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8권 5화 – 다시 시작된 옥화무제의 탐욕

묵향 28권 5화 – 다시 시작된 옥화무제의 탐욕

다시 시작된 옥화무제의 탐욕

십만대산을 나선 매영인은 남경으로 달려갔다. 남경분타에 있는 문주 즉, 자신의 어머니를 만나서 교주와의 협상 결과를 알릴 생각에 그녀의 머릿속 은 가득 차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할머니에게 직접 소식을 전했으면 좋겠지만, 지금의 그녀로서는 할머니는 물론이고 어머니조차 어디에 잠적해 있 는지 알 수가 없는 상태다. 그녀가 남경으로 달려가는 이유는 자신이 십만대산으로 갔다는 것을 잘 아는 자신의 어머니가 먼저 접촉해 올 것을 기대 했기 때문이다.

몸에 밴 습관대로 매영인은 혹, 누군가 자신의 뒤를 미행하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며 객잔으로 들어갔다.

매영인의 미모에 점소이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점소이를 향해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깨끗한 방 하나 주세요.”

“어, 어떤 방을 드릴깝쇼?”

점소이는 객잔에 남아있는 방들의 형태와 그에 따른 가격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더듬더듬 끊기고 있었다. 난생 처 음 보는 미모의 여성과 말을 하려고 하다 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매화방으로 주세요.”

손님이 그 중에서 가장 비싼 방으로 안내해 달라고 하자, 점소이는 고개가 땅에 닿을 정도로 굽신댔다.

“이, 이쪽으로 오십시오, 손님.”

매영인은 그 객잔에서 잠을 잤지만 식사는 아침만 그곳에서 먹고, 점심과 저녁은 밖에 나가서 해결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고는 있었지만, 딱히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애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매영인은 자신의 모습을 노출시켜, 무영문쪽에서 찾아오기를 바랬던 것이다.

무영문과의 접촉은 5일 만에 이뤄졌다. 5일째 되던 날 밤, 그녀의 방으로 자그마한 암기 한 개가 날아와 박혔다. 암기에 새겨져 있는 섬세하고 독특 한 문양. 그것은 분타주급 이상의 무영문도들만이 지니는 것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매영인은 흑록색의 야행복으로 갈아입었다. 두건까지 써 두 눈동 자만을 드러낸 얼굴. 그녀는 혹시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인물이 있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본 다음,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곧이어 그녀의 몸은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매영인이 십만대산에 다녀오는 동안, 이미 그녀의 어머니는 완전히 끊어져 버렸던 옥화무제와의 연락망을 다시 연결해 놓은 상태였다. 전서구 망까 지 구축하려면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하겠지만, 아쉬운 대로 연락은 가능한 상황이었다.

어머니에게 교주와의 면담 결과를 보고한 매영인은, 곧바로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모처로 달려갔다.

매영인이 무사히 도착했다는 보고를 접한 옥화무제는 그 기쁨에 잠시 말을 잊을 정도였다. 그녀는 손녀가 이미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지하로 숨어든 남경분타를 비영단원들이 찾아낸 후에야, 옥화무제는 손녀가 교주를 만나겠답시고 십만대산으로 달려갔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평소 냉철했던 아이였기에, 이토록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할 줄은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옥화무제였다. 그제서야 옥화무제는 교주와의 불화에 대해, 그리고 교주가 무영문을 멸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에 대해 손녀에게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손녀가 마교로 갔다면, 그 이후에 벌어질 결과는 뻔했던 것이다. 그런데 멀쩡히 살아서 돌아 왔으니.

옥화무제는 매영인을 꼭 껴안으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네가 살아있었구나. 살아있었어……………”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할머니.”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지난 후에야, 옥화무제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 십만대산으로는 가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잘했다, 잘했어.”

매영인의 눈이 동그래진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십만대산에 가지 않은 게 아니냐? 그렇지 않고서야 그 흉악한 놈이 너를 그냥 놔줬을 리가 없지 않느냐?”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알겠지만, 저는 십만대산에 갔어요. 물론 처음에는 조금 문제가 있었지만, 그곳의 군사를 맡고 있는 사람이 잘 대해주더라 고요. 그리고 교주님도 만났지요.”

“그, 그자를 만났다고? 그럴 리가………….”

옥화무제는 화들짝 놀라며 밖에 대고 외쳤다.

