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6권 10화 – 건곤일척의 대전
건곤일척의 대전
인질들이 탈출했다는 보고를 입수한 편복대주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그들은 자신의 통제 하에 있었다. 그런 만큼 그 책임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이런 멍청한 것들! 어찌 그런 실수를 할 수 있단 말이냐.”
“하지만 황녀께서…….”
“아무리 황녀를 인질로 잡았다고 해도 그렇지, 황녀 따위의 목숨과 반도의 딸의 목숨이 그 가치가 같겠느냐! 황녀 따위는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 무슨 대가를 치르 더라도 연놈들을 다시 잡아들이도록 해라. 알겠느냐?”
“존명!”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명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그들을 다시 잡아들이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것은 편복대주도 잘 알고 있었다. 도망친 자들은 거의 절정에 준하는 실력을 갖춘 고수들이다. 실혼인들의 전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머리가 텅 빈 실혼인들의 능력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전면전이라면 몰라도 추격전에는 그리 유용하지가 못하다는 말이다.
‘어쩔 수 없군. 교주님께 책망을 좀 듣는 한이 있더라도, 증원군을 파견하는 수밖에…….?
생각을 정리한 편복대주는 장인걸에게로 달려갔다. 장인걸은 집무실에 혼자 있지 않았다. 장인걸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상대는 천마혈검대주 환영비마 구양운 장 로였다. 묵향과의 접전이 임박해 있는 만큼, 장인걸은 황제를 호위하기 위해 남겨뒀던 천마혈검대원들을 모두 다 불러들였던 것이다. 그들 없이는 싸움 자체가 불 가능했으니까.
구양운 장로는 전사(戰士)의 모습이라는 게 과연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듯한 강인한 용모를 지닌 사내였다. 핏빛 혈(血衣)를 즐겨 입는데다가, 숨이 막힐 듯 한 지독한 마기까지 물씬 뿜어내다 보니 가까이 다가가기조차 겁이 날 정도의 인물이었다.
편복대주는 구양운 장로의 얼굴을 보자마자 뒤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지금 보고하기에는 때가 너무 좋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를 알아본 구양운 장 로가 불러 세웠다.
“편복대주, 무슨 일인데 오다가 돌아가는 것인가?”
일순 편복대주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장인걸에게 다가가 납쭉 엎드리며 사죄부터 했다. 인질들이 가증스럽게도 황녀의 목숨 을 위협하여 탈출했다는 보고와 함께. 물론 보고 내용은 실제와는 많이 왜곡되어 있었다. 하지만 노하구에서 올라온 보고만으로 상황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던 편복 대주로서는 그게 진실인 줄 알았다.
그리고 놈들이 어떤 수단을 써서 탈출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놈들이 탈출했다는 게 가장 핵심적인 보고 내용이었고, 그놈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어떤 수단을 쓸 것인지를 빨리 결정하는 게 중요했던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구양운 장로가 끼어들었다.
“인질이라면 부교주의 딸 말인가?”
“그렇습니다.”
편복대주의 보고를 들은 장인걸은 그를 질책하기에 앞서 재빨리 명령부터 내렸다.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인 것이다.
“워더리 장군에게 출동 명령을 하달해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어떻게든 그 연놈들을 몽땅 다 잡아들이라고 말이다!”
장인걸이 보유하고 있는 고수 집단은 둘로 나뉘어 관리되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하루아 장군이었고, 다른 한 명이 워더리 장군이었다. 그들의 휘하에는 대략 2 천명 정도의 여진 출신 고수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존명!”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구양운 장로가 입을 열었다.
“교주님, 차라리 제수하들을 몇 명 보내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일 듯합니다.”
편복대주는 장인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빨리 결정을 내려달라는 듯이.
“놈과의 전쟁이 언제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지금, 천마혈검대의 전력을 분산시킬 수는 없네.”
“허면, 워더리 장군에게 출동 명령을 전달하겠사옵니다, 교주님.”
편복대주가 장인걸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밖으로 달려 나가려 할 때, 반대편에서 그의 부하가 전서 한 장을 손에 들고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는 편복대주를 보 자마자 큰 목소리로 외쳤다.
“대주님, 기뻐하십시오. 적도의 수괴를 함정으로 끌어들여 매몰시켜 버렸다는 급보입니다.”
“뭣이!”
부하는 편복대주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방금 전에 입수된 전서를 전했다. 전서에는 깨알만한 글씨로 방금 전 태산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간략한 보고 내용이 기
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차후에 좀 더 자세한 보고서를 발송하겠다는 글이 덧붙여져 있었다.
