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권 26화 – 교주의 외출 결과

교주의 외출 결과

교주가 비밀스런 외출을 한 후 두 시진 뒤……. 제법 널찍한 밀실 안에 여러 인물들이 커다란 탁자를 중심으로 모여 쑥덕거리고 있었다. 모두들 몸에서 짙은 마기 를 풍기는 자들……. 그들의 표정은 대단히 심각했다. 그들 중에서 상석에 앉은 자가 입을 열었다.

“오늘 그대들을 급히 모이라고 한 것은 몇 가지 의논할 게 있어서요.”

“아직 혁무상 장로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금 바쁜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소. 이제 계획이 거의 완성되었으니 이제 행동을 시작해야지 언제까지고 미적미적 미룰 수는 없소.”

“하지만 아직 완전한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분타들이 총타와 별개로 움직이며 소식이 두절되었습니다. 이건 뭔가 교주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말인데 섣 불리 덤볐다가 되려 …….?”

“크흐흐흐, 그 걱정은 하지 마시오. 몇몇 분타에 심어 놓은 첩자의 보고로는 이번 권력 다툼에 아주 심한 유혈 사태가 일어날 것을 대비해 분타를 총단으로부터 독 립시켜 잠적시킨 것이지 별다른 뜻은 없는 것 같소.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라 교주가 우리들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눈치 챘다는 것이지.”

“어느 정도까지 눈치 챘습니까?”

“물론 그 단순한 교주는 이제서야 묵향을 축출한 것이 실수한 거라는 걸 눈치 챘지. 거기에 운 좋게도 묵향은 교주의 측근인 능비계까지 죽여 줬다 이 말이오. 이제 교주는 믿고 의지할 힘이 거의 없소. 그리고 누가 적인지 아직 모호한 상태에서 최후의 도박을 시작했소.”

“뭡니까?”

상석에 앉은 인물은 일부러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묵향과 손을 다시 잡는 것이오.”

그러자 탁자 주위에 앉은 인물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묵향은 누가 뭐래도 마교가 배출한 최강의 고수가 아닌가? 그가 교주의 손을 들어 준다면 반란의 반 자 도 거론조차 불가능했다.

“이럴 수가……. 그런 사태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막아야 합니다. 그가 본교에 돌아온다면 반란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는 무공 외에는 별 관심이 없는 단순한 바 보입니다. 그때도 그가 교주에게 그 뛰어난 무공에도 불구하고 충성을 바치는 바람에 축출한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그러자 다른 목소리가 그 목소리를 막았다.

“하지만 묵향과 교주의 재결합은 어려울 겁니다. 교주의 말만 믿고 그가 어리숙하게 들어왔다가 무슨 일을 당하려구요. 전에 한 번 쓴맛을 봤으니 그것은 어려울 겁니다.”

그러자 상석에 앉은 인물은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교주가 화해의 선물로 분타들을 묵향에게 맡긴 걸로 조사되었소. 그래서 분타들과 연락이 끊긴 것이고……. 거기에 혈화궁과 만악궁까지 선물로 줬더군. 본좌도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낸 덕분에 막지 못했소.”

하지만 그 인물은 그런 반론에도 묵향과 교주의 결합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 세력들은 본교의 주력이 아닙니다. 그들의 전력을 몽땅 합해도 총타 전력의 20분의 1도 안 되는 전력인데 겨우 그걸 가지고 교주의 말을 신뢰하기는 힘들지요. 자성만마대만 동원해도 넉넉잡고 반 년이면 중원 구석구석에 있는 분타들을 싹쓸이할 수 있을 텐데……. 묵향이 생각을 조금이라도 할 줄 안다면 그따위 조건에 응하지는 않겠지요.”

상석에 앉은 자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역시 제갈천(諸葛天) 장로는 식견이 높으시오. 물론 묵향은 그따위 미끼를 덥석 물 바보가 아니지요.”

그러자 멸절신장(滅絶神掌) 제갈천 장로는 의아한 듯 물었다.

“그렇다면 무슨 또 다른 미끼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러자 상석에 앉은 인물은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탁자 주위에 앉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탁자 중간으로 던졌다.

“교주가 제시한 최후의 미끼는 바로 이거요.”

상석의 인물이 던진 것은 종이였다. 그 인물의 절묘한 내공의 조절에 의해 종이는 활짝 펴진 상태로 천천히 날아가서 정확히 탁자의 중간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그 내용을 눈알이 빠지게 심각하게 바라보던 제갈천 장로는 경악해서 외쳤다.

“그렇다면 교주는 천마혈검대를 묵향에게 준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그 둘의 결합은 성공할 겁니다. 부교주님! 천마혈검대가 묵향에게 가는 걸 기필코 막아야만 합니다.”

그러자 장인걸은 광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크하하하하! 물론 막았지요. 그걸 막았으니까 이 종이가 여기 있는 거요. 구양운 장로는 그대들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이미 오래전에 본좌에게 포섭된 인물이오.”

그는 교주의 명령과는 달리 섬서분타 부근까지 가겠지만 곧장 이리 돌아올 거요. 물론 그가 그쪽으로 움직이는 것도 교주의 첩자들을 속이기 위함이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교주는 구양운 장로가 배신했다는 걸 알아챌 겁니다. 그 정도 선물이면 묵향은 교주와 화해할 게 분명하니까요. 천마혈검대까지 묵향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교주보다 묵향이 거느린 전력이 월등해지기 때문에 묵향도 교주를 믿게 될 테지요. 교주가 눈치 채기 전에 선수를 써야 합니다.”

