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6권 9화 – 차라리 죽여 주시오
차라리 죽여 주시오
묵향은 아직 조령을 잡아들일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천만의 말씀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장인걸 쪽 진영에 안착해 버렸으니까. 조령 은 노하구로 갔다가 장인걸을 만나기 위해 춘릉성으로 갔다.
장인걸은 노하구에 10만의 방어 병력을 남겨 둔 뒤, 50만 대군을 이끌고 춘릉 앞의 드넓은 벌판 위에 진을 쳤다. 제아무리 마교도들의 무공이 뛰어나다고 하지 만, 중무장을 하고 있는 병사들이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쇠뇌나 투석기, 활 등 각종 장거리 투사 무기까지 두루 보유하고 있기에 가까이 접근하기 조차 힘들었다.
조령은 장인걸을 만나러 들어가는 길에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춘릉성의 나지막한 성곽을 볼 수 있었다. 춘릉처럼 작은 성을 공략하기에 장인걸이 동원한 50만 대군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엄청난 숫자였다. 병사들이 세워 놓은 군막(軍幕)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을 정도였으니까.
조령이 도착했을 때, 장인걸은 막사 밖에까지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금나라에서 장인걸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생각해 본다면 의아하다 싶을 정도의 환대였다. “오랜만이구나. 정말 수고가 많았다.”
조령이 황녀의 신분을 지니고 있는 만큼, 원칙적으로 따진다면 장인걸은 그녀에게 공대를 해야 옳았다. 하지만 장인걸만큼은 예외였다. 그는 아구다가 황제가 되 기도 전부터 그와 친분을 나눴던 사람이다. 그리고 당시 여진족을 이끌었던 오야속이 대권을 물려주려 했던 사람은 장인걸이었다. 그는 자신의 동생이었던 아구다 보다, 장인걸이 훨씬 더 뛰어난 사람이라고 판단했었던 것이다.
그런 장인걸의 특수한 신분 때문에 그는 황녀인 조령으로부터 노사(老師)로 불렸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노사님. 아바마마의 원혼을 달래는 데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요.”
장인걸은 조령과 꽤 오랜 시간 담소를 나눴다.
사실, 조령이 장인걸에게 도움이 된 것은 딱 하나. 소연을 납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뿐이었다. 그 뒤로는 오히려 놈들의 간계에 걸려들어, 엉터리 정보를 알려 줘 혼란만 가중시켰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실수한 그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 해도, 소연을 납치할 수 있도록 도와준 데 대한 공로를 상쇄할 수는 없었다. 그걸 잘 아는 장인걸이었기에 그녀에 게 이런 파격적인 대우를 해 주고 있는 것이다.
장인걸의 눈치를 살피던 조령은 기회를 보아 진팔을 만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졸랐다.
“허어, 네가 그 아이에게 마음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장인걸의 말에 조령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인질로 잡아들인 아이들의 신상과 자질에 대해서는 장인걸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인질들 중에 폭풍검 서량과 설취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횡재나 다 름없었다. 그들을 미끼로 만통음제와 패력검제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그리고 진팔의 존재 또한 장인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조령이 진팔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이미 편복대주에게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몰랐던 것처럼 조령에게 농을 건넸다.
조령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만약 장인걸이 그런 사실을 몰랐다면, 오래전에 진팔을 만수진인과 같은 실혼인으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라는 걸. 소연과 서량, 설 취와 달리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진팔이 아직까지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건 전적으로 조령의 덕분이었던 것이다.
장인걸의 명령에 편복대주는 즉각 편복대 감찰어사를 호출했다. 편복대에는 장인걸 휘하의 모든 부서들이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감독하며 살펴보는 감찰부 가 존재한다. 감찰어사는 감찰부 안에서 중간쯤 되는 직책이었다.
“자네는 황녀 마마를 모시고 가, 그분께서 ‘쥐약’을 만나 뵐 수 있도록 하게.”
그러면서 편복대주는 장인걸이 내준 허가서를 그에게 건넸다.
“존명!”
편복대주는 조령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감찰어사가 마마를 편안히 모실 것이옵니다.”
“알겠다.”
“원하시는 일 잘 이루어지기를 빌겠사옵니다.”
“고맙구나.”
조령을 보내고 난 다음, 편복대주는 입맛이 씁쓸한지 찻물을 들이켰다. 사실 지금처럼 중요한 시점에 인질들과 다른 사람이 접촉할 수 있도록 허가한다는 것은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던 것이다.
“황녀를 미행하는 인물은 없었겠지?”
“물론입니다, 대주님. 양양성에서부터 시작해서 이곳까지 철저하게 살펴봤으니 염려하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아무래도 찝찝해……”
편복대주는 잠시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뭔가 생각이 났는지 급히 말했다.
“황녀에게 마차를 내주도록 해라. 노하구와 여기를 왕복하는 치중대(輜重隊)로 위장한다면, 조금 더 안심할 수 있겠지.”
이때, 수하들 중 한 명이 달려 들어오며 그에게 외쳤다.
