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7권 13화 – 매영인 포로가 되다
매영인 포로가 되다
옥화무제를 비롯한 수뇌부는 이미 가장 가까운 분타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물론 그 분타도 지금까지 있던 자리를 포기한 채 어딘가로 잠적해 버 린 상태였기에, 그들을 찾아내는 데 꽤나 애를 먹어야만 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 거죠?”
옥화무제의 질책에 추밀단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로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태였으니까.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요?”
그 질문에 추밀단주가 서류를 살펴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급히 대피를 하느라 총단에 보관되어 있던 자료의 거의 대부분을 소각해 버려야 했습니다. 물론 각 분타들이 축적하고 있는 자료가 있기에 대략적 인 복구는 가능합니다만, 그 사본을 모두 넘겨받고 다시 정리하려면 엄청난 시간과 인력이 소요될 겁니다.”
옥화무제는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나마 복구가 가능하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기는 하네요.”
“그리고 황색인장이 발령된 만큼, 전서구 통신망을 완벽하게 새로이 정비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총단에서 황색 신호탄 3개가 날아오르면, 그 즉시 전서구 관리소에서는 중원 각지의 분타에 황색인장을 달고 있는 전서구 10마리씩을 날린다. 그런 다음 남은 전서구는 몽땅 다 죽여 버린 뒤 그곳을 불사르고 대피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각지의 분타들은 황색인장을 받는 즉시, 현재 분타를 버리고 딴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즉, 지금까지 운용되던 전서구 통신망이 완전 히 파괴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전서구 통신망을 재구축하려면 얼마나 많은 자금과 시간이 들어가게 될지, 현재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추밀단주의 보고에 옥화무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렇게나 치명적인 피해를 입다니. 아마 무영문이 과거처럼 제대로 움직이려면 최소한 몇 년 의 시간이 필요하리라. 아니, 몇 년의 시간이 흘러도 예전과 같기는 힘들었다. 통신망은 복구하더라도, 분타로부터 넘겨받은 자료를 재정립하고 분석 하려면 몇 년의 시간으로는 어림도 없으니 말이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옥화무제가 이번에는 총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인명피해는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나요?”
“그건 아직 파악이 불가능합니다. 마교도들이 버티고 있어, 그들이 물러난 다음에야 확인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식량은 충분하겠죠?”
“각 토굴마다 6개월 치의 비상식량이 비축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한 곳에 인원이 많이 몰리면 그전에 소비될 수도 있잖아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 각자의 등급에 맞는 토굴을 숙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제발 인원피해라도 좀 적었으면 좋겠네요.”
이때, 분타주가 달려 들어오며 희소식을 전했다.
“비영단과의 연락에 성공했습니다.”
비영단은 무영문의 행동대였다. 그들과 연락에 성공한 이상, 지하에 잠적해 버린 분타들을 찾아내어 무영문을 정상화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먼저 문주부터 찾아내세요. 그리고 이번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도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세요.”
“옛, 즉시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번 잠에 빠져 버린 무영문을 다시 깨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황색인장이 발령된 후에는 1개월 동안 외부와 일체의 연락을 주 고받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총관은 무영문의 분타들을 몽땅 다 깨우는 것은 포기한 채, 총단 인근에 위치해 있는 분타들부터 우선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총단이 파괴당한 후, 2주일이 지난 다음에야 겨우 옥화무제는 마교도들이 어떤 방식으로 그녀의 코앞에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정확한 피해까지도.
“어떻게 그들이 남쪽에서 올라올 수가 있었던 거죠?”
무영문의 총단은 무제산맥(武弟山脈) 속에 감춰져 있었다.
