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9권 7화 – 팔려가는 라이

팔려가는 라이

어두운 곳에 있다 보니 시간의 흐름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한참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이었다. 갑자기 밖에서 칼칼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마도 두목이 네 일 영감이라고 했던 늙은이가 찾아온 모양이다.

“물건이 있다며. 상태는 괜찮아?”

“어서 오십시오, 네일 씨. 물론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뒤탈이 있는 물건은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여기 출신도 아니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오크 소굴에 잡혀 있었다고 하더군요.”

“오크 소굴이라고? 젠장! 1골드라고 해서 꽁지 빠지게 달려왔더니, 헛걸음을 했잖아.”

1골드라고 한 것은 네일 영감을 낚기 위한 미끼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오크 소굴에서 살았다는 말에 네일 영감은 물건의 상태를 볼 생각이 싹 사라진 모양이다. 그 가 그냥 돌아가려고 하자, 두목이 말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 잠깐만요, 네일 씨. 무슨 성격이 그렇게 급하십니까. 일단, 여기까지 오셨으니 물건이라도 보고 가셔야죠.”

밖에서 빗장을 여는 소리가 들려오자, 라이는 주먹에 힘을 꽉 줬다. 여차하면 치고 나갈 생각이었다. 계속 바깥의 동정을 살펴본 결과, 밖에 있는 건 두목이라는 놈 한 명뿐이었다. 간혹 가다 똘마니 한둘이 들락거리기는 했지만, 그들은 그리 오랜 시간 머물지 않고 곧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렇다면 지금 문밖에는 두목과 영감, 이 렇게 두명밖에 없으리라.

끼이익!

귀가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문이 활짝 열렸다. 그와 동시에 쏟아져 들어오는 엄청난 빛줄기. 라이는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들 생각이었지만, 상대가 보여야 달려들 든지 아니면 빈틈을 노려 도망치든지 할 게 아닌가. 라이가 강한 빛줄기 때문에 눈조차 뜨지 못하고 버벅거리고 있을 때, 네일 영감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내 살다 살다 이렇게까지 비쩍 마른 놈은 처음이로군.”

라이가 시력을 채 회복하기도 전에 갑자기 문이 탁 하고 닫혔다.

“안 돼!”

재빨리 뛰어가 힘껏 문을 밀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밖에서 빗장을 거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라이는 문을 쾅쾅 치며 소리쳤다.

“이러지 말아요. 풀어 줘요. 나를 풀어 줘! 문 열어!”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고 두목의 열성적인 목소리만 들려왔다.

“저거 봐요. 겉모습만 저렇지, 원기왕성하다니까요. 아직 젊으니까 잘 먹이면, 조금만 지나도 예전 모습을 되찾을 겁니다.”

두목의 그것에 비해 네일 영감의 목소리는 심드렁했다.

“흠, 병든 게 아니라면… 좋아, 20실버 주지.”

영감의 제안에 두목은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겨우 20실버요? 요즘 노예 시세가 얼만데…….”

“저런 꼬라지인데 더 받기를 원하나? 불만이면 직접 노예시장까지 자네가 데리고 가든지.”

아무나 노예시장에 노예를 데리고 가 거래를 하지는 못한다. 정식으로 노예를 팔려면, 제반 서류가 빈틈없이 갖춰져 있어야 했다. 이 노예가 어떤 사유로 인해서 노예가 되었는지를 증명하는 그런 서류들 말이다. 그리고 그런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불법적인 루트를 통해 거래를 하려면, 어지간한 인맥과 조직력 가지고는 거래 자체가 불가능했다.

영감의 최후 통첩에 두목은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나를 꺼내줘! 풀어달란 말이다. 이 새끼들! 내가 무슨 물건인 줄 알아? 내가 풀려나면 너희들은 다 죽었어. 관청에 고발할 테다. 고발!”

라이의 악에 받친 외침이 들리는 가운데, 장시간 고민하던 두목이 결국 결정을 내린 모양이다.

“10실버만 더 쓰시죠, 네일 씨.”

잠시 궁리하는 듯하던 네일이 말했다.

“5실버.”

“조금만 더 쓰시죠.”

두목은 애처롭게 사정했지만, 네일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더 이상은 절대로 안 돼. 저렇게 비쩍 마른 놈은 팔기도 힘들단 말이야.”

또다시 시작된 침묵. 하지만 그것은 전보다는 빨리 끝났다. 두목의 체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습니다. 25실버로 하죠.”

“좋아, 물건은 모레 찾으러 오지. 그동안 잘 먹여놔.”

“걱정 마십시오. 먼 길 떠나는 데 지장 없도록 잘 먹여 놓을 테니까요.”

“참, 인수하러 오는 당일은 음식은 물론이고, 물 한 방울 먹이지 않아야 된다는 것쯤은 잊지 않았겠지?”

“핫핫,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디 하루이틀 장사합니까?”

