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7권 10화 – 마교와 무림맹의 거래
마교와 무림맹의 거래
“드디어 마교가 움직였답니다.”
총관의 보고에 옥화무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만, 내심으로는 크게 안도했다. 상대가 제대로 흔적을 알아먹었는지 몰라 그녀는 꽤나 망설였었다. 그들이 망설이고 있는 줄도 모르고 흔적을 좀 더 노골적으로 보냈었다면, 스스로 다 된 밥에 침을 뱉어 버릴 뻔하지 않았나. 그냥 참고 가만히 있기 를 백번 잘한 것이다.
“그래, 어느 길로 내려오고 있나요?”
“그게, 아직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총관의 대답에 옥화무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짜증 섞인 어조로 총관을 질책했다.
“그게 말이 되나요? 비영단원들의 상당수를 1차 탐색지에 물샐틈없이 배치해 놨는데, 도대체 어디로 빠져나갔다는 건가요?”
옥화무제는 효과적인 감시를 위해, 마교도들이 10일 동안 전속력으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를 기준으로 십만대산에서부터 동심원을 그렸다. 그 동심 원의 제일 안쪽이 1차 탐색지, 두 번째가 2차 탐색지, 그런 식으로 탐색지마다 비영단원들을 촘촘히 배치해 놓았던 것이다.
옥화무제의 질책에 총관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지금까지 마교도들이 이동했었던 지점들을 중심으로 요원들을 중점적으로 배치해 놨었습니다. 그런데 마교도들이 갑자기, 그것도 한밤중에 북쪽 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 나갔는지라……………’
옥화무제는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규모도 파악하기 힘들었겠군요.”
“예, 최소한 수천 명은 되지 않을까 짐작된답니다.”
“수천 명이라……?”
자세하지 못한 정보에 옥화무제는 더욱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를 가장 불쾌하게 만든 것은, 아무리 창졸지간에 벌어진 일이라고 하지만 요원들이 그들의 숫자를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숫자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면, 그들 개개인이 내뿜는 마기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볼 여유는 더더욱 없었으리라.
이렇게 되면 이번 작전을 위해 마교에서 투입한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예 짐작조차 불가능해져 버리는 것이다.
마교도들의 행적을 놓치기는 했지만, 옥화무제는 아직까지 여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표가 어딘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두 번 다시 당하지 않도록 조치하세요.”
“이미 조치를 취해 놨습니다. 다음에는 그들이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출발하더라도 이렇게 어이없이 놓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총관의 거침없는 대답에 옥화무제는 그제서야 흡족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던 그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화급히 물었다.
“미끼에 문제점은 없겠죠? 혹시나 거기서 엉뚱한 자료라도 새나가면 곤란해요.”
“염려 놓으십시오. 제가 직접 가서 확인했습니다. 그곳에 쌓여 있는 문서더미들 중에서 쓸 만한 것은 단 한 장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나마도 적의 공 격을 받자마자 모두 불태워 버릴 겁니다. 마교 쪽에서는 자신들이 총단이 아니라 분타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절대로 눈치 채지 못할 겁니다.” “잘했어요.”
옥화무제의 표정이 한결 느긋해졌다.
잠시 지도를 바라보던 옥화무제가 문득 입을 열었다.
“침투경로는 뻔해요. 북쪽으로 올라가며 우리 쪽의 추적을 따돌린 다음, 아래로 내려오겠죠. 마기를 숨기면서 내려올 만한 길이라고 해 봐야 뻔한 거 아니겠어요? 인적이 드문 곳들을 중점적으로 관찰하라고 비영단주에게 전하세요.”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공손히 대답한 총관은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옥화무제에게 조언했다.
“마교의 주력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걸 무림맹에도 통보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어차피 우리가 망하는 걸 좋아했으면 좋아했지, 도와줄 리가 없는데 말이에요.”
“마교가 본문을 멸망시키려고 한다면 그렇겠지만, 우리 쪽을 흡수하려고 한다면 얘기는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총관의 말에 옥화무제는 자신이 뭘 놓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흐음…, 그건 꽤 괜찮은 계책이로군요.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예, 태상문주님.”
