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권 22화 – 암습

암습

아늑한 방 안에서 다과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건만 화기애애한 담소가 오가는 것이 아니라 숨통이 막힐 듯한 분위기였다. 누가 검을 당장 뽑아 든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의 괴괴한 분위기……. 둘의 복색은 저마다 달랐지만 하나의 큰 공통점이 있었다. 마기……. 두 사람은 모두 마기를 은근히 뿜어내고 있었 다. 이때 탁자의 상석에 앉은 인물이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오랜 친우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화급을 다투는 일이다.”

그러면서 그는 은은한 자색을 띤 손을 품속에 넣어 봉서(書)를 꺼내어 건네주며 말했다.

“그에게 전하라. 그리고 재삼 당부하지만 지금 행할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함께 동행할 수하들에게도 최후의 순간까지 목적지를 말하지 말아야 한다. 이 방을 나선 다음에는 그 누구도 믿지 마라.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배신을 당한다면, 속하만으로는 좀…….”

“배신을 당한다면 서신이 적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게 기필코 없애 버려라. 다행히도 그에게 도착한다면 그 서신을 건네주며 그에게 말하라. 조만간에 본좌의 성의 (誠意)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존명!”

“그대를 택한 것은 어떤 일이 닥쳐도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본좌가 믿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서신을 전하겠습니다.”

따뜻한 가을햇살을 받으며 한 사내가 장작더미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 군데군데 주근깨가 박혀 있는 그리 잘생기지 못한 얼굴에 언제 씻었는지 땟물이 흘 렀다. 헤 벌어진 입술 옆으로 침까지 흘리는 걸 보니 이제 조는 단계를 건너뛰어 아예 꿈나라로 입문(入門)하는 모양이다. 그의 옆에는 아직 패지 못한 통나무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면, 한참 장작을 패다가 잠깐 휴식을 취한다고 기대앉은 것이 탈인 모양이다.

고달픈 하인 생활에 이런 기가 막히게 달디단 휴식을 잠시나마 취하는 게 무슨 큰일이겠냐고 모두들 생각하겠지만 지금은 문제가 달랐다. 왜냐하면 바로 그의 앞 에 못마땅한 눈초리로 쏘아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봐…….”

끓어오르는 것을 참으며 점잖게 사내가 불렀지만 꿈나라에 한 다리를 걸친 이 속편한 녀석에게 그게 들릴 리가 없다. 하지만 꿈나라에 들어간 하인에게는 불행하 게도 지금 그를 부르는 이 양반은 평소에도 말보다는 손이 빠른 사람이었으니…….

퍽!

그 사내의 손이 소문만큼이나 매운 듯 완전히 얼굴이 반 바퀴는 돌아갔지만 하인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황감한 표정으로 비굴하게 말했다.

“크악! 나오셨습니까요? 나으리…….?”

“쯧쯧쯧, 장작을 겨우 그거 패 놓고 잠이 오더냐? 이 밥버러지야. 빨리 그거 패 놓고 부엌의 물통들에 물을 가득 부어 놔라. 알겠느냐?”

말이 물통들이지 이 많은 식구가 한 끼를 먹는 데 들어가는 물이 적은 양이 아니었다. 평소에도 세 명이 달라붙어서 묵직한 물통을 한 시진은 죽자고 져 날라야 하 는데……. 그 때문에 모두들 물 운반을 싫어하기에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근깨 하인 같은 경우 물 운반 대상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곳에 온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이란 대단히 소중한 것이기에 독 같은 것을 탈 수도 있으니까 믿을 수 있는 하인들에게만 이 작업을 시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주근깨 하인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벌칙으로 떠맡은 것이지만 지어 놓은 죄가 있기에 반발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는 체념한 듯한 구슬픈 표정으로 답했다.

“예…….”

하지만 놀랍게도 그 사내가 멀리 사라지자 멍청하게 보이던 그의 눈에서 번쩍하고 빛이 났다. 하지만 그것은 나타날 때도 갑작스러웠지만 곧이어 사라졌다. ‘흐흐흐, 물이라……. 이 기회를 만들려고 일부러 자는 척한 줄은 몰랐을걸…….’

“제기랄…….”

