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7권 8화 – 묵향의 결혼식
묵향의 결혼식
흉노족의 후예인 위구르족이 차지하고 있는 야만의 대지로 들어가기 위한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가 바로 서녕(西寧)이다.
길가에 흔히 보이는 대상(隊商)의 무리들. 수십 마리에 달하는 말이나 낙타에 짐을 잔뜩 실은 상인들은 오랜 여정을 예상하는 듯 느긋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만 봐도 이곳이 얼마나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인지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서녕에는 대상만이 오가는 것은 아니었다. 아름다운 청해호(靑海湖)를 유람하기 위해 들리는 유람객들의 수도 꽤 되었다. 서녕이 변방의 도시 치고는 꽤나 번화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 근래 서녕의 모습은 평상시와는 달리 거리에 사람들로 넘쳐났다. 웬일인지 갑자기 수많은 인파들이 모여들어 포화상태가 되어 버렸기 때 문이다.
2배의 돈을 지불한다고 해도 여관이나 객잔의 방을 얻을 수 없었고, 식사시간만 되면 모든 식당들이 미어터질 정도였다.
때 아닌 돈벼락을 맞고 있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땅값이라든지 집값이 들썩거리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 비정상적인 호경기가 그리 길지 않을 거라는 걸 모두 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 호경기는 단 한 쌍의 결혼식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모두들 숙식을 해결할 곳을 구하기 위해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지만, 따뜻한 양지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패거리들은 전혀 그런 걸 걱정하는 내 색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로 거지들이었으니까.
늙은 거지 하나가 커다랗게 하품을 하더니 투덜거렸다.
“썩을! 세상 참으로 말세로군. 무슨 놈의 결혼식에 사람이 이렇게 많아.”
그러자 옆에 비스듬히 누워서 배를 벅벅 긁고 있던 또 다른 늙은 거지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일세. 천하의 대마두가 결혼한다는데 뭔 연놈들이 이렇게 많이 몰려들 오는지 원………….”
“교주한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빌어먹을 놈들이지. 썩을!”
그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서녕으로 들어오는 동쪽 관도였다. 중원에서 서녕으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이 길을 거쳐야 하는 만큼, 관도는 수많은 인 파들로 붐볐다.
“하기야 이 많은 사람들을 십만대산에 수용할 수나 있겠나. 서녕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건 정말 잘 생각한 거지.”
늙은 거지들의 얘기에 젊은 거지 하나가 끼어들었다.
“덕분에 교주의 결혼식을 우리도 구경을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구경은 무슨 얼어죽을 구경. 드나드는 사람 숫자나 제대로 세!”
서녕으로 들어오는 모든 길목에는 개방의 거지들이 배치되어 밀려드는 사람들을 헤아리고 있는 중이었다. 결혼식에 참석하는 인원을 계산하기 위해 서.
그리고 상당수의 거지들이 지금 서녕 안으로 들어가서, 과연 어떤 문파들이 결혼식에 참석하는지를 조사하는 중이었다. 물론 결혼식에 참석하는 사 람들의 상당수가 초기단계부터 개방의 이목에 포착되어 꼬리를 달아 놓았기에, 거의 8할 이상은 이미 파악이 끝난 상태였다.
결국 자칫 놓쳤을지도 모를 나머지 2할이 누군지 알아내기 위해 이렇게 서녕까지 파견되어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천하제일고수라고 하더니, 참 대단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젊은 거지의 말에 늙은 거지는 삐딱한 표정으로 이죽댔다.
“그런 말을 꺼내는 의도가 뭐냐?”
“생각을 해 보십쇼. 철옹성이라는 십만대산도 아니고, 이런 외지에 나와서 결혼식을 올릴 생각을 하다니……… 이러다가 만약 기습이라도 당하면 어 쩌려고요.”
“크크,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 일대에 마교 전투단들이 쫙 깔려 있는데 어떤 놈이 감히 그런 미친 생각을 하겠냐. 그리고 지금 무림맹이 마교하 고 싸울 정신이 있는 줄 아느냐.”
“그, 그렇긴 합니다만. 어쨌든 대단한 배포지 않습니까?”
“시끄러. 잡소리 그만 하고, 오는 사람들 숫자나 잘 파악해!”
늙은 거지가 젊은 거지를 구박하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
결혼식이 거행되는 당일. 묵향을 비롯해 마교의 거의 모든 수뇌부들이 서녕에 도착했다. 결혼식에 필요한 제반사항들은 이미 소무면 장로가 다 준비 해 놓은 상태였다.
