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7권 4화 – 초류빈이 남긴 유산
초류빈이 남긴 유산
다음 날 아침, 양양성을 떠난 묵향 일행은 먼저 초씨세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왠지 수심에 차 있는 듯한 묵향의 안색은 변함이 없었다.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마화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한시도 묵향 옆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초씨세가가 있는 지역에 도착하게 되자, 묵향은 수하들을 풀어 위치를 알아보게 했다. 잠시 후, 길을 물어보러 갔던 호법원 소속 무사 한 명 이 돌아와서 보고했다.
“저쪽에 보이는 넓은 장원이 초씨세가랍니다, 교주님.”
초씨세가는 비록 오대세가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오래 된 도(刀)의 명문으로서 강호에 혁혁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세가였다.
남궁세가가 예전과 달리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대세가 중 하나로 꼽히는 이유는 오랜 세월 정파 무림을 위해 선조들이 이뤄 놓은 업적들과 공헌 덕분이었다. 만약 보유하고 있는 세력만으로 따진다면 오래전에 남궁세가를 밀어내고 초씨세가가 오대세가의 한 자리를 차지했을 것 이다. 그런 만큼 초씨세가의 본거지는 제법 웅장한 규모를 자랑했다.
초씨세가의 본거지가 눈앞에 뻔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묵향은 선뜻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웬일인지 세가를 코앞에 두고 묵향이 미적거리고 있자, 마화가 미심쩍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가주에게 통보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었나요?”
묵향이 초씨세가에 볼일이 있다고 했을 때, 마화는 그가 왜 그곳에 가려는지 금방 눈치 챘었다. 초류빈 부교주가 죽었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리라. 마화의 물음에 묵향은 난감하다는 듯 대꾸했다.
“녀석의 어머니가 아직까지도 살아 있다는 게 문제지.”
슬쩍 눈치를 보니 초류빈의 어머니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에 상당히 껄끄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에 마화는 크게 인심을 쓴다는 듯 제안했다. “제가 대신 통보해 드릴까요?”
하지만 묵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야 있나. 부교주의 죽음을 전하려면 본좌가 직접 가야 격에 맞지.”
말은 그렇게 단호히 하면서도 묵향은 전혀 움직일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초류빈의 어머니를 직접 만나 그녀의 면전에 대고 ‘댁의 아들이 이번에 전 사했으니 그리 아쇼.’ 하는 식의 통보를 해야 할 걸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세인들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마왕이라고 매도당하는 교 주가, 이토록 인간적이라는 것에 마화는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한동안 조용히 묵향을 바라보던 마화는 뭔가 생각이 떠올랐는지 살그머니 초진걸 좌호법에게 다가가 물어봤다.
“부교주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시죠?”
물어보지 않으면 대답을 하지 않을 정도로 과묵한 인물이기는 했지만, 초진걸은 꽤나 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묵향이 왜 초씨세가를 방문하려 하는지, 또 누구를 만나려고 하는 지까지 벌써 모든 조사를 다 끝낸 상태였다. 그걸 알고 있는 쪽이 경호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훨씬 더 효율적 이기 때문이었다.
“초씨세가의 장로라고 들었습니다. 명문 출신으로 여자로서는 보기 드문 무재(武)를 지닌 분이라고 하더군요.”
초진걸이 ‘보기 드문’이라는 표현까지 쓴 걸 보면 대단한 여고수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초류빈이 지녔던 무공에 대한 재능은 그의 어머니에게서 물 려받은 것이었을지도…………….
마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초씨세가 쪽에서 소란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마화의 시선이 초씨세가 쪽으로 향했 을 때, 귀청을 찢는 듯한 요란한 경종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뎅! 뎅! 뎅!
마치 큰일이라도 난 듯 경종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조용하던 초씨세가의 본거지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묵향의 인상이 살짝 일그러졌다. 갑자기 초씨세가가 경종을 울리고 분주해진 이유를 금방 눈치 챘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그곳에는 자신을 호위한답시고 따라온 호법원의 고수 11명이 태연한 표정으로 초씨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반인들이 라면 그들 앞에서 감히 숨조차 내쉬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마기를 뿜어내는 거마(巨) 11명이 졸졸 뒤를 따라왔으니 저들이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을 리 없다.
