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6권 8화 – 묵향을 사랑하는 여인들
묵향을 사랑하는 여인들
무영문 총단에 옥화무제에게 보내는 전문이 하나 도착했다. 그 전문에는 옥화무제만이 봉인을 해제할 수 있다는 특별한 문양의 담겨 있었다. 편복대주가 옥화무제 가 알려 준 방법을 통해 연락을 넣은 게 돌고 돌아서 지금 그녀 앞에 도착한 것이다.
옥화무제가 직접 봉인을 열고 안에 들어 있는 전서를 꺼내보니, 그 안에는 단 한 줄의 글만이 적혀 있었다.
「둥지가 완성되었으니 꾀꼬리를 끌어들여도 됨.」
그리고 전서 밑에는 태산파 문도들이 평소 자신들의 도복에 즐겨 수놓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즉, 둥지가 있는 위치가 바로 태산파라는 뜻이었다.
그 전문을 입수함과 동시에 옥화무제는 태산파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명령했다. 태산파에 대한 정보를 장인걸에게 직접 넘겨받으면 될 텐데도, 이렇게 일을 복잡 하게 처리하는 것은 이쪽이 훨씬 더 기밀 유지에 편리했기 때문이다. 무영문에서 각 문파에 수많은 첩자들을 심어 놨듯, 다른 문파에서 무영문에 첩자를 심어 놓았 을 위험도 있었기 때문이다.
자료가 어느 정도 모이자 옥화무제는 그것을 매영인에게 건네주며 묵향을 찾아가 보고할 것을 명령했다. 지금 묵향의 주력부대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은 춘릉이라는 작은 성이다. 그곳으로 가려면 대별산맥이 가로막고 있기에 양양성을 돌아서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금 아래쪽으로 내려와야만 했다.
매영인은 춘릉성으로 가는 도중에 지평선 끝까지 이어져 있는 금나라 대군(大軍)의 행렬을 볼 수 있었다. 묵향이 공격하기 용이한 곳에 자리 잡자, 그 기회를 놓치 지 않고 장인걸이 병력을 일으킨 것이다. 아마 며칠 지나지 않아 춘릉성을 겹겹이 에워쌀 것임에 틀림없었다.
매영인과 그녀를 수행하는 호위무사들이 춘릉성 인근에 도착했을 때, 여기저기서 집단을 이뤄 대기하고 있는 무수한 인마(人馬)들을 볼 수 있었다. 모두들 시커먼 갑주로 중무장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매영인은 그들의 정체를 금방 알 수 있었다.
“이들이 바로 흑풍대로구나.’
보고서를 통해 흑풍대에 대해서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일견 무질서하게 엉켜 있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들의 눈빛만 봐도 숱 한 전장을 거쳐 온 최고의 정예들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성문 쪽으로 좀 더 이동해 들어가자, 매영인은 그들이 왜 성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좁은 성문 앞은 수많은 우마 차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쇠뇌나 투석기 같은 보기 드문 무기들까지 섞여 있었다. 아마 밖에 서 있던 무사들은 이 치중대(輜重隊)가 성내에 수납 될 때까지 현 위치에서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모양이다.
매영인은 성문을 지키고 서 있는 무사에게 통보했다.
“무영문에서 매영인이 왔다고 교주님께 전해 주세요.”
