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7권 1화 – 춘릉성 전투의 종결
춘릉성 전투의 종결
“으드득!”
전투를 지켜보던 옥화무제는 예상 외로 상황이 흘러가자 이를 갈며 분해했다. 압도적인 병력을 지니고 있는 장인걸이 이토록 허망하게 깨질 줄은 전 혀 예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최소한 양패구상이라도 해줄 줄 알았던 공공대사는 비무 후, 갑자기 깨달음을 얻었다며 왜 공력을 전패한 뒤 떠난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 보다 허망했던 건 마교에 최후의 일격을 가할 천금과도 같은 기회를 그냥 날려 버린 무림맹의 행태였다.
“이런 병신 같은 놈들. 마교를 깨부술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를………….”
더 이상 이곳에서 지켜보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옥화무제는 짜증스런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뭘 봤는지 일순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 떴다.
“저, 저놈은 진팔?”
진팔의 갑작스런 등장에 옥화무제는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진팔이 여기서 튀어나온단 말인가. 자신이 잘못 봤나 싶어 안력을 돋워 다시 봤지만 감찰부주 뒤에 끌려나와 있는 사람은 분명 진팔이었다.
진팔을 인질로 감찰부주가 교주를 위협하다니, 그녀가 가지고 있던 지식으로는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옥화무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비영단주에게 다급히 물었다.
“분명 쥐약은 둥지에 넣어 뒀다고 하지 않았나요?”
비영단주는 잠시 궁리하더니 곧 대답했다.
“쥐약에 다른 인질들까지 포함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교주를 제어할 수 있는 인질은 소연이라는 여아(兒) 하나뿐이었으니까요.”
“아니에요. 진팔이 저기에 있다는 말은 다른 인질들도 둥지를 벗어났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에요. 만약 흑살마왕이 선물로 맹주에게 넘겨준 게 아 니라면, 자력으로 탈출했을 수도 있다고 봐야겠죠. 그렇다면 소연이 역시 둥지를 탈출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가 없어요. 아, 이럴 때가 아니죠.” 옥화무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쏜살같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 옥화무제의 뒤를 비영단주가 따라가며 물었다.
“어디를 가십니까? 태상문주님.”
“소연이가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 만큼, 반드시 우리가 먼저 나머지 인질들을 찾아내야 해요. 안 그래도 소중한 인질들을 그렇듯 허망하게 소모해 버렸다는 게 내심 수상쩍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건만…….”
다급한 옥화무제의 말에 비영단주도 곧 깨달았다. 이제 무영문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소연이를 확보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을 말 이다.
감찰부주가 슬쩍 손짓을 하자, 감찰부원들이 어떤 사내를 질질 끌고 앞으로 나왔다.
사내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얼마나 심한 고초를 겪었는지 옷 여기저기에는 검붉은 선혈들이 묻어 있었고, 몇 군데는 찢어져 있기까지 했다. 그야 말로 불쌍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사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묵향은 뭔가에 머리를 두들겨 맞기라도 한 듯 멍하니 굳어 버렸다. 그 사내는 바로 진팔이었다.
장인걸은 분명히 소연이를 연공관에 가둬 뒀었다고 대답했던 만큼, 진팔이가 살아 있다는 게 그리 의외의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인걸의 진영에 잡혀 있어야 할 진팔이 맹주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은 전혀 의외였다. 그리고 그 순간 묵향의 뇌리에는 희뿌연 희망이 싹트 기 시작했다. 혹, 소연이도 아직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그 아이를 장인걸에게서 구출해 낸 것인가?”
묵향의 표정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어 버리는 것을 보며, 감찰부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오.>
감찰부주의 전음과는 달리 진팔은 아니라는 듯 열심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뭔가 얘기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혈도를 제압당했는지 목소리는 새어나 오지 않았다.
“저 아이 말고 다른 아이들도 있었을 텐데…………. 만통 형님의 제자 설취라든지…………….’
<다른 사람들은 걱정할 필요 없소이다. 모두 안전한 곳에서 쉬고 있으니 말이오.〉
감찰부주는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제 묵향으로서는 꼭 진팔을 살려야만 할 필요성이 없어진 셈이었으니까.
묵향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지만, 그런 그의 속셈을 알 리 없는 감찰부주는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전음을 다시 날렸다.
