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8권 8화 – 생사경의 경지?
생사경의 경지?
묵향은 옥화무제의 안내를 받으며 장백산에 도착했다. 옥화무제가 체력이 딸려서 몇 번 지체된 것을 제외한다면, 이곳까지 쉬지도 않고 줄곧 달려온 셈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저 산이 장백산이에요. 토착민들은 저 산을 백두산이라고 부르지요.”
“호오, 과연 대가리가 하얗긴 하얗군.”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하루 쉬었다가 가는 게 어때요?”
옥화무제의 물음에 묵향은 활기찬 어조로 대답했다.
“괜찮아, 전혀 안 힘들어.”
“내가 힘들어서 그래요.”
옥화무제의 대답이 의외였던 묵향이다. 물론 먼 거리를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달려왔으니 피곤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몇 시간 정도 운기조식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 하루의 휴식을 필요로 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정말 함정이라도 파놓은 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묵향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그녀가 마련해 놓은 함정이라는 게 있다면, 구경해 보고 싶다는 호기가 일었던 것이다.
“그래? 그렇다면 어디 쉴만한 데가 있나 찾아보기로 하지.”
“그럴 필요는 없어요. 아는 곳이 있으니까요. 나를 따라와요.”
앞장 서서 내달리기 시작하는 옥화무제. 그 뒤를 따르며 묵향은 갑자기 옥화무제가 객잔으로 가고 싶다고 하는 진정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 해답 은 엉뚱한 곳에 있었다. 옥화무제는 묵향에게 하룻밤만이라도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실력차가 클 텐데, 지쳐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다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이게 내가 당신에게 해주는 마지막 배려에요.’
그녀가 안내한 객잔은 중원을 기준으로 본다면 매우 허름했다. 하지만 주위에 있는 다른 건물들에 비교한다면 그래도 개중에 나은 편에 속했다. 놀랍게도 객잔에는 그녀의 수하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 옥화무제가 이곳으로 왔을 때 이끌고 왔던 수하들이었다. 중원까지 가서 묵향 을 만나려면 혼자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아, 모두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명령을 내려놨던 것이다.
“다녀오셨습니까, 태상문주님.”
인사를 건네는 수하들을 바라보던 옥화무제는 묵향을 향해 살짝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별 다른 뜻은 없어요. 통역이 필요해서 대기시켜 놓은 거니까요.”
묵향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별소리를 다하는군. 난 상관없으니 신경 쓰지 마.”
중원의 제대로 된 음식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비교적 괜찮은 음식으로 배를 채운 두 사람은 객잔에 있는 방들 중 가장 좋은 곳에서 하루를 푹 쉬었다.
다음날 아침을 배불리 먹은 두 사람은 장백산을 향해 출발했다. 험악한 산길이었지만, 중원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그들이었기에 피곤한 줄 을 몰랐다. 두 사람의 발목을 잡는 것은 그녀가 데리고 온 통역이었다. 그녀가 이끌고 온 수하들 중에서 가장 무공이 뛰어난 녀석이었음에도 불구하 고, 그의 발걸음은 턱도 없이 느렸다.
두 사람은 통역이 따라올 수 있도록 천천히 산을 올랐다.
“이쪽이에요.”
정상에 오르자 놀랍게도 산꼭대기에 드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그 때문에 다른 산들에 비교한다면 아주 색다른 경치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게 사 실이다. 하지만 묵향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는 지금 주변의 경치에 신경을 쓸 여유 따위는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묵향은 무감각한 어조로 대꾸했다.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꽤나 색다른 경치로군.”
“무슨 대답이 그래요?”
“경치는 됐고, 북명신공을 요구한다는 녀석들은 어디에 있지?”
“여기서 기다리면 올 거예요.”
옥화무제의 대답에 묵향은 그제야 그녀가 자신을 이리로 안내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초조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옥화무제와는 달리, 묵향은 무표정한 눈길로 호수만을 응시하고 있다. 딱히 경치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시선을 그쪽으로 돌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은 경치이지 않나?』
갑작스럽게 들려온 발해어. 옥화무제는 그게 무슨 소린지 몰랐지만,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묵향은 상대 가 뭐라고 말한 것인지 알아들었다. 오래 전에 북명신공을 읽어보겠다는 일념 하에 발해어를 공부한 적이 있었으니까. 물론 발음은 어눌한 그였지만, 상대의 말을 알아듣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었다.
묵향은 멀리 바위 위에 앉아있는 한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 그가 거기에 앉아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건 겉보기로는 꽤나 젊어 보 이는 인상이었다. 한 20대 후반쯤? 그것도 길게 기른 수염 때문에 그렇게 보인 것일 뿐, 만약 수염이 없었다면 20대 초반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얼굴 이었다.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묵향은 만통음제의 대제자 맹파천을 떠올렸다. 얼굴 모습은 달랐지만, 전체적인 생김새는 대략 그와 비슷했던 것이다. 물론 겉모습은 맹파천과 비슷한지 몰라도, 그가 풍기는 기운은 완전히 달랐다. 사내를 노려보는 묵향의 가슴은 언제부터인가 흥분으로 인해 세차게 뛰고 있었다. 아무리 느끼려고 해도 사내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엄청난 고수였다. 옥화무제의 말은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사내가 바위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아름답지 않나?」
꽤나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였지만 그의 목소리의 크기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괜찮군요.』
어눌한 발음이기는 해도, 묵향이 발해어로 대답하자 사내의 얼굴에 잠시 이채가 어렸다. 설마 발해어를 알아들고, 또 말할 거라고는 기대도 안했었 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사내의 눈빛은 마치 놀잇감을 찾아낸 아이의 그것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사내가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이런! 멋을 모르는 녀석이로구먼. 많은 댓가를 치루고 나서야 얻은 경치라네. 그렇게 대충 훑어볼 것이 아니지.』
사내가 조금 더 가까워지자, 옥화무제는 날아갈듯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 순간 옥화무제는 커다란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묵향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사람이 바로 교주에요.”
그녀의 말은 곧바로 통역사를 통해 사내에게 전달이 되었다.
