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6권 2화 – 능구렁이들의 머리싸움
능구렁이들의 머리싸움
비육걸개 장로가 패력검제와 함께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진곡추와 자장분타주는 혹, 있을지도 모를 무영문의 기습에 대비하느라 정신없이 움직여 야만 했다. 무영문도들이 워낙 은신과 잠행에 뛰어나다 보니, 언제 기습공격을 가해 올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총타로부터 긴급 지시가 하달되었다. 수하가 전하는 전문을 받아 읽던 자장분타주는 경악성을 내질렀다.
“이럴 수가!”
자장분타주의 얼굴에 짙은 회의감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본 진곡추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갑자기 그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전문인데 그러나? 놈들이 어딘가를 기습공격 하기라도 했나?”
자장분타주는 전문을 진곡추에게 건네주며 허탈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게 아닐세. 지금 당장 무영문도들을 석방하라는 명령이야.”
자장분타주의 손에서 전문을 뺏듯이 받아든 진곡추는 급히 읽기 시작했다. 암호로 작성된 전문이었지만, 그 역시 분타주였기에 읽는데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미, 믿을 수가 없군. 그 많은 형제들이 무참히 살해당했는데, 놈들을 그냥 놔주겠다니……. 이럴 수가 있나!”
울분에 찬 진곡추는 다급히 비육걸개 장로에게 달려가 상부의 지시를 전했다. 이번 작전에서 자신의 부하를 몽땅 다 잃은 진곡추였기에, 그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 었다.
그는 차분히 전문을 읽고 있는 비육걸개를 향해 씨근덕거리며 상부의 결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성토했다. 하지만 진곡추의 예상과 달리 전문을 모두 읽은 비육걸개의 반응은 덤덤하기만 했다. 아니, 그는 이미 이런 식으로 결론이 날 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비육걸개의 모습에 진곡추는 마치 믿는 도끼에 발등이라도 찍혔다는 듯 분개하며 소리쳤다.
“장로님께서는 이미 이렇게 결론지어질 거라고 예측하고 계셨습니까?”
비육걸개는 내공을 끌어올려 전문을 불사르며 중얼거렸다.
“분하고 원통한 일이지만, 방주께서는 결국 화평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걸세.”
“본방은 30만씩이나 되는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지 않습니까? 한번 붙어 보기라도…….”
하지만 진곡추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비육걸개가 갑자기 자신의 멱살을 틀어쥐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서로의 얼굴이 맞닿기라도 할 듯 가까워졌다. 그리고 이때 진곡추는 볼 수 있었다. 살덩어리에 가려져 있는 비육걸개의 자그마한 눈에 어느새 습기가 차오르고 있음을
“나도 잘 알아! 안다고! 하지만 놈들의 본거지를 알아내지 못하는 한, 싸워 봤자 백전백패라는 걸 자네는 모르나?”
“그렇다면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무슨 기회?”
“제가 놈들의 본거지를 반드시 알아내겠습니다.”
비육걸개는 진곡추의 멱살을 살며시 놔주며 말했다.
“그 말은 안 들은 것으로 하겠네. 지금까지 무영문을 감시하기 위해 투입한 인원들 중 살아서 돌아온 제자는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말일세.”
“장로님이 말리신다고 해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설령 그로 인해 제 목숨을 내놔야 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비육걸개 장로는 잠시 진곡추의 얼굴을 그 작은 눈으로 쏘아봤다. 갑작스럽게 바뀐 비육걸개의 태도에 진곡추 역시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잠시 후, 비육걸개가 허탈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무영문을 감시하기 위해 투입된 인원들 중, 단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하는 노부의 말뜻을 진정 모르는 겐가?”
숨겨진 속뜻이 있다는 말에 진곡추는 잠시 당황했다. 숨겨진 속뜻이라고? 잠시 생각하던 진곡추의 얼굴에 경악감이 어렸다.
“서, 설마……?”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비육걸개는 고개를 끄덕인 후, 중얼거렸다.
