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8권 7화 – 똥줄 타는 아르티어스
똥줄 타는 아르티어스
뚱따당, 뚱땅.
거문고의 은은한 선율이 그의 귀 주위를 계속 맴돌고 있었지만, 아르티어스의 마음은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젠장, 이걸 어떻게 처리한다?”
요즘 들어 하루에도 수백 번씩 그의 골치를 아프게 만들고 있는 주제였다.
“잘못될 가능성도 거의 없는데, 그냥 확 실행해 버려?”
하지만 말처럼 쉽게 그러지는 못했다. 아무리 자신이 마법에 능통한 존재라고 해도, 기억을 지우는 정신계 마법까지 전능하지는 않았다. 만에 하나 작은 실수로도,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가능성이 아주 컸다. 그 최악의 상황이라는 것은 만통음제가 음악적 재능의 일부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었다. 아르티어스는 만통음제의 음악적 재능에 푹 빠져있는 상태다. 그렇기에 만의 하나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쉽사리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그의 아버지였다면 실패하건 말건 과감하게 실행했을 것이다.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그에게는 원상태로 돌려놓을 수 있는 리라이프(Re-life) 라는 최후의 보루가 남아있었으니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르티어스는 그 마법을 쓸 줄 몰랐다.
최악의 사태까지 발생한다면 과감하게 모험을 감행하겠지만, 아직은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아들놈하고 헤어진지는 이제 겨우 몇 달도 채 되지 않았 지 않은가. 기나긴 드래곤의 삶에 있어서 몇 달 정도는 순간에 불과했다.
“저걸 못 듣게 된다면, 너무 아쉬울 거야.”
이때, 하인 하나가 슬그머니 다가와서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대인, 식사는 어떻게 준비해 드릴깝쇼?”
내친김에 아르티어스는 이곳에 한 살림을 차려놓은 상태였다. 돈이야 없으면 아무데나 가서 훔쳐도 된다. 중원에서 그의 도둑질을 막을 수 있는 존 재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그는 이곳에 커다란 저택을 한 채 샀고, 솜씨 좋은 요리사와 하인, 하녀들까지도 고용했다.
평상시에는 집에서 식사를 했지만, 간혹 마을의 객잔에 가서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곳의 숙수(熟手; 여기서는 요리사를 그렇게 부른다)가 자신이 고 용한 숙수에 비해 솜씨가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가서 먹어볼까 하는데.”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요, 대인.”
아르티어스는 하인이 물러나자 골치가 아픈지 머리를 가볍게 저으며 중얼거렸다.
“저놈에 대한 건 다음에 생각하기로 하지. 아직은 시간 여유가 있으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르티어스는 공간이동 마법을 전개하여 한순간에 마을 외곽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으슥한 골목. 그는 이곳의 좌표를 기억해 뒀다가 별식을 먹고 싶을 때면 종종 애용하고 있었다. 골목을 나서는 아르티어스의 입가에는 곧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인지 흐뭇한 웃음이 걸려있었다.
“오늘은 뭘 먹어볼까? 흐흐흣, 여기 음식은 정말 마음에 든단 말씀이야.”
아르티어스가 외출하자마자 하인은 곧바로 만통음제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대인께서 외출하셨습니다.”
대인이라고 불리는 이 집 주인은 만통음제에게 그 어떤 신체적인 금제도 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통음제는 그를 어떻게 하지 못했다. 화경급 고수 인 그가 손도 대지 못할 상대가 이 세상에 존재할 줄이야 어찌 상상이라도 해봤겠는가. 물론 상대가 강한 측면도 있긴 했지만, 도대체 놈이 무슨 사술 을 부려놨는지 그를 공격하려고만 하면 내공이 흩어져 버리는 괴변이 발생하니, 그로서도 미칠 지경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괴변은 대인이라는 놈에 국한되어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대인을 제외한 하인들은 만통음제 앞에서 밥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대인이 외 출하자마자 그에게 달려와 이렇듯 보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인의 보고를 접한 만통음제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 외곽으로 갔다.
“진법일까?”