『북명신공은?』
“이 사람이 가지고 있어요. 나는 약속을 지켰으니 해혈을 부탁드려요.”
해혈이라는 말에 묵향의 눈썹이 꿈틀했다. 설마 그녀가 제압당해 있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이곳은 자신을 잡기 위해 만들어놓은 함정이고? 하지만 묵향은 옥화무제를 향해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았다. 함정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저런 가공할 만한 고수를 맞이하여, 속 시원하게 싸워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만족했다.
옥화무제의 수하가 통역을 마쳤음에도, 사내는 전혀 해혈을 해줄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내는 차갑게 비웃으며 이죽거렸다.
『살려줄 걸 기대했다니, 정말 되놈들은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저놈이 살려줄 생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태상문주님.”
그 정도는 통역해 주지 않아도, 사내의 표정만 보고도 알 수 있었던 옥화무제다. 하지만 그녀는 감히 발작하지 못했다. 자신을 바라보며 비웃는 사내 를 향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원독어린 시선으로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실력 차이가 워낙 심하게 나다보니, 도저히 보복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신은 이곳에 남아 있다가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고해 주도록 하세요.”
수하에게 명령을 내린 후, 옥화무제는 미련 없이 뒤로 돌아섰다. 그녀는 교주가 사내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만에 하나 교주가 이길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저 사내놈과 공모하여 이곳으로 끌어들인 자신을 교주가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저들에게 자비를 구하느니 한 달도 채 남지 않는 생명이기는 하 지만, 그 시간을 잘 활용하는 게 훨씬 생산적이리라. 무엇보다 자신의 딸과 손녀를 만나 유언이라도 한 마디 남겨 줘야 할 게 아니겠는가.
산 아래쪽을 향해 전력으로 달리는 그녀의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화를 부른다는 말, 그리고 과욕은 언제 나 뒤끝이 좋지 못하다는 말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북명신공에 욕심을 부린 자신의 잘못이었다.
옥화무제가 떠난 후, 묵향은 사내에게 정중하게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고인(人)을 뵙습니다. 저는 천마신교라는 문파를 이끌고 있는 묵향이라고 합니다.」
발해인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대신, 몸을 호수쪽으로 빙글 돌렸다. 자신의 등판이 고스란히 상대에게 드러난 상황임에도, 발해인은 전혀 신경 쓰 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리라. 그는 예의 그 부드러운 저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네가 북명신공이라는 무공을 익혔다는 게 사실이냐?』
『익히지는 못했고, 도움은 받았습니다.』
묵향의 대답에 그는 허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발해가 멸망한 후, 조국이 멸망한 후, 조상들의 혼이 깃든 무공이 이대로 절전되어 버리는 것이 안타까웠던 나는 후인들을 위해 열두 곳에 작은 씨 앗을 뿌려뒀었느니라. 그런데 그 흔적을 보고 찾아온 것이 이 검의 주인이었던 놈과 너 뿐이라니. 참으로 허망하구나.』
그 말을 듣고 묵향의 시선은 발해인이 허리에 차고 있는 검쪽으로 움직였다. 저 검의 주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하지만 고풍스런 검의 손잡이와 검집 을 보는 것만으로, 검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유추해 낼 수가 없었다. 아니, 검이 어떤 형태의 검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뜬금없는 방법을 쓰실 게 아니라, 직접 제자를 키우시지 그러셨습니까?
『발해가 멸망당하던 날, 내 제자들은 모두 다 죽임을 당했느니라. 만인적(萬人敵)이 가능한 절정의 무인들이었으나,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적도 들을 감당할 수는 없었던 게지.』
『무모했군요. 적의 기세가 그토록 거셌다면, 잠시 후퇴하여 훗날을 도모했으면 될 게 아니겠습니까?』
주인에게 얽매인 자들에게는, 그런 선택권이 없느니.
발해인의 대답을 듣고서야 묵향은 그의 제자들이 발해의 장수들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봤다. 그것 외에 다른 해답이 없었다. 왕이 있고, 그 왕을 지켜 야만 되는 입장이라면, 적의 기세에 맞대응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을 테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그리 많이 흐른 것도 아니구요. 귀하의 능력이시라면 발해의 유민들을 다시금 끌어 모아 새로운 제국을 건설 하는 것도 꿈은 아닐 듯 싶습니다만……… ·J
『나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노라. 발해를 멸망시킨 주범이 바로 나였으니까.』
발해인의 대답에 묵향은 대꾸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직접 발해를 멸했다고? 그렇다면 방금 전에 말했던 제자들도 그 자신이 직접 죽였다는 뜻인가? 묵향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발해인의 말이 이어졌다.
발해를 멸망시킨 것이 자신이라는 과거를 떠올리는 순간 발해인의 눈빛이 광기에 물들기 시작했지만, 그의 시선이 호수쪽을 향해 있었기에 묵향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지 않은가?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호수…………. 하지만 원래부터 이런 호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네. 예전에는 이곳에 만년설 만이 덮여 있었지. 이 호수는 백두산이 대폭발을 일으키며, 요동과 만주일대를 초토화시킨 후에 만들어진 것이지.』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말이 계속될수록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기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이미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발 해인. 그의 음성은 분노에 가득 차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수십 척에 달하는 화산재가 쌓인 상황에서는 농사는 물론이고, 가축을 키우는 것조차 불가능했지. 아무리 강대한 제국이라 해도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네.』
그렇다면 그것을 기회로 반란이라도 일으키신 겁니까?
묵향의 질문에 사내는 갑자기 미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왠지 허탈하면서도 서글픈 느낌의 부자연스런 웃음소리. 그는 한참동안 웃음을 터트리다 갑 자기 정색을 하며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구먼. 하지만 그건 아닐세. 내가 발해를 멸했다는 건, 그런 뜻이 아니라 화산을 내가 터뜨렸다는 것이었다
네.
그 말을 묵향은 믿기 힘들었다.
