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권 2화 – 뛰어난 모사를 얻다

뛰어난 모사를 얻다

“이런 빌어먹을, 칠야산이 이렇게 넓을 줄은 생각도 못 해 봤군.”

묵향은 10인의 호위 무사를 거느린 채 4일째 수색 중이었다. 칠야산 곳곳을 이 잡듯이 뒤져 댔지만,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설무지의 행방은 묘연했다. ‘칠야산에 불을 지르면 숨이 막혀서 튀어나올까……??

급기야는 짜증스러움에 이런 망상까지 하게 될 때쯤, 동쪽을 살펴보러 갔던 수하가 달려와서 묵향의 앞에 부복하며 외쳤다.

“찾았습니다.”

“그래? 가자!”

자그마한 모옥(芼屋)……. 그 모옥을 중심으로 묵향의 신호에 따라 사방에서 수하들이 몰려들었다. 모든 수하들이 도착하자 묵향은 그들을 외곽에 놔둔 채 혼자 만 모옥으로 다가가 부드럽게 외쳤다.

“계십니까?”

“……”

“계십니까? 저는 묵향이라 합니다.”

아무런 답이 없자 묵향은 조심스레 다가가 문을 열어 봤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방 안의 공기가 절대 폐가가 아님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거기에 덧붙여 황 급히 떠난 듯 살림살이도 거의 다 있었고 일부만이 방바닥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몇 시진 전까지 사람이 있었다. 볼일이 있어 딴 곳에 갔나? 아니면 저놈의 마기를 풍겨 대는 수하 놈들 때문에 겁먹고 도망가 버렸나……. 하여튼 도움이 안 되는 놈들이군, 쯧쯧.’

묵향은 멀찍이서 기다리고 있는 수하들을 원망스레 바라보다가 생각을 돌렸다.

‘겁을 먹었다면 어쩔 수 없다. 편지나 남겨 두고 돌아갔다가, 다음에는 혼자 와서 뒤져 보는 수밖에. 강한 건 좋은데 마기를 안 풍기는 놈들이 없으니. 그래서 사군 자는 일부러 마기 없는 놈들만 넣은 것이었는데…….?

묵향은 주인이 없었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방 안에 놓인 지필묵(紙筆墨)을 이용해서 그럴듯한 편지 한 장을 남겨 둔 다음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괜히 주변에 남아 있으면 아마도 감시 중일 게 뻔한 상대가 더욱 조심할 것이 분명하기에 아예 모두를 이끌고 마을로 내려가 버렸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묵향은 수하들을 이끌고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모옥에서 50장(약 150미터) 밖에 그들을 대기시켜 둔 후 모옥으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모옥 앞에 있는 밭에서 한 남자가 곡괭이를 들고 밭을 매고 있었다. 묵향은 그에게 다가갔다. 한 쉰 살은 되었으리라. 희끗한 수염과 얼굴 곳곳에 새겨진 세월의 상처들이 그의 경륜을 나타내는 듯했다. 맑고 잔잔한 눈에 적당히 솟아오른 콧날.. 확실히 농부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지적인 얼굴이다. 묵향은 그가 일을 마칠 때까지 그 냥 옆에 서서 기다렸다.

이윽고 곡괭이 소리가 멈추더니 그 농부는 묵향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차라도 들겠소?”

“예.”

농부는 부엌에 들어가더니 손수 차를 준비해 왔다. 묵향이야 그다지 차를 즐기는 인물은 아니었기에 그런대로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만 행동하며 차를 마셨 다. 그런 의미에서 유백 사부는 그에게 많은 가르침을 줬던 것이다.

조용히 차를 마시는 묵향을 바라보며 농부는 생각했다.

‘알 수가 없군. 차를 마시는 모양으로 보아… 결코 교육을 잘 받은 사내는 아니다. 타고난 무골처럼 행동하지만 겉모습만 봐서는 무공을 익힌 것 같지도 않으 니……. 거기에 저 칙칙한 눈동자, 결코 정도를 걷는 인물은 아니야. 계속 보니 그냥 칙칙한 게 아니군. 맑지만 너무나 깊다 보니 칙칙하게 느껴지는……. 그렇다 면??

“손님께서는 어떻게 오셨는지요?”

“이미 편지를 통해 아시겠지만 저는 설 대인을 애타게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제가 거느린 식구가 많다 보니 먹여 살리기도 힘들고, 또 효과적으로 이들을 통제해 나갈 인물이 절실한 실정입니다. 설 대인의 뛰어난 능력을 저와 함께 꽃피워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함께 꽃피워 뭘 하자는 것입니까? 무림통일? 대문파로 키우는 것? 도대체가 알 수가 없군요.”

“뭐가 말씀입니까?”

“저도 관상(觀相)을 볼 줄 압니다. 하지만 당신은 피비린내 나는 무림과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이고… 더구나 무림통일 따위의 허황된 꿈을 좇을 인물도 아닌 듯한데…”

“우선 저는 작은 꿈을 이루려 합니다. 나머지는 그 후에 생각할 문제죠.”

“작은 꿈이라니요?”

“사적인 저의 자그마한 복수입니다.”