“이미 혁무상 장로가 손을 써 놨소. 이제는 교주를 처치하는 일만이 남았을 뿐이오. 그대들은 정확히 5일 뒤 교내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시오. 혁무상 장로가 그대 들을 지휘할 거요. 그리고 그때쯤 교주는 영원히 안식을 취하게 될 거요.”

제갈천 장로는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교주를 없애는 건 좀 자제해야 할 겁니다.”

“왜?”

“인질로 써야 할 테니까요.”

“인질?”

“교주와 그 가족들을 인질로 잡아야지만 독수마제(毒手魔帝)의 개입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독수마제 개인이야 겁날 게 없지만 원로원이 움직인다면 큰일이지요. 우선 인질들로 독수마제를 협박해서 그의 개입을 막은 후 천천히 독수마제를 고립시켜야만 합니다. 물론 그 인질들의 생명을 철저히 보호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 것도 독수마제의 독수(毒手)를 뽑아 버린 후에는 필요 없겠지만요, 흐흐흐…….

대단히 악랄한 계획임에 틀림없었다. 독수마제는 은퇴한 교주의 아버지. 당연히 교주와 그 가족들의 목숨으로 독수마제를 위협한다면 그는 장인걸의 교주 찬탈을 묵인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독수마제의 원로원에 대한 영향력을 천천히 없앤 후 은밀히 처치해 버린다면? 그러고 나면 교주와 그 가족들까지 다 없애 버릴 수 있을 것이고 그다음부터는 모두들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을 것이다.

“크하하하, 좋은 생각이군. 본좌도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소. 좋아, 일단은 아쉬운 대로 교주를 반병신을 만드는 걸로 끝내야지. 제갈천 장로는 본좌가 돌아 올 때까지 교주의 가족들을 확보해 놓게.”

“존명!”

그로부터 5일 후……. 작고 아담한 장원에 교주 일행이 도착했다. 이번 나들이는 마교의 교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하는 것이기에 그의 수하들은 많지 않았 다. 초절정고수 열 명으로 이뤄진 교주 독립 호위대인 십혈룡(血龍)과 원거리에서 교주를 호위하기 위해 특별히 선발된 혈마대(血魔隊)의 고수 1백 명 중에서 30 명만을 데리고 왔을 뿐이다.

교주 일행이 장원에 도착한 다음 제일 먼저 한 일은 장원의 식솔들을 모두 제압하여 방 하나에 굴비 엮듯 묶어 가지고 처박아 놓는 것이었다. 주변 정리가 끝나자 교주는 천천히 주위 경치를 구경하며 장원 안으로 들어섰고, 그의 뒤에서 십혈룡이 호위하며 따라왔다. 교주가 아담한 방에 들어가자 무사 한 명이 작은 술병과 간 소한 안주 몇 가지를 재빨리 가져왔다. 교주는 그걸 천천히 마시면서 손님을 기다렸다.

교주가 한 시진 정도 기다리자 기다리던 손님이 도착했다. 부드럽게 안광을 안으로 갈무리한 30대 중반의 잘생긴 청년… 그는 현 무림맹주였다.

그 또한 교주처럼 소수의 호위들만을 거느린 채 장원에 들어섰고, 이 시대가 낳은 두 거인이 작은 방에서 쑥덕거리는 동안 도저히 한자리에 모일 수 없는 마교와 정파의 절정고수들이 사이좋게 사방에 흩어져 외곽을 감시함과 동시에 서로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오. 일이 잘 풀리는 모양이군요. 안색이 아주 좋으시오.”

“허허허, 그러는 교주야말로……. 오랜만이외다. 참, 안 그래도 만나고 싶었소.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말이오.”

“뭔가요?”

“이번에 구휘 대협의 무덤을 발견한 것 때문에 전 무림이 발칵 뒤집혔는데, 왜 유독 마교만 조용하냐 이거요.”

“흐흐흐, 본교에는 북명신공이 있는데 왜 구태여 탐을 내겠소? 그리고 본교 내부 사정으로 그따위 무공이나 보물에 정신 팔 때가 아니오.”

“오, 그때 묵향을 보고 혹시나 했었는데 역시 귀교에 북명신공이 있었군요. 귀하도 그 신공을 익혔소?”

“익히지 못했소. 몇 번 해 봤는데 조금 이상하더군요. 아무래도 뭔가 고의로 틀리게 만든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전에 시도해 보다가 하마터면 주화입마에 걸 릴 뻔한 후로는 손도 안 대고 있소. 그런데 괴이하게도 묵향은 그걸 익혔지.”

“귀교가 장난친 게 아니라면 그럼, 그 무덤은 진짜라는 말인가? 하여튼 본좌도 요즘 그놈의 무덤 때문에 엄청나게 바빴소. 모두들 보물에 눈이 뒤집혀서 정사 간에 또는 문파 간에 혈전이 벌어질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니요. 어쨌든 귀교가 개입한 게 아니라니 다행이구려……. 참, 그런데 아직 만날 때가 안 되었는데 무슨 급한 일 이길래 본좌를 불렀소?”

그러자 아연한 얼굴 표정을 하고 교주가 오히려 되물었다.

“뭐라구요? 본좌는 그대가 불러서 온 건데……. 그대가 부르지 않았소?”

“그럼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아차, 간계에 빠졌소.”

이때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 소리, 기합 소리……. 교주와 맹주는 재빨리 신형을 날려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밖에서 본 것은 정말이지 경악할 만한 장면이었다. 교주와 맹주를 호위하는 직속 수하들은 대단히 뛰어난 고수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는 3백여 명의 혈의를 입은 무리들……. 도저히 그들은 인간 같지가 않았다. 각종 병장기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손이나 발이 날아가거나 심지어

배가 찢어져 내장이 흘러내리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무시무시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교주는 신음성을 흘렸다.

