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6권 12화 – 최후의 결전

최후의 결전

금나라 패잔병들에 대한 학살극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이제 제령단의 효과도 다 떨어져 버린 상태였기에, 금나라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뿔뿔이 흩어져 도주하고 있었다. 적들이 자신들을 향해 공격해 들어오지 않는 만큼, 마교도들은 그들을 따라가서 없애 버리느냐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모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시체가 즐비하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묵향은 태연히 술을 마시며 그런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부하들이 이제 그만 춘릉성으로 돌아가서 쉬 시라며 권해지만 묵향은 막무가내였다.

전투는 대승리로 끝이 났고, 숙적이었던 장인걸은 그의 발치에서 목이 없는 시체가 되어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교로 돌아가 원로원에 보고할 때 보여 주기 위 해 목을 잘라 소금에 절여 놨기 때문이었다.

“내 딸은 어디에 있나? 빨리 자백하는 게 좋을 걸? 그렇지 않으면 네놈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마.”

장인걸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묵향에게 대답했다.

“크크크, 그년은 저승에서 네놈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을 게다.”

그 말에 묵향은 장인걸의 멱살을 거머쥐고 왈칵 끌어당겼다. 서로의 코와 코가 맞닿을 정도로 장인걸을 끌어당긴 상태에서 묵향은 장인걸의 눈을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네놈은 지금 나를 화나게 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거야. 그렇지?”

장인걸은 콧방귀를 뀌며 이죽거렸다.

“흥! 본좌가 뭐가 두려워 네놈에게 거짓말을 하겠느냐. 나는 그 계집을 태산파의 연공실 깊은 곳에 가둬 뒀었다. 네놈과 저승길 길동무나 하라는 본좌의 배려였 지.”

“끄으윽! 거짓말이야!”

“미친 새끼. 본좌가 네놈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 나는 네놈에게 딸이 있음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토록 딸을 아꼈다면, 처음부터 본좌와 반목 하지를 말았어야지. 네 딸은 네놈이 죽인 거나 마찬가지야. 네놈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평생 후회하며 살게 될 거다, 크흐흐흐.”

“닥쳐!”

묵향은 화가 나서 외쳤지만, 오히려 장인걸은 그게 더욱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는 더욱 비비꼬인 어조로 이죽거렸다.

“본좌를 꺾었으니 부귀와 공명이 함께 하기는 하겠지만, 정작 네놈 자신은 사는 게 사는 것 같지도 않을 게다. 딸을 죽인 비정한 애비라…, 크하하핫!”

미친 듯 웃음을 터뜨리던 장인걸은 뭔가가 목구멍에 걸렸는지 심하게 기침을 해댔다. 입을 가리는 그의 손에 시뻘건 피가 묻어 있었다. 핏속에 내장 부스러기까지 끼어 있는 걸 보면 그의 내장이 완전히 박살난 듯했다.

장인걸의 비웃음에 묵향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했다. 소연이를 빗대어 자신을 비웃는 것인 만큼, 도저히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닥쳐! 닥치라구!”

이성을 잃은 묵향은 자신도 모르게 장인걸을 후려쳤다. 한번 때리기 시작하자 자신의 행동을 도저히 억제할 수가 없었다. 주위에서 부하들이 말리는 바람에 그가 겨우 손을 뗐을 때, 장인걸의 몸은 축 늘어져 있었다. 이미 숨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이런 젠장, 이렇게 곱게 죽여 줘서 될 일이 아닌데…..”

묵향은 너무나도 화가 나서 손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때, 그의 뒤에서 대호법이 조언했다.

“교주님, 일단 아가씨의 시신이라도 수습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홍진! 홍진 장로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잠시 후, 온 몸이 피에 젖은 홍진 장로가 달려와 예를 갖추었다.

“부르셨습니까? 교주님.”

홍진 장로가 달려올 때쯤 묵향의 분노도 많이 수그러든 상태였다. 묵향은 냉철한 어조로 명령했다.

“너는 지금 당장 태산파로 달려가서 폭발 현장을 샅샅이 파 뒤집어라.”

“이미 수하들에게 그리 하라 지시를 내렸습니다.”

홍진 장로는 이미 태산파에 수하들을 파견한 상태였다. 그곳에 매몰된 마교도들의 시신을 수습해야 하는데다, 패력검제가 가져간 묵향의 신물인 묵혼검을 찾아와 야 했기 때문이다.

“그곳에 본좌의 딸이 갇혀 있었다고 하네.”

“예?”

“그 아이의 시신만이라도 찾아다 주게. 알겠나?”

