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5권 9화 – 밝혀지는 진실들

밝혀지는 진실들

연무장에 쌓인 나뭇잎을 빗자루로 쓸고 있던 동자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힐끔 누각 위를 살폈다. 며칠 전부터 장문인의 안색이 심상찮았기 때문이다. 뭔가 걱정이 라도 있는 듯 수심에 찬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거나, 혹은 방 안을 서성거리기도 했다. 그런 현천검제의 심적 동요가 그의 시중을 들고 있는 동자에게까지 영 향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현천검제의 표정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동자에게 명령했다.

“손님 두 분이 오실 게다. 차를 준비하도록 하거라.”

“예.”

동자는 언제나 그랬듯 사숙들과 차를 함께 하려는 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정말 잠시 후에 두 명의 낯선 손님이 도착했던 것이다. 한 명은 푸른 비 단옷을 입은 중후한 모습의 중년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꾀죄죄한 몰골의 살집이 좋은 늙은 거지였다.

늙은 거지가 먼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겠소이다, 장문인.”

현천검제는 답례하며 말했다.

“마중을 나가지 못해 죄송하오이다, 방주. 그런데 방주께서 무슨 일로 맹호검군 장로와 함께 여기에……?”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푸른 비단옷의 중년인이 대신했다.

“산 밑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올라왔소이다. 오랜만이외다, 장문인.”

무림맹의 장로인 맹호검군 백량의 신분은 각 문파의 장문인과 동급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현천검제나 개방 방주를 상대로 대등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잘 오셨소, 맹호검군 장로. 안 그래도 맹주께 전할 말도 있었는데……. 자, 저쪽으로 가십시다.”

현천검제는 손님들을 화산파 내부에 있는 외진 정자로 안내했다. 원래 이 정자는 장문인이 머리를 식힐 때마다 애용하던 곳이었는데, 과거 묵향이 자신을 찾아왔 을 때도 이곳으로 안내했을 정도로 은밀한 밀담을 나누는 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백량 장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맹주께서는 진실을 알고 싶어 하십니다. 그 때문에 제가 온 거지요.”

“진실이라니…, 그건 무슨 말씀이시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개방 방주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 역시 맹호검군 장로가 묻고자 하는 것에 관심이 많소. 나는 지금껏 살아오며 수많은 정보의 파편들을 다뤄 왔소. 그중에는 아귀가 딱딱 들어맞아서 재조사를 할 필요조차 없는 것도 있었지만, 어떤 것은 조사가 모두 끝났음에도 마치 똥 싸고 밑을 안 닦은 것처럼 찜찜한 것도 있더란 말이오. 물론 세월이 흐르다 보면 모든 진실이 밝혀지기는 하겠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현천검제는 방주의 말을 끊으며 부탁조로 말했다.

“본문은 이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인데, 구태여 시시비비를 가려서 뭣 하겠소이까. 이미 다 지나간 일이니 묻어 두는 게 좋지 않겠소?”

“그럴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시구려. 장문인께서 마교도들과 함께 행동하고 있지만 않았더라도 우리 두 사람이 이곳까지 오지는 않았을 게요. 그렇기에 장문인의 입 장을 명확히 밝혀 주시는게…….”

방주는 뒷말을 흐렸지만 그 속뜻은 명확했다. 백(白)인지 흑(黑)인지를 결정하라는 말이다. 화산파야 망하기 직전이었지만, 화경급 고수인 현천검제의 존재는 무 림맹으로서도 무시할 수가 없었으니까.

잠시 고민을 하던 현천검제는 한숨을 푹 내쉰 후 말했다.

“어쩔 수 없구려. 대신, 지금 내게 들은 말에 대해서는 절대 비밀을 지켜 주실 수 있겠소?”

“허허, 당연하지요.”

“그렇게 가볍게 얘기하실 상황은 아니외다. 만약 이 사실이 무림에 퍼진다면,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두 분의 목을 베어 버릴 테니 말이오.”

그 말에 지금까지 여유롭던 두 사람의 표정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현천검제의 말투에서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를 읽었기 때문이다.

사실 개방 방주는 며칠 전에 이곳에 도착했었다. 하지만 혼자서 화산파로 올라오지 못하고 밑에서 서성거리며 눈치만 살피고 있었던 이유는 현천검제와 마교와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호랑이 아가리 안으로 제 발로 쫓아 들어가는 격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그 때문에 동정만 살피며 애태우고 있던 중, 맹주의 밀명을 받고 온 맹호검군을 발견하고는 그와 함께 올라온 것이다. 설혹, 현천검제가 마교와 손을 잡았다고 해 도 맹에서 보낸 장로까지 죽여 없앨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들을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을 들었으니 두 사람의 안색이 창백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상대는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었으니까.