“큰일났습니다, 대주님.”
“큰일이라니, 또 무슨 일이냐?”
“몽고 놈들이 쳐들어왔다고 합니다.”
“뭣이? 몽고 놈들이!”
북부전선에서 날아온 보고서였다. 며칠 전 몽고의 대군이 갑작스럽게 국경선을 돌파했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경선에는 30만 대군이 포진하고 있었지 만, 테무진과 화친이 성립된 이후, 그중 20만을 남쪽 전선에서 써먹기 위해 이동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 20만이 남하하여 연경 외곽의 방어부대가 위치하고 있던 자리로 이동하고, 연경 외곽에 있던 방어부대 중 20만을 노하구 쪽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이 모든 게 북부전선이 완전히 안정되었다고 판단한 뒤 내린 결정이었는데…….
편복대주는 너무나도 분해서 이빨을 뿌드득 갈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촌놈의 새끼가 감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나를 우롱해?”
그는 즉시 이 사안을 장인걸에게 보고하려고 했다. 하지만 장인걸에게 달려가는 도중에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장인걸에게 이걸 보고해 봐 야 변할 건 전혀 없었다. 자신들의 코앞에는 마교의 최정예들이 자리 잡고 있고, 장인걸의 대군은 그들을 반쯤 포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언제 대규모 접전이 벌어 질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병력을 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편복대주는 장인걸에게 가던 발길을 다시 되돌려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어쩔 수 없지. 지금은 그저 시간만 끄는 수밖에. 그 촌놈은 이곳이 정리되는 대로 싸그리 쓸어버릴 테다. 으드득.”
편복대주는 북부전선에서 연경 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20만 대군에게 보낼 명령서를 작성했다. 지금 당장 발길을 되돌려, 북쪽 국경선을 침범한 몽고 놈들을 막아 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연경에서 노하구로 이동 중인 20만 대군에 대해서는 연경으로 되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북부 방어군 20만을 되돌려 보내는 것만으 로도 충분히 몽고의 침략을 막아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 * *
편복대주가 붙여 준 감찰어사는 조령과 그녀의 호위무사인 쟈타르를 노하구로 안내했다. 설마 그들이 어제 자신이 떠나왔던 노하구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보 지 않았던 조령이었다. 그만큼 노하구는 모든 적들의 집중적인 감시를 받는 곳이었으니까.
그들이 탄 마차는 노하구 외곽에 위치한 제법 규모가 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쟈타르가 자세히 살펴보니, 그 저택이 다른 집들과 다른 점이 전혀 없다는 게 오히 려 의외였다. 뭔가 음산한 마기가 풍겨 나올 거라고 지레짐작을 했기 때문이다.
쟈타르는 그 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자신처럼 신분을 노출하지 않아야 할 필요가 있는 일부 황실무사들이나, 편복대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마공을 익혀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쪽이 훨씬 더 강력한 위력을 지닐 뿐더러, 단기간에 깊은 수준까지 연성할 수 있었으니까.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차가 멈춰 섰다. 조령을 안내해 온 감찰어사가 마차에서 내리며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조령과 함께 마차에서 내린 쟈타르 가 보니, 내실로 들어가는 두 번째 대문에 배치되어 있던 경비무사 한 명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감찰어사는 품속에서 패를 꺼내 그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대주님의 명을 받들어 왔다.”
“감찰어사님, 어서 오십시오.”
“이곳의 책임자에게 안내하거라.”
“지금 즉시 통보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문 쪽에 서 있는 경비무사들 중 한 명에게 지시했다.
“너는 안에 들어가서 조장님께 감찰어사께서 오셨다고 전해라.”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지시를 받은 그 경비무사는 묵묵히 행동으로 지시를 이행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안으로 달려 들어가 버렸다. 정말이지 놀라운 신법이 었다. 쟈타르는 그가 보여 준 그 한 수만으로도, 그가 자신보다 훨씬 더 윗줄에 놓이는 고수임을 확신했다.
‘진팔 공자와 엇비슷한 정도의 수준!’
하지만 쟈타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궁에서는 황제가 밖으로 암행할 때 쓰기 위해 일부 정파의 내공을 익힌 고수를 키웠다. 하지만 그들의 실력은 별 볼 일 없 는 수준이었다. 높아 봤자 쟈타르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런데 어찌 저런 고수가 심부름 따위나 하러 달려갈 수 있단 말인가.
경비무사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갈 때, 안쪽에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인물과 마주쳤다. 그의 경공술은 방금 전 보고를 하기 위해 달려 들어갔던 경비무사에
비교한다면 형편없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였다. 굳이 표현하자면 보름달과 반딧불 수준이랄까.
그렇기에 쟈타르는 그자가 책임자의 심부름꾼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가 자신을 소개하자 쟈타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자가 이곳의 책 임자였던 것이다. 어떻게 무공도 떨어지는 저런 인물이 책임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감찰어사는 품속에서 명령서를 꺼내 책임자에게 건네며 말했다.