“자네가 생각하는 그대로일세. 본방 내에 무영문의 개들이 숨어 들어와 있다는 말이지.”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냥 놔두고 계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오랜 시간 공들여 조사한 결과 몇 놈은 찾아냈어. 하지만 아직까지도 얼마나 많은 숫자가 본방에 들어와 있는지 파악하지는 못했다네. 놈들을 완전히 일망타진 할 수 없다면, 그냥 놔두는 게 좋아. 괜히 건드려 봐야 놈들의 조심성만 키워 줄 뿐이니까.”
제자들을 시켜 포로들을 놔주라고 지시한 비육걸개는 패력검제가 있는 객잔으로 발길을 옮겼다.
“젠장. 이제는 그 소식을 전해야 하는구만.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
이렇게 중얼거리며 패력검제를 찾아 발길을 옮기는 비육걸개의 어깨는 평소와 달리 축 늘어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아들이 납치되었다는 정보를 이제야 전한다는 게 너무 속 보이는 행동이라는 걸 그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패력검제가 개방을 위해 그토록 큰 도움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진실을 감추고 있어야 했다는 게……. 자격지심이 들지 않는다면 그건 사람도 아니리라.
“참, 이번에 아드님이 금나라에 납치당했다고 들었는데, 대협께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전해야 할지…”
비육걸개는 이런저런 얘기로 시간을 보내다가 적절한 때를 골라 슬그머니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얘기를 들은 패력검제는 예상대로 경악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예상대로의 반응이었지만, 비육걸개는 상대의 이런 반응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는 듯 되물었다.
“아니, 아직 모르고 계셨습니까? 저는 대협께서 홀로 여기까지 오신 게…, 그놈들의 흔적을 추적하시다 보니 그렇게 된 거라고만 생각을….
그 정도에서 비육걸개는 슬쩍 말을 얼버무렸다.
노회하기 그지없는 패력검제였지만, 이런 비육걸개의 교활한 속셈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런 걸 찬찬히 따질 만큼 안정적인 정신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일 때문에 이리 온 거고……. 그래, 량이가 납치당했다는 건 대체 어디에서 들었소이까?”
“허, 거참.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돕니다. 만약 이게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런 정보였다면, 대협을 뵙자마자 제가 이 소식부터 전했겠지요. 자제분께서 는 동료 4명과 함께 만현으로 이동하던 도중에 놈들의 마수에 걸렸다고 합니다.”
“만현으로 가던 도중이었다고요?”
패력검제는 머리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이 시점에 아들 녀석이 만현으로 갈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혹, 위쪽의 지시를 받고 움직였던 것이었습니까?”
패력검제가 제일 먼저 떠올린 이유는 그것이었다. 문도들을 거느리고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는 것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을 대신해서 제령문을 맡고 있어야 할 녀석이 만현으로 갈 이유가 없었다. 무책임한 놈도 아니고, 오히려 어떻게 보면 고지식하기까지 한 녀석이 아니던가.
“제가 듣기로는 친구들과 유람차…….?”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패력검제가 외쳤다.
“량이가 어떤 아이인데 그런 헛소리를!”
“하지만 사실입니다. 천지문의 소연과 진팔, 그리고 조령이라는 여아와 그 아이의 호위무사가 함께 움직였다고 하더군요.” 소연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패력검제는 솟구쳐 오르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소연이도 함께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 말에 비육걸개는 살집을 출렁거리며 호들갑스럽게 대꾸했다.
“오, 패력검제 대협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군요. 아마 자제분께서는 그 여아들 중 하나에 마음이 있었던 건지도…….”
연막을 치기 위해 비육걸개가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댔지만, 패력검제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이번 납치극이 왜 벌어진 것인지 곧바로 감을 잡았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소연 즉, 교주의 양녀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만약 그녀가 교주의 딸이라는 걸 몰랐다면 패력검제로서도 이 사건의 내막을 전혀 감조차 잡 지 못했을 것이다.
‘허허, 이거 참. 고래 싸움에 끼어 새우 등이 터진 격이군. 량이 이놈은 어쩌자고 소연이 하고 같이 어울리다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패력검제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 사실을 마…….”
