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권 15화 – 진영 공주
진영 공주
묵향은 끈덕지게 만류하는 설무지를 설득하느라고 자신이 아는 온갖 술수를 동원했다. 끝내 묵향이 고집을 부리자 호위 40명을 대동하는 선에서 서로가 합의를 했고, 독립 호위 중에서 세 명은 가짜를 경호하기 위해 남고 마화와 둘이서 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묵향이나 마화도 호위들과 같은 흑색 무복에 장검을 차고 있었으므로 특별히 표시가 나지 않았다. 홍일점인 마화가 약간 두드러질 뿐이었다. 묵향은 난생 처음으 로―기억에 없는 몽고전은 제외하고ᅳ묵혼검이 아닌 보통의 장검(長劍)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그의 묵혼검은 분타에 남아서 그의 대리 역을 하는 가짜가 착용하 고 있었다. 마교 고수들의 임무가 외곽 호위이니만큼 멀찌감치에서 경계를 하고 있었기에 묵향으로서는 속 뒤틀리는 황족이란 것들을 직접 대면하지 않아서 좋았 다.
어찌된 영문인지 열 명 정도의 고수를 파견하겠다던 당초의 통보와는 달리 거의 50명이 넘는 고수가 외곽에 깔렸기에 황궁에서 파견된 호위 담당 장수인 종4품 (宗四品) 금진덕(金眞德) 사령(司令)은 아주 좋아했다. 하지만 금 사령으로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하나 있었다. 언제나 이동을 할 때는 공주와 그녀의 친구 여 섯 명을 호위하는 황군 본대(本隊)는 뒤에서 가고 일단의 선행대가 앞에서 이동하면서 숙식에 따른 여러 가지 계약을 체결하고 또한 수상한 무리가 없는지 감시하 게 되는데, 마교의 무리들 중에 거의 대부분이 앞쪽에 몰려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마교의 고수들을 이끄는 책임자는 항상 뒤에서 따라왔지만 사실상 그는 10여 명만을 직접적으로 통솔했고 나머지 40여 명은 앞의 선행대를 호위하는 듯한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선행대에 그렇게 전력을 집중할 필요가 없으니 그로서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황궁의 패거리는 매 식사 때, 그리고 숙소를 정할 때마다 난리를 부렸다. 실상 그 인원이 260여 명이나 되다 보니 웬만한 규모의 식당이나 여관으로서는 턱도 없는 데다가, 공주의 안전한 호위를 명분으로 그 큰 식당이나 여인숙에 먼저 들어가 있던 손님들을 모두 다 내쫓았기 때문이다.
웬만한 실력의 무림인들도 관부와 충돌을 일으킬 생각이 없었기에 모두들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러나는 판이니 일반 백성들이야 두말할 것 없었다. 그 모든 사람들 의 협조(?) 하에 식당이나 여관이 텅 비게 되면 그때 황군이 그 안으로 공주 일행을 모시고 들어가게 되고, 그 외곽에 10여 명의 마교 고수들이 깔리고 나머지는 함 께 들어와서 식사를 하든지 잠을 자게 되는 것이다.
도중에 큰 마을이 나타나면 공주 일행은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좋다는 허울 좋은 명목 하에 관청으로 향했고, 그 관청에서 일하는 관리들은 다음 날 공주 일행 이 떠날 때까지 진땀을 뺐다. 그 공주 일행이 흥청망청 먹고 마신 비용을 황궁에서 지원해 주느냐 하면 그게 아니었으므로, 돈이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질 리가 없는 관청에서는 당연히 공주 일행이 떠난 다음에 불쌍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족쳐 그만큼의 돈을 더 징수하는 것이다.
