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6권 5화 – 꼬리치는 여우
꼬리치는 여우
요즘 옥화무제는 일선의 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뗀 상태였다. 어떻게 하면 묵향을 파멸시킬 수 있을지 궁리하는 것만으로도 잠자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다. 상대 는 무림 역사상 최강급에 들어간다는 고수.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어쩌다 한 번씩 자신의 처지가 왜 이렇게까지 초라하게 전락했는지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하기에.
연못 속을 헤엄치고 있는 커다란 비단잉어들은 그녀의 복잡한 마음도 모른 채, 던져 주는 먹이를 먹느라 입이 찢어지도록 빠끔거리고 있는 중이다. 파드드득!
서로 간에 치열한 몸싸움까지 벌이면서 말이다.
잉어에게 먹이를 던져 주고 있던 옥화무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자신의 뒤로 총관이 다가왔다는 걸 느낀 것이다.
“무슨 일이지요? 총관.”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는 태상문주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던 총관이었기에 즉각 대답했다.
“지급으로 도착한 전문입니다.”
옥화무제는 총관의 손에서 빼앗듯 전문을 받아들었다. 지급이라는 말과는 달리 전문에 기록되어 있는 글자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觸(촉)」이라는 글 자였다.
총관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태상문주님께서 하시는 일인데 주제넘은 말일지는 모르겠지만,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되겠사옵니까? 하다못해 마교 쪽에서 행하고 있는 작전을 모두 알려 주는 정 도가 아니라면, 그분께 타격을 가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 정도는 본녀도 알고 있어요.”
옥화무제는 다시금 시선을 잉어들에게로 돌리며 뒷말을 이었다.
“이건 선물일 뿐이에요.”
“선물이라고 하시면……?”
“이쪽에서 정보를 알려 준다고 해도, 흑살마왕이 그걸 덥석 받아들일 것 같아요?”
“흠, 그것도 그렇군요.”
“정보 제공자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정보라도 쓸모가 없는 법이에요. 아니, 오히려 혼란만을 가중시킬 뿐이죠. 지금은 흑살마왕에게 본문과의 합 작이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와 서로에 대한 신뢰를 형성하는 게 중요해요. 그와는 단 한 번도 거래를 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흑살마왕과 접촉할 만한 복안은 생각해 두셨습니까? 첫 접촉인데다, 그를 직접 만나 의사를 타진하려면 문주님이나 부문주님 정도는 되어야 격이 맞을 것입니 다.”
태상문주를 거기에서 뺀 것은 늑대굴에 그녀가 들어가기에는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곧 무영문이었다. 그녀가 만약 장인걸에게 생포라도 당한다면 그날 로 무영문은 끝장이었다.
하지만 옥화무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가벼운 미소만을 지은 채, 잉어만을 바라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잠시 말없이 서 있던 옥화무제가 문득 입을 열었다.
“맹주는 아직까지도 맹을 나서지 않았나요?”
“예. 하지만 조만간에 밖으로 나오지 않겠습니까? 만수진인이 흑살마왕과 접촉한 지도 시간이 꽤 흘렀으니까요.”
그렇게 대답하던 총관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맹주가 맹을 나서는 이유는 당연히 장인걸을 만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를 믿지 못하 는 만큼, 호위도 거의 거느리지 않은 채 아주 단출하게 만날 가능성이 컸다. 장인걸은 어떨지 몰라도 맹주는 이 일을 비밀에 붙이고 싶어 할 테니까.
총관이 느끼기에는 옥화무제가 맹주를 만나기 위해 밖으로 나오는 장인걸과 접촉할 생각인 듯했다.
“직접…, 만나시겠습니까?”
“당연한 거 아닐까요. 한 배를 타고자 한다면, 그 정도 성의는 보여 줘야죠.”
“그럼 맹주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실하게 감시하라고 지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예?”
“어디서 만날지 이미 짐작하고 있으니까요.”
그 말에 총관은 고개를 조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태상문주님의 혜안에는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본녀는 잠시 밖에 나갔다가 올 테니 그리 알고 있으세요.”