“다, 다짜고짜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오?”

“이건 본문의 치부까지 밝혀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소이다. 절대로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두 사람에게 절대 입을 다물겠다는 굳은 다짐을 받아 낸 후에야 현천검제는 조심스럽게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밝히기 시작했다. 물론 묵향과의 관계는 제외하 고.

“처음 시작은 패천문(敗天門)과의 갈등에서 시작되었소이다.”

백량 장로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방주가 재빨리 덧붙여 말했다.

“패천문은 화산파 근처에 있던 사파 계열의 작은 문파외다.”

그 말이 맞다는 듯 현천검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다음 계속 입을 열었다.

“그들과 가벼운 충돌이 벌어져서 몇 명 잡아다가 가뒀더니, 며칠 지나지도 않아 교주가 직접 노부를 찾아왔소.”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방주의 두 눈 가득히 불신이 어렸다. 자신도 기억을 더듬어야 생각이 날 정도로 작은 문파의 문도 몇 명을 잡아 가둔 것인데, 천하의 마교 교주가 직접 나섰다는 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방주가 그런 의문을 입 밖으로 내기도 전에 현천검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내 말을 믿기 힘들다는 눈치인 것 같은데, 그건 그대들이 알아서 판단하시오. 만약 내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된다면 나중에 조사를 해 보시든지.”

아무리 조사를 해도 알아낼 수가 없었던 일이었기에 천하의 개방 방주라 해도 찌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죄송하오. 계속 말씀해 주시오.”

“그때 교주의 말에 의하면, 패천문이 화산파의 영역에 들어왔던 것은 세력 확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교에서 지시한 비밀분타 건설 작업 때문이었다는 거였소. 그런 만큼 지금 당장 그들을 풀어 주지 않는다면, 사파들에 대한 마교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본문에 응징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이오.”

“협상을 하기 위해서 그가 직접 왔다는 겁니까?”

체면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파의 습성 탓인지 백량 장로가 의문을 제기했다. 그 정도 사안이라면 당주급이나, 아니면 장로급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았겠 냐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의문에 대한 현천검제의 대답은 또 다시 두 사람을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실은 협상을 하자고 그가 온 게 아니라, 나를 없애려고 달려온 거였소.”

화경급 고수인 현천검제의 목을 베려고 교주가 왔다면 다소 과한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납득할 만했다. 어디로 튈지 예상이 불가능한 묵향의 지 난 행적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말을 하던 현천검제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 시선을 저 먼 곳으로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첫 시작이 칼부림부터였다는 게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 처음 시작부터 정말 재수가 없었지.’

잠시 기억을 정리하던 현천검제가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교주가 자신의 신분을 밝힌 것은 아니었소. 그래서 난 살수인 줄로만 알았소. 하지만 몇 번 검을 채 나누기도 전에 혹시 무당파의 고수가 무공에 대한 깨 달음을 얻기 위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소. 왜냐하면 그가 태극혜검을 썼기 때문이오.”

“그, 그럴 리가!”

그 당시에 벌어졌었던 일들은 능비화에 의해 무림맹에 보고서가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그 자료는 매우 엉성한 것이었다. 능비화는 당시 옥대진과 사랑을 속삭인 다고 교주와 현천검제가 격전을 벌인 현장에 있지도 않았고, 또 있었다고 해도 상대가 어떤 검술을 썼는지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당시 있었던 일에 대 해서 사형제들에게 물어보고, 그걸 무림맹에 보고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백량 장로는 당시 교주가 태극혜검을 썼다는 건 현천검제에게 처음 들었던 것이다. “교주가 태극혜검을 쓴 게 확실합니까?”

침중한 음성으로 백량 장로가 물어오자, 현천검제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가 태극혜검을 직접 견식한 적은 없었지만, 본문에 태극혜검이 어떤 식의 검(劍路)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자료 정도는 있소이다. 그 자료가 틀린 게 아니라면 태극혜검이 확실하오.”

현천검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는데 안 좋은 기억을 떠올렸는지 얼굴에 씁쓸함이 가득 했다.

“사실 현경급 고수인 교주가 나를 죽이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오. 그런데 교주는 태극혜검으로 나를 죽인 뒤, 그 혐의를 무당파 에 덮어씌우려고 했소. 그 덕분에 나는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지요.”

그 말에 방주는 무릎을 탁 치며 외쳤다.

