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9권 12화 – 절망의 사막 (29권 끝)
절망의 사막
링카 성은 서쪽 대륙으로부터의 접경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 커다란 성이었다. 서쪽 대륙에서 생산된 희귀한 산물들이 사막을 넘어 들어왔고, 동쪽 대륙에서 생산 된 물자들이 서쪽 대륙으로 팔려나가는 출구이기도 했다.
엄청난 물자가 끊임없이 들락거리는 만큼, 그것을 노리는 날파리들 역시 꼬이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링카 성은 상업의 중심지이기도 했지만, 왕국 서쪽 방어선의 중추이기도 했다. 이 성에 주둔하고 있는 정규군만 해도 거의 1만에 다다를 정도였다.
라이는 이곳에서 사막을 건너온 대상(隊商) 무리를 구경할 수 있었다. 수백 마리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의 괴상한 동물들. 그리고 그 동물들의 등 위에는 커다란 짐 이 잔뜩 실려 있었다.
“저게 무슨 동물이죠? 정말 희한하게 생겼네요.”
“저건 낙타라는 짐승이야.”
“그런데 왜 저렇게 짐을 싣고 오는 거죠? 커다란 마차에다 실으면 훨씬 더 효율적일 텐데..
“왜냐하면 사막에서는 마차를 쓸 수 없기 때문이지.”
사막이 무엇인지 모르는 라이였기에 올란도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못 쓴다는 말입니까? 마차는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는데. 아, 혹시 사막이라는 곳이 밀림처럼 나무가 촘촘히 우거져 있는 곳인가요? 그럼 마차가 지나다니지 못할 수도 있겠네요.”
순간 올란도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설마 사막이 뭔지도 모르는 무식한 놈이 이 세상에 존재할 거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모래로 된 지역을 몰라? 온 천지가 모래로 뒤덮인…….?
“죄송합니다만, 모래가 뭡니까?”
올란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사막은 고사하고, 설마 ‘모래’라는 단어가 뭘 뜻하는지도 모르는 멍청이가 있을 줄이야. 모래가 뭔지도 모르는 놈에게 어떻게 사막이라는 지역을 설명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에효, 말을 말자. 그냥 모래라는 게 있어. 그 모래라는 걸로 뒤덮여 있는 땅이 사막이고 말이야. 여기 성문 밖을 나가면 실컷 볼 수 있을 테니까, 그건 그때 가서 얘 기하자.”
“알겠습니다.”
“어쨌거나 사막을 건너는 데는 낙타가 최고야. 그렇기에 저렇게 낙타 등에 물건들을 바리바리 싣고 움직이고 있는 거지.”
“낙타보다 더 좋은 건 없습니까?”
“물론 있지. 하지만 가격대비 효과라는 게 있지 않느냐. 사막을 건너는 데 있어서 낙타보다 좋은 것도 많지. 하지만 그런 놈들은 희귀할뿐더러 가격 또한 엄청나게 비싸서 저렇게 많은 숫자를 동원할 수 없다는 게 문제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라이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그 대표적인 게 바로 저놈이다.”
말을 하던 올란도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고, 라이는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하늘을 쳐다봤다. 그러자 커다란 박쥐같이 생긴 게 하늘을 날고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박쥐는 아니었다. 박쥐라고 보기에는 기이할 정도로 긴 목과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저, 저게 뭡니까?”
“와이번(Wivern)이라 불리는 몬스터다. 야생 와이번이 저렇게 하늘을 날고 있다고 하면 난리도 아니지. 저놈들은 다 자란 황소도 채가서 잡아먹을 정도로 엄청난 몬스터니까. 하지만 와이번을 길들이는 데 성공하기만 하면, 저렇게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게 되는 거지.”
“우와, 그럼 저게 길들인 와이번이라는 건가요?”
“그래, 군(軍)에서는 와이번을 길들여서 정찰용으로 아주 유용하게 써먹고 있지.”
“그럼 와이번이 오크처럼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올란도는 잠시라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 말뜻을 이해한 그는 도저히 참기 힘들다는 듯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핫! 세상에 이렇게 무식한 놈이 있을 줄은 내 꿈에서도 상상해 본 적이 없거늘. 너 광대 해도 먹고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겠다. 으하하핫.”