십만대산에서 무제산맥으로 들어오려면 사천성에서 호남성에 이르는 산악을 타고 내려와 남령산맥(南嶺山脈)을 통해 들어오는 길과 대파산맥에서 대별산맥을 거쳐 아래로 남하해 내려오는 길이 있다. 물론, 그 두 갈래 길은 최악의 험로였지만, 마교도들이 짙은 마기를 감추면서 이동할 수 있는 최 선의 선택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동로 주위에는 어김없이 무영문의 고정첩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외에 다른 수많은 길에도 무영문의 촉각들이 널리 퍼져 있었기에, 어떤 길로 들어온다 해도 마교의 고수들처럼 눈에 띄는 자들이라면 그 즉시, 그 들의 동태가 총단으로 보고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교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아래쪽에서 달려 올라왔다. 첩자들을 통해 알아본 결과, 그들의 모습이 처음으로 포착된 것은 온주(溫州) 근처라 는 것을 알아냈다.
“산맥을 타고 내려온 게 아니라, 해로(海路)를 통해서 들어온 게 분명합니다.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말에 옥화무제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금껏 마교도들이 이동했던 육로만을 잘 감시하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완전히 허를 찔린 것 이다.
“도대체 그 많은 배가 어디에서 났죠? 수천 명을 실어 나르려면 한두 척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을 텐데…………. 마교도를 발견했다는 항구도 없었을 뿐 더러, 다수의 배가 누군가에게 동원되었다는 정보조차 입수된 게 없잖아요.”
“일전에 태상문주님께 보고를 올리지 않았습니까. 누군가가 왜국과 대규모로 밀거래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총관의 말에 옥화무제는 아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그게 그들이라는 말인가요?”
“그렇게 봐야 모든 아귀가 맞아떨어집니다. 일전에 그분을 돕겠답시고 왜구 10만이 상륙한 전례도 있지 않습니까. 그걸 간과한 게 치명적이었습니 다. 그분은 왜와 통하고 있는 만큼, 몇 천씩이나 되는 인원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해로로 이동시킬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뒀어야 했습니다.” 상대를 너무 얕잡아봤기에 치러야 했던 값비싼 대가였다.
“조사해 본 결과, 마교 쪽은 꽤나 정확한 정보를 입수한 상태로 움직였습니다. 온주에서부터 시작해서 총단에 이르는 노상에 배치되어 있던 모든 고 정 첩자망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총단의 동남쪽에 배치되어 있던 경비대 역시 전멸 당했습니다.”
피해가 너무 컸기에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은 채 옥화무제가 자책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태상문주님께서는 무사하시느냐?”
저음의 중후한 음성. 그 목소리를 들은 옥화무제는 힘이 솟는 걸 느꼈다. 그만큼 그녀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신뢰했던 것이다.
곧이어 장대한 체구를 지닌 사내가 실내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무공으로 다져진 군살 한 점 없는 탄탄한 체구만 봐도 듬직함이 느껴지는 사내, 비영단주였다. 비영단주는 옥화무제를 보자마자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아이구,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소식을 듣자마자 급히 달려왔습니다.”
옥화무제는 처연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내 꼴이 정말 우습게 되어 버렸군요.”
“우습게 되다니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잠시 옥화무제를 위로하던 비영단주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하마터면 길이 엇갈릴 뻔했습니다. 장백산으로 갈까 하던 차에 소식을 들었으니까요.”
“장백산이요? 비영단주가 장백산에 왜……………?”
“일전에 태상문주님께서 장백산을 조사해 보라고 지시하셨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하지만 그 정도 일로 비영단주가 직접 나설 필요까지야….”
“사실,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비영단주는 장백산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옥화무제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장백산에 1개조의 수하들을 투입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서들이 날아 오기 시작했다.
“보고에 의하면 장백산에 신선이 산다고 하더군요.”
비영단주의 말에 옥화무제는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농담하는 건가요?”
옥화무제의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에도 비영단주는 진중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진담입니다. 토착민들 중에서 신선을 봤다는 사람이 아주 많았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직접적으로 신선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었고요. 목격 자들의 진술을 종합해 분석해 보니, 아주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게 질 나쁜 농담이 아니라면, 가능성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신선으로 보일 만큼 제법 실력 있는 고수가 은거해 있는 모양이군요.”