묵향의 말에 홍진은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존명! 태산 전체를 파 뒤엎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명을 완수하겠습니다.”

홍진 장로는 먼저 태산으로 달려간 부하들에게 전서구를 날리는 한편, 자기 휘하의 남은 부하들을 모두 이끌고 태산을 향해 달려갔다. 묵향은 싸늘하게 식어 버린 장인걸의 목 없는 시체를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개새끼! 마지막까지 내 속을 뒤집어 놓고 가는군.”

묵향은 술병을 들고 거칠게 입으로 털어 넣었다. 그 지독한 천일취를 몇 병씩이나 마셨는데도 불구하고, 취기는 전혀 올라오지 않았다.

“가서 술을 좀 더 가져와.”

묵향의 명령에, 그의 뒤에 시립하고 있던 우호법이 부하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그러자 부하는 춘릉성을 향해 술을 가지러 달려갔다.

한 번에 수십 병이라도 가지고 올 수 있었지만 부하는 단 두 병만을 가지고 돌아왔다. 천일취는 지독하게 독한 술이다. 만약 우호법이 이런 식으로 제어하지 않았 다면, 아마 지금쯤 묵향은 완전히 뻗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는 동안 서서히 저녁놀이 지기 시작했다. 노을은 전장의 참상을 아는지 마치 피를 뿌려놓은 것처럼 붉디붉었다.

“술은 아직도 도착 안 했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교주님. 저쪽에서 달려오고 있는 게 보입니다.”

“한꺼번에 많이 좀 가져오라고 해. 감질나게 두 병씩 가져오지 말고.”

“교주님,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춘릉성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묵향은 그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고 짙은 노을이 깔리는 산등성이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던 마화가 슬그머 니 끼어들었다. 묵향이 이렇듯 슬퍼하는 게 소연의 죽음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지금껏 만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호법님의 말이 맞아요. 춘릉성으로 돌아가요.”

“여기가 어때서? 소연이를 추억하는 데 있어 이곳이야말로 최고의 장소잖아.”

주위를 빙 둘러보며 묵향이 말했다. 그의 주변에는 수천 아니, 수만이 넘어가는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이번 전투에서 전사한 마교 고수들의 시체 를 따로 모아 두고 있는 중이었다. 전투가 끝났으니, 예법에 따라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였다.

춘릉성 인근을 가득 메운 시체들과 짙은 혈향. 거기에다가 아직 숨이 끊기지 않은 중상자들이 흘려내는 신음 소리까지. 짙은 노을로 인해 온 천지가 마치 피에 잠 긴 것만 같았다. 더 이상 뭐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음산한 분위기였지만 묵향이나, 그의 수하들은 그런 것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철혈을 숭상하는 그들에게 있 어서 어쩌면 이런 장소야말로 최고의 조문 장소일지도 몰랐다.

이때, 철영 부교주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게 보였다.

“교주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이 일대에 배치해 두었던 비마대원들과의 연락이 모두 끊어졌습니다.”

마교 고수들의 경우 마기를 흘리는 만큼, 정찰을 위해 내보내기가 곤란했다. 상대편이 그 기척을 알아채고 재빨리 숨어 버릴 게 뻔하니까.

“언제부터 끊어졌나?”

“워낙 혼전 중이라…, 그건 알 수가 없습니다만, 속하가 관찰 초소 몇 군데로 수하들을 보내 본 결과 모두들 죽어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비마대원들에게도 연락을 취해 봤나?”

“예. 하지만 응답을 한 대원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묵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지금 당장 수하들을 모두 집결시켜라!”

“존명!”

철영 부교주는 입술을 오므린 뒤 가늘고도 긴 휘파람 소리를 냈다. 그러자 그에 화답하듯 여기저기에서 휘파람 소리가 타원형을 그리듯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휘 파람은 마교의 독특한 명령 전달 방법 중 하나였다.

“수하들이 모두 집결을 완료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금군 병사들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필사적으로 도망을 쳤다. 더군다나 아직 살아남은 금군 병사들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그런 그들을 모두 주살하기 위해 마 교도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는 중이었다. 따라서 수하들이 얼마나 멀리까지 그들을 쫓아갔는지는 철영 부교주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묵향은 대호법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부하들을 보내 주변을 샅샅이 정찰해 보도록 해라.”

“옛.?”

대호법이 호법원 고수들을 두 명씩 짝을 지어 사방으로 내보내고 있을 때, 묵향은 철영 부교주을 바라보며 물었다.

“시체는 확인해 봤겠지? 언제쯤 죽은 것 같던가?”

