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7권 6화 – 재정비하는 마교
재정비하는 마교
마교에서의 기본적인 율법은 강자지존(强者之尊)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실력 차가 미세하여 생사대결을 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기에 그 상하관계가 매우 미묘해진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뭔가 다른 임무가 있어 수행능력이 뛰어나다든지 하면 직위가 오를 가능성이라도 있겠지만, 마교의 주력 고수들은 눈만 뜨면 하는 게 수련 이다 보니 무공 외적인 능력을 드러낼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위로 올라갈수록 교주의 신임을 얼마나 받느냐, 혹은 얼마나 든든한 배경을 지 니고 있느냐가 아주 중요해지게 된다.
물론 그런 배경을 만드는 능력도 강자로서 지녀야 할 덕목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마교처럼 강자를 우대하는 단체에서조차도 그런 눈에 보이 지 않는 이중 잣대가 존재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막심한 피해를 입은 전쟁이 끝난 다음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전쟁에서 수많은 고수들이 죽었기에, 조직의 대대적인 재편성이 불 가피한 상황인 것이다.
공을 세운 무사들은 진급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었다. 더군다나 교의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장로직마저 한 자리가 비어 있는 상태였다. 교내에서는 누 가 옥관패를 대신하여 새로운 장로가 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게 새로운 진급자들의 명단인가?”
“예, 교주님.”
묵향은 설민이 건넨 두툼한 문서다발을 꼼꼼히 살펴봤다. 수많은 고수들이 죽어 나간 상황이라, 그 공백만 메우면서 위로 올라간다고 해도 모두들 수십 단계 이상 서열이 올라가게 된다. 더군다나 만약 눈에 띄는 공이라도 세웠다면, 심하면 100단계 이상의 서열이 이동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누가 어디서 공을 세웠는지, 묵향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보고서가 정확하게 작성되어 있다면, 그것에 맞춰 상을 주면 된다.
문제는 얼마나 정확하게 작성되어 있느냐, 그것만 자신이 판단하면 되는 것이다.
묵향은 자신이 읽던 두툼한 책자를 내려놓으며 설민에게 지시했다.
“교내 상위 200위까지 서열이 기록되어 있는 서책을 가져오게. 전쟁 전의 것은 물론이고, 이번 진급이 시행된 후에 변동할 것까지 말이야.” “즉시 작성하여 가지고 오겠습니다, 교주님.”
서열표가 새롭게 작성되는 것인 만큼, 곧바로 가져온다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설민은 밑에 사람들을 채근해 금세 시간 그 일을 끝마쳤다. “여기 있습니다, 교주님. 이것이 과거의 것이고, 이게 새로운 서열표입니다.”
책자에는 서열과 이름, 그리고 그 사람의 직책이 기입되어 있었다.
새로운 서열표를 보는 순간, 묵향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의 이름 바로 밑에 마화의 이름이 써져 있는 것을 보니, 뭔가 기분이 묘했던 것 이다.
두 권의 책자를 비교해서 살펴보니, 누가 죽었고 누가 그 자리를 대신해서 들어왔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자신과 고락을 함께 했던 뛰어난 수하들을 많이 잃었다. 특히 초류빈이나 옥관패 장로가 죽은 것은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만큼 힘겨운 전쟁이었다는 반증이겠지만, 그들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 묵향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한참 서열표를 꼼꼼히 살펴보던 묵향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군사, 자네 이름은 어디에 있나? 아무리 살펴봐도 안 보이는데 말이야.”
“예? 그, 그럴 리가……………”
급히 만들어서 가져오느라 아무래도 검증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큰 오류는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자신의 이름이 없 는 것이다. 순간, 설민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여기는 물론이고, 이쪽에도 자네의 이름이 없더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제서야 설민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그의 아버지 설무지는 교내 서열 4위를 차지했었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로서 새롭게 군사가 된 설민의 지위를 몇 위로 줄지에 대해 논란이 심했었다.
더군다나 그때는 철영과 관지가 대권을 두고 다툼을 벌이고 있던 때라 누구도 설민에게 높은 서열을 주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가 어느 쪽에 붙느냐 에 따라 쌍방 간에 희비가 엇갈릴 테니 말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묵향이 돌아왔고, 또 전쟁이 벌어지고…………… 뭐 어쩌다 보니 설민의 서열이 허공에 붕 떠버렸음에도, 그걸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시간이 이렇게 흘러 버렸던 것이다.