마치 비웃는 듯한 올란도의 웃음에 기분이 상한 라이가 황급히 질문을 던졌다.
“아니, 정찰용으로 쓴다기에 드린 말씀이었는데, 그렇게 비웃으시다니요. 그럼 말도 못하는 와이번이 어떻게 적의 동태를 살펴보고 돌아와서, 설명을 해줄 수 있 단 말씀이십니까?”
“너 저렇게 작게 보이니까, 와이번이 혹시 참새 새끼만큼 작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냐?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저놈들은 다 자란 황소도 잡아가는 몬스터란 말 이다. 저게 생각보다 엄청나게 커. 등에 안장을 놓고 사람이 탈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아…….”
라이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어떻게 와이번 위에 사람이 탈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원래 라이의 성격은 꽤나 단순하고 즉흥적인 구 석이 많았다.
하지만 노예로 잡히고 난 후, 그의 성격은 점차 변해가기 시작했다. 주위 환경을 최대한 파악하려 노력했고, 그런 자신의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식으로 말이 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이제 알겠냐?”
“예.”
“저렇게 와이번을 부리는 기사들을, 우리는 용기사(龍騎士)라고 부른단다. 적으로 만났을 때는 꽤나 까다로운 상대지. 왜냐하면 속도가 워낙 빨라서 활로 쏘아 잡 는다는 게 쉬운 게 아니거든. 더군다나 상대방은 하늘 위쪽에 위치해 있으니, 어지간한 활로는 저 위까지 화살을 날리지도 못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지.”
올란도는 그 후로도 거리를 지나치는 예쁘게 생긴 여자만 눈에 보이면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니, 빤히 쳐다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몇몇 여자들에 게는 윙크를 날리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낯부끄럽게도 손바닥에 뽀뽀를 해서는 여자 쪽으로 손을 뻗기도 했고.
“흥!”
물론 그런 수작에 차갑게 돌아서는 여자들. 그런 여자들의 싸늘한 대응에 라이의 얼굴이 다 화끈거릴 지경이었지만, 올란도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꿀꺽! 시간만 좀 있었어도…….”
군침을 꿀꺽 삼킨 그는 라이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역시 미녀들은 도도한 맛이 있어야 해. 그래야 정복욕이 더욱 불타오르거든. 안 그래?”
“그, 그렇죠.”
“올라가기 어려운 산을 정복했을 때 그 쾌감이 배가 되듯,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지. 도도한 미녀야말로 정복할 만한 가치와 재미가 있는 유일한 대상이 라고나 할까.”
‘하아, 세상 참 편하게 사는 사람이군.’
올란도라는 사람은 라이의 시각에서 봤을 때,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의 인물이었다. 어떤 때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처럼 보이다, 또 어떤 때는 완전 방탕아가 따로 없을 만큼 호색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분명한 건 라이가 그런 분위기에 점차 휘둘리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식당에서 자신의 처지가 노예라는 걸 다시금 곱씹었던 라이가 어느 샌가 올란도를 편하게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성문을 벗어나자마자 보인 것은 끝도 없이 펼쳐진 모래땅이었다. 올란도는 말에서 내리며 말했다.
“너도 내려라.”
올란도는 모래를 한 움큼 쥐어서 라이에게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이게 바로 모래라는 거다.”
라이는 모래라는 것을 한 움큼 쥐어봤다. 그러자 곧이어 하얀 알갱이들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신기하냐?”
“예.”
“이렇게 부드럽기 때문에 가느다란 말의 발굽은 푹푹 빠지게 되지. 말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걸어가는 게 최고야. 그래도 짐을 실을 수 있다 는 것만 해도 그게 어디냐.”
“그런데 왜 이렇게 덥죠? 엄청나게 더워요.”
“당연하지. 마법진의 경계 밖으로 나왔으니까.”
올란도는 알카사스의 도시들은 모두 다 마법진에 의해 보호된다는 것을 설명해 줬다. 거기에는 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도 포함되지만, 사막의 열기를 식혀주는 따 위의 사소한 부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성내의 날씨는 사막이라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로 온화했던 것이다.
뜨거운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열사의 사막.
