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7권 12화 – 여우의 굴은 여러 개

여우의 굴은 여러 개

흑풍대는 옥화무제가 예측했던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더 교묘하게 움직이고 있었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다.

그들은 관도를 따라서 당당하게 이동했다. 어떤 이는 상인으로, 어떤 이는 유람객으로, 또 어떤 이는 이웃 마을에 놀러가는 한량처럼 행동했다. 이동 하면서 그들은 서로를 모르는 척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관도 위를 일반인들과 섞여서 이동하다 보니, 그들의 움직임을 이전부터 추적해 오지 않았다면 깜빡 속아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흑풍대의 움직임에 대해, 본문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수고했어요. 진격 속도로 봤을 때, 벌써 시작되었겠죠?”

“아직 전서가 도착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이틀 전에 미끼를 물었을 겁니다.”

총관의 대답에 그녀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본녀가 직접 가서 보는 건데 그랬네요. 먼 길을 도는 수고까지 마다하지 않고 기세등등하게 들이닥쳤는데 건진 게 하나도 없다면, 그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그 똥 씹은 표정을 생각만 해도 아주 통쾌하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교주의 얼굴을 보러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가짜 총단에 제대로 된 전투원이 있을 리 없었다. 적들의 기습에 허둥대며 중요한 문서를 소각하고 도망치는 무영문의 나약한 모습이 연출되도록 그럴듯하게 꾸며 놓은 곳인데, 거기에 뭘 볼 게 있다고 가겠는가.

“이번 일로 본문을 조금만 더 얕잡아 보게 되면 좋을 텐데… 아니, 이런 한심한 버러지들을 없앤다고 괜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텐데……………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는 건가요?”

“아닙니다. 충분히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도록 꾸며 놨습니다.”

“잘되어야 할 텐데………….”

“잘될 겁니다, 태상문주님.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던 옥화무제가 총관을 향해 물었다.

“참, 보고서는 언제쯤 올라오죠?”

“오늘쯤 전서들이 들어오기 시작할 테니, 정리가 되는대로 곧바로 보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군요.”

“옛, 추밀단주님께 그렇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좋아…….”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던 옥화무제가 갑자기 고개를 획 돌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총관 역시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봤지만, 보이 는 거라고는 벽뿐이었다. 그렇다고 그 벽에 옥화무제가 경악한 표정을 짓고 볼 만한 것이 걸려 있느냐 하면 그건 절대로 아니었다. 아름다운 수묵화 몇 점만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옥화무제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뭔가 문제가 있군요.”

중얼거리며 손을 쭉 뻗자, 평소 그녀가 앉는 자리의 뒷부분을 장식하고 있던 고풍스런 보검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그녀에게로 날아왔 다. 검을 손에 쥔 옥화무제는 딱딱하게 굳은 음성으로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추밀단주에게 달려가 특급대피령을 전하도록 하세요.”

“특급대피령이라니요, 태상문주님? 갑자기 그런 말씀을 왜…………….”

“미세한 마기가 저쪽 방향에서 느껴져요. 하나 둘도 아니고, 엄청난 숫자가! 빨리 움직여요.”

지시를 내린 옥화무제의 신형은 한순간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총관은 다급히 추밀단 본부로 달려갔다.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무사들에게 총 관은 정신없이 외쳤다.

“지금 당장 특급대피령을 발호하고, 황색 신호탄 3개를 터뜨려라. 이건 태상문주님의 명령이시다!”

“예? 옛!”

지시를 내린 총관이 건물 안으로 달려 들어가니, 거의 100여 명이 넘는 문사들이 문서를 정리하며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다. 사방 벽면에는 수없이 많은 문서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그 외에 몇 개의 방에 이런 자료들이 잘 정리된 채 쌓여 있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문서들을 꺼내어 읽기도 하고, 혹은 자신들이 정리해 놓은 문서를 그 안에 집어넣기도 했다. 이 방대한 양의 자료들이 바로 무영문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재산이었던 것이다.

“특급사태다! 지금 당장 가장 중요한 자료만을 챙겨서 이곳을 벗어나라!”

그러자 한쪽 구석에 앉아 뭔가를 살펴보고 있던 한 노인이 벌떡 일어서서 총관에게 다가왔다.

“특급사태라니, 도대체 무슨 일인가? 총관.”

“추밀단주님, 급히 피하셔야겠습니다. 마교가 침입한 모양입니다.”

“마교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가. 그들이 이곳을 알아낸다는 건 불가능해!”

“지금 당장 대피하라는 태상문주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자료만을 챙기고, 나머지는 빨리 소각해 주십시오.”

갑작스런 사태로 얼이 빠져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문사들을 향해 총관이 외쳤다.

“특급대피령이란 말이다! 모두들 빨리 움직여라! 빨리!”