“호위들을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조용한 곳에서 혼자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으니까요.”
“예.”
“그리고 본문 전체를 대상으로 인원을 한 번 더 철저하게 점검하도록 하세요.”
어느 문파든 첩자가 끼어들 수 있기에 정기적으로 인원 점검을 행한다. 특히 무영문은 중원 최고의 정보 집단이자, 모든 것이 신비의 장막으로 감싸져 있었기에 다 른 모든 정보 집단의 표적이 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즉시 시행하도록 모든 지단에 공문을 발송하겠습니다.”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서둘러 발길을 옮기던 총관은 문득 고개를 뒤로 돌려 옥화무제를 바라봤다. 옥화무제는 연못을 바라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했다. 장인걸을 만나서 뭐라고 말을 꺼낼 것인지 고민이라도 하고 있는 듯…….
“흑살마왕이 미끼를 물었습니다.”
“그거 반가운 소식이구먼. 그래, 만수 사질은 돌아왔느냐?”
맹주의 질문에 감찰부주는 머뭇거리더니 힘겨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 *
맹주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을 본 감찰부주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자가 맹주님과 직접 만나기를 원하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방금 전까지 원수로 지냈던 사이다. 그런 만큼 직접 만나는 것에는 커다란 위험부담이 따른다. 하지만 맹주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최대한 빨리 약속 장소를 잡도록 하거라. 괜히 시간을 끌면 저쪽이 의심할 수도 있으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맹주님. 그런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예서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더냐.”
“맹주님, 그게 아니라 호위의 규모를 어떻게 해야 할지..
그제야 맹주는 감찰부주가 고민하는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호위무사를 많이 데려가자니 비밀 유지가 힘들게 뻔하고, 그렇다고 최소한의 인원만 거느리고 가자니 아무래도 불안한 것이다.
그에 맹주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호위는 필요 없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그자가 막대한 병력을 투입하여 천라지망(天羅之罔)이라도 치지 않는 한, 나에게 위해를 가할 수나 있을 것 같으냐?” 맹주의 말이 옳다. 아무리 장인걸이 많은 병력을 투입한다 해도 개개인의 실력은 아주 낮다. 퇴로만 적절히 확보할 수만 있다면, 절대로 장인걸은 맹주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말에서 뭔가 실마리를 얻었는지 감찰부주는 고개를 깊이 조아리며 대답했다.
“최대한 빨리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며칠 후, 정사의 거두들이 만났다. 장인걸은 편복대주를, 그리고 맹주는 감찰부주만을 대동한 아주 단출한 회동이었다.
“본좌는 귀하가 이곳에서 만나자고 제안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소.”
장인걸은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양양성의 잿빛 성벽을 멀뚱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쩌면 그는 그 순간, ‘저놈의 성만 없었다면 지금쯤 중원 전체를 짓밟아 버 릴 수 있었을 텐데’하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맹주는 비밀 유지 때문에 수하들을 동원하기 힘들었고, 장인걸은 주변에 양양성이라는 막강한 무력집단이 있기에 많은 수하들을 데리고 올 수가 없었다. 그런 의 미에서 보면 소수의 인원이 비밀리에 회담을 나누는 데 있어 이만큼 좋은 장소도 찾기 힘들 것이다.
혹시 맹주의 함정일 수도 있을 거라는 예상을 장인걸이 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이 만남을 호쾌하게 받아들였다. 물론 겉으로야 대장부답게 받아들였겠지만, 그도 내심 약간 찝찝했는지 천마혈검대 일부를 주위에 매복시켜 놓은 상태였다. 귀식대법으로 기척을 숨기고 있는 그들을 관 속에 넣은 다음, 편복대원들이 옮겼기에 맹
주는 그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맹주는 협정서에 서명한 것을 장인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본맹은 이제부터 중립을 지키도록 하겠소이다. 양양성에서 무사들이 완전히 철수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조금 필요하니, 괜한 오해는 하지 마시구려.”