<혈족의 목숨이 아깝다고 생각한다면, 이쯤에서 전투를 종료하고 헤어지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감찰부주가 조심스럽게 전음으로 의사를 타진한 것은 자신의 말을 이곳에 모여 있는 군웅들이 들어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뭔가 지시를 받았는지 갑자기 감찰부원들이 꽁꽁 묶여 있는 진팔을 거칠게 땅에 꿇어앉게 만든 후, 검을 뽑아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마치 금방이라 도 목을 날려 버리려는 듯 말이다.
묵향을 압박하기 위한 행동이었겠지만, 그게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눈살을 찌푸린 묵향이 갑자기 주위의 군웅들이 모두 다 들으라는 듯 아 주 큰 소리로 소리쳤기 때문이다.
“양양성에 있을 때 내가 잘 대해 준 아이이긴 하지만, 그 아이의 목숨을 담보로 잡는다고 본좌를 굴복시킬 수 있을 줄 알았더냐? 그래, 죽일 테면 죽 여라!”
감찰부주의 얼굴이 일순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설마 묵향이 이렇게 고자세로 나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진팔을 위해 그토록 엄청난 손해를 감수했던 교주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진팔을 위협해 무릎을 꿇리기는 힘들지 몰라도, 최 소한 협상의 주도권은 가져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자신의 혈육을 죽이라고 하다니. 그동안 무림에 알려진 대로 교주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악하기 그지없는 인물이었다 는 말인가?
감찰부주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든 말든 묵향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진팔아, 네 목숨을 구해 줄 수는 없지만 복수는 확실하게 해 줄 테니 편히 눈을 감도록 하거라.”
갑작스런 묵향의 말에 진팔의 두 눈이 황당함으로 휘둥그레졌다. 묵향의 얼굴에 살짝 비웃음까지 어려 있는 걸 보고 있는 그의 머릿속에 지금 무슨 생각이 떠오르겠는가.
“야, 이 가증스런 새끼야! 그게 지금 나한테 할 말이냐?”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쏴주고 싶었지만, 진팔은 지금 아혈이 제압당한 상태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리로 끌려오기 전, 감찰부원이 그의 아혈 을 미리 제압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비록 작지만 천지문은 무림맹 소속이다. 진팔을 인질로 해서 마교 교주를 위협하는 걸 다른 무림동도들이 알아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아혈을 제압 해 진실을 최대한 감추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묵향은 보기 좋게 역이용한 것이다. 감찰부주가 뭐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묵향은 분노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수하들에게 외 쳤다.
“저 인면수심의 쓰레기들을 아예 중원에서 말살해 버려라. 모두 돌격하라!”
몇몇은 인질로 잡힌 채 꿇어앉아 있는 사내가 진팔이라는 것을 알아봤지만, 대부분의 부하들은 그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꽤나 고강한 무공 을 지닌 듯 보이는 도사가 사내의 목숨을 위협하며 교주를 윽박지르려 하고 있다는 것쯤은 금방 눈치 챌 수 있었다.
정파라고 거들먹거리던 놈들이 감히 교주님을 상대로 저런 비열한 짓거리를 벌이고 있다니……………. 모두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교주가 돌격명령을 내리니, 부하들은 용기백배하여 앞으로 돌진해 나갔다.
“교주님께서 명령하셨다. 모두들 돌격!”
“수라마참대는 나를 따르라!”
“천랑대는 나를 따르라!”
“호법원은 교주님을 호위하라!”
“우와아아아!”
넘쳐흐르는 살기와 함께 괴성을 질러대며 돌진해 들어오는 마교도들을 바라보는 감찰부주의 안색은 썩은 돼지의 그것마냥 순식간에 푸르딩딩해졌 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이, 이러면 안 되는 것인데……”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묵향은 현경의 고수라는 칭호에 걸맞게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 들어왔다.
하지만 묵향보다 먼저 날아온 게 있었다. 묵향이 쏘아 보낸 10개의 자그마한 원구들. 공공대사와의 접전에서 이게 얼마나 막강한 위력을 지닌 압축 된 강기 덩어리라는 것을 이미 견식한 상태였다.
원구들은 빠르게 맹주와 그의 주변에 서 있던 핵심고수들을 향해 날아왔다. 감찰부주 역시 그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히익!”
