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6권 6화 – 또 하나의 덫
또 하나의 덫
패력검제가 맹을 떠난 다음 날, 맹주는 생각지도 못한 여인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옥화무제였다. 뻔뻔스럽게도 그녀가 이렇게 빨리 자신을 찾 아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맹주였다.
그는 옥화무제를 일단 귀빈들이 묵는 숙소에서 기다리도록 문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한동안 기다리게 만들며 그녀의 애를 태울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접대를 담당한 문사가 황급히 달려와 또 다른 보고를 올렸다.
옥화무제를 귀빈용 숙소로 안내하려 하자, 그녀는 그것을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우연히 근처를 지나다 재미있는 소식 한두 가지를 알려 드릴 까 하고 들렀는데, 맹주님께서 바쁘신 듯하니 그냥 가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소식이라는 게 뭐지?”
보고를 들은 맹주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어떤 정보이기에 감히 옥화무제가 이렇게 뻔뻔스럽게 자신을 찾아올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말이다.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여 만날 것인가, 아니면 그냥 돌아가도록 방치할 것인가. 그녀에게 모멸감을 안겨 주려면 후자가 훨씬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정보를 들을 수 있는 기회 역시 놓치게 된다.
고심하던 맹주는 감찰부주를 불러 그녀의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상의했다.
“일단 만나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무리 꼴 보기 싫다 해도, 그분의 뒤에는 무영문이 있습니다. 무영문의 본거지를 파악하지 못한 이상, 그분을 홀대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도 그렇구먼. 봉공에게 이리 오라고 일러라.”
잠시 후, 맹주가 자신을 만나고자 한다는 기별을 받은 옥화무제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바쁘신데 제가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맹주님.”
“허허, 무슨 그런 말을. 노부가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봉공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없어도 만들어야지요.”
맹주는 옥화무제에게 자리를 권한 후,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종을 흔들어 시녀를 불러서는 다과를 내오라 일렀다. 향기로운 차를 마시며 옥화무제는 맹주에게 말했다.
“혹시 공공대사라는 분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그러자 감찰부주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지금에 이르러 공공대사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맹주나 감찰부주는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 던 인물이다. 세인들은 불계불황(不戒佛皇)이나 만사불황(萬邪佛皇)이라는 명호밖에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두 사람은 공공대사가 소림의 등불로서 추앙받았던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공공대사라는 명호는 무적(無敵)이라는 단어와 거의 같은 의미로 쓰였을 정도였다.
“불황(佛皇)의 근황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소?”
“역시 모르고 계신 모양이네요. 시간을 내 들린 보람이 있군요.”
옥화무제는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말을 이었다.
“공공대사가 정신을 차리셨어요. 더군다나 현경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도 있구요.”
“그, 그게 사실이오?”
그 정보가 진실이냐는 것을 묻는 맹주. 하지만 감찰부주는 인상을 찡그리더니 다소 초점이 어긋난 질문을 던졌다.
“그분이 정신을 차리신 게 언제입니까? 혹, 알고 계시다면 알려 주십시오.”
“그 일이 봉문 전에 벌어진 건지, 아니면 그 후에 벌어진 건지 그게 궁금한 건가요?”
“그렇습니다.”
“봉문 전에 벌어진 일이에요.”
감찰부주의 얼굴에 짙은 의심이 차올랐다.
“그렇다면 말이 좀 안 되는군요. 그게 사실이라면 소림은 봉문을 선언할 필요조차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아니, 소림의 봉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했던 게 바로 그라고 들었어요. 불법만을 세우면 되지, 허황되기 그지없는 명성에 집착하여 살생을 하는 게 더욱 치욕스런 일이라고 말이에요.”
그 말에 맹주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무림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이지 않소?”
“아뇨. 그건 맹주께서 하시기 나름이지요. 방장을 움직여 보세요. 소림의 법도상, 방장이 하고자 한다면 공공대사도 어쩔 수 없이 끌려올 수밖에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게 쉽겠소? 공공대사의 말에 의해 봉문까지 선택했다면서…….”
“지금 소림은 무승들의 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요. 지난날의 치욕을 설욕할 생각이 없다면 무승들을 다그칠 이유가 없지요.”
“허허, 참으로 놀라운 정보구려.”
정파 무림에 현경급 고수가 출현했다는 말에 맹주는 정신이 없었다. 그는 차를 음미하며, 이 정보가 가져올 맹 내의 변화에 대해 측근들과 상의해 보고 싶었다. 하
지만 옥화무제는 전혀 떠날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잠시 미소를 짓다가, 문득 생각이라도 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참,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더 알아낸 게 있는데…, 이건 좋은 소식이 아니라서 전해 드리기가 좀 그러네요.”
“기탄없이 말해 보구려. 새로운 정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니까.”