그제서야 문사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중요한 문서들을 꺼내 자루에 담는 한편, 밖에서 커다란 상자를 들고 와 그 안에 있는 통들을 꺼냈다. 통 안에는 기름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가지고 갈 특급 기밀문서를 제외한 문서더미에 기름을 끼얹는 그들의 두 눈에는 안타까움에 어느 샌가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감(感)은 저들이 마교도라고 속삭이고 있었지만, 옥화무제는 도저히 자신의 감각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마교도들이 이곳에 나타날 수 있 단 말인가. 그렇기에 그녀는 위험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미약하게 느껴졌던 마기들이 점점 더 강하게 느껴졌다. 서로가 쌍방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기에, 마기의 강도가 강해지는 속도는 대 단히 빨랐다.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렇게 많은 강력한 마기 덩어리들이 코앞에서 느껴지고 있는데, 그것을 어찌 엉터리라 고 치부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제는 눈으로 확인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마교도가 아니라면, 아니 마교에서 키운 절정고수들이 아니라면 어찌 인간이 저토록 강한 기운을 뿜어 낼 수 있겠는가.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발걸음을 되돌려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그녀는 볼 수 있었다.

콰꽝!

“으아악!”

총단의 외곽을 경비하고 있던 무사들이 공포에 질려 미친 듯 도망치고 있는 장면을. 하지만 그들은 뒤쫓고 있는 4명의 마인들을 따돌릴 수가 없었 다. 거리가 금방 줄어들더니, 그녀가 보는 앞에서 하나씩, 하나씩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시체가 되어 나뒹굴었다.

무공 수준이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보니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는 옥화무제의 심사가 좋을 리 만무했다.

“이, 이런 쳐죽일 놈들이!”

옥화무제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봤다. 수십 개가 넘는 마기 덩어리들이 주위에 산재해 있었다. 하지만 저 빌어먹을 4명을 죽이고 튀는 것이라면, 그 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생각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마음을 굳히자마자 옥화무제의 신형은 그들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마교도들은 지금까지 옥화무제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그 순간, 모두들 그녀의 존재를 깨달았다. 사방으 로 흩어져 무영문의 무사들을 주살하고 있던 마교도들은 옥화무제를 포위하기 위해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옥화무제가 4명의 마인들을 해치우는 데 걸린 시간은 예상보다 훨씬 길었다. 아무리 그녀가 화경에 이른 고수라고 해도, 일문의 장로급에 해당하는 무공을 보유하고 있는 고수들을 순식간에 해치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기습공격도 아니었고, 그녀가 전력을 다하기 위해 공 력을 최대한도로 끌어올린 그 순간에 모두들 그녀의 존재를 파악해 버린 상태였다. 미리 응전할 준비를 갖춘 고수들을 해치우는 것은, 아무리 화경급 이라고 하지만 그녀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젠장!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어.”

머릿속으로는 지금이라도 당장 전역(戰域)을 이탈하는 게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한 놈이 아직 살아남아 있었기 때 문이다. 그것도 3번째 녀석을 해치울 때 함께 받은 충격으로 인해, 입 주위로 핏물까지 흘리고 있는 놈이었다. 그런 놈을 그냥 놔두고 간다는 것은 너 무나도 아까웠다. 옥화무제는 악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멀쩡한 상태에서도 도저히 상대가 불가능한 옥화무제를, 내상까지 입은 상태에서 버틸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지닌바 최선을 다해 옥화무 제를 상대했다. 마침내 옥화무제의 검에 자신의 목이 떨어져 나갈 때, 그의 눈은 웃고 있었다. 동료들이 자신의 복수를 해 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는 듯.

마지막 녀석의 명줄을 끊어 놓은 옥화무제는 내심 아차 싶었다. 너무 시간을 지체한 것이다. 이미 수십 명이 넘는 마기들이 주변에 내달리고 있었고, 그중 서넛은 코앞까지 들이닥친 상황이었다. 그녀는 생각할 것도 없이 뒤돌아서서 내달리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공격을 하기에는 거리가 조금 멀었지만, 암기로 공격하기에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뒤따라 붙은 마교도들은 저마다 품속에서 암기를 꺼내들었다.

피유웅~!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흘리며 사방에서 암기들이 날아왔다. 가느다란 우모침과 달리 파공성까지 흘리면서 날아오는데도 그녀는 암기들을 피할 수가

없었다. 쫓아오는 놈들이 워낙에 고수들이었기에 자신이 발출한 암기를 기를 통해 조종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어기선회(御氣旋回)처럼 완만하게 꺾어 지는 게 아니라, 이기어검(以氣御劍)에 근접할 정도로 아주 급격한 각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검처럼 육중한 무기도 어기동검술(御 動劍術)을 통해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놈들인데, 하물며 작고 가벼운 암기를 다루지 못하겠는가.

수십 개가 넘는 암기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니, 이건 당문 최고의 암기술이라는 만천화우보다 더 피하기가 힘들었다. 이리저리 몸을 비틀기도 하고, 검과 손으로 쳐내기도 했지만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런 젠장!”