『화산을 터뜨리셨다구요?』
『나는 오랫동안 풀리지 않고 있던 벽을 넘기 위해 이곳에서 매일 목욕재개를 하며 수련에 힘쓰고 있었지. 성산(聖山)으로 추앙받는 이곳이야말로 몸 과 마음에 쌓인 묵은 때를 벗어버리기에 최적의 장소가 아니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한순간에 모든 게 이뤄져 버렸다 네. 온 몸에 쌓여있던 탁한 기운이 일순간에 빠져나가는 것 같았지.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다네. 그저 내가 기억하는 것 은, 눈을 떴을 때 내 눈앞에 화염지옥이 펼쳐져 있었다는 것뿐.』
정말이지 황당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묵향이 아연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발해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조국을 멸망시킨 죄인이 무슨 염치로 후인들을 양성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발해의 무공을 12조각으로 나눠 요동 벌판 여기저기에 안배해 놨다네. 혹, 그것이 후배들이 성장함에 있어서 약간의 도움이라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일세.』
『지역을 잘못 선택하셨군요. 동이족이 거주하는 곳은 요동이 아니라, 더 아래쪽인 반도(半島)입니다. 그들은 고려라는 나라를 세우고……………』
하지만 묵향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발해인이 냉소적인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고려 따위가 어찌 내 조국이 될 수 있단 말이냐! 놈들은 되놈들과 야합하여 대고구려 제국을 멸망시킨 역적들의 후손일 뿐이다. 그런 쓰레기들에게 대발해의 정기가 이어지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발해인은 싸늘한 눈빛을 묵향에게로 던지며 말을 이었다.
『물론 그 정기가 되놈 따위에게 이어지는 것은 더더욱 안 될 말이지. 네 자질이 뛰어나다만, 결코 탐해서는 안 될 보물을 지니고 있는 게 네놈의 죄 다. 발해의 무공을 익히게 된 네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거라.』
묵향으로서는 억울한 노릇이었다. 북명신공은 익히지는 못하고, 겨우 참고만 했을 뿐이다. 비급에 기록된 내용 자체가 워낙에 빠진 부분들이 많았기 에, 그것만을 가지고 무공을 익힐 수 있다는 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죽했으면 북명신공의 몇몇 부분만으로 뇌전신공이나 화염신공으로 개악하는 짓까지 저질러야 했을까. 하지만 광기에 이글거리는 발해인의 눈빛을 봤을 때, 자신의 변명이 먹혀 들어갈 리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싸우 는 수밖에.
묵향은 천천히 발해인과 자신과의 거리를 쟀다. 그때까지 묵향의 얼굴에는 전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억지가 너무 심하십니다. 저는 오랑캐 따위가 만든 무공은 익힌 적이 없습니다.』
『오, 오랑캐 따위?』
묵향의 도발이 제대로 먹힌 모양이었다. 발해인이 분노를 터뜨린 그 순간, 묵향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너무나도 빨리 움직였기에, 잠시 잔 상이 그 자리에 남아있어 상대가 방어하기에 곤란하게 만드는 절정에 달한 이형환위의 수법이었다. 묵향의 허리에서 뽑힌 검이 무시무시한 파동을 일으키며 발해인을 휩쓸어갔다.
『허허, 역시 되놈들의 속은 음흉하기 짝이 없구나. 혹시나 하여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려고 했던 게 내 잘못이로다. 하기야,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입맛이 씁쓸하구나.
검의 궤적에서 벗어난, 먼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묵향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발해인이 어떻게 자신의 공격권에서 빠져나갔는지 보지도 못했다. 검이 허공을 벤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처음에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공격권을 넓혔음에도 발해인의 옷깃조차 베지 못한 것이다.
헛소리하지 마라. 처음부터 대화 따위는 할 생각도 없었으면서. 어차피 나와 싸울 생각이었잖아? 점잖은 척, 개소리하지 말고 칼을 뽑아라.』 자신을 다잡기 위해 오히려 더욱 강경한 어조로 상대를 도발하는 묵향. 발해인이 감정 조절을 제대로 못하는 것을 잘만 이용한다면, 어쩌면 기회가 올지 모르기에 계속 도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이!』
순간 무시무시한 분노를 표출하는 발해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너무나도 강했기에, 묵향 같은 초고수도 마음 한편이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그럴수록 묵향은 검을 꽉 움켜쥐었다. 묵혼검이 부서진 후, 새롭게 장만한 검이다. 보검 축에 들어가는 좋은 검이기는 했지만, 과거 그가 쓰던 묵혼검 에 비한다면 훨씬 뒤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교주의 위신에 어울릴 정도의 보검이라는 소리를 들을만한 검이기는 해도, 알맹이보다는 껍데기에 좀 더 신경을 쓴 검이라는 게 문제였다.
묵향은 차라리 교주의 신물인 화룡도(龍刀)를 차고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마저 들었다. 실력 차가 존재하는 만큼, 무기로라도 덕을 볼 수 있는 방법도 괜찮았으니까.
비록 묵혼검에 비한다면 허접한 검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검을 쥐고 적을 겨누고 있자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끈적끈적하게 솟 아오르고 있던 공포감이 서서히 사라져간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이 정도의 공포감을 느끼게 했던 인물이 과연 누가 있었던가? 묵향은 검의 손잡이를 꽉 움켜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 나는 할 수 있어. 꿈속에서조차도 이런 기회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렸었잖아.’
더 높은 경지로 올라설 수 있는 깨달음. 그 깨달음은 대부분 생(生)과 사(死)가 갈리는 찰나의 순간에 찾아온다. 발해인은 생사결을 나누기에 충분하 고도, 넘치는 인물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너무 넘치는 게 문제였지만………………
묵향은 온 몸의 기를 끌어올렸다. 전신이 터져나갈 듯 팽창했다. 그의 검은 마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듯 검강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모습이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발해인의 표정에는 그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저 두 눈만이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을 뿐.
죽어랏!」
번쩍 하는 순간, 묵향의 몸은 이미 발해인의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그의 검은 엄청난 강기를 흩뿌리며 적의 요혈을 향해 치고 들어가고 있었 다. 바야흐로 최강의 고수들끼리의 결전이 시작된 것이다.