“부문주를 데리고 온 대원을 찾아 즉시 이리로 오라 하거라. 그리고 추밀단주에게도 내가 보잔다고 전하고.”

“옛, 태상문주님.”

“그는 왜 찾으세요?”

“혹시 미행을 당한 것은 아니더냐?”

“조심했는데, 미행 같은 건 없었어요.”

매영인이 단호하게 부정했음에도 옥화무제는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총단을 습격 받은 게 얼마 전이지 않은가.

“이상하네. 그럴 리가 없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미행은 당하지 않았으니까요. 십만대산을 출발할 때부터 줄곧 조심해서 이동했다고요.”

이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찾으신 왕석 조장이 도착했습니다, 태상문주님.”

“들라고 해라.”

얼마나 허겁지겁 달려왔는지 조장쯤 되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호흡이 불안정할 정도였다. 왕석 조장은 깊숙이 고개를 조아리며 부복했다.

“태상문주님을 뵙습니다. 속하를 찾으셨다고…………….”

옥화무제는 거두절미하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혹여 미행을 당하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왕석은 자신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심려하실 필요는 추호도 없습니다, 태상문주님. 속하, 부문주님을 모시며 만전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이곳까지 오며 그 어떤 이상도 발견할 수 없 었습니다.”

비영단의 조장급이 하는 장담인 만큼 믿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옥화무제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수고했어요. 그만 가 봐도 좋아요.”

왕석 조장이 물러난 후, 옥화무제는 서탁으로 가서 지필묵을 꺼내 명령서를 작성했다. 지금 당장 남경분타의 위치를 다른 곳으로 비밀리에 옮기고, 주변에 대한 경계를 한층 더 강화하라는 명령서였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무사 한 명을 불러 명령서를 전해주며 말했다.

“이걸 지금 즉시 총관에게 전하도록 하세요.”

“존명!”

무사가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물러나자 그제서야 옥화무제는 서탁에서 일어서서 매영인이 앉아있는 탁자에 마주 앉았다.

“그래, 교주가 네게 무슨 말을 하더냐?”

매영인은 활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기뻐하세요, 할머니. 그분께서는 본문과 예전처럼 사이좋게 지낼 수도 있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옥화무제는 그 말에 콧방귀부터 뀌었다. 영활하게 돌아가는 그녀의 머리는 교주가 뭔가 흉계를 꾸미고 있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흥! 정공법으로 안 되니 잔대가리를 굴리는 것이겠지.”

“할머니께서는 설마 그분께서 본문과 화해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물론이지. 그는 더 이상 본문을 필요로 하지 않아. 더군다나 무림맹과 짜고 총단까지 쳐들어온 그가, 구태여 너를 통해 화해를 청할 필요가 있겠니? 뭔가 다른 속셈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이미 그분이 왜 그렇게 행동하셨는지 그분의 부인에게서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하지만 제가 직접 만나본 바에 의하면 아예 가망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분께서는 만약 본문이 화해를 원한다면 3가지 조건을 완수해 오라고 하셨어요.”

이건 분명 옥화무제로서도 의외의 말이었다. 무영문이 마교의 뒤통수를 친 행위를 모르고 있다면 말이 되지만, 매영인이 알면서도 이런 말을 한다는 건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조건을 제시했다고? 한 번 말해 보거라.”

매영인은 교주가 제시한 조건들을 자세히 설명했다.

과연 매영인의 말 대로 교주가 제시한 조건들은 하나같이 완수하기 까다로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해내지 못할 조건들도 아니 었다. 그걸 잘 알면서도 옥화무제는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하나같이 어려운 조건들이로구나. 어쩌면 그는 화평 자체를 원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만통음제는 그렇다 쳐도, 행방불명된 자신의 아 버지를 찾아오라니? 그게 말이 되느냐. 언제 어디에서 없어졌는지 아무 정보조차 없는 상황인데. 이거야 원, 남경에서 왕서방 찾기지………….”

물론 옥화무제는 예전에 교주와 함께 있던 초로의 노인을 본 적이 있기는 했다. 아마도 그자가 교주가 말하는 아버지이리라. 하지만 꽤나 오래 전의 일이어서 지금은 그 노인의 얼굴조차 가물가물하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무리 무영문의 능력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만하다 해도 찾아낼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건 염려하실 필요 없어요, 할머니. 웬만한 자료는 다 받아왔거든요.”