“천령강시, 도대체 누가 천령강시를……?”

이때 활을 든 1백여 명의 무사들과 그 외의 각종 무기를 가진 1천여 무사들이 주위에 내려섰다. 완벽하게 포위된 것이다. 그중의 한 명이 입을 열었다. 30대 초반 의 준수한 얼굴을 한 그는 생긴 것과 달리 음흉한 웃음을 터뜨리며 교주의 약을 올리기 시작했다.

“크흐흐흐, 오랜만이요, 교주, 이런 장소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겠지요? 크하하하!”

“장인걸…, 이 개자식! 네놈이, 네놈이…….”

“교주가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들어 놓은 천령강시.. 상상 밖으로 정말 위력이 대단한 것 같지요? 본좌가 교주에게 강시 제조법을 알려 줬으니 당연히 그에 따라 만든 강시는 본좌가 부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그대는 해 뒀어야 했소. 거기에 강시를 만든 책임자가 본좌의 심복이니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일반적인 도검으로 상처 하나 입힐 수 없는 천령강시들을 토막 낼 수 있을 정도로 호위 무사들의 실력이 의외로 뛰어나다는 점은 인정하겠지만, 그래도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을 거외다, 크하하하…….”

분노에 가득 찬 교주가 몸속의 진기를 서서히 끌어올리자 그의 피부는 밝은 자색을 띠기 시작했고, 더욱 기괴한 형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서 있던 맹주 도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고 허리에서 자신의 애검인 빙백수룡검(氷白水龍劍)을 천천히 뽑았다. 빙백수룡검은 맑고 투명할 정도로 아름다운 2척 8촌의 검신 양면에 수룡이 한 마리씩 음각되어 있었다. 대단히 파괴력이 강한 검으로 싸늘한 한기가 느껴지는데, 사람을 아무리 베어도 피가 묻지 않는 특이한 검으로, 무 림맹주의 신물(信物)이었다.

장인걸은 두 고수들의 행동을 지긋이 바라본 다음 느긋하게 말했다.

“참, 무림맹주까지 계셨군요. 정사는 양립할 수 없다고 했는데……. 여기에 서 계신다는 것 자체가 불행이지요, 흐흐흐. 두 사람 다 여기서 빠져나갈 생각은 버려 야 할 거외다. 이들 외에도 2천의 정예들이 외곽을 포위하고 있으니까 말이오. 어쨌든 그대들이 한 번씩 은밀히 만나서 쑥덕거린다는 것을 본좌가 눈치 챘을 때부터 그대들의 운명이 다한 것이오. 조용히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줄 의향이 있소이다.”

“이 모든 게 다 네놈이 뒤에서 조종한 것이냐?”

그러자 장인걸은 빙긋이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렇소. 나도 이렇게 잘될 줄은 몰랐소이다. 혼자서 새로운 마도를 추구할 거라고 암흑마교를 세웠을 때, 정말 천하가 곧 내 손 안에 들어올 것 같았지요. 하지만 곧이어 현실의 벽에 부딪쳤소. 마교 내에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밖에서 마교를 부숴 보려고 했더니 그게 장난이 아니더군. 본좌가 50여 년을 노력해서 만든 단체라 고 해 봐야 천마혈검대가 하루 저녁 휘저어 놓으면 가루가 날 정도밖에 안 되었으니까 말이오.

그래서 생각을 바꿔서 마교 안에서부터 시작하려고 들어갔지요. 하지만 거기에는 더 큰 벽이 기다리고 있었소. 교주도 알다시피 묵향이란 초고수가 있더군. 그냥 놔뒀다간 정말 나한테는 국물도 남을 게 없을 것 같아서 슬슬 뒷공작을 했지. 교주는 말로는 묵향을 포용하는 것처럼 하면서 뒤로는 묵향의 재능에 심한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지요. 나는 그걸 조금씩 자극한 것 외에는 별로 한 게 없지요. 흐흐, 당신은 멍청하게도 적당하게 이간질을 하니까 아주 손쉽게 먹이를 덥석 물었소. 거 기에 내 조언을 듣고 묵향을 없애기 위해 능비계를 파견한 건 정말 자기 무덤을 판 거나 다름없지요. 하하하, 그렇지 않소? 교주 나으리.”

그러자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솟은 교주가 노성을 질렀다.

“네놈에게 내가 아쉽게 해 준 것이 없는데, 이렇게 본좌를 핍박할 수 있냐? 그따위 교주 자리 달라고 했다면 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꼭 내란을 일으켜야만 했느냐?”

그러자 장인걸은 음산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교주는 뭘 모르시는구려. 자고로 계집의 옷도 순순히 벗게 놔두는 것보다 강제로 벗기는 게 재미있는 법이지. 또 꼬리치는 계집보다 반항하는 계집을 강간하는 게 더욱 재미있지 않소? 거저 굴러 떨어지는 교주 자리는 별로 재미없는 거요. 뺏어야만 진정한 내 자리가 되는 거지.”

그들 간의 이죽거리는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 교주와 맹주의 호위 무사들은 모두 다 천령강시들에게 죽임을 당해 버렸다. 천령강시들은 남은 두 사람의 실력을 은연중에 느꼈는지 곧장 공격해 들어오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만큼 그 두 거인의 실력은 독보적이었다. 그들은 무림에 현존하는 열한 명밖에 안되는 화경이나 극마의 고수들이었으니까…….

“뭣들 하느냐? 공격하라!”