문 밑쪽에 만들어 놓은 조그만한 쪽문이 탁 하고 열리며, 두목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릇 내놔.”

살짝 열린 쪽문으로 재빨리 다가간 라이는, 구리로 만들어진 다 찌그러진 그릇을 밖으로 내밀었다. 밖으로 나온 그릇에 두목은 뜨끈한 스튜를 한 국자 떠 넣어줬 다. 뻣뻣한 싸구려 빵 한 덩어리와 함께. 이게 식사의 전부였다.

“남기지 말고 다 처먹어. 알겠지?”

당연히 음식을 남길 생각이 없었던 라이는 빵을 찢어서 스튜에 찍어 먹었다. 숟가락 따위는 아예 없었다. 빵으로 그릇의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서 먹었기에 설거지 를 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릇은 깨끗하게 변했다. 물론 설거지 하라고 물을 따로 넣어 주지도 않았지만.

라이가 두목이 넣어주는 음식을 군소리 하지 않고 깨끗이 먹어치운 이유는, 체력을 비축하는 게 최우선적인 과제였기 때문이다. 실낱같은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 를 움켜쥐려면 체력이 있어야만 했다.

‘영감이라고 했지? 좋아. 빈틈을 노리다 보면, 노예시장까지 가는 동안에 최소한 한 번쯤은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야.’

라이가 희망을 거는 것은 네일이 늙은이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오랜 노예생활로 인해 비쩍 말랐다고는 하지만, 나이 많은 영감 하나 제압하지 못할 리가 있 겠는가. 물론 수갑이라든지 족쇄 같은 구속구를 채우기야 하겠지만, 기회만 있다면 영감을 때려눕히고 열쇠를 탈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크 소굴에서도 살아남은 나야. 여기라고 내가 포기할 거 같아? 나중에 두고 보자. 꼭 복수해 줄 테다.’

어떻게 해서든 아버지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아버지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고해 바치면, 저 인신매매 일당은 절대 살아남지 못하리라. 아니, 구태여 아버지의 손을 빌릴 필요도 없다. 관청에 가서 고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그러면 그의 복수는 관청이 대신 해 줄 것이다. 그는 햇볕이 잘 드는 따뜻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두목과 그 똘마니들이 교수형에 처해지는 것을 구경하기만 하면 된다.

‘그래, 언젠가는 나한테 살려달라고 싹싹 빌게 만들어 줄 테다. 반드시.’

갇혀 있다 보니 따로 할 일도 없는 만큼, 라이는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복수를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상상하며 자신을 위안했다.

꼬로로록!

뱃속에서는 밥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두목이 밥을 주지 않았다.

‘참, 그 영감이 당일에는 아무것도 먹이지 말라고 했었지? 오늘이 바로 그날인 모양이군. 아, 목마르고 배도 고프고..

두목은 아침부터 어디로 갔는지 밖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기야 그 전에도 두목이나 그 똘마니들은 이곳을 자주 비워놓고 들락거렸다. 그걸 보면 여기가 저들의 본거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두컴컴한 데다 구석진 곳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보니 살며시 잠이 밀려들었다. 라이는 정신을 차리려고 하지 않고, 일부러 잠에 빠져들기 위해 노력했다. 배고픔 과 갈증을 잊는 데는 그게 최고였으니까.

라이가 비몽사몽간을 헤매고 있을 때, 갑자기 빗장이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드디어 기회가 왔다. 오늘이 그 네일 영감이라는 놈이 자신을 인수받기로 한 바로 그날인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문이 열릴 리가 없지 않은가. 순간 문이 활짝 열리며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라이는 인상을 찡그리며 팔을 들어 빛을 가렸다. 눈이 빛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 여유가 필요했다.

억센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을 때쯤 라이의 시력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이때, 라이의 눈에 탁자 앞에 서서 자신을 노려보며 서 있는 한 중년인이 보였다. 중년인이 라이에게 안겨준 인상은 정말 강렬했다. 안 그래도 사나운 눈초리를 지닌 데다가, 뺨은 물론이고 한쪽 눈알마저 훑고 지나가버린 기다란 칼자국으로 인 해 그의 인상은 가히 공포스러울 지경이었다. 과연 똘마니들이 두목으로 받들어 모실 만한 사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놈이 두목?”

두목은 푸대자루에서 사슬뭉치를 꺼내며 말했다.

“이쪽으로 데려와.”

반항을 할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두목의 인상을 보는 순간 라이는 기가 질려버렸다. 괜히 까불어 봐야 좋을 게 전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손 내밀어.”

라이는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그냥 넘어가고, 나중에 기회를 봐서 영감을 때려눕히는 게 훨씬 쉽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라이의 표정은 곧이어 일그러졌다. 상대가 자신에게 채우려고 하는 수갑은 일반적인 수갑이 아니었다.