“그리고 추밀사를 우리 쪽으로 포섭하라고 문주에게 전하세요.”
“추밀사를 포섭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금나라 쪽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 만큼, 황실에서는 전력을 다해 반란을 진압하려 들 겁니다. 비록 반란군 들이 아무리 정예라 해도 결국에는 진압당할 게 뻔합니다.”
옥화무제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마교가 돕지 않는다면 십중팔구는 그렇게 되겠죠. 하지만 마교가 변수에요. 그런 만큼 혹여 반란이 성공했을 때, 그 달콤한 과실이 마교 쪽으 로 넘어가지 않도록 미리 침을 발라둘 필요가 있다는 말이에요.”
총관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아, 그렇군요. 즉시 문주님께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무림맹에 마교의 준동을 알릴 때, 그들이 반란군들을 뒤에서 돕고 있다는 것도 함께 전하도록 하세요. 뭔가 흑심이 있지 않고서야 왜 그런 짓을 하겠느냐고 말이에요.”
“기가 막힌 계책이십니다. 즉시 그렇게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총관이 물러난 후, 홀로 남은 옥화무제는 다시 한 번 지도를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흥! 감히 본녀를 없애겠다고? 아직 100년은 이르다.”
자신 있게 말하던 옥화무제는 갑자기 흠칫 놀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까지 마교는 십만대산 인근으로 이어져 있는 산맥을 타고 중원으로 내려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저 멀리 북쪽으로 돌아오는 길을 택했다. 아무 리 그런 꽁수를 쓴다고 해도, 결국에는 산맥을 타고 내려와야 하는 만큼 내려올 길은 뻔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번쩍 든 것 이다.
“아차! 그 방법이 있었구나.”
그것은 바로 귀식대법이었다. 이미 장인걸의 수하들이 사용하여 그 유용성을 확실히 입증했다. 백량 장로가 이끄는 종남파 고수들을 상대로 말이다. 기습부대는 완벽하게 함정에 빠졌고, 철저히 궤멸당했다. 그 이후, 무림맹 쪽에서는 최대한 조심했기에 똑같은 수법에 두 번 다시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귀식대법에 관한 정보를 마교 쪽에는 알려 주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장기적인 안목으로 봤을 때, 마교가 그런 수법을 쓰게 되면 골치 아파지 는 것은 정파 쪽이었으니까.
확실하게 정보 통제를 해 왔기에, 귀식대법을 이용한 편법을 마교 쪽에서는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대금전쟁 을 봐도 마교 쪽에서 귀식대법을 이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 교활하기 짝이 없는 놈이 모르는 척하며 일부러 써먹지 않았을 확률도 배제할 수 없었다. 언젠가 결정적인 순간에 써먹 을 요량으로 말이다.
이렇게 되면 마교도들이 어디로 내려올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수없이 많은 관도들을 이용할 수도 있었고, 선편을 이용해 강을 따라 내려올 수도 있었 다.
그렇다고 마교도들이 어떤 방법을 쓰던 알아내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상대의 수법을 옥화무제가 뻔히 알고 있었으므로. “우마차를 이용하는 대규모 상단도 조사하라고 해야겠어. 호호홋! 가소롭기는…… 겨우 그런 얄팍한 수로 본녀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니.”
옥화무제는 묵향의 일그러진 얼굴이 눈에 보이는 듯하자, 그동안 가슴에 맺혀 있던 응어리들이 한 번에 풀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욱 소리 높여 웃을 수 있었다. 쌓여 있던 모든 것들을 다 풀어 버리기라도 하듯.
오랜 세월 마교의 압박 아래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느냐로 고심했었던 곤륜파였다. 하지만 지금 곤륜파는 개파 이래 최고의 중흥기를 맞이하고 있 었다. 곤륜무황이 맹주로 선출되었고, 꿈에도 그리던 중원 진출도 실행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중원 진출을 내세우며 분타를 건설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 속셈은 따로 있었다.
