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9권 3화 – 트롤과의 숨바꼭질
트롤과의 숨바꼭질
대부분의 육식동물들이 그러하듯, 트롤 또한 밤에 사냥하는 것을 즐긴다. 먹이를 기습하는 데 있어서 낮보다는 밤이 훨씬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점이 트롤을 상대하는 것을 더욱 까다롭게 만들었다.
뛰어난 후각을 지닌 트롤인 만큼, 어쩌면 어제 낮부터 말 냄새를 포착하고 따라왔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노회한 트롤은 곧장 공격하지 않고 밤이 되기만을 기다 렸다. 그 편이 말을 사냥하기도 편했겠지만, 더욱 큰 이유는 말 냄새에 섞인 쇠 냄새를 맡았기 때문일 것이다. 녀석은 무기를 든 인간들을 상대하는 것이 얼마나 위 험한지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랬기에 상황이 불리해지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튄 것이다.
“재미없게 됐어. 말 냄새에 트롤이 꾀일 줄이야.”
“한밤중에 트롤과 싸운다는 것은 자살행윕니다. 더군다나 숲속에서……. 방금 전에는 운이 좋아서 어떻게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만, 또다시 그런 행운이 되풀이될 리는 없을 겁니다.”
잠시 말이 없던 헤슬러 남작은 이윽고 결정을 내렸다.
“말 한 필을 통행세로 던져주자.”
그 말에 다른 기사들도 동의했다.
“그게 좋겠습니다. 녀석도 먹이를 확보한다면, 더 이상 우리들과 싸우려 들지 않을 테니까요.”
라이는 통행세로 말을 던져준다는 기사들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옛다, 받아라’ 하며 말 한 필을 놈에게 던져줄 리는 없지 않겠는가.
이때, 헤슬러 남작의 명령이 들려왔다.
“모두들 이동한다. 나무에서 내려와라.”
원래가 나무라는 게 올라가는 것에 비해 내려가는 게 훨씬 더 어렵다. 그 이유는 신체 구조상 발을 디딜 곳을 눈으로 찾아내기가, 올라갈 때에 비해 더욱 힘들기 때 문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워낙 어두워 발 밑쪽은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지금까지 한밤중에 나무 위에서 내려와 본 적이 없었던 라이는 몇 번이나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해 낑낑대야만 했다. 결국 땅바닥 위에 내려섰을 때, 그의 온몸은 식 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헤슬러 남작은 말들 중에서 가장 쓸모가 없다고 판단한 1마리를 그 자리에 묶어놓은 다음, 다른 말들은 데리고 잠자리를 옮겼다. 즉, 그가 말한 말 1마리를 던져준 다는 뜻은, 그 자리에다가 1마리를 놔두고 다른 곳으로 잠자리를 옮기겠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가며 30여 분 정도 걸었을까? 헤슬러 남작은 잠시 주위를 둘러본 뒤 이곳에서 밤을 보내겠다고 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한밤중이기는 했 지만, 나무를 올라가는 것은 한결 쉬웠다. 손으로 더듬어서 나뭇가지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으니까.
나뭇가지 위에 자리를 잡은 라이는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곧이어 곯아 떨어졌다. 트롤과의 대결, 그 후 이어진 야간행군. 이 모든 게 그의 진을 완전히 빼놨던 것이 다.
정신없이 잠에 취해 있던 라이를 새벽에 깨운 것은 섬뜩하기 그지없는 말의 비명소리였다. 비명을 지른 말은 팔로아였다. 함께 지낸 게 일주일 남짓밖에 되지는 않 았지만, 그동안 꽤나 정이 든 녀석이었는데……. 그런데 트롤의 밥이 되어 버리다니. 라이로서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 라이는 어른들의 예상이 그대로 적중한 것에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그 자리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트롤은 말을 죽이기에 앞서 식사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부터 먼저 죽여 없애려 들었으리라.