두목이 꺼내든 것은 노예용으로 특별히 제작된 구속구(拘束具)였다. 수갑과 족쇄만 차고 있어도 움직이는 데 커다란 제약을 받게 될 텐데, 이것은 그 둘을 사슬로 연결해 놓아 더더욱 움직이기 불편하게 만들어 놨다. 더군다나 구속구에 열쇠 따위는 아예 달려 있지도 않았다. 열쇠로 열게 만들어 봐야 관리하기만 힘들고, 또 노 예가 열쇠를 훔쳐 탈출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구속구에 자물쇠를 다는 대신, 이것은 좀 더 단순하면서도 풀기 어려운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양쪽을 오므린 다음, 그 사이에다가 작은 쇠막대기를 박아 넣는 형식으로 잠가버린다. 쇠막대기가 꽂혀 들어갈 구멍은 한 치수 작게 제작되어 있기에, 망치로 쇠막대기를 두들겨 넣어버리면 뽑는 것 또한 예삿일이 아니었다. 전용 장비를 동원하든지, 아니면 대장간으로 쫓아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두목과 똘마니는 수갑은 물론이고 족쇄까지 라이에게 완벽하게 채웠다. 하지만 두목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끈을 꺼내어 무릎을 묶고, 또 팔도 움직이기 어렵 도록 꽁꽁 묶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소리도 내지 못하도록 재갈까지 채워버렸다.

이때, 두목 옆에 서 있던 똘마니가 입을 열었다.

“밖에까지 들어다 드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네일 씨.”

순간 라이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라이는 얼굴을 홱 돌려 방금 전까지 자신이 두목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네일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더 살펴봤다.

‘헉, 이 사람이 네일이라고? 영감이라더니! 이게 무슨 영감이얏!’

“들어 줄 필요 없어. 내가 자네와 함께 있는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는 게 더 문제야.”

“그건 그렇습죠.”

당황한 라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여기까지였다. 네일이 커다란 푸대자루 속에 그를 집어넣어 버렸던 것이다.

“여기 있네. 은화 25개. 세 보게.”

“예, 틀림없군요.”

“다음에도 물건이 생기면 꼭 연락해 주게.”

“물론입니다, 네일 씨. 제가 네일 씨 외에 다른 사람에게 물건을 넘기는 걸 한 번이라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네일은 라이가 들어 있는 푸대자루를 어깨에 이고 두목의 거처를 나왔다. 거처 앞에는 그가 몰고 온 짐마차가 한 대 매여 있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주위를 한번 쓱 둘러봤다. 도둑길드의 본거지가 있는 곳답게 평소에도 인적이 거의 없는 곳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라이를 푸대자루 안에 집어넣는 수고를 아끼지 않 은 것은, 짐마차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납치된 거라는 게 들통났다가는 끝장이었기 때문이다.

네일은 감자 자루를 마차에 옮겨 싣듯 태연자약하게 움직였다. 놀랍게도 짐마차 안에는 라이가 담겨 있는 것과 유사한 형태의 푸대자루 6개가 더 있었다. 즉, 납치 되어 온 아이들이 여섯 명씩이나 더 있었던 것이다.

네일은 라이를 푸대자루 사이에다가 던져두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끈으로 그들과 함께 꽁꽁 묶어버렸다. 몸과 다리 부위를 말이다. 이렇게 해놔야 어느 한 녀석 이 마차를 발로 차서 밖에다가 신호를 보내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다. 어쨌건 아이들은 모두 다 제대로 된 신분증명이 없는 불법노예들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 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 다음, 영감은 푸대자루들을 누가 보지 못하도록 그 앞에 야채나 잡다한 생활용품 등으로 가려서 눈가림을 했다. 노예시장으로 가려면 성문을 통과해야 하는 만큼, 혹 검문을 당할 경우도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성문에서 당직을 서는 경비원은 이미 그가 예전에 구워삶아 놓은 놈이기는 했지만.

따그닥, 따그닥……..

변경지역의 도시들이 그러하듯 바레인 시 역시 높직한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때문에 성문을 통하지 않고는 출입 자체가 불가능하다.

“어이, 오늘은 자네가 근무인가 보지?”

“안녕하십니까, 네일 씨. 오늘도 브레가 시에 가시는 모양이죠?”

이곳 사람들은 네일을 운송업자로 알고 있었다. 강도, 산적, 몬스터 등등……. 안전한 성을 벗어나기만 하면 워낙에 위험요소들이 많다 보니 각 도시 간에 물류를 운반하는 것도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네일처럼 은퇴한 용병들이 이런 종류의 사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네일이 겨우 40대 후반 정도밖에 안 되는 나이 임에도, 두목이 그를 영감이라고 부른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용병으로서 그 정도 나이까지 살아남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네. 먹고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있나?”

“들리는 소문으로는 브레가 시 근처에서 강도에게 털린 사람이 있는 모양이던데, 조심하십시오.”

“걱정 말게. 나도 현역에 있을 때는 꽤나 날리던 사람이었으니까 말일세.”

“근데 마차에 실린 화물은 뭡니까?”