여기까지 말하던 패력검제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소연이 교주의 딸이라는 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다. 이 사건이 장인걸이 의도적으로 그녀를 납치하기 위해 벌 인 것인지, 아니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 자신으로서는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마교 교주를 거론한다면, 눈치 빠르기로 소문난 개방의 장로가 무슨 생각을 할까? 앞으로 교주의 도움을 청하게 될 가능성이 큰 만큼, 쓸데없는 잡음은 일으키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급한 김에 말을 끊기는 했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때, 패력검제의 머릿속을 스치는 기가 막힌 생각이 하나 있었다.
패력검제는 짐짓 표정을 굳히며 낮은 어조로 질책했다.
“그러고 보니, 마을에 오시자마자 저한테 알려 주지 않고, 이제야 전해 주는 저의가 뭡니까?”
“헛, 그, 그건…….”
얘기가 잘 풀렸다며 안심하고 있던 비육걸개의 푸짐한 얼굴 살이 푸들푸들 떨렸다.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헤쳐가야 하나?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벌써 알고 계신 줄로 생각했지 뭡니까? 모르고 계신 걸 진작 알았다면 벌써 말했겠지요.”
비육걸개는 난감한 표정으로 이런저런 핑계를 늘어놓다가 슬그머니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홀로 남은 패력검제는 누구를 찾아가서 아들의 구명을 부탁 해야 할지 고심했다. 아무리 자신이 화경에 오른 고수이고, 제령문의 문주라고 하지만 자신의 힘만으로 장인걸의 손아귀에서 아들 녀석을 구출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는 소린데…, 과연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가장 좋을까?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은 교주였다. 그도 자신의 딸이 납치된 만큼, 장인걸의 손아귀에서 딸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패력검제는 선뜻 교주에게로 달려갈 수가 없었다. 정파의 명숙인 자신이 교주에게 매달린다는 게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가 들어왔던 마교에 대한 선입관도 크게 작용했다. 마교는 음모와 귀계가 난무하는 철혈의 세계라 하지 않던가.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 교주까 지 되었을 정도라면 보통 냉혹한 성격을 지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리라. 더군다나 그는 전임 교주였던 장인걸을 내쫓고 교주가 된 인물이었다. 한중길 교주를 내쫓 고, 교주가 되었을 정도로 교활하기 짝이 없는 장인걸을 상대로 말이다.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 그는 딸의 목숨을 택할까? 아니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교주가 지금이야 저렇게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딸의 생명 따위는 헌신짝 버리듯 포기해 버릴 게 뻔했다. 그리고 그 선택에 의해 자신의 아들 목숨까지 함께 날아가게 될 것이다.
“그와 함께 움직이는 것보다는, 나는 나대로 다른 길을 모색해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자신이 가야 할 곳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곳은 바로 무림맹이었다. 먼저 맹주에게 청을 넣어본 다음, 만약 맹주가 자신의 청을 거절한다 면 그때는 교주에게로 가는 수밖에 없으리라.
* * *
“패력검제가 찾아왔다고?”
맹주의 물음에 접객원주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맹주님. 맹주님을 뵙기를 청하고 계십니다.”
“그가 노부를 왜 찾아왔을……
순간 맹주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번에 장인걸에게 납치된 것은 진팔만이 아니지 않은가. 패력검제의 아들 역시 납치되었으니 말이다. 맹주는 접객원주에게 지시했다.
“노부가 지금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시간을 내기 힘드니, 잠시만 기다리시라고 전하게.”
“예, 맹주님.”
“맹 내에서 가장 좋은 숙소로 안내해 불편함이 없도록 하게. 알겠나?”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접객원주를 돌려보내자마자 맹주는 감찰부주를 급하게 불러들였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꼬?”
“깊게 생각하실 게 뭐가 있겠습니까? 굴러들어온 호박이니, 이용해 먹으면 그만이지요.”
“그러다가 그가 교주에게로 가면 어떻게 하고?”
감찰부주는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맹주님. 진팔이가 교주의 혈육이라는 사실을 그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걸 모르니 이리로 달려온 것이겠지요.”
감찰부주의 말에 맹주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오호, 듣고 보니 그렇구먼. 이것도 다 원시천존님의 뜻인가 보구먼.”
“그에게 아들을 구출하는 것에 맹에서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말하시요.”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 아닌가?”
