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권 24화 – 다시 만난 괴인
다시 만난 괴인
백운옥이나 초류빈은 백씨세가에 도착하기까지 거의 2주일 동안 함께 여행을 하며, 자신들이 처음 접해 보는 묵향이란 마교도를 주목해서 관찰했다. 초류빈이야 묵향에게 자신의 생을 의탁한 처지였기에 만약 주인감이 아니라면 뺑소니칠 생각이었고, 백운옥은 말로만 들었지 ‘사악한 마교도’를 처음 봤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둘이 대단한 호기심으로 묵향을 관찰한 결과 몇 가지를 알 수 있었다. 확실히 들은 대로 마교도는 마교도였다. 어떤 관습이나 체면 따위에 얽매이지 않 는 자유분방함. 거기에 무림에 통용되는 문파 간의 존중 따위는 아예 없었다. 그건 함께 백씨세가로 여행을 시작한 지 4일째에, 주변에는 그래도 이름이 나있던 ‘진 무문(晉武門)’이라는 정파 계통의 제자 열두 명을 만나면서 알 수 있었다. 비록 면사를 썼다고 하지만 꽤나 미인인 듯한 소저와 그의 시비를 보고 옆에서 조금 농을 걸어 오며 장난을 치던 세 명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네 명의 팔뼈를 부숴 버린 것이다. 세상에, 그것도 미소를 지으며 아무런 망설임 없이…….
뒤미쳐서 그녀의 호위 무사 다섯 명이 말과 마차를 대어 놓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신들이 누구에게 추태를 벌인 것인지 눈치 챈 그들이 먼저 슬쩍 도망쳐 버리 고 말았지만……. 그때 묵향의 잔인했던 얼굴은 백운옥과 그 시비의 뇌리에 아주 오랫동안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꼴같지 않게 무림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잘해 주는 편이었고, 특히나 자신의 수하로 들어온 초류빈에게는 상당한 신경을 써 줬다. 그의 무공을 봐 준다든 지 하면서……. 그래서 하루는 백운옥이 자신보다는 자신의 시비에게 더욱 따뜻하게 대해 주는 묵향에게 조금 신경질이 나서 한마디 한 적이 있었다.
“진랑이에게 마음이 있으신 거 같은데, 오늘 밤 빌려 드릴까요?”
뭐, 주인이 계집종과 하룻밤 함께 잤다는 것은 정말 농담거리도 되지 않는 그런 시대였기에 주인이 손님에게 마음에 들어 하는 계집종을 빌려 준다는 것도 자주 일 어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묵향은 그 질문을 처음에는 가볍게 받아들였다.
“아니, 필요 없다.”
“어떻게 보면 여자한테 약하신 거 같기도 하고, 강하신 거 같기도 하고, 도저히 감이 안 잡히는데 좀 알려 주실래요?”
“흠, 감히 노부의 속마음을 알아내려고 시건방지게 굴지만 않는다면 누구와도 잘 지낼 수 있지. 그래서 너하고는 사이가 좋을 수 없는 거야.”
그러면서 묵향은 똥 씹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백운옥을 뒤로 하고 목욕하러 가 버렸다.
백씨세가까지 제법 오랜 시간 진행된 여행으로 백운옥과 초류빈, 시비, 그리고 경호 무사 다섯 명은 묵향의 괴상한 성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 디로 말하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과 같은 성격이라는 결론에, 아예 묵향을 건드리지 않는 게 최상의 길이라는 대응책까지 뽑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묵향의 성격에 가장 빨리 적응한 것은 시비였다. 그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백씨세가에 들어가 시녀 노릇을 해 왔기에 눈치가 빨라 상전의 기분 변화를 재빨리 알 아채는 재주를 익혔던 것이다. 마음 좋은 상전이라면 상관없지만 성격이 모난 상전이라면 곧바로 따귀가 날아오는 것이다.
그런 점에 미뤄 보면 아예 가식이라곤 거의 없는 묵향의 성격이 밑의 사람이 모시기에는 최고의 성격이었다. 조금 기분이 언짢은 것 같으면 접근을 안 하면 그만이 요, 조금 기분이 좋은 것 같을 때 주위에서 서성이면 운 좋게 금음(琴音)이라도 얻어 들을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 적응한 무리들은 호위 무사들……. . 건드리지만 않으면 되니 주위로 가지만 않으면 된다는 결론. 멀찍이서 죽은 듯이 조용히 있으면 찾아와서 시비까 지 거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들로서는 찾아와서까지 행패를 부리지 않으니 무슨 짓을 하든지 그냥 멀찌감치 서서 구경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아마도 묵향의 성격에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인물이 백운옥일 것이다. 그녀는 백씨세가의 금지옥엽. 여태껏 아쉬운 것 없이 자신을 떠받들던 무리들에게 감싸여 자라 온 인물이니, 제멋대로인 이 녀석과 도저히 한자리에서 공존할 수 없는 성격이라고 할까……. 사사건건 간섭하며 성질부리다 이틀 전에 따귀 한 대 맞은 다음 정신을 차리고 요즘은 아예 묵향에 대해 신경을 끄고 있었다.
마차가 제법 큼직한 장원(莊園)에 이르렀을 때 일행의 여행도 끝이 났다. 예전에 백가장(白家莊)이라 불렸으나 그 규모가 커지자 세가(世家)로 불리기에 이른 것이 다. 1천 명이 넘는 식구를 거느리게 된 백씨세가는 일대에서 가장 거대한 무력 단체였고, 그 무력을 기반으로 각종 사업을 벌여 그 수입으로 기반을 더욱 튼튼하게 다져 오고 있었다.
사악함과 공포적인 힘의 대명사인 마교 같은 경우도 음으로 양으로 수많은 사업체를 거느리고 있다. 그만큼 무림과 상권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다. 사람이란 동물이 흙이나 공기만 먹고 움직일 수 없기에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자신들의 상권을 지키려면 강력한 무력이 필요했고, 또 그 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 은 돈이 필요했다. 그러니 각 문파가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그건 문제가 될 게 없었다. 문제는 자신들의 상권을 아무에게도 뺏기면 안 되었고 될 수만 있다면 남의 상권을 빼앗아야만 했다.
상권을 뺏기면 그만큼의 돈이 줄어들고, 그렇다면 그들이 유지할 수 있는 무사의 수도 줄어들게 된다. 그렇다면 상권은 왜 뺏기느냐? 대부분의 경우 정당한 상거 래에 의한 경쟁 때문에 뺏기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 상권을 놓고 문파끼리 칼부림을 해서 서로의 구역을 뺏어 나가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무림에서는 수많은 다툼 이 벌어졌고 오늘의 명가가 내일은 거지 소굴로 변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점을 감안해 본다면 과거 한낱 백가장 정도로 불리며 무림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 작은 장원이 1천여 식솔을 거느리는 거대 문파로 발전한 것은 그 가주들의 뛰어난 능력을 대변해 주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서 오너라.”