그 말에 장인걸은 내심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중원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혈겁이 더욱 위맹을 떨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공문이 며칠 전 무림맹에서 각 문파에 배송되었다는 정보를 이미 입수한 상태였다. 그걸 보면 맹주가 부리려는 수작이 뻔하지 않은가?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도인인 줄로만 알았는데, 속에는 능 구렁이가 열 마리쯤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양양성에서 무사들을 철수시킬 필요는 없소이다.”
장인걸의 말에 맹주는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그건 무슨 말씀이시오? 서로 간에 오해가 없게 하기 위해서는 무사들을 철수시키는 게 좋지 않겠소이까?”
“철수하는 건 좋지만, 그렇게 해서야 묵가놈이 본좌하고 싸우려고 들기나 하겠소?”
장인걸의 반응에 맹주는 내심 감탄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는다면 장인걸은 양양성에서 철수할 것을 요청하겠지만, 그 반대인 경우 가만히 있 어 달라고 요청할 거라며 교주는 예상을 했던 것이다. 장인걸과 오랜 세월 싸우다 보니 상대의 속셈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모사(謀士)들 중에서 아주 뛰어난 인물이 있는 것인지…….
하지만 맹주는 시침을 뚝 떼며 자신으로서는 상대가 이런 요구를 해 올 거라고는 생각도 해 보지 못했다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아,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구려. 나는 우리 쪽에서만 중립을 지키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외다.”
“기왕에 협정을 맺은 사이니, 놈을 없애기 위해 그쪽도 조금 힘을 보태 주셔야겠소.”
“알겠소. 하지만 최선을 다해 돕긴 하겠으나, 주위의 이목도 있고 하니 티 나게 돕지는 못한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구려.”
“그 정도를 가지고 오해할 만큼 본좌의 속이 좁지는 않소이다.”
장인걸과 비밀회담이 끝나자마자, 맹주는 곧바로 양양성으로 향했다. 맹주가 감찰부주만을 대동한 채 양양성을 향해 출발했다는 것은 이미 무림맹 내에서도 여러 명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맹주가 맹을 나서는 이상, 그의 호위대나 최소한 몇몇 장로들에게는 행적을 알려 줘야만 했기 때문이다. 무림맹은 마교와 달리 맹주 마 음대로 모든 걸 할 수 있는 단체는 아니었으니까.
특히나 전임 맹주였던 옥청학이 맹 밖으로 비밀리에 출타했다가 행방불명되어 버린 이후, 그 절차는 더욱 까다로워졌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되풀이 되는 것을 장로들이 원치 않았던 것이다.
“맹주님이 아니십니까? 무량수불! 기별이라도 주시지 않고.”
맹주가 도착했다는 전갈에 곤륜파의 무량 대장로는 황망히 달려 나왔다.
감찰부주는 대장로에게 인사를 건넨 후 말했다.
“기밀을 요하다 보니 먼저 기별을 드리지 못한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대장로님.”
“허허,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런 변방까지 맹주께서 직접 찾아 주신 점 영광입니다, 무량수불.”
“무황께서는 계십니까?”
“자, 안으로 드시지요. 이미 기별을 넣었습니다.”
곤륜무황은 맹주 일행을 반가이 맞이했다.
“이쪽은 본맹의 감찰부주를 맡고 있는 아이입니다.”
“청수(淸水)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곤륜무황 대협.”
“아, 그대가 맹의 대들보 중 하나인 감찰부주였구려. 어서 오시구려.”
곤륜무황은 손님들에게 차를 권한 후, 맹주에게 물었다.
“기별도 없이 여기까지 어쩐 일이시오이까?”
《방금 전에 흑살마왕을 만났지요.》
어기전성으로는 그렇게 대답을 하면서 겉으로는 딴전을 부린다.
“우연히 근처를 지나다가 귀하가 보고 싶어서 왔소이다.”