네일은 마차 안쪽에 손을 넣어서는 커다란 햄 한 덩어리를 꺼내 경비병에게 슬쩍 건네주며 말했다.

“이번에 가져가는 화물의 태반은 이걸세. 자, 자네도 맛이나 한번 보게. 맛이 아주 훌륭하다네.”

색상이나 향기로 보아, 꽤나 품질이 좋은 햄이었다.

“이거 번번이 감사하기는 합니다만, 부탁받은 물건인데 이렇게 주셔도 괜찮습니까?”

“괜찮아. 일전에도 말했지만, 식품의 경우 몬스터라든지 쥐새끼라든지…, 뭐 이런저런 이유로 약간의 손실이 생기는 것 정도는 눈감아 주는 게 관례니까 말이야.”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경비병은 마차 안쪽을 확인해 보지도 않고 종이에다가 뭔가를 대충 쓱쓱 적은 다음, 네일에게 말했다.

“그럼 잘 다녀오십시오.”

“그래, 자네도 수고하게.”

일반적인 경우 성문을 통과하는 마차는 경비병이 반드시 안을 살펴본다. 혹시 불법적인 물건을 반출하거나, 혹은 반입하지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라이는 거 기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런데 오가는 대화를 엿듣다 보니, 아예 조사를 할 생각조차 없지 않은가.

라이는 악착같이 옆으로 기어갔다. 아이들과 함께 몸이 묶여 있었기에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옆의 아이가 은근슬쩍 도와줬기에 가능했다. 라이는 유일하게 자신의 몸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부위인 머리로 마차 벽을 쿵쿵 박아댔다. 그리고 그 반응은 곧이어 밖에서 들려왔다.

“햄 외에 뭘 실으셨기에, 저렇게 버드럭거리는 겁니까?”

그러자 막 마차를 몰고 성문 밖으로 나가려고 하던 네일의 능청스런 대꾸가 들려온다.

“한번 볼 텐가? 돼지 2마리를 묶어놨다네. 똥 싼다고 어제부터 먹이를 주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아직도 찔끔찔끔 싸대는 걸 보면 내 말을 듣지 않은 모양이 야. 젠장, 똥냄새가 햄에 배면 큰일인데…….”

돼지 똥냄새가 난다는데 일부러 마차에 들어가서 살펴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돼지가 그리 신기한 동물도 아닌데 말이다.

경비원은 마차 안을 볼 생각도 없는 듯 네일 곁에 서서 말했다.

“살아 있는 것 치고는 꽤 조용한 편이네요.”

“당연하지. 운반하던 도중에 돼지가 쓸데없이 꿀꿀거리거나 지랄을 하면 큰일 나게? 몬스터 놈들이 돼지고기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래서 아예 재갈을 물려놓고 마차에 실었지. 에휴, 그냥 때려잡아서 소금에 절여 운반하지. 서로가 고생스럽게 왜 이렇게 살아 있는 놈을 고집하는 건지…, 쯧쯧.”

“수고가 많으시네요.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그래, 자네도 수고하게. 나중에 술이나 한잔 하세.”

“그거 좋죠.”

성문을 통과한 네일은 느긋한 표정으로 마차를 몰았다. 길 가다가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까지 건네면서. 네일처럼 불법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 의도적으로 주위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놔야, 주변에서 애들이 사라졌다고 해도 자신을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인적이 없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가식적인 태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겉에 묶었던 줄을 풀고, 애들에게 뒤집어 씌워 놨던 푸대자루를 벗겼 다. 그러자 하나씩 드러나는 아이들의 얼굴들. 여자아이 5명에, 남자아이 둘이다. 그는 아이들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재갈을 풀어주며 으르렁거렸다.

“아까 어떤 새끼가 소리를 냈어? 내가 경고했지! 쥐죽은 듯 조용히 있으라고 말이야. 어떤 놈이야?”

안 그래도 무서운 얼굴에다가 눈까지 희번뜩거리며 협박을 하니, 그야말로 공포스러웠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오냐, 말을 안 한단 말이지? 좋아, 네까짓 것들이 실토하지 않고 얼마나 견디는지 두고 보기로 하지.”

푸대자루는 벗겨졌지만, 아직 아이들 개개인을 묶어놓은 줄은 풀어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애들은 저마다 마차 바닥에 쓰러진 채 끙끙댈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마 을 주변을 벗어날 때까지 애들이 소변을 본다든지 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네일은 물도 먹이지 않았다.

밧줄로 꽁꽁 묶여 피도 잘 통하지 않다 보니 팔다리에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배고픔뿐만 아니라, 지독한 갈증까지…….

그때 한 여자아이가 더 이상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실토했다.

“제 앞쪽에 묶여 있는 애가 그랬어요. 나는 안 그랬어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한 애가 입을 열자, 모두들 언제 침묵을 지켰냐는 듯 자신이 한 게 아니라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푸대자루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던 만큼, 범인을 본 사람은 아무 도 없다. 라이도 얼른 주변 애들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이것들이 정말! 다들 안 했다니, 그게 말이 돼? 브레가에 도착할 때까지 꽁꽁 묶여 있어 볼래!”