6척에 가까운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흰색의 문사) 차림을 한 40대 정도로 보이는 인물이 마차에서 내리는 백운옥을 반겼다.
“다녀왔어요, 아빠.”
“뉘시냐?”
물론 마차에서 꾸역꾸역 내리고 있는 묵향과 초류빈을 보고 한 말이었다.
“이분은 초씨세가의 탈명도 초류빈 소협, 그리고 저분은 묵향 분타주에요. 이쪽은 저의 아버님이세요.”
“오, 반갑구려. 어서 들어오시오.”
백운옥의 소개로 백씨세가의 부가주 분광창分光槍) 백상) 대협이 가볍게 포권했고, 그에 따라 묵향, 초류빈이 마주 포권했다. 묵향이야 이런 시골 문파 따위 알바가 없었지만 그래도 정파에서는 큰 문파였는지라 초류빈이 아는 척을 했다.
“대명을 익히 들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허허허, 안으로 듭시다. 이번에 좋은 차를 구했다오.”
귀하기로 이름난 용정차의 향긋한 향이 퍼져 가는 가운데 주객(客)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운옥의 전음으로 묵향이란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대강 알게 된 백상 대협으로서는 별로 유쾌하지 못한 자리였다. 정파로 이름 높은 백씨세가의 마당 안에 마교도가 들어오다니……. 하지만 백상 대협은 감히 발작을 일 으킬 수는 없었다. 상대의 실력이 아무래도 수상쩍었던 것이다. 만만해 보인다면 곧장 병신을 만들어 내쫓겠지만, 영 만만해 보이지가 않았다. 거기에 초류빈까지 거느리고 괜히 일을 벌여 망신을 당할, 아니 어쩌면 목숨을 날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허허허, 이번 여행에서 혹시 여식이 실례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는지요?”
“…..”
“차를 조금 더 드시겠습니까?”
“…..”
이쪽에서 떠들어도 묵향은 닥치고 있었고, 당연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초류빈과 백운옥이 끼어들어 떠들어 대고 있었지만 한쪽에서 인상 쓰고 가만히 있으니 분위 기가 날 리 없었다. 이윽고 차를 다 마신 묵향이 쓱 일어서면서 말했다.
“먼저 가서 좀 쉬어야겠소. 방을 좀 안내해 주시오. 그리고 노부를 찾는 사람이 혹시 있으면 노부에게 지체 없이 알려 주면 고맙겠소.”
“…그러지요.”
묵향이 나가고 나자 백상 대협은 딸에게 질문을 퍼부어댔다.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전음으로 말씀드린 대로예요. 우연히 만나서 왔는데, 단편적으로 제가 듣기로는 아무래도 이번 구휘 대협의 무덤에 마교가 관여한 것 같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묵향 분타주의 말로는 마교에서는 구휘 대협의 무덤에 별로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구요. 저 묵향 분타주의 무공 수준으로 봤을 때 마교의 아주 고위층의 인물인 것 같기도 하니까 꽤 신빙성 있는 말 같아요.”
백상 대협은 딸의 말을 시큰둥하게 듣고 있었다. 당연히 그럴 것이 서열 높은 자가 하는 말이라고 그게 모두 사실일 가능성은 없지 않은가? 오히려 거짓말이 더 많 을 수도 있지. 이때 백운옥의 말을 초류빈이 옆에서 보충했다.
“아마도 그 추리는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와 대화를 나눠서 알아본 결과로는 그의 지위가 최소한 마교 서열 20위 안쪽인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마 교에서 벌어진 섬서분타 반란의 핵심 인물이라는 사실이죠. 오랫동안 같이 여행을 해 본 결과 최소한 그가 거짓을 말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진실 중에 얘기 하지 않은 부분도 많겠지만요.”
그러자 백상 대협이 경악해서 되물었다. 마교에서 20위 안쪽이라면 엄청난 무공을 지니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백상 대협은 한순간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방금 전에 마음에 안 든다고 괜히 강짜라도 부렸다면? 마교 서열 20위 안쪽의 인물에게 백씨세가는 아예 무림에서 사라져 버렸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마교 서열 20위 안쪽이라고?”
“예.”
“그의 이름이 묵향이라고 했나?”
“예.”
“특이한 이름인데, 아무래도 가명이 아닐까?”
“아닌 것 같습니다. 그의 행동으로 봤을 때…….
“알아보면 확인할 수 있겠지. 거기에다 반란의 주모자라면…….”
“참, 이번에 아주 특이한 인물들을 만났습니다. 진영 공주 전하를 납치하려고 했던 무리들 중에서 검붉은 혈의를 입은 고수들이 있었는데, 그때 저 묵향 타주와 싸 웠죠. 저도 그때 딴 무리들과 싸운다고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여덟 명 정도가 묵향 분타주를 빙 둘러쌌는데 무슨 진법같이 보이지도 않았고 그냥 빙 둘러싼 상태 에서 이상한 주문 같은 거만 외우고 있더군요.
그러다가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그들에게 합류한 다음 손에서 검은 기운을 뿜어냈는데, 그게 묵향 분타주를 감쌌습니다. 그러다 조금 더 지나고 나니 엄청난 대 폭 발이 일어났구요. 그 안에서 묵향 분타주가 걸어 나오더니 지독한 독기라고 그러더군요. 완전히 옷이 다 삭아서 떨어지는 걸 보면 과연 독하긴 독한 모양이었습니 다. 제 설명이 좀 두서없지만 혹시 이런 무공을 쓰는 인물들이 강호에 있습니까?”
“혈의, 주문, 검은 기운, 독기, 대 폭발이라…….”
“참, 그 혈의를 입은 무리들의 무기가 특이했습니다. 한 5척 정도 길이에 윗부분에 해골 같은 형상을 붙여놓은 철봉을 사용했습니다.”
“해골 모양을 붙여 놓은 봉? 그렇다면 출사봉(出邪棒)인가? 하지만 그건 혈교의 무기인데……. 정말 해골 모양이 맞나?”
“예, 해골 모양이 맞습니다. 그 부근이 원체 독기가 짙어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갈갈이 찢어진 그들의 시체 사이에서 봤죠.”
“갈갈이 찢어진 시체?”
“대 폭발이 있었다고 했잖습니까? 묵향 분타주를 중심으로 엄청난 폭발이 있었죠. 혈의인들은 모두 그 폭발에 휘말려서 죽었기에 온전한 시체라고는 거의 없었습 니다. 그리고 조금 지나고 나니까 그 시체도 독기 때문에 흐물거리며 녹아 버렸으니까요.”
“흐음, 오래전에 황궁에 짓밟힌 다음 행적이 묘연하더니, 또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모양이군. 공주 전하를 납치하는 무리에 혈교가 있었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겠 지.”
“뭐예요? 아빠?”