이런 식으로 방금 전에 장인걸과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하는 맹주. 그런 맹주의 행동에 곤륜무황은 내심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혹 엿듣는 자가 있 을 수도 있기에 신중을 기하는 것임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맹주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곤륜파 제자들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강력한 전력을 보유한 전투단을 1개 운용했으면 하오. 물론 그 존재를 흑살마왕 쪽에서 의심하지 못하도록 말이오.》
맹주의 말에 곤륜무황은 별것 아니라는 듯 되물었다.
《그거야 그렇게 하시면 되지, 왜 빈도에게 말을 하는 것이오?》
《왜냐하면 양양성에서도 2천 정도를 차출해야겠기에 하는 말이외다. 그렇게 하면 양양성에 집중된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처럼 흑살마왕을 속일 수도 있으니 일거 양득이 아니겠소?》
《그러면 어떻게 해 드리면 되겠소?》
그 물음에 맹주는 침중한 어조로 답변했다.
“이번에 무림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혈겁에 대한 명확한 단서를 잡았소이다.”
두 가지 방향에서 동시에 대화가 전개되고 있었기에 곤륜무황으로서도 그에 맞춰 대화를 전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는 맹주가 지금 뭘 원하는 지 모르고 있지 않은가.
“축하드릴…, 일이군요. 그래, 범인이 누구라고 하더이까?”
“놀랍게도 흑살마왕이 벌인 일이었소이다. 혹시나 했지만, 그게 사실일 줄은 몰랐소이다. 그자의 치밀한 술수에 무림 전체가 놀아난 꼴이 된 것이지요.”
그러면서 맹주는 장인걸이 벌여 놓은 ‘보물찾기’라는 작전이 어떤 식으로 진행된 것인지 자세히 설명했다. 사람이 지닌 원초적인 욕망을 이용한 장인걸의 기발한 계책에 곤륜무황은 감탄을 금하기 힘들었다.
“이렇게 해서 저들의 정체를 밝히는 데는 성공했으나, 문제는 그들을 어떻게 타도하느냐 하는 것이오. 저들의 세력이 워낙 신출귀몰하다 보니 가뜩이나 적은 본맹 의 무사들만 동원하기에는 벅찬 노릇이고…….”
미리 어기전성으로 양해를 구한만큼 곤륜무황도 입을 맞춰 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연극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소이까?》
《만사불여튼튼이라 하지 않소? 그만큼 이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외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양양성에서 2천을 투입할 테니, 맹에서도 그만큼의 정예를 투입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게 좋겠구려.”
곤륜무황과 회동을 마친 후, 맹주는 양양성에 있는 각 문파의 수뇌부를 초청하여 간단한 주연을 베풀며 그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이곳에 자신이 오지 않았다면 모 르겠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온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곤륜무황만 만나고 가 버린다면 양양성에 모여 있는 각 문파 사람들의 불만이 터져 나올 수도 있었기 때 문이었다.
다음 날 새벽, 맹주는 맹으로 돌아갔고, 곤륜무황은 각 문파의 대표자들을 소집해 맹주의 뜻을 전했다. 각 대표자들은 맹주가 2천의 정예를 모집한다는 것에 지지 를 보냈다. 안 그래도 여기저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혈겁 때문에 은근히 찝찝함을 느끼고 있던 상황이 아니었던가. 이제 이 일로 더 이상 본가가 털릴 걱정에서 해방 되게 생겼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리 없다.
“우리 쪽 무사들의 통솔은 서문 가주께서 맡아 주시는 게 어떨는지요?”
곤륜무황의 제안은 모두에게 뜻밖이었다. 모두들 지휘권을 곤륜파에서 가질 것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결정이 떨어지자 서문세가의 장로들은 크 게 감동했다.
맹주가 이곳 양양성까지 직접 행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독대를 나눈 사람은 곤륜무황뿐이었다.
수라도제가 빠져나간 지 얼마나 지났다고, 양양성에 있는 문파들 중 가장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 서문세가가 이런 홀대를 받아야 하나 그들은 내심 서운해 하 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런 결정이 나오자 그들은 맹주와 곤륜무황의 마음씀씀이에 크게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 * *
맹주와 만나 기분 좋은 협정을 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사방에 알릴 수 없다는 게 장인걸로서는 아쉬울 따름이었다. 만약 이 사실을 묵향 그 잡것이 알게 된 다면 당장 보따리를 싸 십만대산으로 줄행랑을 칠 게 아니겠는가.