편복대주는 전서를 몇 번이나 반복해 읽으면서도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만큼 기뻤던 것이다.
이때 장인걸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그게 사실이냐?”
부하가 외치는 소리를 장인걸도 들었다. 그는 편복대주가 전서를 들고 자신에게로 달려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편복대주는 멍하니 서 있는 게 아닌가. 결국 장인걸은 도저히 점잖게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어 태사의를 박차고 뛰쳐나온 것이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숙적을 없앴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체면 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말인가.
장인걸의 목소리에 편복대주는 화들짝 놀랐다. 그는 오른손의 손톱으로 자신의 왼손을 힘껏 찔렀다. 극심한 통증과 함께 왼손에는 손톱이 박힌 자국이 선명히 드 러났다. 이게 정녕 꿈은 아니라고 생각한 편복대주는 장인걸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보고했다.
“묵향 부교주를 처치했다는 보고이옵니다.”
그러면서 황급히 전서를 장인걸에게 전했지만, 장인걸은 눈살만 찌푸릴 뿐 그걸 읽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 읽을 수가 없었다. 특급 비밀 전서였기에 최상급의 복 잡한 암호로 쓰여 있어 그걸 한 눈에 해독할 수 있는 인물은 편복대주를 포함하여 몇 명 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 뭐라고 써져 있는 것이냐?”
장인걸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났고, 눈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편복대주는 화들짝 놀랐다. 아무리 정신이 없다고 해도 전서를 그대로 교주에게 전하다니, 이런 실수가…….
편복대주는 고개를 조아리며 급히 대답했다.
“태산파로 잠입한 적도들을 함정으로 유인하여 폭사시켰다고 하옵니다. 지하 수십 장 밑에 매몰된 상황이기에 놈이 아무리 날고기는 재주를 지녔다 해도 살아서 나오기는 힘들 듯 합니다.”
“들어간 놈이 묵향이 확실하다더냐?”
“예. 연공실을 막고 있는 강철문을 파괴할 때, 그자가 묵혼검을 사용하는 것을 똑똑히 봤다고 하옵니다.”
장인걸은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흠, 묵혼검이 놈의 신물(信物)인 것은 확실하지만, 연막전술일 수도 있어.”
“물론 그렇사옵니다.”
편복대주는 깨알같이 작은 글자들 중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 보면, 놈은 거의 40여 명에 가까운 절정고수들을 거느리고 태산으로 달려왔다고 하옵니다. 놈은 우선 지상부를 완전히 제압한 다음, 연공실로 향했다고 하옵니다. 일전에 교주님께도 보고를 드렸다시피, 연공실 입구는 태산파에서 설치해 놓은 1척 두께의 강철문이 막고 있지 않사옵니까? 놈이 함정 안으로 들어가기 쉽도록 하기 위해 그걸 다른 문으로 바꾸는 게 어떨까 교주님께 여쭈었던 그 문 말이옵니다.”
편복대주의 말에 장인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억나는군. 그때 본좌가 그냥 놔두라고 했었지. 입구가 너무 취약하면 오히려 놈이 의심할 수도 있다고 말이야.”
“예. 바로 그 강철문을 놈은 단 일격에 부숴 버렸다고 하옵니다.”
그 말에 장인걸도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자신이라면 1척 두께의 강철문을 그렇게 부술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걸 일격에?”
“예. 놈이 부수기에 앞서 화경급으로 보이는 고수 한 명이 검을 뽑아들고 문을 공격했다고 하옵니다. 무시무시한 검기가 회오리쳤지만, 문짝은 수많은 흠집만을 냈을 뿐 끄떡도 없었다고 하옵니다. 그러자 놈이 나서서 문을 한참 살펴보는 듯하더니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답니다. 시커먼 광택을 내뿜은 짤막한 검이라면, 놈의 신물인 묵혼검이 틀림없지 않사옵니까. 놈은 단 일격으로 강철문을 산산조각 내버렸다고 하옵니다. 이 정도면 그자가 부교주라는 틀림없는 증거가 아니올런 지요?”
장인걸의 얼굴에 그제서야 미소가 떠올랐다. 통쾌한 광소를 터뜨리는 게 아니라, 미소로만 그치고 있었던 것은 그가 아직까지도 묵향의 죽음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날이 오기를 얼마나 학수고대 했던가. 하지만 묵향이라는 벽은 그에게 너무나도 높았었다. 감히 그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조 차 하기 힘들었을 정도로……
“허어, 설마 놈이 그런 말도 안 되는 함정에 걸려들 줄이야…….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구나.”
