 입장에서는 입장이 난처했을 게 틀림없다.
“거~ 듣고 보니 그러네.”
잠시 옥화무제를 바라보고 있던 묵향은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그래, 그쪽에서 원하는 건?”
“중원 무림에 대한 영구적인 불가침조약을 원한다고 하더군요.”
뭐, 대단한 거라도 원하는 줄 알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묵향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 그 정도쯤이야.”
“그리고 마교가 협정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증거물을 원해요.”
“말코들이 욕심도 많으시구먼. 그래, 뭘 원한다고 하던가?”
“지금까지 마교가 중원에서 약탈해 간 각종 무공비급들의 원본….
중개자를 자처하면서 옥화무제는 가증스럽게도 맹주 쪽에서 꺼내지도 않은 조건을 말했다. 처음부터 사본 운운하면, 묵향이 그녀에게 실력 발휘를 좀 해서 조건을 한 단계 낮추라는 주문을 해 올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그녀는 처음부터 엄청나게 강한 조건을 들이댔다. 그런 다음 조건의 강도를 차츰 낮출 속셈이었다. 마치, 자 신이 맹주 쪽을 구워삶는다고 엄청난 고생이라도 했다는 듯 말이다.
그녀의 말에 묵향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콧김까지 거칠어지는 걸 보면 무척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언제든지 파기할 수 있는 공허하기 짝 이 없는 조약 따위 하고, 비급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도 특히나 원본이라면! 그것들은 지금껏 마교의 선조들이 중원 무림을 상대로 거둔 승리의 증표 들이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건 본교의 선조들이 쌓아 놓은 빛나는 업적이야. 그걸 본좌가 순순히 내놓을 거라고 생각했나? 바랄 걸 바래야지, 멍청한 말코 새끼들.”
“그건 그쪽 사정이고…, 어떻게 할 거예요? 맹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그걸 돌려줘야만 할 거예요.”
“이런 썩을! 딴 거라면 몰라도……?”
마교도들은 거의 정파의 무공을 익히지 않는다. 정파 무공을 연구하기 위한 자료로 사용하는 거라면 원본이 아니라 사본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 향이 이토록 고심하는 이유는 원본 비급이 지니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 때문이었다. 상대방 본진을 박살 내고, 그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증거물이 아닌가 말이다. 따 라서 원본 비급은 자손 대대로 이어 줘야만 할 조상들의 빛나는 업적이었다.
묵향은 술 한 잔을 쭉 들이킨 다음 투덜거렸다.
“당신이 꽤 능력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건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구먼.”
옥화무제는 발끈한 듯 뾰족한 목소리로 따졌다.
“맹주가 그렇게 요청을 하는데,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예욧!”
“이번 일도 그렇고…. 그놈의 독두개에 관한 일도 그렇고…….”
묵향의 말은 독두개를 빼내 달라고 부탁을 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것에 대한 질책성 말투였다.
“당신이라면 잘할 수 있을 것 같나요? 잘됐군요. 그럼 혼자서 해 봐요. 나를 더 이상 끌어들이지 말고. 능력이 없는 저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 드리겠어 요.”
옥화무제는 기분이 상한 듯 새침한 목소리로 톡 쏴 준 다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아, 기분이 상했다면 내가 사과하지. 자, 앉으라구. 아직 얘기가 안 끝났잖아.”
옥화무제는 자리에 앉으면서 퉁명스레 말했다.
“질질 끌지 말고 빨리 결정해요. 할 거예요? 아니면 그만둘 거예요?”
한동안 고심하던 묵향이 옥화무제에게 어설픈 미소를 지어보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원본은 안 되겠어. 그 대신 사본을 만들어서 돌려주면 안 될까?”
“사본 따위…, 쓸모가 있을까요?”
옥화무제가 이렇게 반문하는 이유는, 원본이 약탈당했다고 해서 그 무공이 문파에서 절전(絶傳)되어 버리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여러 권의 사본을 만들어 둔다. 한 명만 그걸 익히는 게 아니기에, 그 편이 훨씬 편리하기 때문이다.