그녀는 내력 소모가 좀 크더라도 강공으로 나가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옥화무제의 보검이 마치 불이라도 붙은 듯 붉게 달아올랐다. 그 리고 그와 동시에 붉은 궤적을 그리며 공간을 가르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옥화무제가 검을 휘두른 궤적을 따라 마치 안개와도 같은 희뿌연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퍼퍼펑!

놀랍게도 그 희뿌연 안개 같은 것과 맞부딪친 암기들이 사방에서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과연 화경급 고수라는 이름에 걸맞은 놀라운 한수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녀가 퍼뜨린 거대한 강기의 파동은 마교도들에게 그 어떤 피해도 주지 못했다. 너무 폭넓게 퍼져서 날아갔기에, 개개인에게 안겨 준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이다. 마교도들은 제각기 자신에게로 뿜어져 날아온 강기를 손쉽게 막아내 버렸다.

‘이걸로 암기는 막아낼 수 있겠지만, 저들을 저지하는 데는 역부족이구나.’

날아오던 암기를 몽땅 다 파괴해 버렸기에 아주 잠시 동안이기는 했지만, 그녀는 전속력으로 도망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곧이어 수십 개가 넘는 암 기들이 또다시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결국 그녀는 또다시 강기의 파동을 내뿜어야만 했다.

암기만으로는 도저히 옥화무제를 저지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 마교도들 중 몇몇이 자신의 무기를 그녀에게 집어던졌다. 그것들은 암기에 비해 비교 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고, 그만큼 강력한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옥화무제에게는 그래도 다행이라면, 무기를 소유한 자들이 생각보다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 정도일까?

천마혈검대의 경우 천마혈검이라는 희대의 마검 100자루가 있었기에 아예 무기를 통일해 버렸지만, 대다수의 마교도들은 무기를 사용하기보다는 권장법을 선호했다. 역혈의 심법을 통해 막강한 내공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골 복잡한 무기술보다는 내공을 뿜어내는 권장법이 훨씬 더 익히기가 용 이했기 때문이다.

또다시 옥화무제의 검에서 강기의 파동이 퍼져 나갔다.

고오오오—.

하지만 무기들은 암기와 달리 강기의 파동을 뚫고 나왔다. 일회용인 암기에 비한다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두껍고 무게도 무거울 뿐더러, 훨씬 더 강한 무기들이었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무기들이 쏟아져 들어오자, 옥화무제의 움직임이 더욱 바빠졌다. 달려가기도 해야 했지만,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무기들을 쳐내기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친 듯 달려가던 옥화무제는 검 한 자루가 바로 등 뒤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상체를 뒤로 틀며 강하게 쳐냈다.

파킹!

어기동검에 의해 날아오던 검은 그녀가 휘두른 불타오르는 듯한 보검에 맞고 두 조각으로 쪼개졌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두 조각으로 나눠 진 검은 제각각 살아 있는 듯 움직이며 그녀를 또다시 공격해 왔던 것이다.

“끈질긴 놈들!”

옥화무제는 문득 날아오는 검을 막을 게 아니라, 무기를 조종하는 마교도들을 공격하여 그들이 어기동검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게 훨씬 더 효율적 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 즉시 그녀의 검에서는 10여 가닥에 이르는 강기다발이 사방으로 힘차게 뻗어 나갔다.

파창!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옥화무제를 공격하던 검 조각들이 힘없이 땅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그뿐만 아니라 마교도들은 저마다 자신들에게 날아오는 강기를 처리하느라 잠시 발걸음을 늦췄다. 하지만 그것은 주위의 10여 명이었을 뿐, 나머지 20여 명이 넘는 마교도의 공격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그들은 순차적으로 옥화무제를 향해 공격을 가했다. 그리고 옥화무제는 내심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그 공격을 받아 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공력 소모가 계속되면 결코 좋을 게 없다는 걸 뻔히 알고 있었지만, 그녀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마교도들은 그녀의 발목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화경급 고수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과시하듯, 옥화무 제는 생명을 건 술래잡기에서 어떻게든 버텨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던 전장에 갑자기 변화가 찾아왔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 그녀를 덮쳐오고 있었던 것이다.

온 몸에 전율이 흐른 옥화무제는 재빨리 그 기운과 자신 간의 거리를 가늠했다. 거리를 재던 그녀가 허리를 틀며 정체불명의 기운을 힘껏 쳐냈다. 그 리고 그녀는 보았다. 자신의 검에 튕겨 나가고 있는 불타오르는 듯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장검 한 자루를.

‘이, 이기어검!’