그가 그렇게 추정하는 것은 족쇄를 차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 근처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더 밖으로 나가면, 순식간에 몸이 저택에 있는 자신의 방으 로 이동해 버리는 변괴가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호에 만통이라는 글자가 붙을 정도로 해박한 그였지만, 이런 해괴한 진법이 존재한다는 얘기는 풍문으로 조차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진법일 수밖에 없겠지. 그거 말고 뭐가 있겠어? 하지만 왜 나만 이 진법에 영향을 받는 게지? 이해할 수가 없구먼.”
집안의 하인들은 진법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밖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진법 자체가 존재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 도 불구하고 만통음제 자신만 이런 해괴한 일을 당하고 있으니, 미치고 팔짝 뛸 수밖에.
혹시 자신의 몸이나 몸속에 뭔가를 설치해 놓은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온 몸을 주무르며 혈맥을 촉진해 봤고, 내공을 이용하여 몸속 구석구석에 걸쳐 살펴도 봤다. 또한 하인 하나를 불러들여 혹시 등 뒤에 문신 같은 걸 파놓지 않았는지 물어보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에는 그 어떤 이상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어허, 이거 참. 이런 불가사의한 진법이 이 세상에 존재할 줄이야. 평생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살았거늘, 오늘에야 내가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났구 나.”
만통음제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모든 진법들을 떠올리며,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를 궁리했다. 그게 요즘 들어 매일매일 행하고 있는 그의 일과였다.
이때, 기가 막힌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 지하를 통해 밖으로 나가면 어떨까? 땅 속 저 깊은 곳까지 영향을 미치는 진법이 있다는 소리는 아직 들어본 적도 없으니 말이야. 그래, 바로 “그거야!”
생각을 정한 그 순간, 만통음제의 몸이 무섭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의 주위를 맹렬하게 회전하는 강기의 막. 고난도의 무공을 이용하여, 만통음제 는 단숨에 지하 깊숙이 파고 들었다.
충분한 깊이까지 파고 들어왔다고 생각한 그는 옆으로 방향을 돌렸다. 뛰어난 무공 실력을 갖춘 만큼, 땅을 파나가는 속도 또한 무시무시했다. 그의 후방으로 전방으로 뚫고 지나가며 생긴 돌가루와 흙가루가 거칠게 휘날렸다.
“엥?”
어느 순간, 만통음제는 흙투성이가 된 채 자신의 방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으아아아아!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한참동안 방안을 돌며 발광을 하던 그는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자리에 퍼질러 앉아 중얼거렸다.
“그래, 죽자! 이렇게 살아서 뭣하리.”
이곳에 잡혀 와서, 하루에 골백번도 더 떠올려 보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죽음을 생각하니 의동생 묵향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고 맹파천과 설취 등등 자신이 아끼고 사랑했던 얼굴들이 줄줄이 나타났다가 사라졌 다.
결국 그는 자신의 생각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자유가 제한되어 있는 것 외에 자신에게 가해진 금제는 전혀 없었다. 물론 하루 중 일정 시간동 안은 악기를 연주해야 한다는 제약이 있긴 했다. 딱히 할 일도 없었던 만통음제였기에, 대인이라는 놈의 압력이 아니더라도 미친 듯이 악기를 연주했 다. 그것 외에 자신의 이 비참한 현실을 잊게 해줄 방도가 없었으니까.
“제 아무리 완벽한 진법을 설치해 놨다 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어딘가에 빈틈이 있을 거야. 시간을 들여 천천히 궁리해 보자.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 지 말자. 너는 할 수 있어.”
스스로를 위로하는 만통음제였다. 물론 이것도 다 상대가 인간이라고 생각했기에 가지게 된 부질없는 희망이긴 했지만……………
자신이 자주 애용하는 객잔을 향해 걸어가던 아르티어스의 발걸음이 흠칫 멈췄다. 평소 감정의 동요를 찾아보기 힘든 그였지만, 지금 그의 두 눈은 휘둥그레져 있었다. 그가 발길을 멈춘 곳은, 평소 관에서 현상수배자들의 방을 붙이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마치 어린아이들이 장난이라도 쳐놓은 듯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듯한 괴상한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방이 하나 붙어있었는데, 그것이 아르 티어스의 눈길을 잡아끌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레어가 위치한 말토리오 산맥 인근에 자리잡고 있는 크라레스 제국이 사용하는 문자였다.