장백산을 물어물어 찾아가며 단거리 공간이동을 하고 있는 아르티어스, 달려가는 것에 비한다면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속도임에는 틀림없 었지만, 마나의 소모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삽질’이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미친 짓임에 틀림없었다. 아르티어스가 지금 이렇게까지 무리를 하고 있 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들놈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나기 힘들면 힘들수록, 더욱 보고 싶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리라. 물론 자신을 버리고, 홀로서기를 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살짝 있었고.
이렇게 죽어라 공간이동을 하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앞쪽 어딘가에서 갑자기 엄청난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오잉, 여기에도 드래곤이 사나…?”
드래곤이 이 세계에서 살고 있을 리가 없다. 만약 살고 있었다면 아르티어스가 이 세계에 도착함과 동시에, 그가 찾아왔을 것이다. 드래곤이 자신의 존재감을 의도적으로 숨기지 않는 한, 다른 드래곤들이 그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만큼 드래곤의 존재감은 강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르티어스가 드래곤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의 존재들이 저 먼 곳에서 싸우고 있었다. 이때, 아르티어스는 그 강력한 존재감에 가려 져 있는 미약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안 돼!”
아르티어스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 존재감은 바로 아들놈의 것이었으니까. 아마도 아들놈은 저 앞 어딘가에서 엄청나게 강 한 존재와 싸우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아르티어스는 엄청난 마나가 느껴진 그 위치를 목표로 삼아, 곧바로 장거리 공간이동을 감행했다. 위험하기는 했지만, 이건 지금 그가 선택할 수 있 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왜냐하면 엄청난 존재감으로 미뤄봤을 때, 자신의 아들놈은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아무리 싸우고 싶다고 해도, 상대를 좀 가려가면서 싸워야지!’
묵향과 발해인의 싸움이 진행되고 있는 하늘 위로 아르티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작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아르티어스가 도착했을 때쯤에는, 이 미 싸움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상황에까지 치닫고 있었다.
입으로 검붉은 핏줄기를 뿜으며 튕겨져 날아가고 있는 묵향. 그의 손에는 겨우 두 치 정도의 길이밖에 남아있지 않은 검이 들려있었다. 방금 전까지 만 해도 그 검에서는 강맹한 검강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었지만, 지금은 그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들과 싸우고 있는 상대가 강하다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들이 이토록 일방적으로 박살나고 있는 중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 던 아르티어스였다.
“아들아!”
묵향을 부르는 순간, 아르티어스는 날아가는 아들과의 거리를 급격히 좁히고 있는 호비트 한 마리를 발견했다.
“이익! 라이트닝 볼…, 안 돼!”
그놈을 향해 마법을 시전하려던 아르티어스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 비명을 질렀다. 육안으로 포착하기도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접근해 들어가는 상대. 그의 검이 화려한 궤적을 그리며 움직인 순간, 묵향의 몸은 수십 토막으로 잘려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크아아악! 안돼!”
사방에 흩뿌려진 시뻘건 피와 육편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르티어스는 오열했다. 자신이 조금만 더 일찍 왔다면, 그랬다면 아들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까지 불안했고, 아들놈을 만나기 위해 서두르고 싶었는지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이렇게 죽다니… 이렇게…………. 아냐! 이렇게 허무하게 널 보낼 수는 없어. 이렇게는 아들아! 내가 무슨 댓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너를 살려낼 테 다. 아버지는 그렇게 보내드릴 수밖에 없었지만, 너는…………….”
그때 멍하니 중얼거리던 아르티어스의 뇌리를 번쩍 하고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건 아들놈을 되살리려면, 영혼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영혼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살려낼 수가 없다. 물론 신화나 전설에서는 죽음의 강을 건너가서 영혼을 데려오기도 했지만, 사실 그건 불 가능했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절대로 영계(靈界)로 들어갈 수 없으니까.
아르티어스는 황급히 품속을 뒤졌다. 영혼을 담을 만한 그릇 같은 게 있나 찾기 위해서였다. 이때 그의 손에 술병 하나가 잡혔다. 급히 술병을 꺼낸 아르티어스는 마개를 열고 내용물을 쏟아버렸다. 그런 다음 그 병을 들고 뭔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아들놈의 육체를 이탈하여 영계로 날아가려는 영혼을 붙잡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영적인 부분은 드래곤의 전공이 아니었고, 설상가상으로 아르티어 스는 그쪽 방면으로는 관심조차 없어서 공부한 것도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급한 김에 유령과 같은 정신체 몬스터들을 제압하는 마법을 시전했 다.
고오오오오……
그 순간 하늘 위에서 흰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점점 한곳에 집중되며 더욱 밝아졌다. 아르티어스의 마음은 급했다. 유령이 이 마법을 당하면 고통에 찬 소름끼치는 비명을 질러댔겠지만, 지금 아들의 영혼은 그것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더 이상 영혼에 피해를 입히기 전에 봉인해야만 했다.
아르티어스의 인도에 따라 밝은 빛을 뿜어내는 구체는 빠른 속도로 날아와 곧바로 술병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아르티어스는 영혼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다섯 겹의 결계를 친 다음, 방금 전에 영혼을 제압하는 데 사용했던 마법을 해제했다. 겨우 아들놈의 영혼을 봉인하는데 성공을 하 긴 했지만, 아르티어스는 걱정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방금 전의 그 마법으로 인해 영혼이 너무 큰 손상을 입은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 이다.
“젠장, 정신계 마법도 좀 배워놓을 걸. 그런 건 절대로 쓸 일이 없다며 등한시 했더니, 결국 이 꼴이 되는군.”
자신이 배운 정신계쪽 마법이라고는, 예전에 아버지의 강압으로 인해 익힌 몇 가지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 마법들은 이런 목적에 사용하는 게 아니다 보니, 아르티어스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 것이다.
이런 아르티어스의 모습을 흥미진진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인물. 그는 바로 묵향을 이 지경으로 만든 발해인이었다.