“진천왕과 혈교의 합작.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구나. 혈교가 원하는 것은 무림. 진천왕이 원하는 것은 황실. 같은 중원을 원하지만 서로의 목적이 다르 니 합작도 가능하겠지. 진천왕은 혈교의 힘을 필요로 하고, 혈교는 난세를 이용해서 자신의 세력을 더욱 넓히고자 할 것이니까……. 그리고 기존의 무림 세력들도 황실을 편들지 진천왕을 편들 자는 없을 테니 서로의 이득이 합치된다고 봐야지.”
“과거 제가 듣기로는 마교와 싸워 마교 세력의 4할을 부쉈다는 게 혈교 아닙니까? 그 덕분에 마교는 거의 30년 동안이나 세력을 보충하기 위해 엄청난 고생을 했 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혈교가 이제 슬슬 활동을 시작한다면 전과는 다른 어떤 준비를 하지 않았을까요? 최근의 전투에서도 마교와 거의 맞먹는다는 찬황흑풍단이 겨우 혈교의 분타 하나 부수는 데 2천 명이 넘게 죽고 7천 명이 넘는 부상자를 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정면에서 승부를 겨눈다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 고 다칠지….”
“글쎄, 하지만 그건 조금 다르지. 사람과 사람이 싸우는 것과 강시와 사람이 싸우는 것은 아주 차이가 크지. 사람은 최소한 싸우다가 지치기도 하고 상처가 생기면 그게 전력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 하지만 강시는 달라. 강시들을 상대하려면 무공이 약한 사람은 오히려 방해만 돼. 무공이 아주 강한 사람들만, 강시를 일검에 토막을 칠 수 있는 사람들만 나서서 공격을 해야 해. 그래야 간단히 강시를 물리치지, 어중이떠중이 다 뭉쳐서 공격하면 그들이 도리어 방해가 되어 고수들 이 필요로 하는 충분한 공간을 만들어 주지 못하기에 피해가 더욱 커지는 거야. 만약 고수들이 많은 마교가 그들을 공격했다면 그렇게 대단한 피해를 당하지도 않았 을 거다. 어쨌든 마교는 거의 5천 명이나 되는 극강의 정예를 가진 문파니까.”
“그렇다면 왜 그렇게 힘없이 무너져 버린 찬황흑풍단과 마교가 예전에는 거의 동급으로 비교 되었을까요?”
“그거야 그 당시 흑풍단을 이끌었던 옥영진 대장군의 능력, 그리고 강력한 호신강기의 역할을 해내는 두터운 갑주, 우수한 장비, 그것이 그때의 찬황흑풍단의 명 성을 만들었던 것이지. 하지만 강시와 사람은 다른 거니까……. 물론 그때 상대가 마교였다면, 그것도 넓은 평야에서 붙었다면 완전히 얘기가 달라졌을 거야.” “그렇다면 마교란 단체는 아무도 손도 못 쓸 정도로 강하다는 말입니까?”
“아니지. 마교는 혈교와 달리 강시 따위는 쓰지 않아. 그러니 정파에 밀려서 활개를 치지 못하는 거지. 사람 대 사람이라면 어중이떠중이라도 숫자가 많은 쪽이 어 느 정도는 유리한 법이니까. 그리고 마교와의 투쟁이 시작되면 은거했던 기인들까지 모습을 드러내니 그렇게 마교에게 고수의 숫자에서도 밀리는 것이 아니 고……. 아니 그분들까지 합한다면 고수의 수는 정파가 월등하다고 봐야 하겠지. 대신 그쪽은 한 덩어리로 뭉쳐진 상태고 이쪽은 숫자는 많지만 흩어진 상태. 어떤 큰 위기가 닥치지 않으면 뭉칠 생각을 안 하니까 마교의 무리들이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는 거야. 그리고 고인 물은 썩는 이치와 같아서 정파의 세상이 된다 하더라 도 나중에는 별의별 파렴치한 놈들이 다 나오게 되니, 그게 마도의 무리들이나 무슨 차이가 있겠나? 그냥 이런 식으로 양분되어 서로를 견제하는 편이 좋지.”
묵향은 목욕을 끝낸 다음 의자에 앉아 탁자 위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고는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묵향이 안내된 작은 별채는 제법 아담하게 꾸며진 조용한 장소 였다. 가구들도 그런대로 좋은 편이라 이런 예정에도 없던 객에게 주어진 방임을 생각한다면 백씨세가는 꽤나 풍족한 살림살이를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앉은 의자에서 바라다 보이는 정원은 제법 세심하게 가꾼 화초들이 우거져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었다.
묵향은 천천히 일어서서 정원으로 내려섰다. 예로부터 정원이야말로 살수들이 숨어서 암살하기 딱 알맞은 장소지만 묵향의 촉수에는 그 어떤 살수의 기척도 느껴 지지 않았다. 다만 정원사가 열심히 가꾼 아담한 정원만이 묵향의 눈을 즐겁게 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묵향은 천천히 정원의 한쪽 귀퉁이에 국화들이 있는 곳을 향 해 걸어갔다. 아직 국화꽃은 피지 않았지만 싱싱하면서도 흠집 없는 푸르른 잎사귀가 자신은 가을에 아름다운 국화를 피울 것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기억이 돌아온 다음에도 국화를 좋아하는 묵향의 취향은 사라지지 않았다. 예전처럼 광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한 살수를 기억하게 해줬기에 예의상 다른 것들보다는 좋아한다고 봐야 할까……. 묵향이 지긋이 정원의 화초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 사람이 정원으로 들어왔다. 묵향이 고 개를 돌려 바라보니 40대 초반은 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의외의 장소에서 사람을 만나 조금 놀라는 듯하더니 친근하게 말을 걸어 왔다.
“여기는 거의 사람의 출입이 없는 곳인데, 여기에 묵게 되셨나요?”
“예, 죄송하지만 누구신지?”
“저는 백상 부가주의 안사람입니다.”
그녀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힐 수는 없기에 약간 돌려서 말했고, 묵향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들었다. 노가주는 이미 늙었고 그의 부인도 거의 은퇴 직전일 것이다. 그러니 아마도 앞에 있는 이 중년의 부인이 백씨세가를 이끌어가는 안주인인 모양이었다.
“아, 예. 실례를 했군요. 저는 이번에 신세를 지게 된 묵향이라 합니다.”
“이곳의 정원은 아주 아름답지요. 그래서 저도 한 번씩 마음이 갑갑할 때는 여기에 와 보곤 한답니다. 남편이 이곳에 자리를 잡아 드린 걸 보면 아주 귀중한 손님이 신 모양이군요.”
“별로 귀중한 편은 아닙니다. 바쁘실 텐데, 저는 이만 물러나지요. 참으로 아름다운 정원입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의 위안을 얻으시기를…….”
묵향이 이렇게 노부인에게 신경을 쓰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무림에서 남자 고수는 정말 많다. 하지만 여자 고수가 그렇게 많지 않은 이유는 남편과 부인이 둘 다 무공에 미쳐 버리면 집안 살림은 망하게 되는 게 정석. 그렇기에 남편이 무공에 미치면 부인은 내조를 해야 하는 것이다.