맹주와 주변에 서 있던 고수들은 즉각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원구에 공격을 퍼부었다. 가까이 접근한 다음에는 늦는다. 공공대사가 그렇게 했듯, 원 구가 가까이 접근해 오기 전에 파괴해 버리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예상 외의 상황 전개에 침통한 표정으로 서 있던 맹주는 급히 마음을 다잡고, 허리에 차고 있던 빙백수룡검(氷白水龍劍)을 뽑아들었다. 빙백수룡검 은 뽑히자마자 찬란한 빛을 뿜으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무림 십대기병의 서열 5위를 차지하고 있는 보검답게, 이기어검술에 의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빙백수룡검의 모습은 마치 찬란한 빛을 뿜으며 날아가는 한 마리 빙룡처럼 아름다웠다.
찬란한 빛무리를 뿜어내는 빙백수룡검과 묵향이 쏘아 보낸 원구가 맞부딪치는 순간, 무시무시한 대폭발이 사위를 진동시켰다.
콰콰쾅!
맹주는 10개의 원구를 모두 다 파괴하려 했지만, 그건 역부족이었다. 예상보다 각각의 원구가 지닌 파괴력이 훨씬 강했던 것이다. 강기를 저토록 작 은 공간에 압축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그 위력은 맹주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맹주 외에 다른 고수들 또한 원구를 향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강의 공격을 날렸다. 공공대사가 싸울 때를 미루어 봤을 때,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 는 성질의 공격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도 눈치 챘던 것이다.
하지만 공공대사가 강기를 뿜어 잘도 파괴시켰던 원구 덩어리들이, 자신들이 쏘아낸 공격을 꿰뚫고 계속 날아들어 오는 모습에는 모두들 혼비백산 해야 했다.
그 중 어기동검술(御氣動劍術)로 검을 날린 자들만이 원구를 겨우 막아냈을 뿐이다. 아니, 원구와 함께 검이 폭발해 버려 검이 조각조각 쇳조각으로 변해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봐야 했다.
이때, 운 나쁘게도 원구 공격에 노출된 3명 중 한 명이 바로 감찰부주였다. 그는 검술의 명가 무당파의 전대고수답게 어기동검술의 달인이었지만, 진팔의 목숨을 붙들고 교주를 위협하느라 검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코앞에 다다른 원구에 사색이 된 감찰부주는 급한 마음에 진팔을 들어 올려 원구에 들이댔다. 설마 자신의 혈육을 죽이겠냐 싶었던 것이 다.
그의 예상은 제대로 먹혀들어갔다. 원구는 곡선을 그리며 반원을 그리더니 감찰부주의 뒤편으로 날아왔다. 그러자 감찰부주는 이번에도 진팔을 붙 잡아 뒤쪽에서 날아오는 원구를 막았다.
다급했던 감찰부주로서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앞쪽으로 놓여 있던 진팔의 얼굴이 뒤쪽에 서 있던 군웅들을 향해 훤히 드러나게 되어 버린 것 은 그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진팔은 나름 꽤나 유명한 사내였다. 그의 얼굴을 모른다면, 양양성에 가 본 적이 없는 인물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금나라와의 방 어전에서 상당한 실력을 과시했을 뿐만 아니라, 마교 교주와 대놓고 비무까지 벌인 유일한 사내가 아닌가. 정파이면서도 마교 교주의 총애를 흠뻑 받 고 있다는 소문까지 퍼져 있는 상황이라, 각 문파에서 그를 예의 주시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아니, 저건 진팔이 아냐?”
그를 알아본 누군가가 외쳤고, 곧이어 그에 찬동하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맞아, 진팔이다.”
진팔의 얼굴을 알아보는 순간, 그들은 사태의 전말을 대충이나마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이곳에 올 정도의 고수들이라면 다들 흉험한 무림에서 산전 수전 다 겪어 본 사람들이었다.
척 보니 감찰부주가 진팔을 붙잡고 교주를 협박했고, 교주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진팔을 붙잡아서는 방패막 이로까지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런 모습을 보게 된 무림맹 고수들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속사정이야 어떻든 대의명분으로 살아가는 집단이 바로 정파였다. 아무리 교주를 상 대하기 위함이라고 해도 무림맹 감찰부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인질을 잡고 협박을 하다니.
더군다나 지금은 인간방패로 쓰는 치졸함까지 연출하고 있다. 게다가 그가 뒷덜미를 잡고 있는 인간방패는 마교도도 아니고, 정파인이지 않은가. 그제서야 중인들은 소림이나 곤륜파가 왜 떠나 버린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맹주에 대한 실망이리라. 과거에는 마교와의 싸움이라는 대의 명분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럴듯한 명분은커녕 악취가 풀풀 풍길 정도였다.