마교 쪽에서 지급한 신분증명패를 제시하기도 했지만, 성문에 서 있던 무사들의 대장이 매영인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신분 검사의 다른 과정은 생략한 채, 바로 교 주에게로 그녀를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매영인은 안내하는 무사를 따라가면서 성안의 풍경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기저기에 서 있는 험상궂은 무사들. 그들의 몸에서는 짙은 마기가 뿜어져 나오 고 있었다. 그리고 성의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그 마기는 더욱 짙어졌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정예무사들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매영인은 그들의 복색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대부분이 검은색이나 회색, 혹은 녹회색 계열의 옷들을 입고 있어, 옷차림만으로는 소속을 구분하기 힘들었 다. 하지만 매영인은 그들의 무기에 매여 있는 수실의 색깔이 바로 그들의 소속을 나타낸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자색(紫色)과 황색(黃色)의 수실은 자성만마대와 염왕대원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들어오는 길에 본 흑풍대 무사들의 병장기에 매어져 있던 수실의 색이 검은 것을 보면, 아마 그들은 흑색을 배정받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중심부로 들어가니 수실의 색은 회색(灰色)과 적혈색(赤血色)으로 변했다. 그러면서 마기의 기운은 더욱 무시무시해졌다.
무사는 그녀를 관청으로 안내했다. 하지만 말이 관청이지 그녀가 이곳까지 오면서 관원은 물론이고 병사 한 명 구경하지 못했다. 마교도들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모두들 꽁지가 빠져라 도망쳐 버린 듯했다.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마기와 살기를 보고, 아마 귀신을 봤다고 생각했으리라.
“여기서 잠시 기다리십시오.”
그곳에 서서 그녀는 주위를 빙 둘러봤다. 이곳 관청 앞에 서 있는 무사들의 수실 색은 밝은 진홍색(眞紅色)이었다. 그들의 소속이 어딘지는 몰라도, 새로 발견한 색 깔들에 대한 정보를 추밀단주에게 알려 주면 그는 꽤나 기뻐하리라.
이때, 그녀의 귀로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듯한 노성이 들려왔다.
“그래서 놓쳤단 말이냐?”
잠시 조용하더니 다시 한 번 창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잘 감시하고 있으라고 했잖아. 이런 빌어먹을!”
묵향의 목소리였다. 꽤나 먼 곳에 있는 것 같았는데, 그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까지 들려왔을 정도로 그는 괴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매영인의 안색이 조금 창백해졌다. 시간을 잘못 맞춰 온 것이다. 전에 왔을 때는 교주의 기분이 꽤나 좋은 것 같아서 안 좋았던 일도 잘 넘어 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꼭지가 열려 버릴 정도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라 있는 게 확연히 느껴질 정도가 아닌가.
바로 도망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계속 기다릴 것인가 그녀는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괜히 저기압 상태인 교주와 만나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까. 이때, 실내로 들어갔던 그 무사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게 보였다. 무사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매영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교주님께서 지금 아주 바쁘신 것 같은데, 제가 나중에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세요.”
“아닙니다. 당장 안으로 모시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매영인의 안색이 조금 더 창백해졌다. 하지만 들어오라고 하는데,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무사를 따라 실내로 들어갔다.
그녀가 실내로 들어갔을 때, 안쪽에서 걸어 나오는 한 사내와 마주쳤다. 지금껏 본 그 어떤 흑풍대원보다도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사내. 그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 다 들려오는 박차(車)의 묘한 울림과 함께 묵직한 힘이 느껴졌다.
매영인은 정보를 통해 흑풍대의 대주가 관지 장로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초상화에 비해 훨씬 더 남자다워 보였다. 그리고 그림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야 성미까지 물씬 느껴졌다.
관지 장로의 안색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마도 방금 전 묵향에게 질책을 당한 사람이 바로 관지 장로였던 모양이다. 도대체 그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 에?
그녀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느 샌가 그녀는 묵향의 집무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무사가 묵향에게 자신이 왔다는 걸 고하는 목소리에, 그녀는 숨을 훅 들이마시며 마음을 다잡았다. 자기가 잘못한 건 없었지만 겁이 났던 것이다. 그만큼 교주는 무서운 사내였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묵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건 분명 그녀로서는 의외의 환대였다.
“어서 와. 먼 길을 오느라 힘들었겠군.”
매영인은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부터 했다.
“괜히 기분이 안 좋으실 때 찾아뵌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혹,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시다면 무리하실 필요는 없어요. 내일 다시 올 게요.”