“여기서 이러고 계실 게 아니라 빨리 방문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마화가 묵향에게 말을 건네는 동안 초씨세가에서 수십 마리의 전서구가 일제히 날아올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청록색의 야행복을 입은 십수 명의 무사들이 메뚜기처럼 튀어나와서는 어딘가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주위 문파에 구원을 요청하나 보네요.”
마화의 중얼거림에 묵향은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겨우 11명을 상대하는 것에 자신이 없어서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다니…………. 자존심도 없는 녀석들 같으니라고.”
“호호, 11명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뒤에 또 다른 후속부대가 있을까 겁내는 거겠죠.”
마화의 말대로 초씨세가는 꽤나 커다란 규모의 문파였다. 그리고 초류빈 같은 고수를 키워 낼 정도로 그 뿌리 또한 얕지 않았다.
그들이 겁내는 것은 이것이 마교의 전면적인 도발이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세가의 총력을 기울인다면 11명의 마두들이야 어떻게 없앨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만약 후속부대가 뒤따라오고 있다면 도저히 답이 없는 것이다.
쓸데없이 일이 커진 것 같아 짜증이 치솟았지만, 묵향은 어쩔 수 없이 초씨세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화와 호법원 고수들이 그 뒤를 따 랐다.
앞서 가던 묵향이 갑자기 뒤로 돌아서더니 마화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건 네가 가지고 있다 전하는 게 모양새가 좋겠지.”
그러면서 묵향은 품속에서 작은 보따리 하나를 꺼내 마화에게 건넸다.
“이게…, 뭐죠?”
“뭐긴, 그녀석의 유품이지.”
보통 특별한 경우가 아닐 때에는 정문에 급이 낮은 무사가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마교의 난입이 염려되는 시점이라 그런지 꽤나 높은 인물이 서 있었고, 그 덕분에 그는 한눈에 다가오고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헉!”
“무슨 일이십니까?”
“너는 지금 당장 가주님께 아뢰라. 교, 교주가 왔다고 말이다. 빨리!”
“예?”
“빨리 가서 고하라니까!”
그렇게 명령한 다음, 그는 황급히 달려 나가 묵향에게 코가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혔다.
“어서 오십시오, 교주님. 소생은 초씨세가의 정문을 맡고 있는 박진철이라 합니다.”
박진철은 묵향을 비롯해 그 뒤에 서 있는 마인들을 힐끔 쳐다본 다음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그들이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마기에 자신도 모르게 두 발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 가주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하지만 교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의외였다.
“가주는 됐고, 본좌는 초운하(雲河)를 만나러 왔다.”
“초, 초운하요?”
“그래, 초운하 말이다. 여기에 초운하라는 여인이 있지 않더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박진철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왈칵 일그러졌다. 초씨 성을 쓰는 것으로 보아 세가 사람인 것 같긴 했지만 아무리 머리 를 굴려 봐도 그런 이름을 쓰는 여인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대의 맹한 얼굴을 바라보던 마화가 가볍게 혀를 차며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교주님께서는 귀 세가의 초운하 장로님을 만나러 오셨어요.”
독수낭랑 종리운하가 초씨세가에 시집와 초씨라는 성을 부여받은 지도 어언 6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시집올 당시부터 뛰어난 고수였던 그 녀는 세가 내에서 단연 두각을 드러냈고, 고위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런 그녀가 장로직에서 은퇴한 게 벌써 20여 년 전이다. 그녀는 남편 초풍천이 죽 은 다음 날, 은퇴했던 것이다.
박진철이 세가 내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굳혔을 때쯤엔 그녀는 벌써 은퇴한 후였기에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기억하는 한, 여자로서 장로직에까지 오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장로라는 말에 묵향이 찾는 여인이 누군지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아! 그분이시라면 이미 은퇴하셨는데…
은퇴했다는 말에 묵향의 안색이 살짝 찌푸려졌다.
“왜? 여기 없느냐?”
“아, 아닙니다. 세가 내에서 기거하고 계십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박진철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교 교주가 왜 가주가 아닌, 이미 은퇴한 장로를 찾아온 것인지 그 이유를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있는 곳으 로 안내하지 못하겠다며 배짱을 부릴 담력은 아예 없었다.
만약 지금과 같은 상황이 춘릉 대회전 이전에 일어났다면, 아마 그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비듯 도를 뽑아 들었을지도 모른다. 세가에 그런 사람이 없다고 딱 잡아떼며 말이다.