이곳은 정말 마음에 안 드는 곳이다. 외곽의 담장을 따라 곳곳에 수많은 고수들이 숨어서 정말이지 지독할 정도로 보초를 서고 있다. 물론 동편에 있는 창고들에는 곡식이나 각종 값어치 있는 물건들이 많이 들어 있으니 그 정도 경계는 해야겠지……. 사실 이 정도 감시망이 펼쳐져 있다면 도둑 걱정은 평생 가도록 안 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로서는 더욱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었다. 그것은 내당과 외당의 사이에 지독한 진법이 펼쳐져 있다는 점이다. 낮 동안의 서너 시진 정도는 일부 진법이 해제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일부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외길, 딱 통로 한 개만 개방되는 것이다. 거기에 살벌한 고수들 10여 명이 배치되어 철저하게 출입인 들을 감시한다. 도대체 내당 안에 금덩어리를 얼마나 쌓아뒀기에 저 정도까지나 할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놈들이다. 아마 황궁이라도 이 정도까지 경계

를 하지 않으리라…….

그는 오늘도 산책이라는 핑계로, 아니지 이놈의 산책… ‘달구경’이라는 말도 모두들 눈치 챈 지 오래다. 달구경은 핑계고 그가 정연(鄭蓮)이 년하고 눈이 맞아서 쏙닥거리러 밤마다 나간다는 건 모르는 놈이 거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정연이는 마당이나 방을 청소하는 계집인데 사실 두리뭉실하게 생긴 것이 조금 귀여운 맛 은 있는지 몰라도 도저히 그의 입으로도 차마 예쁘다는 말은 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하녀다.

이틀 전에 이르러서야 그는 천신만고 끝에 정연이의 입술에 가벼운, 정말이지 가벼운 뽀뽀를 할 수 있었다. 근본이 천생(賤生)이라 사내들하고 함께 부대끼며 살 다 보니 닳고 닳아가지고 웬만한 칭찬으로는 넘어오지 않아서, 정말 마음속으로 찔리는 것을 느끼며 눈 꽉 감고 예쁘다는 칭찬을부처님 용서하세요. 저는 그날 거짓말을 하고야 말았답니다—해 줘야만 했다. 그놈의 입술이 뭔지……. 그날따라 왜 그리도 위에서 뚫어지게 노려보는 달님에게 미안하던지. 역시 거짓말은 하면 할수록 버릇되니 처음부터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는 천천히 정연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누가 봐도 산책하는 것처럼 점잔을 빼면서 주위를 찬찬히 훑어보며 느긋하게 걸었다. 그리고 오늘은 달도 누가 씹어 먹었는지 자그마해져 있었지만, 뭐 며칠 더 지나고 나면 다시 언제나처럼 동그래질 테니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작더라도 달은 떠 있었 고 그는 그것을 본다는 핑계로 나온 것이니까…….

“떠그랄, 모두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다 알고 있겠지..

그가 걸어가는 길 왼편으로는 1장 반은 됨직한 담장이 둘러져 있다. 내당과 외당 사이에는 두 개의 담이 쌓여 있고, 담과 담 사이에는 진법이 설치되어 있다. 그가 걸어가는 길의 왼편 담을 통해 으스스한 살기가 느껴지는 것이 하인들 사이에 나도는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그 담 주변으로는 2장 정도의 길이 나 있기에 한 밤에 산책하기에 제법 그럴듯했다. 그가 정연이의 입술을 훔친 곳도 담에서 2, 3장 떨어져서 세워진 건물들 사이의 으슥한 장소였으니까…….

계집은 일단 남이 안 보는 으슥한 곳으로 유인해서 누가 들어도 거짓말임이 확실한 감언이설로 꼬드겨도 간단히 넘어오는 걸 보면 바보는 바보인 모양이다. 언제나와 같은 하루가 끝나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 검은 그림자 하나가 담 안에서 튀어나오며 쏜살같이 암흑의 대지를 가르며 사라져 갔다. 하지만 그는 그 것을 보지 못했는지 그대로 천천히 걸어갔다.

사실 그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이 달밤에 볼 수 있다면 이미 하인 노릇은 그만둬도 될 것이다. 어디를 가도 칼 차고 밥 먹을 수 있을 테니, 이놈의 힘든 하인 노릇을 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하지만 눈치 채지 못하고 걸어가던 그도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땡땡땡…..

“암습이다!”

“놈을 놓치지 마랏!”

곳곳에서 횃불이 켜지기 시작했고 곧이어 그의 앞이나 위쪽으로 20여 개의 검은 그림자들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그것도 알아보지 못했다. 대신 그는 정연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난리가 났으니 그 눈치 없는 년을 방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멍청하게 서성거리다가 잘못 걸리면 없는 죄를 뒤집 어쓰고 시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달음박질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눈앞에 다섯 명의 흑의인들이 살기를 풍기며 서 있었던 것 이다.