“나를 부하가 잘못한 일을 가지고 그대에게 신경질을 부릴 사람으로 생각했나? 본좌는 그렇게 아둔한 사람이 아니야. 자, 앉지.”
매영인의 짐작과는 달리 묵향의 기분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듯 보였다. 억지로 지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미소까지 짓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요 근래에 자주 보는군.”
묵향의 말에 매영인은 쑥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할머니의 몸이 아직 완쾌된 게 아니다 보니, 장거리 여행은 무리라서 말이지요. 대신 제가 당분간 교주님과의 연락을 담당하게 되었답니다.”
“빨리 완쾌되어야 할 텐데, 큰일이로군.”
“깊은 관심, 할머니를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건강이 점차 좋아지고 계시다고 의원이 그랬으니, 조만간 일어나실 수 있을 거예요.”
“그거 다행이군.”
이때 수하들이 가져온 다과가 도착했기에, 그들은 그것을 먹고 마시며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요 근래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특히 금나라의 새로운 황제에 대한 얘기가 주를 이뤘다. 꽤나 깊이 있는 정보이기는 했지만, 묵향에게는 별 쓸모가 없었다. 그가 싸울 대상은 황제가 아니라 장인걸이었으니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매영인은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자기가 가지고 온 가장 중요한 정보를 꺼냈다.
“실은, 한 가지 알려 드릴 일이 있어서 왔어요.”
“무슨 일인데?”
“소연 소저 말이에요.”
순간 묵향의 표정이 눈에 띄게 딱딱해졌다.
“그 아이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나?”
“예.”
과연 무영문의 정보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마대원들이 총력을 다해서 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디에 있는데?”
“태산파요.”
그 대답은 확실히 의외였던 모양이었다.
“태산파라고? 그게 사실인가?”
“현재 소연 소저가 수감되어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은 태산파에요. 처음에는 흑살마왕의 본거지인 노하구 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그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가 없었죠. 그러던 와중에 우연히 태산파에서 흑살마왕의 부하들이 뭔가 일을 벌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 거예요.”
묵향은 짜증스런 어조로 투덜거렸다.
“뭐를 해? 본좌는 말을 빙빙 돌리는 걸 아주 싫어하지. 핵심만 말하라고.”
찔끔한 매영인은 좀 더 빠른 속도로 말했다.
“기관진식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장비들을 그곳으로 옮기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곳으로 첩보조를 급파했지요.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어요. 태산파를 경비하고 있는 무사들 중에서 흑살마왕의 최정예인 천마혈검대원을 5명씩이나 찾아냈을 정도로 말이에요.”
장인걸에게는 1류급을 상회하는 고수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런 중요한 시점에 그토록 강력한 전력을 저 먼 태산까지 이동시킨 걸 보면, 그곳에 아주 중요한 뭔가가 있음에 틀림없다고 봐야 했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지켜야만 할 정도로 그렇게 중요한 뭔가가.
묵향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 정도 인물들이 지키고 있으니, 그곳에 소연이가 있을 게 틀림없다고 추측한 모양이군.”
“그렇게 간단하게 결론을 내린 건 아니에요. 이걸 한 번 보세요.”
매영인이 품속에서 꺼낸 것은 태산파에 설치되어 있는 각종 기관진식에 대한 설치도면이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무영문이 입수한 정보의 정수임에도 불구하고 군 데군데 많은 공백들이 눈에 띄었다. 특히나 태산파 최고의 중지라는 파천지관(破天之館)으로 들어가는 통로는 하얀 백지 상태였다.
“추밀단에서는 그들이 소연 소저를 이곳에 가둬 뒀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어요.”
매영인의 하얀 손가락이 도면 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문짝 하나만이 덩그러니 그려져 있을 뿐, 그 안쪽에 뭐가 있는지 아무것도 표시되어 있지 않았 다. 그야말로 새하얀 공백.