하지만 춘릉에서 공공대사와의 비무를 통해 보여 준 교주의 무위는 너무나도 엄청났다. 도저히 인간이 펼치는 무공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 였으니 말이다.
만약 자신이 직접 보지 않고,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들었다면 당연히 거짓말로 치부해 버렸을 정도로 대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지났다고 감히 교주에게 개길 수가 있겠는가.
세가 안쪽으로 들어가서 넓은 연무장을 지나칠 때쯤이었다. 수행원들을 거느린 가주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게 보였다.
“안녕하셨습니까? 교주.”
“오랜만이군.”
“자, 이쪽으로 드시지요.”
“아닐세. 자네를 만나러 온 게 아니라 초운하라는 여인을 만나러 온 거야.”
초운하라는 말에 흠칫하는 듯했지만, 초우는 유연하게 행동했다.
“장로님을 말씀이십니까? 그럼 저를 따라오시지요. 이쪽입니다.”
굳이 자신이 안내할 필요가 없는데도, 그가 직접 안내하겠다고 나선 것은 묵향이 왜 초운하 장로를 찾아온 것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 게 생각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묵향에게서 적대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한몫 했다.
초우는 묵향을 안내하고 있던 박진철에게 시선을 돌려 지시했다.
“여기는 노부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는 맡은 일이나 하게.”
“옛, 가주님.”
“자, 이쪽으로………”
초우가 안내한 곳은 초씨세가의 건물들 중에서 북쪽 외곽이었다. 그리고 산 아래쪽에 작은 오두막이 한 채 있었다. 초우 자신이 생각해도 가문의 장 로를 역임했던 사람이 기거하기에 너무나 초라하다고 생각했는지 황급히 변명과도 같은 설명을 했다.
“원래는 내실 쪽에 기거하셨는데, 은퇴하신 후에 이리로 옮기신 겁니다. 어쩌면 조금이라도 더 남편 가까이 있고 싶으셨는지도 모르지요. 저 산 중 턱에 묘가 있거든요.”
“죽었다는 보고는 들었네.”
차분한 묵향의 대꾸에 초우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운하의 남편, 그러니까 초풍천(楚風天)은 교주가 관심을 가질 정도의 고수가 아니 었다. 오죽하면 그의 명호가 옥면일랑(玉面一郞)이었겠는가. 명호대로 겉모습이야 끝내 줬지만, 알맹이는 영 아니올시다였던 것이다.
그런 초풍천의 죽음을 마교 교주씩이나 되는 거물이 알고 있다고 하니, 어떻게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오두막에 도착한 초우가 초운하를 소개시켜 주기도 전에 묵향은 성큼성큼 걸어 호미로 밭을 일구고 있던 한 중년여인에게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소이까?”
놀랍게도 그녀가 바로 초운하였던 것이다.
초운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척을 이미 읽었을 게 뻔한데도 밭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이 자신을 찾아 이리로 오고 있 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사내의 목소리에 초운하는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낯선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뒤쪽에는 가주인 초우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상시였다면 무시하고 자신의 볼일을 봤겠지만, 그녀는 호미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을 건 젊은이의 내력이 궁금했던 것이다.
저 뒤쪽에 서 있는 11명의 마인들. 엄청난 마기를 뿜어내는 것이, 그 하나하나가 자신이 감당하기에도 벅찰 정도의 인물들이었다. 그런 마인들과 함 께 온 젊은이였으니, 그 정체가 궁금했던 것이다.
초운하는 흙 묻은 손을 앞치마에 쓱쓱 문질러 닦으며 가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분께서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오신 겁니까? 가주.”
“그분은 천마신교의 교주십니다. 장로님을 뵙고 싶다고 하셔서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혹, 초운하가 말실수라도 할까 두려웠던 초우는 재빨리 겉모습만 젊어 보이는 마두의 신분을 일러줬다.
뒤에서 조용히 시립해 있는 마인들을 보고, 어느 정도는 젊은이의 신분을 짐작하고 있었던 초운하였다. 하지만 설마하니 상대가 교주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조차 못했다.
더군다나 이 시대 최강의 고수가 이렇게 평범한 인상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그의 무위에 어울릴 만한 그 어떤 존재감조차 느낄 수 없었기에 그녀는 더욱 놀라워했다.