아직도 2백여 구나 남은 천령강시들은 호위 무사들을 전멸시킨 후 잠시 주춤거리다가 장인걸의 불호령이 떨어진 다음에야 공격을 시작했다.

천령강시는 일반적인 강시의 약점인 속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마물이다. 거기에 이들은 어느 정도 이성(理性)을 갖추고 있기에 멍청하게 움직이지도 않는다. 눈부신 속도에 과거 익혔던 무공의 초식에 바탕을 둔 뛰어난 공격력, 거기에 강시 특유의 단단한 몸매를 자랑하는 이것들은 거의 무적에 가까운 파괴력을 자랑한다. 그렇기에 교주는 혈교로부터 유래된 이 천령강시의 제조법을 장인걸에게 들은 다음 묵향을 없애기 위해 특별히 제조한 것인데, 그것들이 자신을 향해 공격해 올 줄 은 생각도 못해봤던 것이다.

일단 교주와 맹주가 손을 쓰기 시작하자 정말이지 처절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교주의 강렬한 자전마공에 강시의 몸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갔고, 맹주의 백류매화 검법에 강시들이 토막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시들은 손발 따위 떨어져도 끄떡도 하지 않고 두 사람을 공격했다. 심지어 두 토막이 나 내장을 쏟아 내면서도 손으 로 기어와서, 어떻게 해서라도 그 두 사람의 발이라도 움켜잡으려고 들었다.

교주와 맹주의 무공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장인걸은 무심히 내뱉었다.

“교주는 그 누구도 극성까지 익히지 못했던 자전마공을 대성했군.. 흐흐흐, 하기야 저따위 괴이한 모양으로 돌아다닐 바보가 여태껏 없었으니까 교주가 최초 였겠지만, 아무튼 대단한 사람이야. 자전마공 하나에 끝까지 매달리다니…….”

장인걸은 옆에 서 있던 무사의 활을 뺏어 들고는 늘어서 있는 궁수들에게 명령했다.

“화살을 쏴라!”

1백여 명의 고수들이 교주와 맹주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하지만 수두룩하게 늘어서 있는 천령강시들이 방해가 되어 교주나 맹주에게까지 날아간 화살은 극소수 였다. 거기에 화살이 날아오는 파공음이나 기를 포착하여 천령강시들을 방패로 써먹었기에 그들에게 도달하는 화살은 거의 없었다. 천령강시들은 그 단단한 몸통 으로 교주와 맹주의 튼튼한 방패가 되어 주고 있었다. 내력이 약한 자가 쏜 화살은 천령강시의 피부조차 뚫지 못했고 내력이 좀 강하다고 해 봐야 깊숙이 박히는 정 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천령강시들은 등 뒤로 화살들을 몇 대씩이나 꽂아 넣고도 교주와 맹주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이때 장인걸은 엄청난 무위를 자랑하고 있는 교주를 향해 은밀히 조준한 다음 화살을 발사했다. 교주는 막 앞쪽에서 달려들던 천령강시 한 구의 머리통을 바숴 버 린 다음 좌우에서 협공해 들어오는 천령강시들에게 자전강기(紫電剛氣)를 퍼붓고 있었다. 이때 교주는 옆에 있던 천령강시의 등 쪽으로 화살이 한 대 날아온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는 천령강시의 몸이 방패가 되어 줄 것으로 믿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또 다른 강시를 공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화 살은 천령강시를 관통한 다음 교주의 복부 깊숙이 박혔다.

퍽!

“크억!”

교주는 곧이어 자전강기에 두 토막이 난 천령강시가 쓰러지는 뒤쪽으로 활을 든 채 빙그레 미소 짓고 있는 장인걸을 볼 수 있었다.

“이런, 개자식!”

교주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장인걸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이제 방패막이가 없어진 교주에게 화살이 집중되기 시작했고, 궁수들의 뒤쪽에 서 있던 또 다른 고수들이 교주에게 달려들었다.

화경이나 극마는 거의 동일한, 인간으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현경이나 생사경이 있지만 그 두 경지는 너무나도 꿈같은 것들이라 감히 범인들이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하는 것이다. 어쨌든 화경에 올라선 고수들끼리 일대일로 대결한다면 뭔가 비겁한 수를 쓰지 않고서는 양패구상하기 딱 좋다. 그 둘의 실력 차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론 화경 내에서도 각기 배운 무공에 의한 파괴력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또 화경 내의 상하 능력 차도 있다. 갓 화경에 올라선 자와 이제 현경에 올라가려고 깝죽거리는 인간들과의 능력 차는 대단한 것이다.

맹주와 교주의 경우 둘 다 현경에 아주 근접한 인물들이었고, 장인걸은 연륜과 실력에서 아무래도 그들보다 한 수 아래였다. 만약 그가 묵향처럼 현경에 올라섰다 면 애꿎은 수하들을 작살 내지 않고 그들을 직접 없애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장인걸은 자신의 실력과 교주의 실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상대는 극마급 의 고수 두 명이 아닌가? 그렇다면 자신이 몸소 나서 봐야 끝내는 당해 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키운, 거의 4천에 가까운 정예를 끌고 온 것이다. 거기에 자신 의 수하들은 모두 다 귀혼강신대법(歸魂?身大法)을 익힌 불사의 신체를 가진 자들이 아닌가? 아무리 교주와 맹주가 극강의 고수라 해도, 그들 모두를 다 죽이려면 내공이 바닥까지 떨어질 것이라는 걸 염두에 둔 작전이었다.

이제 천령강시가 거의 죽임을 당하자 본격적으로 장인걸이 거느리고 온 수하들 중에서 1천 명이 두 사람을 죽이기 위해 투입되어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 방적인 도살로 치닫고 있는 것은 참으로 의외였다.