그리고 내민 것은 비마대에서 그린 정밀한 초상화와 아버지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대한 정황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보고서였 다. 그것들은 다 아르티어스가 행방불명되었을 때, 그를 찾아 헤맸던 왕지륜에 의해 작성된 것들이었다.

“흐음, 이 정도 정보라면 어떻게 찾아보는 시늉은 해볼만 하겠네.”

“교주님의 말씀으로는 이 분은 역용술(易容術)의 대가이시기에 초상화는 별로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른다고 하셨어요.”

옥화무제의 눈이 실쭉 가늘어진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다면 어떻게 찾으라는 말이냐?”

“그 분이 볼 수 있도록, 온 천지사방에 방을 붙이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고 하셨어요. 이걸 복사해서요.”

매영인은 품속에서 커다란 종이를 한 장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옥화무제가 살펴보니,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하게 생긴 지렁이가 꿈틀대는 듯한 문자였다. 그녀도 꽤나 견문이 넓었지만, 이런 문자는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게 마교에서 만든 새로운 암호가 아닐까 추 측해 봤다.

“흠, 이 정도로 끝날 수 있는 일이라면 굳이 조건으로 내세울 게 아니라 마교가 직접 해도 되는 일이 아니더냐?”

“그건 그렇지만 조건들을 말씀하시는 교주님의 표정에는 진심이 엿보였다고요. 결코 허언이나 계략으로 이런 제안을 하신 게 아니라고 저는 믿어 요.”

그러면서 매영인은 두 번째 조건을 해결하기 위해 교주가 말해줬던 비사(祕事)에 대해 얘기했다. 북명신공이 마교에 있다는 것과 그가 건네준 문장 이 어쩌면 발해의 옛 문자일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걸 가만히 듣고 있는 옥화무제의 표정은 변화가 전혀 없었다.

매영인은 할머니가 꽤나 놀라워 할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시무룩해졌다. 자신이 아무리 말을 해도 할머니는 이게 모두 교주 의 농간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으니 그건 당연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했던 자신의 고생이 모두 다 헛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교주에 대해 품고 있었던 자신의 생각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지금까지 얼마나 공명정대하게 행동해 왔는지. 그리고 차가움 을 가장한 그의 내면은 얼마나 따뜻한 것이었는지를 말이다. 그러면서 이번에 교주가 내건 조건들도 서로간의 화해를 모색하기 위함이지, 결코 함정 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화해를 위한 수순으로, 자신이 인질로 마교에 가 있겠다고 말했다는 것까지.

인질로 마교에 가 있겠다는 부분에는 깜짝 놀랐지만, 열기 띈 어조로 자신을 설득하려 하는 손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던 옥화무제의 두 눈에는 착잡함이 어려 있었다.

말을 듣던 옥화무제가 문득 입을 열었다.

“네가 그를 마음에 두고 있었을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구나.”

그 말에 얼굴이 붉게 변한 매영인은 화를 발칵 내며 소리쳤다.

“아이, 할머니는! 누가 누굴 좋아한다고 그래요. 그냥 사실이 그렇다는 거지요. 그리고 제가 언제 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한 마디라도 했나 요?”

“글쎄다? 꼭 말로 들어야만 알 수 있는 건 아니지.”

그 순간부터 왠지 할머니의 눈길이 거북해지기 시작한 매영인이었다. 그토록 고대해왔던 할머니와의 자리가 바늘방석이 되려는 순간, 다행히도 밖 으로부터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상문주님, 추밀단주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래? 드시라고 전하거라.”

문을 열고 추밀단주가 들어오고 있을 때, 옥화무제는 매영인에게 말했다.

“어쨌거나 그동안 피곤했을 터이니, 가서 휴식부터 취하거라. 이 사안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꾸나.”

“예, 할머니.”

추밀단주는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매영인과 인사를 나눈 다음, 옥화무제에게로 다가왔다.

“찾으셨습니까? 태상문주님.”

“영인이가 큰일을 해준 거 같아요.”

옥화무제는 방금 전에 손녀로부터 들은 얘기를 자세히 들려줬다.

“흠, 저희로서는 그다지 나쁜 조건은 아니군요. 가만히 들어보니 왠지 명분 쌓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요.”

추밀단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옥화무제는 불현듯 입을 열었다.

“본녀는 장백산에 혈교가 둥지를 틀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추밀단주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그 말에 동조했다.

“부문주님이 가져오신 정보가 맞다면, 그곳에 북명신공과 관련된 문파가 자리잡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사료됩니다.”