“약간의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교주님.”
“뭐, 어쩌다 보면 누락될 수도 있겠지. 그래, 자네 서열은 몇 번째인가?”
과거 설무지가 죽기 전에 그가 받았던 서열은 2,352위였다. 군사부(軍師部)에서 일하는 문관에게 주어진 서열치고는 엄청나게 높은 것이었지만, 그 렇다고 그 서열을 그대로 묵향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한 문파의 군사 서열이 2,352위라는 건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 마음대로 서열을 높여서 교주에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설민이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묵향은 짜증스런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는 설민의 명단이 어쩌다 실수로 누락되었다고 생각했지, 설 마 아직까지도 예전 서열 그대로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고민을 하던 설민은 결국 고개를 푹 숙이며 이실직고했다.
“그게, 장로회를 거쳐야 제 서열이 확정될 듯………….”
“그게 무슨 말인가? 아직까지도 서열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말인가?”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교내의 서열조차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속하의 잘못입니다.”
간덩이가 작은 설민이 이렇게 솔직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사안 정도로 묵향이 자신을 문책할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짐작이 맞았는지 고개를 조아리는 설민을 보며 묵향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물론 씁쓸한 여운이 감도는 미소였지만.
“그게 어떻게 자네의 잘못이겠나. 자네가 군사직에 오른 후 꽤나 많은 일이 있었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이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게지. 어쨌건 잘못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바로 잡지 않을 수는 없지. 본좌가 자네의 서열을 정해 주겠네. 자네의 서열은 예전의 설무지 와 같이 대호법 다음이면 적당하겠군.”
묵향의 말에 설민은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교주님의 신뢰에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묵향이 자신을 얼마나 생각해 주는지를 느낀 설민의 눈가에 살짝 물기가 어렸다. 묵향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대호법 다음인 교내 서열 5위가 된다는 말이었다.
“뭘, 그 정도 가지고. 그쯤은 돼야 장로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을 거 아닌가?”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설민의 목소리에는 자신이 없었다. 사실, 자신의 서열이 아무리 높아진다고 해도, 저 노회하기 짝이 없는 늙은 마두들을 아버지처럼 손가락 하나로 다룰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들의 살기 띤 눈빛만 봐도 오금이 저리는데, 그들을 어찌 제어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그들도 설민이 심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말이다. “어허, 목소리가 왜 그렇게 자신이 없나? 힘내라구. 자네는 잘하고 있어. 지금까지 해 온 대로만 해 줘도 본좌는 충분히 만족해. 알겠나?”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다시금 눈길을 돌려 책자를 살펴보던 묵향은 여기저기에 공란이 있는 것들을 발견했다.
“이건 뭔가?”
“예, 아직 인원이 내정되지 않았기에 비워둔 것입니다. 전사자들이 많은 만큼, 대대적인 재편성이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특히 혈랑대와 같은 경우에 는 거의 전멸한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라……………”
“동방뇌무 장로에게 혈랑대를 재건하라고 해. 인원 선정에 있어서 최우선권을 줄 테니, 가장 뛰어난 고수로 100명을 뽑으라고 말이야.”
“가장 뛰어난 고수라고 하시면…, 호법원도 포함되는 겁니까?”
잠시 궁리하던 묵향이 대답했다. 예전처럼 딸린 식구가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호법원의 호위가 필요했다.
“대호법에게 전해. 고수의 수가 부족한 만큼 그쪽에서 양보하라고 말이야. 좌호법원은 그대로 유지하고, 우호법원의 수는 200명으로 늘리는 대신, 한 단계 낮은 고수들로 채워 넣으라고 해. 그리고 본좌의 가족들의 호위는 좌호법원이 전담하고, 그 외의 요인들에 대한 호위는 우호법원이 책임지는 것으로 하면 되겠군.”
“대호법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인원 차출에 대한 우선순위는 혈랑대 다음에 호법원으로 할까요?”
“그렇지. 그 외에는 예전처럼 하면 되겠군.”