“이게 진정한 사막의 기후라고 할 수 있지.”
올란도는 투구를 벗어 말 등에 맸다. 그런 다음 짐꾸러미를 뒤져 넓적하면서도 아주 긴 천 두 장을 꺼냈다. 그 중 한 장을 라이에게 건넨 다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 장을 머리에 휘휘 감으며 설명했다.
“천을 이렇게 머리에 둘둘 말아 햇볕을 막으면 한결 시원하지. 그리고 이 부분을 이렇게 올리면 모래먼지가 입이나 콧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도 있고 말이야.”
과연 그렇게 머리에 천을 감으니, 한결 견딜 만했다.
라이는 주위를 둘러봤다. 성벽 밖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 다 황량한 사막뿐. 드문드문 식물 덩어리들이 자라 있는 게 보이기는 했지만, 키가 너무 작아서 햇볕을 막 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황량한 땅도 있다니. 자신이 살던 북부보다도 훨씬 더 지독했다. 라이의 고향의 설원도 눈으로 덮인 끝도 없이 광활한 곳이었지만, 한여름에는 눈이 녹으며 수많은 생물들이 번성했다. 하지만 이곳은 겨울이 되어 날이 서늘해진다고 해도, 전혀 사정이 나아질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젠장. 이렇게 되면 도망은 어떻게 치지? 방법이 없잖아.’
라이가 인상을 팍 찡그리고 있을 때, 올란도는 말을 끌고는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어갔다. 라이는 그 뒤를 졸졸 따라가며 물었다.
“성 밖에는 사람이 안 사나요?”
“너 같으면 이런 곳에서 살 수 있을 것 같냐?”
“아뇨.”
“그럼 뻔한 걸 왜 물어봐? 사람은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지. 그런데 사막은 너도 보다시피 물이라고는 전혀 없는 곳이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두 사람은 계속 걸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목이 타는 듯 말라오기 시작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올란도가 편하게 대해줬지만, 물을 달라 고 하기도 뭣해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올란도가 갑자기 멈춰섰다. 올란도는 주머니 속에서 뭔가를 꺼내 입 안에 집어넣더니, 그 중 하나를 라이에게도 건네줬다. “이걸 먹어라.”
하얗고 작은 덩어리, 덩어리를 혀로 살짝 핥아본 라이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건 소금이 아닙니까?”
“그래, 소금이지. 사막에서 염분을 제대로 섭취하지 않으면, 탈진해 죽는 수가 있어. 그러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냥 먹어.”
“예.”
라이가 소금을 먹는 걸 보던 올란도는 말 등에서 물통을 벗겨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 다음 물통을 라이에게 건네줬다.
“너도 마셔라.”
안 그래도 목이 마른 데다가, 적은 양이라고는 하지만 소금까지 먹고 나니 타는 듯한 갈증에 목구멍이 쓰리고 아플 지경이었다.
“감사합니다.”
‘큭!’
물통을 입에 대고 마시려는 순간, 라이는 하마터면 뿜어버릴 뻔했다. 물맛이 이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왜냐하면 물맛이 이상하든 말든 마셔야 할 만큼 갈증이 심했으니까.
“표정이 왜 그래?”
“물맛이 이상해요.”
“술을 탄 물은 처음 마셔보냐?”
“아니, 물에 왜 술을 섞어서 마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야 물의 신선함이 더 오래가니까. 더군다나 사막의 밤 추위를 견디는 데는 술만 한 것도 없지.”
“추위요?”
라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계란을 깨서 바닥에 떨구면 곧바로 익어버릴 만큼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사막에서, 웬 추위?
“크크, 밤이 되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게다. 지금은 온 천지가 지글지글 끓는 것처럼 뜨겁지? 하지만 저 해가 떨어지고 나면, 그때부터는 얼어죽기 않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거든.”
물을 마신 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술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몸이 더욱 달아올랐고, 타는 듯한 갈증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혹시 술을 타지 않은 물은 없습니까?”
올란도는 당치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물에 술을 섞어 마시는 건 상식이야. 물은 금방 상해버리지만, 술을 섞은 물은 절대로 상하지 않지.”