“교주가 주기로 했던 것 말이에요. 바로 그 비급들.
“그게 어쨌다는 말씀이시오?”
“비급들을 받아 내는 데 있어서 제가 많은 무리수를 뒀던 점 깊이 사과 드려요. 뭐, 결국은 하나도 건진 게 없지만..
안 좋은 소식이라는 말에 내심 긴장하고 있었던 맹주는 옥화무제가 정중히 사과를 해 오자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저었다.
“핫핫핫, 봉공의 사과는 받아들이겠소.”
“맹주의 너그러우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그래도 미련이 남아서 십만대산을 관찰하던 중에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지요.”
“그게 뭐요?”
“교주가 비급을 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이에요.”
“그게 사실이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흑살마왕만 처치해 버리면, 그에게는 더 이상 적이 없어요. 이제 곧 있으면 흑살마왕과의 대회전이 벌어질 거예요. 그런데 그 는 아직까지도 비급을 전해 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죠. 그렇다고 십만대산에서 비급을 실은 마차들이 출발한 것도 아니구요.”
옥화무제가 상큼한 미소를 짓는데 반해, 맹주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지고 있었다. 비급을 받아 낼 수 있다고 장로들에게 이미 공포했다. 당연히 장로들도 자신들 이 소속된 각 문파의 문주들에게 이미 그 보고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비급을 받지 못한다면 결국 맹주인 자신이 교주의 손바닥에서 놀아난 꼴이 되지 않겠는가.
“과연 일이 다 끝났는데도 교주가 비급을 챙겨 줄까요?”
“그 말 책임질 수 있소?”
“물론이에요. 곧 있으면 모든 게 밝혀질 일인데, 제가 맹주님께 거짓말을 해서 무슨 이익이 있다고 그러겠어요.”
“크흠…….”
“그리고 한 가지 더. 아마 교주는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무림일통(武林一統)을 시작할지도 몰라요.”
순간 맹주의 얼굴에 수심이 차올랐다.
“그, 그럴 리가……?”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지금 그에게는 흑살마왕이라는 관심을 끌 대상이 있잖아요. 만약 그가 없어지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전설에나 등 장하는 생사경을 뚫기 위해 또다시 기나긴 연공에 들어갈 거라고 생각하세요?”
옥화무제는 맹주와 감찰부주의 일그러진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 둘러본 다음 계속 말을 이었다.
“그는 이미 20년간 폐관수련을 했어요. 그동안 그는 깨달았겠죠. 더 이상 수련해 봤자 시간 낭비라는 것을 말이에요.”
“죄송합니다만, 그렇게 단정 짓는다는 것은 너무 성급한..”
감찰부주가 뭔가 반박을 하려 했지만 옥화무제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성급한 게 아니에요. 그는 20여 년간의 공백을 깨고 갑자기 튀어나왔어요. 그리고 시작한 게 바로 흑살마왕에 대한 복수였죠. 그에게 있어서 흑살마왕을 처치하 는 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이었을까요? 하지만 그는 수많은 무리수를 두고 있어요. 마치 자신의 능력을 시험이라도 하겠다는 듯 말이죠. 비급들의 사본을 제공하 겠다는 둥, 그리고 자신들이 모든 피를 뒤집어쓸 테니 무림맹은 그저 보고만 있어라 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옥화무제의 말에 맹주와 감찰부주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듣다 보니 그녀의 말이 꽤나 타당했던 것이다.
“이것 하나는 단언할 수 있어요. 만약 나에게 그토록 죽이고 싶은 원수가 있다면, 절대 20년씩이나 기다리고 있지 않을 거라는 것을 말이에요. 물론 능력이 모자라 서 그걸 갖추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다면 이런 생각까지는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는 20년 전부터 흑살마왕따위는 한 방에 처치해 버릴 만한 능력을 가지 고 있었죠. 오히려 20년씩이나 기다려 주는 바람에 흑살마왕이 다시금 재기하는 기회를 얻은 거잖아요. 안 그래요?”
“이제 흑살마왕을 없애고 난 후, 그는 어떻게 할까요? 십만대산으로 돌아가 얌전히 눈 구경이나 하면서 여생을 마치면 좋겠지만…, 그가 과연 그렇게 할까요? 없 는 적도 만들어서 없애는 사람인데 말이죠.”
“그래서 내린 결론이 바로 무림일통이라는 말이오?”
“뭐, 제 말을 믿지 않으셔도 뭐라 할 말은 없어요. 저는 그저 관찰자일 뿐, 무림사에 직접적으로 관여해 온 적은 없었으니까요. 그냥 옆에서 구경만 할 생각이에요. 무림의 위대한 절대자의 탄생을 말이죠.”
옥화무제의 말에 맹주는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허허, 이거 참. 무량수불…….”