지금까지 조용히 듣고 있던 구양운 장로가 끼어들었다.
“부교주인지 아닌지 인부들을 동원해 함정을 파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며칠 내로 결과를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잠시 생각하던 장인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짓이다. 만약 놈이 귀식대법이라도 쓰며 그 속에서 질긴 명줄을 연장한 채 기다리고 있다면 어찌되겠느냐? 시체를 확인하겠다고 하다 자칫 놈의 탈출을 도와주는 꼴이 될 수도 있어.”
그 자신도 귀식대법에 일가견이 있는 만큼, 공기 한줌 없는 곳에서도 며칠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다는 것을 그제야 떠올린 구양운 장로였다.
“아, 속하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시길…….”
“괜찮다. 어쨌건 놈이 그렇게 죽다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는구나. 이렇게 기쁜 날, 술이라도 한잔 해야겠어. 같이 한잔 하겠느냐?”
“영광입니다, 교주님.”
구양운 장로는 장인걸의 뒤를 따라 몇 발자국 가다가 갑자기 뒤로 돌아서며 편복대주에게 지시했다.
“참, 감패(甘覇) 대장(隊長)에게 전달해 주게. 제3대를 이끌고 지금 즉시 황성으로 가서 황제를 경호하라고 말이야. 나는 나머지 대원들을 이끌고 내일쯤 출발할 거라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장로님.”
장인걸은 구양운 장로와 축하주라도 나눌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때, 물러나려던 편복대주의 머릿속을 번쩍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급히 장인걸에게 달려가 보고했다.
“놈이 죽은 게 확실하다면 지금 당장 춘릉으로 치고 들어가야만 하옵니다, 교주님.”
장인걸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놈이 죽은 이상, 남은 놈들은 허수아비나 다름없다. 무리해서 소모전을 벌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외람된 말씀이옵니다만, 속하의 생각으로는 그들이 소모전이라도 벌여 준다면 오히려 좋겠사옵니다.”
“그건 무슨 말이냐?”
“수괴인 부교주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밑에는 뛰어난 고수들이 즐비하지 않사옵니까. 만약 부교주가 죽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들 중 한 명이 곧바로 교주 로 등극하겠지요. 그때 새롭게 교주가 된 자가 전투를 하지 않고, 십만대산으로 철수한 다음 후일을 도모하려 한다면 어찌되겠사옵니까?”
그 말에 장인걸은 머리통에 철퇴라도 두들겨 맞은 듯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그렇다. 놈들이 십만대산으로 철수라도 하는 날에는 큰일이었다. 이런 평지라면 혹 몰 라도, 십만대산 같은 철옹성에 2만이 넘는 고수들이 틀어박힌다면 설혹 500만 대군을 동원한다 해도 승산이 없었던 것이다.
“좋은 지적을 해 주었다. 지금 당장 장수들에게 출진 명령을 내려라.”
“존명!”
편복대주가 달려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구양운 장로는 시선을 장인걸에게로 옮기며 말했다.
“속하도 남아서 싸워도 괜찮겠습니까? 연경에서의 생활은 너무 지루해서.”
“좋을 대로 하게. 아무래도 놈들을 쉽게 흡수하기는 힘들 테니, 자네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겠군.”
“속하가 교주님께 도움이 된다니 기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핫핫핫, 자네가 내 옆에 있다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나.”
기분이 좋은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장인걸의 얼굴에는 십년 묵은 체증이 쑤욱 내려간 듯 한없이 밝기만 했다.
뿌우우우~~~
둥! 둥! 둥! 둥!
* * *
심장을 울리는 듯한 커다란 전고(戰鼓) 소리와 귀를 찢는 듯한 나팔소리에 맞춰 금나라의 50만 대군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병대는 전군(前軍)과 좌군(左 軍), 우군(右軍)의 3개 집단으로 나뉘어 이동을 시작했다.
마교도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일거에 포위망을 구축하기 위해 춘릉성북쪽을 목표로 전군이 비교적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면, 춘릉성의 동쪽과 서쪽을 목표로 하 는 좌군과 우군은 전군에 비해 조금 더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그리고 대별산맥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춘릉성의 남쪽은 5만에 달하는 기마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빠르게 달려가 우선적으로 포위망을 구축했다. 그런 뒤 목표 지점에 도착한 좌군과 우군의 일부가 아래쪽으로 내려가 남쪽에 대한 포위망을 더욱 굳건하게 강화했다.