“제법 시간이 경과된 상태였다는 보고였습니다. 어쩌면…,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죽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흠, 혹시 장인걸의 소행일까?”

그러자 철영 부교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편복대에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속하의 생각으로는 무영문의 소행이 아닐는지…….

철영 부교주의 추측에 묵향의 눈이 번쩍 빛난다.

“무영문? 자네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뭔가?”

“이 일대에 쫙 깔아 뒀던 비마대원들이 한 명도 남김없이 전부 다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비마대는 무영문과 공조 체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역으 로 말하면 이쪽 사정을 가장 낱낱이 파악하고 있는 것 역시 무영문이라는 거죠. 그들이 만약 한순간에 뒤통수를 쳐왔다면, 비마대원들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흐음…, 그런데 무영문이 우리를 배신할 이유가 없지 않나?”

“혹시 교주님의 계획을 눈치 챈 게 아닐까요?”

철영 부교주의 말에 묵향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무영문을 없앨 궁리를 하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듯, 옥화무제 또한 이쪽의 속셈을 눈치 채고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교활한 계집! 내 이년을 잡기만 하면..”

묵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저 멀리 보이는 산 쪽에서 수없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는 무사들을 보고는 일순 말문이 막혀 버렸던 것이다.

달려오는 무사들 중에서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경공술을 전개하고 있었다. 즉,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는 저들 모두가 무공을 익 히고 있다는 뜻인 것이다.

처음 그들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마교 고수들의 눈에는 비웃음이 어렸었다. 교주 주위에 모여 있는 고수들은 거의가 다 호법원의 고수들이었다. 마교의 최정예인 만큼, 저 정도 숫자의 고수들쯤이야 그들의 눈에 차지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산 뒤편에서 쏟아져 나오는 무사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최소한 만 명은 넘어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계속 산을 넘어 오고 있었다. 도대체 얼 마나 많은 인원이 몰려오는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제야 모두의 얼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교주님, 일단 춘릉성으로 철수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대호법의 조언에 묵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일반 병사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저런 고수들에게 춘릉성처럼 작은 성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차라리 여기서 부하들을 기다리는 게 더 나아.”

묵향의 말대로 사방에서 휘파람 소리를 들은 부하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치열한 전투를 치렀을 뿐만 아니라, 도망치는 금군 병사들을 주살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만약 묵향이 춘릉성으로 철수한다면 달려오던 부하들은 하나씩 흔적도 없이 죽음을 당할 것이 뻔했다.

묵향은 자신이 완전히 뒤통수를 맞았음을 깨달았다. 부하들이 온전한 상태라면 혹 모르겠지만, 이 상태로 저 많은 무사들과 싸운다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도망칠 수는 더더욱 없었다. 지금 자신이 도망친다면 이 일대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마교 전력 대다수가 위험했다.

잠시 생각하던 묵향이 달려오는 무사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마화가 그 뒤를 따랐다.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다. 수많은 전장을 거쳐 온 마화는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저들에게 맞선다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것을. 하지만 그녀는 묵향을 만류할 수가 없었다. 이쪽에서 물러선다고 해서 피해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묵향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철영 부교주를 비롯해 대호법 등 주위에 있던 고수들이 뒤를 따랐다. 신호를 받고 황급히 달려온 고수들 역시 거친 숨을 내쉬며 그 뒤를 따랐다.

묵향이 자신들에게 다가오자 달려오던 정파 고수들은 경공술을 멈추고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선두에 서 있는 인물들은 모두 다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정 파 최고의 명숙들이었다. 맹주를 비롯하여 곤륜무황, 황룡무제, 청호진인, 맹호검군, 공지대사 등 전대고수들부터 시작해 현재 각파를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고수들 이 모두 모여 있었다.

묵향은 맹주의 뒤쪽에 공지대사와 함께 서 있는 공공대사의 얼굴을 보자 자신에게 최악의 상황이 닥쳤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마화와 함께 탈출하는 것조차도 힘들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때문이었을까, 묵향은 매서운 눈초리를 공공대사에게 보내며 이죽거렸다.

“그렇게 안 봤더니…, 그때 보여 준 귀하의 모습은 가식이었소?”

하지만 공공대사는 묵향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맹주가 묵향을 향해 가볍게 포권하며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구려, 교주.”

“흥! 지금까지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일을 다 끝내고 난 다음에야 달려 나온 속셈이 뭐요?”

맹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악을 말소하기 위해 왔소이다.”

“너무 늦게 왔구려. 본교의 반도는 이미 본좌가 끝장을 냈으니 말이오.”