사랑하는 아버지.
도대체 어디에서 뭘 하고 계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빨리 집으로 돌아오세요. 뭐, 저랑 같이 살기 싫으시다면 어쩔 수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하 루라도 빨리 돌아오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봐서 한동안 여행을 떠날까 하는데, 안 오시면 저 혼자 떠날 겁니다.
다크 올림
다른 사람들은 그 방에 그려져 있는 괴상한 기호들을 보고는 누군가가 장난을 쳐놨다고 생각하겠지만, 방을 읽는 아르티어스의 가슴은 세차게 요동 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아버지. 너무나도 달콤한 말이다. 그리고 둘이서 오붓하게 여행을 떠나자니? 안 그래도 그놈의 의형이라는 놈을 모르고 두 들겨 팬 것 때문에 노심초사 하고 있던 차에, 이런 가족적인 정이 듬뿍 배인 글을 보자 울컥 감정이 치밀어 오른 것이다.
“흑흑…….”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조금 전까지는 교활한 호비트놈에게 낚여, 이렇게 이계까지 와서 개고생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 다. 호비트놈은 자신을 아버지라고 생각도 하지 않는데, 자신만 미친 듯 짝사랑하고 있는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얼마나 보지 못했다고, 이런 식으로 사방에 방을 붙여 자신을 찾다니. 게다가 방의 첫 문장이 사랑하는 아버지가 아니던가.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들 또한 얼마나 따뜻한 내용인가. 여행을 갈 테니, 빨리 돌아오라고………………
엥? 훌쩍거리며 방의 문장들을 읽고 또 읽던 아르티어스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읽을수록 그 뜻이 오묘(?)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장을 곧이곧대로 해석한다면 어딘가로 여행을 떠날 일이 생겼는데, 아버지와 함께 가고 싶으니 빨 리 돌아오시라는 것이었다. 빨리 오지 않으면 혼자 떠난다는 말과 함께………….
얼핏 생각해도 이 문장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세계에 와서 아들놈이 자기를 내팽개치고 혼자서만 여행을 다닌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그리고 겨 우 여행 한 번 같이 가자고, 온 천지에 방을 도배해 놨다는 것도 수상쩍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뭔가 내용이 이상해?”
이때, 아르티어스의 뇌리에 번쩍 하고 스치는 게 있었다.
“그래! 이건 최후통첩이야.”
그 순간 아르티어스의 머릿속에서 방의 내용이 새롭게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여행이라는 말을 이별과 같은 뜻으로 해석해 본다면…
『빨리 십만대산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하고 같이 살기 싫은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빨리 튀어 와서 싹싹 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는다 면 아빠와 나는 영원히 이별이니 그리 아십쇼.』
아르티어스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이런 떠그랄! 내가 네 녀석 하나 믿고, 이 물설고 낯선 곳까지 따라왔는데, 나를 이렇게까지 괄시하다니. 이 못된 녀석!”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서둘러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저택에 만통음제가 갇혀있다는 것 따위는 그의 머릿속에서 이미 잊혀진지 오래였 다.
십만대산의 교주 전용 연공실 안에는 예전에 그가 그려둔 수신마법진이 있다. 교주 전용 연공실이 워낙 안전한 곳이었기에 혹시나 써먹을 수 있을지 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려둔 것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그게 도움이 될 줄은 그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수신마법진을 그려두기를 정말 잘했어. 거기까지 달려갈 걸 생각하면, 에휴~~.”
한숨을 내쉬며 아르티어스는 마법진을 구동시켰다.
“크, 큰일 났습니다. 수석장로님!”
헐레벌떡 달려 들어오는 왕지륜을 바라보며 수석장로는 눈살을 찌푸렸다. 장로원 수석참모라는 놈이 저렇게 경망스러워서야…………….
“에잉~,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바, 방금 천마동에서 급전이 도, 도착했습니다.”
“천마동?”
천마동이라면 교주 전용의 연공실이다. 혹시, 그곳이 무너지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허어, 답답하구나. 어서 속 시원하게 빨리 좀 말해 보거라. 천마동이 어찌 되었다고?”