‘반박귀진(返縛歸眞)의 경지에 들어가면 겉으로 전혀 정기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더니………………’
그런데 교주가 왜 자신을 찾아왔을까? 그녀는 그 이유를 전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살아온 노숙한 초운하는 전혀 당황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기거하는 허름한 모옥(茅屋)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멀리서 오셨는데, 대접할 게 마땅치 않아서………….”
초운하는 하녀를 시켜 차를 내오라고 이른 다음, 교주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좁은 실내에는 작은 탁자 하나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정도 공간이라면 4명이 앉기에도 비좁을 정도였다.
마화는 묵향의 뒤를 따라 들어왔고, 초우 역시 묵향의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끼어들어 한 자리를 차지했다. 만약 묵향이 밖으로 나가라고 하면 어 쩔 수 없이 쫓겨나야 했겠지만, 운 좋게도 축객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밖에 서 있던 다른 사람들은 형편이 달랐다. 묵향과 마화가 모옥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좌호법은 모옥 앞을 쓰윽 막아서며 수하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와 동시에 호법원의 고수들은 본격적인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경계의 대상에는 세가의 인물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없었다. 그들은 모옥 안을 기웃거리는 세가의 사람들을 가차 없이 밖으로 내몰아 버렸 다.
지금껏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던 중년여인이 안으로 서슴없이 들어와 교주의 옆자리에 앉는 것을 보며 초운하는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기 어려웠다. 자신의 안목이 이렇게까지 형편없어졌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호법원 고수들의 존재감이 워낙 강렬하다 보니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냥 묻혀 버린 탓이 컸다.
‘교주와 함께 다니는 것을 보니, 극마에 이른 고수라는 말인가?”
극마의 경지에 이르면 마기를 숨길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찬찬히 마화를 살펴본 초운하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곧 깨달았다. 마화는 자신의 기척을 숨기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희미하지만 아주 뚜렷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화의 무공내력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초운하의 무공 수위가 높았기 때문이다.
‘정파의 인물이 마교 교주와 함께 다니다니…………… 어찌 된 일인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구먼.’
내심 궁금하긴 했지만, 초운하는 더 이상 마화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자신에게 볼일이 있는 것은 저 여인이 아니라 교주였으니까.
그녀는 앞치마를 벗어 하녀에게 넘겨주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조아렸다.
“일을 하던 중이라 모습이 이러니 너무 탓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괜찮소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
묵향이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마화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초류빈이라는 이름을 아실 겁니다.”
그러자 지금껏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초운하가 흠칫했다. 가문을 박차고 나간 후, 수십 년 동안 소식 한 번 없었던 아들의 이름이었다. 설 마 그 이름을 마교도들에게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던 초운하였다.
그녀는 문득 치솟는 분노를 억제하기가 힘들었다. 어딘가에서 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설마 마교의 주구走狗)가 되어 있을 줄이야. 아들 녀석 은 저 반반한 계집처럼 교주에게 포섭되었던 모양이었다.
만약 이런 말을 마교도랍시고 다른 놈이 찾아와서 주절거렸다면 아무리 수양이 깊은 그녀로서도 도저히 참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말을 꺼낸 건 바로 마교 교주가 아닌가.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교주가 직접 찾아온 걸 보면, 집을 뛰쳐나간 자식이 그런대로 마교 내에 서 대접받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묘하게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빈이가 귀교에 있었던 모양이군요. 그토록 찾아도 생사를 알 수 없었건만…….”
마화가 대화의 물꼬를 터놓자 묵향으로서도 말을 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그는 본교에서 대단히 뛰어난 인재였소.”
마교의 주구가 되었다는 말에 속은 편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식이라고 안부가 궁금했던 초운하는 담담한 어조로 슬쩍 물었다.
“잘 지내고 있습니까?”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 노부로서도 난감하오만………….”
어렵게 입을 여는 교주의 모습에 초운하의 가슴은 덜컥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앞부분만 들었지만 그녀는 그 뒷말이 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죽었다는 말이리라. 요 근래 마교가 금나라와 대혈전을 벌인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혹시?
“본교의 부교주인 초류빈은 금나라와의 전투 중 사망했소이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지.