“황녀 마마께서 진팔이라는 죄수와 면담을 나누시는 데 있어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라는 편복대주님의 명령서다.”
“대주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책임자는 조령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소인을 따라오시옵소서, 마마. 그자에게 안내해 드리겠사옵니다.”
“본녀는 그와 개인적으로 면회를 하고 싶노라.”
조령의 말에 책임자는 난처한 듯 대꾸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규칙상 그럴 수는 없사옵니다, 마마. 속하는 대주님께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들을 지하실에서 내보내지 말라는 명을 받았나이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앞장 서거라.”
“예.”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책임자는 직접 조령을 인질들이 갇혀 있는 지하실로 안내했다.
감찰어사도 함께 따라 들어오며 책임자에게 물었다.
“죄수들의 상태에 문제는 없겠지?”
“염려 놓으십시오, 감찰어사님. 모두들 건강한 상탭니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문 앞에도 두 명의 경비무사가 지키고 서 있었다.
“안으로 드시옵소서, 마마.”
조령과 감찰어사가 지하실 안으로 들어간 다음, 쟈타르도 따라 들어가려고 할 때 책임자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이곳에 무기를 소지한 채 들어가실 수는 없습니다.”
쟈타르는 즉시 허리에 차고 있던 도(刀)를 풀어 경비무사에게 건넸다. 경비무사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무표정하게 쟈타르의 무기를 받았다.
조령은 진팔이 음산하기 짝이 없는 지하 감옥에 갇혀 있을 거라고 상상했었다. 하지만 책임자를 따라 지하실 안으로 들어서니, 자신의 상상과 전혀 다른 장면에 내 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넓은 지하실은 사람들이 안락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잘 꾸며져 있었다. 침상에 놓여 있는 이불도 비교적 깨끗했고, 사람들의 옷차림 또 한 그러했다.
마침 인질 4명은 식탁에 둘러앉아 얘기를 나누며 음식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위에서 사람들이 내려오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중 조령의 모습이 보이자 분노를 감추기 힘든 듯 모두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사람들의 그런 시선에 조령은 내심 찔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지은 죄를 뻔히 알고 있다 보니, 그들이 자신을 얼마나 증오하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 다. 그것 때문에 진팔만 만나고자 했던 것이었는데…….
이때, 책임자가 정중하게 말했다.
“저쪽에서 얘기를 나누시옵소서.”
책임자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한쪽 구석에 물건들을 쌓아 마치 하나의 방처럼 만들어 놓은 곳이 보였다. 저 정도라면 진팔과 조용히 얘기를 나눌 수 있을 듯도 했 다.
“자네, 저 안으로 들어가게.”
책임자의 지적을 받은 진팔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조령과의 독대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잡초처럼 끈질긴 성격의 그는 실낱같은 가능성이라 도 허투루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령은 진팔의 뒤를 따라 들어가며 휘장을 들춰 방 안을 살펴봤다. 침상 2개가 놓여 있고, 이불도 아주 깨끗했다. 아마 여기가 여인들을 위한 개인적인 공간인 모양 이었다.
조령은 방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책임자에게 말했다.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해 줘서 고맙구나.”
“과찬이시옵니다, 마마.”
“내 편복대주에게 그대의 친절에 대해 전하겠노라.”
“감사하옵니다, 마마.”
조령이 방 안으로 들어간 후, 쟈타르가 그 휘장 앞에 섰다.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아선 것이다.
책임자는 쟈타르에게 말했다.
“마마께 시간에 구애받지 마시고 천천히 담소를 나누시라고 전해 주십시오.”
그런 다음 그는 감찰어사를 안내해 어디론가 가 버렸다. 아마도 이곳 현장의 경비 상황에 대해 보고하기 위함이리라.
“조령 소저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어인 일이시오?”
반쯤은 농담조로 이죽거린 진팔이었다. 하지만 조령의 반응에 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 맺히는 그렁그렁한 눈물을 봤기 때문이다. 왜 조령이 눈 물을 보이는 것일까? 자신들을 팔아넘길 때는 언제고…….
“몸은 괜찮으세요?”
진팔은 수갑을 찬 손을 그녀 앞에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의 발에도 족쇄가 단단히 채워져 있었다.
“보시다시피.”
조령은 애절한 목소리로 사정했다.
“지금 당장 저를 용서해 달라고는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저로서도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어요.”
조령은 자기가 금나라 황제 아구다의 딸들 중 한 명이라는 것을 밝혔다. 그녀를 한낱 첩자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진팔에게 그건 의외의 상황이긴 했다. 그리고 그 녀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정황들에 대해 늘어놓자, 더 이상 그녀를 증오할 수만도 없게 되어 버렸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금지옥엽으로 성장한 황녀가 진흙탕 속으로 뛰어들었다는데, 그걸 어찌 비난할 수 있겠는가. 설혹, 그 대상이 자신이 되는 개 같은 상황이 벌어지긴 했다 해도 말이다.
“그런 말씀을 황녀께서 저에게 하시는 이유를 묻고 싶군요.”