“파천지관? 여기는 뭐야? 감옥이라고 하기에는 명칭이 너무 거창한데……?”
“최상층부 고수들만 입관을 허락받을 수 있었던 연공실이에요.”
“연공실이라고?”
“예. 외부 침입자에 대한 철저한 방어망을 자랑하죠. 본문에서도 오랜 세월이 안쪽의 사정을 정탐했지만, 단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어요. 그야말로 용담호 혈(龍潭虎穴)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문파의 최고수가 폐관수련 하는 걸 지켜내지 못한다면 그 문파는 곧이어 망할 게 뻔하니까.
잠시 궁리하던 묵향이 입을 열었다.
“태산파 도사들 중에서 남쪽으로 피난 온 사람들도 꽤 있을 텐데?”
질문의 의도를 알고 있는 매영인은 동의를 표했다. 무영문에서는 이미 그 방면으로도 조사를 해 봤으니까.
“물론 있죠. 저희 문파에서도 그들과 접촉해 내부 사정을 알아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어요. 사정은 이해하지만 문규(門規)를 어길 수는 없다며 완강히 거부하 더군요.”
“이런 망할 말코새끼들!”
묵향은 밖을 향해 외쳤다.
“누가 가서 홍진 장로를 불러와!”
얼마 지나지 않아 홍진 장로가 달려왔다.
“찾으셨습니까? 교주님.”
홍진 장로는 마교의 정보를 총괄하는 인물이다. 무영문에서조차 그의 인상착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신비스런 인물. 매영인은 그의 모습을 기억 속에 각인시 키기 위해 얼굴의 작은 특징까지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자세히 관찰했다.
매영인이 홍진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든 말든 묵향은 그에게 명령을 내렸다.
“자네는 지금 당장 태산파 말코들 좀 잡아오도록 해.”
“예?”
“그러시면 안 됩니다, 교주님.”
뜬금없는 명령에 얼빠진 표정의 홍진 장로와 즉각 이를 말리려는 매영인. 하지만 묵향의 태도는 단호했다.
“최소한 장로급은 돼야 해. 이걸 봐.”
묵향은 파천지관이 그려져 있는 도면을 보여 주며 말했다.
“여기는 태산파의 최고급 연공실이다. 이 안에 소연이가 구금되어 있을…
“당장 알아내도록 하겠습니다!”
묵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홍진 장로는 그렇게 외치더니 허겁지겁 밖으로 달려 나가 버렸다. 교주가 태산파 말코를 필요로 하는 이유를 안 이상 지체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묵향은 조금 느긋해진 표정으로 매영인에게 말했다.
“며칠만 기다리면 내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거야.”
매영인이 옆에서 보니 태산파의 원로를 잡아다가 주리라도 틀 기세였다. 아니, 그렇게 하고 말 것이 분명했다. 그로 인해 무림맹과 어떤 갈등이 벌어질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이다. 이런 때는 말려야 하지만, 말로 해서는 통할 상대가 아니니 그게 더욱 난감했다. 하지만 매영인은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주 믿음직해 보이시네요.”
“그럼. 아주 능력 있는 친구지.”
“하지만 그렇게 해서 내부 도면을 알아내신다고 해도 크게 도움은 되지 않을 거예요.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태산파로 수송되는 방대한 물량 때문에 단서를 잡을 수 있었다고 말이에요. 초소형 쇠뇌 등 각종 정밀 제작된 암기들이 보내지는 걸 보면 그곳에 설치된 기관진식을 더욱 강화하려는 게 틀림없어요. 외곽을 지키 는 많은 고수들에다가, 강화한 기관진식. 그런 사지를 뚫고 들어가 소연 소저를 구출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렇게 말하는 매영인의 목소리에는 묵향에 대한 진정이 담겨 있었다. 그걸 느낀 묵향은 그녀의 조언을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물론, 그녀의 말에 따를 생각은 전 혀 없었지만 말이다.