상황은 최악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드디어 이기어검술을 구사할 수 있는 고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은 이곳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자신의 발목을 붙잡기 위해 검을 먼저 쏘아 보낸 것이리라. 옥화무제는 이를 질끈 깨물었다. 그가 여기에 도착하기 전에 무 슨 짓을 해서라도 진법이 펼쳐져 있는 곳까지 가야 했다. 그것만이 그녀가 살길이었다.

옥화무제와 죽음의 경주를 벌이고 있던 마교도들은 황당한 경험을 해야만 했다. 바로 코앞에서 달려가고 있던 옥화무제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 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신을 향해 돌진해 들어오는 동료들의 모습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젠장!”

욕을 하며 서로를 피하는 그들. 워낙에 반사신경들이 뛰어난 인물들이었기에 집단으로 정면충돌하는 추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모두들 서로의 얼굴을 멀뚱멀뚱 바라만 볼 뿐, 명확하게 대답해 주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중 한 명이 못 참겠다는 듯 다시 한 번 옥화무제가 사라 진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들은 볼 수 있었다. 갑자기 어느 지점에서 그의 뒷모습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다시금 튀어나와 자신들에게로 달려오는 그의 모습을.

“진법인가? 그냥 일직선으로 달렸을 뿐인데……

문제는 이곳에 모여 있는 마교도들 중에서 진법에 해박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이 비교적 수월한 진법이, 그들에게는 난공불 락의 성벽이 되어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모두들 당혹스런 표정으로 웅성거리고 있을 때, 동방뇌무 장로와 함께 철영 부교주가 도착했다.

“무슨 일인가?”

“진법입니다.”

수하들의 대답에 그들은 앞을 세심하게 살펴봤다. 하지만 아무런 이상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진법이라고?”

철영은 수하들이 가리킨 곳을 향해 직접 달려가 봤다. 앞으로 쭉 달렸을 뿐인데, 갑자기 눈앞의 풍경이 바뀌며 뒤쪽에 있어야 할 수하들이 그의 눈앞 에 나타났다. 정말 귀신에 홀리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다. 아마 총단의 위치를 드러내지 않도록 사냥꾼이나 약초꾼 따위가 접근하지 못하게 설치해 놓 은 진법인 것 같았다.

“이거 큰일이군요. 전투단 중에 진법에 밝은 놈은 단 한 명도 없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문관이라도 몇 명 데려올 것을 그랬습니다.”

물론 무영문을 공격함에 있어 주위에 진법이 설치되어 있을 것이라 예상하기는 했다. 하지만 워낙 위험한 여로였기에 무공도 익히지 않은 약골인 문 관을 데려올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시도해 보는 수밖에.”

철영은 다시 한 번 진법이 설치되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한 번 들어가 봤던 경험이 있는 만큼 진법의 중간쯤 왔다는 생각이 들자 멈춘 뒤, 있는 대로 공력을 끌어올려 발밑은 물론이고 주위를 향해 무자비하게 장력을 퍼부었다.

콰콰콰쾅!

그의 장력이 땅바닥과 충돌하며 요란한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날아올랐다. 코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히이익!”

설마 철영 부교주가 이렇게 단순무식한 방법으로 진법을 파괴하려 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수하들은 불시에 흙먼지를 뒤집어써야만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 흙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방금 전의 폭발로 인해 진세는 파괴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앞에 보이던 경치가 완전히 바뀌어 있 었다. 옅은 안개가 끼어 있는 울창한 숲 사이로 사람들이 다녔음직한 길이 드러났다. 이미 그곳에서 철영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마 진법을 박살냄과 동시에 안쪽으로 달려 들어간 모양이었다.

“과연 부교주님이시군.”

모두들 철영의 무위를 칭송하고 있을 때, 동방뇌무 장로는 뒤쪽을 힐끗 돌아봤다. 수라마참대원들이 뿜어내는 마기를 느끼며, 그 거리를 가늠해 보 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들이 합류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부교주의 뒤를 따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부교주님의 뒤를 따른다. 모두 돌격!”

동방뇌무 장로의 명령에, 혈랑대는 앞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길을 따라 달려 들어가며 동방뇌무 장로는 의아함을 감추기 힘들었다. 꽤나 들어온 것 같은데, 아직까지 총단 건물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하군. 지도상으로 봤을 때는 별로 멀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때, 저쪽에서 달려오는 무영문의 무사들이 보였다. 모두들 갈색 경장을 입고 있는 것이, 한눈에 봐도 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겁을 상 실했는지 감히 병장기를 뽑아들고 흉흉한 살기를 날리고 있었다.

“큿!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동방뇌무 장로는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무영문도들의 씨를 말려 버려라!”

그의 명령에 수하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들고는 마주 달려갔다.

“우와아아!”

곧이어 양쪽 집단이 서로 뒤엉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영문도들의 무공이 형편없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들은 대단한 무위를 지니고 있었다. 무영문도들의 수는 겨우 500여 명밖에 안 되었지만, 마교의 최정예인 혈랑대에 밀리지 않으며 팽팽한 접전을 벌였다.