묵향은 혼인 예복을 입고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남의 결혼식조차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만큼 자신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이왕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것, 마화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안겨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때, 홍진 장로가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왔다.
“헌헌장부가 따로 없으십니다, 교주님.”
하지만 묵향은 답답해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젠장, 이 나이에 이런 옷을 입고 사람들 앞에 나서려니 원. 성질대로 할 수도 없고………….”
투덜거리는 묵향의 모습에 홍진 장로는 쓴웃음을 지으며 주위를 쓱 훑어봤다. 모두들 결혼식 준비로 바쁘게 움직였다. 꼼짝하지 않고 서 있는 사람 들은 경비를 책임진 호법원의 고수들뿐이었다. 그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홍진 장로는 입을 열려다 잠시 망설여야 했다. 결혼식 직전인데 이런 말을 해도 될지 고민스러웠던 것이다.
“저……, 시기가 좀 안 좋기는 합니다만, 보고를 안 드릴 수가 없어서………….”
“무슨 일인데 그러나?”
홍진 장로는 방금 전에 입수된 정보를 묵향에게 전음으로 보고했다. 무영문의 본거지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는 것을 말이다.
순간 묵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확한 정보인가?”
“확인을 해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습니다만 자칫, 정보가 역으로 누출되어 지하로 잠적할까 두려워 고민 중입니다.”
잠시 궁리하던 묵향이 입을 열었다.
“확인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전투단 1개면 완전히 초토화시켜 버릴 수 있을 텐데 말이야. 더군다나 지금은 무림맹 쪽을 걱정할 필요도 없잖아. 뭐, 거짓정보라면 그냥 돌아오면 되는 거고.”
묵향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설혹 무영문이 함정을 파놨다고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전력에 있어서는 이쪽이 압도적으로 강한데 말이다. 함 정 따위는 힘으로 뚫어 버리면 그만이다.
“교주님의 말씀도 옳기는 합니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
“첫째로, 이 정보가 진짜라면 전투단이 총단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짐 챙겨서 튀어 버렸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요. 전력이야 이쪽이 월등히 강합 니다만, 그놈의 마기 때문에 기습공격이 불가능하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게다가 무영문 놈들은 냄새 맡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지 않습니까.” “흠, 그놈의 마기가 언제나 말썽이로군.”
어쩌면 마교가 압도적인 전력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무림일통을 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마기 때문일 것이다. 고수라면 수십 리 밖에 서도 알아챌 수 있는 마기로 인해 기습공격이 불가능한 마교도들이었기에 언제나 피 튀기는 정면승부만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묵향에게는 역대 교주들과 달리 마기를 뿜지 않는 전투단이 있었다.
“흑풍대를 보내면 되지 않겠나?”
“흑풍대가 마기를 뿜지는 않습니다만, 몇 백도 아니고 8,000에 가까운 숫자가 움직이는 것을 천하의 무영문이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딴은 그렇군. 그렇다면 두 번째 문제는?”
“둘째는 이게 놈들의 미끼일 수도 있다는 점이죠. 우리 쪽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한.”
“흠, 반응을 알아보기 위함이라…………. 그럴 수도 있겠군.”
묵향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기야, 이쪽이 워낙 조용하니 지금쯤 불안해서 똥줄이 타고 있을 게야. 자네 생각은 어떤가? 뭐, 좋은 복안이라도 있나?”
“속하의 의견을 물으신다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천천히 단계적으로 확인해 나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러다 보면 이게 함정인지 아닌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뭐, 급할 건 없으니까 놈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조심해서 확인해 봐. 그럼 이건은 결혼식이 끝나고 난 다음, 좀 한가해진 후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 지.”
“예, 교주님.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묵향은 말도 안 된다는 듯 투덜댔다.
“좋은 시간? 헛, 이제 좋은 시간은 다 끝났는데, 무슨 얼어 죽을 좋은 시간!”
물론 그 말을 곧이들을 홍진 장로가 아니었다. 만약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묵향이 귀찮게 결혼식 따위를 올릴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 문이다. 아무리 장로들이 입을 모아 강권한다고 해도 말이다.
총관은 며칠 전에 거행된 교주의 화려했던 결혼식에 대해 옥화무제에게 보고했다.