이 중 몇몇 문파의 수장들이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침을 뱉으며 휘하 문도들에게 외쳤다.
“에잇, 퉤퉤! 이런 추잡한 짓을 벌이다니. 철수한다!”
처음 한두 문파가 철수를 결정하자, 삽시간에 대열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런 갑작스런 사태에 가장 앞쪽에서 마교와 싸우고 있던 무림맹 직속의 정예무사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이 마교도들과 싸우고 있을 때, 정파 무사들이 그 뒤를 받쳐줄 줄 알았는데 모두들 떠나 버리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곧 동요하기 시작했고, 몇몇은 눈치를 보다 슬그머니 도망치기까지 했다.
결국에는 맹주 이하 무림맹의 핵심고수들 역시 교주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고 느꼈는지 모두 다 뿔뿔이 흩어져 도망쳐 버렸 다.
진팔을 붙잡고 있던 감찰부주는 교주가 다른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고 자신만을 쫓아오자 진팔을 내던지고 줄행랑을 쳤다. 그것도 교묘하게 진팔을 있는 힘껏 커다란 바위 쪽으로 내던짐으로써, 교주가 그를 받으러 달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그 반대편을 향해 꽁지가 빠져라 도망쳐 버렸던 것이다.
진팔은 바윗덩이를 향해 자신이 내동댕이쳐지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자신을 향해 급속도로 거리를 좁혀 오는 바윗덩이를 바라볼 담량이 없었던 것이다. 아마 곧이어 머리통이 박살나며 이승을 하직하게 되리라.
감찰부주가 자신을 바위 쪽으로 던진 이유야 뻔했지만, 교주가 구해 주려 올 리가 없지 않은가. 그가 알고 있는 교주라면 자신의 죽음에 눈길조차 주 지 않고, 감찰부주를 쫓아갈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이런 떠그랄! 하고 많은 죽음 중에서 바위에 대가리를 처박는 꼴사나운 죽임을 당하게 될 줄이야. 사저, 사랑했습니다. 다음에 태어나면 꼭 사저…….”
하지만 그의 생각은 더 이상 연결되지 않았다. 엄청난 힘이 자신을 붙잡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깜짝 놀란 진팔이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앞에는 놀랍 게도 교주가 서 있었다.
“서, 설마 감찰부주를 놔주고, 나를 살리기 위해 달려왔다는 건가?”
묵향은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어, 그동안 수고했다. 지금만큼 네 녀석을 살려둔 보람을 느낀 적도 없는 것 같구나. 그래, 소연이는 어떻게 됐느냐?”
어느새 아혈을 풀어 줬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사실조차 모른 채 진팔은 묵향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했다. 예전에 하도 많이 두들겨 맞다 보니 자동적 으로 몸이 반응한 것이다.
“사저께서는 저쪽 산 뒤편에 있는 천막에 감금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요. 저만 이쪽으로 끌려나온 겁니다.”
진팔의 대답에 묵향의 마음은 기쁨으로 인해 날아갈 것만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설마 그게 사실이 될 줄이야. 소연이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던 것이다.
“이런 개새끼! 감히 본좌를 속여?”
묵향의 갑작스런 외침에 진팔은 사색이 되어 외쳤다. 묵향의 얼굴 가득 피어오르고 있는 환희의 미소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정말이라니까요. 거기 가 보시면 금방 아실 건데, 제가 어찌 감히 교주님을 속이겠습니…….”
하지만 진팔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순간 주위의 풍경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급한 마음에 대답을 채 듣지도 않은 묵향이 진팔을 안은 채 전속력으로 경공술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진팔은 세차게 밀어닥치는 풍압으로 인해 눈조차 제대로 뜨기 힘들었다. 그도 나름 경공에 있어서는 남들보다 그리 뒤쳐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 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과신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순식간에 산을 넘어온 묵향이 소리쳤다.
“천막이 어디에 있느냐?”
그 말에 재빨리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진팔은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깁니다. 저쪽으로 조금만 더 가시면 보일 겁니다.”
이때, 소연을 찾기 위해 산을 이리저리 뒤지고 다니던 옥화무제와 비영단주는 묵향의 갑작스런 등장에 기절초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의 시간적 여유만 있다면 소연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묵향이 이미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이상 더 이상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묵향의 모습을 보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 경공을 전개해 도망쳐 버렸다.