* * *
“어서 오게, 군사.”
설민은 묵향에게 예를 올린 다음, 자리에 앉았다.
“본좌가 지시한 것에 대한 조사는 해 봤나?”
“예, 교주님.”
그는 지도에서 춘릉성(春陵城)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결전의 장소로서 속하가 추천 드리는 곳은 바로 이곳입니다.”
묵향은 지도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보기에도 그곳은 전투를 벌이기에 썩 좋은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춘릉성을 택한 이유를 들어 볼 수 있을까?”
“예. 춘릉성은 대별산맥 끝단에 위치해 있는 작은 성입니다. 전략적인…….?”
이때, 홍진 장로가 허겁지겁 달려 들어오며 외쳤다.
“교주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금나라에서 테무진에게로 황녀를 보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황녀를? 그놈 참 재주도 좋군.”
묵향은 피식 미소 지었다. 테무진 같은 인물을 매수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묵향은 생각했지만, 홍진 장로의 생각은 달랐다.
“웃으실 일이 아닙니다. 테무진 그 망할 놈이 황녀 외에도 막대한 재물까지 요구했다는 것을 보면 진심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금처럼 중요한 시국에 그놈이 손을 떼면, 장인걸의 세력이 훨씬 더 커질 것은 불 보듯 뻔하지 않습니까? 그 촌뜨기 놈이 누구 덕분에 그렇게 세력이 커졌는데, 이제는 제법 대가리가 컸다고 배신을 하 다니. 지금 당장 이팔삼 대장에게 기별을 보내 그놈을 없애 버리라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홍진 장로는 길길이 뛰고 있었지만, 묵향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용의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그런 하찮은 걸로 옭아맬 수는 없어.”
“하찮은 거라니요? 그놈이 해마다 받아 처먹기로 한 세폐(歲幣)만 해도 은자 10만 냥에 비단 30만 필이란 말입니다.”
묵향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아, 그 얘기는 그만하게. 나는 그놈을 믿어.”
“뒤통수를 얻어맞고 난 다음에는 너무 늦습니다, 교주님.”
홍진 장로의 어조는 급박했지만, 묵향은 마치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건 맞고 난 다음에 생각해 보기로 하세.”
묵향은 다시 설민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춘릉성의 전략적 가치가 어쨌다고?”
“예. 그곳은 전략적 요충지하고는 거리가 먼 곳에 자리 잡고 있기에 성곽의 높이도 그리 높지 않은데다, 장인걸이 대군을 움직이기에 용이한 평야 지대에 위치하 고 있어서 방어하기가 아주 힘든 곳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본진을 그쪽으로 옮겼다는 걸 알게 되면 틀림없이 곧바로 달려들 겁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린가 하고 조용히 듣고 있던 홍진 장로는 마지막 말에 겨우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춘릉성으로 거점을 옮기자는 말이 아닌가. 그 위험하기 짝이 없 는 곳으로 말이다. 순간 홍진 장로의 얼굴이 한층 더 시뻘게졌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홍진 장로는 매서운 눈초리로 설민을 노려보며 질책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망말인가! 춘릉성으로 옮기자니, 자네가 장인걸에게 뇌물을 받아먹지 않은 다음에야 어찌 그런 망령된 제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서슬이 시퍼런 어조로 뇌물 운운하자 안 그래도 심약한 설민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저, 저, 저는 결코…….?”
이때, 묵향이 손을 들며 단호한 어조로 끼어들었다.
“홍진 장로.”
“하명하십시오, 교주님. 저놈을 당장 끌어내다가 목을.
그러자 묵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게 아닐세. 그건 자네가 오해한 거야. 내가 군사에게 지시한 걸세. 장인걸과 결전을 벌이는 데 적합한 장소가 어딘가 하고 말이야. 군사가 제대로 된 장소를 찾 은 것 같군. 정보를 다루는 자네조차 기겁을 할 정도로 기가 막힌 장소를 말이지.”
설민은 두려운 듯 홍진 장로의 눈치를 살피며, 묵향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거, 겉으로 봤을 때는 이쪽에 유리한 점이 단 한 개도 없는 듯 보입니다만, 자세히 파고들면 꽤나 그럴듯한 이점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특히, 이곳에 있는 두 개의 강이 놓여 있는 위치가 너무나도 절묘합니다. 강폭도 그리 넓지 않고, 수심도 얕기에 장인걸 쪽에서 진격해 들어오는 데는 아무런 지장도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전 투에 패해서 추격을 당하는 상태로 건너기는 쉽지가 않지요. 제대로 걸리기만 하면 이 일대에서 그의 대군을 완전히 전멸시켜 버릴 수도 있을 겁니다.”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묵향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 자정쯤 춘릉성에 도착할 수 있도록 출발 시간을 조정하도록 해.”