내조……. 말이 좋아 내조지 남편은 연공실에 틀어박혀 있을 때ᅳ무림인이 아닌 경우 글공부 따위 한다고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있을 때ᅳ부인은 가정을 이끌어 가게 된다. 그렇기에 부인이 남편보다 무공이 강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지만 만약 있다면 그 여자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남편보다 몇 배는 뛰어난 오 성을 지니고 있는 여자라야만 남편보다 조금 더 뛰어난 정도로 무공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게 많은 살림살이를 책임지고도 약간씩 연공 시간을 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히 부지런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교육을 받는다. 남자는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이라고 하는 허울은 좋지만 실상은 적성에 안 맞아도 무공을 뼈 빠지게 익히든 지, 아니면 어디에 쓰일지 알지도 못하는 공부를 쌍코피 터지게 하든지. 그래서 입신양명하는 게 목적인 불쌍한 족속들이다. 묵향처럼..
하지만 여자는 완전히 다르다. 공부나 무공은 부차적인 것이다. 명가의 여자들이라면 어릴 때부터 그녀의 어머니가 수많은 하인들과 고용인들, 어떤 때는 노예들 까지 거느리며 각종 사업을―농사도 사업이니까―처리해 나가는 것을 보고 배우게 된다. 자신도 딴 집에 시집가게 되면 그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들은 어릴 때부터 장부 작성, 정리라든지 산학(算學), 그리고 어디에서 물건을 구입하면 싸게 구입하는가라든지, 돈을 빌릴 곳, 또는 차용증 작성 요 령 등 실생활에 관계되는 수많은 교육을 받는 것이다. 시집을 잘 간다면(?) 수백 명의 하인을 관리 감독하면서 집안일을 처리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자가 한 집안의 살림을 처리하게 되는 그 순간, 즉 시집가는 그 순간부터 그녀의 고달픈 인생이 시작된다. 그게 언제쯤 멈추게 되느냐 하면, 자신의 며 느리를 볼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완전히 집안의 경제권을 쥐고 흔든다는 막강한 힘이 그녀에게 주어지긴 하지만 그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만약 남편이 상인이라면 그 남편이 외부 거래의 일정 부분을 처리해 주어 한결 부담이 덜해지지만 그래도 수없이 많은 물건들이 드나들기에 그것을 유지, 관리, 감 독함에 있어 일이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게 된다. 그렇기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시집간 다음 과로사했는지는 역사에 나오지 않아도 모두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물론 첩()이라든지 뭐 그런 이유로 받아들여진 여자라면 이와 같은 사항에 해당이 없다. 그런 여자들은 대부분이 화류계의 여인들로 남자를 성적으로 즐겁게 해 주는 언어적 기교, 안마술, 방중술(房中術)이라든지, 노래, 춤, 악기 등 실생활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잡기들만 배운 여인들이다. 그렇기에 그런 여인들에게 부인 (婦人)이 해야 할 일을 시킨다면, 며칠 되지도 않아 야반도주할 가능성이 컸다. 이 첩이라는 것도 다 부인이 모든 경제를 책임져 주기에 글만 읽다가, 또는 무공만 익 히다가, 친구들과 놀다가,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자들이 계집에 혹해서는 끌어들이는 거였으니까 말이다. 마누라는 집안을 이끈다고 죽어 나가는 줄도 모르고 서…….
이런 이유가 있기에 묵향은 안살림을 직접 책임지게 되는 부인을 대단히 높게 평가했다. 만약 무공의 고하로만 모든 것을 생각한다면 그녀 또한 그녀의 남편과 같 은 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녀는 무공이 아닌 살림을 책임지는 것이다. 설무지처럼 말이다. 사실 그녀가 책임지게 되는 부분들 중에 상당 부분 무력하고 연관되는 부분은 설무지 같은 어떤 인물이 책임지겠지만 그래도 집안일은 부인의 소관이니 그 일이 결코 적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게 공짜 인력은 결코 놀릴 수가 없다는 남자들만의 이론에서 만들어진 아주 편리한 노동력 착취 방법이었으니까 말이다. 머리 좋고, 일 잘하고, 아랫사람 잘 부 리도록 어릴 때부터 교육받았고, 그걸 알고도 놀릴 바보가 있겠는가? 그러니 당연히 그녀들은 남편들의 감언이설에 속아서 매일 힘들다는 내색도 못하고 중노동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묵향은 관리라든지, 산학 등 원체 그쪽으로는 공부를 안 해서 무식했기에 그런 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에게는 우대를 해 줬다. 그렇 기에 부인은 묵향으로부터 깍듯한 대우를 받게 된 것이다.
그날 저녁 모두들 모여서 식사를 했고 묵향은 따로 자신이 묵게 된 별채에서 식사를 했다. 묵향은 혼자서 먹는 것이 편하다고 사양했기 때문이다. 원래 그런 것은 객으로서 조금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낮에 묵향이 보여 준 비사교적인 태도 덕에, 감히 모두들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조금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고맙게 생각하며 묵인했던 것이다.
모두들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자 식당에서 맛있게 요리된 음식들이 날라져 들어왔다. 그때 차로 입술을 적시던 조연(趙蓮)은 살며시 입을 열었다.
“다른 손님도 한 분 더 계신 것 같던데, 왜 안 보이나요?”
조금 당황한 백상 대협. 그의 아내 조연은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또 가치 있게 생각하는 거의 유일한 여자였다. 그녀는 비단 채찍 하나로 그의 집을 다 스려 나가는 부드럽고 따스한 아내요, 자애로운 어머니였고, 또 엄격하면서도 부드러운 집안의 지배자였다.
“아, 그는 따로 식사를 한다고 했소.”
“그 별채에 묵게 하신 걸 보니 꽤 중요한 손님인 것 같은데, 그러면 실례지요.”
그러자 백상 대협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변명했다.
“그, 그 손님의 성격이 워낙 괴팍한지라 그렇게 하라고 일렀소. 부인은 너무 신경 쓰지 마시구려.”
“뭐가 괴팍하다는 말입니까? 저도 낮에 만나 뵈었는데, 아주 친절하고 마음씨 고운 분이시던데……. 가가께서 그렇게 함부로 평가하시다니 오늘 이상하시군요.” “허흠, 그게 아니라 부인… 그는 마교의 인물이요. 마교의 인물치고…….”
“사람을 그렇게 한꺼번에 잡아서 말하면 실례지요. 아이들도 있는데.. 정파라 자처하는 자들 중에서도 인면수심의 인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역으로 마교라 해도 좋은 인물들도 있겠지요. 깊이 사귀어 보지 않고 단정을 내리는 것은 안 된다고 평소에도 자주 말씀하시는 가가께서 언행일치를 안 하시다니…….”