『허~, 오늘은 정말 운이 좋은 날이로군. 내가 어제 무슨 꿈을 꿨더라? 되놈들은 대가리 수만 많은 멍충이들이라고 지금껏 생각하고 있었건만, 오늘 에야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겠구나. 이렇게 굉장한 고수를 보게 되다니……………』
그렇다. 그가 놀라고 있는 것은 방금 전에 자신과 대결했던 인물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 나타났다는 데 있었다. 시대를 초월한 강자가 한 명도 아니
고, 두 명씩이나 존재할 줄이야. 그것도 그 둘이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일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던 그였다. 절대의 경지에 올라선 이후, 그는 지금껏 고독에 파묻혀 살아왔으니까. 절대자와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은, 상대 역시 절대자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수하가 되거나, 아니면 서로 죽고 죽이는 원수가 될 뿐이다. 수준이 엇비슷하면 친구가 될 수 있지 않느냐고?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한 산에 호랑이 가 결코 둘씩이나 존재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이제 다 끝났느냐?』
회한에 젖어 있던 아르티어스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들을 이 지경으로 만든 놈이 서 있었다. 자신이 아들놈의 영 혼에 정신을 팔고 있는 틈을 이용해 도망쳐도 쫓아가서 죽일지 말지 고심할 판에, 감히 저토록 오만한 눈빛으로 서 있다니.
하는 행동으로 보아 술사(術)인 듯 한데, 방금 전 뿜어져 나온 엄청난 기운으로 짐작해 본다면, 너 또한 보통은 넘어가는 인물임에 틀림없을 터. 오늘은 정말 운이 좋은 날이로구나. 자, 준비하거라. 그 정도는 기다려 줄 테니까.』
물론 그가 한 발해의 언어를 아르티어스가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명확히 전달되었다. 도망치지 않고, 가만히 서 있 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했으니까.
“크흐흣, 감히 도망치지도 않고 나에게 시비를 걸다니. 하기야, 네놈을 살려줄 생각도 없었다. 목숨에 대한 댓가는 목숨이니까.”
순간, 아르티어스의 몸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아왔기에 이제는 삶이라는 것에 대해 염증까지 느끼고 있던 발해인. 그는 이 세상에서 무감각해진 자신에게 더 이상 놀라움을 줄만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사람이 거대한 황금빛 괴물로 변하는 모습을 보며 기절초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하니 사람이 서책에서만 봤던 용과 같은 영물로 변하는 모습을 현실에서 보게 될 줄이야…………. 덕분에 아르티어스는 드래곤으로의 현신을 안전하게 완료할 수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거대한 황금빛 괴물. 마치 무사가 두꺼운 금속갑옷을 입은 것처럼, 황금색의 철갑을 온몸에 두른 듯이 보인다. 전설상의 용에 비해서 훨씬 더 위압적인 형상을 하고 있다.
용인가?
발해인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아르티어스의 본체를 바라봤다.
『허허, 지금까지 들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생겼군.』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간 아르티어스는 곧바로 발해인을 향해 일격을 날리려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손에 영혼을 담은 술병을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드래곤의 커다란 손에 비한다면, 술병의 크기는 너무나도 작았다. 꼭 쥐고 있다고 해도, 어디로 새어 나가버릴지 알 수가 없을 정 도로.
아르티어스가 주문을 외우자, 타이탄들이 드나드는 곳 같은 공간의 빈틈이 생겨났다. 공간의 빈틈은 장시간 물건을 저장하는 데는 문제가 많았지만, 싸움이 끝날 동안 보관하는 것 정도야 문제될 게 없었다.
아르티어스는 공간의 빈틈에 술병을 던져 넣은 다음, 묵향의 육편 조각도 함께 넣었다. 육체를 재구성하는데, 혹시나 아들의 육편이 필요할지도 몰 랐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공간의 빈틈은 차원이 틀린 세계이기에, 넣어둔 물체가 부패하거나 썩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이런 목적으로 쓰기에는 안 성맞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쿠오오오오~~!!
드래곤 로어(Dragon Roar).
드래곤의 포효소리는 모든 생명체에게 두려움을 안겨준다. 드래곤의 포효소리 한 번에 아예 굳어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식은땀만 삐질거리는 게 거 의 모든 생명체의 공통사항이었다. 하지만 발해인은 오히려 전의를 다지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에게 드래곤의 포효소리 따위는 전혀 영향을 미 치지 못했던 것이다.
드래곤 로어를 견뎌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도 인간이었다. 인간으로서 무공이 최고봉의 위치에 올라섰다고 하지만, 드래곤이 지닌 무시무시한 공격력에 비한다면 어른과 어린애의 격차보다도 더욱 심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아르티어스는 손쉽게 놈을 죽여 아들놈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거 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게 완전한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아르티어스는 같은 드래곤과 싸운 적도 있었고, 타이탄과 싸워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맹세코 이렇게 맨몸으로 덤벼드는 사람과 일대일로 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원수 같은 호비트놈은 드래곤이나 타이탄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지만, 대신 눈으로 쫓기도 힘들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이런, 빌어먹을!>
호비트 따위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한 방이면 끝이라고 생각했던 아르티어스였지만, 그는 곧이어 그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호비트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데다, 덩치마저 작다 보니, 공격을 퍼부어도 맞추기조차 힘들었다.
눈알이 핑핑 돌 만큼 빠르게 움직이던 호비트가 갑자기 아르티어스의 몸에 바짝 붙어서는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녀석이 뽑아든 거무틱틱한 광택 을 띈 검은 표면이 매끄럽지 못하고 우둘투둘했다. 그것은 검 날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대장간에서 만들다가 실패해서 버린 듯한 검을 들고 나온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흑묵검이 호사가들이 중원 최고의 검으로 꼽는 보검이라는 사실을 아르티어스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검의 표면이 매끄럽지 못한 것은, 워낙에 검이 단단해서 더 이상 가공할 방도를 찾아내지 못했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흑묵검은 10년 이상을 숫돌에 갈았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갈리지 않았다고 전해질 정도의 전설적인 보검이었다. 강기를 이용하여 검의 파괴력을 높일 수 있는 상승의 검술을 익힌 검객에게 있어서 흑묵검은 최고의 동반자였던 것이다.