“존명.”
옆에 서 있던 홍진이 한 마디를 참견했다.
“내일 아침이 되면 장인걸이 기절초풍하겠군요.”
“그게 바로 본좌가 원하는 거지. 놈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을걸? 달려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말일세.”
설민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결국은 걸려들 겁니다. 이런 기회는 몇 번씩 오는 게 아니거든요. 그리고 이쪽에서 방어진을 구축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더 빨리 달려들 겁니다. 방어선이 갖춰지기 전에 싸우려고 들 테니까요.”
“그래, 그 말이 맞아. 자네는 지금 당장 다른 장로들에게도 이 작전을 알려 준 뒤 실수가 없도록 하게.”
“존명.”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설민이 밖으로 달려 나가자, 묵향은 홍진 장로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테무진 쪽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야. 그러니 그런 곳에 신경 쓸 시간에 소연이가 감금되어 있을 만한 곳이나 좀 더 열심히 찾아봐.”
“수하들이 열심히 찾아다니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고정 첩자망이 없다 보니 입수할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혹시 무영문에서 뭔가 발견한 게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그쪽도 아직까지는 알아낸 게 없다고 하더군.”
“빨리 찾아내야 할 텐데, 큰일이군요.”
“어쨌건 분발해 주게. 그 녀석과 전면전에 들어가기 전에 그 아이를 구출하지 못한다면.
묵향은 목이 메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크흠! 어쨌건 본좌로서는 그 아이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으니 말일세. 자네만 믿겠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교주님.”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묵향의 말이 홍진 장로의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그가 소연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안다. 그런데 수하들을 위해 자신의 딸을 아낌없이 포기하겠다니.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겠는가. 홍진 장로는 그런 묵향을 향해 겨우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나 도 무능력하게 느껴졌다.
* * *
황하 하류 남쪽에는 중원 오악(五嶽) 중 하나인 태산이 하늘이라도 뚫을 듯 우뚝 솟아 있다. 태산은 도교의 위대한 성지들 중 하나로서, 명문 중의 하나인 태산파의 요람이다.
하지만 지금 태산에는 단 한 명의 도사도 찾아볼 수가 없다. 있다면 삼엄한 예기를 날리며 주위를 향해 감시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객(客)들뿐. 금나라 영토에 위치 한 대부분의 문파들이 그러하듯, 태산파 역시도 금나라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보금자리를 떠나 버린 것이다.
편복대주는 텅 비어있던 이곳 태산파의 본거지를 이용해서 강력하기 짝이 없는 함정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연경에서 사용되었던 화약의 양은 3만여 근(약 11톤)이나 됐고, 거기에다 1천5백여 개의 진천뢰까지 터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그 지옥에서 살아서 나왔다 고 한다. 그야말로 괴물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놈인 것이다.
새로운 함정을 구축함에 있어 전보다 많은 화약을 쓰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겠지만, 옥화무제는 그것보다 훨씬 더 확실한 방법이 있다며 장인걸에게 제안했다. 그 것은 바로 깊은 땅 속으로 그를 유인한 뒤 아예 매몰시켜 버리자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초고수라고 할지라도, 깊은 땅 속에서 살아서 기어 나올 수는 없을 게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엄청난 화약 폭발의 충격까지 입은 상태라면 더더 욱 불가능하리라.
편복대주는 지하 통로 곳곳에 매설되어 있는 방대한 양의 화약을 보며, 이 계책을 생각해 낸 옥화무제의 악독함에 내심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지독한 여자야. 얼마 전까지 한편이었던 사람을 죽이기 위해 이렇게 악독한 계책을 생각해 내다니…….?
옥화무제가 왜 그토록 악독해질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편복대주는 모르고 있었기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신이 아니, 무 영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묵향을 죽여 없애야만 했기 때문이다.
지하 통로 곳곳을 돌아다니며 점검을 하던 편복대주에게 공사 책임자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화약의 잔여분이 예정대로 도착해 주기만 한다면 3일 정도 공기를 앞당겨 작업을 끝마칠 수 있을 겁니다, 대주님.”
“오호,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대원수께서도 자네의 노고에 크게 만족하실 걸세.”
“속하가 해야 할 소임을 다했을 뿐입니다, 대주님.”
“3일이라…….”
이렇게 중얼거리던 편복대주는 갑자기 공사 책임자를 쏘아보며 단호히 말했다.
“빠른 건 좋지만, 부실 공사를 해서는 안 돼.”
그 말에 공사 책임자는 섭섭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거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대주님. 제가 책임지고 마지막 마무리까지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대주님께서도 저쪽에서부터 살펴보고 오셨지 않았습니 까? 지금까지 6만 관에 달하는 화약을 매설했습니다만, 작은 흔적조차 찾아내지 못하셨지 않습니까?”