“험험, 부인 그만하시구려. 손님도 와 계시는데…….”
“아, 참 초류빈 소협을 잊었군요. 그래 가내(家) 평안하신가요?”
“예, 모두들 평안하십니다.”
“요즘도 자당(慈堂)께선 정정하신가요?”
초류빈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지는 듯싶었지만 곧이어 대답했다.
“예…….?
초류빈의 어머니 독수낭랑(毒手郞) 왕운하(王雲河)는 그 괄괄하면서도 괴팍한 성질로 유명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초류빈의 아버지 옥면일랑(玉面一郞) 초풍천 (楚風天)이 명호대로 그 잘생긴 얼굴로 무림에 초출한 것을 낚아채어 거의 강제로 결혼한 왈가닥이다. 초류빈의 아버지가 한 번씩 눈두덩이가 시퍼런 상태에서 손 님들을 만나게 되다 보니 자연히 그 소문이 퍼져 나중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결혼한 지 4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두 살 연하의 남편이 자 기 부인에게 구타당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10년쯤 전에 초풍천은 아이들이 장성한 것을 보고 지금쯤이면 아이들 낳고 살림한다고 바빠서 자신보다는 무공이 떨어질 거라고 판단하고 최후의 반항을 시도했 다가 묵사발이 난 다음부터는 아예 반항할 엄두조차 못 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나이도 당년 73세에 이르렀으니 조금 나아진 점이 있나 해서 조연은 안주인답게 약간 빙 돌려서 물은 것이다. 하지만 초류빈의 난감해하는 표 정을 보니 그 나이에 이르러서도 독수낭랑의 성격은 조금도 바뀌지 않은 모양이었다. 허기야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으니 7년은 더 기다려 봐야 결과가 나오 지 않을까?
“이곳에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백씨세가에 들어온지 7일이 되었을 때 묵향이 초류빈에게 물은 말이었다. 그동안 묵향과 초류빈은 이곳 별채에서 그야말로 식객 생활을 해 오고 있었다. 초류빈 은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묵향은 여기 온 다음부터 줄곧 이 별채에서 떠나지 않았기에 당연히 주위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적대 -그는 마교도이니까할지도 모르는 인물들 틈에서 1주일 동안 아무런 질문도 없이 한가하게 명상이나 하며 지내는 것을 보면 묵향도 보통 태평스런 인물은 아니 었다.
초류빈은 이제서야 질문을 하냐는 표정으로 묵향에게 말했다.
“오늘이나 내일쯤 5대세가의 수장인 서문세가에서 사람이 온답니다. 서문세가에서 구휘 대협의 무덤 지도를 제일 먼저 입수했으니 그들에게 우선권이 있는 것은 당연하죠. 서문세가에서 사람이 오면 그들과 의논을 한 후 백상 대협이 행동을 시작할 거라고 하시더군요. 그때까지 기다리셔야겠는데요.”
“뭐 기다리지. 그건 어려울 게 없으니까…….”
“그런데 정말 지금 반란 중이라면서 이러고 계셔도 됩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급하면 어련히 연락이 오려고……. 몇 명 믿는 녀석들이 있으니 갑자기 망하지는 않을 거야. 또 망하면 다시 시작하면 되지. 뭐가 걱정인 가? 남아도는 게 시간인데…
초류빈은 정원의 땅바닥 위에 돗자리 하나를 깔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젊은 모습의 묵향을 보며 생각했다.
“겉모양으로 봤을 때는 정말 남아도는 게 시간처럼 보이는군. 한 60년은 끄떡없이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이니까. 그런데 저자의 진짜 나이는 몇 살일까? 그리고 진 정한 무공의 깊이는?”
이때 저쪽에서 시녀 한 명이 다가오더니 공손하게 말했다.
“아씨께서 잠시 오시라고 하십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묵향은 방금 전 대화를 끝으로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있었으므로, 초류빈은 그냥 갈까 하다가 한마디 한 다음 시비의 뒤를 따랐다. 시비가 안내한 곳은 화려한 거 실이었고 그곳에는 백운옥 외에도 새로운 인물이 네 명 더 앉아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벌떡 일어서며 먼저 인사해 왔다.
“오오, 오랜만이야. 정말 반갑구만……. 가출했다더니 의외로 생생하구만.”
초류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비천검飛天劍) 혁련운(赫蓮運)은 황룡문이라는 이름 없는 작은 문파의 제자였다. 하지만 천운을 타고났음인지 과거 기연을 통해 능비영이란 선배 고인으로부터 그 이름도 높은 청월검법의 비급을 얻어 오랜 수련 끝에 10성까지 익혔다. 거기에 무당파에서 어떤 무시무시한 고수를 만나 안계(眼界)를 넓힌 후 그의 검술은 더욱 정진하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후기지수들 중에서는 최강이라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자였다. 그의 나이는 43세였고 한 살 어린 초류빈과 형제의 의를 맺고 있었다. 원 래 뛰어난 명가가 아니라 그런지 말이 조금 거친 게 흠이었지만 인간성은 7룡 중에서 최고였으며 현재 황룡문의 부문주였다.
“오랜만이에요, 류빈 오빠.”
혁련운에 이어 20세 안팎으로 보이는 정말 눈 튀어나올 만큼 예쁜 여인이 인사를 건네 왔다. 그녀의 이름은 매영인(梅瑛仁)으로 무림에서 활동을 하지 않았기에 별호는 없었지만 4봉의 한 사람이었다. 5제(五帝) 중 유일한 여인 옥화무제 매향옥의 손녀로서 방년 31세였다. 그 할머니의 무공 수위로 짐작해 보건대 그녀의 무 공도 엄청날 것이라는 게 세인들의 추측이었다.
“그래…… 안 본 사이에 더욱 예뻐졌구나.”
“고마워요.”
고맙다는 뻔뻔한 대답이 얼굴색도 안 변하고 주저 없이 흘러나오는 걸 보면 자신이 예쁜 줄은 잘 아는 듯…….
“안녕하셨습니까?”
이번에는 매영인의 옆에 앉아 있던 옥면공자(公) 능소천(陵紹天)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무당파의 속가제자로, 대단히 뛰어난 외모를 가졌지만 어
딘가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었다. 태극검법(太極劍法)의 달인으로 뛰어난 무예의 소유자였으며, 피리나 금에도 소질이 대단했고, 그를 이용한 음공(功) 에도 조예가 있는 인물이었다.
“오, 반갑군. 오랜만이야. 자네하고 피리 실력을 겨눌 만한 인물이 여기 있으니 나중에 만나 보게나.”
“예,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쪽은??”
그러자 능소천이 사근사근하게 옆에 서 있던 영준하게 생긴 젊은이에게 말했다.
“인사하시게, 탈명도 초류빈 대협이시네.”
“처음 뵙겠습니다. 불초 서문길(西門佶)이라 합니다.”