말을 하던 올란도는 물통을 입에 처박고 몇 모금 더 마셨다.
“크~ 좋다. 술을 너무 많이 탔나? 입에 쩍쩍 붙는군.”
입가에 묻은 물기를 소맷자락으로 쓱 닦은 올란도는 물통을 말 등에 매며 라이에게 물었다.
“너, 혹시 여자하고 자본 적 있냐?”
올란도가 야릇한 표정으로 묻는 것에 비해, 라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잔거야 꽤 되죠.”
물론이다. 이곳까지 끌려오는 동안 여자노예들과 섞여서 갇혀 있던 경우도 많았으니, 수많은 여자들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밤을 함께 보낸 셈이다.
라이의 대답에 올란도는 전혀 뜻밖이었다는 듯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호들갑을 떤다.
“오호! 어리게 봤더니, 그게 아니었잖아. 이 녀석, 나와 같은 취향을 가진 놈이었군. 이거,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겠는데?”
자신이 올란도와 같은 취향을 가졌다는 말에 라이는 내심 욕설을 퍼부었다. 자신의 어디가 저런 변태 중년과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 보인단 말인가. “크크, 어차피 성에 도착하려면 꽤 걸릴 테니 잘 됐군. 네놈의 경험담이나 좀 얘기해 봐라. 아, 그리고 넌 어떤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하지? 늘씬한 애? 아니면 유방 이 큰?”
노골적인 올란도의 질문에 라이는 얼굴을 붉혀야 했다.
“무, 무슨 경험담이요?”
여자노예들과 한 방에 갇혀 있었던 적은 많았지만, 구속구에 온몸이 꽁꽁 묶인 채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그때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아무 생 각도 못했는데 말이다.
하긴 그러고 보면 야릇한 장면을 몇 번 보기는 했었다. 두려움에 질린 여자노예들이 참지 못하고 그냥 소변을 보는 바람에, 지린내 때문에 이맛살을 찌푸린 적은 있었다.
그러자 인상이 살짝 일그러지는 올란도.
“여자랑 많이 잤다며?”
“여기까지 끌려오기 전에 여러 여자노예들과 함께 비좁은 작은 방에서 같이 먹고 잤죠. 물론 쇠사슬에 묶인 채로요.”
“이런, 내 얘기는 그런 게 아니라 좀 더 원초적인 걸 말했던 거라구.”
올란도는 말을 하면서 한쪽 손의 손가락으로 원을 만든 뒤, 다른 손의 손가락으로 그 원안을 쑤시는 시늉을 했다.
“이런 거 말이야.”
“그게 뭔데요?”
라이의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에 올란도는 기가 막힌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젠장, 어쩐지 보기보다 경험이 많다 했지. 알고 보니 이거 순 맹탕 아냐.”
그제서야 라이는 올란도가 말하는 경험이라는 말의 뜻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라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라이는 지금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피가 끓어오르는 새파랗 게 젊은 나이다. 당연히 여자에 대한 호기심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다 보니, 여자에 대한 호기심을 가질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에이, 이러면 재미없는데. 너 그러면 여자애를 사랑해 본 적은 있냐?”
“아뇨.”
“쯧쯧, 정말 재미없는 인생을 살고 있었구먼. 지금부터 내가 여자에 대해 가르쳐 줄 테니 열심히 배워두도록 하여라.”
“저, 그런 거보다, 이런 사막에서 물이 떨어지면 어떻게 되죠?”
“그야 당연히 잘 말려진 육포가 되는 거지. 그런 사소한 것들은 신경 끄고, 내 얘기나 들어 봐.”
사막은 라이로서는 접해본 적이 전혀 없는 미지의 땅이었다. 탈출하는 데 있어서 사막이 그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것은 뻔한 사실.
그렇기에 라이는 올란도에게 사막을 횡단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이 뭐 없을까 물어봤지만, 올란도는 그저 여자 얘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올란도의 말솜씨가 워 낙 좋다 보니, 라이는 그가 하는 여자 얘기에 푹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했다.
광활하게 펼쳐진 새하얀 모래 사막 위로 해가 지며 온 세상이 붉게 물들자 정말이지 멋진 장관이었다. 하지만 라이는 그런 장관을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해 는 지고 있는데, 올란도는 걸음을 멈출 생각도 하지 않고 계속 걷기만 했기 때문이다.