“그, 그건 제가 당신을 여, 연모하고 있기 때문이라구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당신에게 끌렸어요.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까지 무심할 수가 있죠?” 조령의 고백에 진팔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 어째서 저 같은 걸……?”
“당신은 너무나도 자유스런 사람이었으니까요.”
진팔은 조령의 철없는 대답에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황녀께서는 지금껏 저와 함께 계시면서 느끼셨을 거 아닙니까? 그놈의 자유라는 건 다 허상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건 상관없어요. 처음에는 허상에 속아 끌렸던 것이지만, 그걸 깨달은 후에도 당신은 내 가슴 속에 남았어요. 이 세상 어떤 여인이 당신 같은 무인을 연모하지 않 을 수 있겠어요.”
말을 하던 조령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당신을 연모해요. 이런 짓을 했다고 나를 미워하지는 말아 주세요. 이것도 다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애절한 조령의 고백에 진팔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지금껏 살아오며 단 한 명의 여자도 사귀어 보지 않은 진팔이었다. 그런데 여자가 울며 간청하고 있으니 당황해 서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소연만 아니었다면, 사귀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매력적인 여성이 아닌가.
한참을 고민하던 진팔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황녀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황녀’라는 말에 조령의 눈에 다시금 습기가 차올랐다.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면 약간이라도 거리를 좁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늘어난 것만 같았 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가요.”
“설취 소저와 서량 공자는 이번 일에 아무런 연관이 없지 않습니까?”
그 둘을 지금 당장 풀어 달라는 말인 것으로 판단한 조령은 눈물을 살짝 닦으며 대답했다.
“교주만 처리되면 모두 다 풀려 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럴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아니라는 말인가요?”
진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휘장을 살짝 옆으로 걷으며 조령에게 속삭였다.
“저쪽에 서 있는 여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조령은 일어서서 진팔의 곁에 섰다. 그리고 휘장 틈으로 밖을 훔쳐봤다. 지하에는 4명의 하녀들이 있었는데, 그녀들은 각자 한 명씩의 인질들을 전담해 시중을 들 고 있었다. 전담하고 있는 인질의 바로 뒤에 가만히 서 있다가 뭔가 요구를 하면 바로 움직이는 것이다.
“아주 성실한 하녀들인 것 같군요. 그런데 뭘 보라는 거죠?”
진팔은 고개를 흔들며 단호하게 말했다.
“저건 성실한 정도가 아닙니다. 저 여인들은 2개 조로서, 6시간씩 이곳에서 일한 뒤 교대로 휴식을 취하더군요. 그런데 그 6시간 동안 동료들 간에 사소한 대화라 고는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철두철미하게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그건 너무 비정상적이지 않습니까?”
진팔이 말하고자 하는 뜻을 이해하지 못한 조령이 다시 물었다.
“철저하게 교육받았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지 않나요?”
“아니죠. 저 여인들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진팔이 가리킨 여인은 방 밖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여인은 진팔을 담당했던 모양이다. 진팔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여인의 얼굴은 무표정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목 각인형이라도 세워 놓은 것처럼…….
“저게 정상적인 사람의 모습입니까?”
“…….”
“저 여인들을 잘 살펴보면 꽤나 고된 수련을 쌓은 흔적들을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전문적으로 하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이죠. 황녀께서는 혹, 마령 섭혼심법이라는 것에 대한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으십니까?”
“글쎄요. 최면술 같은 잡술은 별로…..”
“최면술 따위가 아닙니다. 사람의 인성을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는 악독한 술법이 몇 가지 알려져 있는데, 그중에서 마교에서 사용하는 것이 바로 마령섭혼심법이 지요.”
“마령섭혼심법이라고요?”
“예. 마교가 자랑하는 저주받은 술법의 이름입니다. 대원수는 마교 출신이라고 들었으니, 아마 틀림없을 겁니다.”
“……”
“쓸 만한 무림인들을 사로잡기만 하면 마령섭혼심법을 통해 저렇게 꼭두각시로 만들어 왔을 겁니다. 저나 다른 사람들도 다 무림에 적을 둔 이상, 언젠가는 누군 가의 검에 목숨을 잃을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렇게 되는 건 싫습니다.”
진팔의 말에 조령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저는 두 사람을 탈출시켜 달라는 부탁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단지 저 두 사람이 평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겁니다. 저분들과의 옛정을 생각해 서라도…,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 그래도…….”
“지금 이 상황에서 황녀께 이런 제의를 하는 것도 웃기지만…, 만약 제 청을 들어 주신다면 제 남은 생을 황녀님께 의탁하겠습니다.”
지하실에서 나온 조령은 책임자가 마련해 준 숙소로 발길을 옮겼다. 연모하던 진팔과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눴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안색은 어둡기만 했다. “목욕부터 하시겠습니까?”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질문을 던지는 쟈타르를 향해 조령은 나지막한 어조로 물었다.
“그의 말이 사실일까?”