소탈한 성격 탓에 평소 남에게 과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교주가 중원을 들썩이게 만들 정도로 거창한 결혼식을 올린 것은 분명 의외였다. 하지만 정보 분석을 담당하는 추밀단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은 그때 밝혀진 교주의 반려자였다. 놀랍게도 그녀는 이미 그들도 잘 알고 있던 인물이었 던 것이다.
“결혼식에 대한 최종 보고를 받은 추밀단주께서도 꽤나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았습니다. 더군다나 그분은 마교 쪽을 대표해 양양성에서 본문과의 접 촉을 담당하셨던 분이지 않습니까. 꽤나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그분의 정인일 줄이야………….”
총관의 말에 옥화무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마화가 묵향의 정인이라는 사실은 그녀에게도 충격이었던 것이다. 만약 이 사실을 2개월 전에만 알 았더라면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화를 구워삶아 교주와 화해하고, 다시 한 번 더………………
“휴우~,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옥화무제는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잊고 싶은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이제는 도저히 되 돌릴 수 없는.
“참, 비마대에 포섭해 놓은 끄나풀에게서 정보가 하나 들어온 게 있습니다.”
비마대라면 마교의 정보단체가 아닌가. 대금전쟁을 거치면서 비마대와는 꽤나 오랜 시간 함께 작전을 수행했고, 그러다 보니 몇 명을 포섭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드디어 교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그분이 비마대의 일부를 고려로 파견했답니다.”
이 정보를 입수하게 된 것은 운 좋게도 끄나풀이 그 일부에 포함된 덕분이었다.
“흠, 고려라………….”
옥화무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교에서 고려로 사람을 보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고려에서 생산되는 물품들 중에서 마교에서 탐을 낼 만한 것은 인삼(人蔘)뿐이었다. 그리고 인삼을 대량으로 구입해서 할 만한 짓이라고는 뻔하지 않은가.
“영단(丹)이라도 대량으로 제조하려는 걸까요?”
“그게 아니라 고대 발해 문자를 알고 있는 문사들을 찾고 있답니다.”
“발해 문자를요? 그런 걸 알아서 어디에다가 쓰게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바로 이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답니다.”
그러면서 총관이 품속에서 꺼내든 것은 괴상한 모양의 문양들이 그려져 있는 종이였다. 놀랍게도 그 문양들은 묵향이 홍진 장로에게 건넸던 것과 똑 같은 내용이었다.
“흠, 정말 괴상한 문자로군요. 이게 고대 발해에서 쓰던 문자였다는 건가요?”
“예, 그렇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알아봤나요?”
“추밀단주님께 부탁드려 놨으니, 조만간에 알아내실 겁니다. 이게 제대로 된 문자가 맞다면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마교 쪽의 반응은 아직 없나요? 미끼를 던졌으니, 지금쯤이면 뭔가 반응이 올 때가 됐는데 말이에요.”
“이상하게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옥화무제는 고개를 갸웃거려야만 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묵향의 성격상 조용히 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던 것 이다.
“그것 참, 이상하네요. 냄새를 맡고 가만히 있을 인간이 아닌데…………….”
옥화무제는 모두의 이목이 그의 결혼식에 집중되어 있을 때, 그때를 이용해서 그가 뭔가 획기적인 짓거리를 벌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니, 이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미끼 쪽의 동태는 어떻다고 하던가요?”
“그쪽도 아무런 이상이 없답니다. 혹시, 냄새를 너무 약하게 풍긴 게 아닐까요? 어쩌면 그분의 결혼식에 신경 쓰느라, 우리 쪽에서 뿌려 놓은 미세한 흔적을 못보고 그냥 넘어가 버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옥화무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그 말도 일리는 있군요. 그렇다면 좀 더 진하게 냄새를 풍겨야 하나?”
하지만 그녀는 곧이어 골치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투덜거렸다.
“그렇게 되면 너무 노골적인데…………. 빌어먹을 놈들, 그 정도 흔적을 남겨 줬으면 척하고 알아채야지!”
지금껏 무영문의 총단 위치를 알아낸 문파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만큼 비밀 유지에 만전을 기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위치를 알려 주는 흔적 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이건 누가 봐도 함정일 거라고 생각할 게 뻔하지 않은가.
“참, 흑풍대는요?”
“흑풍대는 십만대산에서 아예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수라마참대와 천랑대, 염왕대가 서녕 외곽에 배치됐고, 근접 호위는 호법원에서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교 고위층의 초상(肖像) 자료는 최대한 많이 입수했겠죠?”