그러자 설 대인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복수라구요? 겨우 하찮은 타인의 복수 따위를 해 주자고 자신의 인생을 맡길 인물도 있을까요?”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그것도 상대 나름이 아니겠소? 내 상대는 마교…, 아니지 어쩌면 무림 전체를 상대로 싸워야 합니다. 그들을 부수려면 너무나도 큰 힘이 필요하고, 그런 힘을 효과적으로 이끌 능력이 제겐 없습니다. 힘을 빌려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자 설 대인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작은 복수가 아니군요. 어쩌면 세상을 뒤집을 일인데, 과연 당신에게 그런 능력이…….”

그의 말에 묵향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미 마교가 가진 드러난 힘의 4할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저 또한 마교의 인물. 천마(天魔)의 법칙(法則)을 잘 알기에 승산이 없는 대결은 피하는 사람이니 저 를 믿어 주실 수는 없을까요?”

묵향의 말이 떨어지자 설 대인은 경악했다.

‘드러난 힘의 4할이라고? 그러면 웬만한 문파 정도가 아니라 세상을 피로 물들일 힘이로군. 놀라운 인물이로다. 그런데 전혀 마인처럼 보이지가 않으니 도대체 어 느 정도로 수련을 쌓은 인물인지 상상도 가지 않는군.’

묵향은 그가 경악한 표정으로 말이 없자 다소곳이 말했다.

“지금 결론을 내리기 어려우시다면 며칠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 시간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야 별수 없다. 눈앞의 인물이 별 볼일 없는 인물도 아니었고, 자신 또한 죽는 그날까지 초야에 묻혀 지낼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모사(士) 란 주인을 잘 만나야 그 능력을 꽃피울 수 있다. 설무지는 그런 인물이 눈앞의 흑의인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소인의 능력이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닌데 삼고초려(三顧草廬 : 유비가 제갈량을 얻을 때 초가집을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 것을 이르는 말)를 하시겠다니…….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나으리를 모시겠습니다.”

“감사하오.”

“소인에게는 자식이 둘 있습니다. 둘 다 멍청하지는 않으니 속하와 함께 거두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좋소. 능력 있는 자는 아무리 많아도 부담이 되지 않는 것. 좋을 대로 하시오.”

“그렇다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설무지는 신형을 날려 뒷산으로 날아갔다. 보통 사람들이 봤을 때는 꽤 괜찮은 신법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무공에 대한 성취는 학문에 못 따라가는 모양이군. 하기야 말이 좋아 팔방미인이지. 오히려 여러 가지를 조금씩 아는 자보다는 한 가지에 정통한 자가 더욱 필요 한 게 현실이야. 한평생을 바쳐 한 가지도 이룩하기 어렵거늘.. 수십 가지 재주를 모두 꽃피울 수는 없겠지.’

조금 시간이 지나자 설무지는 두 명의 자식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한 명은 조금 병약해 보이는 사내였고, 또 한 명은 그런대로 튀지도 빠지지도 않는 얼굴을 가진 여자였다. 둘 다 무공은 겉만 핥았을 뿐 진수(眞髓)를 맛보려면 애당초 그른 인물들이었지만, 묵향에게는 그런 그들이 자신에게 너무나도 필요함을 한눈에 알 수 있 었다. 설무지는 둘에게 말했다.

“주군(主君)이시다. 앞으로 충성을 다해 모시도록 해라.”

“예.”

“이 아이는 설민(雪)이라 하옵고, 이 아이는 설령(雪伶)이라 합니다. 예로부터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이 있습니다. 무림사(武林史)를 거슬러 보면 영웅은 목 적한 바를 이룬 후 끝까지 영화를 누렸으나 그를 도운 모사의 말로는 비참하게 끝난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주군을 받듦에 있어 제 생을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제 능 력을 시험하고자 합니다. 제가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해 보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나중에 남는 것이 죽음이라 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 서…….”

설무지는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어 그의 머리카락과 그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조금씩 잘라 묵향의 앞에 놓았다.

“언젠가는 주군이 저희들의 목숨을 원할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여태껏 있어 왔던 역사의 순환. 저는 지금도 그걸 거스를 생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 니다. 이것은 저의 생명이니 나중에 일이 끝난 후 실물을 취해 가셔도 저로서는 제가 지닌 바 모든 능력을 다할 수만 있다면 아무런 여한이 없다는 점을 여기서 밝힙 니다. 대신에 주군께도 저희들에 대한 그만큼의 신뢰를 부탁드립니다.”

“좋소. 내가 아무리 사냥감이 없어져 배가 고파도 그대들을 삶아 먹을 생각은 없지만 그대의 생각이 정 그렇다면 그 뜻만은 받아들이지. 여봐라.”

묵향의 부름이 있자 50장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하들이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려와 부복하며 외쳤다.

“예.”

“일단 도착할 때까지 이들의 몸에 티끌만 한 상처라도 생긴다면 너희들의 목숨으로 그 죄를 묻겠다. 이들의 경호에 최선을 다하라!”

“존명.”

“너희들은 군사(軍師)를 모시고 돌아가라. 나는 일이 있어 따로 행동하겠다.”

“존명!”

묵향이 갑자기 군사라 칭하자 설무지와 자식들은 놀랐다. 사실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는 상태에서 보자마자 그 직위를 결정해 준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커다란 신뢰의 표시였기 때문이다.

“주군께서는 어디로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흠, 뭐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오. 좀 쑥스러운 말이지만 날 아는 사람들을 좀 데리러 가는 길인데…, 나중에 본거지에 도착해 보면 자연히 알 수 있을 거요. 그럼 나는 가 볼 테니 가는 길 몸조심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