초운하는 아들이 죽었다는 말 이상으로 부교주였다는 말에 더한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그렇게 높은 지위에까지 올라간 걸 보면, 얼마나 마교에 미 쳤었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초운하는 도저히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걸 보면…
“이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이때 경악한 초우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도저히 옆에서 듣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마교의 부교주 자리가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게 아 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말은 즉, 그의 사촌형인 초류빈이 절대고수의 반열에 올랐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실례인 줄 알지만 부교주였다는 말은 형님이 혹시 화경에 올랐다는 뜻입니까?”
화경이라는 말에 초운하도 흠칫 놀랐다. 과연 아들이 그 지고한 경지에 올랐다는 말일까? 그녀의 눈길이 황급히 교주에게로 가서 꽂혔다.
묵향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화경이 맞소. 녀석이 마공을 익힌 것은 아니니까 말이오.”
아들이 화경에 올랐다는 말에 초운하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무공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버리는 게 무인의 생리다. 아들놈은 무공을 완성하기 위해 마교에 투신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할 것인가. 결국 이렇게 허망하게 죽어 버린 것을. 초운하는 문득 먼저 가버린 남편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이런 더러운 꼴을 안 보 고 먼저 가버린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본교에서는 시체는 곧바로 화장하여 뿌리는 것을 관례로 하고 있소. 대신, 생전에 부교주가 쓰던 것들을 가져왔소.”
묵향이 슬쩍 눈짓을 하자, 마화가 재빨리 품속에서 작은 보따리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보따리를 바라보는 초운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라고 알려졌던 마교 교주였다. 요즘 들어 그것이 낭설이었다는 말들이 무림을 떠돌고 있었다. 금나라 군대를 맞이하여 춘릉 대회전에서 보인 무시무시한 신위와 함께. 더군다나 뒤통수를 치려던 무 림맹을 용서하는 관용까지 베풀었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 희대의 거물이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아들의 죽음을 알리고 있었다. 수하를 통해 알리지 않고, 자신이 직접 찾아와서 말이다. 이것만 봐도 아들 이 교주에게 얼마나 사랑받으며 지냈는지는 안 봐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녀석, 나름대로는 행복하게 살았는지도……’
애써 감정을 추스른 초운하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슬픔에 잠겨 있었다.
“어디.., 어디에다가 뿌렸나요?”
“태산(泰山) 밑에 보면 태안(泰安)이라는 마을이 있소. 태안 앞을 흐르는 작은 강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뿌렸다고 들었소.”
태산이라는 말에 초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태산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곳에서도 전투가 있었습니까?”
묵향은 초우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사람을 보내보면 알 거다. 장인걸 녀석이 파놓은 함정 때문에 태산파의 절반이 날아갔으니까.”
“태산파의 절반이 날아갔다고요? 태산파는 그곳에서 모두 철수한 걸로 들었는데……
“사람을 말한 게 아니라 태산파의 건물 절반이라는 말이야.”
더더욱 알 수 없다는 듯 초우가 맹한 눈을 하고 있자, 묵향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설명해 줬다. 물론 그리 자세한 설명은 아니었지만.
“장인걸 녀석이 그곳에 함정을 파놨었다. 그리고는 수십 만근에 달하는 화약을 일시에 터트렸지. 그때 초 부교주는 물론이고, 패력검제와 본교의 정 예 수십 명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했다.”
초류빈뿐만 아니라 패력검제도 함께 죽었다는 말에 초우는 경악했다.
“패, 패력검제 대협이 죽었다구요?”
묵향은 말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정파의 존경받는 명숙들 중 한 명인 패력검제까지 그곳에서 죽었다는 말에 초운하는 크게 위안을 받은 모양이었다. 적어도 아들이 의미 없는 전장에 서 죽지는 않았다는 뜻이었으니까.
묵향은 더 이상 해 줄 말이 없었기에 조용히 목례를 한 뒤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고 있는 초운하에게 위로를 해줄 처지도 아닌 만큼, 자리를 비켜 주는 것이 그녀를 도와주는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묵향의 뒤를 따라 나온 초우의 안색은 매우 복잡했다. 가문에서 화경급 고수가 탄생했다는 것은 분명 대단히 영광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마교 를 통해서 배출된 것이었기에 어디에다가 말도 꺼내기 힘들게 되지 않았는가.
“본교와 협정을 맺을 생각은 없는가?”
갑작스런 제의에 초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협정이라니요?”