2주일 정도는 아주 순조로운 여행이었다. 그런데 그날 점심 식사를 위해 큼지막한 식당을 하나 골랐고 그 안으로 호기 있게 들어갔던 다섯 명의 황군 장졸將卒)들 중의 한 명이 얼마 안 되어 창문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곧이어 묵향 일행이 그 안으로 들어가자 식당 바닥에 네 명의 장졸들이 뻗어 있는 것이 보였고, 그들 앞쪽에는 무림인으로 보이는 한 중년인이 검을 허리에 차고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그 표정도 오래가지 않았다. 마기를 뿜어 대는 인물들이 10여 명이나 식당 안으로 들어섰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묵향이 척 보니 식당 안에는 꽤 많은 무림인들이 앉아 있었다. 이들은 꽤 실력이 있어 보였고 그런 상태에서 눈에 차지도 않는 무술 실력을 가지고 거들먹거리는 관복을 입은 무리 다섯이 들어와서 다짜고짜 나가라고 했으니, 그들로서도 속이 뒤틀리던 차에 저 남자가 화풀이를 했음에 틀림없었다.
묵향은 될 수 있으면 이 일을 좋은 방향으로 처리하고 싶었기에 즉시 말했다.
“마화.”
“예.”
“조용히 처리하고 싶으니 저들에게 사정을 말하고 돌아가라고 하라.”
요즘 들어 묵향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예전과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마화도 잘 알고 있었다. 예전 몽고전에서 알던 묵향과는 달리 그는 귀찮은 일이나 번거로운 것 을 싫어했고 될 수 있으면 말보다는 힘으로 해결하는 경향이 강했던 것이다. ‘웬일이야?”하는 마음이 앞섰지만 마화는 두말 않고 묵향의 지시에 따랐다.
“예.”
마화는 앞으로 나선 다음 가볍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무슨 일 때문에 여기 모이셨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저희는 지금 진영 공주 전하 일행을 호위하여 이곳에서 식사를 하고자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께서는 자리를 비켜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그러자 저쪽에 있던 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그대들은 마교의 고수들이 맞나?”
“그렇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마교도 타락했군. 관부에 빌붙어서 위사 노릇이나 하고 있다니…….”
그 말을 듣자마자 묵향의 뒤쪽에 있던 고수 한 명이 살기를 뿜으며 앞으로 나서려고 했지만 묵향이 그를 말렸다. 마화와 그 남자와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왜 마교의 고수들이 황실에 붙어서 일하고 있는가?”
“그거야 당연히 돈 벌려고 하는 것이죠. 위사 사업은 꽤 수입이 괜찮으니까요. 방금 전에 일으킨 사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을 테니 이쯤에서 물러나 주 시는 것이 어떨까요?”
“우리들도 무림에서는 이름깨나 떨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다짜고짜 나가라고 한다면 말이 안 되지. 사실 이곳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고……? “귀하의 존성대명을 알고 싶군요.”
“뭐 존성대명이랄 것도 없고, 관부의 추격을 받고 싶지는 않으니 알려 주고 싶지 않군.”
드디어 마화도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슬슬 신경질이 나기 시작하는지 말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이름을 알릴 배짱도 없으면 여기서 빨리 나가라. 지금 타주님의 명령이 있기에 참고 있음을 알아야지.”
새파란 계집아이가 떠들어 대자 그중에서 한 인물이 열불이 뻗쳤는지 응대해 왔다.
“새파란 것이 뒤에 있는 고수들을 믿고 날뛰다니…….”
“이것들을…..”
그러면서 마화가 검의 손잡이를 잡고 앞으로 나가려 하자 묵향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말렸다.
“너보다는 고수다. 뒤로 물러서라.”
마화가 뒤로 물러서자 묵향이 빙글거리며 말했다.
“이런 산골짜기에 열 명이나 되는, 상당한 실력을 지닌 고수들이 모여 있다는 것은 좀 이상하군. 그대들은 본좌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고 있는 거냐?”
“…..”
새파랗게 보이는 젊은이가 나서서 본좌 운운 해 대니 상대가 기가 차서 잠시 말문이 막혀 있는 사이 묵향의 말이 이어졌다.
