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권 8화 – 건망증

건망증

묵향은 백운장에서 나와 1백 리를 갈 때까지 하오문의 총타가 있는 호남성에 위치한 군산으로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이 갑자기 바뀐 이유는 한 농가를 힐끗 본 다음이었다.

때는 한낮이었고 땡볕을 피해 시원한 초막의 마루에 오손도손 정답게 앉아 있는 가족들에게 무의식적으로 눈이 갔던 것이다. 처음에는 뭔가 수상한 점이 없는지 거의 본능적으로 살펴본 것이었는데 어느새 묵향은 단란한 농가의 식사 장면을 뚫어지게 훔쳐보고 있었다. 농가에는 한 농부와 그의 아내, 그리고 아들 둘과 딸 하 나가 있었다.

사실 농부의 아내나 그 딸 모두 박색을 간신히 모면한 정도였지만 묵향이 바라보고 가슴이 뭉클했던 것은 그 집안의 분위기였다. 그들의 속사정이야 신이 아니니 알 도리가 없었지만 눈에 보이는 너무나도 정겨운 식사 장면..

“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갑자기 이성이 돌아온 묵향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가만, 나한테 저런 때가 있었나??

무공에 관한 사항을 제외하고는 안 돌리던 머리를 열심히 굴려 머나먼, 정말 머나먼 과거의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있었군. 그래, 그때야. 그 아이 이름이……. 맙소사! 양녀 이름까지 잊어 먹었군. 그 아이는 요즘 잘 지내는지 모르겠구나. 참 예쁜 숙녀가 되어 있었는데…, 지금쯤 결혼해서 애를 몇 명 낳았는지 모르겠구만.. 하나뿐인 양녀인데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어. 벌써 헤어진 지 몇 년째인지 기억도 안 나 는군. 그때 표두(頭) 노릇을 하지 않았다면 그 아이를 만나지도 못했겠지. 그때는 참 재미있었지. 방 분타주는 잘 지내는지 모르겠군. 참,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요즘 돈줄도 필요한데 방 분타주가 거느린 낙양의 세력을 흡수한다면 꽤 보탬이 되겠군. 그리고 내친김에 부근에 있는 분타도 몇 개 꿀꺽하고 말이야. 그리고 또…….?

먼발치에서라도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에 묵향은 자신이 그곳으로 가야 하는 이유를 줄줄이 만들어 내면서 자신이 내린 결정을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왜 호남성으로 가야 하는지는 완전히 망각한 채……. 그의 성격으로는 도저히 어린 계집애 하나를 만나기 위해 그 먼 길을 가야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이다.

묵향은 천천히 그 독특한 걸음걸이로 하남성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하남성은 전 무림인들이 존경을 아끼지 않는 대 사찰 소림사(小林寺)와 20만 거지들의 왕초가 거주하는 개방이 있는 곳이다. 오래전 세력 다툼에 의해 10만의 거지가 떨어져 나가 남개방을 세웠다. 하지만 남개방의 세력이 작았기에 모든 공식행사에는 북개방 의 방주가 나서고 있었다. 북개방은 20만 식솔을 거느린 거대 방파지만 그래도 두 토막이 난 후 세력이 급속도로 쇠퇴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섬서성의 남단에 위치한 황제가 거주하는, 오래전 장안이라고도 불렸던 중경(中京)……. 중경에는 중앙원수부와 비극적인 사건으로 해체되어 버린 찬황흑풍단이 있는 곳이다. 그렇게도 강대한 군사력을 가진 중경의 동쪽 관문이라 볼 수 있는 낙양. 하남성의 북쪽에 위치한 낙양은 넓은 평야 지대로, 예전에 몇몇 국가의 수도가 위치한 곳이었지만 지리상 수비에 난점이 많은 도시다. 그렇기에 송대에 이르러 장안에서 멀지 않은 낙양에 정북원수부를 두었으니 사실상 황제로서는 두 개의 원 수부를 직할하게 되어 버렸고, 상대적으로 왕들보다 더욱 강대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묵향이 가는 곳은 오래전 자신이 잠시 살았었던 정북원수부가 위치한 낙양인데, 이곳은 군사, 상업, 교통의 중심지로 대단히 시끌벅적한 도시였다. 묵향은 낙양으 로 발길을 돌린 후 포목점에서 무명을 세 필 사다가 너무나 잘 알려져 버린 이놈의 묵혼검을 칭칭 동여매어 덜그덕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게 만든 후 상자 하나를 구 해서 그 안에 집어넣고 어깨에 메고 다녔다. 평소에는 귀찮다고 변장 따위 하지도 않았고 또 암습 따위를 걱정하는 성격도 아니었지만 양녀를 만나러 가는데 꼬리를 달고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묵향은 한참 길을 가다가 시장기를 느끼고 그럴듯한 식당을 찾았다. 평소대로 길바닥을 힐끗 훑어본 다음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근처에 유명한 명소인 동백산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식당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묵향은 다행히 자리를 하나 찾고는 그곳에 앉아서 점소이를 불러 주문을 했다.