그런 기가 막힌 구경거리를 포기해야만 한다는 게 한스러웠지만, 뭐 결국 놈의 잘린 머리통을 구경할 수 있을 테니 그 정도 욕구쯤이야 웃으며 참아 줄 수 있는 노 릇이었다.
회동을 마치고 돌아가는 도중 편복대주는 제법 그럴듯해 보이는 객잔으로 장인걸을 안내했다.
“저기서 요기를 하고 가시는 게 어떻겠사옵니까? 음식 맛이 교주님의 마음에 드실 것이옵니다.”
“앞장서거라.”
“예.”
유명한 곳인지 객잔 안은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편복대주는 장인걸을 3층으로 안내했다. 객잔은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호화롭게 꾸며놨고, 음식의 가격 또한 아래층에 비해 훨씬 더 비쌌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연한 초록빛 성장(盛裝)을 입은 아가씨 한 명이 걸어 올라오는 게 보였다. 보기 드문 그녀의 미모에 식당 안에 앉아 있 던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계단 쪽으로 집중되었다. 편복대주 또한 남자였기에 그녀에게로 가는 시선을 억제하기 힘들었지만, 장인걸의 앞이라 그의 눈치
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편복대주로서는 의외였던 게, 장인걸 역시 다른 사내들처럼 아주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장인걸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 동안 미녀를 한두 명 겪어 보았겠는가. 연경으로 돌아가면 그의 저택에 수십 명의 미희(姬)들이 줄을 지어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들과 비교해서 그리 빼어난 구석도 없어 보이는데도 장인걸이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으니 의외라고 할 수밖에.
편복대주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그 미녀는 살풋살풋 걸어오더니 이윽고 그들의 탁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런 상황은 정녕 예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편복대 주의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도대체 그녀의 정체가 뭐기에…….
“합석을 청해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왜 이 여인이 의도적으로 접근해 오는 것인지 그 이유를 생각하느라 편복대주는 정신이 없었지만, 장인걸의 태도는 의외로 담담했다. 그는 맞은편 자리를 가리키 며 말했다.
“얼마든지.”
그녀가 자리에 앉자 장인걸은 무감정한 어조로 말했다.
“설마, 귀하를 직접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소.”
미녀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대금제국 대원수께서 저같이 미천한 야인(野人)을 한눈에 알아봐 주시니 영광이네요.”
“누가 감히 무제(武帝)의 칭호를 얻은 사람을 미천하다고 하겠소.”
무제의 칭호를 얻었다는 말에 편복대주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 말은 눈앞의 이 아름다운 여인이 옥화무제라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끽소리도 내지 못했다.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워낙 대단하신 분이라 조용히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잡기가 너무나도 힘들군요.”
장인걸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일부러 접근한 걸 보면, 비밀을 요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적 자체가 무영문에 완벽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걸 깨 달았던 것이다.
“본좌를 찾아온 이유를 들을 수 있겠소?”
옥화무제는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과 손을 잡고 싶어요.”
장인걸은 씨익 미소 지었다. 무림맹과 밀약을 맺은 이상, 조만간에 천하는 자신의 것이 될 게 뻔했다. 그걸 알고 이 교활한 계집이 자신에게 접근한 것이리라. 일단 상대의 속셈을 짐작할 수 있게 되자, 마음이 한결 느긋해졌다.
“세인들은 무영문이 중원 최고의 정보 조직이라고 하지만, 본좌는 그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소.”
장인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옥화무제는 아주 재미있는 얘기라도 들었다는 듯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은 아주 매력적인 것이었지만, 장인걸의 인 상은 일그러졌다. 자신을 비웃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웃지만 말고 얘기를 해 보시오.”
“만나기에 앞서 선물까지 드렸었는데, 그쪽에서는 그걸 받았는지도 모르고 있다니 정말 재미있군요. 그렇지 않나요? 편복대주.”