“예, 그런데 조금 이해하기 힘들었던 게, 그 신선을 봤다는 사람들의 시대 폭이 좀 과하게 넓다는 점이었지요.”
“시대 폭이요?”
“요 근래에 봤다는 사람부터 시작해, 아주 어렸을 때 봤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 봤다는 사람도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말대로라면 몇 백 년을 살아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이 좀 의아스럽기는 합니다.”
옥화무제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곳에 문파가 들어앉아 있다면 그런 말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무리 화경급 고수라고 해도 몇 백 년을 살 수는 없다. 그렇기에 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문도들의 모습에 목격자들이 헷갈렸을 거라 생각한 것이 다.
“문제는 목격자들이 본 신선의 인상착의가 동일인이었다는 점입니다.”
“그, 그건 좀 믿기 힘들군요.”
“속하도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파견했던 수하들로부터 연락이 갑자기 끊겨 버렸습니다.”
“흐음…, 그건 조금 심각한 문제군요.”
은잠과 침투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게 비영단 요원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실종되었다는 것은 그곳에 범상치 않은 집단이 은둔하고 있 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알아보려 했던 것입니다.”
잠시 고민하던 옥화무제는 이윽고 결단을 내렸다.
“일단 장백산에 대한 조사는 중단하세요.”
“혈교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옥화무제도 비영단주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 된다는 거예요. 그 발해 문자는 마교에서 흘러나온 거죠. 즉, 마교가 그들의 뒤를 쫓고 있다는 말이에요. 이 시점에서 장백산에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만 해도 우리로서는 충분해요.”
“혹시 마교에 흘리실 생각이신가요?”
“맞아요.”
“하지만 혈교라면 그들에게도 대비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예전에 혈교가 재기하기 직전에 쉽게 무너져 버린 이유도, 제대로 준비 가 갖춰지기 전에 찬황흑풍단의 기습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 정보를 흘린 것은 무영문이었다. 혈교는 일전에도 위치가 사전에 노출되어 치명타를 입은 만큼, 이번에는 더욱 만전을 기울일 게 분명했다. 아마 그것 때문에 위험을 무릎 쓰고, 비영단주가 직접 혈교의 상황을 살펴보려고 했던 모양이다.
“괜히 조사한다고 얼쩡거리다, 그쪽에서 눈치 채고 잠적해 버릴 가능성도 있어요. 그러니 그냥 놔두도록 하세요. 무엇보다 지금은 혈교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으니까요.”
“예, 알겠습니다.”
묵향의 지시에 의해 천랑대는 십만대산으로 철수했다. 600여 명에 가까운 포로들을 압송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혈랑대와 수라마참대는 철수하는 척하고서는, 기척을 감출 수 있을 정도의 거리까지만 물러선 뒤 그곳에서 대기했다.
무영문의 총단을 감시하기 위해 남은 것은 묵향과 철영 단, 두 명뿐이었다. 마기를 완전히 감출 수 있는 사람이 둘뿐이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 다.
처음에는 얼마 기다리지 않아도 놈들이 튀어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묵향의 오산이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다시 1주일, 2주일이 지났 다. 그리고 한 달이 되었을 때, 묵향은 더 이상은 참고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렇게까지 기다렸는데 안 움직이는 걸 보면 벌써 다 도망친 모양이군.”
“그렇게 빨리 도망칠 수 있을까요? 총단의 규모로 봤을 때, 2~3,000명은 족히 거주했을 텐데요.”
“그렇긴 하지만 녀석들이 땅굴을 얼마나 더 뚫어 놨는지 알 수가 없으니 그게 문제지. 저기에 있는 건물들에 연결되어 있는 땅굴만 해도 몇 개던가. 우리가 찾아낸 것만 해도 벌써 6개였어. 놈들의 땅굴이 자네가 쳐놓은 포위망 저 뒤쪽까지 뚫려 있다면, 포위망 자체가 의미 없지 않겠나.”