“어, 어르신께서 천마동에서 나오셨답니다.”
“어르신이?”
왕지륜의 말에 수석장로의 안색이 홱 바꿨다. 어르신이라면 교주의 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이 또 있겠는가.
“행방불명되었다던 어르신께서 왜 천마동에서 나오신다는 말이냐?”
매서운 질책에 왕지륜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그건 속하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수석장로는 주먹을 꽉 쥐며 으르렁거렸다.
“천마동 경비를 섰던 놈들을 철저하게 문초하도록 해라. 녀석들이 긴장을 늦췄을 때, 어르신이 들어가신 거겠지.”
“하, 하지만 수석장로님. 그렇게 따진다면 본교에서 문초를 받지 않을 고수가 누가 있겠습니까. 외곽에서 천마동까지 들어가려면 교내의 거의 모든 경계망을 돌파했다고 봐야 하는데……………. 그건 수석장로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왕지륜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더군다나 아르티어스가 언제쯤 들어왔는지 그것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어쩔 수 없지. 그분께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썩을 놈들. 어르신께서는 천마동에 계셨거늘, 행방불명되셨다고 보고해서 교주님께 심려를 끼치게 만 들다니. 내가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허어, 참! 이런 망신이 있나.”
이때, 뭔가 생각났다는 듯 수석장로는 짜증스런 어조로 외쳤다.
“그러고 보니 이 모든 게 어르신께서 행방불명되셨다며 호들갑을 떤 네놈 잘못이 아니더냐!”
왕지륜은 바닥에 납쭉 엎드리며 사죄했다. 불문곡직하고 단숨에 때려죽인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그의 얼 굴은 공포로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요, 용서를…….”
“네놈의 죄는 급한 일부터 처리한 후에 묻기로 하겠다.”
수석장로는 왕지륜을 그냥 놔둔 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천마동을 향해 달려갔다. 어르신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아르티어스도 수석장로를 찾아서 걸어오고 있던 중이었기에, 얼마 가지 않아 수석장로는 어르신을 만날 수 있었다. 수석장로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고개를 깊숙이 조아리며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어르신,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어르신께서 천마동에 계신지도 모르고, 실종되신 줄 알고…………….”
아르티어스는 상대의 말을 자르며 약간은 짜증스런 어조로 물었다.
“아, 그건 됐고, 내 아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물음에 멍한 표정을 짓는 수석장로. 하지만 그는 재빨리 기억을 더듬어 보고했다.
“예? 아, 예. 교주님께서는 지금 출타하셨습니다.”
“출타했다고? 어디로?”
아르티어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린다. 최후통첩. 어쩌면 아들놈은 최후 통첩대로 자신만을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렸는지도 모른다. 다시 는 보지 않을 생각으로,
하지만 그런 아르티어스의 내심을 알 리 없는 수석장로는 교주가 옥화무제와 만나기로 한 장소를 말해주었다. 사실, 교주가 옥화무제와 만나기 위해 출타했다는 것과, 만나는 장소는 특급기밀 사항이었다. 그럼에도 수석장로가 주저없이 입을 연 것은 아르티어스가 심령에 압박을 가해 입을 열게 만 든 것이다.
“혹시 여행을 간다거나 한 건 아니겠지?”
아르티어스의 속 타는 마음과 달리 수석장로는 당치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예? 여행이라니, 말도 안 되는 억측이십니다. 제목을 걸고 장담합니다만, 교주님께서는 공무 때문에 출타하신 게 틀림없습니다.”
공무 때문이라는 말에 아르티어스는 저으기 안심했다. 핏기없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공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오랜만인 만큼 아들을 만나보고 싶군. 아무래도 내가 직접 거기에 가보는 게 좋겠어.”
“교주님께서는 며칠 내로 돌아오실 겁니다. 지금 교를 나서신다면, 괜히 길만 어긋나실 수도 있습니다, 어르신.”
“거기까지 얼마나 된다고 길이 어긋나? 지명 따위는 필요 없고, 대략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지 정확한 거리를 말해 봐.”