갑자기 옥화무제가 자신을 보며 말하자 편복대주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인걸은 편복대주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선물이라니?”
편복대주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그건 속하도 잘…….”
“워낙 정보가 어두운 것 같아서 대별산맥에 숨어 있는 묵향 교주의 위치까지 알려 드렸잖아요. 설마 그걸 자신들의 힘으로 알아낸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요?”
그 말에 편복대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장인걸의 표정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그는 느긋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선물이 그 정도라면, 그보다 더 중요한 정보들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되겠군.”
“그건 상상에 맡기겠어요. 어때요? 아직도 본문의 정보가 필요 없다는 기존의 생각에 변함이 없나요?”
“아니, 점차 구미가 당기기 시작하는군. 그것보다 그쪽에서 원하는 걸 듣기로 하지. 본좌에게 뭘 원하는 거요?”
“무공 비급이요.”
“무공비급?”
뜻밖의 제안에 장인걸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미 정파의 심법을 익힌 상태에서 역혈심법을 추가로 익히는 건 별로 권장하는 것이 아닌데…….”
옥화무제는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난치는 건가요? 아니면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가요?”
장인걸은 진짜로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는 편복대주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저쪽에서 원할 만한 비급을 보유하고 있는 게 있었나?”
편복대주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개봉을 점령할 당시 황궁무고(皇宮武庫)와 비고(秘庫)에서 입수한 비급들이 있사옵니다.”
“아! 그게 있었지.”
장인걸은 시선을 옥화무제에게 돌리며 물었다.
“그걸 원하는 거요?”
하지만 옥화무제가 원한 건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흥, 그쪽에서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쓸모가 없는 거라면 본문과의 계약 성사를 축하하는 선물 정도로는 적당할 듯하군요.”
순간 그녀에 대한 신뢰감이 조금 상승했다. 사실, 묵향을 배반할 정도라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막대한 대가를 원해야 정상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상대가 원하는 게 뭔지 짐작하지 못하고 있는 만큼 장인걸은 난감하기만 했다.
“흐음…, 그것도 적지 않은 분량인데 만족하지 못하시겠다? 이거 전해 들은 것보다 훨씬 더 배포가 크구먼.”
“황궁에서 긁어모은 비급들 중에서 쓸 만한 건 거의 없어요. 그건 그쪽에서도 잘 알 거 아니에요?”
장인걸은 씨익 미소 지었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거 외에 가지고 있는 거라고는 마공 비급밖에 없소. 설마 그걸 가져다가 익히고는 제2의 천마신교라도 창립하실 생각이시오?”
옥화무제는 새침하게 대꾸했다.
“마공 따위는 필요 없어요. 본녀가 원하는 건 십만대산에 쌓여 있는 정파의 무공비급들을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귀교에서 그 무공들에 대해 연구한 자료도 원해 요.”
그제야 장인걸은 상대가 원하는 걸 알 수가 있었다. 마교에 쌓여 있는 막대한 양의 무공비급. 그 안에는 거의 모든 명문정파들의 절전비기들도 수두룩하다는 걸 장인걸도 알고 있었다. 무공비급 한 권에 목숨을 거는 무림인의 생리상, 그 정도라면 충분히 모험을 할 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흐음…, 그러니까 그 비급들을 얻기 위해 묵향을 없애는 일에 동참하시겠다는 말씀이시구려.”
“맞아요. 묵향 교주를 없앤다면 귀하가 다시금 교주로 추대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녀는 생각하고 있어요. 설마, 교주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겠죠?” 그녀의 목소리는 장인걸이 지금껏 들어왔던 그 어떤 계집의 목소리보다도 더욱 달콤했다. 장인걸은 옥화무제의 혓바닥이 간교하기 짝이 없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 왔었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장인걸은 그녀의 제안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게 바로 그가 가장 원하던 것이었으니까.
본거지로 돌아가자마자 장인걸은 편복대주에게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함정을 설치하는 게 좋겠어.”
“적격지를 선정하여 최대한 빨리 보고 올리도록 하겠사옵니다.”