여명이 밝아오려면 아직도 한두 시간은 더 있어야 했다. 하지만 라이는 쉽사리 잠에 빠져들지 못했다. 온몸에 한기가 들며 부르르 떨린다. 라이는 두터운 로브 자 락으로 한기를 막아보려 했지만, 몸의 떨림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그 원인이 추위로 인한 게 아니라, 공포로 인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떨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 그가 해야 하는 것은 휴식을 취하는 것이었다. 최대한 쉬어둬야 내일의 강행군을 버텨낼 수 있을 테니까. 잠이 확 깨버린 상태였지만 라이는 눈을 질끈 감고 잠을 청했다. 곧이어 시작될 강행군에 대비해서……
일행은 여명이 밝아오자마자 출발했다. 말 1마리를 잃기는 했지만, 다른 사고 없이 트롤 같은 대형 몬스터를 따돌릴 수 있었다는 것에 기사들은 만족하는 듯했다. 자신의 말을 잃은 라이는 죠셉과 함께 말을 타야만 했다. 평소 사이가 좋지 못했었기에 라이로서는 죽을 맛이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트롤을 만난 것으로 인해 액땜이 된 덕분인지, 그날은 아무런 사고도 없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해가 점차 아래로 기울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라이는 오늘도 하루 가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집을 떠난 이후, 어떻게 된 게 편안하게 보낸 날이 단 하루도 없다니. 정말이지 집 떠나면 고생이라던 아버지의 말이 뼈에 와 닿는다.
라이는 슬쩍 기사들 중에서는 그래도 가장 성격이 괜찮은 루크에게 질문을 던졌다. 루크 아저씨라면 자신의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을 해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 다.
“루크 아저씨, 오늘 밤에도 트롤이 습격해 올까요?”
“오늘 밤은 안전할 게다. 제아무리 트롤이 대식가라고 해도 말 1마리를 하루저녁에 먹어치울 수는 없거든. 아마 녀석은 그곳에서 먹이가 다 떨어질 때까지 머무를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잖아요?”
어젯밤에 봤던 트롤의 무시무시했던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쫙 끼치는 라이였다. 두 번 다시 그런 놈과 한밤중에 마주치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런 라이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루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려움에 질려 아무것도 못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두려움을 모르는 것은 더욱 큰 문제라는 것을 그 는 잘 알고 있었다. 트롤 같이 위험한 몬스터를 얕잡아 봤다가는 한순간에 목숨을 잃을 수 있다. 그 자신은 물론이고, 동료들의 목숨까지……. 그런 두려운 존재에 게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것이 뭐가 문제겠는가.
“그래, 네 생각은 어떠냐?”
“오늘도 어제와 같은 방법을 쓰면 어떨까요?”
“어제와 같은 방법?”
“예. 말 한 필을 따로 떼어 묶어두는 거 말이에요.”
라이의 말에 루크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육식동물들은 먹이를 확보하면, 그 먹이가 떨어질 때까지 잠자고 먹기를 반복하지. 그런 식으로 쓸데없는 에너지의 낭비를 줄이 고, 다음 사냥을 위한 에너지를 비축하는 거야. 거기에는 트롤 또한 예외가 아니지.”
그때 우연히 옆을 지나던 헤슬러 남작이 루크의 말을 들었는지 대화에 끼어들었다.
“딴 곳에다 말 한 필을 따로 떼어놨다가 아침에 다시 찾으러 가고 할 여유는 없다.”
“멀찍이 떼어놓을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재수 없어서 트롤이 오늘도 나타난다면…, 그래서 말 떼를 공격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공격당한 말이 잡아먹히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말들도 놀라서 모두 다 달아나 버릴 거예요. 안 그래요?”
지금껏 어벙하게 행동하는 것 같았던 라이가 의외로 조리 있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자, 헤슬러 남작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헤슬러는 시선을 공자에 게로 돌렸다. 그의 의견을 묻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네요, 헤슬러 경.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공자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이번에 미끼로 선택된 것은 죠셉의 말이었다. 헤슬러 남작은 죠셉의 말을 약 30미터쯤 떨어진 나무에 따로 묶어 놨다. 그리고 이 결정으로 인해 헤슬러 일행은 목 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한밤중에 갑작스럽게 들려온 처절한 말 울음소리. 죠셉의 말이 죽기 직전에 내뱉은 비명이었다.
“세상에!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 망할 새끼가 따라왔다는 말이잖아!”
“조용히 해. 아직 범인이 그놈이라는 게 증명된 것은 하나도 없어. 어쩌면 다른 놈일 수도 있어.”
“트롤이니까 이 정도에서 끝났지요. 오크라면 겨우 말 한 필에 만족했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도 선뜻 말이 매여져 있는 곳으로 가서 살펴보고 오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말이 묶여 있는 곳까지의 거리는 거의 30미터가 넘었다. 한밤중인 데 다가 숲속이었기에 동료의 지원사격을 기대하기에는 너무나도 먼 거리였다. 아직 적이 그 자리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데…….