“참, 자성만마대의 피해가 워낙 커서 꽤 많은 인원을 보충해야 하는데, 외부지단이나 분타에서도 인원을 차출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묵향이 대답했다.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특별한 일이 없다면 전투단들은 전부 총단에 있을 거고, 그 녀석들에게 경비를 세우면 되는데 말이야. 외부지단이나 분타도 어느 정도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어야지.”
“예,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수라마참대는 한중평 장로가, 천랑대는 천진악 장로가, 염왕대는 장영길 장로…….”
묵향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 설민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끼어들었다.
“서열로 본다면 염왕대는 관지 장로가 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흑풍대에 비해 염왕대가 월등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관지가 자신이 계속 흑풍대를 맡게 해 달라고 본좌에게 청해 왔네.”
하기야 흑풍대의 특성상 관지 장로 말고 다른 사람이 맡기는 어려웠다. 흑풍대는 마교의 다른 전투단과는 싸우는 방식이 완전히 달랐으니까.
“그리고 자성만마대는 초진걸에게 맡기는 게 좋겠지.”
서열만으로 따진다면 다음 장로가 될 사람은 혈화궁주 나유란이었다. 하지만 이번 결정으로 인해 초진걸의 서열은 나유란이나 진천악보다 높아지게 되었다. 전투단을 지휘하는 장로가 외부지단의 수장인 혈화궁주나 만악궁주보다 서열이 낮다는 것은 말이 안 되니까.
“초 좌호법이 교주님의 은혜에 감읍할 것입니다.”
“여문기 우호법을 좌호법으로 격상시키고, 우호법에는 설약벽 좌외총관을 임명한다. 여진 우외총관을 좌외총관으로,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 공이 큰 왕호(王)를 우외총관으로 임명하도록 해.”
전공(戰)이 뛰어난 왕호야 그렇다손 쳐도,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줄곧 외지로만 돈 설약벽을 우호법에 임명한 것은 설민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 이었다. 호법원은 교주를 근접거리에서 경호하는 것을 주 임무로 하는 만큼, 실력이 조금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믿을 수 있는 인물을 배치하는 것 이 관례였다.
과거 그녀와 함께 외총관의 휘하에서 근무했었던 좌외총관 천진악이 지금은 교내 서열 9위까지 올라가 있는 것을 보면, 그동안 그녀가 얼마나 홀대 받아 왔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그녀를 우호법에 임명한다? 설민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인사였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간에 묵향이 그렇게 결정을 내린 이상, 설민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명령하신 대로 이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새롭게 바뀐 서열표를 다시 작성해서 본좌에게 한 부 가져오게.”
“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군사 설민이 나가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수석장로가 찾아왔다.
“어서 오게나, 수석장로.”
“바쁘신데 찾아온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교주님.”
“아닐세, 시간은 괜찮아. 차나 한잔 하겠나?”
“감사합니다.”
묵향은 차를 가져오라고 명령한 다음, 수석장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무슨 일인가? 자네가 직접 찾아온 걸 보니 꽤나 민감한 사안인 모양이지?”
교의 행정적인 일은 군사가 알아서 처리했고, 무력에 관계된 일은 내총관(수석장로)이 처리했다. 편제상으로 따졌을 때, 호법원을 제외한 교내의 모 든 전투집단이 내관 휘하에 있었다. 당연히 수석장로의 권력은 교주 다음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한 가지 상의드릴 게 있습니다.”
“뜸들이지 말고 속 시원히 말해 보게.”
“혹, 부교주님께 연인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잠시 아연한 표정을 짓던 묵향이 대꾸했다.
“철영이 바람피우고 있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그게 아니라 초류빈 부교주님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런 말은 처음 듣는군. 수련은 안 하고 연애질이나 하고 있었다니. 죽어도 싸다니까. 그래, 어디의 누군가?”
묵향의 질문에 수석장로는 초류빈과 시녀와의 풋사랑에 대해 소상히 얘기했다.
“풉, 하고 많은 여자들을 놔두고 마영각(魔迎閣)에서 일하는 시녀라니…………… 내 그 녀석의 정신상태가 조금 맛이 간 건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 군. 그런데 본좌에게 그 얘기를 하는 이유는 뭔가? 정인(人)이 죽었다고, 그 애가 목이라도 맸다는 말인가?”
“그 아이는 아직 부교주님께서 돌아가신 걸 모르고 있습니다.”
“초류빈이 죽었다는 것을 교에 있으면서 모를 리가 있나.”