“본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추밀단주는 단호하게 말했다.

“교주는 이미 북명신공을 익혔습니다. 그런 그가 그들과 접촉하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어쩌면 그곳에는 북명신공을 상회하는 무공이 전승되 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아니, 그만한 무공이 없다손 치더라도 중원무학과는 뿌리가 틀린 이방인들의 무학인 만큼 교주의 안계를 한층 넓혀줄 위험 성이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지금도 감당하기 힘든 교주인데, 그 무공 수준이 더욱 높아진다면 어찌 되겠는가. 지금이야 어찌어찌 정파 쪽과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지만, 자칫 그 균형추가 완전히 무너져 버릴 위험성이 있었다.

“교주에게 그 정보를 알려줄 게 아니라, 아예 무림맹에 넘기거나 아니면 태상문주님께서 이어받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추밀단주의 갑작스런 제안에 옥화무제의 두 눈이 일순 휘둥그레졌다.

물론 무림맹에 그런 고급 정보를 넘길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필요에 의해 연결되어 있긴 했지만 무영문에게 있어서는 무림맹이나 마교나 그게 그 거였으니까. 더군다나 비급 몇 권에 마교가 자신들의 총단을 치는 걸 승낙해 줬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옥화무제는 배신감에 상당히 분노해 있는 상 태였다.

그녀가 깜짝 놀란 것은 자신이 그곳을 이어받는다는 말 때문이었다.

“본녀가…,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태상문주님.”

“이 나이에 제가 더 이상 무공을 익혀서 뭘 하겠어요? 현경의 벽을 돌파한다고 해도, 교주를 이길 수 있을 가능성은 전무한데…

그녀는 추밀단주의 제안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거절해 버렸다.

장인걸은 교활한 머리는 물론이고, 절대에 가까운 무공까지 지니고 있었다. 더군다나 천마혈검대를 비롯하여 꽤나 많은 숫자의 고수들, 그리고 금나 라의 병권까지 쥐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장인걸 조차도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밖으로 드러낸 채, 정면대결만을 고집한 결과 어떻게 되었나? 마교를 상대로 정면대결은 자살행위라는 것을 자신의 목숨으로 증명해야만 했다.

“그게 아닙니다, 태상문주님, 제 말은 무공을 이어 받으시라 는 게 아니라, 그들을 회유하시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입니다.”

“회유라고요?”

“예. 그 동안의 정황들로 미루어 보면 장백산에는 북명신공과 관련된 문파가 존재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비영단원들조차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당해버렸지 않습니까. 그것도 한두 명도 아닌, 1개 조가 말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회유하기에 충분한 가치 를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사료됩니다.”

그건 충분히 말이 되었다. 촌구석에 위치하고 있기에 세상사에 어두울 게 뻔한 시골문파이니만큼 회유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무영문이 가진 엄청난 재력과 눈이 돌아갈 만큼 아름다운 여자들. 그리고 그녀의 화려한 화술을 생각해 보면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호오, 좋은 점을 지적해 주셨군요.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어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본 뒤 결정하기로 하고, 우선 교주가 제안한 사 안들을 처리해 나가기로 하죠.”

그러자 추밀단주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저들의 의도를 아직 모르는 상황인데, 벌써부터 조사를 개시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안 그래도 인력이 모자라는데..

“이쪽에서 그가 제시한 조건들을 완수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동안만큼은 우리를 건드리지 않을 게 아니겠어요?”

옥화무제의 심계에 추밀단주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오, 그렇다면 가급적 표시나게 움직이는 게 좋겠군요.”

“우선 영인이가 가져온 종이를 대량으로 복사해서, 전 중원에 붙이는 것부터 하기로 하죠.”

“그 작업은 개방을 끌어들여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비용은 좀 들겠지만 우리 측 요원들이 밖으로 드러나서는 곤란하니까요.”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즉시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추밀단주가 물러나고 난 뒤, 한동안 그녀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야 했다.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인지 쉽사리 결정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우선 교주의 의중이 뭐냐는 게 문제였다. 제시한 조건이 어렵고 쉽고의 문제는 아니었다. 어쩌면 뭔가 다른 흉계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손녀를 이 용해 자신을 밖으로 꾀어내려 한다고 해도 이쪽에서 응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조용히 숨죽이고 있으면, 아무리 마교라 해도 자신들의 비밀 거처를 알 아낼 방도가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을 보자고 하는 게 아니라, 뜬금없이 수수께끼 놀이라니. 그녀의 상식으로서는 교주의 행동 자체가 이해 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교와의 새로운 연결고리가 생겼다는 점이다. 교주는 자신의 마음에 든 사람은 쉽게 내치지 않는 사람이다. 어쩌면 그

점을 너무 자신했기에 자신이 그 자리에서 쫓겨난 것인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똑같은 실수를 두 번 다시 할 옥화무제는 아니다.