그 말에 겁을 집어먹고 엉엉 울며 조잘대는 여자애들을 보며, 네일은 용의선상에서 여자아이들을 지워버렸다. 저 정도 간덩이로 어찌 그런 짓을 했겠는가. 그렇다 면 사내놈 둘 중 하나라는 말인데…….

“너냐?”

“아, 아닙니다, 네일 씨. 저, 저는 절대로…….”

덩치 큰 사내놈은 너무 놀라 말까지 더듬고 있다. 흠, 저렇게 작은 간뎅이로는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그렇다면 네 녀석이로군. 못 먹어서 비쩍 마르다 보니, 간뎅이만 부은 모양이지? 응?”

네일은 쓰러져 있는 라이를 지근지근 밟았다. 물론 큰 상처는 입지 않도록 적당히. 일주일 후, 좋은 가격에 팔려면 물건에 하자가 생겨선 곤란했기 때문이다.

“이 개새끼, 오늘부터 한동안 음식은 물론이고 물 한 방울 먹이지 않겠다. 너희들도 이 녀석에게 아무것도 나눠주지 마. 알겠느냐? 만약 그런 짓을 하다 들키면 반 쯤 죽여버릴 테다.”

인상을 왈칵 일그러트리며 소리치는 네일의 말에 아이들은 두려움에 떨며 황급히 대답했다.

“예.”

이번엔 라이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또다시 그런 개 같은 짓을 하면, 이번처럼 굶기는 것 정도로 끝내지 않을 거다. 알겠냐?”

라이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렇다고 절대 탈출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상황이 불리하면 눈치를 보며 기회를 기다린다. 이것이 라이가 세운 탈출 원칙이었 던 것이다.

그 후로도 라이는 틈만 나면 탈출을 시도했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네일은 지금껏 수없이 많은 노예를 다뤄본 전문가였다. 더군다나 라이의 경우 처음 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힌 상태. 탈출하는 라이의 수법이 점차 발전했지만, 그만큼 주위의 감시 또한 삼엄해졌다.

***

배추를 수확하게 되면, 그것을 수집상들이 거둬들여 경매장에 내놓듯, 노예의 거래 또한 그와 유사했다. 전쟁이 벌어졌다든지 하는 이유로 노예가 대량으로 발생 하지 않는 한, 노예를 처음 사들이는 사람은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노예를 수집하는 수집상들이다.

물론 이들이 노예 거래만 하는 것은 아니다. 돈 될 만한 것들은 몽땅 다 취급하는 잡상인으로서, 그 거래 품목에 ‘사람’도 포함된다고 보는 게 옳았다. 즉, 노예 거 래는 부업인 셈이다.

수집상들은 구매한 노예를 광산촌 따위와 같은, 고되고 힘든 일 때문에 사람들이 가려 하지 않는 곳을 찾아가서 팔아넘긴다. 노예를 원하는 소비자와 직거래를 하 는 편이 마진이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집상들이 돌아다니는 곳은 변방이었다. 즉, 노예를 사서 부릴 만큼 돈이 많은 부자들은 거의 없다는 말이다. 때문에 수요가 그다지 많지 않은 만큼, 그들 은 노예를 원하는 소비자를 찾기 힘들어지면 울며 겨자 먹기로 중간상인에게 노예를 저렴한 가격에 넘기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중간상인부터가 노예 거래를 전업으로 뛰는 자들이다. 그들은 수십, 혹은 수백 명 단위로 노예를 모아서 각종 경로를 통해 노예를 필요로 하는 시장까지 운반한다. 운송료가 꽤 많이 들지만, 노예의 가치 또한 훨씬 더 높게 뛰는 만큼 절대로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수집상으로부터 노예를 사들여 그것을 운반하고, 경매장에서 판매하기까지 그 과정을 몽땅 다 혼자서 처리하는 대규모 중개상도 간혹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그렇 지 못했다. 특히 해상 운송의 경우, 선장이나 선주들이 개별적으로 노예 거래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몇 차례나 국경을 건너고, 또 육로에서 해로, 그리고 또다시 육로로 운송되어 오는 기나긴 여정. 주인이 바뀔 때마다 조금이라도 더 돈을 많이 받기 위해 경매를 하 기도 했지만, 경매장에도 수수료를 줘야 하는 만큼, 대부분 단골인 거래처에 적당한 가격에 넘겼다.