“그러시다면 여기서 설명을 들으시는 것보다, 일단 제 집무실로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곳에 비교적 정확하게 그려져 있는 지도가 있는데 말입 니다.”
“오호, 그거 좋군. 앞장 서라.”
“예.”
수석장로가 아르티어스를 모시고 자신의 집무실에 도착했을 때, 왕지륜은 아직도 부복한 자세 그대로 엎드려 있는 중이었다.
“이놈은 왜 이러고 있냐?”
“아, 잘못을 저질러서 기합을 좀 주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왕지륜, 너는 빨리 나가 봐.”
왕지륜은 아르티어스와 수석장로에게 인사를 건넨 후, 후다닥 밖으로 도망쳤다. 아르티어스 덕분에 목숨을 건진 것을 감사해 하며…
수석장로는 탁자 위에 놓인 지도의 한 점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교주님께서는 이곳으로 가셨습니다, 어르신.”
하지만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수석장로가 지도에서 시선을 돌려 아르티어스쪽으로 향했을 때, 그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갑 자기 어르신의 몸에서 희뿌연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그 빛이 멈춘 순간 어르신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수석장로였지만, 이번만큼은 경악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허억! 이런 변괴가!”
한평생을 무공 수련에 몸바쳐온 수석장로다. 무공을 이용해서 한순간에 몸을 빼는 요령쯤은 이미 숙달하고 있었다. 극마급 이상의 고수로 발전한다 해도, 그 속도가 좀 더 빨라진다는 것이지 요령은 똑같다. 그렇기에 그는 방금 전에 아르티어스의 몸이 사라진 게 결코 무공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 고 있었다.
수석장로는 자신의 눈을 몇 번이고 비빈 다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내, 내가 귀, 귀신이라도 본 것일까?”
***
이곳 세계의 미개하기 짝이 없는 호비트들은 마법이라는 것을 쓸 줄 몰랐다. 대신 그 반대 급부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술 쪽으로는 과거 자신이 살았 던 세계에 살던 호비트들에 비해 훨씬 더 체계적인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서로가 장단점이 있긴 해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그게 너무 불편하게 느껴지는 아르티어스였다. 왜냐하면 마법이 발달해 있지 않은 만큼, 공간이동 좌표를 기록해 놓은 책자를 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아르티어스는 가장 단순무식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일단 시야를 통해 멀리 보이는 지평선 위쪽의 한 지점을 정한 다음, 그곳으로 단 거리 공간이동을 연속적으로 시행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크으윽! 이런 개망신이 있나. 여기에 드래곤이 살고 있지 않다는 게 정말 다행이군.”
아마도 다른 드래곤들이 있어서, 아르티어스가 장거리 이동을 함에 있어 이토록 멍청한 짓거리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모두들 비웃을게 뻔했다. 물론, 그놈들도 여기에 데려다 놓으면, 똑같은 짓을 할 수 밖에 없을 테지만, 공간이동 좌표를 모르는 한, 시야를 벗어난 장거리 공간이동은 자기 무 덤을 파는 거나 다름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저긴가?”
멀리 보이는 도시. 도중에 계속 길을 물으며 이동해 왔기에 착오가 있을 리가 없었다. 도시 안으로 들어간 아르티어스는 곧바로 묵향과 무영문주와 의 접선장소인 객잔으로 달려갔다.
“어서 옵쇼, 손님. 혹시 동행이 있으십니까?”
“물어볼 말이 있는데, 대략 일주일 전에…………….”
설명을 하려던 아르티어스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아들놈의 생김새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자니, 꽤나 답답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손님 접대는 자네 혼자 하나?”
“아뇨. 저 말고 한 명 더 있긴 합니다만………….”
“그럼 너 잠시 이리로 와봐.”
아르티어스가 슬쩍 손을 흔드는 순간, 점소이의 눈빛이 몽롱하게 바뀌었다. 마치 몽유병에라도 걸린 듯 비틀비틀 다가오는 점소이. 아르티어스는 그 런 점소이의 머리 위에 자신의 손바닥을 올렸다.
점소이의 기억을 살펴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운 좋게도 이 점소이의 기억 속에서 아들의 영상을 찾아낸 순간, 아르티어스의 입 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운이 좋…….”