“그 조언은 명심해 두도록 하지.”
임무를 완수한 매영인이 떠나겠다고 하자, 묵향은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사실, 지금껏 누군가를 배웅해 본 적이 없는 그였으니 그 행동이 조금은 어색했다.
“어쨌건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와 줘서 고맙군. 옥화무제에도 고맙다고 전해 줘.”
“예.”
지나가던 도중에 그들은 말들과 뒤엉켜서 짐을 정리하고 있는 흑풍대 무사들과 만났다. 얼마 전, 성문 밖에서 만났을 때와는 달리 모두들 전포(戰袍)만을 걸친 홀 가분한 옷차림이었다. 투구의 안구 사이로 번쩍이는 눈만이 보일 때는 너무나도 사나워 보였는데, 지금 보니 옆집 아저씨처럼 친근한 인상들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자신의 말을 돌보는 사람도 있었다. 혹은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는지 어딘가로 급히 걸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저마다 바쁜 모습들이기는 했지만, 그중 누군가는 묵향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터였다. 그때는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매영인으로서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들 일 제히 부복하며 교주님 만세!’라고 외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우연히 묵향의 모습을 발견한 자들이 군례를 올렸지만, 곧이어 자신의 할 일을 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매영인에게는 아주 색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지금껏 상상해 왔던 상명하복적인 마교의 분위기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묘하게 일그러졌다. 한쪽에 서 있는 흑풍대 무사들 중에서 눈탱이에 시퍼런 멍이 든 사람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주위에 있 는 무사들 중 상당수가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있었다. 몇몇은 절뚝거리며 걸어 다닐 정도였다.
사나운 눈빛을 뿜어내는 그들의 강맹하기 이를 데 없던 모습과 영락없는 패잔병과도 같은 모습이 교차되며 하마터면 웃음이 새나올 뻔했다. 하지만 이들이 왜 이 런 꼴을 하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그녀였기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애써 웃음을 참았다.
흑풍대가 양양성을 떠난 표면적인 이유는 곤륜파와의 갈등이었다. 곤륜파 문도들과 대규모 난투극을 벌인 다음, 그걸 빌미로 양측의 수뇌부들까지 나서서 공개적 으로 상대편을 비난하며 설전을 벌였다. 결국 흑풍대의 수장 관지 장로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사태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묵인하고 있던 곤륜파의 장로들에게 욕 설까지 퍼부은 다음, 이곳 춘릉성으로 거점을 옮겨 온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사전에 쌍방이 합의한 연극이었다. 이렇게 해야 장인걸이 이곳 춘릉성으로 흑풍대가 옮겨온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격투에 가담 한 양쪽 하급무사들은 그렇지 못했다. 기왕에 싸우는 것, 승리해야 할 게 아니겠는가. 양쪽은 사망자가 나오기 직전까지 박터지게 싸웠던 것이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연인을 배웅하듯, 그렇게 기분 좋은 얼굴로 매영인을 배웅한 묵향은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집무실로 들어서는 그의 얼굴에 피어 있던 미소는 언제인지 모르지만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아주 힘든 일이라도 치른 듯 피곤한 표정으로 자리에 털썩 주 저앉으며 밖에 대고 외쳤다.
“술 좀 가져와!”
“옛.”
“젠장, 이 짓도 힘들어서 못해 먹겠군. 왜 이렇게 자주 오는 거야? 아니면 아예 한방에 끝내 버리게 할망구가 직접 찾아오던지…….”
낮은 목소리로 궁시렁 투덜거리던 묵향은 마치 옆에 누군가가 서 있기라도 하듯 질문을 던졌다.
“자네가 우려한 대로던가?”
묵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후다닥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설민이 허겁지겁 달려 들어왔다. 그는 방금 전까지 묵향의 옆방에 자리 잡고, 교묘한 각도로 뚫린 구멍을 통해서 매영인을 관찰하고 있었다.