쟈타르는 휘장 바로 앞에 서서 다른 사람이 접근하는 걸 막았다. 그러면서 그는 조령과 진팔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마공 중에 그런 게 있다는 사실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말은 사실인 듯합니다.”
설마 했었는데, 쟈타르까지 인정하자 조령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이라고?”
“예. 저택 내부에 포진하고 있는 고수들의 배치가 매우 수상쩍다는 걸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저택에서 본 인물들 중 가장 무공이 뒤떨어지는 자들 중 하나가 바로 그 책임자라는 녀석이었을 겁니다.”
아마 이곳의 책임자는 편복대 출신일 가능성이 컸다. 편복대처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마공을 익히기 때문이다. 속성으로 익힐 수 있는데다가 위력 까지도 파괴적이니 고수들의 수가 적은 장인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마공을 익혀 마기를 뿌려대는 무사를 이렇게 비밀을 요해야 하는 저택에다 배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곳이 수상한 곳이라며 사방에 광고 하는 거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만약…, 만약에 말이야, 그들을 우리 힘으로 구출할 수는 없겠지?”
자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자신과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한 진팔이었다. 만약 그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진팔은 자신을 영원히 사랑해 주 지 않을까? 그리고 죽도록 도와주는 것보다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자신의 마음이 더 편해질 것 같았기 때문에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쟈타르의 반응은 차가 웠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십시오.”
“왜?”
“저희 둘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왜? 쟈타르는 강하잖아.”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로서도 지하실에 있던 하녀들조차 제압할 자신이 없습니다.”
한 명씩 맞붙는다면 쟈타르가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곳에는 하녀가 4명씩이나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을 어떻게 운 좋게 처리했다 하더라도, 밖으로 나오면 저보다 강한 고수들이 수두룩합니다.”
“만약 그 사람들의 혈도를 풀어 준다면 어떻게 되지?”
“물론 대단한 도움이 되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황녀님께서는 제국의 반역도가 되십니다. 설마 그렇게 되길 원하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아마 진 공자도 그걸 잘 알고 있기에, 황녀님께 그분들이 자결할 수 있도록만 도와달라고 부탁한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그건 가능할 거 같아?”
“방금 전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곳에 있는 4명의 하녀조차도 제압할 자신이 없다고 말입니다. 괜한 모험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가만히 놔두셔도 결국 진공자는 황녀님의 손에 떨어지게 될 테니까요.”
조령도 그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급적이면 진팔의 청을 들어 주고 싶었다. 진팔은 약속했다. 두 사람이 자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자신의 남은 생 을 의탁하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둘은 자신과 친분까지 주고받은 사이가 아닌가. 진팔의 부탁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들이 의지를 상실한 꼭두각시가 될 것을 생 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그건 너무나도 잔인한 짓이었으니까.
“진 공자는 심지가 굳은 분이셔. 그 자신이 내 곁에 남겠다고 결심하지 않는 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분을 붙잡아 둘 수는 없을 거야. 아니, 그 마령 뭐라는 술법 으로 꼭두각시를 만들어 내 곁에 놔둘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나는 그분의 자유로운 영혼을 사랑한 거니까.”
쟈타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황녀의 부탁을 들어 주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시도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조령은 다시 한 번 그 저택을 찾아갔다. 저택의 외곽에 있는 하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통과해서 내실로 들어가려고 하면, 거기서부터는 제 대로 된 실력을 갖춘 경비무사들이 막아섰다.
어제처럼 내실로 통하는 문에는 3명의 경비가 서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은 경비무사로 변장한 편복대원이었고, 나머지는 실혼인들이었다. 편복대원은 조령이 자신 쪽으로 걸어오는 걸 발견하자마자, 옆에 서 있던 실혼인에게 명령했다.
“조장께 황녀님이 오셨다고 전해.”
실혼인은 번개 같은 신법을 전개하여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편복대원은 조령에게 달려와 고개를 조아리며 예를 올렸다.
“어서 오시옵소서, 황녀 마마. 자, 소인을 따라 오시옵소서.”
어제와 달리 그는 조령을 책임자가 있는 곳까지 바로 안내했다. 그런데 실혼인이 벌써 통보했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책임자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쟈타 르의 얼굴에 수심이 차올랐다. 책임자 녀석이 지하실로 안내해야만 이번 계획이 성공할 수 있는데…….
책임자의 숙소에 거의 다 다다랐을 무렵에야 책임자가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나왔다. 어제 봤던 단정한 옷차림과는 달리 그의 의복은 상당히 흐트러져 있었고, 불 장난하다 들킨 어린애 마냥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어, 어서 오시옵소서, 황녀 마마.”
“진팔을 다시 한 번 더 만나고자 하는데, 괜찮겠느냐?”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자, 이리로 오시옵소서.”
그가 앞장서서 안내하자 쟈타르는 그의 뒤를 따르며 조금 열려져 있는 책임자의 방문 틈을 힐끗 바라봤다. 역시나 방 안에는 벌거벗은 여자 하나가 죽은 듯 누워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상당히 낮이 익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바로 어제 지하실에서 봤던 하녀들 중 하나였다.