묵향과의 밀약으로 인해, 조만간에 맹주는 장인걸과 비밀협약을 맺을 계획이었다. 그 말은 곧 인질 구출처럼 장인걸을 자극할 수 있는 행동은 처음부터 할 수 없다 는 말과도 같았다.
하지만 감찰부주는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말로만 그렇게 약조해 주시면 됩니다. 그가 어찌 알겠습니까?”
“괜찮을까?”
“심려하지 마십시오.”
감찰부주의 말에 맹주는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를 만나 봐야겠구먼.”
* * *
묵향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을 찾아온 손님이 보기 드문 미모를 지닌 아름다운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본좌는 옥화무제와의 면담을 원했었는데?”
매영인은 예상했던 상대의 반응에 저도 모르게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자신이 기억하는 한, 이 사람처럼 변하지 않는 사람도 없다. 겉모습부터 시작해서 단도직입적인 그 성격까지. 어떻게 자신이 바로 코앞에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런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제가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하셔도 보자마자 이렇게 면박을 주시니 얼굴이 다 화끈거리네요.”
“아, 실례. 네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건 아니었어. 자, 그쪽에 앉지.”
자리에 앉은 매영인은 공손한 어조로 자신이 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혔다.
“할머니께서 많이 편찮으셔서 제가 대신 왔어요. 제 공식 직책은 무영문의 부문주니까 할머니를 대신해서 교주님과 면담할 수 있는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데요.”
매영인의 말에 묵향의 표정은 한결 누그러졌다. 아마도 그녀의 변명을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먼 길을 달려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군.”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어요. 올라오면서 본 경치도 정말 아름다웠구요.”
묵향은 수하에게 명령해 다과와 술, 그리고 음식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곧이어 음식이 날라져 왔는데, 산 속이라 그런지 조촐하기 짝이 없었다.
“자, 이거 보기보다 꽤 맛있어. 먹어 봐.”
통으로 구운 토끼의 다리를 쭉 찢어서 건네는 묵향의 소탈함(?)에 매영인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 단순한 무인의 뜻하지 않은 환대에 그녀는 한결 마음이 놓였 다. 할머니가 비급을 가지고 장난쳤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기에 여기까지 오면서 묵향에게 어떤 문책을 당할 것인지 간이 조마조마 했었던 것이다.
“저, 실은 사과드리러 왔어요.”
“사과? 그게 무슨 말이야?”
“교주님께서 맹주께 부탁하신……..
하지만 매영인의 말은 묵향에 의해 가로막혔다.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으며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지금까지 무영문에 신세진 게 얼마나 많은데 겨우 그런 것 가지고 본좌가 뚱해 있겠나. 본좌를 그렇게 속 좁은 인간으로 알고 있었다니, 이거 정말 섭섭한데?” 은근한 질책에 매영인은 다급히 고개를 조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교주님.”
“하하핫, 이거 농담도 못하겠군.”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묵향은 아주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그는 매영인에게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무림맹에 제공한 것과 똑같은 사본을 무영문에도 주겠다는 약 속까지 했다. 과거 그녀와의 혼사마저 마다했던 묵향이었는데, 마음 한 구석에는 그녀에 대한 정이 있었던 것이었을까? 매영인을 대하는 묵향의 태도에는 꽤나 배 려가 넘치고 있었던 것이다.
교주와 면담을 마친 뒤 무영문으로 돌아간 매영인은 옥화무제의 방부터 찾아갔다. 옥화무제는 그때까지도 몸져 누워있었다. 의생이 홧병이라고 하는 걸 보면, 비 급을 잃은 충격이 크긴 컸던 모양이다.
옥화무제는 매영인을 보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교주는 만나 봤느냐?”
“예, 할머니.”
“그래, 그가 뭐라고 하더냐?”
몸이 아프기도 했지만, 그녀가 직접 가지 않은 것은 자신이 지은 죄 때문이었다. 묵향이 자신을 찾은 이유가 뻔한데, 구태여 대별산맥까지 찾아가서 욕을 듣고 싶 었겠는가. 그래서 그녀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손녀를 대신 보냈다. 그런 만큼 교주의 반응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별말씀 없으셨어요. 본문에 신세진 게 얼마나 많은데, 그 정도 가지고 속 좁게 따지겠느냐는 말까지 하셨죠.”