순식간에 품속으로 파고 들어 공격을 퍼붓는 발해인. 워낙에 가깝게 접근해 있다 보니, 공격하기도 용이하지 않았다. 손과 발을 이용해서 버둥거려 보았지만, 워낙에 재빨라서 녀석의 움직임을 따라잡기도 힘들었다. 즉, 놈은 아르티어스의 거대한 몸체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찰나의 빈틈이라도 찾아내면 곧장 황금빛 몸체에 검을 휘둘러댔다.
슈슈슈슉!
묵향과 지내면서 외갑(外甲)에 마나를 집어넣어 강화하는 비법을 깨닫지 못했다면, 초전에 아르티어스가 도리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를 만큼 놈의 공격은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발해인의 무시무시한 공격을 아르티어스는 버텨냈다. 마나를 받아들여 더욱 강화된 그의 외갑으로.
<크아악! 이런 망할 자식! 좀 떨어져라.>
드래곤처럼 덩치가 크면서, 강력한 화력을 가진 존재들은 근접전투를 선호하지 않는다. 적과 적당한 거리를 둔 상태에서, 무지막지한 화력을 퍼붓는 싸움에 익숙했다.
물론 아르티어스는 드래곤치고는 근접전투 경험이 많은 편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토록 빠르게 움직이며, 몸 가깝게 다가오는 적과 싸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슬로우 마법까지 걸어봤지만, 놈의 움직임은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개가 벼룩을 상대하기 어렵듯, 그렇게 아르티어스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쉽게 무너질 아르티어스가 아니었다. 실전 경험이라 면 그도 과할 정도로 쌓은 드래곤이었으니까.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아르티어스는 곧장 하늘 저 위쪽으로 공간이동을 시도했다. 우선 놈과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날개로 날 아오르는 것도 한 방법이기는 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날개는 상대적으로 매우 취약한 부분이었고, 놈의 능력이라면 쉽사리 찢어발길 수 있다는 것을 감안했던 것이다.
공간이동을 하고 보니 놈과의 거리는 무려 2킬로미터. 이 정도라면 느긋하게 브레스를 준비해서 내뿜을 수 있는 거리였다. 목표는 저 밑에 있는 호 비트 놈. 산만한 덩치의 드래곤이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자 당황해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중이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숨을 깊이 들이마시기 시작하던 아르티어스의 인상이 팍 일그러졌다. 갑자기 사라진 용이 어디로 갔는지 찾지 못해 두리번거 리던 발해인과 시선이 마주쳤던 것이다. 하늘 저 멀리 떠있는 황금빛 용을 발견한 그의 입꼬리가 살짝 말린다. 즐거운 모양이다.
훗, 도망갔다는 게 겨우 거기냐?』
가소롭다는 듯 비웃음을 짓는 발해인. 곧이어 그의 몸이 하늘 위로 쏜살처럼 날아올랐다.
날아오르는 상대가 방향 전환을 하지 못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브레스가 먹혀들 리가 없다. 브레스를 쏨과 동시에 방향 전환을 하여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잘 아는 아르티어스였기에 브레스를 내뿜는 것을 일단 포기했다. 3번밖에 쏘지 못하는 만큼, 최대한 아껴둘 필요가 있었던 것 이다.
아르티어스는 놈이 하늘을 나는 상태에서, 방향 전환이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우선 시험하기 위해 마법공격을 시작했다. 놈이 방향 전환을 못하고 직 선으로 날아온다면 그 마법을 몽땅 다 뒤집어 쓸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후속타로 브레스를 먹여줄 생각이었다.
고오오오, 슈슈슉!
하지만 놀랍게도 놈은 마치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움직이며 아르티어스의 마법공격들을 모두 피해냈다. 지상에서처럼 공중에서도 놈의 기동력은 발군이었던 것이다.
〈허어, 호비트 따위가 저럴 수 있다니! 하기야 저 정도 실력이니, 아들 녀석이 그렇게 된 거겠지만……………〉
발해인과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들었고, 결국 아르티어스는 다시 한 번 공간이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놈과의 근접전은 자신이 압도적으로 불리했 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이후, 한동안은 똑같은 방식의 전투가 계속되었다. 적과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 10킬로미터 정도 공간이동 한 후, 그곳에서 엄청난 마법공격을 퍼 붓는다. 그러다가 적이 가깝게 접근하면 또다시 공간이동…………. 마법에 능한 드래곤들이 흔히 쓰는 공격 방식이기는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마나의 소비가 너무 크다는 점이었다.
저렇게 기동력이 뛰어난 적을 상대로 공방전을 펼칠 때는 정령왕을 불러내어 함께 싸우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아쉽게도 이곳에서는 정령왕을 소환할 수가 없었다. 목표를 추격하여 타격하는 계통의 마법들은 화력이 약해 놈의 방어막을 뚫을 수가 없었고, 강한 마법은 미꾸라지처럼 피해버리 니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인 것이다.
물론 그건 상대 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실컷 쥐어터지며 거리를 좁히면 갑자기 뿅 하고는 사라졌다가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 모습을 드러내니 말 이다. 상대가 너무나도 얄미워 머리통 위에서 김이 뿜어져 나오지 않는 게 신기한 지경일 것이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끝나갈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아르티어스가 드래곤 하트 속에 보유하고 있던 마나의 양이 별로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자 각한 다음부터였다. 본체인 상태를 유지한 채 계속된 공간이동이 그의 예상보다 더욱 심한 마나의 소모를 유발했던 것이다.
마나의 소모를 걱정한 아르티어스가 멈칫한 그 순간, 발해인은 아르티어스의 몸 가까이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퍼퍼퍼펑!
그와 동시에 쏟아진 가공할 만한 공격. 드래곤의 몸에서 1장(약 3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유지한 채 요리조리 움직이며 막강한 공격을 퍼붓는다. 거 리가 너무 가깝다 보니 아르티어스로서는 상대를 공격할 수단이 딱히 마땅치 않았다. 강한 마법을 사용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가까웠고, 또 너무 빨리 움직였다. 자신이 쏜 마법의 대부분이 자신의 몸에 명중하는 수모를 당한 아르티어스는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렇다고 체격이 작은 호비트 로 변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칼에 목이 떨어져 나갈 우려가 있었으니까.