순간, 쟈타르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아진 것이다. 놈이 당황하고 있는 이유를 알아낸 만큼, 그 점을 잘만 이용한다면 성공할 확률 이 조금은 더 올라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몰래 자결하는 데 가장 좋은 건 독약이다. 하지만 쟈타르에게는 독약을 준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심장을 찌를 비수를 건네주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쟈타르는 조령에게 슬쩍 2자루의 비수를 건넸다. 어제의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조령에게는 무기를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자신도 품속에 비수 4 자루, 그리고 장화 안쪽에 각각 비수 1자루씩을 숨겨놓은 상태였다. 책임자가 몸수색을 하더라도 최소한 한두 자루는 가지고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 희망 을 걸고 챙겨 넣은 것이다.
역시, 책임자는 조령 일행을 지하실로 안내하면서 무기를 달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방금 전에 자신이 보인 추태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만약 자신이 실 혼녀를 상대로 성욕을 풀고 있었다는 것을 조령이 편복대주에게 고해바친다면 목이 날아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 걱정에 정신이 없으니 상대방에게 무 기를 뺏어야 한다는 생각이 날 리 있겠는가.
“진팔! 황녀님께서 오셨다.”
책임자는 어제 그 둘이 대화를 나눴던 칸막이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드시옵소서, 황녀 마마.”
그런 뒤 책임자는 진팔과 진팔을 담당하고 있는 하녀에게 지시했다.
“자네는 황녀 마마를 따라 들어가게. 그리고 너는 진팔이 나오기 전까지 저쪽에서 대기해.”
책임자의 명령을 받은 실혼녀는 그가 가리킨 곳으로 가서 섰다. 멍한 표정으로.
바로 그때였다. 쟈타르가 움직인 것은. 쟈타르는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으로 책임자를 제압했다.
“헉!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쟈타르는 비수로 책임자의 목을 겨눈 채, 그의 허리에 매여 있는 검집을 풀어 한쪽 구석에 집어 던진 뒤 차가운 어조로 외쳤다.
“하녀들에게 저쪽으로 가라고 명령해라.”
책임자는 완강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그럴 수는…….?”
그 순간 쟈타르는 발을 들어 책임자의 발등을 콱 내리찍었다.
“크으윽!”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이, 이래서 뭘 어쩌겠다는 것이냐? 여기에는 무수한 고수들이 포진하고 있다.”
“그건 상관없어.”
쟈타르는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비수 2자루를 꺼내 설취와 서량에게 던졌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하시오.”
빨리 자결하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설취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 한쪽 구석으로 물러난 실혼녀들과 책임자를 번갈아 바라봤다. 혹시나 하고는 있었지만, 그녀가 내 심 기대했던 전개였다. 실혼녀들이 그 어떤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명령에 따라 그냥 물러선 것이다. 만약 실혼녀들이 이런 비정상적인 명령을 받았을 때, 거부하기 라도 했다면 일이 복잡해졌을 텐데….
마음을 정함과 동시에 설취는 진팔에게 외쳤다.
“진 공자, 그녀를 제압하세요.”
내공을 제압당한 상태라, 평소보다는 몸이 굼뜨게 움직였지만 그렇다고 조령 같은 하수를 제압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진팔은 말이 떨어지자마자 수갑의 사슬 을 이용해서 조령의 목을 휘감았다. 갑작스런 전개에 기절초풍한 조령이 정신을 채 차리기도 전에 진팔은 조령의 멱줄을 틀어쥐는 데 성공했다. 진팔은 조령의 몸을 더듬어 비수들까지 빼앗았다. 비수가 손에 쥐어지자, 진팔의 표정이 한결 느긋해졌다. 아무리 내공이 없다 해도 멱줄을 베는 것은 전혀 하자가 없었으니 말이다. 진팔은 비수 한 자루를 소연에게 던졌다.
“사저!”
비수를 받아 든 소연은 쟈타르에게로 다가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더군다나 쟈타르는 책임자를 붙잡고 있느라 대응이 한 박자 느 렸다. 그가 뭔가 대응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나 버린 후였다.
“이게 무슨 짓이오?”
이때, 설취가 입을 열었다.
“도와주러 온 건 고맙지만, 저희들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는 점 이해해 주시길 바래요. 자, 저쪽으로 물러나 주세요.”
설취는 서량에게 말했다.
“서 공자, 저자를 넘겨받으세요.”
쟈타르는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령의 멱줄을 움켜쥐고 있는 진팔과 그와의 사이에는 3명이 가로막고 있다. 모두들 내공이 없다고 하지만, 기본적인 실력만 으로 따진다면 자신보다 월등한 실력자들이다.