“정파의 인물들이 확실한 것 같은데……. 우리들이 마교의 인물들이라서 시비를 거는 건가? 아니면 공주 일행을 노리고 있는 것인가? 그대들의 능력을 추정해 보 건대, 뭐 2백 명 정도 황군쯤은 2각도 안 되어 찜 쪄 먹겠군.”
“그렇게 말하는 네놈은 누구냐?”
“호오, 네놈이라고? 네놈들은 본좌가 누구신지 알 자격이 없어. 방금 전 우리들을 보고 마교가 관부에 빌붙어 있니 하는 말을 한 것 같은데. 우리들이야 약간의 수 입을 올리려고 이번 관광의 호위를 하고 있지만, 네놈들이야 말로 진천왕(眞天王)의 개가 되어 공주 일행을 납치해서 전쟁을 유리하게 전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 가?”
그러자 몇 명의 얼굴이 조금 벌게졌지만 곧 냉정을 되찾았다.
“꽤 눈치가 빠른 놈이군.”
그와 동시에 그중의 한 명이 앉은 자세에서 그대로 엄청난 속도로 도약해서 묵향에게 쏘아져 들어왔다. 그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뛰어드는 와중에 순간적으로 등에 차고 있던 5척이나 되는 장검을 뽑아 묵향을 내리찍어 왔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 상대는 더욱 경악해야만 했으니 묵향은 피 하지도, 그렇다고 검을 뽑아서 막지도 않고 곧바로 손을 뻗어 상대의 검을 양손가락 사이에 끼워서 잡아 버린 것이다.
상대는 용을 썼지만 손가락 사이에 잡혀 버린 검을 뽑아 낼 수가 없었다. 이윽고 상대가 더욱 힘을 쓰자 탱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두 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러자 어이없다는 듯 부러진 자신의 검을 보던 상대는 묵향에게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귀하는 누구시오?”
“네놈 정도 실력으로 본좌의 이름을 알 자격이 없지. 여기서 사라진다면 너희들을 추격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계속 시비를 건다면 모두 다 없애는 수밖에 없지. 사 실 황실에서 받은 액수로 그대들 정도의 고수를 처치한다면 밑지는 장사거든. 어떻게 할 건가?”
그러자 그들은 서로 눈치를 한 번씩 보더니 갑자기 신법을 사용하여 모두들 식당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상대의 실력으로 보건대 자신들 모두가 한꺼번에 덤벼도 승패를 가늠하기 힘든 데다가, 그 뒤쪽에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 여덟 명의 마기를 뿜어 대는 놈들이 버티고 있으니 그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달아나자 마화는 아직도 상대의 공격이 주었던 그 공포스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한 표정으로 묵향에게 물었다.
“그들을 그냥 돌려보내도 될까요? 아주 무서운 고수들인 것 같던데…….”
그러자 묵향은 아직도 정신을 잃고 뻗어 있는 황군들을 힐끗 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이번 여행에서만 공주를 지켜 주면 돼. 우리들이 호위하지 않는 상태에서 저 녀석들이 공주를 납치한다면, 우리는 공주를 구해 주면서 더욱더 많은 돈을 벌 수 있 지. 사실 호위하는 것보다는 구해 주는 것이 더 돈이 되거든. 저런 계집애 하나 감옥에서 구출하는 것쯤 문제될 것이 없지. 저놈들을 여기서 다 죽여 버리면 누가 공 주를 납치하겠냐? 그러니까 그놈들을 살려 두는 것이 이익이지.”
묵향은 뒤에 서 있는 고수들에게 지시했다.
“저들을 깨워라.”
“존명.”
황군의 장졸들이 깨어나자 묵향은 그 우두머리인 장수에게 말했다.
“상당한 고수들이 공주 일행을 노리는 듯하오. 일단은 우리들이 쫓아 버렸지만 계산을 다시 해야 할 것 같군.”
상대가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묵향이 좀 더 상세히 말했다.