“허허, 흑살마왕만이 악은 아니지 않소이까. 노부는 이번 기회에 악의 근원인 귀교를 아예 세상에서 멸하려 하오.”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맹주의 뒤편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마교를 없앤다는 말을 지금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지금이야말로 천하를 어지럽히는 금나라와 그를 돕는 흑살마왕을 뿌리 뽑을 때라는 격문(檄文)을 보고 달려왔다. 하지만 격문의 그 어디에도 마교를 공격하자는 말은 없었다. 그 러니 그들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본좌가 장인걸과 놈이 이끄는 50만 대군과 격전을 벌일 때, 행여 들킬세라 꽁지를 빼고 숨어 있었다는 말이오?”

“허허,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말이 있지 않소. 세상의 악을 제거하기 위해 몇날 며칠을 움츠려 있어야 한다고 해도 노부는 그리 했을 것이오.”

태연하게 대꾸하는 맹주의 모습에 묵향은 울화통이 터져 죽을 뻔했다. 치밀어 오르는 혈압에 묵향은 뒷골을 지그시 누르며 으르렁거렸다.

“하는 행동으로 본다면 네놈이 더 악당인 것 같은데, 누구를 보고 악의 근원 운운하는 것이냐?”

묵향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건 말건, 맹주는 전혀 상대와 말싸움을 할 생각이 없었다. 맹주는 뒤쪽에 서 있는 군웅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마교는 지금껏 중원정복을 위해 수없이 많은 혈겁을 일으켜 왔소. 근래 중원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수많은 혈겁들 또한 본맹이 금나라와 정면충돌하도록 마 교가 꾸민 계략이었소. 노부는 그 증거를 이번에 입수했소.”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맹주의 말에 묵향이 뭐라 반박하려 했지만, 맹주는 그 말을 무시한 채 계속 자기 할 말만 지껄였다.

“저 인간의 탈을 쓴 마두는 나라를 위해 구국의 심정으로 힘을 합치자고 노부를 속였고, 노부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기에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소이다. 은밀 히 조사해 본 결과, 마교가 중원정복을 위해 사용한 악독한 계책들을 수를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발견했소. 그에 노부는 마교의 계략을 역이용해 흑살마왕과 정면 충돌하도록 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오.”

“허,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는군. 그건 본좌가……”

하지만 맹주는 묵향이 해명할 기회 따위는 처음부터 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검을 쑥 뽑아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더러운 입으로 지껄이는 변명 따위는 들어 줄 생각이 없소이다. 자, 철혈을 숭상하는 귀교의 율법대로 칼을 뽑으시오.”

“이런 썩을!”

맹주가 검을 뽑아드는 것과 동시에 그의 주위에 서 있던 정파의 핵심고수들 역시 모두들 검을 뽑아들었다. 그중에는 황룡무제처럼 교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온 고수들도 있긴 했지만, 맹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돌아가는 꼴을 보니, 무림맹이 승리할 가능성이 거의 9할을 넘어선 상황이었다. 이럴 때 괜히 교주 편을 드는 듯한 인상을 보여 맹주에게 찍혔다가는 뒤끝이 안 좋 을 게 뻔하지 않은가. 교주에게 미안한 노릇이기는 했지만, 기호지세(騎虎之勢)였다. 그건 뒤쪽의 군웅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맹주의 폭탄 발언에 웅성거리던 군웅 들 역시 전투가 벌어질 분위기가 되자 모두들 검을 뽑아들었다.

맹주가 내심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군웅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청아한 공공대사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아미타불! 모두들 잠시만 기다리시오.”

공공대사의 목소리에서 감히 거스르기 힘든 힘과 무게가 느껴졌다. 모두들 멈칫하는 순간, 공공대사가 앞으로 쓱 나섰다. 공공대사는 묵향에게 합장을 해 보이며 말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시주.”

“이건 또 무슨 속셈이야?’하는 생각을 하며 묵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무 대꾸조차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 빈승은 교주께 일대일 비무를 청하고자 하는데, 받아들이실 의향이 있으시오이까?”

공공대사의 목소리가 사방을 향해 퍼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모든 고수들의 이목이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공공대사라면 수십 년 전에 정파 최고의 고수로 추앙받 았던 고승이다. 그런 인물이 교주와 일대일 대결을 청하고 있으니, 모두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묵향은 뒤에 서 있는 부하들의 상태를 힐끔 바라봤다. 공공대사의 의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들어주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부 하들이 모두 모이고, 또 원기를 회복할 시간적 여유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좋소. 본좌도 원하는 바요.”