‘이상하군. 무영문도들의 무공이 이렇게 대단했었나?”

하지만 그런 놀라움도 잠시, 순간 뭘 떠올렸는지 동방뇌무 장로는 다급히 외쳤다.

“본좌는 동방뇌무 장로다. 모두들 싸움을 멈추고 서로 떨어져라!”

웅혼한 그의 외침에 뒤엉켜 싸우던 무사들의 전투는 순식간에 멈췄다. 적들과의 격전이 진행되는 와중에 말도 안 되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마교도들 은 전투를 멈추고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상관의 명령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만 했으니까.

그런데 그런 빈틈을 노려 돌격해 들어올 줄 알았던 무영문도들 역시 일제히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이 예상치 못한 광경에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 정을 지었다.

“그쪽에 한중평 장로 있는가? 본좌는 동방뇌무장로다. 이리로 오게.”

그 말에 방금 전까지 엄청난 무위를 발휘하던 무영문도 한 명이 흠칫하는가 싶더니,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는 적당한 거리를 둔 상태에서 멈춰선 뒤 질문을 던졌다.

“정말 차석 장로님이십니까?”

“노부가 동방뇌무가 맞네. 우리는 저 멀리 동여진에서부터 배를 타고 함께 폭풍을 헤쳐 온 사이가 아닌가.”

그러자 그 무사는 안심이 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차석 장로님이 맞으시군요.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러게 말일세. 세상에 이런 진법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구먼.”

“그래도 차석 장로님께서 빨리 눈치를 채셔서 다행히 사상자가 없었습니다. 이거야 원…………. 이렇게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환영진이 있다니.” 그 말에 동방뇌무 장로는 질린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예전에 연경전투에서도 환영진에 걸려 크게 고생했던 적이 있었기에 다행히 눈치를 챌 수 있었다네. 그때는 생전 처음 보는 괴물들이 득실거렸었 는데, 이번에는 아군들이 모두 적으로 보이는구먼. 허참~, 정말 무서운 진법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한중평 장로는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서도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동방뇌무 장로를 다시 한 번 살펴봤다. 지금 그의 눈에 동방뇌무 장로는 붉은 옷을 입고 있는 무영문도로 보였던 것이다. 평상시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무시무시한 마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절정의 무위를 지닌 정파 고수처럼 보였다. 한중평 장로는 소름이 끼쳤다. 이토록 교묘하게 아군끼리 상잔殘)하도록 유도하는 진법이 있다니……………

한동안 진법을 돌파하기 위해 헤맸지만, 모두들 진법하고는 담을 쌓은 무골들이다 보니 도저히 벗어날 재간이 없었다.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드넓은 숲과 짙은 안개, 그리고 끝도 없이 뻗어 있는 오솔길이 전부였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안 되겠네. 진법을 파괴하는 수밖에!”

“예? 진법을 파괴하는 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가 자칫 기관장치라도 건드리면………………

“더 이상 나빠질 게 뭐가 있겠나? 이대로 멍하니 있느니, 모험을 하는 게 낫다고 보네. 이러다 적들의 공격이라도 받게 된다면 더 위험해. 연경에서 는 그 망할 놈들이 우리를 진속에 가둬 놓고 화살비를 퍼부어댔었지.”

동방뇌무 장로의 말에 한중평 장로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동방뇌무 장로는 주위를 둘러보며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모두들 병장기를 뽑아들고 주위에 있는 나무나 돌 등…, 눈에 걸리는 것들은 모두 다 파괴해 버려라!”

“존명!”

수하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주위의 경물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해 나가기 시작했다. 꽤나 오랫동안 진 내부를 무작정 파괴하고 있을 때, 누가 뭘 어떻 게 건드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갑자기 진세가 깨져 버렸다. 안개 낀 숲 속 풍경이 갑자기 사라지더니 저 멀리서 화광이 충천하는 전각들이 모습을 드 러냈던 것이다.

그것을 보자마자 동방뇌무 장로는 장검을 뽑아들며 달려갔다.

“저기다! 모두 돌격하라!”

운 좋게 진법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 마교도들은 곧바로 총단 수색에 들어갔다. 하지만 여기저기를 들쑤시며 아무리 무영문도들을 찾아봐도 전혀 소

득이 없었다. 아직까지도 맹렬하게 불타고 있는 전각 속을 무슨 용뺄 재주가 있어서 수색을 한단 말인가. 적들도 저 불속에 들어 있을 리가 없으니, 이미 오래전에 탈출했을 게 뻔했다.

동방뇌무 장로는 분통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밸도 없는 잡것들! 반항조차 안 하고 튀어 버리다니!”

설마 적이 총단에 쳐들어왔는데도 싸우려 하지 않고 곧바로 내빼 버렸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동방뇌무 장로였다.