포위망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50만 대군은 일제히 신속하게 움직였기에, 춘릉성 동서남북의 네 방위는 거의 동시에 틀어 막혀 버렸다. 마교도들이 포위망을 뚫고 도망칠 우려가 있었기에, 장인걸은 포위망 형성에 각별히 신경을 쓴 것이다.
장인걸은 전군(前軍)의 바로 뒤쪽에 자리 잡은 후군(後軍)과 함께 하고 있었다. 후군이야말로 장인걸의 최고 정예부대였다. 천마혈검대원들을 비롯해 하루아와 워 더리 장군이 지휘하는 4천에 달하는 여진 고수들. 그리고 아직 고수라는 말을 듣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무공을 조금이나마 익힌 3만에 달하는 여진족들이 후군의 주 전력이었다. 여진족 고수들은 좀 더 세월이 지나면 금나라 군의 대들보가 되겠지만, 아직까지는 지닌바 실력이 미천한 수준이었다.
대열의 가장 후미에 자리 잡고 있는 게 바로 실혼인들이었다. 그들의 수는 무려 8천2백여 명. 아쉬운 게 있다면, 1류로 구분될 수 있을 만한 고수들의 숫자가 채 500명도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포위망이 완성되자, 장인걸의 진영 쪽에서 백기를 든 장수 한 명이 맹렬한 속도로 말을 몰아 춘릉성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는 춘릉성 위에 서 있는 마인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듣거라! 지금이라도 늦…, 커억!”
금나라 장수는 장인걸에게 지시받은 대로 항복을 권유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본론을 채 꺼내기도 전에 비명횡사하는 비운을 당했다. 그의 이마 한가운데에 화살 한 대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금나라 장수가 화살에 맞아 말에서 떨어지는 그 순간, 북쪽 성문이 활짝 열리며 검은색 갑주로 중무장한 기마대가 달려 나왔다. 흑풍대였다. 그리고 흑풍대를 뒤따 라 달려 나오는 무리들은 총단의 외곽경비대였다. 마교는 이 전투에 그들의 명운을 건 것이다.
그 뒤를 이어 호법원과 수라마참대, 천랑대, 염왕대, 자성만마대같이 무공이 뛰어난 전투단들이 조그만 성문을 통과한다고 우물거리지 않고 일제히 성벽에서 뛰어 내리며 적진을 향해 달려갔다. 무려 3만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 이들이야말로 천마신교의 모든 것이었다.
그들은 춘릉성에서 뛰어 나오자마자 쇄기꼴 진형을 구축하며 북쪽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북쪽 포위망 뒤쪽에서 강렬한 마 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것을. 그곳이 바로 장인걸의 본진이었고, 그를 없앨 수만 있다면 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아무리 자신들이 고수들이라고 해 도, 50만이나 되는 대군과 칼부림을 벌인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위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헛! 저럴 수가. 모두들 북쪽으로 이동하라. 전군(前軍)을 지원하라!”
상부에서 명령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실전 경험이 풍부한 금나라의 장수들은 저마다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북쪽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장인걸 쪽 진영은 이미 처음부터 허를 찔려 주도권을 뺏긴 상태에서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성 안에 틀어박혀 반항할 줄 알았지, 이렇게 역으로 치고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 던 것이다.
마교도들이 달려간 방향에 있던 전군에서는 여기저기에서 목이 터져라 소리치는 장수들의 외침이 들렸다.
“모두들 제령단(制靈丹)을 복용하라!”
묵향이 죽은 이상 장인걸은 마교도들을 손쉽게 항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병사들에게 제령단을 복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제령단은 득이 큰 만 큼, 실도 큰 약물이었다. 제령단을 복용한 후에 그 후유증을 극복하려면 거의 한 달은 족히 휴식을 취해야 했다. 마교를 무너뜨린 다음에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 장인걸은 가급적이면 병사들에게 제령단을 먹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마교가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려 하자 다급히 제령단을 복용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문제는 갑작스런 이런 조치에 병사들이 제령단의 효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제령단은 삼키자마자 바로 그 효과가 발휘되는 즉효성의 약물이 아니었다. 소화되어 몸에 흡수되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전투는 지금 바로 코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마교도들이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살기에 최전선에 있던 병사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로 창칼조차 제대로 휘두르지 못했다. 도망치고 싶어도 엄청난 대군이 끊임없 이 뒤에서 밀려들고 있었기에 몸조차 돌리기도 힘겨웠다.