특히 장인걸의 수하들에게 가장 큰 타격을 입히고 있는 것은 부상당한 교주였다. 맹주의 백류매화검법은 정말이지 현란하게 검강을 토해 내며 상대를 도륙했지만, 그들은 곧 몸이 다시 들러붙으며 일어섰다. 하지만 교주의 무공은 극양의 자전마공. 교주의 손이 번쩍일 때마다 고기 타는 냄새가 진동을 했고, 장인걸의 수하들은 상처 부위가 완전히 익어 버려 재생이 되지 않았기에 그 위력은 실로 엄청났다.

장인걸은 틈을 보아 가며 교주와 맹주에게 화살을 하나씩 날리고 있었다. 수하들의 몸통이야 구멍이 나건 나지 않건 상관하지 않았다. 겨우 그 정도 상처는 가뿐하 게 재생된다는 걸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주와 맹주는 이미 두세 발의 화살을 몸에 꽂고도 정말이지 인간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 수많은 사람들이 시체가 되어 뒹굴 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덮쳐 오는 숫자는 더욱 늘어나 있었다. 장인걸이 주위에 포진하고 있던 수하들을 더 투입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아무리 그들이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강력한 고수 4천 명과 극마의 고수 한 명을 상 대로 싸워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크흐흐흐, 이제 정신이 드시는 모양이군…… 그래 몸이 어떠시오? 교주 나으리.”

온몸이 피로 물든 인물……. 그의 몸은 약하지만 아직도 자색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상처가 있었다. 아마도 딴에는 치료를 해 준 듯 몸의 여기저기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리고 그의 내공을 끌어올리지 못하게 비파골을 굵직한 쇠사슬로 뚫어 놨고,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과 발은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만년한철로 묶여 있었다. 한중길은 어느 정도 정신이 들었지만 철창 밖에 있는 인물의 말을 알아듣는 건지 못 알아듣는 건지, 팔목이 날아가 뭉텅한 살 덩어리에 피에 젖은 붕대가 감겨 있는 자신의 오른팔을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망연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 왼팔마저 잘라 드릴까 하다가 식생활에 지장이 있으실 것 같아 본좌가 크게 인심을 써서 놔뒀소. 혈맥이 가닥가닥 끊겨서 아마도 20년쯤 죽어라 수련하면 3 할 정도 내공을 회복하실 수 있을 거외다. 아예 내공을 없애 버렸으면 더욱 좋겠지만 그러면 교주의 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육체가 사그라들 게 뻔하기에, 본좌가 어떻게 무림을 집어삼키는지 그 과정을 구경하라고 살려 드렸소. 물론 그 이유로 하나 남은 눈도 뽑아 버리려다가 봐준 거요. 흐흐, 또 내공이 전폐되지는 않았으니 운 좋으면 내게 복수할 수도 있을 거요, 크하하하.”

장인걸은 옆에 묶여 있는 참혹한 모습의 맹주를 지그시 바라봤다. 격투 중에 왼쪽 다리가 날아가고 없었으며 크고 작은 수많은 상처를 감싸 맨 덕분에 거의 전신에 붕대가 돌돌 감겨 있었다. 그 또한 교주처럼 비파골을 사슬이 꿰뚫고 있었으며, 남은 손발이 묶여 있었다. 하지만 맹주는 교주와 달리 자신의 잃어버린 왼쪽 발을 볼 눈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맹주가 쓰러진 다음 장인걸이 뽑아 버렸기 때문이다.

장인걸은 그 두 거물의 꼬락서니를 찬찬히 감상한 다음 옆 감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옆쪽에 연결된 세 칸의 감방에는 교주의 가족들이 잡혀 들어와 있었다. 모두들 처절한 투쟁을 했었는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들도 또한 교주처럼 만년한철로 된 사슬에 묶여 벽에 매달려 있었다. 사슬의 길이는 최대 7척 길이로 벽 뒤에 장치

를 해,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었다. 물론 이쪽 사람의 지시에 의해 강철로 된 벽 뒤에 있는 인물이 그 작업을 했다. 이 감옥은 마교 내에서도 최고의 중죄인들을 위해 설계한 것으로 침상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여기서 죽을 때까지 벽에 매달려 있어야만 했다.

이때 옥문의 저쪽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장인걸은 감방 안에 들어가 있는 수하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수하들은 감방 안에 있는 모든 죄수 들의 목에 비수를 일제히 들이댔다. 이때 저쪽에서 40대 중반의 중후한 인상을 풍기는 인물이 걸어 들어왔다. 그는 감방 안의 풍경을 흘끗 바라보며 장인걸의 앞에 이르렀다. 그러자 장인걸은 정중히 포권하며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태상교주님.”

그러자 태상교주는 장인걸을 무표정한 얼굴로 쏘아보며 물었다.

“본좌를 이리로 부른 이유는?”

“예, 이미 속하가 교주의 직위를 인수했습니다. 더구나 한중길 전 교주는 저기 잡혀 있는 무림맹주와 모종의 밀월 관계에 있었기에 속하는 어쩔 수 없이 본교의 장 래를 위해 그를 처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점 헤아려 주시기를..”

그러자 태상교주는 처참한 몰골의 맹주를 지그시 바라본 후 장인걸에게 말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저 아이들까지 잡아들일 필요가 있었나?”

“그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부모의 죄는 그 자식들도 져야 하는 법. 속하는 본교의 율법에 따른 것뿐입니다. 태상교주께서도 그 점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좋아, 저들의 처리는 어떻게 할 건가?”