더군다나 그들의 눈은 죽음을 각오했는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들로서는 이판사판인 것이다. 그러니 이들을 단숨에 제압하고 조령을 구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리라. 검을 꽉 쥐고 있던 쟈타르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진팔은 미안한 듯 조령에게 말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황녀님. 하지만 저는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가정하고 그런 부탁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것은 노련한 강호 경험을 보유하고 있는 설취의 능력이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스승은 중원에서 지혜롭기로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만통음제가 아닌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쟈타르는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 자리를 서량이 자지했다. 서량은 비수를 책임자에게 겨누며 싸늘한 어조로 외쳤다. “저 여자들에게 명령해서 우리들의 혈도를 풀라고 해라.”
“그, 그럴 수는…….”
“편복대주나 흑살마왕에게 추궁당할 게 겁나나? 하지만 그 전에 나에게 먼저 목이 떨어질 거라는 걸 명심해.”
“그럴 수는 없다!”
책임자가 순순히 이쪽이 요구하는 대로 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서량은 비수를 책임자의 어깨를 푹 찔렀다. 육체적인 관점에서 지금은 책임자 쪽이 훨씬 더 강력했다. 운이 좋아 선기를 잡은 상태지만, 약간이라도 빈틈이 보인다면 그는 반격해 올 게 분명했다. 이럴 때는 상대를 완전히 제압해 버리는 게 최고였다.
“크으윽!”
평소 순후하고 진중한 모습만을 보여 줬던 서량이었지만, 오늘 그는 왜 자신의 명호가 폭풍검인지를 아낌없이 보여 주었다. 책임자를 향하는 그의 손속에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한동안 서량의 모진 고문을 당하던 책임자는 자포자기한 음성으로 외쳤다.
“저, 저들의 혈도를 푸, 풀어 주도록 해라.”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자신들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기라도 하다는 듯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있던 실혼녀들이다. 그의 말에 미동도 하지 않고 한쪽 구석에 서 있던 실혼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일 두 차례에 걸쳐 혈도를 점하는 작업을 직접 했던 실혼녀들이다. 해혈법을 모를 리 없었다.
혈도가 풀리자 단전에서 뻗어 나와 온 몸을 휘감아 도는 장대한 기운을 모처럼 느껴 보는 소연 일행들이었다. 워낙 오랜 시간 혈도를 제압당했던 그들이었기에, 어 디 조용한 곳에서 운기조식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언제 위쪽에서 다른 고수들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쟈타르가 책임자에게서 빼앗아 한쪽 구석에 던져 놓은 검이 저절로 날아오르더니 서량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서량은 비수를 허리춤에 찔러 넣은 다음, 그 검을 뽑아들었다.
그때 소연이 나긋한 걸음걸이로 쟈타르에게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죄송한 부탁이지만 도를 좀 빌렸으면 해요.”
쟈타르가 허리에 차고 있는 도는 오랑캐들이 즐겨 쓴다는 만도(蠻刀)였다. 만도는 철의 질이 떨어지는 만큼, 강도를 유지하기 위해 폭이나 두께가 아주 두껍다. 중 도를 애용하던 소연이었기에, 지금 서량이 들고 있는 검에 비해 만도가 그녀의 취향에 맞았던 것이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쟈타르는 말없이 자신의 도를 풀어 소연에게 건넸다. 소연이 상당한 실력을 갖춘 고수라는 사실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소 연이 만도를 뺏을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막을 능력이 없다는 것도.
모두들 단단히 마음을 먹고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탈출은 생각 외로 쉬웠다. 편복대주는 외부에서 적이 쳐들어올 것에 대한 대비만 했지, 이렇게 내부의 배신으로 인해 책임자가 포로가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덕분이었다.
저택에 배치되어 있는 고수들은 모두 다 실혼인이었다. 실혼인들은 편복대 1328조의 통제 하에 있었으므로, 조장이 포로가 된 마당에서 실혼인들은 아무런 위협 이 되지 못했다. 조장이 비켜서라고 하자, 모든 실혼인들은 마치 잘 익은 수박이라도 잘라지듯 옆으로 쫙 비켜섰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사이를 당당히 걸어서 도망쳐 버렸다.
* * *
“양양성이 보입니다, 사저.”
모두들 진팔이 손짓하는 곳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저 멀리 지평선에 희미하게 성곽의 그림자가 보였다. 물론 진팔보다 훨씬 급수가 떨어지는 쟈타르나 조령 의 눈에는 그게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성을 바라보던 설취가 감개무량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양양성이 저토록 반가울 줄은 미처 몰랐네요.”
개개인의 실력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소연 일행이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던 그들 가장 큰 이유는 묵향이 죽었다고 확신한 장인걸이 2차 추격대를 투입하지 않아서 였다. 물론 그들이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지만, 살아서 무사히 양양성에 돌아왔다는 것으로도 그저 감격할 뿐이었다.
“자, 빨리 갑시다.”
이때, 쟈타르가 진팔에게 애원했다.
“진 소협, 이젠 우리들을 풀어 주게.”
“함께 양양성으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소? 결과적으로 봤을 때 귀하들이 우리들의 탈출을 도운 셈이니, 흑살마왕이 그대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오.” 진팔의 말에 쟈타르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양양성에 가도 마찬가지네. 양양성에는 교주가 있지 않나. 양양성에 돌아왔다는 것을 교주가 안 순간, 마마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어.”