이때, 저쪽에서 철영 부교주가 터덜터덜 돌아오는 게 보였다. 싸움을 한 흔적이 없는 걸 보면, 옥화무제를 찾아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동방뇌무 장로 를 발견한 철영이 그에게 다가왔다.

“뭔가 소득은 있나?”

동방뇌무장로는 난처한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디로 숨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저 밑 어딘가에 지하통로가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화염이 충천하고 있는 건물의 잔해들이었다. 저 건물들 지하 어딘가에 통로가 있을 듯도 한데, 화염이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도저히 그 밑을 살펴볼 방법이 없는 것이다. 결국 저 불이 꺼진 다음에나 손을 쓸 수 있을 거라는 말이었다.

“아마 자네 말이 옳을 걸세. 오면서 살펴봤는데, 밖으로 연결되는 험준한 소로(小路) 하나 없더구먼. 짐승들이 지나다니는 길이라도 하나쯤은 있을 법도 한데, 그것조차 보이지 않았어.”

이때, 철영 부교주가 되돌아온 것을 보고 한중평 장로가 다가왔다. 그 역시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수라마참대원들을 닦달하여 무영문도들의 흔적을 찾고 있었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었던 모양이다.

“이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부교주님.”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불이 꺼질 때까지 손 놓고 있을 게 아니라, 주변을 수색해 보는 건 어떨까요? 두더지가 아닌 이상, 수백 리씩이나 땅굴을 파지는 못했을 거 아닙니 까. 운 좋으면 밖으로 연결되어 있는 통로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철영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내 그 생각도 안 해 본 건 아닐세. 하지만 녀석들이 통로들을 그냥 놔뒀을 리 없잖은가. 아마 철저하게 위장을 해놨겠지.”

“땅굴 입구야 위장을 해 놨겠지만, 길까지 그렇게 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이 정도 규모라면 하루에 소모되는 물자만 해도 엄청날 게 아니겠습니까.” 철영은 한중평 장로의 말에 자신의 생각이 모자랐음을 깨달았다.

“자네 말이 옳으이. 본좌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군.”

실마리가 주어지자, 철영은 동방뇌무 장로와 한중평 장로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사방으로 수색대를 파견하여, 산 쪽으로 연결되어 있는 길이 있는지 찾아보도록 하게. 그리고 혹, 산행을 하는 자들이 보이면 남김없이 잡아들이도록. 알겠나?”

“존명!”

“그리고 사람을 보내서 천진악 장로도 불러들이게. 쓸데없는 곳에서 시간낭비 하지 말고 이쪽으로 와서 도우라고 말이야.”

무영문 총단에서 외부로 연결되어 있는 땅굴은 20개가 넘는다. 그리고 그중에 4개는 손수레도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그 폭이 넓었다. 물론 경사도 가 가팔랐기에 손수레를 이용하지는 못했고 등짐을 져서 옮겨야 했지만, 부피가 큰 짐이라도 옮기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땅굴을 그렇게 많이 파놓은 이유는 평상시에 한 곳으로 너무 많은 인원이 들락거리다 보면 외부에 발각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처 럼 유사시에 탈출하기에도 용이했다. 그리고 총관이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가고 있는 이 땅굴은 무영문의 간부급 요인들의 탈출을 위해 특별 히 조성해 놓은 곳이었다.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멍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던 추밀단주가 문득 총관에게 물었다.

“도대체 총단 위치를 어떻게 알아냈을까?”

“단주님께서 모르시는 일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건 그렇구먼.”

추밀단주씩이나 되는 인물이었기에 총관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것이리라.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네놈이 나를 기망하려는 것이냐?’ 하고 화 를 벌컥 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진짜로 적이 오기는 온 건가?”

그건 총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간부급 요인들을 호위하여 이곳으로 내려온 무사들 또한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들은 옥화무제의 특급대

피령에 따라 행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태상문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사실일 겁니다.”

“그럴까?”

그 말을 끝으로 추밀단주는 또다시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초점 없는 눈으로 그저 습관적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동굴이 울리며 뭔가가 부셔지는 듯한 요란한 굉음이 뒤에서 들려왔다.

“뭐, 뭔가?”

모두들 두 눈이 동그래졌을 때, 무사들을 이끄는 지휘자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지나온 통로를 파괴하는 소리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미리 통보를 해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네.”

총관 일행이 들어간 땅굴은 아주 길었기에 통과하는 것만으로도 꽤나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무사들은 3번에 걸쳐 통로를 파괴해, 혹시 뒤쫓아 올지 도 모를 추격을 미연에 방지했다.

인위적으로 뚫은 땅굴에는 무너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상판과 기둥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시설물들이 보이지 않았다. 자연 적으로 형성된 동굴에 들어선 것이다.

동굴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반각(7.5분) 정도 걸어가자, 동굴 안이 넓어지며 사람들이 생활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시설과 집기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다 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누, 누구냐?”