“으아악!”
순식간에 처절한 비명과 시뻘건 선혈이 전장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마교도들이 지나간 자리는 참혹한 모습으로 쓰러진 시체들로 인해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금나라의 백인대를 이끌고 있는 하루가는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 역시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백전노장이었지만 지금은 검조차 제대로 쥘 수 가 없을 정도로 두려움에 떨었다. 마교도들은 그가 지금까지 상대했던 수많은 병사들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지독한 살기도 살기였지만, 아무 렇지도 않게 휘두르는 그들의 병기에 부하들의 머리가 터져 나가고 몸이 반 토막으로 잘려졌다.
난세에 태어난 탓에 참혹한 전쟁터는 질리도록 봤다고 생각했던 하루가였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친형제처럼 아끼던 부하들이 사방에서 처절한 비명을 지 르며 허무하게 쓰러져 갔다. 증오는 죽음의 공포까지도 이겨내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두려움에 떨던 하루가가 이를 악물며 다급히 품속에서 제령단을 꺼내 복 용하려는 순간이었다.
서걱.
하루가의 몸통이 반으로 잘리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채 눈을 감지 못한 그의 시야에는 온 몸이 피로 물든 마교도 하나가 닥치는 대로 부하들을 주살하며 장인걸 대원수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두려움에 질린 금나라 병사들의 상태야 그렇다고 해도, 그들을 뚫고 장인걸이 있는 본진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마교 쪽의 입장 역시 결코 좋은 것은 아니었다. 금 나라 병사들은 모두 두터운 갑주로 몸을 감싸고 있었기에 내공을 끌어올려 일격을 가하지 않는 한, 잘 죽지도 않았다. 비록 일방적인 도살극을 벌이고는 있었지만, 적을 죽이는 수에 비한다면 진격속도는 매우 더뎠다. 더군다나 사방에서 적의 대군이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었기에 진격로를 뚫는 게 결코 용이하지 않았다. 적을 죽 이고 또 죽이며, 마교의 고수들도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했다.
천마신교가 세운 작전은 단순했다. 아무리 적의 숫자가 많더라도, 그 본진만 날려 버리면 된다. 문제는 본진까지 어떻게 뚫고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다.
적의 수가 많긴 했지만, 인간인 이상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상대가 되지 않는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하며 살육을 벌이면 분명 병사들이 동요할 게 틀림없다.
그 틈을 노려 본진으로 치고 들어가 장인걸의 목만 베어 버린다면 적의 대군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결국에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거라 생각한 것이다. 금나라 병 사들에게 처절한 공포심을 심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이번 작전의 핵심이었다.
명령을 받은 마교도들은 쇄기꼴로 진형을 짠 뒤 무조건 앞으로 돌진하며, 걸리적거리는 병사들을 최대한 잔인하게 죽이고 또 죽였다. 금나라의 공격은 바로 이 쐐 기꼴에 집중되었다. 자국의 병사들이 함께 뒤섞여 있음에도 후방에서 수없이 많은 화살들이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우박처럼 쏟아졌다.
슛, 슛.
허공을 가르며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는 금나라 병사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두려움에 떨던 금나라 병사들이 시간이 흐르자 전장 의 광기에 사로잡혔는지 미친 듯이 칼이나 창을 휘두르며 마교도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우박같이 쏟아지는 화살을 막아 내고, 병사들까지 뚫으며 앞으로 전진하는 것은 제아무리 뛰어난 고수라고 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교의 정예는 그 일을 해내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파괴력으로 피바람을 일으키면서 자신들을 가로막고 있는 수많은 병사들을 뚫으며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쐐기꼴 진형의 선두에는 호법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염왕대와 천랑대가 받쳐 주었다. 혈랑대가 없는 지금, 마교에서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는 단체는 호법원이었기에 이런 진형을 짰던 것이다.
선두에서 미친 듯 피바람을 일으키며 앞으로 달려가는 호법원 고수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지금껏 그들은 교주와 교내의 중요 인물들을 보호한다는 사명에 얽매여 제대로 된 능력을 발휘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더군다나 묵향이 교주가 된 이후로는 이용가치가 사라진 폐물 취급까지 받아야 했다.
그런 그들이 이제 자유를 얻은 것이다. 피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자유를, 그리고 그들의 가장 선두에는 대호법이 연신 투덜거리며 손발을 놀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수십여 성상 고련의 결과가 겨우 이런 잡것들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될 줄이야.”