“그게 아니라, 초류빈 부교주님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기에 모르고 있는 것이지요.”
“호오, 신분을 초월한 사랑이라… 꽤나 재미있는 얘기로군. 그런데 그 얘기를 본좌에게 한 이유는? 질질 끌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주게.”
“그 아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교주님께 상의 드리고자 온 것입니다. 부교주님의 정인이었다는 걸 뻔히 알면서, 허드렛일이나 시키기도 그렇고…….”
이런 하찮은 일로 자신을 찾아온 수석장로를 묵향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석장로의 힘이라면 그냥 적당한 자리 하나 내주는 것쯤이야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기에 대답하는 묵향의 어투에는 약간의 짜증이 어려 있었다.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자리 하나 마련해 주면 되잖나?”
그러자 수석장로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그게…, 나이도 너무 어린데다………….”
“대체 몇 살인데 그러나?”
“이제 17살이랍니다.”
묵향은 황당하다는 듯 툴툴거렸다.
“허, 녀석의 취향을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가 없구만.”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묵향은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혹시 그 아이에게 뭔가 특별한 점은 없던가? 근골이 뛰어나다든지 뭐, 그런·
“제가 직접 만나 봤습니다만 무공에 소질도 없는데다가, 근골도 썩 좋은 편이라고는………….”
여기까지 말하던 수석장로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급히 덧붙였다.
“아니, 평균보다도 못하다고 평가하는 게 정확한 평가일 겁니다.”
“그렇다면 그놈은 왜 그런 쓸모없는 계집을 만나고 있었던 거야?”
“제가 만나 본 바에 의하면 심성이 착한 것 같았습니다.”
묵향은 수석장로의 말에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쯧쯧.. 그건 아닐 거야. 마음이 착하다느니, 그런 전혀 객관적이지 못한 부분에 끌리기에는 녀석의 나이가 너무 많잖아. 풋내기도 아니고 말이야. 혹, 그 아이의 미모가 뛰어나던가?”
“예, 마영각에서 일하는 아이인 만큼, 미모는 기본이지요. 혈화궁에서 자색이 출중한 아이들만 뽑아서 파견하니 말입니다.”
“응큼한 녀석 같으니라고.”
“허나 아마 미모가 그 기준은 아닌 듯합니다. 마영각에는 그 아이보다 뛰어난 미색을 지닌 아이들이 많이 있으니 말입니다.”
“미모도 아니라면 혹, 나이에 걸맞지 않게 밤 기술이 뛰어나다든지 하는 게 있을지도 모르지 않나?”
묵향은 가볍게 농담으로 받았지만 수석장로는 의외로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여색의 문제는 아닌 듯합니다. 그분이 만난 여자는 지금까지 그 하녀 하나뿐이었으니까요. 어쨌거나 뭔가 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어도 아는 게 없다 보니 높은 자리에 앉힌다는 것도 문제고, 그렇다고 자질도 없으니 누군가에게 제자로 받아들이라고 권하기도 그렇고………….
뭘 그런 걸로 고민하냐는 듯 묵향은 곧바로 말했다.
“그러면 자네가 제자로 삼으면 되겠네. 심성은 곱다니 잘됐군.”
“제, 제가요?”
자질이 없어서인지 수석장로는 그녀를 제자로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던 모양이다. 깜짝 놀라며 당황하는 걸 보면.
“사실, 자네도 제자를 거두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으니, 그냥 노후에 시중이나 들어줄 딸 같은 애를 하나 들인다고 생각하게나.”
전혀 예상치 못한 묵향의 권유에 수석장로는 차마 거부는 못하고 당혹스런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러자 묵향은 도망치지 못하도록 아예 쐐기를 박아 버렸다.
“정 데리고 있기 귀찮으면 한 몇 년 키우다가 시집 보내 버려. 혼수는 본좌가 지원해 줄 테니까.”
묵향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도저히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렇기에 수석장로는 마지못해 승낙을 해야 했다.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묵향의 재가(可)가 떨어지자마자 각 전투단들 및 호법원은 대대적인 재편성 작업에 들어갔다. 너무 많은 고수들이 죽었기에 충원할 만한 인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전투단의 규모를 조금씩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숫자만 늘리는 것보다는 평균적인 전투력을 높은 게 아무래도 좋겠다는 판단에서 였다.