“뭐, 상호불가침협정 같은 거지. 본교와 천지문 간에 협정을 맺었다는 얘기 못 들었나? 바로 그런 협정 말이야.”
물론 그런 얘기는 들었다. 그리고 그놈의 협정 때문에 천지문이 완전히 찬밥 대접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혹, 소문을 두려워하는 거라면 비밀협정을 맺는 것도 상관없다네. 본좌가 자네의 도움을 받을 게 있어서 이런 제의를 하는 건 아닐세. 초 부교주를 추억하는 의미에서 초씨가문에 뭔가 도움을 주려고 하는 거지. 본좌의 진심을 알겠나?”
협정의 세부내용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마교와 불가침 협정을 맺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더군다나 그걸 비밀로 할 수 있음 에야.
하지만 초우는 그 제의를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마교와 갈등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협정 체결로 인한 실익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던 탓도 컸 겠지만, 혹시 뭔가 함정이라도 숨겨진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초우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교주는 그다지 기분 나쁜 듯한 얼굴은 아니었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협정이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행동이었다. 단지 그가 초씨세가를 대놓고 도와주기 위한 하나의 장치일 뿐.
“그렇다면 협정은 맺지 않더라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서슴지 말고 본좌에게 연락하게 만사를 제쳐 놓고 도와줄 테니 말이야. 물론, 본교가 초씨 세가를 돕는다는 걸 그 누구도 모르게 해 줄 테니 그건 걱정하지 말게. 초 부교주를 생각한다면 그 정도는 응당 해 줘야지.”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초우는 묵향이 예의상 하는 소리쯤으로 듣고 넘겼다. 명문세가에서 마교에 도움을 청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초씨세가를 나설 때부터 마화는 무슨 생각을 그렇게도 하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묵향의 뒤를 따라 걷기만 했다. 그러다 초씨세가가 안 보이게 되었을 때쯤, 돌연 고개를 번쩍 치켜들며 묵향에게 물었다.
“당신, 기억이 돌아왔죠?”
마화의 질문에 묵향은 무슨 소리냐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기억을 잃었다고…………?”
“척 보면 알아요. 이전까지만 해도 몰랐었는데, 오늘 초운하 여협과 대면하는 것을 보니 알겠더군요. 그건 묵향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예전 국광(菊 狂)의 모습이었지.”
갑작스런 마화의 말에 뒤를 따르던 여문기를 비롯한 호법원 고수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교주가 가짜라는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봐도 교주가 딴사람으로 바뀌었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마화의 저 말은 또 뭐란 말인가?
부정도, 그렇다고 긍정도 하지 않고 있는 묵향에게 마화가 재차 물었다.
“언제였죠?”
“뭐, 뭐가……?”
“언제 기억이 돌아왔느냐는 말이에요.”
묵향은 어색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꽤 됐지…….”
그 말에 마화는 새침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나는 당신이…, 당신이 나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영원히 잊어버렸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포기하고 있었는 데…………….”
순간 마화의 눈에서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묵향은 난처한 표정으로 마화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런 경 우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마화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황급히 닦은 후 묵향에게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시 물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
그제서야 묵향은 미소를 지었다. 마화의 첫인상이 좋았다고는 할 수 없다. 딱 꼬집어 말하자면 마치 독 오른 들고양이 같았다고나 할까.
“물론 기억하지. 정말 감당하기 힘든 여자였다는 것까지도.”
순간 마화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자기가 생각해도 그때는 왜 그렇게 철딱서니가 없었는지 모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그런 수줍은 반응도 잠시였다. 그녀는 다시 눈물을 흘리며 묵향에게 달려가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오오, 국광! 당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묵향 일행을 정문 앞까지 배웅한 초우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발길을 옮겼다. 물론 환영하고 싶지 않은 손님들이었지만 그의 무림에서의 신분을 생 각하면 자신이 직접 배웅을 해야 했던 것이다.
묵향이 떠난 다음에야 초우는 이미 고인이 되어 버린 사촌형을 회상할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허허,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결국 화경까지 올라갔구나. 초씨 문중에 절대고수가 나올 수 있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나는 정말 형이 자랑스러워’
잠시 감상에 빠졌던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사촌형도 화경에 올랐는데, 자신이라고 못할 건 뭐가 있겠는가. 아니, 화경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화경 에 근접하는 경지만 해도 세인들의 존경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래, 내가 요 근래 너무 안이했어. 아무리 일이 바빴다고는 하지만, 하루 1시진도 제대로 수련하지 않았으니…………….”