「마교와 정면충돌을 벌이는 미친 짓은 두 번 다시 하기 싫다!」
지금껏 마교와 충돌하며 숱한 피를 흘렸던 그들의 자그마한 꿈이었다. 문파의 명운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마교가 발흥할 때마다 화살받이로 그 짓을 하자니 죽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 마교의 교주는 대단히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고, 그의 수하들 또한 막강했다. 지금은 평화를 가장하고 있지만, 그가 언제 역대 의 교주들처럼 중원정벌을 단행할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런 결심을 하는 순간, 곤륜파는 멸문당할 가능성이 컸다. 교주는 그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곤륜파는 마교와 가급적이면 멀리 떨어져 있고, 또 마교가 중원에 진출하더라도 그 진격로에서 벗어난 지역으로 옮겨가기를 원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바로 호남성 북부에 자리 잡고 있는 천자산이었다. 곤륜산에서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 천자산에 분타를 만들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본거지를 통째로 옮기는 것은 극비사항이었다. 무림의 다른 문파들은 아직까지도 곤륜파가 방파제 구실을 해 주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만약 곤륜파가 분타를 건설하는 게 아니라, 아예 짐을 싸서 이사 갈 생각이라는 걸 그들이 눈치 챈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방해할 게 뻔했다.
그렇기에 겉으로 봤을 때, 곤륜파는 예전과 비교해서 전혀 변화가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내부를 보면 꽤나 많은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먼저, 곤륜파가 자랑하던 핵심고수들의 태반 이상이 천자산 분타와 무림맹으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오늘도 곤륜파의 수뇌부들은 어떻게 하면 몰래 기반을 천자산으로 옮길 수 있을까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송인 장로, 출발 준비는 제대로 되고 있는가?”
무원(元)장로의 질문에 송인 장로가 공손히 대답했다.
“예, 사숙. 이미 준비는 끝마쳤습니다.”
“화물에 이상이 없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야.”
“염려 마십시오, 사숙.”
똑 부러지는 대답에 흡족하다는 듯 웃은 무원 장로는 고개를 돌려 장문인을 바라보았다.
“장문인.”
“예, 말씀하십시오, 장로님.”
장문인은 무원 장로의 호명에 공손하게 허리를 조아렸다. 하기야 공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장문인의 사조뻘이었으니까.
다른 문파들 같았으면 무(戊)자배나 송(松)자배는 오래전에 은퇴하여 느긋하게 우화등선 할 준비나 하고 있어야 했겠지만, 곤륜파는 모든 이들이 현 역으로 뛰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고수가 필요했기에, 곤륜파에서는 은퇴라는 게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곤륜파는 장로들의 연배가 다른 문파들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나이는 많았지만, 산속에서만 생활해서 그 런지 세속에 물든 중원의 도인들에 비해 훨씬 더 순박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본문의 오랜 꿈이 이뤄지려는 중요한 시점이니, 제자들의 입단속에 더욱 신경 쓰도록 하시구려.”
“염려 놓으십시오. 자나 깨나 조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때, 문도 한 명이 허둥지둥 달려 들어왔다. 그는 공손히 장로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 후, 장문인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보고했다.
“마교에서 사자(使者)가 도착했습니다.”
“사자가?”
예전 같았으면 불문곡직하고 바로 내쫓아 버렸을 것이다. 사자랍시고 찾아와서 놈들이 하는 소리야 언제나 뻔했으니까. 사자에 따라 표현하는 방식 에 약간씩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결국 요지는 「목숨만은 살려 줄 테니 항복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태사조(太師祖)께서 교주와 약간의 친분을 쌓았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그들이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은 태사조께서 맹주가 되어 무림맹으로 갔다는 것을 마교에서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왜 맹으로 사신을 보내지 않고 이쪽으로 보냈느냐 하는 것이었다.
장문인은 조용히 지시를 기다리는 듯 무원 장로를 바라봤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했는지 무원 장로는 허둥지둥 말했다.
“이리로……………. 아니지, 접객원(接客院)으로 그 시주를 모시도록 하거라.”
“예, 장로님.”
“장문인은 나와 함께 가십시다. 그가 만나기를 원하는 것은 장문인일 터이니.”
무원 장로의 말에 장문인은 고개를 조아렸다.