자신에게 달려드는 병사들을 향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권법을 펼치자, 그 순간 10여 명의 병사들이 뭔가에 얻어맞기라도 한 듯 비명을 터트리며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땅바닥에 쓰러진 병사들이 입고 있는 갑옷은 마치 커다란 망치에라도 찍힌 듯 푹 파여 있었다. 입가로 피를 내뿜으며 쓰러진 병사들은 온 몸을 부 들부들 떨다 이내 축 늘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을 향해 마교의 고수들이 물밀듯 진격해 오고 있음에도, 그것을 바라보는 장인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장인걸은 옆에 서 있는 구양운 장로 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본좌가 이긴 것 같군. 큭큭큭.”
“이것도 다 교주님께 무운(武運)이 함께함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마교의 고수들이 가공할 만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금나라가 이번 전투에 동원한 병사의 수는 무려 50만이다. 더군다나 이제 제령단의 약효까지 발현되기 시작하자, 무자비한 살육을 저지르며 돌진해 들어오는 마교의 진격 속도가 현저하게 둔해지고 있었다.
그들을 막아서는 병사들의 눈에는 핏발이 곤두서 있어 한 치의 두려움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강력한 마약 성분이 들어 있는 제령단을 복용한 상태에서 전장의 광기에 휩싸이다 보니 금나라 병사들은 이미 피 냄새에 미쳐 버린 늑대가 되어 있었다. 죽음의 공포 따위는 전혀 생각지도 않는 그들의 두 눈에는 적에 대한 엄청난 적개심만이 넘쳐 흐를 뿐이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나 지났을까? 호법원의 고수들은 온 몸이 피에 젖을 만큼 격전을 치르며 겨우 장인걸의 본진 앞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바로 코 앞에 호법원의 고수들이 밀려들고 있음에도, 장인걸을 둘러싸고 있는 고수들은 전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장인걸의 수하 고수들이 모두 다 활을 등에 메고 있다는 점도 특이했다. 보통 무공을 익힌 고수들은 암기만 사용해도 충분히 적을 살상할 수 있기에, 거추 장스런 활은 잘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마교도들이 바로 코앞에까지 이르렀는데도 불구하고, 활을 꺼내 들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이때, 장인걸이 큰소리로 외쳤다.
“철영! 뒤에 숨어 있지 말고, 본좌와 얘기 좀 하세!”
대호법이 만류했지만, 철영 부교주는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10여 명의 병사들을 단칼에 베어 버리며 앞으로 나섰다. 여기까지 뚫고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까지 맺혀 있었다. 호법원의 고수들과 철영 부교주가 지나온 길은 그야말로 시산혈해(屍山血海)! 참혹하게 죽은 시체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 었다.
철영 부교주는 칼에 묻은 피를 가볍게 흔들어 털어 버린 뒤,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뵙는구려, 장인걸 교주.”
장인걸은 그런 철영에게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불쑥 물었다.
“만약 묵향이 없었다면 자네는 나를 따랐을 텐가?”
그 말에 철영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본교 내에서 귀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인물은 거의 없을 거라고 노부는 확신하오. 하지만 귀하의 능력이 아무리 걸출하다 해도, 귀하보다 더욱 뛰 어나신 분께서 지금 교를 이끌고 계시니 난들 어쩔 수 없지 않겠소이까?”
장인걸은 그 말이 꽤 마음에 든 듯 호탕하게 웃은 뒤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가?”
“물론이오. 지금에 이르러 서로 간의 무공 수준이 엇비슷해졌다 할지라도, 전반적인 능력은 귀하가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소. 본교에서 쫓 겨났음에도 불구하고, 귀하는 또다시 이만한 세력을 구축하지 않았소이까? 당신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요.”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나를 따르게. 묵향은 이미 태산에서 죽었다네. 자네도 잘 알게 아닌가? 천마신교의 교주라는 자가 이런 건곤일척의 승부를 코앞에 두고, 혈육에 얽매여 딸래미를 구출하겠답시고 태산으로 달려갔다는 것을 말이야.”
장인걸의 말에 철영의 안색이 일순 어두워졌다. 그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씁쓸한 표정으로 그저 장인걸을 바라만 봤다.