“오호, 서문세가에서 젊은 기재가 계시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젊으신 줄은 몰랐소. 만나서 반갑소.”
초류빈은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렇게 후기지수의 최고봉이라는 7룡4봉의 네 분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군요.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이 녀석이……. 네 녀석도 중간에 문파에서 뛰쳐나가지만 않았다면 7룡에 계속 들어가 있었을 거 아냐? 네놈이 빠져나간 덕분에 내가 들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이 나이에 7룡에 들어 있다니…….”
“참, 형은 언제 장가드실 겁니까? 연세를 생각하셔야죠.”
“네놈이나 생각해. 나는 아직도 생각 없다.”
“왜요?”
“하루라도 무공단련을 게을리 하면 과거 무당파에서 그 괴인과 싸울 때, 배 위로 그자의 검이 훑고 지나가던 악몽을 꾸게 된다구. 그게 얼마나 섬뜩한지 너 아냐?” 초류빈은 미소하며 응대했고 다른 인물들은 처음 듣는 말인 듯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에이, 농담도……. 그게 언젯적 일인데?”
“너 같으면 생각이 안 나게 생겼냐? 내 뱃가죽 바로 1촌 앞으로 그 전설의 어검술이 통과했는데…, 검강이 내 뱃가죽을 훑고 지나가는 그 느낌. 지금 생각해 도 식은땀이 바짝바짝 난다구. 그자의 검이 짧지만 않았다면 내 목숨은 그때 끝난 거였어.”
“그래도 덕분에 형 검술 솜씨 따라갈 사람이 거의 없잖아요?”
“덕분은…, 제발 하루라도 편안하게 푹 자고 싶을 뿐이야. 도저히 그때 생각을 하면, 아마도 평생 편안한 잠을 자기는 틀린 것 같다.”
“그래도 형이 빨리 장가들어야 또 다른 후배가 7룡에 들어가죠. 형 때문에 지금 밀려 있는 뛰어난 후기지수들이 몇 명인 줄 알아요? 마흔셋이나 되어 가지고 아직 도 7룡에 들어 있다는 건, 아마 고자…….”
그러자 혁련운은 두 여자를 재빨리 훑어보며 얼굴이 벌게져서 떠들었다.
“너 죽을래? 그러는 네놈은 왜 안 가냐? 마흔둘이나 되어 가지고……. 피장파장이니 헛소리하지 말라구.”
“그런데 웬일로 이렇게….”
“그거야 당연히 구휘 대협의 무덤 때문이지. 몇 가지 의논할 점도 있고 해서 모두들 모였지. 백상 대협과 의논한 후에 무림맹으로 갈 거야. 그런데 백 소저한테 얘 기를 들어 보니 어떤 사람하고 같이 왔다며? 그런데 그 사람은 왜 안 데려오고 너 혼자 오냐?”
“예, 조금 사정이 있어서요. 나중에 소개해 드리죠.”
“그 사람의 수하가 되었다며? 뭐 하는 사람이냐? 백 소저는 너한테 들으라던데…….”
“그것도 나중에 말해 줄게요. 그런데 의논할 게 뭐예요? 뭐 새로운 정보라도 들어온 게 있어요?”
“조금 있으면 백상 대협이 오실 거야. 그건 그때 이야기하기로 하지.”
백상 대협은 아직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으므로 좌중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이때 초류빈과 혁련운의 대화를 들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매영인이 갑자기 혁련운에게 물었다.
“혁 오빠! 분명 어검술이라고 했어요?”
“응.”
“그 사람 어떻게 생겼어요?”
“흑의를 입은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아마도 반로환동했을 테니 나이는 모르겠다. 그렇게 잘생긴 얼굴은 아니야. 못생긴 얼굴도 아니구. 그런대로 이목구비가 반듯한 인물이었지. 검은 빛깔이 나는 짤막한 검을 썼어.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만 말이야. 내가 검을 뽑아 들자 본 척도 안 하더니 검법을 펼치니까 그제서야 검을 뽑더군. 청월검법이라면 상대해 줄 값어치가 있다는 듯이 말이야. 그때 상대의 실력을 알아보고 꼬리를 내렸어야 했는데, 그게 잘되냐? 그때 막 청월 검법을 10성까지 익혔던 때라 간 크게도 달려들었지. 그때 그자의 검이 갑자기 불타오르는 것처럼 이글거리는 푸른빛을 내더군. 그 상태로 검을 휘둘러 오는데, 단 일초에 내 검과 호신강기가 박살이 났지. 정말 무시무시했어. 하지만 그의 검이 짧았기에 이렇게 내 배 앞쪽을 통과했지 뭐냐. 하지만 그 어검술에서 나오는 강기의 여파 때문에 호신지기 따위는 말할 것도 없고 뱃가죽이 푹 파였지. 그때 정말 죽는 줄 알았다니까……..
혁련운은 손짓까지 해 대며 상대의 어검술이 어떻게 통과했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설마…, 그가?”
“뭐? 그 괴인이 누군지 알고 있냐? 하기야 무영문이라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적은 문파니까. 그 사람이 누구냐?”
혁련운은 정말이지 궁금해 미치겠다는 음성으로 말했지만 매영인은 그 정보의 정확도에 조금 자신이 없는 듯 힘없이 말했다.
“나도 잘 몰라요. 사실 저는 문파의 깊은 일까지는 잘 모르니까요. 전에 할머니하고 총관이 주고받던 대화 중에서 생각나는 게 있어서 말이에요.”
“뭔데?”
“그렇게 초식을 무시하고 어검술을… 쓴다면 현경의 고수가 아니겠어요?”
“그렇다고 봐야지.”
“구휘 대협 다음에 나타난 현경급의 고수가 한 명 있대요.”
“뭐라구?”
“마교에 한 명 있었죠. 놀랍게도 탈마의 고수라고 들었어요. 탈마면 현경과 마찬가지라고 들었으니 그도 현경급의 고수라고 봐야 하겠죠?”
“그렇지. 하지만 나는 마교의 고수가 그렇게 엄청난 무공을 깨달았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그거야 당연하죠. 성격상 문제가 좀 있는 인물이었던 모양인지 10년쯤 전에 마교에서 제거되었으니까요. 그가 활동했던 시기로 보면 혁오빠가 만난 괴인이 그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거 같네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혁련운이 말했다.
“제거되었다고?”
“예, 예전에 얼핏 듣기로 그는 기억을 상실해서 떠돌아다닌다고 했어요. 마교에서 탈출할 때 엄청난 중상을 입은 모양이에요. 그래서 모든 무공을 잊은 상태에서 황궁에 포섭된 모양이었어요. 놀랍게도 그자는 단기간에 황궁무공을 익혀 다시 화경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를 포섭할 방책을 할머니하고 총관 아 저씨하고 의논하는 걸 우연히 들었었거든요.”
“그 외에는?”
“그것 말고는 없어요. 탈마라는 말이 들려서 잠시 엿들은 것뿐이니까요.”
