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권 1화 – 날개를 펴는 묵향

날개를 펴는 묵향

천랑대가 금의위의 위사들을 학살하는 모습을 보면서 묵향은 생각했다.

‘역시 아무래도 세력이 좀 더 있어야 해. 예전에 교주가 나한테 그랬었지. 나는 독보강호(獨步强豪)는 가능해도 무림제패(武林制覇)는 불가능한 위인이라고……. 나도 이럴 생각은 없지만 내가 복수하고자 하는 상대들이 거대 문파를 거느리고 있고 또 그들이 나와 단독 대결을 벌여 줄 가능성이 없는 이상 나도 세력을 거느려 야만 해. 우선 한중평까지 끌어들인 후 계속적으로 마교의 5대 세력을 본인이 흡수해 주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천리독행이 묵향 앞에 부복했다.

“모두 처치했습니다.”

“좋아, 이제 염왕적자에게로 가자.”

“저…….”

“뭔가?”

“옥 대장군 관저(官邸)에 본대의 부상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거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있나?”

“거의 5백 명 정도…….”

“그럼 수하들을 보내 그들을 수습하여, 가만있자… 어디를 본거지로 삼는 게 좋을까?”

“3백리(약 90킬로미터)떨어진 곳에 흑룡문(黑龍門)이 있습니다. 아쉬운 대로 그들을 접수하심이 어떨까요?”

“좋아, 수하들을 수습하여 그곳에서 합류하기로 하지. 부상자가 그렇게 많다면 자네가 직접 지휘하도록.” “존명!”

“염왕대의 위치를 아는 자가 있나?”

“예.”

천리독행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진철(眞鐵)!”

그러자 뒤쪽에서 흑의인이 쏜살같이 날아와 부복하며 외쳤다.

“옛!”

묵향은 그 진철이라 불린 흑의인에게 말했다.

“너는 본좌를 염왕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존명!”

묵향은 진철을 따라 몸을 날리며 천리독행에게 지시했다.

“흑룡문에서 만나자. 본좌가 도착하기 전까지 접수를 완료하도록!”

“존명!”

그들이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앞쪽에서 많은 수의 흑의인들이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훗, 저쪽에서 찾아오다니 일이 편하게 됐군.”

묵향과 진철이 잠시 기다리자 병장기를 뽑아 든 흑의인들이 주변에 포위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묵향이 코웃음을 쳤다. “염왕적자!”

상대로부터 아무런 답이 없자 묵향은 다시 한 번 더 외쳤다.

“염왕적자! 네놈은 본좌가 누군지 잊었나?”

그러자 묵향 앞쪽을 막고 있는 흑의인들 뒤쪽에서 음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훗! 회음전성(回音傳聲) 따위 얄팍한 술법을 쓴다고 본좌가 네 녀석의 위치를 모를 것 같은가? 네 녀석은 둘 중 하나만 선택해라. 본좌를 따르든지 아니면 교주의 충실한 개로서 여기서 영광스런 죽음을 맞이하든지…….”

회음전성이란 기를 이용하여 음을 굴곡시켜 동(東)에서 말한 것이 서(西)에서 들리도록 조작하는 고차원적인 기술이다. 그런데 그걸 바로 지적하자 상대는 경악했

다.

“헉! 기억을 되찾으셨습니까?”

“물론, 천리독행은 본좌와 함께하기로 했다. 이제 너의 선택만이 남았다.”

“그는… 천리독행은 어디 있습니까?”

“부상자들을 수습하러 대장군 저택에 간다더군. 참내…, 마교가 아무리 썩어도 겨우 대장군부 하나를 부수는 데 천랑대 전력의 9할이 나가떨어지다니……. 믿어 지지 않는 일이야.”

그러자 염왕적자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장군부 하나 부수는 데 그 정도 전력이 깨질 리는 만무했다. 어쩌면 그 원흉은……?

“선택하라. 지금 죽을 건지. 아니면 따를 건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묵향이 마교의 부교주라는 점

사실 묵향이 정파의 고수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들은 철혈의 세계에서 자라온 강자들. 을 들고 나온 이상, 이건 어디까지나 교내의 권력 투쟁이 되는 것이다. 이때는 좀 더 강한 자 밑에 들어가는 것이 여러모로 봐서 자신들에게 낫다. 무엇보다도 묵향 이 마교가 낳은 최강의 고수라는 사실은 변함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정해지자 그는 묵향 앞으로 튀어나갔다. 놀랍게도 그는 목소리가 들린 곳과는 달리 묵 향의 오른쪽에서 나와 부복(俯伏)하며 외쳤다.