그때 맹주가 난감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서며 뭐라 말하려 했다. 묵향은 그걸 보고는 재빨리 큰 소리로 말했다.

“우선, 대사께서 현경의 지고한 경지에 오른 것을 축하드리오.”

묵향이 일부러 모든 군웅들이 들을 수 있도록 내공을 실어 말했기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자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묵향의 말에 군웅 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공공대사가 현경의 벽을 깼다는 말은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본좌 또한 탈마 즉, 현경에 준하는 경지에 올라 있으니 이렇게 되면 무림사 최초로 현경급 고수들끼리 대결하는 것이 되겠구려.”

묵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방에서 기대에 찬 함성이 울려 퍼졌다.

“우와아아아!”

공공대사를 말리려고 앞으로 나섰던 맹주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맹주의 힘으로 이들의 대결을 말릴 단계는 이미 벗어나 버렸다는 것을 안 것이다. 이곳에 모인 모든 군웅들의 얼굴은 세기의 대결을 관전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군웅들이 저렇게 기대하고 있는데, 그에 호응해 주는 게 도리겠지요?”

“아미타불.

묵향은 고개를 돌려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모두 100장 뒤로 물러나라.”

그에 맞춰 공공대사 역시 무림의 동도들에게 합장을 하며 부탁했다.

“모두들 100장 뒤로 물러나서 관전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소이다. 협조를 부탁드리오이다.”

그 말에 정파의 군웅들 역시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맹주가 동원한 인원은 거의 6만에 달했다. 뒤쪽에 있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앞 으로 밀려들고 있다 보니, 앞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 뒤로 물러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윽고 반경 100장에 달하는 빈 공간이 만들어지자, 그 한 가운데에 이 시대가 배출한 최고의 고수 두 명이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시주께서 먼저 손을 쓰시겠소?”

공공대사는 예의상 건네본 말이었다. 교주보다 자신이 나이가 훨씬 더 많았으니까. 하지만 묵향은 사양하지 않고 곧바로 공격해 들어갔다. 묵향의 평소 지론은 선 수필승(先必勝)! 비슷한 수준끼리는 먼저 공격하는 쪽이 승리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걸 실천하는 인물이었다.

“흐읍!”

언제 튀어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묵향의 손에는 빛으로 만들어진 검이 하나 들려 있었다. 묵향은 그것을 검처럼 다루며 공공대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에 대응하는 공공대사의 손도 뿌연 빛줄기가 솟아 올라와 감싸고 있었다.

스팟, 스팟.

묘한 작은 소리를 내며 빛줄기끼리 부딪쳤다. 하지만 비무를 지켜보는 군웅들은 잘 알고 있었다. 빛줄기에 감겨 있는 힘과 위력이 자신들의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순식간에 수십 초식이 흘러갔다. 웬만한 고수가 아니라면,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파악하기조차 힘들 정도였으니, 세세한 움직임은 아예 보지도 못하고 그냥 넘어갔다.

“우와아!”

과연 현경급 고수간의 대결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의 치열한 육박전이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무공의 차원을 아예 벗어난 듯한 절대자들의 움직임에 모두들 경탄을 금치 못했다.

공공대사와 묵향간의 거리는 많이 벌어졌을 때라도 3장을 채 벗어나지 않았다. 정말이지 지독할 정도의 초근접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1류를 상회하는 실력을 갖 춰 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경지가 되면, 그때부터는 적과 나와의 거리의 개념이 사라진다. 아무리 먼 거리의 적이라도 기를 이용해 공격할 수 있게 되기 때문 이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근접전을 벌이는 일은 차츰 줄어든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일반적인 무공의 개념을 뛰어넘었다. 묵향은 검술을 펼쳐 공공대사의 굳건한 방어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했고, 공공대사는 권장을 위주로 하여 묵향의 공격을 막아냈다. 묵향의 심검과 공공대사의 주먹이 맞부딪칠 때마다 뭔가가 갈리는 듯한 묘한 소리와 함께 강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렇게 한참 동안 공수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어느 순간 거리를 벌렸다. 묵향이 무림에 출도한 이래 이 정도로 숨 막히는 대결을 한 적은 아마 공공대사가 최초일 것이다. 예전에 이세계에서 엘프 카렐과도 비무를 한 적이 있었지만, 카렐은 묵향이 사용하는 무공을 잘 몰랐기에 박빙의 공방전을 펼치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공공대사는 그렇지 않았다. 묵향이 지닌 모든 무공을 아낌없이 펼쳐도 될 만큼 그의 무공은 정심했고, 깊이가 있었다.