무사가 외치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총관이 앞으로 달려 나가며 외쳤다.

“태상문주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십니까?”

총관이 경악할 만도 했다. 옥화무제의 꼴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헤어질 때만 해도 아름다웠던 비단옷이 지금은 여기저기 찢어져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호신강기로 보호되고 있었던 그녀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이, 이것이라도 급한 대로…………….”

총관이 자신의 겉옷을 벗으려고 했지만, 옥화무제는 그것을 막으며 말했다.

“이럴 시간이 없어요. 지금 당장 탈출해야 해요.”

“지금 당장 말입니까?”

“조만간에 그들은 땅굴의 존재를 눈치 챌 거예요. 그 전에 여기에서 탈출해야만 해요.”

옥화무제의 예상은 적중했다.

“저쪽에 관도(道)가 있습니다.”

산 뒤쪽으로 정찰을 나갔던 수하들의 보고에 철영은 아연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깊은 산골짜기에 관도가 뚫려 있다니, 그게 말이 되는 가?

“그럴 리가…………….”

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철영이 달려가 보니, 험준한 산맥을 뚫고 꾸불꾸불 연결되어 있는 길이 보였다. 우마차(牛馬車)가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제법 폭넓게 뚫어 놓은 관도 위를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 중이었다. 알고 보니 이 산길은 복건성과 강소성을 연결하기 위해 관에서 뚫어 놓은 도로였다.

이때, 철영의 눈에 도로에 접해 있는 커다란 객잔이 보였다. 아마도 산길을 통과하는 객들이 쉬어 가는 곳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뭔가 수상쩍었다. 동굴이 이쪽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출구가 위치하기 딱 좋은 곳에 건물이 세워져 있었 기 때문이다.

“도로에 접해 있는 모든 건물들을 샅샅이 뒤져라!”

“존명!”

수하들을 먼저 탈출시킨 후, 옥화무제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숨어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적들이 자신의 예상보다 빨리 이 도로를 찾아낼 수도 있 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자신은 수하들이 도망칠 만한 시간을 벌어 줘야 했다.

다행이 마교도들이 산길을 알아낸 것은 수뇌부들이 다 탈출하고 난 다음이었다.

“제법 눈치가 빠르군. 하지만 너무 늦었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수뇌부는 여기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절대다수의 무영문도들은 아직까지도 이곳 여기저기 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발 눈치 채지 못해야 할 텐데………….”

하지만 그녀의 바램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젠장!”

마교도들이 뭔가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예상보다 마교쪽 지휘자의 감각이 예민했던 것이다.

마교도들은 즉각 관도를 틀어막았다. 몇몇 도주하는 인물들이 보였지만 마교도들의 손길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모두들 굴비 엮듯 줄줄이 붙잡혀 버렸다.

그 다음 마교도들이 행한 것은 관도 상에 위치한 건물들을 뒤지는 것이었다. 그것까지 보고 그녀는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은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이것들을….”

옥화무제는 분노를 감추기 힘들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수하들을 구하러 가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 다. 그녀가 아무리 화경을 깨달았다고는 하지만, 저 안에 들어가서 포위당하는 날에는 그날로 끝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저 멀리서 무시무시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이게 도대체 사람이 내뿜을 수 있는 기세란 말인가?”

화경을 깨달은 그녀에게조차 공포감을 안겨 줄 정도의 강력한 존재감이었다. 그리고 그 존재감은 급속도로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엄청 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교주로군.”

묵향이 흑풍대를 거느리고 그녀가 만들어 놓은 미끼를 덮친 게 3일 전이었다. 아마 그곳을 박살낸 다음, 곧바로 이쪽으로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곳 에서 여기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먼데………

옥화무제는 경악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거리를 3일 만에 달려올 수 있다는 말인가? 말도 안 돼!”

관도 뒤쪽으로는 마치 산불이라도 난 것처럼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하지만 관도를 걷던 사람들은 그쪽을 힐끔 바라봤을 뿐, 더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아니, 발걸음을 옮기는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을 뿐이다. 그들은 산불이 난 줄 알았던 것이다. 그랬기에 혹여 산불이 이 쪽까지 번져오기 전에 산을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가지도 못하고 멈춰서야 했다.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풍기는 험악한 자들이 길을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가만히 서 있어라. 검사에 협조한다면 아무 일도 없을 거다. 하지만 반항하거나 도망친다면 그 뒤에 일어나는 사태에 대해서는 각자가 책임 져야 할 거다.”

곧이어 검문검색이 시작되었다. 그 순간 칼을 차고 있던 2명의 장한이 쏜살같이 도망쳤다. 그들은 도저히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 로 달아났다.

“무, 무림인?!”

사실 무림인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일반인들이 보는 앞에서 무공을 사용한 결투를 벌이는 것을 가급적이면 자제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반인들의 시선으로는 마치 신선처럼 생각되는 그런 인물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곧바로 붙잡혀 왔다. 마치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몰골 이 엉망으로 변한 채.