그런 철영의 모습을 보며 장인걸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의 말에 철영이 흔들리고 있음을 금방 알아차린 것이다. 이제 조금만 더 설득하면 넘어 오려나? 장인걸은 한껏 자애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내게 온다면 부귀와 공명을 함께 할 것을 약속하겠네. 아, 혹시 묵향이 죽었다는 것을 아직도 믿지 못하는 건 아닐 테지? 자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본좌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걸세. 태산에서 몇몇 살아남은 혈랑대원들이 그 사실을 증명해 줄 테니 말이야.”
철영은 비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미 알고 있소. 귀하가 교주님의 따님을 미끼삼아 태산에 화약을 잔뜩 매설해 뒀다가 일시에 터트려 버렸다는 것도.”
“호오, 벌써 태산에서 예까지 달려왔단 말인가? 전서구가 날아온 것과 엇비슷한 속도라니……. 참으로 놀랍구먼.”
“놀라실 필요는 없소이다. 사람이 어찌 그 짧은 시간 동안에 태산에서 예까지 달려왔겠소. 전서구를 사용한 거요.”
저쪽도 전서구를 사용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니. 역시 편복대주의 청을 받아들여, 곧바로 전투를 개시하기를 잘했다고 장인걸은 내심 생각했다. 철영이 전후 사정을 다 알고 있다면 얘기하기는 더욱 편해진다.
장인걸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흐흐흐, 속은 놈이 멍청한 게지. 설마하니 정파나부랭이들처럼 본좌에게 비겁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물론 아니오.”
“그렇다면 내게 오게.”
장인걸이 다시 한 번 권했지만 철영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인걸은 고지식한 철영이 너무나도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조금 전에, 만약 그놈만 없다면 본좌를 교주로 모셨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지금까지의 대화는 본좌를 우롱한 것이었나?”
“그건 내 진심이었소. 하지만 아무리 귀하가 그렇게 말한다 해도, 교주님이 죽지 않았다는 걸 뻔히 알면서 귀하에게 투항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소.”
철영의 대답에 장인걸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허어, 참. 그 녀석은 벌써 죽었다니까 그러네.”
그러자 철영은 조금 전에 장인걸이 지었던 비릿한 웃음을 흉내 내며 입을 열었다.
“저 뒤쪽에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여길 지켜보고 계시는데, 어찌 귀하는 자꾸 교주님께서 죽었다고 하시오? 귀하는 내가 그런 뻔한 거짓말에 속을 거라고 생각하셨 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장인걸은 황급히 시선을 돌려 철영의 뒤쪽을 살펴보았다. 한순간 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마치 재미있는 연극이라도 보듯, 자 신이 철영을 상대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을 구경하고 있는 묵향의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장인걸은 일순 기절초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놈이 여기에 있단 말인가. 놈은 분명히 죽었을 거라고……. 이때, 장인걸의 눈은 묵향의 허리를 빠르게 훑었다. 그가 죽었다는 확실한 증거 중 하나였던 묵혼검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묵향의 허리에는 묵혼검이 없었다. 그는 아무런 무장도 하고 있지 않았다.
저놈이 가짜일까? 아니면 태산에서 죽은 놈이 가짜일까? 대답은 뻔한 것이었다. 만약 저놈이 가짜라면 자신을 향해 저토록 광오한 눈빛을 보내고 있지 못할 테니 말이다. 마치 자신을 부처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가련한 손오공쯤으로 보고 있는 그런 눈빛을
장인걸은 분노에 이빨을 갈지 않을 수 없었다. 왜 하늘은 나를 낳고, 또 저놈을 낳았단 말인가. 그저 하늘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으드드득! 이런 비열한 새끼, 감히 본좌를 속이다니!”
묵향은 현재 상황이 꽤나 마음에 든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이죽거렸다.
“옛 부하와 회포의 정을 나누는 걸 방해해서 미안하기는 하다만,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자네의 거짓말만큼이나, 무공 실력이 늘었기를 기대하지.”
순간, 아무것도 없던 묵향의 손에서 시퍼런 빛줄기가 쭉 뻗어 나와 검의 형상을 이루었다.
‘이런 빌어먹을! 심검(心劍)인가?’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는 장인걸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를 상대할 방법을 수도 없이 궁리했고, 또 나름대로 대비책도 세웠었다. 그리고 그가 처음부터 그 방법을 쓰지 않았던 것은 묵향이 이미 죽었을 거라고 오해했기 때문이었다.
“개진(陣)!”
장인걸의 외침에 뒤쪽에 도열해 있던 실혼인들이 달려 나왔다. 실혼인들의 손에 발화창(發火槍)이 쥐어져 있는 것을 본 마교 고수들이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발화창이 어떤 무기인지는 이미 이전의 전투에서 충분히 맛을 본 상태였기 때문이다.