“예, 장로님.”
장문인이 무원 장로와 함께 접객원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마교의 사신이 당도해 있었다.
사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가공할 만한 기세에, 이런 인물을 사신으로 보낸 교주의 저의를 두 사람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굵은 눈썹에 사각진 턱, 게다가 얼굴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지렁이 같은 흉터들까지. 안 그래도 험악한 인상에 가공할 만한 마기까지 풀풀 뿜어대 고 있는 걸 보니, 이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공갈협박하려고 왔다는 오해를 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시비를 걸겠다는 건지, 아니면 알아서 기라 는 건지.
상대의 기세에 밀리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으며 장문인이 위엄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커흠, 천마신교에서 오셨다 하셨소이까?”
그러자 장문인의 예상과 달리, 사신은 재빨리 일어나 정중하게 포권을 하는 것이었다. 생긴 것과는 사뭇 다른 정중함이었다.
“저는 천마신교의 좌외총관 여진이라고 합니다. 지존의 명을 전하기 위해 귀 문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험한 길을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소이다.”
서로 간에 인사가 오고 간 후, 장문인은 소박한 다과를 권했다.
“산속의 도량이다 보니, 대접할 만한 것이 없구려.”
“괜찮습니다.”
“그래,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발걸음을 하시었소?”
“예, 이것을 전해 드리려고 오게 되었습니다.”
여진은 품속에 손을 넣어 두툼한 책자를 하나 꺼내 장문인에게 건넸다.
책자를 받아든 장문인은 왜 이런 걸 주냐는 식의 얼굴을 하며 물었다.
“이게 무엇이오?”
“본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정파 비급의 목록입니다.”
“정파 비급의 목록이요?”
그 말에 무심결에 책장을 펼치던 장문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책장을 쥐고 있는 손까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함께 배석해 있던 무원 장로는 혹, 상대가 암습이라도 한 게 아닌가 싶어 걱정스런 어조로 급히 물었다. 혹시 책장에 독이라도 묻혀놨나? “장문인, 괜찮으시오?”
“괘,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장문인을 보고 나서야 무원 장로는 충격을 준 것이 바로 책에 쓰여 있는 내용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그는 장문인 뒤편으로 슬금슬금 다가가 어깨 너머로 책의 내용을 훔쳐봤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얼굴 또한 장문인의 표정과 비슷하게 변해 버렸다. 오랜 세월 도를 닦아 정심하던 그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 것은 책자에 기록되어 있는 무공들의 이름들이었다. 그 중에는 곤륜파에서 오래전에 실 전된 것으로 알려진 무공들도 다수 끼어 있었는데 특히, 태허검보(太虛劍譜)는 다시 얻을 수만 있다면 목숨을 걸어도 전혀 아깝지가 않을, 곤륜이 자 랑하던 철학이었다.
장인걸과의 전쟁이 격화되고 있을 때, 무황과 교주 간에 모종의 밀약이 오갔다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몰랐지만, 뭔가를 해 주는 대가로 마교가 수집해 놨던 정파 비급들의 사본을 제공해 준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 얘기를 듣고 얼마나 기대감에 부풀었던가. 하지만 곧이어 그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전쟁 막바지에 벌어진 돌연한 무림맹의 배신. 그런 상황에 서 마교가 비급을 줄 리 없다는 것은 당연한 추측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을 보내 자신들이 소장하고 있는 비급들의 목록을 보여 주는 저의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이걸 줄 테니 또 다른 밀약이라도 맺자 는 건가? 아니면………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장문인보다 먼저 정신을 수습한 무원 장로가 여진에게 의문이 담긴 시선을 보내며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이걸 보여 주는 이유를 알고 싶소.”
장문인도 아니고, 자신을 장로라고 소개한 인물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질문을 던지자 여진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마교 쪽 입장에서 봤을 때, 장로 가 아무리 연배가 높다고 해도 교를 이끄는 지존은 교주였다. 그렇기에 그는 무원 장로가 장문인을 앞에 두고 불쑥 끼어들었다는 게 매우 불쾌했다. 그는 무원 장로를 무시하고 장문인에게 말했다.