백상 대협과의 의논이 끝난 다음 그들은 무림맹에서 벌어질 회합에 참석하기 위한 출발 날짜를 내일로 잡고는 백상 대협이 마련해 준 숙소에 짐을 풀었다. 사실 내 일 떠날 것이니 짐을 풀 것도 없었지만 몇 가지 필요한 것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서로들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가 능소천이 초류빈에게 물었다.
“저하고 피리 솜씨를 겨루게 할 사람이 있다면서요? 잠시 시간도 나는데 풍류를 즐기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그러자 백운옥이 애교 띤 음성으로 그의 말에 찬성했다.
“와아, 그거 좋은 생각이에요. 그 사람도 정말 금을 잘 타던데, 능소천 소협의 실력이 뛰어나시단 소문은 들었거든요. 그분과 함께 저희들의 이목을 좀 넓혀 주세 요.”
사실 옥면공자 능소천의 피리 솜씨와 거문고 솜씨는 널리 소문이 퍼져 있었다. 거기에 그는 시서화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기에 모두들 그를 풍류공자라고도 불렀 다. 그 덕분에 그를 사모하는 여자들이 줄을 섰다나? 어쨌다나…….
모두들 이렇게 나오자 초류빈은 그들을 묵향이 있는 곳으로 안내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마교도라고 선전을 하지는 않겠지. 그러면 나는 파멸이라구…….’
“뭐, 좋겠지. 따라들 오게.”
묵향은 초류빈이 떠날 때 그 상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정원 한 구석에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가부좌를 튼 채 앉아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웅 성거리면서 사람들이 몰려오자 그는 천천히 일어섰고, 그의 허리 뒤쪽으로 검대에 매달려 있는 평범한 3척 장검이 얼핏 보였다.
혁련운은 중인들과 떠들며 별채의 문을 통해 들어오다가 그 모습을 보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자신에게 수없이 악몽을 꾸게 만든 장본인이 여기 서 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모습과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그때는 낡은 흑의였는데 지금은 새 옷이었다. 독 때문에 백씨세가에 와서 새로 사 입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와 거의 똑 같은, 아니 꿈에서 나타나던 얼굴보다 조금 더 젊은 것 같기도 했다. 그의 검은 약간 모양이 다른 것 같기도 했지만 그 차고 있는 모양새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 다. 아주 거만하게 뒤로 늘어뜨려 차고 있는 모습이…….
‘제기랄…….”
혁련운이 갑자기 멈춰 서서는 흑의인을 노려보며 식은땀만 흘리고 있자 모두들 궁금해했다.
“왜 그래요?”
초류빈이 묻자 그제서야 현재 자신이 취하고 있었던 행동을 의식하며, 혁련운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황룡문의 부문주가 공포에 얼 어 있다면 누구에게나 그 면목이 서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쪽은 묵향 타주. 이쪽은 차례로 서문길, 혁련운, 매영인, 능소천입니다. 모두들 7룡4봉에 들어가는 최고의 후기지수들이죠.”
“만나서 반갑소. 나는 시끄러운 건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딴 곳으로 가 보겠소. 이왕 오셨으니 편히 쉬시기 바라오.”
묵향이 퉁명스레 답하고는 천천히 별채의 문 쪽으로 걸어가자 혁련운은 마지막 남은 용기를 다 짜내어 다급히 묵향에게 말했다.
“잠깐… 묵향 타주.”
묵향이 뒤로 돌아보자 말을 이었다.
“혹시 우리 구면이 아닌가요?”
묵향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글쎄, 나는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아서…….”
“그렇다면 이건 기억이 나시나요?”
주위 사람들이 말리기도 전에 허리에서 검을 쭉 뽑더니 검초를 시전했다. 그걸 본 묵향은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했다.
“청월검법? 같기도 하군. 그런데 뭘 기억하라는 건가?”
“묵향 타주는 무당파에서 청월검법을 사용하는 사람과 싸운 적이 없습니까?”
그러자 모두들 설마하는 표정으로 묵향과 혁련운을 둘러봤다. 묵향은 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물었으면 간단한 걸 가지고 돌려서 말하니 뭔 소린지 알 수가 있어야지. 당연히 나는 무당파에도 한 번 갔었고 그때 청월검법 사용하던 애송이 에게 본때도 보여 줬지.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
이제야 그 둘의 관계를 눈치 챈 다른 사람들이 경악스러운 눈길로 묵향을 바라봤다. 그렇다면 이자가 바로 현경급 고수라는 말인가?
혁련운이 떠듬떠듬 말했다.
“비무…, 비무를 청합니다.”
그러자 묵향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절한다. 나는 비무 따위 안한다. 대결이라면 몰라…….”
“대결이라구요?”
그러자 묵향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냉정하게 말했다.
“목숨을 걸 각오가 있나? 그렇다면 덤벼라! 죽여 줄 테니.”
검을 쥐고 있는 혁련운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은 도저히 상대도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놈은 3황의 한 사람이었던 뇌전검황을 저세상에 보낸 인물이다. 그건 무당파의 장문인에게 그때 듣지 않았던가. 하지만 혁련운은 지금 자신이 위축되어 버리면 다시는 검을 못 들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놈의 악몽 때문에 거의 사는 것 같지가 않은데, 여기서 더욱 위축되면 검을 버리는 길밖에 없었다.
순간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떨림이 천천히 멎기 시작했다. 단 일초라도 자신 있게 펼치고 싶었다. 그때 자신이 그렇게 믿었던 검초가 산산이 부서지며 느꼈 던 공포감……. 하지만 이번을 위해 얼마나 많은 수련을 했던가. 단 일초만이라도 자신 있게 저 괴물 같은 상대에게 펼칠 수 있다면 이제부터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호오, 기세가 제법이군.”
혁련운이 ‘단일초만…’이라는 말을 되뇌며 자세를 잡자 묵향이 내뱉은 말이었다.
묵향도 천천히 검을 뽑았다. 보통 묵혼검의 그 짧으면서도 휘어진 검신에 익숙해져 있는 그였기에 일직선이면서도 긴 검을 뽑는 것은 약간 성가신 작업이었다. 그 렇기에 묵향은 자신이 가진 평범한 검을 약간은 어색한 동작으로 뽑았다. 그것을 보면서 이번 사건의 경과를 약간의 대화를 통해 알고 있었던 그들은 묵향의 싸구려 처럼 보이는 저 검을, 그것도 조금, 아주 조금 어색한 동작으로 뽑는 것을 보고 과연 저 사람이 소문의 주인일까 일순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묵향이 검을 뽑아 자세를 잡자 혁련운은 일순간 당황했다. 검을 뽑기 전에는 뭔가 만만한 구석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검을 뽑은 순간 그것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의 몸은 수많은 허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그 모든 게 함정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너무 완벽해서 치고 들어갈 틈이 하나도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종잡을 수가 없었다.