<젠장! 젠장! 정말 미치겠구만!!>
상대가 이제는 목까지 타고 올라와 자신의 목에 칼질을 해대려고 하는 것을 보자 아르티어스는 어쩔 수 없이 또다시 공간이동을 하는 수밖에 없었 다. 발해인과 10여 킬로미터쯤 떨어진 허공 위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아르티어스, 드래곤 하트 속에 들어있는 마나도 거의 없어졌고, 놈을 공격할 방 법도 마땅치 않다.
‘저놈이 드래곤쯤 되는 크기였다면, 이렇게까지 상대하기가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상황이 여의치는 않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호비트따위에게 쫓겨서 도망친다는 게 싫었다. 더군다나 놈은 아들을 살해한 원수이지 않은가. 이때 문득 아르티어스의 눈에 하늘을 날고 있는 새들이 보였다. 공간이동을 할 때마다, 주위를 나는 새들을 관찰하는 것은 필수적인 사항이었다. 만 약 새떼 사이로 공간이동하는 날에는 자신이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할지라도 그날이 바로 자신의 제삿날이 될 가능성이 컸으니까.
‘공간 충돌?’
그 순간 아르티어스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가 막힌 착상. 그것은 바로 공간이동으로 인해 야기되는 최악의 사태인 공간 충돌이었다.
방법이 생각나자마자 자신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거리를 좁혀오는 녀석을 대상으로 아르티어스는 공간이동 마법을 시행했다.
‘대상은 저놈. 목적지는 바로 저곳!’
주문을 외우자 곧바로 마나가 발해인을 감쌌다.
만약 이곳이 아르티어스가 태어났던 세계였고, 저놈이 그곳에서 살고 있는 토종 호비트였다면 이런 간단한 함정에 빠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 만 상대는 마법이 뭔지도 모르는, 마법 쪽으로는 애송이가 아닌가.
상대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마법은 피하고, 약한 것 같은 공격은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강력한 방어막 으로 버텼다. 그렇게 했기에 아르티어스가 뿜어낸 그 엄청난 화력에도 불구하고, 거의 피해를 받지 않고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방법이 그의 생명을 옭죄고 있었다. 아르티어스가 시전한 것은 공격마법이 아니라, 공간이동 마법이었으니까.
아르티어스를 향해 날아오던 발해인의 몸에서 일순 희뿌연 빛이 뿜어나오는 듯 하더니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꽈꽈꽈꽈꽝!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천지연 안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아르티어스는 자신이 아닌, 발해인에게 공간이동 마법을 걸어 천지연 안에다가 날려버 린 것이다. 그 결과 발해인의 몸은 천지연 속으로 공간이동 되었고, 이미 그곳을 채우고 있던 물과 공간 충돌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런 경우는 드래곤이라고 해도 살아남기 힘들었다.
<휴우, 호비트 한 마리 해치우는 게 이렇게 힘들어서야……………>
아르티어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싸움이 끝난 후, 아르티어스의 몸 여기저기는 크고 작은 상처들로 가득했다. 아마 브로마네스가 자신을 봤다면, 에이션트급 드래곤과 사생결단을 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만큼 놈이 안긴 상처는 깊은 것이었다.
“허어…….”
겨우 승리를 쟁취하기는 했지만, 이번 싸움으로 인해 아르티어스는 호비트라는 존재에 대한 평가를 전면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련이라는 것을 통해 드래곤인 자신을 이토록 힘들게 만들 수 있다니. 그것도 타이탄 같은 마법병기를 동원한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수련으로 이룩한 힘만으로…. “육체라는 것이 단련하기에 따라서 얼마나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수 있는지 한수 배운 것 같군.”
하지만 감탄이나 하고 있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의 몸 상태는 이미 엉망진창이라, 어딘가 처박혀서 잠이나 자며 몸부터 회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그는 죽어버린 생명체를 되살려 보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 아르티엔이 죽었을 때도, 크게 슬프기는 했 지만 그를 되살리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다크를 되살리고 싶었다. 그 어떤 댓가를 치르 더라도!
일단 사체의 일부는 물론이고, 영혼까지도 확보해 놨다. 하지만 그것들을 이용해서 어떻게 아들을 되살릴 수 있는지 그는 몰랐다. 영혼과 육체를 우 선적으로 확보해 둔 것은 예전부터 주워들은 풍문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드래곤은 본질적으로 삶을 연장하는 것에 대해 무관심했다. 아버지 아르티엔도 만약 자신의 마법력을 잘만 이용했다면 죽음에 이르지 않았을지도 몰랐고, 어쩌면 되살아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는 겸허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지겨울 정도로 긴 삶을 사는 드래곤에게 있어서 삶을 연장하 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아르티어스는 자신이 살아왔던 세계로 돌아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여기 있어봐야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아왔던 세계, 마법이 고도로 발달해 있는 그 세계가 아니라면 이미 죽어버린 다크를 되살릴 수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우선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거대한 마법진을 그렸다. 몇 번씩이나 되는 시행착오를 거치며 여기까지 넘어온 만큼, 이미 시공을 초월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요령을 터득한 상태였다. 시간이 촉박한 만큼,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마법진을 다 그린다음, 아르티어스는 인간의 몸체로 변신했다. 드래곤인 상태로 시공간을 초월하려면 너무나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에너지 절약을 위해, 가급적이면 덩치를 줄일 필요가 있었다.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다가 사라지는 순간, 그 자리에는 인간으로 변한 아르티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으로 변한 그의 몰골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몸 여기저기에 난 크고 작은 상처들. 아르티어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회복마법을 시전했지만, 쉽게 낫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 상처는 본체 가 입은 것이었기에, 호비트를 치료하듯 그리 간단하게 치료될 성질의 상처가 아니었던 것이다.
트랜스포메이션 마법을 통해 모습을 바꾼다고 해서 상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즉, 치명상을 입은 상태에서 다른 생명체로 모습을 바꾼다고 해서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는 말이다.