설혹, 사본이 없다고 하더라도 원본 분실 후, 새로 만들면 그만이다. 아무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해도, 완전히 궤멸당하지 않는 한 그걸 익힌 사람이 한둘은 살아남아 있게 마련이니까. 그리고 살아남은 자가 가장 뛰어난 고수일 가능성이 컸다. 그런 그들이 자신의 기억을 정리해서 잃어버린 원본을 대신할 만한 사본을 만 들 건 뻔한 이치다. 이 경우 원본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야 했다. 왜냐하면 그걸 익히는 과정에서 완전히 외우다시피 했던 사 람이 만든 거니까.
“훗, 그건 맞는 말이야. 하지만 모두 다 복구된 건 아니지. 절전된 무공도 꽤 있을 테니까.”
“물론이에요. 하지만 스승도 없이 단순히 비급만으로 무공을 익힌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당신도 잘 알고 있죠? 더군다나 누군가가 비급에다가 장난이라도 쳐 놨다면…, 그건 비급이 아니라 자살하기 위한 지침서와 다름없게 되죠.”
옥화무제의 말에 묵향은 불쾌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
“본좌를 어떻게 보고 그딴 소리를 하지? 나를 그런 얄팍한 짓거리나 할 위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니…… “실망이로군.”
“나는 지금 무림맹 쪽의 생각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과 손잡고 계책을 실행해 줄 상대는 내가 아니라 그쪽이니까요.”
“어찌 되었건 재미없게 되었는데…….
한동안 말없이 이리저리 생각해 봤지만, 혼자서 결정할 사안은 아니었다. 아무리 자신이 교주라고 해도 조상들의 업적을 통째로 날려 버리는 일이었기에 원로원의 의견을 들어 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건 본좌 혼자서 처리할 사안이 아니야. 수하들과 좀 더 의논을 해 보고 답신을 보내도록 하지.”
묵향의 대답에 옥화무제는 놀랍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물론 그녀의 표정은 꽤 과장되어 있었지만..
“당신 같은 절대자도 수하들의 눈치를 봐야 해요?”
이에 묵향은 피식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의견을 수렴하는 거야. 그걸 모은 건 내가 아니니까.”
“한번 얘기해 봐요. 의견 수렴이 잘될 것 같아요?”
“글쎄…….”
고개를 갸웃하던 묵향은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실망이군. 본좌는 당신의 능력이 좀 더 훌륭한 것일 줄 알았는데, 천하의 옥화무제가 겨우 이 정도 능력밖에 없다니…….” 옥화무제는 새침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좀 제대로 된 협상을 해 오란 뜻이야. 나도 노력을 해 보긴 하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들어 줄 만한 조건이어야 말이지.”
“알았어요. 맹주를 다시 한 번 더 설득해 볼게요.”
“그래, 부탁해.”
묵향이 자신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는 걸 보며, 옥화무제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대명사였던 교주에게 이런 공손한 인사를 받게 될 줄이야.
대별산맥의 본거지로 돌아간 묵향은 먼저 그곳에 모여 있던 장로들의 의견을 물었다. 과연 맹의 요청을 받아들여도 되는지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교주님.”
“이런 망할 새끼들이! 본교가 오랑캐 놈들을 대신 박살 내 주겠다는데 증거는 무슨 얼어죽을 증거.”
“그런 개소리를 하는 놈의 아가리를 찢어 놔야 합니다, 교주님.”
그 외에 별의별 소리들이 다 튀어나왔지만, 결국 장로들의 의견은 하나로 귀결됐다. 절대로 무림맹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뭔가 참신한 제안을 내심 기 대하고 있었던 묵향은 장로들의 뻔한 대답에 짜증이 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뭐라 말하지는 않았다. 서로 간에 해묵은 감정이 있기에, 이런 경우 정상적인 사고를 하기보다는 먼저 감정이 앞선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