“이제 곧 어두워질 텐데, 야영은 안 합니까?”
“햇빛이 쨍쨍 내리쬘 때 사막을 걸어봤으니 알 게 아니냐. 뜨거운 햇빛을 받으면서 걸을 만하더냐?”
라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그렇기에 사막에서는 밤에 걷는다. 그리고 낮에 쉬지.”
그 말은 밤새도록 걷겠다는 뜻이었다.
해가 지고 나자 주위는 언제 그렇게 찜통이었냐는 듯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올란도는 말 등에서 두꺼운 외투를 한 벌 꺼내어 라이에게 건네주며 말했 다.
“입어라. 낮에는 뜨겁지만, 밤에는 엄청나게 추워지는 게 사막의 특징이니까.”
과연 밤이 되자 주위가 꽁꽁 얼어붙는 것 같았다. “으, 추워.”
북방의 꽤 추운 지방에서 살았던 라이조차, 온몸을 벌벌 떨 만큼 매서운 추위였다. 올란도는 물통을 꺼내 몇 모금 마신 다음, 라이에게 건네줬다.
“자, 한 모금 마셔. 몸이 좀 풀릴 테니까.”
과연 낮에 마셨을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술기운이 몸속으로 퍼져나가자 추위로 잔뜩 굳었던 몸이 훈훈해져 오기 시작했다. 술이 들어가자 올란도의 얘기는 더욱 노골적으로 바뀌었다.
“내가 임무를 맡아 테라토 지방에 갔을 땐데 말이야. 그곳의 식당 주인 아줌마가 놀랍게도 굉장한 미인이더라구. 아주 색기가 좔좔 흐르더란 말이지. 그런 미인을 내가 가만히 놔뒀을 거 같냐? 당연히 수작을 걸었지. 꼴에 미인이랍시고 얼마나 튕겨대는지. 하지만 내가 포기할 거 같냐? 매일 찾아갔지. 내가 그 여자를 어떻게 꼬 셨는가 하면 말이지…….?”
라이는 올란도의 말을 듣는 척하며 밤하늘의 별자리를 슬쩍 살펴보았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기사 수업을 받았던 라이였기에 별자리를 보는 방법쯤은 이미 익 히고 있었다. 하지만 사막에서 본 별자리는 고향에서 보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라이는 내심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래서야 어떻게 탈출을 한다손 치더라도 이곳 사막을 벗어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라이는 한참 자신의 얘기에 흠뻑 빠져 열심히 떠들고 있는 올란도를 쳐다보았다. 썩 믿음은 가지 않지만 한동안 이 사람 옆에서 정보를 좀 더 얻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크크, 내가 누구냐. 사람들이 나를 발정난…,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결국 여자가 살포시 마음을 열더라 이거지. 그럴 때는 뜸들이면 안 돼.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될 수 있거든. 그날 밤 바로 쳐들어갔지. 가보니까 고 앙큼한 것이 이미 문을 살짝 열어놨더라 이거야. 흐흐흐, 참 기가 막혔었는데.”
라이는 다시 한 번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 꼬신 얘기만 벌써 몇 시간째인지……. 이런 호색한에 허풍쟁이 같은 올란도에게 뭘 배울 게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라이는 몰랐다. 그런 라이의 내심을 마치 읽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올란도가 자신을 살짝 훔쳐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낮에는 햇볕을 피해 차양막을 친 뒤 쉬고, 밤에는 줄창 걷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열심히 여자 얘기를 떠들어대던 올란도가 언제부터인가 말이 없 어졌다. 그만큼 지쳤다는 말이었다. 그건 라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급속도로 체력이 바닥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차양막을 친다 해도 잠을 자기 힘들 만큼 사막 위는 뜨거웠고, 밤이 되면 덜덜 떨려오는 매서운 추위에 진저리를 쳐야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준비해온 물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사막을 걷기 시작한 지 5일 정도 되었을까? 라이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는 올란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저 물통의 물이 떨어지면, 수중에 물 한 방울 남 지 않게 된다는 걸 라이 역시 잘 알기 때문이다.