설민은 이번에도 옥화무제가 오지 않고 매영인이 온 것을 보자 혹시 저쪽에서 묵향의 무영문 말살계획을 눈치 챈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감을 표시했다. 그 말에 묵향 은 설민에게 옆방에서 그녀를 관찰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아무래도 여자의 표정을 관찰함에 있어서 자기보다는 가정을 꾸리고 있는 설민이 월등하게 나을 거 라는 가정 하에.
설민은 묵향과 대화를 나누는 매영인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세밀히 관찰했다. 그리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예상과 달리 그녀가 묵향을 아주 존경하고 있다는걸.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겉으로는 정파니 사파니 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약육강식인 세계를 구축할 수밖에 없는 게 무림이라는 곳이 다. 그 세계에서 최강의 고수와 면담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묵향이 평소와 달리 얼마나 친절하게 그녀에게 대해 주고 있는가. 그녀로서는 이게 꿈인가 싶을 것이다. 마치 소녀가 자기가 좋아하는 경극배우와 만남 의 시간을 즐기듯……..
“부문주는 교주님을 아주 좋아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 표정 하나하나에 흠모의 정이 담뿍 배여 있더군요. 속하가 너무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설민의 말에 묵향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그것 봐, 내가 뭐랬어? 간단하게 속일 수 있을 거라고 했잖아.”
이때 수하 한 명이 술과 간단한 안주를 가져왔기에, 묵향은 그것을 받아 술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자네도 한잔 할 텐가?”
그 말에 설민의 안색이 약간 창백해졌다. 그는 아는 것이다. 저 술병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말이다. 저걸 마시면 아마 며칠 동안 자신은 일어서지도 못하리라.
“감히 속하가 어찌 교주님과 대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괜찮아. 나는 그런 거 안 따지는 사람이거든.”
“속하가 불편해서 그렇습니다. 더군다나 해야 할 일도 많고 말입니다.”
“그래? 이 좋은 걸 안 마시겠다니…….?
짐짓 불쾌하다는 듯 투덜거리며 묵향은 거친 동작으로 술잔을 입 속에 털어 넣었다.
“크…, 좋군.”
묵향은 얼굴 여기저기를 문지르며 또다시 투덜거렸다.
“안 하던 짓을 하려니 얼굴 근육이 다 땡기는군.”
아마도 매영인을 상대할 때 줄곧 미소 짓고 있었던 걸 말하는 모양이다. 너스레를 떨던 묵향은 갑자기 설민을 향해 매서운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그곳에 내 딸이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나?”
묵향이 하는 행동을 내심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설민이었다. 그런데 묵향이 갑자기 정색을 하며 질문을 던지자 자신의 속마음이 들켰을 새라, 황급히 고 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할이 넘을 걸로 짐작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묵향은 좀이 쑤시는 모양이지만, 설민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서둘러 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습니다.”
“뭔가 좋은 생각이 있는 모양이군.”
“예. 현재 장인걸은 심각한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병사들은 넘치지만, 정작 필요한 고수들의 숫자는 턱도 없이 모자라죠.”
“그건 본좌도 알고 있어.”
“현 상황만으로도 구출작전은 엄두도 내기 힘든데, 그곳의 기관진식을 장인걸이 더욱 강화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설민의 지적에 묵향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답했다.
“글쎄. 그것만 가지고는 안심이 안 돼는 모양이지.”
“그게 아니라 그곳에 배치해 둔 고수들을 철수시키려는 것입니다. 안 그래도 고수가 모자라는데, 그런 곳에 언제까지 천마혈검대와 같은 고수들을 놔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흠, 그러니 그때가 소연이를 탈출시킬 수 있는 적기다, 이거로군.”
“예, 교주님.”