감찰부주는 인질들이 행여 다른 사람들의 눈에 뛸까 두려워 숲 속 으슥한 곳에다 감금해 두었다. 예정에 없던 일이었던지라 후방으로 빼돌리지는 못 하고 감금해 놓은 천막 주위를 나무로 위장하는 정도로 조치를 끝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급한 옥화무제는 그들을 쉽사리 찾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숲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감찰부의 정예무사들이 천막을 경비하며 서 있었다. 그들은 갑작스런 침입자의 출현에 당황한 듯 그의 앞을 급히 가로막았지 만, 묵향은 얘기를 나눌 시간조차도 아깝다는 듯 곧바로 손을 썼다.
“크아아악!”
묵향의 손이 휘둘러지는 순간, 빛이 번쩍 하더니 순식간에 경비무사 몇 명의 목이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본 다른 경비무사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일그 러졌다. 도저히 자신들이 어떻게 해 볼 상대가 아닌 것이다.
이때, 진팔이 다급히 외쳤다.
“모두 싸우지 말고 도망치시오! 맹주를 비롯한 맹의 수뇌부도 도망친 지 오래요. 여기서 쓸데없이 목숨을 잃을 필요가………….”
진팔이 갑자기 입을 다문 이유는 더 이상 자신의 말을 들을 무사가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짧은 순간에 묵향이 그들을 다 죽여 버 린 것이다. 그것도 한 손으로는 진팔을 안고 있는 상태로 말이다.
자신을 던지듯 내려놓고 천막을 향해 다가가는 교주를 향해 진팔이 악을 쓰듯 외쳤다.
“모두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지 않습니까!”
묵향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진팔의 이 주제넘은 참견 자체를 듣지 못한 듯했다. 그는 지금 천막 안에 과연 소연이 있을 것인지에만 온 정신 이 팔려 있었다.
천막 안으로 들어섰을 때, 묵향은 그곳에서 그리운 얼굴들을 볼 수 있었다. 소연이와 설취, 그리고 서량까지. 모두들 혈도를 제압당한 상태로 드러누
워 있었다.
초췌해진 소연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묵향의 눈에는 물기가 차올랐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더군다나 악에 바친 장인걸의 말마따나 소연이 가 죽게 된 이유는 자신의 탓이라는 자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묵향이다. 놈과의 대결이 시작된 이상, 소연이의 보호에 만전을 기울였어야 했는데, 그걸 등한시한 잘못은 자신에게 있었으니까.
“살아 있었구나. 살아 있었어……”
묵향은 격동에 부들부들 떨리는 손길로 소연의 막힌 혈도를 풀어 줬다.
“아버지, 와 주셨군요. 아버지…”
소연은 눈물을 흘리며 묵향을 꽉 껴안았다.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묵향의 몰골만 봐도 자신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가 얼마나 험난한 길을 뚫고 온 것 인지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도 묵향은 그 모든 것을 잊고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묵향의 지극한 사랑에 소연은 너무나 도 큰 감동을 받았다.
뒤따라 들어와 부녀간의 감동스런 상봉 장면을 지켜보던 진팔은 가슴이 시큰해짐을 느꼈다.
그때 진팔의 눈에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 들어왔다. 설취와 서량은 아직까지도 혈도를 제압당한 채 누워 있었다. 그들 역시 묵향과 소연이 서로 껴안 고 해후의 기쁨을 누리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들의 혈도를 풀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진팔은 서둘러서 그 둘의 혈도를 풀어 줬다.
잠시 후, 묵향은 소연을 데리고 천막 밖으로 나왔다. 산 중턱에서 아래를 바라보니, 여기저기에서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무림맹 직속의 고 수들도 있었지만, 그중 상당수는 제때 이곳을 탈출하지 못해 싸움에 휘말려 버린 자들이었다.
묵향은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전투 중지!”
내공이 실린 그의 목소리는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그의 부하들이 상대편과 거리를 벌리는 모습이 여기저기에서 목격되었다.
묵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 쪽을 바라보고 있는 정파의 무림인들에게 외쳤다.
“오늘은 본교의 우환을 제거한 기쁜 날이다. 귀하들이 왜 본교에 싸움을 걸어온 것인지는 묻지 않겠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우리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달라. 만약 본좌의 부탁을 무시한다면, 이 이후에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겠다.”