뒤로 물러선 묵향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묵향은 공공대사를 향해 정중히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과연 명불허전. 이제야 대사 같은 인물을 만난 게 통탄스러울 뿐이오.”

“아미타불, 일전에 시주의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면 이 정도까지 맞춰 드리기도 힘들었을 거외다.”

대답하는 공공대사의 얼굴에도 자애스런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공공대사는 과거 묵향과의 비무를 머릿속 깊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토대로 깨달음을 얻 어 진정한 현경급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그는 예전의 묵향처럼 몸은 현경에 올랐으면서도 그걸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몰랐었다. 만약 묵향과의 비무가 없었다면 결코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 당시 묵향이 자신의 목숨을 빼앗아 버렸다면 깨달음은 커녕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지도 못했겠지만.

“이제 몸이 풀렸을 테니 본격적으로 해 봅시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무공 위주로 공격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에 공공대사 또한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내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이 황금색으로 달아올랐다. 몸 전체를 금강불괴신공으로 감싼 것이다.

쾅! 콰쾅!

그때부터 벌어진 두 사람의 대결은 범인들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부딪칠 때마다 강기의 회오리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대폭발을 일으켰다. 비무 를 바라보는 군웅들의 얼굴에는 믿기 힘들다는 경악이 어렸지만, 화경급 고수들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산 속에서 숨어서 지켜봤던 장인걸과의 대결에서 선보인 무 공에 비해 훨씬 더 강력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저, 저럴 수가…….?”

맹주를 비롯한 그의 측근 고수들은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마교 교주를 없애야 한다는 것에 공감했다. 저렇게 강한 무공을 지닌 자가, 마교처럼 막강한 단체까지

거느리고 있지 않은가. 만약 저자가 역대 교주들처럼 무림일통을 부르짖으며 쳐들어온다면, 그때는 정말이지 대책이 없는 것이다.

물론 정파 쪽에도 공공대사와 같은 뛰어난 인물이 있긴 했지만 방금 전에 봤듯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적대감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오늘 어떠한 무리를 해 서라도 정사 대전으로 몰고 가 교주를 죽여야 한다고 맹주는 다짐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좋은 기회가 다시는 없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때, 뒤쪽에서 허겁지겁 달려온 무사 한 명이 감찰부주에게 다가가 뭔가를 전했다. 작은 쪽지였다. 급하게 쪽지를 읽은 감찰부주의 얼굴에 활짝 미소가 어렸다. 생각지도 못한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것이다. 그는 쪽지를 가져온 부하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뒤쪽으로 끌고 와서 대기시켜 놓도록 해라.”

“예.”

감찰부주는 두 사람의 비무를 관전하느라 정신이 없는 맹주에게로 슬그머니 다가가서 쪽지를 건네며 속삭였다.

“바라지도 않았던 대어를 확보했습니다, 맹주님.”

맹주는 쪽지를 읽자마자 불태운 뒤 행여 누가 봤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모두들 교주와 공공대사 간의 비무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쏙 빠져 있는 상태였 다. 맹주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쉰 다음, 시선을 다시금 교주와 공공대사를 향해 돌렸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방금 전과 달리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교주를 없앨 수 있다는 뭔지 모를 자신감으로.

콰콰쾅,

꽈쾅!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승부의 추가 묵향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군웅들은 느꼈다. 공공대사의 무공 역시 가공할 경지였지만 그의 공격은 교주의 근처에도 다 가가지 못한 채 소멸되고 말았다. 그에 비해 교주의 공격은 벌써 3번이나 공공대사의 방어벽을 뚫고 들어와 금강불괴지체에 부딪쳤다.

“아미타불!”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공공대사는 최후의 대결을 준비했다. 지금까지 수세를 취하던 것에서 벗어나 공공대사의 몸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묵향을 향해 돌 진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또다시 초근접전이 벌어졌다.

서로간의 몸과 몸이 부딪칠 때마다 엄청난 충격파가 뻗어 나왔다. 엄청난 굉음이 터질 때마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반경 100장이 수십 개의 폭탄이 터진 것처럼 움 푹움푹 파였고, 뿌연 먼지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그 순간, 군웅들은 뒤로 더 물러서야만 했다. 100장 밖임에도 몸을 주체하기 힘들 정도의 충격파가 밀어닥쳤기 때문이다. 군웅들이 지금 비무가 어떻게 되어 가는 지 알 수조차 없을 정도로 너무 빠르게 비무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굉음보다 훨씬 더 큰 폭발음이 터지며 엄청난 충격파가 사방으로 밀려 나갔다. 군웅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보자 교주의 몸이 땅바닥에 처박혀 있었고, 공공대사는 그런 교주의 등을 향해 무시무시한 강기의 세례를 퍼부었다.