그 때문에 혈랑대는 100명, 수라마참대는 400명, 천랑대는 800명, 염왕대는 1,400명, 자성만마대는 5,000명 수준으로 그 규모를 맞췄다.
물론 흑풍대는 재편성 작업에서 제외되었다. 딱히 충원할 인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외부에서 인원을 영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재편성 작업을 끝마친 후, 관지 장로를 제외한 다른 장로들은 자신이 맡은 전투단들이 제대로 된 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정신없이 움직 여야만 했다.
각 전투단마다 고유의 진법이 있었고, 권장하는 무공이 있다. 천마혈검대처럼 소속원의 무기를 하나로 통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보통은 여러 무기 를 조합하는 쪽을 택했다. 단일 병기로 통일시키는 것보다 그쪽이 훨씬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뿐더러, 잡다한 무공들을 익힌 단원들을 포용
하기도 쉬웠기 때문이다.
각종 무기술을 익힌 자들은 물론이고, 권장법을 익힌 자들까지 두루 모여 진세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공격과 수비에 있어서 혼자 하는 것
보다는 여럿이 힘을 합치는 쪽이 훨씬 더 강하다는 진리를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바로 진법이다. 집단의 힘은 통일성에서 나오는 만큼, 그걸 유 지하기 위해서는 반복 숙달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고 있는 거 아닌가?”
묵향의 집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연무장에서 수련하고 있는 건 수라마참대였다. 얼마나 열심히 훈련을 받고 있는지 모두들 땀에 푹 절어 있었다. 아 침부터 시작된 훈련이, 잠시의 휴식도 없이 오후인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었던 것이다.
묵향의 말에 뒤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석장로였다.
“대원들이 너무 많이 바뀐지라, 제대로 손발을 맞추려면 최소한 몇 달은 족히 걸릴 겁니다.”
“몇 달이라……”
수석장로는 교주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훈련기간을 좀 더 단축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장로들을 독려할까요?”
잠시 생각하던 묵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저 정도만 해도 충분해. 지금 당장 할 건 늙은 여우 사냥밖에 없으니까.”
묵향의 집무실에서 지금 북궁뇌 수석장로와 소무면 외총관, 비마대주 홍진 장로, 그리고 군사 설민이 모여서 전략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묵향으로부터 늙은 여우라는 말이 나오자, 수석장로는 고개를 돌려 홍진 장로에게 물었다.
“뭔가 흔적이라도 찾아낸 게 있나?”
“아직 없습니다.”
“거~ 참, 재주도 좋군.”
“지금껏 무영문이 위험한 줄타기를 하면서도 안전할 수 있었던 게 다 그 재주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수석장로님.”
수석장로는 묵향에게로 시선을 돌려 한 가지를 제안했다.
“교주님, 무영문을 찾을 때까지 그냥 손 놓고 있을 게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본교의 뒤통수를 치려고 했던 무림맹부터 손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지금 수하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이용해 그 잡것들부터 멸해 버리시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니야, 오랜 원정으로 인해 다들 지쳐 있는 상태지. 일단 푹 쉬면서 원기도 회복해야 할 테고, 각 전투단들마다 교육도 끝마쳐야 할 것 아닌가.”
“진법 훈련이 아직 미흡하다 뿐이지, 개개인의 실력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전투에 동원한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겁니다.”
“그렇게 무리를 해서까지 전투를 시작할 이유는 없다고 본좌는 생각한다네. 모든 준비가 완료된 후에 중원을 도모하는 것에 대한 의논을 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교주님.”
묵향은 소무면 장로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외관.”
“하명하십시오, 교주님.”
“정말 전투단을 맡을 생각이 없는가?”
인사이동 전에 묵향은 소무면 장로에게 전투단을 맡으라고 제안했었다. 그는 한영성 교주 시절에 자성만마대를 맡았었고, 장인걸 교주 밑에서는 수 라마참대를 맡았었다.
그러던 그가 묵향 밑에 들어와서 외총관을 맡게 된 것은, 그 당시 외부 지단이 대폭 축소되어 유명무실해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묵향 은 장인걸 밑에 있었던 소무면 장로를 신뢰하지 않았기에 그런 한직에 앉혀 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소무면 장로는 분타들을 건설해 나가며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고, 묵향의 신뢰를 받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행정 업무가 주를 이 루는 외총관에 앉혀 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인력 낭비라고 볼 수 있었다. 그게 아쉬웠던지 묵향이 또다시 묻는 것이다.