“그, 그럴 수도 있겠군요.”
“더 이상 이곳에 매복해 있는 건 의미가 없는 것 같으니, 여우의 뒤통수를 한 대 갈겨 준 것 정도로 만족하고 철수하지.”
“그래도 이대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냥 물러나기에는 아쉽다는 듯 철영이 주저하자 묵향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홍진 장로에게 연락해 이곳에 비마대를 깔아 놓으면 될 게 아닌가?”
“그렇게 하면 되겠군요. 곧바로 홍진 장로에게 연락하겠습니다.”
결국 이렇게 마교의 무영문 총단 습격은 일단락되었다.
***
무영문의 문주는 남경 분타에 머물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인 옥화무제가 총단을 장악하고 있는 만큼, 그녀는 필요에 따라 여러 분타들을 떠돌며 현장에서 지휘 업무를 맡고 있었던 것이다.
금나라와의 전쟁이 일단락되었기에 원래는 총단으로 돌아가는 게 옳았지만, 군부에서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녀는 아직까지도 남경에 머물고 있 었다.
“총단이 공격당했습니다.”
남경 분타주가 전한 급보에 문주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리가…….”
“방금 전에 도착한 전서입니다.”
남경 분타주가 그녀에게 전한 것은 손바닥 크기만 한 전서였다. 전서에는 몇 줄의 내용이 암호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내용이 아니었 다. 제일 마지막에 찍혀 있는 조그마한 인장. 별것 아닌 문양이 새겨져 있는 이 황색의 인장이 바로 문제였던 것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황색인장을 노려보는 문주. 그녀의 손은 무의식중에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문주는 자신에게 이게 전달될 것이라고 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그녀의 놀라움은 컸다.
그런 문주를 향해 분타주가 채근했다.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 분타를 떠나야 합니다, 문주님.”
문주는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어느 정도 놀라움을 가라앉혔다. 냉정을 회복하자마자 그녀는 분타주에게 명령했다.
“총단 인근에 있는 분타에 전서구를 날려, 지금 당장 총단을 살펴보라고 전하세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황색인장이 전 분타에 배포된 이상, 모든 분타주는 외부와 연락을 단절하고 대피하는 게 규칙이지 않습니까?”
“당장 영인이를 불러들이세요.”
부문주 매영인은 지금 추밀사 섭평과 만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매영인은 합류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파견된 전령을 통해 상황을 대충 전해 들은 매영인이 곧바로 마교 총단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전령에게 서 그 얘기를 전해 들은 문주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이, 이 바보 같은 놈이…………….”
어머니의 말만 듣고, 딸에게 제대로 된 상황을 알려 주지 않은 게 지금처럼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 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딸아이는 교주에게 사정하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지금 교주는 아예 무영문의 뿌리를 뽑을 작정을 하고, 손을 쓴 상황이니까.
“왕 타주!”
“예, 하명하십시오. 문주님.”
“지금 당장 영인이에게 사람을 보내서 돌아오라고 전하세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지금 본타에는 부문주님을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경공이 뛰어난 고수도 없을 뿐더러, 황색인장이 발령이 된 이상 다른 분타 에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상황이 아닙니까.”
문주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딸아이가 사지로 들어가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말릴 방법이 없다니, 참으로 통탄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묵향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매영인은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무작정 십만대산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에서였다.
남경에서 십만대산까지 가려면 무려 1만 리에 달하는 거리를 건너뛰어야만 했다. 그 엄청난 거리를 패력검제는 겨우 7일 만에 주파해 버렸지만, 매 영인으로서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속도였다.