“쐐기를 박는 의미에서 그에게 후처로 주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만 된다면 안심하고 살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천금과도 같은 손녀를 그런 놈에게 후처로 주다니. 예전 같았으면 누가 그런 말을 꺼내기만 했어도 그놈의 입을 찢어버렸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 라졌다. 무영문을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다면, 손녀가 대수겠는가. 더군다나 그 아이는 교주를 사모하고 있음에 틀림없으니,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인 것이다. 더군다나 영인이가 본처보다 먼저 후계자를 잉태하게 된다면……………

생각을 거듭하던 옥화무제는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설사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아직까지는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그 일은 추진할 수 없었다. 우선은 상황을 지켜보면서, 교주가 제시한 조건을 수행하는 척 해야 한다. 그러면서 영인이와의 결혼에 대해 넌지시 떠보 면 될 것이다. 물론 너무 표가 나지 않게. 만약 이 사실이 본처에게 알려지게 된다면, 그녀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혼사를 방해하려 들게 뻔하지 않겠 는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한편의 소설처럼 구체화되고 있다. 이렇게 일을 처리하다 보면, 이런저런 문제점이 생길 것이고…, 그걸 해결하려면 이렇게 저렇게……………

평상시 같았으면 이미 결론이 나오고도 남았을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옥화무제의 생각은 자꾸 한 자리를 빙빙 맴돌고 있었다. 그녀의 생각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추밀단주가 던진 말이었다. 발해에 대한 자료를 교주에게 넘기는 게 좋을까, 아니면 자신이 먼저 꿀꺽 하는 게 옳을까? 만에 하나 교주가 손녀에게 한 제안이 진실이었을 경우, 자신이 한 행동을 나중이라도 들키게 된다면 마교와의 화평은 물 건너가게 되는 것이다.

잠시 이리저리 고심하던 옥화무제는 뭘 생각했는지 배시시 웃었다.

‘그래, 일단 내가 먼저 가보는 거야. 제대로 된 정보가 있어야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지. 나중에 교주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조건을 수행 하기 위해 본녀가 직접 움직였다고 둘러대면 되는 거고. 만약 상황이 악화돼도 꽁꽁 숨어있으면 그만 아니겠어? 혹시 재수가 좋아서 그들을 회유할 수만 있다면 나에게도 막강한 무력이 생기는 일인데, 멍청하게 그걸 그냥 통째로 넘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마음을 굳힌 옥화무제는 밖에 대고 외쳤다.

“총관보고 지금 당장 이리로 오라고 하세요.”

“옛, 태상문주님.”

잠시 후, 총관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고개를 조아렸다.

“찾으셨습니까? 태상문주님.”

옥화무제는 매영인이 물고 온 조건에 대해 총관에게 자세히 설명해줬다.

“총관은 영인이를 도와 만통음제와 교주의 아버지라는 사람을 찾는 데 전력을 다하도록 하세요.”

총관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분의 제의를 받아들이실 겁니까?”

“일단 준비는 해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는 것뿐이에요. 본녀는 요동에 좀 다녀올 테니, 그동안 영인이를 잘 부탁해요.”

“심려하지 마십시오.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뭔가요?”

총관은 걱정스럽다는 듯 조언했다.

“태상문주님이 하시는 일에 속하가 감히 반대를 하겠습니까만은, 그분의 것을 가로채려고 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들어 H…….”

그 말에 옥화무제는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누가 가로챈다는 거예요? 살짝 한 번 맛만 보겠다는 거죠. 상황을 보고 우리들이 삼킬 수 있으면 삼키고, 그게 힘들 것 같으면 교주에게 넘겨주면 되는 거예요.”

“아, 예…….”

“뭔지도 모르는데 그냥 교주에게 넘겨주기에는 너무 아깝잖아요. 안 그래요?”

“태상문주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그쪽 토속어에 능한 자들로 몇 명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