“언제쯤 용병단에 도착할 수 있을까요?”
조심스런 라이의 질문에 올란도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빌어먹을, 그건 나도 잘 몰라. 방향을 잘못 잡았거든. 이러다 재수 없으면 미이라처럼 바짝 말라 뒈져버릴 수 있단 말이다.”
온통 모래만이 존재하는 사막에서는 다른 지역처럼 지형을 보고 방향을 잡는 게 아니라, 밤하늘에 떠 있는 별자리를 보고 방향을 잡는다. 그렇다 보니 자신들의 현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쉽게 말해 방향이 정확해도 언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지 계산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올란도는 연신 투덜거리며 먹다 남은 물통의 물을 몽땅 다 말에게 먹였다. 비싼 말이 갈증에 쓰러지면 안 된다면서 말이다. 올란도는 빈 물통을 말 등에 매며 난감 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젠장, 가지고 온 물이 벌써 다 떨어져 버리다니. 물통을 두세 개 정도 더 준비하는 거였는데…….”
라이는 내심 한숨을 길게 내쉴 수밖에 없었다. 사막이 언제 끝이 날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물도 다 떨어져 가는데, 아껴서 마실 생각을 하지 않고 그걸 몽땅 다 말에게 처먹이고는 저따위 헛소리를 주절거리다니. 하지만 라이는 몰랐다. 지금 올란도가 일부러 자신을 극한 상황으로까지 몰고 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 다.
그 말을 끝으로 언제나처럼 올란도가 말을 끌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 뒤를 따라가고 있는 라이. 처음 올란도에게 팔렸을 때 생각하고 있었던 기습하기에 적절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달이 두 개 떠 있어 시야까지 훤하게 확보되어 있었다. 올란도의 뒤통수가 빤히 보인다.
“저기만 정확히 가격할 수 있다면…….’
라이는 주머니 속에 숨겨두고 있었던 짱돌을 슬쩍 어루만졌다. 올란도의 머리를 보호하고 있는 것은 하얀 천 한 겹. 짱돌로 뒤통수를 후려갈기기만 해도 충분히 죽 일 수 있는 여건이다.
좀 더 지켜보며 정보를 모은 뒤 탈출을 하겠다던 라이의 마음이 바뀌게 된 것은,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바에는 차라리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탈출을 시도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라이는 짱돌을 주물럭거리기만 했지,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마치 옆집 형처럼 친근하게 대해줬던 올란도를 죽인다는 게 마음에 걸 렸고, 또 하나의 이유는 왠지 모르겠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듯한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한참을 고심하던 라이는 주머니 안에서 손을 뺐다. 올란도를 죽이고 탈출하겠다는 생각을 버린 것이다. 하지만 탈출을 아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이 아닌 다 른 기회를 엿보겠다는 것뿐이었으니까.
두꺼운 외투를 입었지만, 몸이 계속 떨려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만큼 사막의 밤은 추웠다. 그래도 계속 걷다 보니 몸속에서 열기가 생겨 그럭저럭 견딜 만 은 했다.
그날도 두 사람은 여명이 밝아올 때까지 줄곧 걸었다. 하지만 올란도는 날이 밝아오는데도 불구하고 발길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라이는 뒤에서 헉헉거리면 서 따라갈 뿐, 날이 밝아오는데 왜 멈추지 않느냐고 따지지 않았다. 이미 물이 떨어졌기에 하루라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걸 뻔히 알기 때문이 다.
해가 떠오르자 찌는 듯한 더위가 다시 시작되었다. 더군다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막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 라이는 입 안이 바짝 말랐다. 타는 듯한 갈증에 죽을 지 경이었지만, 앞쪽에서 걸어가고 있는 올란도는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라이는 점차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라이는 악착같이 걸음을 옮겼다. 올란도의 뒤를 따라가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냈다. 여기서 걸음을 멈추면 그것이 곧 자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대체 얼마나 많은 모래 언덕을 넘었는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 라이는 그저 몽유병 환자처럼 비틀거리며 올란도의 뒤를 따를 뿐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는 쓰러져 버렸다. 바닥까지 드러난 체력과 갈증으로 기절해 버린 것이다.
<묵향> 30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