“예. 결혼식에 참석한 자들은 모두 다 그려 놓았습니다.”
“일단은 조금만 더 관망을 해 보도록 하죠. 섣부른 행동은 금물이니까 말이에요.”
옥화무제는 속이 탔지만, 지금은 마교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서문세가의 가주 서문길은 오늘 뜻밖의 손님을 맞이했다.
“가주님, 태극검황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태극검황께서?”
무림맹에 파견 나가 있는 원로로부터 맹주가 물러났다는 보고는 이미 들었다. 하지만 그가 설마 이쪽으로 올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서문 길의 준수한 인상이 일그러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시간을 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리 드시라고 하게.”
“예.”
잠시 후, 태극검황과 청호진인, 그리고 청수진인이 무사의 안내를 받으며 집무실로 들어섰다. 모두들 무당파가 자랑하는 쟁쟁한 고수들이다.
“어서 오십시오. 본 세가에 몸소 오시다니 영광입니다.”
“허허, 맹주 자리에서 물러난 쓸모없는 늙은이를 이렇게 환대해 주니 고맙구려.”
“별 말씀을요, 당치도 않으십니다. 자,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서문길은 태극검황을 상석(上席)으로 안내했다. 가벼운 대화가 오가며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태극검황은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용건을 슬그머니 꺼냈다.
“영존)은 집에 계시는가?”
수라도제 얘기가 나오자 지금까지 노련하게 대화를 이끌고 있던 서문길이 크게 동요했다.
“예? 아, 아버님은 왜……………?”
“맹에 얽매여 있을 때는 서로가 바빠 제대로 얘기도 나누지 못했지 않은가. 이 근처에 온 김에 이리로 달려온 것은 오랜만에 영존과 담소나 나눌까 해서일세.”
태극검황의 말에 서문길은 당혹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여기서 거절한다는 것은 엄청난 실례였다. 그렇다고 만나게 해줄 수도 없지 않은가.
“왜, 어디 출타라도 하셨나?”
“그, 그건 아니고………….”
“허어, 답답하구먼. 속 시원히 말해 보게.”
잠시 망설이던 서문길은 한숨을 푹 내쉬며 이실직고했다.
“저, 아직 얘기를 듣지 못하신 모양인데, 지금 아버님을 만나시는 건………….”
서문길은 자신의 아버지가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숨긴다고 해도, 결국에는 알게 될 게 뻔했다.
더군다나 무림맹 장로회의에서 공수개 장로에 의해 이 수치스러운 사실이 밝혀졌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 걸 뻔히 알면서도 굳이 숨긴다는 것은 상대 에 대한 모욕이나 마찬가지였다.
서문길의 얘기를 들은 태극검황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허어, 그런 일이 있었다니…………. 자네가 마음고생이 크겠구먼.”
“이해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라면 영존을 그냥 놔둘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어떻게 치료라도……”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아버님께서는 스스로 당신의 몸과 마음이 아주 건강하다 생각하고 계시거든요. 워낙 엄청난 무예를 지니신 분이라 강제로 치료할 수도 없고………….”
그렇게 말하며 서문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동안 그는 수라도제를 치료하려고 안 해 본 짓이 없었다. 칼 들고 달려들어 사생결단을 내는 것 외에는 다해 봤던 것이 다. 심지어 음식에 몰래 산공분(散功粉)까지 투입했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그 모든 방법들이 전혀 씨알도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수라도제 산전수전 다 겪은 능구렁이기도 했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살짝 맛이 가 버린 후에는 전혀 타인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진맥하려는 의생마저도 자신에게 해코지하려 든다며 때려죽였을 정도니, 그토록 의심이 많은 인물을 어떻게 제압할 수 있단 말인가. “허어, 그렇다고 치료를 안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자네만 괜찮다면 노부가 치료를 하는 데 한팔 거들고 싶은데………….”
태극검황의 제의에 서문길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인품이 훌륭하신 분이 왜 맹주 자리에서 쫓겨나듯 물러나야만 했단 말인가.
“이곳입니다.”
서문길은 직접 태극검황 일행을 수라도제가 묵고 있는 숙소로 안내했다.
수라도제가 기거하고 있는 곳은 서문세가의 후원에 위치한 커다란 건물이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가자 풍악 소리와 함께 간드러지는 듯한 여인네 들의 교태 어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간혹 가다 무슨 짓을 하는지 야릇한 비음까지 간간히 들려왔다.