산 넘고 물 건너서, 소비자들이 넘쳐나는 대도시에까지 운반되어 오면 노예의 가격은 산지 가격의 5배 이상으로 불어나게 된다. 그쯤에서 소비자에게 팔려가는 경 우가 거의 대부분이었지만, 일부 선택받은 노예들은 그렇지 않았다. 일종의 재교육 과정을 거쳐 더욱 높은 몸값으로 가치를 불리게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여자 노예의 가치와 요리를 능숙하게 할 줄 아는 여자 노예의 가치는 10배 이상 차이가 난다. 그런 만큼 어린 노예가 들어왔을 때 그 아이들 중에서 외모가 뛰어나고, 총명한 녀석들을 골라 재교육을 시키는 사업 또한 성황리에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키워내기만 하면 엄청난 부가가치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노예 양성소(養成所)를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이 바닥에서는 꽤나 알아주는 실력자 중 한 명이 바로 테귤러였다. 마치 옆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을 하고 있는 중년 사내. 살까지 투실투실 쪄서 더욱 인심 좋게 생긴 외모를 하고 있었지만, 노예상들은 잘 알고 있었다. 겉모습과는 달리, 이 뚱보의 속마음이 뱀처럼 교활 하고 냉혹하다는 것을. 이미 이 방면에는 악명이 자자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테귤러 씨. 오늘은 어쩐 일이십니까?”

“새로운 물건들이 들어왔다고 해서 왔네.”

정확히 말하면 어제 도착했다. 그리고 예정대로였다면 지금쯤 통관작업이 끝났으리라. 테귤러는 이 시점에 찾아와서 쓸 만한 노예들은 몽땅 다 뽑아서 가버렸다. 그것도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하지만 노예상으로서는 판매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상대가 너무 거물이었던 것이다.

“일부러 이곳까지 찾아오셨는데 이거 죄송해서…, 아직 검역(檢疫)을 마치지 못했기에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 말에 테귤러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상하군. 어제 도착한 게 아니었나?”

어제 도착했다면 지금쯤이면 검역과정이 끝나 있어야 정상이다. 다른 노예상이라면 몰라도,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사정이 있었다니, 어쩔 수 없지.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주저없이 일어서는 테귤러.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며 노예상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놈이 윗선에다가 대고 몇 마디 말만 해도, 이번에 수 입한 노예들의 통관 허가가 언제 떨어질지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테귤러는 웃으며 일어섰지만, 이 방면에서 그가 왜 악명을 떨치고 있는지 노예상은 정확히 알 고 있었다.

노예상은 황급히 테귤러를 따라 나오며 사정했다.

“고정하십시오, 테귤러 씨. 검역이 끝나는 대로 바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일견 비굴하게까지 느껴지는 노예상의 대응에 테귤러는 발걸음을 멈췄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 쓸 만한 놈들이 있던가?”

“저도 아직 실물을 본 건 아닙니다만, 서류상으로 봤을 때 테귤러 씨가 흥미를 가지실 만한 아이는 몇 있는 것 같더군요. 검역이 끝나는 대로 따로 관리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제3부두는 노예선들이 접안하는 부두였다. 외국에서 수입되어 들어오는 노예들의 검역 때문에 노예선들만의 전용부두를 정해놓은 것이다. 노예상의 사무실은 제 3부두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테귤러는 부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두에는 꽤 많은 노예선들이 정박해 있었다.

어쩌면 한꺼번에 배들이 밀려들어오면서 검역이 지연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요즘 노예선들이 꽤 많이 들어오는 것 같더군. 내 위쪽에 말해 두지. 자네 배의 검역을 최우선적으로 해주라고 말일세.”

“감사합니다, 테귤러 씨.”

선수에 말 조각상이 붙어 있는 돛대 3개짜리 대형 범선이 바로 노예상의 배였다. 청소를 하느라 갑판 위를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선원들의 모습이 조그마하게 보 인다.

그때 테귤러의 눈에 꽤나 색다른 광경이 들어왔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무심코 봤을 때는 못 보고 지나쳤었는데, 지금 보니 돛대에 사람이 하나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도 매달려 있는 사람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마치 뼈다귀를 연상시킬 정도로 비쩍 마른 것이, 흑마법사들이 소환한다는 스켈레톤 같았 다.

제법 먼 거리였기에 자신이 제대로 본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테귤러는 품속에 손을 넣어 작은 망원경을 꺼냈다. 망원경으로 자세히 확인해 보니, 자신이 본 게 틀림없었다. 매달린 노예의 몸은 정상적인 게 아니었다.

“혹시 전염병이라도 들어온 건가?”

전염병이라는 말에 노예상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전염병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쪽을 보게. 아까는 몰랐는데, 저기에 비쩍 마른 노예를 하나 매달아 놨지 않은가. 귀중한 상품을 굶겨서 저렇게 만들어 놨을 리는 없고…….”

노예상은 잠시 망설이더니, 할 수 없다는 듯 털어놨다.

“전염병은 아니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생각을 해보시면 아실 겁니다. 병에 걸린 노예를 돛대에 매달아 놓을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자네 말이 맞는 것 같군. 그런데 무슨 일이기에 저렇게 매달아 놓은 건가? 그러고 보니 채찍질이라도 한 모양이지? 등판에 핏자국이 있는 걸 보면 말일세.” “이런 말씀 드리기 부끄럽습니다만, 글쎄 저놈이 탈출을 시도했지 뭡니까.”