“속하도 애써서 생포한 저들을 꼭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며칠 전만 해도 존경했던 상관이요, 또 그의 가족들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그건 속하 가 교주가 되는 데 원로원의 방해 공작이 없어야 한다는 가정이 앞서야 하지만요.”

그러자 태상교주는 같잖다는 미소를 피워 올리며 장인걸에게 말했다.

“그대는 인질로 본좌를 협박하는 건가?”

장인걸은 태상교주의 안색을 살피며 더욱 정중하게 답했다. 어쨌든 지금은 아직 그의 기반이 다져지지 않은 상태다. 지금 충돌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태상교 주는 거의 교주와 맞먹는 고수였다. 수하들을 총동원해서 태상교주를 없앨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그를 원로원이 용서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지 금은 원로원에 대한 태상교주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닙니다. 속하가 어찌 태상교주님을 협박할 수 있겠습니까? 저들은 본교의 죄인일 뿐. 그들의 처리 방법은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겠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저들 을 모두 풀어 줄 수도 있지요. 사실 교주의 경우 지금 근골이 뒤틀리고, 혈맥이 끊겨 거의 폐인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또 교주의 자식들은 저도 그 아이들이 커 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사랑을 주고받던 사이가 아니겠습니까? 속하도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면 저들을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알겠네. 저들도 마교인이기에 앞서 본좌의 식솔들이니 그대가 약간의 인정을 베풀기를 바라네. 내 원로원에는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게 말을 해 놓겠네.”

 “감사합니다, 태상교주님.”

태상교주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키며 감옥을 나서야만 했다. 자신이 지금 장인걸의 폭주를 막지 못한다면 저 아이들의 목숨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 이어진 마교의 역사상 권력을 찬탈당한 전대 교주의 가족들이 살아남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지금 원로원을 동원한다 면? 장인걸은 없앨 수 있을지 모르나 저 아이들의 목숨도 함께 끊어질 것이다. 이래도 저래도 살아남을 가망이 없었다. 태상교주는 장인걸을 없애는 대신 그냥 놔두 는 것을 택했다. 지금 원로원과 장인걸이 싸움질을 벌인다면 마교가 입는 그 피해는 수십 년을 두고도 보충하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그의 가족의 목숨은 절단 난 것이지만 마교의 맥을 여기서 끊기게 둘 수는 없었다. 혁무상 장로의 말에 따르면 무림의 정세도 대단히 불안정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래전에 마교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었던 혈교도 부활하는 이 마당에 자중지란을 일으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태상교 주는 섣불리 손을 쓰지 못했다. 장인걸의 인정 아래 가족들의 목숨을 맡기고 돌아서는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장인걸은 그날 밤 자신의 방 옆에 딸려 있는 비밀스런 밀실에 들어가서 벽에 쭉 세워 놓은 세 자루의 보검들을 만족스레 바라봤다. 세 자루 다 무림인이라면 꿈속 에서도 그리는 10대기병(奇兵)이었다. 기병 서열 2위에 올라가 있는 화룡도(火龍刀). 붉은색의 검신은 강한 불의 기운을 지니며 능력이 미치지 않는 자가 건드리면 타 죽는다고 전해지는 4척 길이의 마도(魔刀). 과거 사사천림(死邪天林)의 임주가 지니고 있었으나 마교가 사사천림을 멸망시키고 입수했다.

검법을 익힌 자가 도를 들면 아무리 좋은 도라도 강한 위력을 낼 수 없기에 역대 교주들은 그 강력한 파괴력에도 불구하고 잘 사용하지 않았다. 한중길은 권법에 능했기에 검법을 익힌 아들에게 수라마검(修羅魔劍)을 넘겨주고 대신 이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거의 사용하지는 않았다. 만약 그가 이 검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면 장인걸은 좀 더 큰 대가를 치러야만 교주를 없앨 수 있었을 것이다.

감옥에 갇혀 버린 소교주가 가지고 있던 기병 서열 4위의 수라마검. 아수라(阿修羅)의 힘을 가져 그 힘을 제어하지 못하는 자가 가지면 검의 마기에 홀려 혈귀(血 鬼)가 된다고 전해지는 마검으로, 검붉은 색의 검신에서는 강렬한 마기가 느껴진다. 전통적으로 마교의 교주가 지니던 신물(信物)이었다.

이제 폐인이 되어 버린 무림맹주가 가지고 있던 기병 서열 5위의 빙백수룡검. 맑고 투명할 정도로 아름다운 2척 8촌의 검신에 양면에 한 마리씩 수룡이 음각되어 있다. 대단히 파괴력이 강한 검으로 싸늘한 한기가 느껴진다. 아무리 사람을 베어도 피가 묻지 않는 특이한 검으로 무림맹주의 신물이었다. 과거 구휘 대협이 생존 해 있을 당시에는 기병 서열 1위의 흑묵검(黑墨劍)이 맹주의 신물이었지만 구휘의 행방불명과 함께 흑묵검 또한 사라져 버렸기에 빙백수룡검이 신물이 된 것이다. 이 세 자루의 기병 중 두 자루는 각각 정(正)과 마(魔)를 대표하는 신물. 장인걸에게는 이제 자신의 것이 된 거나 다름없는 마교의 신물보다 무림맹의 신물인 빙백 수룡검이 더욱 가치 있게 생각되었다. 무극검황 옥청학 맹주의 목숨과 맹주의 신물로서 협박을 하면 무림맹은 마교에 많은 것을 양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장인걸은 빙백수룡검을 슬며시 쓰다듬으며 옥청학의 아들 옥진호(玉振湖)가 다음 맹주가 되기를 빌었다. 옥진호는 화경에는 올라서지 못했지만 대단히 뛰어난 검 객으로 백류매화검법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거기에 옥청학의 아들이라는 든든한 뒷배경이 있으니 잘만 하면 그가 차기 맹주가 될지도 몰랐다. 그렇게만 된다면, 흐흐흐.”