생각지도 못했던 매영인의 말에 옥화무제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하네. 그럴 인간이 아닌데……?”
“아니에요.”
매영인은 묵향과의 면담 내용을 아주 상세하게 옥화무제에게 들려 줬다. 마지막에는 이번 일만 잘 해결되고 나면, 옥화무제가 그토록 갈구했던 비급들의 사본까지 제공할 용의가 있다는 것까지.
비급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에 옥화무제의 입이 벙긋 귀밑에 걸렸다. 그토록 원했던 일이 이뤄졌으니, 지금 당장 죽어도……. 아니, 그런 거라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하겠지만, 어쨌건 그녀로서는 너무나도 기뻤던 것이다.
옥화무제는 언제 자신이 앓았냐는 듯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정원으로 나갔다.
“오랜만에 같이 다과나 함께 할까? 향긋한 차가 마시고 싶구나.”
“예, 할머니. 기운 차리신 모습을 다시 뵙게 되어 너무 좋네요.”
“다 네 덕분이다. 정말 수고했다.”
이렇게 화기애애한 조손간의 한때를 보낸 후, 매영인이 돌아가고 혼자 남게 되자 옥화무제의 영활한 머리는 저절로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요 근래 욕심에 눈이 멀어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했던 그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것을 얻게 된 지금,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던 집착에 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속박에서 벗어난 그녀의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민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찾아냈다.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을.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그녀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마치 비명이라도 지르듯 소리쳤다.
“가만! 그게 아니잖아!”
일순 옥화무제의 안색이 핼쑥하게 질렸다. 매영인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지만, 노회하기 짝이 없는 옥화무제는 눈치를 챈 것이다. 묵향이 그녀를 아니, 무영문을 통째로 중원에서 없애버리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당장 총관을 불러들였다.
“찾으셨습니까, 태상문주님.”
“본문의 존망이 걸린 일이에요.”
그러면서 옥화무제는 방금 전 매영인에게 들었던 묵향과의 대화 내용을 자세히 말해 줬다. 하지만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총관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태상문주님의 혜안(慧眼)을 속하가 감히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비약이 너무 심한 건 아닐까요?”
옥화무제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건 절대로 아니에요. 나도 한동안은 그가 비급을 넘겨준다는 말에 들떠서 아무런 생각도 안 났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세요. 그가 지금껏 이 런 식으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뭔가를 주겠다고 했던 적이 있었나요?”
잠시 생각해 보던 총관은 어색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태상문주님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만큼의 일을 수행해 드렸을 때,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급해 주셨지요.”
“그는 절대로 선심성 발언을 남발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가 해 주겠다고 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해 줬어요. 대신 그가 그런 약속을 할 때는 언제나 이유가 있었 죠. 이번처럼 아무런 이유 없이 뭔가를 주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는 말이에요.”
이제 함정은 만들어졌고, 장인걸이 거기에 걸려드는 것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즉, 무영문이 앞으로 묵향을 위해 해 줄 일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황을 정리해 보던 총관은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정말 냉혹한 분이시로군요.”
“그런 사람이니까 철혈의 세계에서 정점에 설 수 있었던 거겠죠. 일견 아주 관대한 사람인 듯 보여도 그건 미래를 함께 할 사람들인 경우에 한해서예요. 일단 아니 라고 판단하면, 그는 그 누구보다도 잔인해질 수 있는 사람이죠.”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가 묵향의 역린(逆鱗)을 건드리게 된 것은 비급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워낙 엄청난 가치를 지닌 비급들이었기에 그녀의 눈이 완 전히 뒤집혔던 것이다.
“그래도 정말 의외로군요. 본문과 오랜 세월 거래를 맺어오셨는데, 이토록 매정하게 끊어 버릴 생각을 하시다니. 더군다나 본문과는 불가침협정까지 맺지 않으셨 습니까?”
“본녀도 그걸 과신했다는 걸 부인하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그런 종잇조각 따위로 얽어맬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에요. 더군다나 그 협정서 역시 그가 원해서 써 준 건 아니었잖아요.”