묵향의 물음에 소무면 장로는 싱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오랫동안 해 온 일입니다, 교주님. 아마 속하보다 더 외부 지단을 잘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자네를 못 믿어서가 아닐세. 쓸데없이 일거리만 많은 직책이니 그런 게지. 앞으로 자네가 할 일이 더욱더 늘어날 게야. 어쩌면 수련할 시간조차 내 기 힘들 정도로…….”
“안 그래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교주님. 춘릉 대회전에서 본교가 승리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본교의 위상은 하늘을 찌를 정도입니다. 각 지역을 주름잡고 있는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모두 다 본교와 손을 잡기를 원하고 있으니, 본교의 영역은 더욱 넓어질 것입니다. 나날이 본교의 세력이 확장되어 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속하에게는 크나큰 기쁨이니, 교주님께서 너무 심려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소무면 장로의 눈에는 강한 자부심이 어려 있었다. 교주가 돌아온 이후, 외부 지단들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자 기 입맛대로 키워 나가는 재미. 전투단을 맡게 되면 이런 재미는 절대로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고해 주게. 자네가 있기에 바깥쪽 일은 잊어버릴 수 있으니까.”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교주님.”
묵향은 설민에게 질문을 던졌다.
“회의할 안건이 더 있나?”
설민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이제 급한 일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상황이니, 교주님의 결혼식에 대해 논의해야 할 때라고 사료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수석장로님.”
“그건 군사의 말이 옳구먼.”
수석장로는 웃으며 찬동했지만, 묵향은 썩 내키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결혼식을 꼭 올릴 필요가 있나? 이미 같이 살고 있는데 말이야.”
그러자 수석장로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결혼식을 올리셔야지요. 야인(野人)도 아니고, 교주님께서는 본교의 지존이십니다. 지존께서 결혼식을 올리지 않으신다는 건 본교의 위신 문제입니다. 게다가 수하들 앞에서 체면도 서지 않고 말입니다.”
위신이라는 말까지 들먹거리는 것으로 봤을 때, 결혼식을 결코 조촐한 규모로 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수석장로가 꽤나 강하게 나오자, 묵향은 다급히 핑계거리를 대야 했다.
“그건 그렇지만 아버님도 안 계신데 결혼식을 올릴 수는 없지 않겠나.”
묵향이 아르티어스를 방패로 들이밀자 모두들 찔끔하는 게 느껴졌다. 아르티어스의 괴팍함에 곤욕을 치룬 사람이 한둘이 아닌 것이다. 특히 수석장 로가 가장 크게 고생을 했었다. 역시나 수석장로의 어조는 한풀 꺾였다.
“그렇다면 결혼식은 어르신께서 돌아오신 후에…”
하지만 이때 의외의 복병이 튀어나왔다. 그는 바로 소무면 장로였다. 그는 지금까지와 달리 매우 강경한 태도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수석장로님. 만약 마화 님께서 본교의 안주인이시라는 사실이 밖으로 새나가 보십시오. 본교와 연을 맺은 모든 문파의 수장들 이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자신들을 하찮게 생각해서 결혼식에 초대조차 하지 않은 거라고 오해할 겁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하,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지 않는가. 그들에게 교주님께서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으신 거라고 해명한다면.
지금까지 옆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설민이 끼어들었다. 비록 아르티어스가 겁이 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그냥 묻 어 두지도 않았다.
“그런 해명은 먹히지 않을 겁니다. 더군다나 어떤 문파는 초대를 받았는데, 어떤 문파는 초대받지 못했다는 식의 유언비어까지 퍼진다면 더욱 감당 하기 힘든 사태로 발전하겠지요.”
“군사의 지적이 옳습니다. 교주님께서는 본교의 지존이십니다. 좋던 싫던 지존에 어울리는 행보를 밟으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잠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수석장로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놈들을 몽땅 다 초청해서 거창하게 결혼식을 올린 다음, 어르신께서 돌아오시는 대로 다시 한 번 결혼식을 올리면 되겠군. 그러면 어르 신께서도 토를 다시지 않으실 게야. 아, 어쩌면 소문을 듣고 오실지도 모르겠군, 그래.”