하지만 설민은 이때 한 가지 사실을 숨겼다. 장인걸이 저 먼 태산파에다 소연을 감금한 이유가 뻔했기 때문이다. 왕복 2천5백 리가 넘는 거리였다. 그 엄청난 거리 자체가 또 하나의 함정이었다. 저렇게 방어력이 뛰어난 곳에서 소연을 구출하려면 적지 않은 전력을 쏟아 부어야 할 건 당연한 사실. 이쪽의 전력이 분산되는 그 순 간, 그걸 노리고 있던 장인걸은 곧바로 달려들 것이다. 그렇게 하려고 일부러 멀리 떨어진 곳에다 소연을 감금해 놓은 거라고 설민은 판단했다.
“좋아. 일단 태산파 내부의 자료를 좀 더 모은 다음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세.”
“예.”
대화가 모두 끝나자 예를 올리고 밖으로 나가려는 설민을 묵향이 급히 불러 세웠다.
“더 하명하실 게 있으십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년을 찾아내도록 해. 홧김에 관지에게 잡아오라고 고함을 지르기는 했지만, 그가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비마대를 투입하면 곧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겁니다.”
묵향은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는 듯 탁자를 쾅 치며 외쳤다.
“썩을! 그때 그냥 목을 비틀어 버렸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장인걸을 속여 넘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젠장. 그걸 아니까 더욱 화가 나는 거라구.”
매영인이 돌아가고 난 그날 밤, 묵향은 착잡한 심정을 달래려 연신 술잔을 들이켰다. 장인걸에게 납치된 소연에 대한 미안한 감정 때문이었다. 자신의 능력이 이렇 게 보잘 것 없게 느껴진 것도 처음이었다. 지금 같을 때, 아르티어스가 옆에 있었다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될 것인가.
“아버지는 꼭 필요할 때는 없단 말이야. 도대체 어디에 간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다 보니 더욱 울적해졌다. 이럴 때 누군가가 자신의 곁에 있어 줬으면 했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르티어스도 만통음제도……. 그들로부터 위로를 받자는 게 아니라 그저 술잔이나마 같이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울적한 마음이 가시지는 않겠지만.
매영인이 준 자료를 아무리 검토해 봐도 태산의 경비 태세는 너무나도 튼튼했다. 소연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그곳으로 달려가는 것 외에 그 어떤 방법 도 소용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도저히 몸을 뺄 수가 없었다. 만약 자신이 이곳에 없다는 걸 장인걸이 눈치 챈다면, 그는 과감히 춘릉성을 공격할 게 뻔하니까.
묵향이 씁쓸한 표정으로 천일취를 마시고 있을 때, 가벼운 기척이 그의 기감에 잡혔다. 그와 동시에 묵향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의 문 앞에 살 며시 다가와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 눈치 챘기 때문이다.
똑똑똑!
가벼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문이 살짝 열리더니, 문틈으로 마화의 얼굴만이 빼꼼이 들어왔다. 그녀는 쑥스러운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왜 혼자 술을 마셔요? 같이 대작해 드릴까요?”
“하하, 그거 좋지. 어서 들어와. 문 앞에서 그러고 있지 말고.”
묵향이 들어오라고 허락했음에도 마화는 얼굴만 붉힌 채 주저하고 있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 슬그머니 방 안으로 들어오는 마화를 본 묵향의 두 눈이 일순 휘둥 그레졌다. 마화의 옷차림이 평소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치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 듯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부드러운 천이 그녀의 몸에 착착 감기는 것은 물론이고, 속에 입은 옷까지 은근히 비칠 정도로 얇았다.
“추운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마화 정도의 고수라면 설혹 벌거벗고 돌아다닌다 해도 감기 따위에 걸릴 리가 없을 테니까. 묵향은 마화가 자리에 앉자 황급히 그녀 의 어깨에 얇은 이불을 걸쳐 줬다. 마화의 옷차림이 너무 선정적이라서 도저히 눈길을 어디에 둬야 할지 곤혹스러웠기 때문이다.