“연회라도 즐기고 있는 모양이군.”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서문길은 잘 알고 있었지만, 차마 자신의 입으로는 말할 수가 없었다.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태극검황 일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의 눈앞에는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세계가 펼쳐져 있 었기 때문이다.
사내들과 반쯤 벌거벗은 계집들이 서로 얽혀 거나하게 술판을 벌이고 있었고, 술자리의 중심에 마련된 무대에는 거의 벌거벗은 거나 다름없는 계집 들이 농염한 춤을 추고 있었다. 게다가 주위의 시선 따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정사를 벌이고 있는 음탕스러운 년놈들도 눈에 띄었다.
태극검황 일행이 안으로 들어서자 춤을 추던 계집들 중 하나가 신경이 쓰이는지 잠시 멈칫 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픽 쓰러졌 다. 그녀의 이마에 젓가락 하나가 깊숙이 박혀 있는 게 보였다.
“누가 춤을 멈추라고 했느냐?”
수라도제의 일갈에 춤을 추는 계집들의 몸놀림이 더욱 농염해졌다. 모두들 남자를 홀릴 듯 교태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태극검황은 그녀들의 눈 동자 속에서 깊은 절망과 공포를 발견했다.
“호오, 이게 누구신가. 맹주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 어쩐 일이시오?”
미쳤다고는 하지만 수라도제는 방문객들이 누군지 한눈에 알아봤다.
태극검황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랜만에 귀하와 얘기나 나눌까 해서 찾아왔소이다.”
그러자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수라도제는 주위를 둘러보며 버럭 소리쳤다.
“너희들은 어서 손님을 맞이하지 않고 뭣들 하는 게냐! 귀한 손님들께서 오셨단 말이다!”
수라도제 옆에 앉아 있던 여인들이 허겁지겁 일어서더니 육감적인 몸짓으로 태극검황 일행에 팔짱을 끼며 그들을 술상으로 안내했다.
그녀들의 가슴을 누르고 있는 팔을 통해 가느다란 떨림이 전해졌다. 모두들 음탕스런 미소를 지으며 사내를 홀리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녀들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들 공포에 질려 제정신들이 아니었다.
이때 술을 마시던 사내 녀석 중 하나가 수라도제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면서 슬그머니 일어나 죽어 있는 계집을 옮기는 게 보였다. 놈이 시체를 질 질 끌고 가자,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로 인해 바닥에 혈선이 길게 이어졌다.
무심코 그 흔적을 쳐다보던 청호진인의 눈살이 왈칵 찌푸려졌다.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한쪽 구석에 시체 몇 구가 더 나뒹굴고 있는 게 보였던 것 이다.
청호진인은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참기 힘들었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중얼거렸다.
“어,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런 만행을………….”
태극검황 일행이 자신의 행동에 경악을 하건 말건 수라도제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듯 여인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
며 자랑을 했다.
“저것들을 데려온다고 근처에 있는 모든 기방들을 다 털었소이다. 어떻소? 그런대로 쓸 만하지 않소이까?”
태극검황 일행은 모두들 전대의 고수들이다. 적지 않은 세월을 살며 경험을 쌓아 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순수하게 자신의 욕망만을 쫓는 인물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공공대사가 왜 만사불황이라고 불렸는지 그 이유를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아마 정신을 차리기 전의 공공대사를 만났더라면 이와 유사한 광 경을 볼 수 있었으리라.
수라도제가 주화입마에 빠져서 이런 미친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태극검황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챙!
순간적으로 태극검황의 허리에 매여 있던 검이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하듯 저절로 뽑혀 나왔다. 그리고는 수라도제를 향해 빛살 같은 속도로 날아갔 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수라도제의 뒤편 벽에 걸려 있던 그의 애도(愛刀) 또한 움직이기 시작했다.
쾅!
검과 도가 공중에서 맞부딪쳤을 뿐인데도 강렬한 폭음과 함께 그 충격파에 건물이 뒤흔들렸다. 그 순간, 태극검황의 뒤편에 서 있던 청호진인과 청 수진인도 검을 뽑아들고 수라도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3명의 전대 고수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을 바라보며, 서문길은 착잡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아버지를 향해 달 려드는 적을 향해 그 역시 도를 뽑아들고 맞서야 했으리라. 하지만 그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기만 할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제발 잘되어야 할 텐데……”
서문길은 그저 간절히 염원했다. 아버지가 큰 상처 없이 태극검황에게 제압당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