“그래도 금나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살행위요. 나는 약속을 천금과도 같이 여기는 사람이오. 얼마 전에 조 낭자와 했던 약속을 어길 생각이 전혀 없소.” 진팔은 조령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와 함께 가자. 만약 교주가 너를 해치려 한다면 내가 목숨을 걸고 막아 주마.”
그 말에 소연도 입을 열었다.
“마지막에 동생이 보여 준 용기를 나는 잊지 않아. 우리와 함께 가. 아버지께서 뭐라고 하시던 내가 지켜 줄게. 금나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그편이 훨씬 안전할 거 “야.”
하지만 조령은 그들과 함께 갈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진팔이 평생을 자신과 함께한다 해도, 그것은 그의 빈 껍질뿐일 거라는 것을. 진팔의 마음은 영원토록 소연을 그리워할 게 분명했다. 그런 그들의 사이에 눈치 없이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자신이 그걸 몰랐다면 몰라도,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결 국은 모두가 다 불행해질 뿐이다.
“아뇨. 나는 어마마마께로 돌아갈래요. 아무리 노사께서 저를 미워하신다고 하더라도, 어마마마께서 계신 한 저를 어떻게 하지는 못할 거예요.”
진팔은 다시 한 번 더 양양성으로 함께 가기를 권했지만, 조령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녀의 미래가 빤히 보였지만, 진팔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언제까지 여기에서 계속 입씨름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조령 일행과 헤어진 그들은 양양성을 향해 달려갔다. 깨알처럼 보이던 양양성의 성벽이 점점 더 커지더니, 나중에는 웅장한 성벽으로 그 모습이 바뀌었다.
성문 위에 있던 병사들이 진팔 일행을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천마신교 교주님을 만나 뵈러 왔소.”
천마신교라는 말에 성문의 병사가 막 뭐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그와 함께 성문에 서 있던 무사 한 명이 병사를 제지하며 질문을 던졌다.
“혹시 천지문의 진팔 대협이 아니시오?”
“예, 맞습니다.”
그 말에 무사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무림맹 감찰부 소속으로 진팔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감찰부는 양양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파악하여 감찰부주에게 보고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곤륜무황이 여기에 있는 거의 모든 무사들을 거느리고 춘릉 성을 향해 이동한 후에도, 감찰부원의 일부는 정보 취득을 위해 이곳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진팔은 감찰부원에게 자신들이 장인걸의 마수에서 탈출해 왔다는 것을 간단히 요약해 말해 줬다. 그 길고 긴 고생담을 성문 앞에 서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까 말이다.
“이거 고생이 심하셨구려. 잠시만 기다리시오.”
곧바로 성문이 열렸다. 성문 위에서 뛰어내린 감찰부원은 성문 안쪽을 가리키며 진팔에게 말했다.
“지금 성 안으로 들어간다 해도 교주님을 만날 수는 없을 거요.”
“어디로 가셨소?”
“흑살마왕과 대회전을 벌이기 위해 춘릉성으로 떠나셨소.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다 그곳으로 가셨지요.”
그 말에 서량이 끼어들었다.
“제령문도 그쪽으로 갔습니까?”
“예. 곤륜무황 대협께서 이곳에 있는 모든 문파들에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금나라 오랑캐를 멸하기 위해 떨쳐 일어설 때라고 말이지요.”
얼마전까지 장인걸의 마수에 잡혀 개고생을 했던 그들이다. 그렇기에 젊은 무사의 말만 믿고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먼저 마교가 거주하던 장원에 들린 후, 그 다음은 제령문이 있는 장원으로 갔다.
하지만 젊은 무사의 말대로 장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그 두 장원에만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양양성 안을 북적거리게 만들었던 그 많은 고수들이 단 한 명도 남지 않고 다 사라져 버려 거리는 을씨년스러울 정도였다.
이때, 성문 앞에서 만났던 그 젊은 무사가 다가왔다.
“모두 춘릉성으로 가셨으니, 지금 속히 출발하신다면 머지않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뭘요. 참, 교주께 전해 드릴 서신이 있어 춘릉성으로 가는 전령이 있는데, 그를 따라가시면 춘릉성까지 지름길로 가실 수 있을 겁니다. 멀리 둘러가는 것보다 시간 이 꽤 절약되죠. 아마 내일 아침쯤에는 도착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오, 그렇습니까? 이거 고맙습니다.”
그들은 젊은 무사의 주선으로 춘릉성으로 가는 전령과 함께 길을 떠날 수 있었다. 전령은 경공술을 써서 인적이 없는 산길을 주파해 나갔다. 일행 모두 무공에 있 어서는 어느 정도 자부를 하는 인물들이었고, 그 전령은 경공술 외에는 무공이 별로 뛰어난 것 같지 않았기에, 그들은 안심하고 전령의 뒤를 따라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