“우리들이 그대들의 외곽 호위를 의뢰받았을 때 분명히 산적이나 기타 잡배들의 공격에 대한 방비라고 들었소. 하지만 방금 그대도 한 대 맞아 봐서 알겠지만 상 대는 대단히 뛰어난 고수다 이 말이외다. 그들의 실력이라면 1각도 안 되어 호위군을 전멸시키고 유유히 공주 전하 일행을 납치할 수 있을 것이오. 우리들은 계약과 는 달리 그런 고수들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하니 당연히 과외로 돈을 더 받아야겠다 이 말이외다.”
“그대는 그들이 누구의 사주를 받고 움직인다고 보시오? 또다시 올 가능성이 있지 않다면 이런 제안을 할 리가 없기에 하는 말이오.”
“당연히 그자들과 대화를 나눠 본 결과 알 수 있었지요. 그 고수들은 진천왕에게 고용되어 공주 일행을 납치하려고 하는 것 같았소. 그러니 그들은 다시 우리들을 덮쳐 올 가능성이 다분히 있고 그렇다면 그들의 실력을 보건대 이쪽에도 피해가 생길 수 있지요. 옛말에도 있듯이 지키는 자 열 명이 도둑 하나를 당하기 어렵다고 하지 않았소?”
“흐음, 그대의 말에도 일리는 있소. 사실 처음 계약상에는 무림의 고수들이 공주 전하를 노릴 것이라는 말은 없었으니까……. 수고료의 액수는 금진덕 사령께 여 쭈어 보고 결정하겠지만 그대들이 원하는 액수는 얼마요?”
“당연히 위험 부담이 높으니 금화 1백 냥은 더 주셔야겠소이다.”
“그건, 그건 액수가 너무 많소. 금화 50냥 정도로 합시다.”
“90냥.”
“60냥.”
“80냥”
“70냥.”
묵향은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75냥, 더 이상은 양보하기 힘드오.”
“좋소, 금화 75냥으로 합시다.”
“이제 액수가 정해졌으니 금 사령에게 말을 잘 전해 주시고, 공주 전하께서 곧이어 오실 것이니 빨리 주인에게 통보를 하시오. 그럼 나는 밖에서 호위를 하겠소.” 상대가 급히 주방 안으로 사라지자 그제서야 묵향은 일부러 딱딱하게 짓던 표정을 풀면서 빙그레 미소 지으며 밖으로 나왔다.
공갈 한 번 잘 쳐서 금화 75냥의 공돈이 거저 굴러 들어온 것이다. 이것은 은화 1천5백 냥이니 은화 다섯 냥이면 한 식구가 1년을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액수다. 그러니 잡수익으로서는 대단한 금액인 것이다.
‘역시 황궁 놈들은 돈이 많거든…….?
사실 떠돌이 무사들이 실력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예상외로 꽤 무술 실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놈들 열 명 가지고는 마교의 정예인 천랑대 네 명을 당하기도 어렵다. 마화의 경우는 흑풍대에서는 손꼽히는 고수지만 무공만을 죽자고 익혀 댄 무공광(武功狂)들과 동년배라도 실력 차가 엄청 벌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인데, 겨우 30대 초반에 이르는 마화의 나이로는 수십 년씩 무공을 익힌 자들과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리라.