“오리탕 한 그릇하고 죽엽청 두 병, 그리고 신선한 소채가 있으면 좀 다오.”

“예.”

식당 안의 대화는 요와의 전쟁 얘기나 얼마 전에 일어난 서경의 패주(覇主) 진천왕(眞天王)이 오랜 전쟁과 흑풍단의 해체, 금의위의 몰락으로 인한 황권의 약화를 틈타 정서원수부의 부수장 광해(廣海) 대장군과 모의하여 곽진(郭) 원수를 살해한 후 반란을 일으킨 것에 집중되고 있었다. 묵향이야 세상이 뒤집히든 말든 자신 과는 별 상관이 없었기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입장이었지만, 나약한 백성들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관심사였던 것이다.

한참 맛있게 오리 고기를 뜯으며 죽엽청을 마시고 있는데 한 젊은이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다른 사람이야 그에게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만약 그를 한 번 본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칼 차고 다니는 거 보니 무림인이군.’

하지만 조금 더 관찰력이 있다면 저런 생각도 했으리라.

‘남자답게 생긴 데다 제법 다부진 몸매를 가지고 있고… 차림새가 그럴듯한 걸 보니 막돼먹은 놈은 아니군.”

거기에 그 사람이 무림인이었다면 요런 생각도 했을 것이다.

‘제법 근사한 눈을 하고 있어. 꽤 수련을 잘한 놈이야.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닌 것 같은데?”

거기에 그 사람이 묵향 정도의 안목을 가진 놈이라면 그런 생각들에 조런 생각까지 보탰을 것이다.

‘제법 검을 잘 아는 놈이군.’

묵향은 찬찬히 상대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대단히 흥미가 당기는 상대였다. 많은 인물들을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검만을 꼽는다면 자신이 아는 자들 중에 서 상위 5천 명 안에는 들어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법 흥미를 돋우는 놈이군. 추정되는 나이에 비했을 때 놀라운 성취를 지니고 있는 놈이야. 아직 애송이라는 게 흠이지만, 어쩌면 내 나이쯤 되면 나를 능가할지 도…….?

초고수라면 대부분 그 막강한 내공으로 육체의 노화를 억누른다. 그렇기에 그놈이 그놈 같아 보이지만, 실상 막강한 고수를 알아보기는 힘든 게 아니다. 우선 눈. 눈만 봐도 이자가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섰는지 화경에 들기 전이라면 대강은 눈치 챌 수 있다. 현경이라면 반박귀진(反樸歸眞)의 단계라 자신의 모든 것을 완벽히 숨길 수 있기에 그 내막을 알아보기는 화경보다도 더욱 힘들다. 그렇지만 화경에 들지 못한 고수들이라면 한눈에 뻔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내공 조예가 어느 정 도인지…….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 밝혀지면 익힌 바 무공이나 수련 정도에 따라 공력의 차이가 심하기에 오차가 크긴 하지만, 일정 나이에서 죽자고 쌓을 수 있는 한계가 있기 에 영약(靈藥)이라도 먹지 않았다면 어느 정도는 나이를 유추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음식 떠먹는다고 치아가 약간이라도 보이면 이건 도저히 속이기가 힘들 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이빨의 상태도 개개인의 습관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있기도 하기에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생전 이빨 관리를 안 하는 일부 게으른 놈들하고 미용을 위해 죽자고 양치질을 해대는 일부 부지런한 년들하고는 색깔이 많이 다르니까……

이때 묵향의 눈에 힐끗 보인 게 그의 검이었다. 어딘지 낯익은 검……. 언젠가 한 번쯤은 저 검의 주인을 봤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저 애송이는 아니야. 누굴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꽤 오래전에 본 모양인데……. 흔한 검은 아니야. 손잡이의 형태, 검집의 모양, 전체적으로 봤을 때 흔한 검처럼 아주 수수하게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저건 뛰어 난 장인이 만든 솜씨야. 조각되어 파 들어간 칼자국만 봐도 알 수 있지……. 그런데 저걸 어디서 봤었지??

묵향이란 인물은 원체가 무골(武骨)이라 그림 따위는 알지 못했고 알려고 노력도 안 했다. 하지만 공예품이나 특히 조각된 것이라면 그것을 만든 장인의 섬세한 솜씨를 거의 본능적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조각칼도 칼은 칼이었고, 그는 그 칼을 사용한 상대의 솜씨를 읽는 것이었다.

상대는 음식을 시키더니 꽤 허기졌는지 술을 반주 삼아 열심히 먹어대기 시작했다.