묵향은 정파 무림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자리를 비켜달라는 표현을 썼다. 전투를 두려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의 심기를 건드리면, 쓸데없는 피를 흘려야 할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건 또 다른 분란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교 교주의 부탁 아닌 부탁에 정파의 고수들은 모두들 자신들이 소속된 문파를 찾아 뿔뿔이 길을 나섰다. 지금 여기에 남아서 싸우고 있던 사람들 은 자신의 동료들이 철수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일부러 남는 길을 택한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문파의 충성심이 강한 쓸 만한 자 들이라는 얘기였다. 모두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자들을 죽여 봐야 뒤끝이 좋지 못할 것은 뻔한 사실이다.
이때, 마화가 산 밑에서 맹렬한 속도로 달려 올라오는 게 보였다. 그녀를 뒤따르는 호법원 고수들의 모습도 보였다.
마화를 지근거리에서 호위하고 있는 것은 좌호법 초진걸(楚眞杰)이었다. 마교 서열 15위의 초강자가 그녀를 직접 호위하고 있는 것만 봐도, 지금 그 녀가 마교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쉽게 가늠할 수 있었다.
마화는 소연을 보자마자 달려가 그녀의 양손을 꼭 잡으며 감격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살아 있었구나. 교주님께서 네 걱정을 얼마나 하셨는지………….”
“덕분에 무사했어요. 감사드려요.”
마화는 묵향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어디 다치지는 않으셨어요?”
“괜찮아. 본좌와 겨룰 수 있는 자가 누가 있다고…………….”
하지만 묵향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마화가 갑자기 자신을 꼭 껴안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는 수많은 정파 무림인들이 몰려들었을 때 이제 끝장이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리고 그 후에 벌어진 생각지도 않았던 반전들. 그녀는 아 직까지도 자신과 묵향이 무사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험험…, 그것 참. 부하들도 보는 앞에서…………. 다친 곳이 없으니 괜찮대도 그러네.”
그제서야 마화는 자신의 추태를 깨닫고는 얼굴을 붉히며 묵향의 품에서 떨어졌다.
“자, 이제 본교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군.”
묵향은 좌호법에게 명령했다.
“부교주와 장로들에게 기별을 보내라. 본교로 돌아간다.”
“존명!”
“그리고 관지 장로에게는 흑풍대원들 중 몇 명을 차출해서 유광세 상장군을 도우라고 해라.”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교주님.”
멋쩍은 얼굴로 연이어 지시를 내리는 묵향을 유심히 바라보던 소연은 살며시 마화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축하 드려요, 어머니.”
어머니라는 말에 마화의 얼굴이 기쁨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때, 철영 부교주와 2명의 장로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게 보였다. 격전을 거친 후라 그런지 모두들 몰골이 말이 아니다.
“교주님!”
“무슨 일인가?”
“철수한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래, 본좌가 그렇게 명령을 내렸지.”
“그 명령을 거둬 주십시오. 맹을 상대로 승기를 잡았지 않습니까?”
표정들을 보니 철영과 함께 온 장로들의 생각도 같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묵향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을 뿐, 철영처럼 대놓고 따지지는 못했 다.
묵향은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좌우를 둘러보게. 이 상태로 전투가 지속 가능한지 말이야.”
“물론 지금 당장 싸우자는 것은 아닙니다. 속하의 생각으로는 굳이 십만대산으로 철수할 필요까지 있느냐는 겁니다. 일단 춘릉성으로 돌아가 한 며 칠 푹 쉬면서 기력을 회복한 다음, 곧바로 중원정벌을…………….”
하지만 철영의 말은 묵향의 손짓에 의해 막혔다. 묵향은 심히 불쾌하다는 듯 대꾸했다.
“자네는 지금 본좌의 결정을 거부하겠다는 건가?”
흠칫 한 철영은 황급히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교주님.”
“더 이상의 싸움은 의미가 없다. 자네는 교도들을 이끌고 십만대산으로 돌아가라. 알겠나?”
“존명!”
묵향의 확고한 명령에 철영은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했다. 뭔가를 결심하기 전이라면 교주는 수하들의 의견을 폭넓게 수용했다. 하지만 일단 자신이 결정을 내린 사안에 대해서는 수하들이 뭐라고 해도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을 철영은 잘 알고 있었다. 아마 교주는 철수에 대해 그전부터 고심했 었으리라.
“그런데…, 함께 가시지 않으실 겁니까? 교주님.”
“본좌는 양양성에 볼일이 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겠다.”
“옛.”
“그리고 군사는 지금 어디에 있나?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는데 말이야.”
“즉시 찾아서 이리로 데리고 오라고 수하들에게 명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