“오해하지 말게. 자네를 질책하고자 한 말은 아니었다네. 지금까지처럼 끝마무리도 깨끗하게 해 달라는 뜻이었지.”
“염려 놓으십시오, 대주님.”
“이번 일만 잘 처리하면 내 자네를 연경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힘써 주겠네.”
“가, 감사합니다, 대주님.”
공사 책임자는 태산을 내려가는 편복대주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그쪽을 향해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황도에서 한 자리 차지할 수 있게 되다니, 그야말로 꿈에도 그리던 일이 아니겠는가. 가정생활은 물론이고, 일도 한결 수월해질 것이니 말이다.
* * *
흑풍대가 양양성에서 떠나 버린 것은 미리 무림맹과 협의한 사항이었지만, 그에 대해 전혀 언질조차 받지 못했던 유광세 상장군은 그야말로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교주의 지원을 믿고 일을 추진하고 있었던 그였던 만큼, 그 배신감은 더욱 컸다.
“이런 망할 놈! 그렇게 자신을 믿으라고 큰소리 쳐대더니, 정작 필요할 때가 되자 슬그머니 도망을 쳐?” 순우기 장군은 길길이 뛰고 있는 유광세 상장군을 다독였다.
“고정하십시오, 상장군.”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흑풍대가 떠난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는 관지를 찾아가 제발 떠나지 말라고 사정까지 했었다. 훈련교두 여문덕 상장군과의 대담이 잘 성사되어, 길일을 택해 군사 를 일으키는 일만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런 중차대한 시점에 중요 전력인 마교가 이탈해 버리다니.
물론, 일이 꼬이다 보면 거점을 옮길 수도 있다. 그런데 관지 장로의 말로는 황성을 치는 데 있어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건 유광세 상장군의 입장에서 는 통한의 일격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자신들이 황성으로 진격할 때 흑풍대가 선두에 서 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으니까.
순우기 장군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선택의 여지는 없어졌습니다. 그쪽이 배신한 것이건, 그렇지 않건, 황도를 향해 진격하는 것 외에 우리 쪽에는 그 어떤 선택도 불가능하니까요. 묵 대인이 배 신을 안 했다면 다행스런 일이겠지만, 만약 그가 배신을 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황성사의 고수들이 저희들을 추포하기 위해 달려올 게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군.”
“지금이라도 당장 군사를 일으키자고 여문덕 상장군께 기별을 넣어야…….?
이때, 짤막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두 번 났다.
똑똑똑, 똑똑.
문 앞에 세워 놓은 호위군관이 보내는 신호였다. 누군가가 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와 동시에 둘의 대화는 멈췄다.
잠시 후, 밖에서 호위군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각(張)장군께서 상장군을 뵙기를 청하고 계십니다.”
“드시라고 하게.”
곧이어 문이 열리며 무장(武將) 한 명이 들어와 절도 있는 동작으로 군례를 올렸다.
“상장군을 뵈오이다.”
“무슨 일인가?”
“수색대에 적의 대규모 이동이 포착되었습니다.”
그 말에 상장군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놈들이 지금 진격해 들어온다면, 황도로 진격한다는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는 게 아닌가.
“적들의 진격 속도는? 언제쯤 여기에 도착할 거라고 하던가?”
“예? 무슨 말씀이신지…….”
어리둥절한 장각 장군의 표정에, 상장군은 짜증스럽다는 듯 대꾸했다.
“놈들이 군사를 일으켰다면서? 그러니 언제쯤 여기에 도착할 건가 그걸 묻고 있는 게 아닌가?”
“그, 그런데 이상한 건 남하하고 있는 게 아니라 동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동진이라고?”
“예, 상장군.”
장각 장군은 노하구 쪽에서 시작해 오른쪽으로 쭉 손가락으로 그으며 말했다. “기마대를 앞세우고 이쪽 방향으로 대단히 빠른 속도로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순우기 장군의 안색이 환히 밝아졌다. 그는 상장군에게 급히 말했다.
“그쪽 방향으로 가면 춘릉성이 나옵니다. 놈들은 묵 대인께서 전진기지를 구축하고 계신 춘릉성을 공략하려고 하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 말에 상장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정황으로 보아, 묵 대인이 자신에게 통보한 게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 아닌가.
“이 기회를 노려 군사를 일으키는 게 좋겠습니다, 상장군.”
“그게 무슨 말인가?”