이때 밖에서 음산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님, 죄인을 끌고 왔습니다.”

““잠시 기다려라.”

장인걸은 밀실 밖으로 나간 후 기관 장치를 돌리는 장치인 아수라의 목을 원위치로 돌렸다. 그러자 책장이 빙글 돌아가며 밀실로 들어가는 통로가 사라졌다. 그는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들어오라.”

문이 열리며 두 명의 무사가 한중길의 손녀 한영영을 끌고 들어왔다. 군데군데 검붉은 피가 묻은 옷을 입은 그녀는 이미 혈도가 막혔는지 한 올의 내공조차 끌어올 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나가 봐라.”

“옛!”

무사들이 나간 후 장인걸은 원한이 가득한 한영영의 턱을 들어 올려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정말 아름답구나.”

“퉤! 더러운 자식!”

“역시 계집은 반항하는 맛이 있어야지, 크하하하..”

장인걸은 발버둥치는 한영영을 간단히 안아 들고는 침상으로 갔다. 그러자 한영영은 발악을 하며 외쳤다.

“더러운 자식! 내 몸에 손만 대 봐. 혀를 깨물고 자살할 테다…….”

장인걸은 버둥거리는 한영영을 찍어 누른 후 가슴을 주무르며 이죽거렸다.

“흐흐흐, 혀를 깨물면 혀만 잘리지 죽긴 왜 죽어. 자, 혀를 깨물어 보거라. 본좌는 피를 보면서 성합을 하는 걸 즐기니까, 크하하하! 하지만 네년이 혀를 깨물면 네 아비와 어미의 목도 함께 날아갈 거라는 것도 생각해 둬야 할걸? 어때? 아직도 깨물고 싶은 생각이 있나?”

무림은 무림맹주 무극검황 옥청학의 갑작스런 실종으로 들끓고 있었다. 그를 호위했던 30명이 넘는 뛰어난 무공을 지닌 무사들까지 함께 사라졌기에 구구한 억측 과 유언비어가 나도는 가운데 정파는 서서히 분열하기 시작했다. 맹주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은 많았다. 무림맹은 세력 순으로 소림(小林), 무당(武當), 공동(空 洞), 점창(點蒼), 화산(華山), 당문(唐門), 아미(峨嵋), 청성(靑城), 종남(南)의 9파와 개방(쾬幇)의 1방, 또 서문세가(西門世家), 종리세가(鍾里世家), 제갈세가(諸 葛世家), 악양세가(岳陽世家), 남궁세가(南宮世家)의 5대세가가 연합한 단체인 만큼 그들은 맹주의 실종과 함께 자파에서 맹주직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암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아미, 소림의 경우 승려들로 이루어졌기에 맹주직을 차지할 생각이 없었고, 무당과 곤륜은 도인들로 이루어졌기에 권력과는 상관이 없었다. 또 개방의 경 우 거지 떼로 이뤄졌기에 거지의 특권인 무소유, 무욕에 상반되기에 맹주직을 노릴 가능성은 없었다. 악양세가의 경우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의가(醫 家)였기에 무림의 장악에는 별로 뜻이 없었다. 그리고 당문의 경우 독과 암기의 대명사로서 대단히 악랄함을 자랑하기는 하지만 그에 너무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 사실상 절정고수라 할 수 있는 인물이 거의 없기에 맹주직을 노리려고 해도 거의 불가능했다. 거기에 다른 문파들도 무공에 비해 독과 암기만을 너무 우대하는 그들 을 약간 멸시하는 경향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열다섯 개의 거대 세력 중 여섯 개의 세력을 뺀 아홉 개의 문파가 문제였다. 그들은 각파의 장문인 내지는 뛰어난 고수들을 앞세워 맹주직을 노렸 다. 하지만 사실상 맹주가 될 만한 인물은 몇 사람 되지 않았다.

우선 옥청학의 아들 옥진호를 들 수 있다. 그의 아버지가 맹주였기에 맹에서 가장 탄탄한 기반을 잡고 있는 인물이라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기에 옥 청학은 맹주이자 공동파의 전대 장문인이었으며 그의 아들 옥진호에게 공동파 장문인의 직위를 넘겨 주고 맹주에 취임했었다. 하지만 옥진호 장문인의 무공은 그 의 경쟁자들에 비해 조금 떨어지는 게 흠이었다.

두 번째로 들 수 있는 인물이 서문세가의 가주 수라도제(修羅刀帝) 서문길제(西門吉制)였다. 가전의 뇌전도법을 10성 이상 성취한 유일한 인물로 120세에 이르는 화경의 고수였다. 서문세가의 힘이 5대세가의 수위에 오르는 만큼 서문길제가 맹주로 등극할 확률은 지극히 높았다.

세 번째로 들 수 있는 인물은 옥화무제(玉花武帝) 매향옥(梅香玉)이었다. 사실 그녀의 사문은 9파1방에도 5대세가에도 들지 못했지만 무림 최고의 정보 단체 무영 문을 운영하는 여걸인 만큼 무림맹의 정보력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아마도 그녀가 자신의 공헌도를 내세워 맹주 직위를 노린다면 딱히 무림맹 에서 거절하기 힘들다는 게 세인들의 평이었다.