매영인은 일단 말을 구입했고, 그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다 말이 지치면 팔아치우고, 또 다른 말로 바꿔 이동했기에 예상보다는 꽤나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여정을 그렇게 이동한 것은 아니다. 산맥이나 계곡 따위가 가로막고 있어 빙 돌아가야만 할 때, 그녀는 곧바로 말을 버린 뒤 경공으로
그곳을 가로질렀다. 그런 다음 관도를 다시 만나면, 말을 구입해 타고 가는 방식으로 이동했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그녀라 해도 경공만으로 그 먼 거리를 달려갈 자신이 없었기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꽤나 강행군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영인은 38일이라는 시일이 흘러서야 십만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지리를 알고 있는 그녀는 곧바로 정문 을 향했다.
정문 주변의 경비는 무사들이 하고 있었지만, 방문객을 맞이하는 것은 제법 나이를 먹은 문사였다. 그는 노련한 눈썰미로 매영인을 판단했다. 말을 타고 있는데다가, 복장이 꽤나 고급스럽다. 더군다나 그녀의 허리에는 아주 고색창연한 보검이 걸려 있었다. 그것만 봐도 그녀의 신분이 범상치 않다 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조금 의외인 것은 그런 그녀가 단 한 명의 종자도 거느리지 않고 왔다는 점이었다. 매우 피곤해 보이는 얼굴만 봐도, 그녀가 꽤나 먼 거리를 강행군해서 온 것 같은데 종자조차 없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수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문사는 정중하게 예를 갖춘 다음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교주님을 뵙게 해 주세요.”
교주를 만나러 왔다는 말에, 문관은 살짝 긴장했다. 신분이 높은 사람일 거라는 것은 짐작했지만, 설마 교주를 만나러 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 으니까.
“누구시라고 전할까요?”
“무영문의 부문주, 매영인이라고 전해 주세요.”
“무영문이라구요?”
방명록을 기록하고 있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그녀는 보지 못했지만, 문관의 눈이 그 순간 묘하게 번쩍였다. 지금 무영문과 전쟁 중이라는 것 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무영문의 부문주가 제 발로 찾아왔으니, 앉아서 공을 세우게 된 것이다.
“상부에 연락을 드리긴 하겠습니다만, 지금 당장 교주님께서 부문주님을 만나 주실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묵으실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 습니다. 그곳에서 기다리시면 차후에 연락이 갈 겁니다.”
문관은 그렇게 말한 후, 매영인을 직접 황룡각(黃龍閣)으로 안내했다. 마영각이 극빈을 위해 만들어 놓은 곳이라면, 황룡각은 그 아랫단계의 손님을 위해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마영각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손님들을 숙박시켜야 하는 만큼, 건물의 규모는 훨씬 더 컸다. 건물 여기저기에 황금으로 도 금해 놓은 용의 형상이 아로새겨져 있어, 꽤나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문관은 매영인을 황룡각으로 안내한 뒤 곧바로 경비대에 보고했다. 먹잇감이 제 발로 기어 들어왔다고 말이다. 문관의 보고를 받은 정문 경비대장은 이 사실을 외총관에게 급히 전했다.
“혼자 왔다는 게 사실이냐?”
“옛,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외총관은 자신이 앉아서 공을 세우게 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는 즉시 자리를 털고 일어서 그녀가 묵고 있는 황룡각으로 갔다.
“귀하가 무영문의 부문주이시오?”
“예.”
소무면 장로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포권했다.
“처음 뵙겠소이다. 노부는 본교의 외총관직을 맡고 있는 소무면이라고 하오.”
“처음 뵙겠습……”
매영인도 마주 포권하며 인사했지만, 그녀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가 포권하며 고개를 숙이는 그 순간, 소무면 장로가 기습공격을 가 해왔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온갖 영약을 섭취한데다가, 할머니인 옥화무제로부터 직접 무공까지 배웠다고 하지만 그녀는 기본적으로 온실 속에서 자라온 화초였 다. 피 튀기는 지옥 속에서 성장해 온 소무면 같은 거마에 비한다면 실전경험에서 상대가 안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더군다나 기습까지 당한 상태 가 아닌가. 처음 한 방을 허용한 것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소무면 장로는 매영인을 제압해서 지하감옥에 처넣어 버렸다. 그런 뒤 고문기술자를 불러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몽땅 다 실토 받으라고 명령했다. 일처리를 깨끗하게 끝낸 소무면 장로는 공치사도 할 겸, 보고도 할 겸 해서 수석장로를 찾아갔다. 마침 수석장로는 설민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 었다.