옥화무제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는 흑살마왕을 없앤 후 곧바로 나를 아니, 본문을 멸하려고 들 거예요. 흑살마왕을 없앤 후에 비급을 주겠다는 약속을 한 건, 그때까지 아무 짓도 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는 뜻이겠지요.”
이렇게 말한 옥화무제는 총관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질문을 던졌다.
“자,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는 게 좋을까요? 추밀단주와 상의하기에 앞서 총관의 의견부터 듣고 싶었어요.”
그만큼 옥화무제가 총관을 신뢰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사실, 그녀가 그동안 수립한 대부분의 계책들은 총관과 상의해서 수립된 것들이었고, 또 총관에 의해 실행 되어 왔으니까.
“무림맹에 도움을 청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마지막에 봤던 맹주의 그 싸늘했던 눈동자를 떠올리며 옥화무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도 맹주는 도와주지 않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옥화무제가 아니라고 하면 아닐 것이다. 순간, 총관의 얼굴에 난감함이 어렸다. 무림맹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자신 들을 도울 수 있다는 말인가.
잠시 고민하던 총관이 문득 입을 열었다.
“교주께서 본문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히 드러내지 않고 있는 만큼, 아직까지는 기회가 있지 않을까요? 다시 한 번 정중히 용서를 구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옥화무제는 고개를 단호히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에요. 그처럼 융통성 없는 사람은 한 번 결단을 내리면 절대로 번복하지 않는다는 걸 총관도 잘 알잖아요.”
“번복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분께 압력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의 발언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찾아내기만 한다면요.”
옥화무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총관의 의견이 일리가 있긴 했지만, 묵향에게 압력을 행사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소연은 장인걸에게 잡혀 갔고, 의 형제를 맺은 만통음제는 행방불명이다.
“참, 그러고 보니 그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있었죠?”
옥화무제의 말에 총관은 기억을 되살리며 대답했다.
“아, 얘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협정서를 맺을 당시 잠시 모습이 포착되었을 뿐, 더 이상 그분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십만대산에 있는 게 아닐까요?”
십만대산이라는 말에 옥화무제의 가슴은 더욱 답답해졌다. 워낙 거리가 멀어 왕복하는 데도 엄청난 시간이 걸리지만, 문제는 그곳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라고는 단 한 치도 찾아낼 수 없는 철옹성이라서 은밀히 접촉하여 청탁을 넣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데 있었다. 천하의 무영문에서 첩자를 단 한 명도 침투시키지 못한 곳이 바로 마교 총단이었으니 말이다.
옥화무제도, 총관도 그들이 찾고 있는 대상에 마화가 포함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화를 그렇게까지 비중 있는 인물로 생 각하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본 마화는 마교의 살림꾼이 아니라, 흑풍대의 부대주일 뿐이었으니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겠군요.”
“……”
그 말을 끝으로 깊은 침묵이 이어졌다. 입을 열어 그 선택이 무엇이냐는 말을 못하고 있을 뿐, 두 사람은 지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길은 단 하나뿐 이라는 것을. 그것은 바로 전력을 다해 묵향을 없애는 것,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오랜 침묵을 깨고 옥화무제가 입을 열었다.
“대별산맥의 마교 집결지를 편복대에 노출시키도록 하세요.”
“그, 그러다 교주께서 눈치라도 채게 되면 돌이킬…….”
옥화무제는 단호하게 말했다.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말아요. 그와는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상태니까요.”
“지시대로 이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참, 추밀단주를 불러 주세요. 은밀하게.”
“예.”
총관이 밖으로 나가자 그녀는 주전자를 들고 마치 기갈이라도 든 듯 마지막 한 방울까지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지만 목이 바짝 타 들어가는 듯한 그녀의 갈증은 전 혀 가시지 않았다.
시녀를 불러 차를 더 가져다 놓으라고 지시한 다음, 그녀는 자리에 앉아 추밀단주를 기다렸다. 현재 그녀가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은 추밀단주뿐이었다. 그녀는 일부 러 이 일에서 손녀인 매영인을 배제했다. 그녀는 다음에 써먹을 데가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