편복대주가 그렇게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인걸은 이미 장소를 생각해 놓은 모양이었다. 그는 벽면에 걸린 커다란 지도 중 한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 설치하도록!”
장인걸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태산(泰山)이었다. 편복대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구태여 태산에 설치할 이유라도 있으시옵니까? 거리가 너무 멀어 그곳까지 인원과 장비를 보내려면 시간이 너무 지체되지 않을까 염려되옵니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여기에는 태산파가 있어. 태산파의 연공실을 최대한 이용하도록 해라.”
그 말에 편복대주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맞다. 태산파라면 정파의 명문들 중 하나로 한때는 9파1방에 들어갔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그리고 그렇 게 큰 문파인 만큼, 문주급이 사용하는 연공실로 들어가는 통로에는 수많은 기관진식들을 설치해 놨을 게 분명했다. 그걸 이용한다면 최소한의 시간으로도 완벽한 준비를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즉시 공사를 시작하도록 지시하겠사옵니다.”
편복대주가 밖으로 뛰쳐나가자, 장인걸은 호피(虎皮)로 장식한 호화로운 의자에 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본좌도 귀(鬼計)에는 꽤나 능숙하다 자신하고 있었거늘…….”
옥화무제를 만난 후 그는 자신에게 뭐가 부족한지 명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그에게는 계책에 능한 책사가 없었다. 편복대주는 정보의 처리에는 능했지만, 그 것들을 응용해서 적을 타격할 계책을 꾸미는 것에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재능이 있고 없고를 떠나, 사악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런 사악함이 말이다.
‘그때 무슨 짓을 해서라도 혁무상 장로를 데리고 탈출했어야 했어. 정말이지 두고두고 후회되는구먼.’
자신이 권좌에서 밀려났던 바로 그날을 떠올리면 씁쓸하기 짝이 없다.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그때 저렇게 했더라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개되는 자기반성. 그런 식으로 자신을 채찍질했기에 그는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잡았다. 십만대산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이런 저런 상념에 잠겨 있던 장인걸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참,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말코나 손봐줘야겠군. 크흐흣…, 감히 본좌를 가지고 놀려고 들다니. 깜찍한 놈들 같으니라구.”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그가 향한 곳은 만수진인이 기거하고 있는 방이었다.
* * *
패력검제는 무림맹에서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맹주는 그의 아들을 구출하는 데 있어 전폭적인 협조를 약속했지만, 며칠 동안 동정을 살펴본 결과 그 어 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거의 매일 감찰부주가 찾아와 서량이 감금되어 있을 만한 장소를 찾고 있다며 말해 주기는 했지만, 그런 말들을 곧이곧대로 믿어 버릴 만큼 그는 맹을 신뢰하고 있 지 않았던 것이다.
“계속 이대로 기다려야만 하나?”
초조한 듯 방안을 서성거리던 패력검제의 머릿속을 꿰뚫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교주도 딸을 납치당하지 않았던가. 맹주는 자신의 일이 아니니 옆집에서 난 불구경하듯 할 수 있지만, 교주는 다를 것이다. 그는 자기 집에 불이 난 상태니까.
“맹으로 올 게 아니라, 처음부터 교주에게로 갔었어야 했어. 정파에 적을 두고 있다는 그놈의 자부심이라는 게 뭔지……. 아까운 시간만 잡아먹었군.’
패력검제는 검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결단을 내렸으니 더 이상 이곳에서 머무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곧 깨달아야만 했다. 방에서 나온 직후부터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훔쳐보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정말 이상하군. 한 명이라도 더 투입해서 정보 수입에 힘을 쏟아야 마땅한 이때, 왜 나를 감시하고 있단 말인가?”
패력검제는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맹에서 자신을 감시할 이유를 전혀 찾아낼 수 없었다. 맹에 소속된 문파와 분란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오히려 무영문과 충돌에 서는 개방을 도와주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문득 패력검제에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소연에 대한 정보를 맹에서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행해지고 있는 무림맹의 알 수 없는 행동이 이해가 갔다.