“저도 한잔 주세요.”
묵향은 마화가 내미는 잔에 천일취를 가득 따라 줬다.
술잔을 단숨에 들이켠 마화는 묵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분이 많이 울적하신 건 알아요. 이럴 때 제게 조금만 기대 주실 수는 없을까요? 물론 교주님이 보시기에 제가 많이 미흡할 거라는 건 잘 알아요. 하지만…….. “나는 마화가 미흡하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
“그렇다면 왜 저를 멀리하시는 거예요?”
마화는 묵향의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어느새 그녀의 두 눈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나는 감정도 없는 사람인 줄 아세요? 자, 느껴 보세요. 제 심장의 울림을…….”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마화가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묵향이었다. 무엇보다 무공에 있어서는 천하제일일지 모르지만, 여자관계에 있어서는 숙맥이나 다름없었다. 막상 이렇게 여자 쪽에서 과감하게 치고 들어오자 그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해 버려 아무런 대꾸조차 생각해 내지 못 하고 있었다.
묵향은 그저 필사적으로 마화의 가슴 위에 올려져 있는 자신의 손을 떼어 내려 애썼다. 하지만 마화의 손은 요지부동이었다. 천하제일 고수인 그가 내공조차 운용 할 생각을 못할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요? 이러는 제가 싫으세요?”
“하, 하지만 나는……. 그, 그래. 동, 동자공(童子功)을 익힌 상태라…..”
예전에 그가 써먹던 연막전술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건 마화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물론 잘 알고 있죠. 그뿐만이 아니라 설약벽(薛若우외관과의 하룻밤까지도요.”
“그, 그걸 어떻게…?”
순간 묵향의 얼굴 표정이 뜨악하게 바뀌었다. 마화는 묵향의 그런 표정 변화가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지었다.
“당신이 행방불명된 뒤 행적을 조사하던 도중에 알게 됐어요.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는 그녀를 중앙으로 불러들이지 않고, 밖으로 돌린 건 그녀와 다시 대면하
기가 껄끄러워서였나요?”
“그, 그건…….
“당신이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춘약을 쓴 건 그녀였으니까요.”
마화는 묵향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이제는 마화의 달콤한 숨결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마화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짓궂은 어조로 말했다.
“당신을 사랑하려면 춘약이 꼭 필요한가요?”
“그, 그럴 리가 있…, 읍…….”
묵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인하려 했지만,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마화의 입술이 그의 입술을 틀어막아버렸기에.
긴 입맞춤이 끝난 후, 마화는 묵향의 품에 안기며 소곤거렸다.
“당신이 돌아온 뒤 나를 불러 주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요. 그런데 당신이라는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도 무정해요?”
전장에 나서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적의 목을 베는 여인이 마화였다. 하지만 그런 강인한 마화조차도 장인걸과의 전투가 목전으로 다가오자 불안감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마교의 전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것도, 묵향이 최강의 고수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적은 금나라의 50만 대군였다.
어쩌면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마화 자신이 묵향보다 먼저 죽을지도 모른다. 묵향만 무사하다면 자신이 죽는 것쯤은 두렵지 않았지만, 그래도 불안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마화는 이게 묵향과의 마지막 밤이라도 되는 양 그의 품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 번의 격정이 흘러간 다음, 마화는 묵향의 품속에 파고들며 조심스런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얼마나 소 소저를 사랑하는지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가 이런 말을 드리는 걸 오해하지는 말아 주세요.”
“나는 오해 같은 건 안 해. 솔직히 말해도 좋아.”
“제발 태산에는 가지 마세요.”
묵향은 마화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춘 다음 씩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안 갈 테니까.”
하지만 마화는 그런 묵향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마화는 묵향을 꼭 껴안았다. 안 그러면 그가 지금 당장에라도 태산으로 떠나기라도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의 밤은 깊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