“헉…….?

“네놈은 누구냐?”

“길지(佶止)라 하옵니다요, 나으리. 짐 나르는 하인이굽시요.”

“어디를 가는 길이냐?”

“저, 달구경하러….”

“뭣이?”

흑의인들 중의 한 명이 언제 다가왔는지 순식간에 그의 앞으로 다가온다 싶자 벌써 그의 몸은 상대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잡혀 공중에 대롱거리고 있었다. “이놈이 노부를 능멸하려 들어?”

이때 또 다른 흑의인이 한 명 나타나면서 그는 상대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아닙니다. 요즘 들어 계집종하고 눈이 맞아서 달구경을 핑계로 돌아다니는 놈입니다. 매일 이 시간에 그 계집종하고 주위를 배회하니까요. 그리고 저쪽에서 부터 걸어오는 것을 제가 보고 있었습니다. 저하고 둘은 여기 남았고, 나머지는 이자의 앞쪽으로 지나간 검은 옷 입은 놈을 쫓아갔습니다.”

그 보초의 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다섯 명의 흑의인들은 보초가 가리킨 방향으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가 버렸다. 도대체 왜 갑자기 다섯 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 졌는지 궁금해하는 듯한,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는 하인 한 명을 뒤에 남겨 두고…….

아직도 잠이 덜 깼지만 어딘지 초조함이 감추어진 목소리였다.

“그놈은 잡았습니까?”

그러자 설무지 앞에 서 있는 흑의인은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즉시 답했다.

“예, 하지만 생포하지는 못했습니다. 품속에 지니고 있던 독으로 자결했습니다.”

“흐음, 뒤를 캐기는 힘들겠군요. 하기야 마교 아니면 무림맹의 짓일 테니……. 뭐 상관은 없겠지요. 참, 그는 어찌 되었나요?”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즉사였습니다.”

“사인은 뭐였지요?”

“비수 때문이었습니다. 놈들도 독 따위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니까 비수에 강한 미혼약과 지독한 춘약으로 알려진 대라환락분(大羅歡樂粉)을 섞은 것에, 아직 확 실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또 다른 하나를 더해서 그것들을 비수에 발라 사용했습니다. 왜 죽었는지도 모르고 죽었을 겁니다.”

“호위들은?”

“모두들 자고 있었기에 죽은 자는 없습니다. 사실 그를 꼭 호위할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놈이 암습을 가하기 전에 수면제를 물에 섞었기에……. 아주 천천히 작용 하는 것을 미량 섞었기에 즉시 반응이 나타나지 않은 데다가 일단 잠든 사람들은 일어나기 어려웠습니다. 보초들은 심한 졸음이 올 정도였으니, 대응이 한 박자 늦 어질 수밖에 없었지요. 어쨌든 그놈을 잡아 놓고 보니까 외당에서 하인 노릇하던 녀석이었습니다. 온 지 3개월 정도밖에 안 되어 물 나를 처지는 아니었는데 낮에 졸다가 들켜서 물을 운반하라는 벌칙을 받은 모양입니다.”

“흐음, 어쩌면 살수를 도운 놈이 있을지도 모르니 그 벌준 녀석부터 시작해서 외당 쪽의 의심나는 인물들을 철저히 감시하라고 하세요. 그리고 내당 쪽에 우물이 완성될 때까지 외당에서 들여오는 물을 철저히 조사하세요.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예, 암습을 한 놈이 도주하는 중에 붉은색 신호탄을 하늘로 쏴 올렸습니다. 모두 세 개의 신호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푸른색과 노란색이 나는 신호탄은 그놈의 품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놈도 살아서 도망가기는 그른 줄 알았을 테니 성공 여부를 가지고 어떤 약속을 한 모양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하급 무사들에게는 지금 타주께서 돌아가셨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흐음, 타주께서 건재하다고 수하들을 모아 놓고 일장 훈시를 할 수도 없는 입장이니……. 중상(重傷)으로 합시다.”

“예?”

“타주께서 중상을 당하셨다고 소문을 내세요. 그리고 태백산 비밀 분타에도 이 사실을 알리시오. 염왕적자 대장에게 될 수 있다면 빨리 그를 찾아오라고 전하세 요. 그리고 믿을 만한 고수 몇 명을 이쪽으로 돌리고 하위급 고수들은 1백여 명만 남기고 모두들 빠른 시일 내에 태백산으로 보내세요. 최악의 경우 조만간에 적의 기습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