그는 오랜만에 수련이나 해 볼까 하는 생각에 연무장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그는 연무장으로 갈 수가 없었다. 초운하가 자신을 불렀기 때 문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저쪽에서 초운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가주, 내 자네에게 긴히 할 말이 있네.”
‘젠장, 수련하기가 왜 이렇게 힘든 거야.’
초우는 입맛이 썼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제 집무실로 가시지요.”
정문 근처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주위를 오가고 있는 중이었기에 그렇게 권한 것이다.
“그러세나.”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장로님.”
초운하에게 자리를 권한 초우는 하녀를 불러 다과를 내오라고 일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초운하는 품속에서 서책 1권을 꺼내 탁자 위에 올리더니, 초우 쪽으로 슬쩍 밀었다. 오랫동안 쓰기 위해서인지 책의 겉표지는 가죽으로 감싼 상태였 다. 얼마나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책장에는 손때가 까맣게 묻어 있었고, 가죽은 반들반들 윤이 흘렀다.
“이게 뭡니까?”
“빈이가 남긴 걸세. 나한테는 보탬이 되지 않겠지만, 가주에게는 커다란 보탬이 될 듯해서 가져왔다네.”
자신에게는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초운하. 그녀의 말에 초우의 궁금증은 더욱 불타올랐다. 장로에게는 필요 없고, 나한테는 보탬이 될 만한 게 뭘까? 무슨 중요한 정보라도 써져 있는 건가?
초우는 급히 서책을 집어 들어 펼쳐봤다. 빼곡히 적혀 있는 글자들. 앞부분만 대충 읽었는데도 초우는 이것이 72식 광풍도법(狂風刀法)의 구결이라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자신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기에 맥이 탁 풀렸다.
그제서야 초우는 왜 초운하가 그런 식으로 얘기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종리세가 출신인 그녀는 광풍도법을 익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비급이 필 요 없다는 뜻이리라.
“누가 보면 어쩌려고 이걸 기록해서 들고 다녀. 형님도 참, 조심성 없기는…………….”
무심결에 초류빈을 탓하는 초우. 적전제자에게만 전수되는 광풍도법은 초씨세가 최고의 무공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투덜거린 것은 밑바닥에 깔린 실망감 때문에서였다. 광풍도법이라면 졸면서도 펼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익혔다고 생각하 는 그였다. 그런 만큼 화경에 이를 수 있는 좀 더 강력한 무공이 이곳에 적혀 있기를 바랬는지도 몰랐다.
이미 알고 있는 구결이었던 만큼, 초우는 대충대충 책장을 넘기며 읽었다. 자신이 암기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 전혀 다를 게 없는 내용이니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렇다고 초운하가 앞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안 읽을 도리가 없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충 읽는 시늉을 하던 초우의 안색이 어느 순간, 심각하게 변했다. 구결을 읽어 나가던 중에 놀랍게도 몇 군데의 내용이 바뀌어 져 있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래쪽에는 왜 구결을 이렇게 바꿔야 하는지에 대한 해석과 함께 그에 따라 변화되어야 하는 도로(刀路)의 흐름도 곁들여져 있었다.
“이, 이건……?”
“빈이가 광풍도법을 손봐 놓은 거라오. 지고한 경지에 오른 후, 뒤돌아보니 광풍도법의 미흡한 점들이 눈에 보였던 것이겠지.”
초운하의 설명을 들을 필요조차 없었다. 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초우도 그걸 눈치 챘으니까. 전대 가주였던 선친에게 직접 광풍도법을 전수받은 후, 그 깊은 오의(義)를 깨닫기 위해 노력한 세월만 해도 어언 30여 년이 넘는다.
비급을 읽는 것만으로도 지금껏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지던 부분들이 하나씩 명쾌하게 풀려 나가는 그 쾌감. 너무나도 오랜 세월 수련해 왔던 도법이 었기에, 몇 글자 되지 않는 주석만으로도 충분히 실타래처럼 엉켜 있던 무공의 오의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기분을 느낀 것이다.