통관작업 도중에 노예가 탈출을 시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쇠사슬로 꽁꽁 묶인 데다, 이동할 때는 여러 명의 감시를 받게 되니 말이다.

그런데도 놈이 탈출을 감행했다는 말은 어딘가 헛점이 보였다는 뜻이다. 즉, 안전을 위해 취해야 할 단계들 중 하나 이상을 무시했다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렇기 에 노예상은 한사코 그걸 감추려고 했던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말씀드립니다만, 저 녀석이 탈출하는 바람에 검역이 중단되었습니다. 녀석을 붙잡았을 때는 이미 검역관이 돌아가 버린 후라서……. 다시 검역 을 해달라고 요청은 해놨습니다만, 대기하고 있는 배가 워낙 많다 보니 한 며칠 걸릴 것 같습니다.”

“으흠~, 그렇게 된 것이로군.”

순간 테귤러는 흥미가 동하는 것을 느꼈다. 설마, 항구에 배가 도착한 첫날의 혼란을 틈타 탈출을 시도하는 놈이 있을 줄이야. 꽤나 행동력이 있는 교활한 놈임에 틀림없었다. 테귤러는 다시 한 번 망원경으로 노예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봤다. 성인은 아니었다. 순간 테귤러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직 어린놈이라면 키 워 볼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노예가 머리를 치켜들었다. 노예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테귤러의 눈에는 급격하게 실망감이 어렸다. 나이가 어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기대만큼 어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최소한으로 잡는다고 해도 14살은 넘어 보였다. 교육시키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였다.

하지만 녀석의 눈빛 하나만큼은 마음에 쏙 들었다. 반항적으로 번쩍이고 있는 차가운 눈빛! 전혀 기가 죽은 놈의 눈빛이 아니었다.

꽤나 흥미가 동하기는 했지만, 노예상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괜히 말해봐야 가격만 올라갈 테니까. 그렇기에 그는 짐짓 딴전을 피웠다.

“아주 제대로 매질을 해놨군.”

“예. 하지만 통할지 의문입니다. 비리비리하게 생긴 것에 비해, 아주 지독한 독종이라고 하더군요. 제대로 팔 수나 있을지 걱정입니다. 지금까지 녀석을 손보려고 했던 사람이 꽤 있었던 모양인데…….”

노예상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노예가 지녀야 할 최고의 미덕은 순종(順從)이 아니겠는가. 저렇게 기가 센 노예를 사겠다는 사람은 아마 없으리라.

“어쨌건, 검역이 끝나고 나면 기별이나 넣어 주게.”

“염려 놓으십시오, 테귤러 씨.”

테귤러가 노예상을 다시 찾은 것은 그로부터 3일이 지난 후였다. 원래는 전날 연락이 왔었는데, 마침 일이 있어서 가지 못하고 하루가 지난 후에 달려온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테귤러 씨.”

잠시 환담이 오간 후, 테귤러는 물건을 먼저 보기를 원했다.

“이 아이들입니다. 외모는 물론이고, 혈통도 괜찮은 아이들로 골라놨습니다.”

물론 정말 괜찮은 애들 몇 명은 뒤로 빼돌려 놓은 상태였다.

테귤러는 노예상이 건네주는 서류를 뒤적거리며 살펴봤다.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위로 올라가 있는 것을 보면, 노예들의 신상내력이 꽤나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서류상으로는 꽤 괜찮구먼.”

이때 여자노예 하나가 살며시 걸어 들어와서는 공손히 인사하며 노예상에게 보고했다.

“아이들이 준비되었습니다.”

“평소처럼 한 명씩 들이라고 할까요?”

“그렇게 해주게. 그리고 자네는 볼 일을 보러 가보게. 나중에 일이 끝나면 부르도록 하지.”

“예, 알겠습니다.”

잠시 후, 여자노예가 아이를 한 명씩 테귤러가 있는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아이들은 테귤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모두들 깨끗하게 씻겨서 잘 입혀놓은 상태다. 여느 부잣집 아이들에 비해 전혀 모자람이 없어 보일 정도로 귀엽고 기품이 흐르는 아이들이다.

테귤러는 방에 들어온 아이들을 꼼꼼히 살펴봤다. 옷을 벗겨서 몸매를 살펴보는 것은 기본이다. 혹시 채찍 자국 같은 게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상류층에 납품 해야 하는 노예의 몸에 보기 흉한 흉터가 있어서는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지능이나 성격을 알아보기 위해 이런저런 질문을 해댔다. 어떤 질문은 지금 상황과는 완전 별개의 뜬금없는 것이기도 했고, 또 어떤 질문은 아이 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그런 것이기도 했다. 아이들의 반응을 보기 위함이었다.

노예들을 모두 살펴본 테귤러는 만족스러운 듯 노예상에게 말했다.