“금군의 주력 부대가 춘릉성으로 들어갔다면, 다시 이쪽으로 돌아서 나오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래도 겨우 그 정도 여유만으로 황도까지 진격한다는 것은..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적이 아무리 많은 병력을 동원했다고 해도 묵 대인의 세력을 단숨에 무너뜨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꽤나 오랜 시간에 걸쳐 대접전을 벌 이게 되겠지요. 군사를 빼려면 지금밖에는 여유가 없습니다. 묵 대인이 적의 대군을 격파해도 문제고, 또 적들이 묵 대인을 격파해도 문제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순우기 장군의 지적대로였다. 묵향이 적의 대군을 격파한다는 것은 곧 금나라의 몰락을 의미했다. 그렇게 되면 간신배 진회의 권력은 더욱 커질 게 아니겠는가. 그 리고 적이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간신배를 일소하고 내실을 다진다면, 재기의 기회를 노릴 수 있다. 비록 묵 대인의 전력은 전멸당하더라도, 양 양성에는 무림맹에서 보내 준 강인한 무사들이 득실거리고 있으니까.
“좋다. 지금 당장 출동 준비를 하라 일러라.”
“옛, 장군.”
* * *
장인걸이 테무진의 요구를 모두 다 들어 준 것은, 아래쪽이 정리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장인걸은 전혀 짐작조차 못했다. 테무진이 그런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한 게 바로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서 금나라를 침입하려는 계략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테무진은 이미 초봄에 몽고에서의 대회전을 통해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을 대부분 정리해 버린 후였다. 그가 그렇게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빨리 군대를 일으 킨 것은 아버지의 안다에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고 싶었던 때문이었다.
테무진이 금나라를 치기 위해 동원한 병력은 무려 20만 명이었다. 그는 자신의 동맹부족들에게 금나라를 치고자 하는 것은 금나라가 자신의 요청을 들어먹지 않 은 것에 대한 징계라고 주장했다.
이미 가짜 황녀까지 올려 보낸 금 황실로서는 억울해서 팔짝 뛸 일이었지만, 테무진의 동맹부족들은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가짜 황녀는 이미 이팔삼 대장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린 후였기에 그쪽에는 황녀 비슷하게 생긴 계집조차 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경선을 돌파하는 몽고 기마대의 선두에는 묵향이 파견해 놓은 이팔삼 대장이 이끄는 자성만마대 500명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족이라는 걸 숨기기 위해 완전히 몽고인들처럼 행동했다. 옷은 물론이고, 무장까지도 모두 다 몽고식으로… 은은한 마기가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게 조금 문제이기는 했지만, 상대적으로 무공의 수준이 낮은 그들이었기에 마기가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몽골족이 지닌 야만성과 광기라는 껍질에 둘러싸여 있었기에 그들이 지닌 마기가 그리 심 하게 표시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열의 선두에서 말을 타고 질주하는 이팔삼 대장 일행. 무공을 익히며 다져진 고도의 운동신경 덕분에 몽고인들이나 행할 수 있는 고난도의 기마술까지 몸에 익 힌 상태였다. 몽고인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질주하면, 웬만한 몽고인들조차도 그들이 한족이라는 것을 눈치채기 힘들 정도였다.
북부 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장졸들 또한 금나라의 정예군이었지만, 고도의 무공을 익힌 이팔삼 일행의 돌파력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이팔삼 일행은 안 그래도 뛰 어난 전력을 지니고 있던 테무진에게 날개를 달아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 * *
함정이 설치되고 있는 현장을 둘러보고 난 뒤 서둘러 돌아온 편복대주에게 기가 막힌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적들이 삽시간에 주둔지를 춘릉성으로 옮겼다는 것 이다.
“도대체 언제 옮긴 건가?”
“어제 자정쯤이었습니다.”
“이런 큰 일이 있었는데, 사전에 그 징후조차 포착하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나?”
“어쩔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짐이라고 해 봐야 별것도 없지 않습니까? 약간의 식량과 개인이 지니고 있는 병장기가 전부인데 말입니다. 짐을 챙 겨 들고 떠날 준비를 완료하는 게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고 합니다.”
“교주님께 보고는 올렸나?”
“예, 편복대주님. 그 때문에 지금 전 군에 출진 명령이 떨어져 있습니다.”
지도를 들여다보며 춘릉성 주변의 지형을 확인하는 편복대주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놈들이 자신들을 꾀기 위해 어딘가로 진지를 옮길 거라는 것은 옥화 무제의 제보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위치를 모르고 있었던 것일 뿐이다.
물론 옥화무제가 전해 주는 정보를 전부 곧이곧대로 다 믿을 수는 없었다. 어딘가 잘못된 부분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틀린 부분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옥화무제는 편복대주에게 정보를 넘겨주면서 그 정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많은 자료들까지 모두 다 건네 줬다. 그리고 그 자료들을 면밀히 검토해 본 결과, 그동안 편복대가 수집해 놓은 일련의 상황들과 이빨이 딱딱 맞아떨어지고 있었기에 거짓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장인걸에게 보고하기에 앞서, 자신이 없는 동안 올라온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던 편복대주는 문서들 중 하나를 손에 들며 수하에게 질문했다.