그 광경을 본 행인들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지금 자신들을 겁박하고 있는 저 괴이한 자들은 단순한 산적 나부랭이가 아니라 무림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 이후, 행인들은 짐을 수색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협조적으로 나왔다. 품속에 가지고 있던 것은 몽땅 다 꺼내 보였으며, 질문에 대해서는 즉각 대 답했다.

이때,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대는 인물이 다가왔다. 동방뇌무 장로였다.

“어떻게 됐느냐?”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동방뇌무 장로는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있는 인물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놈들은?”

“무영문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품속에서 나온 소지품으로 미뤄 봤을 때, 비월문(飛月門)이라는 방파에 소속된 인물들인 것 같은데………………”

“일단 잡아 둬. 나중에 심문해 보면 알 수 있겠지.”

“존명!”

이때, 멀리서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과시하며 묵향이 달려왔다. 처음에는 엄청난 고수의 등장에 바짝 긴장하는 듯했지만, 상대가 교주라는 것을 알게 되자 모두들 자신이 맡은 일에 열중했다.

동방뇌무 장로가 제일 먼저 묵향에게로 달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교주님.”

곧이어 철영 부교주도 도착했다. 그는 교주의 갑작스런 등장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아직까지 뭔가 보여 줄 만한 실적을 올린 게 전혀 없었기 때문 이다.

“여기는 진짜던가?”

“옥화무제와 맞닥트린 것으로 보아, 진짜인 듯합니다.”

“무슨 대답이 그런가? 진짜면 진짜고, 가짜면 가짜지.”

철영은 묵향에게 지금까지 자신이 겪었던 상황을 자세히 보고했다. 무영문의 전각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했고, 도착해보니 이미 불타고 있었다고 말 이다.

“내가 간 쪽과 비슷한 상황이군. 그렇다면 이쪽도 가짜인가?”

이때, 주변의 가옥들을 뒤지러 간 마교도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눈에 봐도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을 굴비 엮듯 끌고 왔다. 책임자인 듯한 무사가 달려와 철영에게 보고했다.

“무영문도들이 확실합니다.”

“오오, 드디어 잡아냈군. 철저하게 심문해서 새로운 정보들을 파악해 내.”

묵향과 철영은 꽤나 고무되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들이 잡아들인 무영문도들 중에서 쓸 만한 고위급 인물들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그들을 심문해 본 결과, 무영문이 지독할 정도로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는 점이 밝혀졌을 뿐, 더 이상의 소득은 없었다. 비영단은 예 외였지만, 그 외 집단들의 경우 소속된 지점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전출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던 탓이다.

“고위급의 인물은 없던가?”

“그들은 따로 움직인 모양입니다.”

묵향의 질문에 철영이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완전히 헛물만 켠 게 확실했다. 그야말로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 버린 형국이었다. 결국 총단 건물을 파괴한 것 외에, 그 어떤 실리도 얻은 게 없었다.

“참, 그게 있었지.”

뭔가 생각난 듯 묵향은 철영에게 지시했다.

“총단으로 전서를 보내 주는 중계지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곳을 쑤셔 봐.”

총단을 점령하고, 또 잔당들을 잡아내기 위해 정신이 없었던 철영은 미처 그것까지는 신경 쓰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는 천진악 장로를 불러 그곳으 로 대원들을 급파하라고 지시했다.

“전서구들 확보에 최선을 다해라. 여기서 키운 전서구도 있겠지만, 각 분타에서 키운 것도 있을 게야. 그것들만 확보할 수만 있다면 분타들을 찾아 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곧이어 철영은 자신이 왜 진작에 그곳을 생각하지 못했는가 하는 한탄을 해야만 했다. 그들이 총단을 치고 있는 동안, 전서구를 중계하던 지 단은 폐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독약을 살포했는지 수없이 많은 비둘기들의 사체가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곳에서 건진 게 있다면, 아직 총 단에서 변고가 일어나기 전에 각 분타들에서 띄운 전서구들이 여기저기에서 계속 날아들고 있었다는 점이다.

천진악 장로는 수하들을 시켜 전서구들의 발에 묶여 있는 전서들을 모두 수거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모두 암호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약이 바짝 오른 묵향은 무려 한 달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 총단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도로에 접해 있는 건물들 속에서 찾은 무영문도들을 제 외한다면, 더 이상의 수확은 없었다. 모두들 땅굴을 파고 들어앉아 있다 보니, 그들을 찾아낼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묵향은 결단을 내렸다는 듯 외쳤다.

“더 이상은 시간낭비다. 철수하도록 한다.”

“원통합니다, 교주님. 그토록 커다란 피해를 감수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물론 이것은 연극이었다. 철수하는 척하면, 혹시 숨어 있던 놈들이 기어 나올까 하는 기대감에서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