콰쾅,

콰콰콰쾅.

“고, 공공대사께서 이기셨…….?

하지만 소리치던 군웅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당장 죽을 것만 같았던 교주가 어느새 일어나 또다시 공공대사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어, 정말 대단하구려. 수십 년을 고려해도 넘을 수 없었던 현경의 경지가 바로 저런 것이었다니…….”

곤륜무황의 감탄에 맹주는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교주가 무적이라고 할 수는 없소. 흑살마왕이 그의 수하들과 함께 교주를 밀어붙이는 장면을 보지 않았소? 준비를 제대로 갖추기만 한다 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노부는 생각하오. 더군다나 우리에게는 교주와 맞수를 이룰 수 있는 공공대사가 계시지 않소?”

“그렇구려.”

일세를 풍미한 두 고수간의 격돌은 점차 종말을 향해 치달았다. 물론 승자는 묵향이었다. 공공대사가 아무리 뛰어난 무인이라도, 현경을 경험한 시간이 너무나도 짧았다. 그 경험의 차이가 승패의 향방을 갈라놓았던 것이다.

한참을 싸우던 공공대사가 갑자기 뒤로 물러섰다. 그의 옷은 충격파로 인해 걸레로도 못쓸 정도로 넝마가 되어 있었고, 온 몸에는 비오듯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내상까지 입었는지 공공대사의 입가에는 피를 토한 흔적까지 남아 있었다.

묵향 역시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공공대사보다는 상황이 나아 보였다. 묵향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아낸 뒤 쾌활한 음성으로 말했다.

“핫핫, 이제 힘이 다하신 게요? 대사.”

“허허, 워낙 나이가 들다 보니 더 이상은 힘에 부치는구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맹주는 주위에 있는 측근들에게 눈짓을 했다. 교주를 향해 집중공격을 가할 준비를 하라는 뜻이었다.

공공대사는 묵향을 향해 차분히 합장을 하며 입을 열었다.

“오늘의 비무는 빈승 생애 최고의 비무였소이다. 이제야 마지막 번뇌의 사슬을 끊어 버릴 수 있을 듯하구려.”

“핫핫, 당장 해탈이라도 하실 듯한 표정이시구려. 이거 배가 아파서 그냥은 못 보내드리겠는데.”

공공대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소림을 잘 부탁하오.”

말을 마친 공공대사의 입가로 핏물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준수했던 그의 얼굴에 주름이 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서 있는 것조차 힘겨운 늙은이의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스스로 단전을 파괴해 무공을 없애 버린 것이다.

깜짝 놀란 묵향이 황급히 공공대사를 부축하며 말했다.

“왜, 왜 그러셨소이까?”

“아미타불, 비우고 버리지 아니 하면 미련으로 인해 번뇌만 쌓이는 법. 현경의 깨달음을 얻고 난 뒤, 빈승은 또 다른 번뇌에 시달려야 했소이다. 천성이 돌중인지라 이번에 깨달은 것이 과연 어떤 위력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 실험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외다. 그러던 차에 오늘 시주로 인해 그렇게 궁금해 하던 것을 모 두 알게 되었으니 이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승려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겠지요.”

“그, 그래도 무공까지 없애실 필요가…….”

이 순간 군웅들은 단전을 파괴한 사람이 흡사 교주가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교주는 안타까워 말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데 반해, 공공대사는 흡사 해탈이라도 한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 말이다.

공공대사는 자신에게 그토록 안타까운 표정을 보내고 있는 묵향에게 합장으로 답례한 다음, 조용히 뒤로 돌아서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황망한 표정으로 그 모 습을 지켜보던 군웅들은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공공대사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얻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공공대사에게 그들은 무한한 존경을 보내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공공대사의 행동에 맹주는 묵향을 향해 공격 명령을 내릴 시기를 놓쳐 버렸다. 그는 다급히 옆에 서 있던 소림사의 방장에게 말했다.

“이, 이럴 수는 없소. 어찌 무림의 악을 놔두고 저런 행동을…….”

하지만 소림의 방장인 덕량대사의 얼굴에는 묘한 갈등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지금 교주와 싸워야 하느냐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가 원로들을 설득해 봉문을 깨고 하산했던 이유는 장인걸에 대한 복수와 그를 통한 소림의 명예 회복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장인걸의 몰락을 구경할 수 있었다. 물론 교주가 대신해 준 복수였지만 어찌되었든 교주는 소림의 원한을 갚아 준 은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 은인을 참살해야만 하는 위치에 서 있게 되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덕량대사를 당혹케 한 건 수십 년간 고련해 온 무공을 불법 수행에 방해가 된다 하여 없애 버린 공공대사의 행동이었다. 더군다나 현경이라는 가 공할만한 무공이었지 않은가. 덕량대사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지금까지 마음 한 구석에 있던 뭔가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아미타불.”