“황녀 구출은 어떻게 됐나?”
“옛, 무사히 양양성을 벗어났다는 보고가 접수되었습니다. 늦어도 3일 내로 이곳으로 모실 수 있을 겁니다.”
“정말로 황녀가 감시를 받고 있던가?”
편복대주의 물음에 수하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놀랍게도 대주님의 말씀대로였습니다. 놈들이 워낙 교묘하게 위장하고 있었기에 그분 주위에 밀정들이 꼬여 있다는 걸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다면 전혀 알아 채지 못했을 거라고 하더군요.”
수하의 얼굴에는 편복대주가 그런 정보를 도대체 어디서 입수했는지 궁금해 하는 표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는 그걸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괜한 호기심은 화를 부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뒤처리는 깨끗하게 했겠지?”
“물론입니다. 그동안 황녀와 접촉했던 모든 편복대원들을 전부 다른 대원으로 교체시켰으며, 대주님께서 지적하신 거점들도 깨끗하게 비웠습니다. 아마 두 번 다 시 놈들에게 꼬리를 잡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잘했군.”
편복대주는 보고서를 들고 밖으로 나가다가 갑자기 뒤로 돌아서며 수하에게 물었다.
“교주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
“출진에 앞서 장수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하고 계십니다.”
“나는 교주님께 갈 테니 긴급 상황이 벌어지면 그쪽으로 연락을 하도록 해라.”
“옛.”
과연 수하의 보고대로 장인걸은 고위급 장수들과 함께 출병에 대한 세부사항들을 논의하고 있었다. 수십만의 대군이 움직여야 하는 만큼, 지시하고 의논해야 할 사항들이 꽤나 많았던 것이다.
회의가 끝나자 장군들은 군례를 올린 다음, 각자 자신의 병영으로 돌아갔다. 기나긴 소강상태가 끝나고, 드디어 적진을 향해 진격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모든 장 군들의 눈에는 전쟁에 대한 살기로 번질거렸다.
편복대주는 장인걸에게로 다가가 예를 올렸다.
“먼 길에 수고가 많았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옵니다.”
“그래, 둥지 조성 작업은 잘되어 가고 있더냐?”
편복대주는 그 물음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장인걸의 뒤편에 서 있는 호위무사에게로 눈길을 던졌다. 그는 갑주로 완전무장한 다음, 안면
보호대까지 둘러 눈만 내놓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인간의 눈이 아닌 듯 싸늘한 것이 단 한 올의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걸 보면 실혼인(失魂人)인 듯 보이기 도 했다.
마교 패거리들과 남양에서 대규모로 충돌한 이후, 장인걸은 고수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에 한탄해야 했다. 그렇다고 새로 인원을 뽑아 무공을 가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마교의 무공이 속성을 자랑한다고 해도 최소한 10년 이상 고련(苦練)을 해야 웬만큼 써먹을 정도의 수준이 되는 것이다.
키우는 게 불가능하다면, 남은 수단은 외부의 고수를 영입하거나 회유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장인걸에게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막강한 술법이 있지 않던가. 바로 마령섭혼심법 말이다. 장인걸은 그 심법을 이용해서 북부 무림을 평정하며 잡아들인 꽤 많은 숫자의 무림인들을 몽땅 다 세뇌하여 자신의 세력으로 흡수했다. 장인걸 혼자였다면 그들의 세뇌 작업은 불가능했겠지만, 그에게는 마공을 정점까지 익힌 천마혈검대가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마령섭혼심법을 전수했고, 천마혈 검대를 이용해서 무림인들의 세뇌 작업을 완수했던 것이다.
장인걸은 실혼인들을 최후의 패(牌)로 써먹기 위해 그 존재 자체를 철저히 숨기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만큼 실혼인을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다가 배치해 놨을 리 없지 않겠는가.
그럼 장인걸이 손수 키운 고수들 중 하나라는 말인데…, 편복대주는 지금껏 이렇게 차가운 눈빛을 지닌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장인걸은 편복대주의 시선을 따라 뒤를 쓱 돌아본 다음, 다시금 편복대주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보겠구먼.”
“예, 교주님.”
“내 소개하지. 이번에 본좌의 휘하로 새로 들어온 만수라고 한다네.”
만수라는 말에 편복대주는 기겁했다.
“예에?”
장인걸은 낮은 어조로 명령했다.
“안면보호대를 벗거라.”
갑주를 입은 냉막한 표정의 무장이 안면보호대를 벗자, 그 안에서 만수진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편복대주는 장인걸에 대한 경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도력이 높은 전대고수까지도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편복대주는 이런 사람을 자신의 상관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에 내심 희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겨, 경하드리옵니다, 교주님.”