“따르겠습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절대 후회는 없습니다. 본교를 접수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야겠지. 더불어 지난날의 복수도 해야 할 거고……. 하지만 밑의 인물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겠다. 그때 나를 암살하려고 모의한 자들을 도운 게 너희들의 뜻 이 아님을 본좌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무기를 들고 포위하고 있던 흑의인들이 저마다 병장기를 놓고 부복하며 외쳤다.

“부교주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묵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염왕적자를 돌아봤다.

“염왕적자!”

“예.”

“모두들 대장군부로 가서 천리독행을 돕도록 하라.”

“존명!”

염왕대와 천랑대는 대장군부에서 부상자들을 수습하여 흑룡문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묵향은 천랑대가 괴멸적인 타격을 받은 것이 자신이 한 일이라는 것을 듣 고 놀랐다.

“모든 것이 내가 한 일이라고?”

“전혀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묵향은 망연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제기랄, 암습을 당한 다음 국(菊)이 나를 이끌고 물속으로 뛰어든 것까지밖에 기억나지 않아. 참, 그러고 보니 그건 총타 부근에서 벌어진 일인데, 여기는……?” 천리독행이 신중하게 설명했다.

“속하도 자세히는 모르나 부교주께서는 암습을 당하신 후 옥 대장군 가 사람들에게 구조되어 기억을 잃은 채 찬황흑풍단에서 일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옥 대장군을 척살하는 사건에 연루되신 겁니다. 부교주께서 기억을 잃으시고 무공이 감소된 것을 안 교주가 능비계 부교주에게 천랑대와 염왕대를 주어 부교주를 없 애라는 명을 내린 거죠. 그런데 싸우는 도중에 부교주께서 기억을 되찾는 바람에 능비계 부교주가 사망했는데……. 이번에는 중간의 기억을 잃으셨다니 하늘의 뜻 인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도 기억이 나시겠죠.”

“크흐흐흐, 그따위 기억 없어도 상관없어. 무림인으로서 관부의 개가 되었던 것이 뭐 자랑이라고 그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하겠나. 우선은 힘을 비축하여 새로운 역사를…, 피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마인(魔人)의 도리. 기왕에 잃은 수하들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남은 부상자들만이라도 완쾌시켜 전력에 보탬이 되도 록 해라.”

“존명!”

흑도 계열인 흑룡문은 문도 수 3천 정도의 제법 큰 방파다. 묵향 일행이 그들을 택한 것은 자신이 거느린 3천에 가까운 식솔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럴듯한 보금 자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흑룡문도 주위에서는 알아주는 문파였으나 마교의 정예 앞에서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간단한 싸움 끝에 항복한 흑룡문주 흑수마령 (黑魔翎) 갈파(葛把)는 묵향의 수하가 될 것을 맹세하고 말았다.

묵향에게는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묵향은 타고난 무인(武人)이라 여태껏 수련에만 전념해 왔었는데 반란도배(叛亂徒輩)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자니 별의별 잡일 을 다 떠맡아야 했던 것이다.

식량, 의복, 무기 등이 하늘에서 거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수천의 문도를 거느린 방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고, 그 모든 것은 서류라는 형 태로 묵향에게 돌아왔다. 묵향이 거느린 천랑대나 염왕대의 경우 무인들로 구성된 집단……. 막강한 힘은 있으나 경영에 관한 머리는 깡통이나 다름없기에 아쉬운

대로 흑룡문주 갈파에게 경영을 맡겼지만, 백지나 다름없는 그가 옆에서 보기에도 갈파 또한 영 아니올시다였던 것이다. 그래서 묵향은 이 중대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천리독행과 염왕적자, 갈파를 불러들여 회의를 열었다.

“아무래도 경영의 귀재를 영입해야겠어.”

“맞습니다. 모두들 검밖에 모르는 돌머리들뿐이니…….”

“왜 본교가 근래에 이르러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지 지금에야 알 것 같더군. 혁무상 그 녀석이야.”

“적미살소 혁무상 장로 말입니까?”

“그래, 나한테도 그런 머리 좋은 녀석이 하나 필요해. 어디 괜찮은 인물이 있다면 천거해 보게. 내가 책임지고 끌고 올 테니까.”