‘원래 이론상으로는 허초를 몇 번 날려 상대의 자세를 허물고 그다음 실초로 공략하는 게 좋지. 하지만 그게 통할 상대가 아니야. 단 일초라도 제대로 펼칠 수 있을 지 의문이니, 처음부터 강공…… 방어 따윈 생각할 필요도 없어. 단 일초만이라도 제대로 펼치자.’
“이얍!”
혁련운은 오늘과 같은 날을 대비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다 털어서 산 천로(泉露)라는 보검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검이었고, 이 보검이라면 아무리 어검술이라도 한 방에 검을 두 토막 내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검은 수류천월(水流天月)의 초식을 그리며 그 짧은 거리에서 강기의 다발을 묵향에게 쏘아 보내려 했다. 하지만 묵향은 이미 혁련운에게 더욱 가깝게 접근해 들어오며 곧바로 검을 그의 왼쪽 허리로 찔러 넣었다. 수류천월의 초식이 만들어지면서 잠시 나타난 아주 작은 허점… 그 허점으로 검을 찔러 온 것이다. 이것을 막는다면 그의 초식은 와해되고 지금까지 쏟아 부은 공력을 회수해야 했기에 잘못하면 내상까지 입을 수 있었다.
혁련운은 잠시 망설였지만 그대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허리에 맞아 봐야 심하면 양패구상이다. 묵향은 상대가 초식을 거둬들일 생각을 안 하자 재빨리 뒤로 물러 섰다. 그와 동시에 혁련운의 완성된 검초에서 강기의 다발이 후퇴 중인 묵향을 향해 날아왔다. 순간 묵향의 검은 푸른색으로 이글거리기 시작했고, 묵향은 그 상태 로 검을 휘둘러 간단히 검강들을 튕겨내 버렸다. 그런 다음 또다시 상대와의 거리를 급속도로 좁혔다. 정말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른 신법이었다. 이제 간신 히 일초를 끝낸 혁련운에게 묵향은 너무도 빨리 다가왔고 혁련운으로서는 검초를 펼칠 시간 여유조차 없었다. 그런 가운데 묵향의 검은 혁련운의 목으로 날아왔고, 혁련운은 간신히 목을 움직여 피한 후 묵향을 향해 자신의 검을 찔렀다. 이건 초식도 뭐도 아니었다. 그저 살기 위한 발악이었을 뿐.
묵향은 혁련운의 검을 간단히 왼손의 두 손가락 사이에 잡은 다음 그대로 혁련운의 복부를 차 버렸다.
퍽!
“우악!”
혁련운은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 정원 구석에 처박혔다가 일어섰다. 심한 내상은 없었지만 그래도 아픈 건 사실이었기에 비실거리면서 걸어 나왔다. 이 둘의 대결 은 설명은 길었지만 정말 검초조차 펼칠 시간 여유가 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 안에 벌어졌다. 중인들 중에 실력이 높은 한둘을 제외하고는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 눈치 채기 어려울 정도의 대결이었다.
그냥 보기에는 혁련운이 검초를 구사하자 묵향의 몸이 눈으로 보기도 힘들 정도로 빨리 앞으로 바짝 붙었다가 뒤로 떨어졌다가 혁련운의 검초가 끝나기를 기다려 다시 붙었다가 투닥거리는 것 같더니 바로 혁련운이 한 대 맞고 정원으로 날아갔으니까……. 아니, 이중에서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백운옥 같은 경우 묵향이 다시 뒤로 빠졌다가 다시 붙는 것은 아예 보지도 못했을 정도였다.
묵향은 검을 천천히 검집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 정도 했으면 자네 실력은 대단한 거야. 대부분이 검초를 펼치다가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죽으니까 말이야. 추정되는 나이를 생각했을 때 자네 실력은 대단 한 편이지. 자네도 슬슬 청월검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군. 그렇지 않고 초식에 얽매인다면 자네는 더 이상 발전을 기대할 수 없어. 어때? 더 해 보고 싶 Lt?”
혁련운은 배를 쥐고는 기침을 몇 번 한 다음 말했다.
“콜록콜록, 아닙니다.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께선 황궁에 계신가요?”
묵향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황궁? 황궁이라니 무슨 말이냐?”
“매영인이 하는 말이 묵향 타주께서 마교에서 축출당하신 다음 황궁에 계신다고 그러던데요. 잘못 알고 있는 건지 모르지만…….?
“어찌 위대한 마인이 황실의 개가 될 수 있는가? 본좌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마인일 뿐이다.”
“묵향 타주께선 기억을 되찾으신 건가요? 아니면 매영인이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저 아이가 매영인인가?”
“예.”
“그 정도까지 알고 있는 걸 보니 다른 문파들보다 정보력이 그래도 나은 곳이군. 본좌는 기억을 되찾은 것이지.” 중인들이 묵향의 말을 듣고 무영문의 정보력에 대해 감탄하고 있을 때 하인이 한 명 들어오더니 묵향에게 말했다. “저… 묵향 타주님을 찾아온 손님이 계신데 안내해 드릴깝쇼?”
““데리고 오너라.”
“예.”
딴 사람은 몰라도 초류빈은 조금 긴장한 얼굴이었다. 묵향이 언제나 말하지 않았던가……. 일이 생기면 찾아올 거라고.
곧이어 낡은 흑의를 입고 장검을 찬 인물이 하인의 안내를 받아 도착했다. 그의 몸에서는 강렬한 마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대단한 수련을 거친 마교의 인물임이 확실했다. 그는 묵향의 앞에 이르러 부복하며 외쳤다.
“부교주님을 뵙습니다!”
그러자 주위의 인물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부교주라니! 분타주가 아니고?
“무슨 일이냐?”
“군사께서 급히 돌아오시랍니다.”
“군사가? 알겠다.”
묵향은 백운옥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젠 본좌도 일이 생겨서 거기 따라가지 못하겠군. 하지만 본좌는 아직도 남의 무덤을 파 뒤지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아. 헤어지는 마당이니 한 가지 알려 주지. 그 따위 무덤 파 봐야 별 볼일 없을 거야. 구휘의 무공이 집대성된 것이 어느 정도 위력일지는 알 수 없으나 북명신공보다는 못하겠지. 본교가 구휘의 무덤에 손을 대지 않는 이유는 본교에 북명신공이 있기 때문이야.”
그러자 중인들은 경악해서 외쳤다.
“정말인가요? 북명신공이 천마신교에 있다는 게…….”
“정말이지. 교주만이 익힐 수 있는 세 가지 무공에 들어가는 게 북명신공이야. 그러니 쓸데없는 일에 정력을 쏟지 말고 집에 돌아가서 수련이나 하는 게 좋을지 도……. 참, 자네는 본좌와 함께 갈 건가?”
그러자 초류빈은 씁쓸하게 대답했다.
“물론,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했으니 따라가야죠.”
“좋아. 다음에 인연이 있다면 만나게 되겠지.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