하지만 그의 말은 거기에서 딱 멈췄다. 녀석이 아들을 본 건 사실이지만, 더 이상 쓸 만한 정보는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놈의 기억을 통해 그날 객 잔의 정경까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영상에 따르면, 아들놈 근처에서 대화를 엿들을 만큼 가까운 위치에 자리잡은 놈이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이놈, 설마 공무를 보는 척 하며 여행을 떠난 거 아냐? 예전에도 저쪽 세상에서 이런 일이 몇 번 있었잖아. 물론 그 아랫것들이야, 개고생을 했지 “만.”
그런 생각이 들자 아르티어스는 마음이 더 다급해졌다. 아들 녀석이 마음먹고 흔적을 감추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자신이 드래곤이라고 해도 찾을 방 법이 없으니까 말이다.
이때, 아르티어스의 머리를 번쩍 스치는 게 있었다. 점소이놈은 아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던 여자의 얼굴을 몰래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아르티어스의 기준에서 본다면 이곳에 서식하는 호비트들의 겉모습은 거의 다 비슷비슷했다. 검은 눈, 검은 머리, 약간 갈색을 띄고 있는 피부…………. 그 중에서 바깥 일을 하는 놈들의 피부색이 좀 더 짙다는 것 외에 별 차이점이 없었다.
“겨우 그런 계집이 뭐 그리 볼 게 있다고 정신을 못 차려. 하지만 덕분에 좋은 걸 얻었어.”
대화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모양에 대한 영상은 얻었다. 물론 놈의 촛점이 계집에게 맞춰져 있었기에, 제대로 된 대화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 다. 어쨌거나 계집이 떠든 말이 뭔지는 대충 파악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녀가 말한 내용들 중에서 가장 그럴 듯해 보인 것은 바로 백두산이라는 지명 이었다.
“백두산이라…?”
이곳에서 습득한 지식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지명이었다.
객잔을 나온 아르티어스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혹시 백두산이라는 산이 어디에 있는지 수소문해 봤다. 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모두들 그런 산 이름은 처음 들어봤다는 것이다. 몇몇 사람이 백두(白頭)라는 명칭이 붙은 것으로 봐서, 산꼭대기에 만년설이 쌓여있는 대단히 높은 산일 거라는 추측만을 내놨을 뿐이다.
산세가 높고 험한 것으로 따진다면, 중원의 서쪽이나 동쪽으로 가야 했다. 그곳에 높은 산들이 즐비하다는 것은 상식이었으니까. 아르티어스는 그쪽
을 향해 또다시 단거리 공간이동을 시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아닐 경우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아들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지는 사태에 직 면할 우려가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손바닥을 탁 치며 외쳤다.
“참, 이럴 때는 아들 녀석이 쓰던 방법을 쓰는 게 좋겠군. 뭔가 알고 싶은 게 있으면, 거지를 찾아서 족치면 된다고 했지, 아마?”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그날 마을에 살던 거지들의 입에서는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구걸로 밥 빌어먹는 거지들이 다 개방에 몸을 담고 있을 리 없 었지만, 아르티어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수백 명이 넘는 거지들을 족쳤을 때쯤, 재수없는 개방도가 한명 걸려들었다. 물론 이것도 아르티어스가 그를 찾아낸 게 아니라, 거지를 괴롭히는 미 친놈이 있다는 소문을 접한 호기심 많은 개방도가 스스로 찾아온 것이었지만.
“거지를 괴롭힌다는 변태 놈이 바로 네놈이냐?”
사실 이 말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아르티어스 앞에는 이미 걸레쪽이 되어 있는 거지 몇 명이 엎어져서 신음하고 있었으니까.
“어? 이번에는 제법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는 놈이로군. 지금까지는 성과가 없었지만, 저놈은 가능성이 있겠는데?”
괴인이 무공을 익힌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비할 시간을 주는 것은 오히려 자기 무덤을 파는 행위였다. 특히나 저런 변태 놈은. 생각을 정한 편두개는 즉시 선제공격을 날렸다. 서로간의 거리는 4보(步). 웬만한 고수가 아니고서는 그의 일격을 막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허억!”