“그렇구려! 그가 어떻게 태극혜검을 익히기는 했지만, 완벽하게 몸에 배지도 않은 검법으로 장문인을 상대하려 했으니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었겠지요.” “맞는 말씀이오. 공격을 하든 방어를 하든, 무의식적으로 몸에 완전히 익은 검법을 펼치는 것과 의도적으로 어떤 검법을 쓰는 건 엄청난 차이가 있소. 한 박자씩 느 린 대응을 할 수밖에 없게 되니까 말이오. 그런데 난 그와 수백 초식을 나누고도 선기를 전혀 잡지 못했으니…, 그가 현경에 도달했다는 게 허언은 아닌 모양이었 소.”

말을 오래 해서 목이 타는지 차를 한 모금 한 현천검제는 다시 입을 열었다.

“태극혜검으로는 나를 죽일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교주가 내게 잠시 대화를 나누자고 제의했소. 그래서 나는 그를 이곳으로 안내했었소.”

방주가 쓱 주위를 둘러보니 외진 곳에 있는 정자인지라 은밀한 밀담을 나누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때 백량 장로가 조금은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 다.

“꼭 그와 밀담을 나눴어야 했소이까? 차라리 문파의 고수들을 불러 함께 교주를 상대했으면 됐지 않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소. 만약 자신의 제의를 거부한다면 곧바로 죽여 버리겠다는 그의 눈빛을 보고 난 깨달았소. 그때까지 교주가 전력을 다하지 않 았다는 것을. 그래서 뭔가 방법을 찾을 시간이 필요했던 거요.”

그러자 백량 장로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꼭 이런 은밀한 장소로 안내했어야 했습니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문도들이 있는 곳에서 떠나지 말았어야지요.”

“만약 문파대 문파의 전면전이라면 처음부터 그리했겠지요. 하지만 교주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 누구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말씀이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한 가 지 묻겠소. 내가 지금 당신을 갑자기 공격한다면, 방주가 옆에서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으시오?”

그 질문에 백량 장로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나올 수 있는 대답은 뻔한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대답은 방금 전에 자신이 한 말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 다.

“여기 도착한 다음에 교주가 그 협상이라는 걸 시작했소. 뭐, 협상이라는 건 교주의 표현이었고, 실제로는 협박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일방적인 통보라고 해야 할까.

뭐, 그런 거였소. 하지만 그대들의 생각만큼 협상의 내용이 들어 주지 못할 정도로 그리 무리한 것은 아니었소. 나름대로 이쪽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 록 자세히 설명해 주는 성의는 보였으니까. 더군다나 교주는 협상이 끝난 다음에 술을 한잔하자고 제의했소. 내 착각일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대놓고 협박한 것에 대 해 약간은 미안해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으니 말이오.”

“그자가 그런 마음을 먹었을 리 없소!”

지금까지 묵향에게 수없이 당해 왔던 개방 방주는 울분에 찬 듯 외쳤고, 백량 장로는 그 뒷말을 채근했다. 그는 현천검제가 교주와 술을 마시러 간 것까지는 보고 서를 통해 알고 있었으니까.

“자자, 그자가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소이까. 그래서 술을 마시러 갔었소?”

그러자 현천검제는 약간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백량 장로를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그건 맹호검군 장로도 잘 알 것 아니오? 마셨으니까 화산파가 이 지경이 됐지. 처음에는 당연히 함께 술을 마실 이유가 없다고 거절했소. 하지만 그가 도나 닦고 앉아 있으니 간덩이가 콩알만 해진 거냐고 조롱하기에, 화가 나서 그만 그의 제의를 승낙해 버리고 말았소. 그런데 예상외로 꽤나 유쾌한 술자리였소. 그와 나눈 대 화도 아주 건설적인 것이었고.”

대화 내용이 궁금했던 백량 장로가 묻기도 전에, 방주가 두 눈을 빛내며 먼저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무슨 대화를 나눴기에 그렇게 유쾌했다는 거요?”

방주는 오래 전에 벌어졌던 화산파의 숨겨진 비사를 듣고 있다는 데 완전히 정신이 빠져 있는 상태였다. 지금까지 너무나도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을 당사자 의 입을 통해 듣는 흔치않은 기회를 잡은 거였으니까.

“토론의 주제는 교주가 시전했었던 태극혜검에 대한 것이었소.”

불길한 생각에 다급히 백량 장로가 입을 열려고 했다.

“서, 설마……?”

“그 설마가 맞소. 태극혜검은 웬만한 상황이 아닌 한 시전조차 하지 않는 무당파 최고의 비밀이 아니겠소? 그걸 수백 초식이나 견식을 한데다가, 강론(講論)까지 들을 수 있었으니 더 이상 뭘 바랄 수 있겠소. 그는 무당파가 아닌 만큼 그 자신이 태극혜검을 익히며 느꼈던 부분들을 가감없이 설명해 줬소. 장점은 물론이고, 치 명적인 약점까지 모두 다 말이오.”