묵향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철영 부교주가 외쳤다.
“호법원은 교주님을 엄호하고, 나머지는 나를 따르라!”
“우와아아!”
하지만 묵향은 뒤로 물러서서 구경이나 하고 있지 않았다. 철영이 앞으로 나서기도 전에 그가 먼저 달려 나갔던 것이다. 그 때문에 후방에서 교주를 호위해야 할 호법원의 고수들 역시 최일선에서 처절한 전투를 벌여야만 했다.
“돌()!”
장인걸의 명령에 실혼인들이 적을 향해 일제히 돌격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난전이 벌어졌다. 실혼인들은 제대로 된 이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는 만큼, 공격을 펼침에 있어서 자신의 몸을 보호하겠다는 생각 따위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마교 고수들은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 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보여 주는 공격 유형과는 전혀 다른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춘릉성을 포위하기 위해 우회했던 병사들까지 몰려들자, 전투는 더욱
격해졌다.
실혼인들이 격전을 벌이기 시작함과 동시에 장인걸의 수하 고수들은 그들의 뒤에 서서 일제히 활을 꺼내 들었다. 이미 수없이 훈련을 한 모양이었다. 그들의 움직 임에는 거침이 없었고, 대단히 신속했다. 화살에 내공을 실어서 쏘면, 암기 따위를 날리는 것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강맹한 위력을 지닌다.
난전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오자 노련하기 그지없는 마교 고수들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 화살들 사이사이로 천마혈검대 와 장인걸이 쏴대는 화살이 섞여 있었다. 그 화살들의 위력은 너무나도 막강해서 쳐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쉐에에엑!!
내공이 가득 담긴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닌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 평상시라면 저렇게 노골적인 파공성을 흘리는 화살에 맞을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하지만 지 금 이곳은 치열한 난전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머리 위로는 수없이 많은 화살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 화살이 자신에게로 날아오는지, 아니 면 내 옆에 있는 다른 누군가에게로 날아가는 것인지를 소리만 듣고 파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지금 그들은 실혼인과 병사들을 베느라 정신이 없 는 상황이 아닌가.
퍽!
“크으윽!”
자신의 옆에서 싸우고 있던 부하가 갑자기 쓰러지는 것을 본 이찬(李)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적을 찾았다. 하지만 어떤 놈이 화살을 쏜 것인지 파악하기가 힘 들었다. 워낙에 많은 놈들이 이리저리 숨어 다니며 화살을 날리고 있었으니까.
“이런 망할 새끼들!”
마음 같아서는 이런 비겁한 짓을 하고 있는 놈을 쫓아가서 요절을 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실혼인들이나, 병사들이 밀려들며 투덜거릴 여유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격해 들어오는 병사 둘을 베었을 때, 실혼인의 공격이 숨 쉴 틈 없이 이어져 들어왔다. 거기다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화살까지 경계하며 싸워야 하니 훨씬 더 힘든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전장 상황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었지만, 이찬은 냉정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오랜 수련을 통한 그의 몸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며 적의 공격 을 막고, 또 베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 정도 실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가 수라마참대에서 십인대장의 직위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리라.
이찬은 화려한 검술로 병사 10명과 실혼인 둘을 순식간에 베어 버렸다. 그들이 피를 뿌리며 나뒹굴 때, 또 다른 실혼인 하나가 자신의 뒤편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 을 이찬은 느꼈다. 그는 실혼인의 공격을 거의 본능적으로 피하며, 녀석의 빈틈을 살폈다. 방어를 도외시한 공격을 펼치고 있는 실혼인이었기에 빈틈은 얼마든지 있 었다. 어디를 공격해야 할지가 고민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때 이변이 벌어졌다. 그의 몸 앞을 훑고 지나가던 발화창이 엄청난 연기를 내뿜으며 폭발했던 것이다.
쾅!
“크으윽!”
이찬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그곳에는 어느새 시커먼 창촉이 꼽혀 있었다. 화살이 날아오는 힘 따위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위력으로 호신강기를 꿰뚫고 들어와서는 그의 가슴 깊이 꼽혀 버린 것이다. 이찬은 허무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 내가 이딴 놈들에게…….”
놈이 자신과 비슷한 실력 정도만 되었어도 이토록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혼인은 무감정한 표정으로 천천히 쓰러지고 있는 이찬의 목을 단숨에 베어 버리더니, 또 다른 먹잇감을 향해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