편두개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괴인이 자신의 공격을 막아냈기 때문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변괴인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주먹이 괴인의 코 앞에서 딱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마치 허공에 뭔가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무슨 사악한 술법을 부린 것이냐?”
이제는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는지, 움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건 혈도를 제압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밧줄에라도 포박 당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눈을 아래로 깔아보니 자신의 손가락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만약 혈도를 제압당했다면 절대로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난데없는 괴변에 편두개가 공황상태에 빠져있건 말건, 괴인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것까지 네놈이 알 필요는 없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해줘야겠다. 백두산이라는 산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
자존심이라는 게 있지, 겨우 구속 정도 당한 것 가지고 순순히 대답을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편두개는 고집스럽게 외쳤다.
“흥! 내가 왜 그런 걸 대답해 줘야 하느냐?”
괴인의 미소가 더욱 짙어진다.
“호오, 대답해 주는 게 신상에 좋을 텐데?”
“개소리 하지 마라!”
호기롭게 외친 편두개였지만, 강도 높은 고문을 당한 후에는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정신계 마법을 꽤나 깊은 부분까지 섭렵하고 있는 아르티어스인 만큼, 마법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법이라 는 게 전능한 것은 아니었다. 매혹의 주문을 통해 상대를 현혹하여 친구로 인식시켜 물어보는 방법이 가장 좋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그는 그런 것은 배우지 않았다. 고문만 해도 충분히 파악해 낼 수 있는데 뭐하려고 귀찮게 그런 쓸데없는 마법을 배우겠는가. 더군다나 아르티어스는 고문이라는 무 식한 행위를 그리 싫어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즐기고 있다고 보는 게 옳았다.
매혹 외에 그가 잘 하는 것은, 상대의 머릿속을 통째로 읽어버리는 것이었다. 문제는 호비트의 머리통 속에 기억된 데이터의 양이 워낙에 방대하다 보니 그거 하나 읽어내자고 시간을 보내느니 차라리 고문을 가하는 게 빠를 수도 있었던 것이다.
“어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나?”
“배, 백두산이라니. 그런 산 이름은 처음 들어 봅니다요.”
편두개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꼭 도둑놈처럼 생긴 험악한 두상에 억지 미소까지 짓고 있다 보니 영 꼴이 말이 아니다.
“헛소리 하지 마. 방금 전에는 말해주지 않겠다고 했잖아. 순순히 실토하지?”
“알면 제가 알려드리지요. 저는 결단코 모른다니까요.”
시간이 흐를수록 아들놈과의 거리가 벌어질 것을 염려한 아르티어스는 가차 없이 편두개에게 고문을 가했다. 예전에 아들놈이 모른다고 뻗대는 놈 들도 이렇게 고문을 가하면, 모든 걸 털어놓는다는 말을 철떡 같이 믿기에.
“모르긴 왜 몰라?”
“크아아악! 저는 모릅니다. 몰라요!”
“이놈이 아직 고문이 부족한 모양이군.”
“제, 제발 살려주십쇼. 제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늙으신 부모님과 토끼 같은 자식들이…………….”
아르티어스는 피식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걸 듣는 독두개에게는 악마의 음성처럼 들렸지만.
“거지주제에 토끼 같은 자식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으아아악!”
강도 높은 고문에 한동안 비명을 질러대던 편두개는 마침내 마지막 수단을 제시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건 다른 놈을 팔아먹는 것이었다.
“저, 저는 모르지만, 알 만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누군데?”
“저희 분타주님이요. 아마 분타주님이라면 잘 아실 겁니다.”
아르티어스의 눈동자가 실쭉 가늘어진다.
“아마? 나는 불확실한 걸 싫어해. 잘 알지?”
독두개는 필사적으로 대꾸했다.
“아, 아니요. 소인이 말을 실수했습니다요. 틀림없습니다! 분타주라면 틀림없이 알고 있습니다. 소인이 보장하겠습니다!”
아르티어스는 마지못해 부탁을 들어준다는 듯 능청스레 말했다.
“허,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내가 참고하도록 하지. 그래, 그 분타주라는 놈은 어디에 있는데?”
“저쪽으로 가시다 보면…………….”