“예정대로라면 5일 후, 목록에 적힌 비급들이 모두 다 이곳에 도착하게 될 겁니다. 맹주께서 여기까지만 운반해 주면 그 뒤는 귀 문파에서 책임지고 무림맹까지 운반할 것이라고 하셨다면서요. 혹시 변동사항이 있습니까? 장문인.”
주겠다는 데야 반론의 여지가 있겠는가. 혹시 교주의 마음이 바뀌어, 주지 않겠다고 할까 두려웠던 장문인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 없소. 응당 그렇게 해야지요.”
장문인과 무원 장로는 그 후로 여진과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둘 다 정신이 딴 데 가 있었기 때문이다.
용무를 마친 여진이 돌아간 지 한참이나 지났건만, 장문인은 아직까지도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지금 자신이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결국 장문인은 슬그머니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어 봤다. 고통이 밀려오는 걸 보면 꿈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때, 옆에 앉아 있던 무원 장로가 감격스런 어조로 중얼거렸다.
“허허, 말로만 들었던 태허검보를 볼 수 있게 될 줄이야. 이게 꿈은 아니겠지요? 장문인.”
태허검법은 곤륜이 자랑하던 최고의 검법들 중 하나였다. 꽤나 난해한 상승무공으로서 익힌 사람도 몇 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번 마교동란 때 검보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그 무공을 익힌 사람도 모두 다 전사해 버려 맥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이에 곤륜의 후인들은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했었다.
“참,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사숙께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게 먼저겠구려.”
무원 장로가 그렇게 말하고 허둥지둥 일어설 무렵, 문인들이 달려와 장문인에게 고했다.
“무림맹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문인들의 안내를 받으며 전령이 도착했다.
“맹에서 왔느냐?”
“예, 장문인. 이것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전령은 품속에서 서신 한 장과 서책 한 권을 꺼냈다. 장문인이 서책을 펼쳐 앞부분을 보니, 방금 전에 사신이 전해 준 것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곤륜 무황이 장문인에게 마교와의 밀약에 대해 통보하기 전에, 마교 쪽에서 먼저 사신이 도착했던 것이다.
서신을 쭉 읽은 장문인은 그것을 무원 장로에게 건네줬다.
“맹주께서는 이미 이 일을 알고 계시군요.”
“그렇다면 방금 전에 사신이 와서 5일 후에 물건이 도착할 거라고 했다는 것을 맹주께 알리는 게 급선무이겠소이다. 빨리 전서구를 날리도록 하시 오.”
“알겠습니다, 장로님.”
옥화무제의 예상과는 달리, 마교도들의 모습은 쉽사리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지? 미끼를 던져 줬으면 달려들어야 할 거 아냐.”
집무실 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옥화무제가 짜증스런 어조로 투덜거리고 있을 때, 총관이 허겁지겁 달려들어 오는 게 보였다.
“찾았나요?”
“그게 아니라, 십만대산에서 대규모 치중대(輜重隊)가 출발했다고 합니다.”
“치중대라고요? 혹시 그 안에 고수들을 숨겨 놓은 게…………?”
총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치중대 주위를 거의 3,000여에 달하는 마인들이 호위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만약 이게 고수들을 어딘가로 빼돌리는 것이 었다면, 이렇게까지 눈에 띄는 수법은 동원하지 않았겠지요.”
“그렇다면 치중대의 내용물은….?”
잠시 고심하던 옥화무제의 머릿속에 번쩍 스치는 게 있었다.
“비급! 비급이로군요.”
“추밀단주께서도 그럴 것 같다는 예상을 하셨습니다.”
옥화무제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제야 비급을…………?”
전쟁이 끝난 지가 언젠데 지금에서야 약속했던 비급을 제공할까? 더군다나 막판에 뒤통수를 친 무림맹에 말이다. 그녀조차도 교주가 당연히 비급을 주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총관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혹시 무림맹의 이목을 혼란시키기 위한 미끼가 아닐까요?”
“미끼라구요?”
