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권 13화 – 어떤 청부

어떤 청부

자그마한 모옥 안, 그 허름한 방의 한쪽 구석에 한 사내가 앉아서 명상에 잠겨 있다. 그가 입고 있는 묵의는 어두운 실내와 그가 풍기는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렸다. 평범한 얼굴이지만 사실 이 사내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평범하게 보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고 있다. 남보다 조금 두터운 눈썹을 평범하게 보이기 위해 적당량 사정없이 뽑아 버렸고, 동경(銅鏡)을 보면서 표정 관리를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었는지…

지금은 세탁하기도 귀찮아서 묵의를 입고 있지만, 일단 밖에 나가면 눈에 띄는 색깔의 옷은 절대 입지 않았다. 그가 다른 색깔의 옷을 입으면 그것대로 또 그에게 는 자연스럽게 그 옷이 어울렸다. 하지만 눈에 띄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평범하게 보인다는 것이 달랐다.

오랜 시간 명상을 끝낸 후 그가 눈을 뜨자 그의 앞에는 큼직한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분명히 그가 명상을 하기 전에는 없었던 것이지만 누군가가 그의 앞에 놔 두고 간 것이다. 그가 누군지는 묵의인도 잘 알고 있었고, 또 그가 들어오는 기척이나 방 안에 들어와서 행한 행동까지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대신 묵의인은 그에 게 아는 척을 안 했을 뿐이다. 심부름꾼은 그 상자 안의 내용이 뭔지 알지도 못하니 아는 척을 해 봐야 입만 아프기 때문이다.

그는 보통 농민들의 손보다는 조금 덜 투박하고 대갓집 자제들보다는 조금 더 투박한 손으로 그 상자를 들어 무릎 위에 올렸다. 고도의 내공과 검술을 익힌 그로서 는 계집아이처럼 고와지는 손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묵의인은 그것도 평범한 조금 투박한 손으로 만들려고 노력했고, 그 노력의 대가가 상자를 들고 있는 손이었 다.

묵의인은 상자 뚜껑에 찍혀 있는 봉인을 세심히 살펴 누군가가 뜯어 보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묵의인처럼 음지에서 살아가는 인물은 비밀이 유지되지 않으면 그날 로 목숨이 날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상자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책자 한 권과 2척 길이의 단검 한 자루, 지갑, 그리고 서신이 있었다. 묵의인은 서신을 들어 서신에 새겨진 봉인도 세심하게 확인한 다음 봉투를 열었다.

특급 지령 : 살(殺)

대상 : 마교 부교주 묵향

기한 : 6개월

무공 수위 : 탈마(脫魔)로 추측

특기 : 강기류와 어검술 등을 주로 하는 검귀지만 그에게는 검이 있건 없건 큰 상관은 없다고 함.

인상착의 : 동봉한 서책(書冊)에 초상화가 있음.

주변 사항 및 위치 : 동봉한 서책에 자세히 기록.

나이 : 65세 정도로 추정.

수련한 무공 : 너무 종류가 많아 동봉한 서책에 따로 기재되어 있음. 사실 그것을 모두 익혔는지는 본좌도 확인 불가. 정사황(正邪皇) 대부분의 검술을 익혔거나 알 고 있다고 추정됨.

특이 사항 : 호신강기가 매우 강하므로 동봉한 보검을 사용할 것. 하지만 아주 작은 살기, 예기에도 반응하므로 최후의 순간이 아니면 뽑지 않기 바람. 최근에 네 명의 호위를 거느린 것으로 조사되었지만 호위들의 무공은 그렇게 강한 편이 아님. 구 흑풍단 소속의 무사들로 추정됨. 잠드는 시간은 불규칙적이며 한두 시진 정도 수면을 취하는 것으로 조사됨. 동자공을 최후의 방패로 써먹었을 정도로 여색을 좋아하지 않음. 도저히 암살이 불가능할 것 같으면 그냥 돌아와도 문책은 없을 것 임.

성격 : 매우 냉정, 냉혹하며 사악한 인물. 인질 따위는 통하지도 않는 상대이니 주의할 것. 고아로 평생을 검과 살아왔기에 가족은 없고 양녀가 한 명 있지만, 현재 그 양녀는 마교에서 인질로 잡고 있음. 하지만 눈도 깜짝 안 했다고 함.