무당파 최고의 절기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말에 방주나 백량 장로는 아주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여기에 왜 온 것인지 그것조차 잊 어버리고 현천검제의 다음 말을 채근했다.

“그, 그게 사실이오? 도대체 어떤 말을 했기에?”

“허허, 내 입으로는 말해 줄 수 없으니, 맹주에게 물어보시구려. 아마 잘 가르쳐 줄게요.”

그런 천금과도 같은 대화가 오고 갔다니.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개방 방주는 자신도 모르게 솔직하게 자신의 심정을 말했다.

“정말 부럽소이다.”

그러자 현천검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부러워하실 거 없소이다. 교주는 아마 내가 자신의 청을 받아 준 것에 대한 대가로 그렇게 얘기를 해 준 모양이지만, 그걸 덥석 받아들인 나는 아주 값비싼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했지요. 안 그렇소이까? 맹호검군 장로.”

“그, 그게 무슨 말이오?”

당혹스런 표정으로 반문을 하는 백량 장로의 말을 무시하고, 현천검제는 그 이후에 일어났던 일을 천천히 이야기해 주었다.

“교주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무림맹은…….”

자신과 교주와 만나는 걸 오해한 무림맹이 개입하여 화산파 장로들에게 압력을 가했고, 그 결과 자신이 장로들에게 어떤 꼴을 당했는지 말이다.

이야기를 듣던 백량 장로의 안색은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자신들이 끼어들어 얼마나 일을 망쳐 놨는지를 깨달았으니까. 현천검제의 설명은 자신이 알고 있는 화산파에 얽힌 정보들과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고 있었기에 그 진위를 의심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점점 일그러져 가는 백량 장로의 얼굴과는 달리, 개방 방주의 얼굴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빛만이 역력했다.

“이거, 장문인의 말을 못 믿겠다는 건 아닙니다만…, 단전이 파괴된데다가, 손발의 힘줄까지 잘렸다면..

아마 그 뒷말은 대라신선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절대로 못 고친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 정도의 치명적인 상처는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한 것이었으니까. 현천검제는 입 아프게 설명하는 대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옷을 슬쩍 들어올렸다. 그의 몸에는 방금 전에 그가 설명했던 상처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어찌 사람의 탈을 쓰고…….”

말로 듣는 것과 실제 상흔을 직접 보는 것은 다른 법이다. 손발의 힘줄 부위에 깊게 나 있는 검흔(劍痕)과 단전에 나 있는 상흔.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 와 동시에 아무리 오해였다지만 장문인에게 이런 짓을 행한 화산파의 장로들에 대한 분노를 감추기 힘들었다. 차라리 깔끔하게 암살을 해 버린 경우는 간혹 있었어 도, 사형제끼리 이렇게까지 악질적인 만행을 저질렀다는 소리는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다 부덕한 탓에 벌어진 일이거늘, 누굴 탓하겠소.”

하지만 아직까지도 현천검제의 말을 제대로 믿기 힘들었던 백량 장로는 힘겨운 어조로 의문을 제기했다.

“그렇다면 그 상처들을 어떻게 치료하셨소이까? 설마, 마교에서 치료해 줬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오호, 어찌 아셨소? 혹시 이 상처들이 가짜라고 생각하시고 있는 게요? 가짜라고 생각된다면 만져 보셔도 무방하오.”

말을 하며 짐짓 손까지 내미는 현천검제다. 백량 장로는 살펴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세히 만져 보기까지 했다. 뭔가 이상한 걸 피부에 덧붙여서 가짜로 만든 흉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백량 장로의 모습에 현천검제는 피식 웃으며 마치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마교에는 불가사의할 정도로 뛰어난 의술을 지닌 어르신이 한 분 계셨소. 내 상처들은 모두 그분이 치료해 주신 거라오. 뭐, 믿지 못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오.”

어이없게도 화산파의 멸문에 대한 발판을 무림맹에서 만들어 줬다는 걸 안 백량 장로는 기가 막혀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일이 이토록 한심하게 꼬 일 수가 있었을까. 자신도 거기에 한 팔 거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백량 장로는 결론이 이렇게 난 것에 당혹감을 감추기 힘들었다.