편두개는 분타의 위치를 알려주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물론 분타의 위치를 외부인에게 발설했다는 게 알려지면 문책이야 당하겠지만, 우선 자신 부터 살고 봐야 할 게 아니겠는가. 그리고 한편으로는 분타에 뒹굴거리고 있는 고수들과 분타주가 이 망할 놈을 처치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있었고.
아르티어스는 편두개의 설명대로 산 2개를 넘은 다음, 행인들에게 물어물어 그놈의 분타가 위치하고 있다는 도시를 찾아갔다. 물론 개방의 분타는 그 도시의 내부에 있지 않고, 시 동북방에 위치한 작은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다. 반쯤 무너진 버려진 장원, 그곳이 바로 개방의 분타였다. 많은 식구 들이 도시 쪽으로 구걸을 나갔지만, 그래도 아직 60여 명의 거지들이 남아있었다.
낯선 손님의 접근에 한 거지가 혐오감을 조성하기 위해 일부러 더욱 추접한 짓거리를 해댔다. 다 헤어진 낡은 옷섶 사이로 손을 넣어 북북 긁으며 중 얼거렸다.
“에이, 이놈의 이! 간지러워서 못살겠네. 그렇다고 옷을 버릴 수도 없고…….”
상대가 가까워지자 그는 ‘카아아악하며 가래를 끌어 모아서 퉤! 하고 상대의 발치 근처에 내뱉었다. 싯누런 가래덩어리였다.
하지만 거지의 바램과는 달리 상대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보통 이 정도만 해도 마치 전염병자라도 본 듯 얼굴이 핼쑥하게 질려서는 주춤 주춤 도망쳐 버렸었는데 말이다.
“무슨 일이슈?”
“분타주라는 놈은 어디에 있느냐?”
“분타주? 이건 또 무슨 개 잡소리야. 거지 떼에 들어와서 분타주를 찾다니!”
녀석은 일부러 큰 소리로 외쳤다. 주위에 있는 거지들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아니나 다를까, 둘이 나누는 대화에 주변의 거지들이 귀를 기울이 기 시작한다.
“여기가 개방의 분타 아니냐?”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몰려나오는 떼거지들. 타구봉(打狗棒)을 들고 튀어나온 그들의 눈빛에서 진한 살기가 뿜어져 나온다.
흉악한 살기를 흘리는 수십 명의 거지들에게 포위당했음에도 상대의 얼굴에는 전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같잖다는 듯 이죽대는 것이 었다.
“어쭈? 꼴에 반항을?”
그 뒤에 이어진 일련의 상황은 거지들을 경악케 했다. 도저히 자신들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괴변. 이건 사람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무슨 요괴(妖怪)를 상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일반인들이 고도의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을 보고 신선이라고 착각하듯, 무림의 물을 먹고 있다는 그들이 귀신이라고 생각할 정도라면 과연 어느 정도였겠는가.
“백두산이 어디라고?”
괴인의 물음에 분타주는 공손히 대답했다. 짙은 공포로 인해 그의 몸은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자, 장백산을 보고, 그 일대 토착민들이 백두산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흠, 그럼 장백산은 어디에 있느냐?”
“요, 요동에 있습지요.”
괴인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듯 하자 분타주는 재빨리 거지 하나를 시켜 지도를 가져오게 했다. 그는 더 이상 괴인과 얼굴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괴인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들어주는 것이 최선의 길이었다. 또, 설명도 제대로 못한다며 쥐어 터지는 것도 싫었고…………….
“바로 이곳입니다.”
“흐음, 대충 동쪽으로 가면 되겠군.”
그 말을 끝으로 괴인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 싶더니, 갑자기 그의 몸이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본 거지들은 모두 기절초풍하 지 않을 수 없었다.
“으아아악! 귀신이다!”
모든 거지들이 공포에 질려 숨을 곳을 찾아 사방으로 내달렸다. 분타주조차 그 대열에 합류했을 정도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래도 도 망이라도 친 거지들은 개중에 담이 큰 편에 속했다. 몇몇 거지들은 아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오줌까지 지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것만 봐도 아르티어스가 그들에게 남겨준 공포가 얼마나 엄청났었는지 알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