편지의 위에는 묵의인을 뜻하는 버드나무 모양의 인장, 아래에는 보낸 자를 뜻하는 뱀 모양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다 읽은 편지를 삼매진화의 절기로 태워 버리며 무의식중에 묵의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한 마디뿐이었다.

“휴, 괴물이군…….”

묵의인은 단검을 들어서 천천히 검집에서 꺼냈다.

스르르르릉.

검집에서 나오자마자 찬란한 보기(寶氣)를 내뿜는 것이 과연 뛰어난 보검이었다. 그는 그것을 다시 상자에 넣은 다음 지갑을 들어 내용물을 살폈다. 지갑 안에는 흔히 사용되는 열 냥짜리 은표 몇 장과 1백 냥짜리 은표 몇 장이 들어있었다.

그는 일어서서 한쪽 구석에 놓인 큼직한 상자 안에서 보따리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보통 농민들이 즐겨 입는 조금 짙은 회색의 약간 낡은 옷이 한 벌 있었는데 그것으로 갈아입었다. 그런 다음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보따리를 하나 꺼내 검과 몇 가지 옷가지를 싸서 등에 지고는 지갑과 책자는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허름한 방 안이었지만 그는 정들었던 이 공간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번의 먹이 는 한 입에 삼키기에는 너무나도 커서 아무래도 목구멍에 걸릴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한 번 뭔가 자신의 몸속에 어떤 물증이 될 만한 것이 없는지 세심히 살펴봤다. 책자 외에는 증거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책자는 길 가는 도중에 완벽하게 외운 다음 없애 버리면 된다. 그러고 나면 설혹 실패하더라도 상대는 그의 배후를 도저히 밝힐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모든 준비를 갖춘 다음 대장간으로 향했다. 대장간 주인에게 돈을 쥐어 주고 일주일간 대장간을 빌려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만들기 시작한 것은 1 척 정도 길이의 바늘처럼 생긴 길쭉한 쇠막대기였다. 막대기 끝은 바늘처럼 뾰족하게 만들었고 그 끝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끝부분에는 준비해 온 현철(玄 鐵)을 사용했다.

그는 뛰어난 대장장이도 아니었기에 그가 일주일 후 완성한 조금 투박스레 생긴 쇠막대기에는 예기라거나 보기 따위의 신비로운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그를 더욱 만족스럽게 했다. 그는 진기를 끌어올려 그것으로 대장간에 놓여진 쇠판을 몇 번 찔러 보았다. 푹푹 들어가 있는 쇠판의 구멍을 만족스레 살펴본 다음 품속에서 작은 병을 하나 꺼내어 그 속에 들어 있는 걸쭉한 액체를 쇠막대기 끝에 세심하게 바르기 시작했다.

아마 이것에 찔리면 천하에 없는 고수라도 정신을 못 차릴 것이 분명했다. 책자에는 상대가 전직 살수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살수란 직업 자체가 죽음의 냄새를 맡 는 데는 거의 짐승과 같은 감각을 소유하게 된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직접 만든 이 투박한, 그 어떤 예기도 느껴지지 않는 이 무기에 모든 것을 걸 생각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거리 곳곳에 나붙은 방문(訪問) 때문에 전체 무림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인력을 동원했는지 알 수 없으나 중원 전 지역에 걸쳐 곳곳에 방문이 붙어 있었다. 그 방문의 내용으로 말미암아 가칭 사마외도(外道)라고 하여 멸시받던 무사들이 모두들 희망에 부풀기 시작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무림 동도들에게 고함. 본 천마신교 섬서분타에서는 우수한 후진들의 영입을 위해 섬서분타 설립 기념 비무대회를 신년(新年) 1월 5일에 개최하기에 많은 무림제 현들의 참여를 바람.

5위 내의 입상자에게는 보검이나 보도, 그리고 미녀와 5만 냥을 지급함.

10위 내의 입상자에게는 미녀와 3만 냥을 지급함.

50위 내의 입상자에게는 미녀와 1만 냥을 지급함.

100위 내의 입상자에게는 3천 냥을 지급함.

그 외에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은 모든 후진들을 위사(衛士)로 채용할 것이며, 그 지닌 바 무예의 등급에 따라 봉록을 푸짐하게 지급할 예정임. 채용된 위사들은 그 무예의 등급에 어울리는 본교가 지닌 뛰어난 무공들을 수련할 기회를 가지게 되며 의복이나 기타 모든 장비들이 최고급으로 지급될 것임.

천마신교 섬서분타주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