“어서 오게, 외총관.”
“오, 군사도 있었구먼. 마침 잘되었네. 자네에게 따로 통보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이야.”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모양이군요. 무슨 일이십니까?”
소무면 장로는 자리에 앉으며 수석장로에게 자랑했다.
“제가 방금 전에 기가 막힌 계집을 하나 잡았지 뭡니까.”
수석장로는 그가 애첩이라도 하나 장만한 줄 알았다.
“이거 섭섭하구먼. 노부에게는 언질도 주지 않고 기방에 가다니 말이야.”
“기루라니요?”
잠시 무슨 말을 하는가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소무면 장로는 이내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핫! 제가 수석장로님을 빼놓고 그런 곳에 혼자 갈 리 없지 않습니까.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제 발로 걸어 들어온 무영문의 계집을 하나 붙잡았다 는 거지요.”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설민이 끼어들었다.
“무영문도라구요?”
“지금 감옥에 처넣고, 주리를 틀고 있는 중일세. 기대해도 좋네. 부문주씩이나 되는 계집이니, 제법 쓸 만한 걸 토설할 게야.”
“부문주라면…………?”
옥화무제의 손녀인 매영인이 분명했다. 그녀라면 예전에도 몇 번 교주를 만나러 온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물론 외총관은 모를 것이다. 그녀가 교주를 찾아온 것은 십만대산이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교주도 매영인을 꽤나 마음에 들어 했다는 점이었는데…… 그런 그녀를 붙잡아 주리를 틀어도 뒤탈 이 없을까?
“이건 아무래도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설민은 매영인과 교주의 관계를 그들에게 설명했다. 외총관은 뜻밖의 정보에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수석장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뭐, 교주님께서 그 아이에게 호감을 가지셨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일세. 무영문을 멸문시키겠다는 결정을 내리셨다는 것은, 곧 그녀 따위는 더 이상 교주님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녀는 이곳에 사신으로서 왔습니다. 그런 그녀를 붙잡아 놓고 고문까지 한다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자칫 교주 님께서 이 사실을 아시고 역정이라도 내시는 날에는, 그 감당을 어찌하시려고요.”
예로부터 가급적이면 사신은 건드리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다. 물론, 허례허식 따위에 신경조차 쓰지 않는 마교에서 사신의 목을 베는 것쯤이야 왕왕 있어 왔던 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수석장로야 자신의 일이 아니니까 저렇게 속편하게 말할 수 있겠지만, 소무면 장로는 달랐다. 그건 자신의 일이었으니까.
“벌써 주리를 틀기 시작했을 텐데, 이 일을 어쩌지?”
“걱정 마십시오, 외총관님.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군사의 제안에 소무면 장로는 반색했다.
“그, 그래 주겠나?”
설민은 급히 지하감옥으로 달려가 매영인을 구출했다. 고문기술자가 살짝 간만 봐놓은 상태였을 뿐, 아직 본격적인 작업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제가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진행되어 너무나도 죄송스럽군요.”
구속에서 풀려난 매영인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심한 매질을 당한 상태였기에 그녀의 옷차림은 엉망진창이었다. 찢어진 옷 틈으로 피투성이가 되 어 버린 속살까지 보일 정도였다.
“처음부터 이럴 의도가 아니었다니, 다행이긴 하네요.”
겉모습과 달리 꽤나 용의주도한 데가 있는 소무면 장로는 그녀를 제압한 후, 곧바로 산공분까지 먹인 상태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지금 공력을 전혀 운용할 수가 없었다.