초우는 자신도 모르게 비스듬히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정좌를 하고 비급을 읽어 내려갔다. 마지막 72식의 구결까지 모두 읽었을 때, 초우의 마음 속은 도저히 털어 내지 못하고 남겨둘 수밖에 없었던 묵은 때를 싹 다 벗겨낸 듯한 개운함과 충만감으로 가득 찼다.
이런 기분을 느껴본 게 얼마만이던가. 저 옛날, 광풍도법을 처음으로 완벽하게 펼치게 되었을 때의 그 느낌이 이러했을까?
하지만 그런 희열과 함께 초우는 짙은 아쉬움 역시 느껴야 했다. 지금껏 광풍도법을 익히며 느껴 왔던 모든 불만사항들은 한꺼번에 해결되었지만, 그렇다고 크게 바뀐 것도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광풍도법이 더욱 강해지기는 하겠지만, 이 정도는 오랜 실전경험에 따른 임기응변으로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부분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광풍도법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50보, 100보인 셈이었다.
초우는 아쉬운 눈길로 바라보며 비급을 덮으려다 72식 광풍도법의 구결이 끝났음에도 아직 책장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에 눈길이 갔다.
황급히 그 뒷장을 넘겨보니, 놀랍게도 새로운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내용은 무공에 대한 좀 더 원론(原論)적인 것으로서, 세가의 도법을 익힘에 있 어 그 추구해야 할 바와 자세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검(劍)은 찌르기에 알맞게 가볍고 가느다랗게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검법의 기본은 적을 찔러서 죽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찌르는 것이 휘두르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변화를 내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손목을 조금만 움직여도 공격지점을 완전히 바꿀 수 있기에 상대가 방어하기에 매우 난해하다. 그렇기에 검법은 수많은 변초와 허초들이 발달해 있어 상대를 현혹시키는 것에 주안점을 두게 된다.
하지만 도(刀)는 그와 완전히 반대다. 찌르는 것보다는 베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 휘둘러야 하는 만큼, 아무래도 찌르기에 비해 변화를 주기가 힘들 어진다. 대신 그 부족한 부분을 무게와 힘으로 메우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도를 이용하는 문파들은 초씨세가처럼 무거운 중도(刀)를 애용했다.
이런 원론적인 글을 읽으며 초우는 먼 옛날을 추억했다. 세가의 무공 원류에 대해서 듣고, 또 그것에 대해 깊이 빠져들었던 때가 언제였더라? 그것 은 바로 자신이 어렸을 때, 즉 초보였을 때였다. 그 이후로는 보다 높은 경지로 올라가는 것에만 집중했지, 이렇게 원류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오랜만에 보다 보니 신선하기는 했지만, 원류에 대한 설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광풍도법을 익힘에 있어서 추구해야 할 핵심적인 부분들이 조목조목 나열되어 있는 부분들을 읽으며 초우는 사촌형이 이런 쓰잘데기 없는 것들을 굳이 기록해 놓은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공을 익히는 자라면 응당 자신이 익히는 무공의 원류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고, 또 그 추구하는 바도 알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 뒷장에 연결되어 있는 내용을 읽었을 때, 초우는 마치 커다란 몽둥이로 뒤통수라도 맞은 듯한 엄청난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그 뒷장 에 연결되는 내용이 바로 광풍도법을 익힌 도객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도의 흐름에 대한 조언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에 미래를 위한 조언만이 쓰여 있었다면 초우가 이토록 큰 충격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거니까. 하지 만 글의 흐름이 과거, 현재, 미래로 쭉 연결되어 흐르고 있었기에 그것은 그에게 더욱 강하게 다가왔고, 한순간에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초우의 몸에서 뭔가 맥동치는 듯한 웅혼한 기운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은 시선은 책을 향한 채 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평온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가주의 모습.
그것이 바로 모든 무인들이 꿈꾸는 깨달음의 순간임을 초운하는 금방 알아챘다. 그녀 또한 저런 순간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으니까.
“가주, 부디 빈이의 노력이 헛된 것이 되지 않도록 해 주시구려.”
가주를 바라보는 초운하의 가슴은 아들에 대한 자랑스러움으로 터질 것만 같았다. 살아서 훌륭한 주군을 섬겼을 뿐만 아니라, 가문을 위해 이렇듯 대단한 유산까지 남겨주다니.
다시금 초운하의 눈가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 순간만큼은 죽은 아들이 너무나도 보고 싶은 초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