그 외에 무당파의 태극검제(太極劍帝)와 곤륜파의 곤륜무제(崑崙武帝)라는 거목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2백 세에 가까운 노고수들로 화경에 이른 인물들이었 다. 물론 그들이 맹주의 직위를 노린다면 다른 인물들보다 우선권이 높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둘은 세상의 명리를 따지지 않는 도인들에다가 은거를 선언한 지 수 십 년이 지난 인물들이었다. 거기에 곤륜파의 경우 그 엄청난 위명에도 불구하고 중원의 변두리에 치우친 관계로 9파1방에도 들어가지 못하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그들이 직접 나설 가능성도 거의 없었지만 그들이 후계자인 고수를 밀어 준다 하더라도 곤륜파는 불가능했고, 무당파만이 가능했지만 여태까지 태극검제의 태도로 미루어 봤을 때 그럴 가능성도 없었다.

또 맹주의 선출에 무림맹 자체의 이권도 있었다. 만약 무림맹은 뇌전검황이 비명횡사하지 않았다면 그를 무조건 맹주로 세웠을 것이다. 제자수 2백여 명 정도의 제령문 같은 작은 문파에서 그렇듯 고강한 무예를 지닌 인물이 나온 게 놀라울 정도였지만, 사실상 7룡4봉에 뇌전검황의 대제자도 아닌 서진(徐眞)이라는 제자가 들어간 것만 봐도 제령문의 저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거기에 뇌전검황의 실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었기에 다른 인물들의 반발도 없을 테지만, 사실 무림맹에서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이유는 딴 데 있었다. 뇌전 검황은 유일하게도 3황5제에 들어가는 초절정고수들 중 가장 기반이 약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문도 수 겨우 2백여 명. 그렇다면 기존 무림맹의 골격이 바뀔 수가 없 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각 파에서 맹주가 나오면 그 맹주는 약 2, 3천 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들어가 모든 중요 직책들에 그의 심복들을 집어넣게 된다. 하지만 뇌전검황은 그럴 만한 인재를 보유하지 못했기에 그를 맹주로 세운다 하더라도 공동파는 계속적으로 무림맹의 요직을 독점해 장기적으로 무림을 주무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뇌전검황은 이미 고인이 되어 버렸고, 공동파가 내세울 유일한 인물은 옥진호 장문인뿐이었다. 만약 맹주 선출이 시작되면 옥진호 장문인이 맹주가 될 확 률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무림맹에서는 맹주의 행방불명 사실을 공포하고, 어딘가에 맹주가 살아 계실지도 모른다는 점을 들어 차기 맹주를 선출하 지 않았다. 그리고는 옥진호 장문인을 맹주 대리로 앉혀 맹주를 찾아내는 작업을 우선시하려고 공작을 펼치는 중이었다.

거기에다 무림맹이 맹주의 실종으로 난리가 나 버려 제 기능을 상실하자 급기야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여태껏 무림맹의 중재로 충돌하지 못하고 있던 남궁세가와 서문세가가 구휘 대협의 무덤을 기화로 정면충돌했던 것이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파의 다섯 개 방파와 정파의 일곱 개 방파까지 무덤을 빌미로 충돌을 벌여, 이제 사태는 거의 구휘 대협의 무덤을 중심으로 정과 사, 사와 사, 또 정과 정의 본격적인 격돌이 시작될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정말이지 추악하게도 1 대 영웅의 무공비급과 보물을 놓고, 그의 무덤 앞에서 싸움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세상은 반란을 일으킨 진천왕과 진압하려는 황제의 본격적인 전쟁으로 소란스러웠다. 한참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귀주성과 사천성에는 전쟁통에 수백만 이 넘는 피난민으로 난리가 나 있었다. 그 덕분에 대사마 진길영 원수와 이창해 원수는 서둘러 요를 정벌한 후, 요 정벌에 커다란 도움을 준 여진의 족장들과 회담을 하여 송화강 동쪽을 여진의 영토로 인정하는 대단히 파격적인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물론 처음에는 여진까지 모조리 정벌해 더 이상 화근거리가 존재하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지만 본국에 내전이 터졌는데 한가로이 야만족들 정벌한다고 대군을 변방에 놔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해 낸 계략이 송화강 동쪽을 여진에게 주는 것이었다. 일부러 그들은 각 족장들과 송이 여진에 공여하는 송화강 동쪽의 영토를 여러 등분하여 그 토막들의 경계선을 불분명하게 하고 두 명 혹은 세 명의 족장들에게 중복하여 같은 영토를 줌으로 해서 여진족들끼리 치열한 내전이 벌어지도록 머리를 썼다.

그리고 그 전과에 따라 대송 황제가 내리는 벼슬도 함께 내렸는데……. 일부러 작은 부족의 족장에게 높은 벼슬을, 또 큰 부족의 족장에게 낮은 벼슬을 내렸다. 거 기에 한술 더 떠서 어떤 큰 부족은 부족장보다 그 수하 용사가 더 높은 벼슬을 받은 곳도 있을 정도였다. 일단 여진에 대한 논공행상이 끝난 후 대송의 주둔군이 철 수하고 나자 진길영 원수와 이창해 원수의 계략대로 여진족 내에서 지독한 내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그 내전은 아골타라는 뛰어난 젊은 족장에게 행운을 가져다주게 된다. 그는 카막투이 부족의 일개 젊은 족장이었지만, 요 정벌에서 송의 군대와 함께 싸우며 집단전의 기법을 배우게 되었고, 거기에 지독한 부족 간의 갈등을 틈타 각종 모략과 술수를 동원하여 빠른 시간 안에 여진족을 통합해 버 렸던 것이다.

<묵향>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