맹주는 그가 교주에게로 가는 걸 싫어하는 것이다. 물론 감시자들의 능력으로 패력검제가 탈출하는 걸 막을 수는 없겠지만, 교주의 사람들이 그에게 접근하는 걸 방해할 수는 있었다. 그들은 패력검제가 이미 진실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패력검제는 씁쓸한 듯 입맛을 다셨다. 장인걸에게 납치당한 사람들을 구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도 시원찮을 지금, 이따위 견제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니 말이다. 패력검제는 그 길로 맹주의 집무실 쪽으로 달려가 면담을 요청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지금은 바쁘셔서 시간을 낼 수 없으니 다음에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패 력검제는 치솟는 분노를 억제하기 힘들었다.
“아들을 찾는 걸 도와주기는커녕, 나를 붙잡고 지금 뭐하자는 겐가? 내가 그렇게 할 일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더냐!”
패력검제의 노성에 문사는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그는 윗사람이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었다. 그 말을 듣고 패력검제가 노성을 터뜨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진, 진정하십시오, 패력검제 대협. 제가 다시 한 번 더 윗선에 보고를 올려 면담 날짜를 잡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됐다. 노부가 거지새끼도 아니고, 맹주를 믿은 게 잘못이지. 맹주에게 전하거라. 내 아들의 목숨은 내가 직접 구하겠다고 말이다.”
이제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 패력검제는 밖으로 뛰쳐나가 전력으로 경공술을 전개했다. 감히 현경급 고수의 뒤를 쫓을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뛰어난 경공술을 자랑하는 그였다. 그런 그가 전력으로 경공술을 전개하자, 그의 신형은 순식간에 까마득한 점으로 화해 버렸다. 패력검제는 단숨에 무림맹을 감싸고 있는 성벽을 뛰 어넘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뭣이? 패력검제가 뛰쳐나가 버렸다고?”
“예, 맹주님.”
“허어~ 좀 말리지 않고.”
“그럴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맹주님께 면담을 청한 다음, 그게 거부되자마자 불같이 화를 내며 자기 아들은 자기가 직접 구하겠다고 하며 달려 나갔다 합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군. 내가 직접 찾아가서라도 그를 데려와야겠어. 지금 그는 어디에 있느냐? 감시는 붙여 뒀겠지?”
그 말에 감찰부주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워낙 엄청난 경공술이라 도저히 추적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뛰어난 애들 몇을 보내 흔적을 뒤쫓고는 있습니다만, 기대는 하지 않으심이…….”
“허허, 이거 참.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구먼. 그렇게 혼자 뛰쳐나가서 도대체 뭘 할 수 있다고.”
“저로서도 의외였습니다. 그가 그런 선택을 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조차도 하지 못했으니까요.”
잠시 말없이 앉아 있던 맹주가 문득 입을 열었다.
“혹, 그가 교주의 혈족도 자신의 아들과 함께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게 아닐까?”
맹주의 의문에 감찰부주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럴 가능성은 절대로 없습니다.”
“확신할 수 있느냐?”
“예. 그가 맹에 들어온 뒤부터 실력 있는 애들을 배치해서 24시간 철저히 감시했습니다. 그동안 그와 접촉한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이해하기 힘들구나.”
“어쩌면 이쪽에서 보여 준 진행 상황이 너무 지지부진한 듯하자, 속이 타서 밖으로 나가 버린 게 아닐까요? 그도 일문의 주인이고, 무림에 두터운 인맥을 쌓아 뒀 을 게 아니겠습니까? 자기 힘으로 어떻게라도 해 볼 생각인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당장 각 문파에 협조 공문을 띄우도록 해라. 패력검제를 발견하면 맹에 알려 달라고 말이다.”
“그런 식이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우려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 감찰부주는 잠시 생각하더니 맹주에게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패력검제 아들의 행방에 대한 작은 단서를 발견했다고 말입니다. 그걸 알려 주기 위해서 그를 찾고 있는 거라고 말이지요.”
“오호, 그거 좋은 생각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