“경하는 무슨……. 이런 기가 막힌 녀석을 본좌에게 선물한 맹주에게 감사해야지. 그건 그렇고, 방금 전 본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편복대주는 고개를 더 한층 깊숙이 조아리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교주님. 작업이 대단히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예정보다 2~3일 앞서 완공할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잘됐군. 예정대로 그녀에게 기별을 넣도록 해라. 놈을 끌어들이라고 말이다.”
장인걸의 명령에 편복대주는 포권하며 대답했다.
“존명. 둥지가 완성되었으니 꾀꼬리를 끌어들이라는 전문을 즉시 발송하도록 하겠사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장인걸은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그런데 말이야, 아무리 암호라고 하지만 꾀꼬리라고 하니까 소름이 끼치는군. 놈을 칭하기에는 너무 앙증맞은 것 같지 않느냐? 차라리 쥐덫과 쥐새끼라고 하는 게 적당하겠지.”
편복대주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어쩔 수 없사옵니다. 그 암호명을 정한 게 저쪽인지라…….
대화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편복대주는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다. 전서구를 날리기 위해 달려 나갔어야 정상이었다. 뭔가 망설이는 듯하며 가만히 서 있는 편복 대주의 표정을 살펴보던 장인걸이 문득 입을 열었다.
“본좌에게 말하고 싶은 게 있느냐?”
편복대주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수상쩍다는 기분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말이옵니다.”
“뭐가 그렇더냐?”
“그분의 제안이 너무 달콤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지요. 일전에 맹주의 경우도 그랬지 않사옵니까? 근사하게 뭔가를 주는 듯했지만 결국에는 이쪽의 뒤통수를 치려는 흉계였지 않사옵니까? 놈들의 농간에 속아 하마터면 함정에 빠질 뻔했던 걸 생각하면..
“본좌도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이번에는 좀 더 조심하고 있는 중이지. 하지만 아직까지 그녀에 대한 그 어떤 혐의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네가 직접 조사해 봤으 니 잘 알 것이 아니냐? 그녀가 넘겨준 정보들 중에서 엉터리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장인걸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만수진인을 바라봤다. 마령섭혼심법에 심지를 제압당한 그의 얼굴은 너무나도 무표정하여 전혀 사람 같지가 않았다. 일정한 간격으 로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면, 조각상을 세워 놓은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만수진인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작업은 편복대주가 없을 때 진행됐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지독한 고문을 몇날 며칠 동안 계속 가해 그의 정신을 밑바닥부터 천 천히 파괴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장인걸이 직접 마령섭혼심법을 시전해 그의 심지를 제압했다. 그런 다음 만수진인을 통해 묵가 놈과 맹주 사이에 뭔가 비밀 스런 뒷공작이 오고 갔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옥화무제가 제공한 정보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아직까지는 발견하지 못했사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조심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사옵니다.”
“그게 뭐냐?”
“보관해 두고 있던 쥐약이 있지 않사옵니까. 혹, 그녀가 우리 쪽에 접근하는 이유가 바로 그걸 탈취하려는 것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쥐약이라는 건 소연을 비롯한 인질들을 말하는 것이다. 장인걸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흠,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아니,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겠지.”
이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음모와 귀계가 난무하는 현 상황에서 옥화무제를 전적으로 믿는다는 건 사실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교활하기로는 중원에서 첫손가락에 꼽힌다는 그녀가 나중에 안 줄지도 모를 무공비급을 위해 저렇게 전력투구하다니……. 그야말로 삼척동자라도 믿기 힘든 일이 아니겠는가.
“묵 부교주 입장에서 봤을 때, 그는 모든 걸 희생해서라도 인질을 구출하기를 원할 것이옵니다. 사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인질을 구출할 수만 있다면, 그 뒤로 행할 작전은 모두 취소해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장인걸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흠, 그럴듯하군. 현 시점에서 놈이 잃는 거라고 해 봐야 여기 있는 만수진인 한 명이 아닌가. 더군다나 그는 놈의 부하도 아니니, 잃어 봤자 아쉬울 것이 전혀 없겠 지.”
심각한 표정으로 한동안 고심하던 장인걸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인질에 관련된 그 어떤 정보도 저쪽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해라. 그리고 당장 인질들을 지금 있는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존명.”
“그리고 그녀에게는 쥐약을 둥지 속에 넣어 둘 거라고 알려 주도록.”
“둥지 속에 말이옵니까? 그녀가 그걸 믿을지 모르겠사옵니다. 부교주를 제어할 수 있는 최후의 패인데..
장인걸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안 믿는다고 해도 상관없지. 만약 이게 묵가 놈과 그년이 짜고 행하는 것이라면 놈은 걸려들 수밖에 없을 게다. 그렇지 않느냐?”
“존명. 즉시 시행하도록 하겠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