묵향은 골치가 아픈지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사실 드레곤인 아르티어스가 자신의 결혼식 따위에 신경 쓸 리가 없지 않은가. 뭐, 소문을 듣 고 찾아오면 좋은 것이고 말이다.
잠시 고민하던 묵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자네들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할 수 없지. 결혼식을 준비하게. 그리고 아버님이 참석하지 못한다고 해서 결혼식을 두 번씩이나 치를 필요는 없다네. 아버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까 말이야.”
그 말에 수석장로는 희색이 만연하여 복명했다.
“옛, 그렇다면 지금 당장 결혼식 준비 작업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규모는 최대한 줄여서 하도록 해. 오랜 전쟁으로 인해 재정이 궁핍해진 상황이니 말이야.”
“지존의 격에 맞도록 적당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고집스럽게 대답하는 소무면 장로를 보며 묵향은 내심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으면, 오늘 회의는 이걸로 마치기로 하지.”
모두들 밖으로 나갈 때, 묵향은 홍진 장로를 불러 세웠다.
“자네는 잠시 나하고 얘기 좀 하세.”
묵향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홍진 장로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게 무슨 뜻인지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게.”
난생 처음 보는 해괴한 문양에 홍진 장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글자인 것 같기는 한데,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건… 어느 문파의 암호문입니까?”
“나도 확실히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발해 문자일 거야. 그것도 꽤나 오래전에.”
묵향이 홍진 장로에게 건넨 것은 과거 북명신공을 익힐 때 그 비급에 기록되어 있었던 해독 불가능한 문장이었다.
묵향은 총단으로 돌아와 처음 며칠간은 전쟁의 뒤처리를 하다 보니 꽤나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논공행상도 끝나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되 자 따분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더 이상 그를 긴장시킬 적이 없다는게 이렇게 따분할 거라고는 묵향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현재 정체되어 있는 무공을 수련하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현경부터는 마음의 무공이다. 즉, 마음이 움직이면 몸이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다.
하지만 그게 어떤 것인지 감조차 잡기 힘들었다. 현경으로 올라가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 바로 급속히 성장한 내적 성장을 마음이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자신보다 더욱 강한 고수가 존재해서 그와의 대련을 통해 이런 무공도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면 혹 몰라도, 천재라기보다는 노력을 통해 지금 의 경지에 다다른 묵향의 상상력은 빈곤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 문제가 현경을 벗어나기 위한 가장 커다란 장벽일지도 몰랐다.
그때 우연히 묵향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예전에 북명신공을 익힐 때, 비급에 적혀 있던 한 토막의 발해 문장.
그게 무슨 소린지는 알 수 없었지만, 꽤나 중요한 말인 듯 하여 한동안 그 문장을 해석하기 위해 꽤나 노력하지 않았던가.
당시에 그 문장을 적어 놨던 종이는 언제 어떻게 없어져 버렸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지만, 다시금 알아내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북명신 공의 비급은 지금 자신의 손아귀에 있으니까.
‘한동안 할 일도 없으니, 예전부터 궁금했던 수수깨끼나 풀어 보도록 하자.’
이런 이유로 홍진 장로에게 그 문장의 해석을 맡기게 된 것이다.
발해라는 말에 홍진 장로는 난감한 모양이었다.
“수하들에게 조사해 보라고 이르겠습니다. 하지만, 중원의 옛문자도 아니고 이민족의 언어를…, 그것도 지금은 사용되지도 않는 고대문자를 연구 하는 학자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묵향은 이미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둔 게 있었다.
“고려에 가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발해나 고려나 모두 다 동이족(東夷)이 세운 나라들이라고 들었는데 말이야.”
“그렇기는 합니다만 같은 동이족이라고 해도 갈래가 틀립니다. 발해는 동이족 중에서도 북방계가 세운 나라고, 고려는 남방계가 세운 나랍니다.”
“어쨌든 일단 조사는 해 봐. 북방계건 남방계건 간에 그놈들 입장에서는 조상들의 언어가 아니겠나. 더군다나 고려라는 나라 자체가 옛 고구려의 뒤 를 계승한다고 들었으니 어쩌면 성과가 있을지도 몰라.”
“옛, 지금 당장 고려에 수하들을 파견해서 조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