다음날 아침. 날이 밝아서야 그들은 범인이 트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땅바닥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트롤의 발자국. 피가 흩뿌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말 을 때려죽인 다음, 어딘가로 들고 가버린 모양이다. 말을 끌고 간 자국은 없었다. 놀랍게도 녀석은 수백 킬로그램이나 되는 말을 들고 가버린 것이다.
“대체 어젯밤에 잡은 말은 어떻게 하고?”
“어제 그 트롤이 아닐 수도 있잖습니까. 아마 다른 트롤이겠지요.”
하지만 헤슬러 남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모든 육식동물이 그러하듯, 트롤 역시 자신만의 영역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겨우 하루 동안에 그 트롤의 영역을 벗어났을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놈은 뭡니까? 어제 잡은 말은 어딘가에다 파묻어 놓고, 계속 따라와서 한 필 더 잡아갔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정말 욕심 많은 트롤이군요.”
그때 지금까지 이야기를 듣고만 있을 뿐, 한 마디도 내뱉지 않고 있던 리챠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문득 입을 열었다.
“어제는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지금처럼 트롤이 과도하게 먹을 것을 탐할 때가 있지요.”
모두의 시선이 리챠드에게 집중되었다.
“아마 놈은 새끼를 키우고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듣던 루크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찬성했다.
“새끼를? 흠, 그거 말 되네. 새끼 수가 많고, 또 덩치가 제법 크다면 먹이가 많이 필요하겠지.”
타일러는 심각한 표정으로 헤슬러 남작에게 묻는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죠? 남은 말들을 모두 녀석의 새끼들을 위해 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물론 그럴 수야 없지. 오늘부터 좀 더 강행군을 하는 수밖에. 놈들에게도 영역이라는 게 있는 만큼, 무작정 따라오지는 못할 거야.”
트롤과 싸우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겨우 4명이서 트롤을 상대한다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에 가깝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곳은 녀석 의 홈그라운드라고 할 수 있는 숲속이 아닌가.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겠군요.”
“초반부터 재수 옴 붙었구먼. 제기랄!”
원래 헤슬러가 계획한 대로라면, 위기의 순간이 왔을 때 말들을 몬스터의 먹이로 던져주고 몸을 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앞으로 갈 길 도 많이 남았는데, 겨우 트롤 1마리 때문에 말을 포기하기는 너무 아까웠던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놈을 떼어내는 길은 최대한 빠르게 멀리 이동하는 것뿐이다. 자 모두들 힘내자!”
일행들은 즉시 이동을 시작했다. 아침식사마저도 이동하면서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모두의 의욕만큼 말이 따라가 주지 못했다. 트롤을 회피하느라 말을 너무 몰 아붙이다 보니, 말들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던 것이다. 아무리 건장한 말들이라고는 해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쉬지를 못하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말을 좀 쉬게 해야지, 더 이상은 힘들겠습니다.”
선두에 서서 열심히 말을 달리던 리챠드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과묵한 그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이쪽으로 쭉 가면 작은 산이 하나 나옵니다. 산 위에서라면 트롤과의 정면대결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산이 있다고? 확실한가?”
헤슬러는 믿기 힘들다는 듯 급히 품속에 손을 넣어 지도를 꺼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그쪽에 산이 있다는 표시는 없었다. 자신의 말을 헤슬러가 믿지 않는 듯 하자 안 그래도 무표정하던 리챠드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아마도 기분이 꽤나 상한 듯 했다.
“예전에 길을 잘못 들어서 그쪽으로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흠, 자네가 직접 가봤다니 믿어야겠지.”
헤슬러는 산 위로 가면 트롤과 싸울 수 있는지에 대해 리챠드와 잠시 의논한 다음, 그곳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지금 그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언제쯤 산 위에 도착할 수 있을까?”
“잘하면 해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리챠드는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면 다행이라고 말했지만, 서두른 보람이 있었는지 어두워지기 전에 산꼭대기에 오를 수 있었다. 산 위에 올라온 일행들의 얼굴에 비로소 만족감이 어린다. 고생고생해서 올라온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산 위쪽에는 나무가 거의 없었다. 있다고 해도 키가 아주 작았다. 산 위쪽은 바위가 많은 돌산이었기에, 나무가 커다랗게 성장할 만큼 영양분이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지형조차 마음에 꼭 들었다. 정상부의 태반 이상이 십수 미터에 달하는 절벽으로 이뤄져 있었기에, 정상으로 올라올 수 있는 통로는 아주 좁았다. 방어전 을 치루기에 정말이지 이상적인 지형이다. 지금까지와 달리 해가 지기만이 기다려질 뿐이다.