“이번에 들어온 아이들의 품질은 꽤 괜찮군.”

“감사합니다, 테귤러 씨.”

“나는 이 정도 가격이라고 판단했네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테귤러가 건네주는 서류. 처음에 노예상이 그에게 건네줬었던 아이들의 신상내력이 적혀 있던 서류였다. 테귤러는 그 서류 아래쪽에 각각의 가격을 써놨다. 그걸 본 노예상의 인상이 왈칵 일그러졌다.

“이, 이건 너무 적습니다. 조금만 더 쓰시지요, 테귤러 씨.”

“총액 624골드 24실버. 꽤 후하게 써놨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조금만 더…….”

아마 딴놈이 와서 이딴 소리를 했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곧바로 내쫓아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테귤러인 만큼 그럴 수가 없었다. 여기서 장사 접을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한동안의 실랑이와 우는 소리가 오고간 후에야 금액이 결정되었다. 650골드로. 물론 그것도 상품의 질에 비한다면 굉장히 싸게 판 것이다.

노예상은 우울한 표정으로 묻는다.

“아이들은 언제 보내드리면 되겠습니까?”

“내일 아침에 보내주게.”

“예, 테귤러 씨.”

테귤러는 짐짓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일전에 돛대에 매달려 있던 녀석 말일세.”

“예.”

“그 녀석도 볼 수 있겠나?”

테귤러의 말에 노예상의 안색이 핼쑥하게 바뀌었다. 마치 똥 씹은 듯한 그런 구린 표정 말이다.

“예? 설마, 그 노예가 마음에 드셨습니까?”

“마음에 든 것은 아니고, 확인해 볼 게 있어서 그런다네. 왜 그러는가?”

“그런 놈을 누가 찾을까 싶은 차에 검투장에서 노예가 필요하다고 하길래 팔아버렸는뎁쇼.”

비록 테귤러가 비양심적인 날강도이기는 했지만, 노예를 보는 안목은 대단히 뛰어났다. 그런 그가 관심을 가질 만한 노예를 똥값에 처분해버렸다니. 노예상으로서 는 너무나도 원통해서 기절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에 비해 테귤러는 노예상이 말한 검투장이라는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비쩍 마른 애를 검투장에서 쓰겠다고 샀다니. 청소? 그런 일을 시키기에는 몸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검투장에?”

“예. 이번에 거창한 쇼를 할 예정인데, 거기에 쓸 노예들이 필요하다고 해서요.”

쇼에 쓴다는 말에 테귤러는 감 잡았다. 그는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어, 검투장에서 소비하기에는 아까운 녀석이었는데…….”

테귤러가 관심을 보이는 것은 고급 노예들이다. 그런 노예를 5골드도 안 되는 헐값에 넘겨버렸으니, 노예상은 울 듯한 표정이다.

“그렇게 쓸 만한 놈이었습니까? 하, 하지만 그놈은 지금까지 테귤러 씨께서 구입해 가신 상품들과는 꽤 거리가 있는 녀석이었는뎁쇼.”

“그건 나도 알고 있네. 그 때문에 자네한테 그날 말하지 않은 거고. 첫째로 나이가 너무 많았고, 둘째로는 몸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거든.”

테귤러는 자신이 어제 와보지 않은 것을 아쉽게 생각했다. 그랬다면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을 텐데.

물론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았다. 정말로 테귤러가 그 아이를 원했다면 검투장에 사람을 보내어 데려올 수도 있었다. 검투장에서 원하는 것은 머릿수였지, 꼭 그 아 이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 아이를 대신할 노예만 건네주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테귤러는 그만뒀다. 이미 검투장으로 팔려간 녀석을 이리로 데리고 오려면 시간이 꽤 걸리니까. 더군다나 그 아이를 꼭 사겠다는 마음도 없었다. 이리로 데 리고 와서 살지 안 살지 판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깨끗하게 포기하고 돈 될 만한 다른 애를 찾는 게 시간상으로 훨씬 이익이리라.

모든 일을 마무리 지은 뒤 노예상의 사무실을 나와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테귤러의 눈에 현란한 포스터 한 장이 눈에 띄었다. 무시무시하게 생긴 괴수 가 커다란 몽둥이로 사람을 잔인하게 때려죽인 후, 뜯어먹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 밑에 쓰여 있는 글자들.

지상 최고의 몬스터 쇼!

이 이상의 자극적인 볼거리는 없다!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포악함! 잔인함! 그리고 괴력!

오감만족(五感滿足)!

절대로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일순 테귤러의 눈에 경멸이 어린다.

“쓰레기 같은 새끼들! 저딴 볼거리를 만들 생각을 하다니. 검투장에서 노예를 왜 사갔는가 했더니, 별 쓰레기 같은 수작을 부리고 있었군.” 테귤러는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듯 거친 동작으로 커튼을 쳐 마차의 창문을 가려버렸다. 적어도 그는 저런 말초적인 자극으로 돈을 벌지는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