아르티어스는 마법진의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다음 공간의 빈틈을 열어 속에 보관해 뒀던 술병과 묵향의 육편 조각을 꺼냈다. 이 세계의 공 간의 빈틈에 저장해 둔 물건을 저쪽 세계에서 꺼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공간이동 마법진을 구동시키기에 앞서, 새삼 주변을 한 바퀴 둘러봤다. 백두산 정상에서 아래쪽으로 보이는 광활한 경치. 예전에 살던 세계에 비해 경치가 그리 새로울 것은 없었지만, 자신의 생명까지 위협했을 정도의 존재가 이곳에 살고 있었다는 것만 해도 경이롭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브로마네스가 이 얘기를 들으면 부러워서 죽으려고 하겠지? 흐흐흣.”
곧이어 마법진에 새겨진 룬 문자들이 빛을 내뿜기 시작하더니, 마법진의 중앙이 밝은 광휘에 휩싸여갔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졌을 때, 그곳에서 아 르티어스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아르티어스에 의해 납치된 만통음제는 오늘도 진세의 끝자락이라고 생각되는 담벼락 앞에 앉아있었다. 그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은 거의 습관처럼 굳 어져 버린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탈출 방도들은 다 실행해 봤지만 단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는 매일 이 자리 에 앉아 멍하니 하늘과 땅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점심을 밖에서 먹겠다며 나간 대인이라는 놈은 그날 이후 행방이 묘연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어딘가 다녀올 데가 있어서 갔나?’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한 달째 돌아오지 않자, ‘그가 어딘가에서 죽어버린 거라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에 잠을 설칠 지경이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걱정이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인 자신을 제압할 정도로 강한 놈이, 어딘가에서 객사를 했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 아닌 가. 그렇게 내심 위안하면서도, 은근히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그가 죽어버렸다면, 자신은 계속 이 저택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으 니까 말이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만통음제가 그렇게 생각하며 대인이라는 놈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품삯을 받지 못한 하인 놈들이 몽땅 다 도망쳐 버린 것 이다. 안 그래도 며칠 전부터 장원 안의 분위기가 뭔가 뒤숭숭한 것을 그도 느끼기는 했었다. 하지만 장원을 탈출하는데 온 정신이 팔려있었던 만통 음제였기에, 그런 어수선한 움직임을 아예 외면해 버렸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만통음제는 겨우 오늘 아침에야 알 수 있었다. 아침 식사를 가지고 왔어야 할 하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장원 안을 뒤져보니 하인들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하인들이 도망을 치면서 품삯을 대신해, 돈이 될 만한 것들과 그들이 들고 갈 수 있 는 것들은 몽땅 다 들고 가버렸다. 당연히 창고 안에는 쌀 한 톨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허어, 이렇게 죽게 될 줄이야.”
외출을 하고 싶다면 뒷처리는 깔끔하게 해놓고 떠나야 할 게 아닌가. 남은 사람이 굶어죽게 만들다니.
“으아아아! 이 썩을 놈의 새끼. 나타나기만 해봐라. 죽여버릴테다!”
분노에 찬 비명성을 터뜨리는 만통음제.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이미 아르티어스가 쳐놨던 마법진은 해제되어 버렸다는 것을.
대자연은 한 곳에 기(氣)가 집중되는 것을 싫어한다. 그렇기에 인위적으로 한 곳에 기를 집중시켜 놓는 것은 매우 힘들었고, 그 양이 많을수록 난이 도 역시 더욱 올라갔다.
마법진 또한 그 법칙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 때문에 단시간만 구동하고 소멸되는 마법진에 비해, 영구적으로 구동되는 마법진을 만드는 게 훨씬 더 힘든 것이다. 영구적으로 가동되는 마법진의 경우, 그 마법진이 유지되기 위한 마나를 공급해주는 또 다른 마법진이 존재해야 했기에 그 두 가지 마법진이 얽혀 더욱 복잡한 문양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가 만통음제를 가둬두는데 사용한 마법진은 영구 마법진이 아니었다. 언제 장원을 버리고 떠날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호비트 한 마리 가두기 위해 영구 마법진까지 설치한다는 것은 굉장히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만통음제야 환장을 하겠지만, 아르티어스가 생각했을 때, 그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장백산에 무시무시한 고수가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준 옥화무제. 놀랍게도 장백산에 살고 있다는 고수는 그녀에게 치명상을 가했을 뿐 아니라, 중 원 최고의 고수로 추앙받던 묵향마저도 해치워 버렸다고 한다. 무림맹은 처음에는 그녀의 말을 믿지 못했지만, 옥화무제가 혈도의 파열로 인해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죽자 그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 이후, 무림은 발칵 뒤집혔다. 마교에서는 부교주를 중심으로 최정예 무사 집단이 장백산을 향해 달려갔고, 중원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장백산을 찾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들이 본 것은 천지가 개벽한 듯 처참하게 뭉개져 있는 격전의 흔적뿐이었다. 그 어디에도 교주나 발해인의 흔적이 발견되 지는 않았지만, 옥화무제의 말대로 교주가 죽은 것은 확실해 보였다. 발해인이라면 몰라도, 교주가 몸을 숨길 이유는 없었으니까.
1년여 정도를 기다리며 사태의 추이를 관찰하던 맹주는, 이윽고 교주의 죽음을 선포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황궁에도 알렸다. 교주를 원수같이 여기 던 해공공에게 보낸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대륙의 정세가 뒤흔들려 버렸다. 그 정보가 황궁에서 돌고 돌다가 몽골 쪽으로 새나갔던 것이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몽골과 송나라의 관계는 그리 나쁜 상태는 아니었다. 북진하던 유광세 대장군의 군세와 남하하던 몽골의 군세가 만난 후, 그들 은 그쯤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유광세 대장군으로서도 금나라를 멸하고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던 몽골군과의 전면전은 커다란 부담이었던 것 이다.
평화조약을 체결한 후, 테무진은 군세를 돌려 서역 원정을 단행했다. 중원인인 아버지의 안다가 살아있는데, 구태여 그의 조국인 송나라와 충돌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복할 땅이 없는 것도 아니고.
테무진이 송나라를 향해 정벌대를 파견한 것은, 마교 교주인 묵향이 죽었다는 소문을 접한 그 다음이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