“오늘에야 놈에게 복수할 수 있겠구먼.”
“망할 놈. 오늘 밤이 네놈 제삿날이다!”
복수를 다짐하고 있는 일행들에게 헤슬러가 소리쳤다.
“자자, 모두들 진정하고 휴식을 취하도록 해라. 푹 쉬어둬야 밤에 힘을 쓰지.”
방어하기에 좋은 지형이었기에 그들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취사도구를 꺼냈다.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어 먹으려는 것이다. 큼직한 돌덩이 3개를 주워와 삼각형으로 놓고, 임시 화덕을 만든 뒤 그 위에 구리로 만든 솥을 올린다. 구리는 아주 무른 금속이라 얇게 가공할 수 있기에 쇠로 만든 것에 비해 가벼워서 여행용으로 들고 다니기에 적합했다.
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자, 가지고 온 재료들을 집어넣어 끓이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스튜를 만들려면 오랜 시간 끓여 재료들이 뭉그러질 정도가 되어야 했지 만, 그들은 그렇게까지 참지 못했다.
“와아! 이게 얼마 만의 따뜻한 음식이야.”
“정말 맛이 기가 막히군요.”
“드실만 하십니까? 공자님.”
“예, 맛있군요.”
“루크의 음식솜씨는 훌륭하지. 우리 마누라보다 훨씬 뛰어나거든.”
허겁지겁 먹다 보니 어느새 솥의 밑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 이제 어느 정도 배를 채웠으면 준비를 하자고. 자자, 어서 일어서!”
헤슬러는 일행들을 독려하여 트롤 사냥준비에 들어갔다.
“모두들 시야가 미치는 곳에 돌탑을 쌓아둬.”
오밤중에 불을 피울 수는 없다. 붉은머리 오크족의 영토는 벗어났지만, 이 일대에 다른 오크족이 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봉책으로나마 돌탑을 쌓아두는 것이다.
모두들 사방으로 흩어져 작은 돌들을 주워서 돌탑을 층층이 쌓기 시작했다. 다가오던 트롤이 돌탑을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지도록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어둠 속에 서 놈이 접근해 오는 기척을 탐지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물론 녀석과의 격전이 시작되면 그때는 불을 피워야만 할 것이다. 야행성인 트롤이야 어둠 속에서도 자유롭겠지만, 사람은 불빛을 필요로 했으니까. 더군다나 이 곳은 나무 한 그루도 없이 사방이 탁 트인 곳이라서 달빛도 훤히 비춰진다. 전날처럼 녀석의 위치를 포착하지 못해 화살을 쏘지 못하는 일 따위는 재현되지 않을 것 이다.
만반의 대비태세를 갖추고 그들은 트롤을 기다렸다. 막간을 이용하여, 식량 주머니를 뒤적여 빵과 소시지를 꺼내 우물거리고 있던 타일러가 루크에게 물었다.
“이봐, 너 물통에 물 얼마나 있어?”
“반쯤 있을 걸. 그건 왜?”
“나도 반쯤 있는데, 그거 합치자.”
타일러의 제안을 이해할 수 없었던지 루크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합치자니?”
“그 아까운 피를 버릴 거야? 한 통 가득 놈의 피를 가져가면 꽤 짭짤하게 벌 수 있잖아.”
그제야 루크는 타일러의 제안을 이해했다. 트롤의 피는 상처회복용 물약인 포션의 핵심재료였고, 그 가격은 대단히 비쌌다. 그걸 물통에 담아가자는 말이다.
“내 몫은?”
“삼분의 일 줄게.”
“에게, 겨우 삼분의 일?”
“젠장! 나는 마을에 가서 물통을 새로 사야 된다고. 찝찝하게, 트롤 피를 넣었던 물통을 다시 쓸 수는 없잖아. 아니면 배분을 반반씩 나누고, 네 물통에 담든지.” “알았어. 삼분의 일.”
“좋아.”
당사자인 트롤은 죽어줄 생각조차 않고 있는데, 그 둘은 벌써 피를 팔 궁리부터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헤슬러와 리챠드는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뭐라고 초치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괜히 부정탈까 봐서였다. 그만큼 상위급 몬스터인 트롤을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