백량 장로가 화산파까지 현천검제를 찾아온 것은 맹주의 밀명을 받아서였다. 현천검제가 마교의 협박에 못 이겨 같이 행동한 것일 수도 있으니 잘 구슬러 보라는 말이었다. 어차피 화산파를 멸문에 이르게 한 것이 마교가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 현천검제의 말을 듣고 보니 백량 장로로서는 그가 복수의 검을 무림맹으로 향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할 판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개방 방주는 현천검제가 입을 다물어 버리자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허허, 왜 갑자기 말을 멈추는 게요? 아까 교주가 장문인을 구출하게 된 연유부터 계속 이어서 얘기해 주시구려. 너무나도 흥미진진하구려.”

씁쓸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현천검제는 그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후에 벌어진 일들을 담담한 목소리로 다시 말해 주었다. 자신이 제거되었으니, 당연히 교주의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교주는 곧바로 그에 대한 응징을 가해 왔다는 걸 말이다.

얘기를 듣던 방주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문에 교주가 화산파 장로들을 그토록 잔인하게 죽인 것이었구려. 팔다리를 자르고…….”

“그게 그 사람 나름의 의리였던 거겠지요. 내가 자신의 청을 받아들인 탓에 그런 꼴이 된 것에 대한……. 허허헛, 그러니까 총단으로 데려가 치료까지 해 준 게 아 니겠소?”

찔리는 구석이 많았던 백량 장로는 은근한 목소리로 슬쩍 물어보았다.

“어찌 되었든 처음 원인 제공은 교주가 한 것이 아니오? 물론 장문인께서 그에게 작은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혹시 그자가 그걸 빌미로 뭔가를 요구하지는 않았소이까?”

“갈 곳도 없을 테니, 마교로 들어오라고 했소.”

그러면 그렇지 하는 눈빛을 하며 백량 장로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마교에 합류하실 생각이신 게요?”

현천검제는 그 질문에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소. 내가 제안을 거절하자 교주도 더 이상 권하지 않았소. 아니, 그때 이후로 그를 만나기도 힘들었소.”

“교주는 지금 양양성에 있소이다.”

“알고 있소. 마교를 떠나 양양성에 가서 교주와 다시 만났으니까. 그때 나와 함께 동행했던 마교도들은 내가 딴 데로 빠지지 않고, 양양성으로 가서 교주와 만나도 록 감시하는 역할을 했던 거였소.”

그제야 왜 현천검제가 마교도들과 같이 동행했었는지를 알게 된 개방 방주는 고개를 끄덕이다 불현듯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교주와는 무슨 얘기를 나눴소? 그가 장문인을 이렇게 쉽게 놔줄 리가 없었을 텐데…….”

“쉽게 놔준 건 아니오. 화산파의 봉문을 요구했으니까.”

“화산파의 봉문이요?”

그 말에 백량 장로는 콧방귀를 뀌며 중얼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제 화산파는 거의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런데 봉문을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 질 게 있단 말인가. 교활하기 짝이 없는 교주가 겨우 그런 걸 요구했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장문인으로 있는 한, 다시는 무림에 나오지 말라고 하더이다.”

이제야 백량 장로는 교주가 진정으로 원한 게 뭔지를 눈치 챘다. 그는 현천검제가 무림맹의 편에 서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구태여 그 약속을 지키실 필요가 있겠소이까? 혹시라도 마교가 마음에 걸리시는 거라면 모든 문도들과 함께 맹으로 거처를 옮겨도…….”

“본인은 여기를 떠날 생각이 전혀 없소. 그리고 장문인의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도 없고 말이오.”

“그, 그래도 이런 사안을 그렇게 감정적으로 처리하시면 아니 되오. 최소한 맹주님과 만나서 대화라도 해 보는 것이…….”

현천검제는 백량 장로를 똑바로 바라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이제부터 본문은 무림의 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겠소. 안 그래도 맹에 사람을 보내 본문의 봉문 사실을 알리려고 했는데, 맹호검군 장로께서 오셨으니 이것도 다 원시천존님의 뜻인가 보오.”

현천검제는 품속에서 봉서를 꺼내 백량 장로에게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이걸 맹주께 전해 주시면 고맙겠소이다.”

봉서를 받은 백량 장로는 다급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면 현천검제를 다시 맹에 끌어들이는 일은 아예 물 건너가게 되기 때문이다.

“하,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장문인께서 직접 맹주를 찾아뵙고…….”

“그러고 싶지 않소. 본문의 멸문에 있어 무림맹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오.”

“그건 억지외다.”

백량 장로의 반박에 현천검제는 싸늘하게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억지건 아니건,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그럼 마중은 않겠소. 잘 가시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순간 백량 장로의 표정은 마치 소태라도 씹은 듯 일그러져 있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얘기가 진행될 줄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꼭 누군가에게 농간을 당하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