“그럼 혁무상을 납치해 오면 어떨까요?”

“그건 별로 좋은 의견이 못 돼. 그 녀석이 자결이라도 한다면.. 게다가 성심껏 협력할지도 의문이고…….”

“무공을 몰라도 상관없습니까?”

“뭐… 무공이야 몰라도 별 상관없지. 나는 무공 실력을 원하는 게 아니라 머리를 원하는 거야.”

“그렇다면 괜찮은 인물이 있습니다. 하지만 포섭하긴 힘들 겁니다.”

“누군가?”

“진량산 부근에 보면 천륜장원이 있는데 그 장원의 주인이 꽤 실력자라고 들었습니다.”

“장원의 주인? 그럼 무림인인가?”

“아뇨, 무림인은 아닙니다. 적당히 땅을 가지고 있고 상행위도 약간 하는데, 머리가 잘 돌아간다고 들었습니다.”

“흠… 그는 안 돼.”

“예?”

“무림에 뜻이 없는 사람들은 그냥 놔두는 게 좋아. 피의 법칙이 통용되는 무림에 그런 순수한 사람들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지. 그거 말고 예전에 망한 단체의 재정 을 맡았다든지, 뭐 그런 인물들 중에 뛰어난 자는 없나?”

“아, 한 명 있습니다. 예전에 천마문(天魔門)에서 일하던 사람인데, 알력이 생겨 쫓겨난 인물입니다. 천마문은 8천의 문도를 거느리는 흑도 계열의 제법 큰 문파인 데, 거기서 문상(文相)의 직위에 있었던 설무지(雪無知)란 인물입니다. 이름은 호(湖)인데, 익히면 익힐수록 더욱 모르는 것이 많더라고 하여 자신의 무지를 한탄하 며 자를 무지(無知)라 붙인 인물입니다.”

“구미가 당기는 인물이군.”

“그때 쫓겨난 다음 칠야산(柒倻山)에서 은거하고 있다고 그러더군요.”

“좋아, 그자로 하지. 내가 다녀올 동안 저놈의 흑룡문 현판은 떼 버리고……. 흑룡문은 정파 같은 냄새가 나서 영 껄끄러우니까 아무 이름이나 적당한 걸로 현판을 걸어 놓도록!”

“존명!”

이때 갈파가 말했다.

“그런데… 부교주님.”

“왜 그러나?”

“소인이 깔아 놓은 정보망에 걸린 건데, 지금은 별 문제될 것이 없으나 나중에 부교주님의 기억이 돌아오면…….”

서론이 길어지자 짜증이 난 묵향이 말했다.

“무슨 일인지 서론은 빼고 결론만 말해!”

“옥영진을 구하기 위해 출동했다가 염왕대와 충돌했던 흑풍단의 일부가 반도라고 규정되어 관군(軍)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그들을 도와주심이 어떨는지요.” “내가 왜 그들을 도와줘야 하지?”

“아마도 그들 중에는 부교주님과 친했던 인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기억이 돌아오신 다음 후회해도……..

“알겠다. 그들은 지금 어디 있나?”

“확실하지는 않으나 관군에게 쫓기면서 지금 감숙성(甘肅省)의 무산(武山) 부근에 있다고 합니다. 체계적인 정보 조직이 없어서 들리는 소문만을 종합했기에 정 확한 것은 가봐야만 알 것입니다.”

“흠.

그러자 천리독행이 나섰다.

“만약 구하러 가신다면 수하들을 준비시키겠습니다.”

“아니야, 그럴 필요는 없어. 그러면 괜히 관부와 충돌이 생기니까 혼자 가기로 하지. 대신 나는 철야산 쪽으로 갔다가 바로 그리로 갈 테니까 군사(軍師)를 호위할 수하들 열 명 정도 데려가기로 하지. 천리독행! 눈치 빠른 놈들로 부탁하네.”

“존명!”

이때 갈파가 묵향에게 비단 주머니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다.

“부교주님의 무공으로는 별 필요 없겠으나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돌아와야 하는 일입니다. 혼자 가시겠다면 이게 필요할 것입니다. 그냥 들판에 뿌리기만 하시면 됩니다.”

묵향은 그 주머니 위에 쓰인 글자를 읽고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것도 있었군. 잘 쓰겠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