“예. 우리 쪽에서 마교의 움직임에 대해 무림맹에 제보하지 않았습니까. 갑작스런 마교의 움직임에 대해 무림맹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 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비급을 풀어 놓으면, 자연히 욕심에 눈이 멀어………….”
옥화무제는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총관의 말을 끊었다.
“그건 말도 안 돼요. 그렇게 하면 맹에서는 오히려 더욱 의심할 거예요. 맹의 수뇌부들이 얼마나 닳고 닳은 것들인데, 그런 얄팍한 수법에 넘어가겠 “어요.”
이렇게 말한 옥화무제는 확신 어린 어조로 외쳤다.
“이건 분명히 뭔가 협잡이 있는 거예요.”
“협잡, 이라니요?”
“그러니까 본문의 일을 눈감아 주는 대가로 교주가 맹주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거죠.”
그 말을 들은 총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다면 이미 맹주와 밀약이 체결되었을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분하지만, 그렇게 밖에는 추론할 수 없어요. 교활한 놈, 이렇게까지 나온다 이거지!”
그녀는 홧김에 총관을 향해 신경질적인 음성으로 외쳤다.
“그놈의 비급들을 탈취하던지 불살라 버리도록 하세요.”
“태상문주님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불가능합니다. 마교의 정예 3,000명이 지키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쪽에서 방해공작을 가해 올 걸 예상하고 있을 게 뻔한데, 그게 먹혀들어가겠습니까?”
“흥, 탈취하는 거라면 몰라도 불사르는 거라면 가능하겠지요. 빈틈을 노리다 보면 최소한 한 번쯤은 기회가 올 거예요. 십만대산에서 무림맹까지는 아주 먼~~ 길이니까.”
총관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이동로를 미뤄 봤을 때, 그들의 목적지는 무림맹이 아니라 곤륜산인 듯합니다. 아마도 곤륜파에 비급들 을 넘겨줄 모양입니다.”
“곤륜파라고요?”
“예.”
“이런 약아빠진 놈!”
그러고 보니 맹주와 밀약을 맺었다면 묵향으로서도 선물을 곤륜파에 던져 주는 게 맞을 것이다. 맹주로서도 선물이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 셈이니 안심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물론 옥화무제도 곤륜파의 손에 들어간 비급에 손을 댈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마교는 물론이고, 정파까지 적으로 만들어 놔서는 무림에서 살아남 을 방법이 없으니까.
뽀드드득!
‘언젠가는 갚아 주고 말 거야.’
옥화무제가 원독에 사무쳐 묵향은 물론이고, 맹주에게까지 마음속으로 저주를 퍼붓고 있을 때,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총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 다.
“참, 일전에 그 발해 문자 말입니다. 추밀단에서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순간 옥화무제의 두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교주가 알고 싶어 하는 내용이 뭔지 아주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 뭐라던가요?”
총관은 쪽지 한 장을 그녀에게 전하며 말했다.
“이런 뜻이랍니다.”
옥화무제가 쪽지를 보니, 「천하제일을 논하고 싶다면 백두산(白頭山)으로 오라」라고 쓰여 있었다.
“백두(白頭)…, 흰 머리라……………? 아마도 만년설이 덮인 산을 뜻하는 것 같은데, 천산(天山)을 말하는 건가요?”
“속하가 알아본 결과로는 장백산을 그곳 토착민들이 그렇게 부르고 있답니다.”
옥화무제는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
“참, 발해 문자라는 것을 깜빡했네요. 동이족이 가장 숭상하는 산이 바로 장백산이라는 말을 어딘가에서 읽어 놓고도 이런 착각을 하다니.
그렇게 말하며 옥화무제는 다시 한 번 쪽지를 바라봤다. 왠지 천하제일이라는 글자가 눈에 거슬렸다. 동이족도 그들 나름대로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무술을 익힌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 잡술로 감히 천하제일을 논할 수 있을까? 아마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쓰여 있는 천하제일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해하기가 힘든 말이네요.”
“그래서 비영단주께 청해 1개조를 그쪽에 파견하기로 했습니다. 일단 한번 훑어본 다음에, 뭔가 걸리는 게 있으면 추후에 인원을 좀 더 투입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겠지요. 안 그래도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