덕량대사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불호만 외우며 두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곤륜무황이 묵향을 향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시주, 오늘 정말 좋은 구경했소이다. 빈도의 안계가 탁 트이는 듯하구려.”

곤륜무황의 칭찬에 묵향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귀하에게 보탬이 될 일은 없을 거요. 그나저나 귀하도 내게 비무를 요청할 것이오?”

이제 공공대사가 떠났으니 정사 대회전이 시작될 거다. 그런데 얼른 달려들지는 않고, 뭔 헛소리가 이리도 많은지……. 묵향은 서서히 짜증이 나고 있는 중이었 다. 하지만 그런 묵향의 응대에 곤륜무황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장난스레 응대했다.

“허허, 빈도 같은 사람이 열 명이 달려들어도 안 될 것 같은데,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하겠소. 혹, 곡차라면 몰라도 말이오.”

그렇게 말한 곤륜무황은 무량 대장로에게 명령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숙.”

“무림을 어지럽히던 흑살마왕의 죽음도 봤고, 천하에서 첫손가락에 꼽힐 만큼 강한 두 영웅의 대결도 보지 않았더냐? 이만큼 견문을 넓혔으니, 이제 본문으로 돌 아감이 옳지 않겠느냐.”

“하, 하지만.

곤륜무황이 성큼 앞장서서 걸어가자, 무량 대장로는 끽소리도 못하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곤륜파 제자들이 따라갔다.

곤륜무황이 철수를 시작하자마자 덕량대사 역시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곤륜파가 앞장선 상태라, 대열을 이탈하며 눈총을 받을 일이 없어진 것이다. 덕량대사는 맹주에게 합장하며 말했다.

“저희 소림도 이만 물러가려 합니다, 맹주. 공공 사조께서 본사로 돌아가시니, 그분을 모셔야 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맹주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아니 이러면 안 되는데…….”

맹주가 말리려고 했지만, 소림 방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허겁지겁 공공대사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런 방장의 뒤를 따라 수많은 소림의 무승들 역시 발걸음 을 옮겼다. 며칠 전 소림을 나설 때, 그들은 소림의 명예를 되찾는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소림을 향해 돌아가는 그들의 발걸음에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천하제일고수와 거의 비등한 대결을 펼친 인물이 소림에서 나왔다는 점. 그리고 불법 수행을 하기 위해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그 엄청난 무공을 없앤 공공대사의 행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군웅들이 만들어 준 길을 통해 걸어가는 소림의 제자들은 알 수 있었다. 군웅들의 두 눈에 소림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결국 공공대사가 무공을 버

림으로 인해 소림의 영광이 되돌아온 것이다.

그러자 뒤쪽에서 눈치만 살피고 있던 황룡무제 역시 소림의 뒤를 따라 슬그머니 황룡문도들을 이끌고 내빼버렸다. 이런 파장(場) 분위기로 어찌 마교를 이길 수 있겠는가. 이런 때는 분위기에 편승해서 내빼는 게 최고였다. 괜히 교주와 원한 관계를 맺어 봐야 좋을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이, 이럴 수가…….?

연이은 군웅들의 이탈로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린 맹주가 몸을 휘청거렸다. 그만큼 충격이 컸던 것이다. 산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 다. 아니, 필승의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목격한 현경의 경지는 정말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그래도 만약 공공대사만 있어 주었다면 합공을 해서라도 교 주를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공대사가 무공을 폐한 뒤 떠난 후부터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다.

곤륜이 떠났고, 소림도 떠났다. 그리고 황룡무제 역시 슬그머니 문도들을 이끌고 사라져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애써 끌어 모은 군웅들 역시 하나 둘씩 자리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만약 묵향이 자신을 가만 놔둔다면, 맹주는 지금이라도 당장 발걸음을 돌려 무림맹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럴 수 있을 리 없었다. 자신들이 곱게 되돌아갈 수 있게 교주가 놔줄리 없는 것이다.

맹주를 비롯해서 무림맹 장로들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고 있을 때였다. 감찰부주가 갑자기 묵향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당신의 혈육이 우리 손에 있소. 그러니 협상을 하지 않겠소?>

<묵향> 27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