묵향과 마화가 관광 겸 호위로 정신이 없는 그때, 한 인물이 높직한 나무 위에서 무엇인가를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위치한 곳은 산 위에 있는 제법 큰 나 무 위였기에, 그는 거의 4리(약 1.6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을 관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내는 그런 것에는 구애를 받지 않는 듯 그 먼 거리를 관찰함에도 인상 하 나 흩트리지 않고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끈질기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넓기는 했지만 허름한 집 뒷마당에 놓아 둔 보따리 하나였다. 그 보따리는 한 시진 전에 몰래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그 런대로 눈에 잘 띄는 곳에 두었지만 아직까지도 집 안의 사람들은 바쁜 일이 있는지 뒷마당으로 나오지 않아서 그 보따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 사내는 끈질기게 집 안의 사람이 나와 그 보따리를 가져가기를 기다렸다. 그 보따리 안의 내용물은 아주 중요 한 것이었고, 그것은 꼭 그 집 안에 있는 사람에게 전달되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그는 혹시나 다른 놈이 그것을 가져가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이렇게 시간 을 축내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거의 오정(午正)이 다 되어 가자 그는 품속에서 말린 고기포를 꺼내어 우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이곳에 보따리를 가져다 놓기 시작한 것은 그가 다 섯 번째로 살인을 저지른 때부터였다. 그는 끈질기게 쫓아오는 추격자들을 따돌리며 이곳까지 도망쳐 왔었는데 그때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을 본 것이다. 그녀는 서른 살은 되어 보였고 세파에 찌든 모습으로 그녀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중년의 남자와 함께 이곳에서 고아들을 돌보고 있는 모습에 그는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이곳에 있는 한 주민에게 수소문을 해 본 결과 그녀의 나이는 고작 스물셋. 어려운 환경으로 인해 그렇게도 늙어 보였나……. 부자들이 고아 몇을 돌 보는 것은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것이 하나의 과시적인 자기 위안이 될 수도 있는 하나의 오락거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도 먹고 살기 힘든 지경에서 남 을 돌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부녀는 별로 윤택한 환경이 아닌데도 고아들을 열한 명이나 돌보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난 다음부터 그의 발길은 자주 이곳을 찾았다. 언제나 보따리 하나를 들고서….
그는 자신의 이러한 감정이 아주 사치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가 이들을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이 밖으로 드러나면, 자신이나 그들이 큰 희생을 치를지도 몰 랐다. 하지만 그는 이 행위를 중단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위험한 행위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의 식구가 늘어나고 부녀와 아이들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지는 것은 은근한 기쁨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6개월에 한 번은 어김없이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그는 언제나 뒷마당에 허름한 보따리 하나를 던져 놓고는 그들이 가져가게 하는 방법을 택했다. 보따리 안에는 언제나 은화 열 냥과 옷가지 등 자질구레한 것들이 들어 있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그들의 생활에 보탬이 되는지는 그들이 보따리를 발견할 때의 그 기쁜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너무 많은 액수의 돈을 넣어 두면 소문이 날지도 모르기에 그가 생각한 최대한의 액수는 은화 열 냥이었다. 아마도 그 정도 액수라면 어떤 할 일 없는 부자가 적선 한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5년이란 세월이 지나는 사이 자그마하던 그녀의 집도 이제는 제법 넓어졌고, 고아들의 수도 6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많아졌 다. 그리고 6개월 정도에 한 번씩 보따리를 던져 넣는 일도 아직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전과 큰 차이점이 있었다.
은화가 아니라 금화로 바뀐 것이다. 금화 열 냥이면 은화 2백 냥이다. 아마도 이 정도 액수면 그녀는 그의 도움이 없어도 아이들과 살림을 꾸려 나갈 수 있을 것이 다.
이제서야 점심을 장만하기 위해 뒷마당에 놔둔 큼직한 장독들에서 몇 가지 양념과 반찬을 꺼내기 위해 그녀가 나왔다. 그녀는 장독 위에 올려 둔 보따리를 발견하 고는 속을 살펴보더니 놀람과 기쁨에 넘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숨어 있던 곳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이곳에서 더 이상의 볼일은 없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와 같이 부근에 누군가 자신의 존재를 눈치 채고 있는 자가 없는지 세밀하게 살피며 그곳을 벗어났다. 만약 자신과 그 고아들과의 연결 고리가 밝혀진 다면 최악의 경우 그 아이들과 부녀는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고, 그 자신도 상대의 그물에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밝힌 자가 자신이 소속된 방파라고 한다면 그건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상대가 동료라 하더라도 이런 자신의 약점을 잡는다면 상황이 아주 안 좋은 방향으 로 흐를 수 있다. 하지만 위험한 이 일도 오늘로 끝이었다. 아니 끝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번에 주어진 일은 힘든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 심결에 한마디가 새어 나올 수밖에 없었으리라.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