“먼저 자리를 옮기시는 게 좋겠습니다. 여기는 대화를 나누기에는 너무 삭막한 곳이군요.”
설민은 매영인을 귀빈들을 위한 마영각으로 안내했다. 마영각의 각주를 비롯한 몇몇 시녀들은 나름대로 어느 정도 무공을 익힌 고수들이었다. 그렇 기에 그녀를 감시하고, 돌보는 데 있어서 마영각만큼 좋은 곳이 없다고 설민은 판단했던 것이다. 물론 그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대호법에게 부탁 해 호법원 고수 몇 명을 더 붙여 놓기까지 했다.
“교주님께서 오시기도 전에 먼저 손을 쓴 점은 사죄드립니다. 부문주님에 대한 처우에 대해서는 나중에 교주님께서 돌아오신 다음에 결정하시게 될 겁니다. 그때까지는 여기에서 기다리시기를 바랍니다.”
“어쩔 수 없지요. 여기까지 온 것은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니까요.”
매영인과 헤어져 밖으로 나온 설민은 마영각주를 만났다. 교내 서열이 무려 5위씩이나 되는 거두가 마영각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영각주는 이미 문밖에서 공손하게 대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 계신 분은 무영문의 부문주일세.”
설민은 각주에게 매영인을 잘 대접하면서도 그녀의 감시에 만전을 기할 것을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새로운 의복을 가져다주고, 의생을 불
러와 치료해 줄 것도 잊지 않았다.
마영각에서 나온 설민은 수석장로를 찾아가 경과를 보고했다.
“일단은 마영각에 수감해 두라고 조치했습니다. 매일 산공분이 든 차를 먹이고, 호법원 고수들이 그녀를 감시하게 해 놨으니 교주님이 오실 때까지 는 괜찮을 겁니다.”
“그래, 수고했네. 노부가 생각했을 때도 그게 가장 좋은 해결책인 듯싶구먼.”
급한 일처리가 끝나자, 마음에 여유가 생긴 설민은 차를 마시며 수석장로에게 슬쩍 물었다. 요즘 들어 엄하기만 하던 수석장로의 분위기가 많이 바 뀌었기 때문이다.
“요즘 좋은 일이 있으신 모양이지요?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좋은 일은 같이 하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수석장로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실은 얼마 전에 교주님의 강권으로 수양딸을 하나 들였지. 그런데 이게 물건이더구먼.”
수석장로가 양녀를 들였음은 설민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수석장로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라면, 자질이 상당히 뛰어난 모양이지요?”
“허허, 그건 자질 이전의 문제라네. 세상 사람들이 딸을 무슨 재미로 키우는지를 이제야 알겠더구먼. 고것이 얼마나 순진하면서도 앙큼한지..
부드럽게 미소 짓는 수석장로를 보며, 설민은 부교주가 왜 그녀에게 빠져들었는지 그 이유를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수석장로같이 엄한 사람 을 저렇게 해파리처럼 흐물흐물하게 만들어 버릴 정도라니, 참으로 대단한 여자아이가 아닌가.
“축하드립니다, 수석장로님. 어쨌거나 교주님의 선택이 탁월하셨던 것이로군요.”
그런데 갑자기 수석장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근심이 어렸다.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물어보세.”
“예, 말씀하십시오.”
“그 아이가 내 앞에서는 밝은 척 노력하려고 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부교주님을 아직 못 잊어 하는 것 같더구만. 마음에 두고 있었던 사람이 하나 있 었는데, 무슨 일인지 갑자기 연락이 끊겨 버렸다고 말일세. 그 아이에게 대체 뭐라고 말해 줘야 하나?”
“그런 경우 사실대로 얘기해 줄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냥 모른 척하십시오. 그러면 시간이 해결해 줄 겁니다.”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구먼.”
그 후로도 두 사람은 이런저런 사담을 나누며 차를 즐겼다.
<묵향> 28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