“검집만 봐서는 알기 힘들고, 검을 직접 보면 떠오를까? 그래도 안 떠오른다면 저놈의 검술을 보면 기억이 날까? 저놈보고 검 좀 보여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 니……. 가장 좋은 방법은 검을 뽑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을 유도하는 게 최고지. 그렇다면 어떻게 시비를 걸까……. 그런데 만약 아는 놈의 제자쯤 된다면 나한테 칼 을 겨눈 저놈을 죽여야 하나?”

이런저런 궁리를 하면서 술을 마시는 사이 그 청년은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묵향은 그가 나가는 것을 보고 식탁에 돈을 던져 놓고 따라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 검의 주인인 애송이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역시나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묵향이었다.

묵향이 애송이를 따라다닌다고 정신이 팔려 있는 이 시간, 하남성으로 들어가는 관도상에서는 웃지 못할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10여 명이나 되는 허리에 장검 (長劍)을 찬 장정들이, 옷도 그럴듯하게 차려입고는 땅바닥을 헤매고 있었으니 기괴할밖에…….

열두 번째 행인이 설설 기어 다니고 있는 꼴을 보며, 칼을 차고 있는지라 대놓고는 못하고 얼핏 비웃음을 띤 눈으로 힐끔거리며 지나가자 한 여인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짜증을 폭발시켰다.

“오빠!”

그러자 땅바닥을 기고 있는 남자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귀 안 먹었으니까 조용히 말해.”

“도대체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보면 모르냐? 흔적을 찾고 있잖아.”

“도대체가 추격술에 있어서는 도가 텄다고 떠들던 양반이 지금 땅바닥에서 뭐 하는 거예요? 그것도 대로 한복판에서……. 사람도 많이 지나다녀서 창피해 죽겠 단 말이에요. 그러고도 오빠가 전직 살수예요?”

“제발 좀 떠들지 마라. 전직 살수였던 초고수의 흔적을 좇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냐?”

“그래 흔적을 찾기는 찾았어요? 오빠가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여기는 하남성으로 가는 길이라구요. 하오문으로 갔다면 호남성으로 가야지. 왜 이리 오 는 거예요?”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호남성 쪽으로 가다가 이상하게 위쪽으로 길을 바꿨다는 것 외에는..

“맞기는 맞는 거예요?”

“이 녀석이 날 뭐로 보고……. 아무리 쉬었다고 해도 내 눈이 그 정도로 썩지는 않았다구.”

이때 저 앞쪽에서 땅바닥을 기고 있던 장한 한 명이 외쳤다.

“막주님, 찾았습니다.”

“그래? 확실히 이쪽이 맞군. 이리 와 봐라. 내가 설명해 줄 테니

여인이 따라가자 몇 개 나 있는 발자국을 보여 주며 말했다.

“여기는 관도상이라서 땅이 굳어 발자국을 찾기 힘들어. 거기다 행인도 많아서 기껏 찍힌 것도 잘 지워진다구. 여태까지는 그놈이 으슥한 길을 골라 왔기 때문에 발자국 따라오기도 편했는데, 그 녀석이 방금 지나온 마을을 통과한 다음부터 아예 대로로 다니는 바람에 더욱 힘들어졌다.”

“아, 그가 무명하고 나무 상자 산 걸로 추정되는 마을 말이에요?”

“그래. 아마 나무 상자 크기로 봤을 때 검을 숨겼겠지. 그의 독특하게 생긴 검만 잘 숨긴다면 쉽사리 눈에 띄는 인물이 아니니까……. 여기 발자국을 봐라. 아주 지 독한 놈이야.”

여인은 발자국을 열심히 쏘아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난 도저히 모르겠는데요?”

“보통 무림인이라면 평지에서는 일정한 보폭으로 걷지. 그건 보법이나 신법, 경공술을 오랜 시간 연마하면서 만들어지는 습성이야. 그리고 군인들도 보폭이 거의 일정하지. 하지만 이놈은 보폭이 일정하지 않아. 첫 발자국에서 2척 5촌이면 다음 발자국은 언제나 반 촌(약 1.5센티미터) 정도가 불규칙적으로 더해지든지 빠지든 지 한다구. 무지렁이 촌민들도 이놈만큼 보폭이 들쑥날쑥하지는 않아. 그만큼 걸으면서 지속적으로 보폭에 신경을 쓰는 거야. 그리고 무림인이라면 절대로 발뒤꿈 치로 걷지 않지. 그건 발소리를 죽이려는 것이기도 하고 언제든지 몸을 날릴 수 있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인데, 이놈은 보란 듯이 뒤꿈치를 디딘다구. 거의 촌민들과 같은 발자국이야. 여태껏 예까지 추격해 온 것은 보폭이 일정하지 않은 것만 찾은 덕분인데, 이렇게 탄탄한 관도 위라면 그것도 힘들군……. 하남성으로 간 것 같으 니 일단은 계속 따라가 보자구.”

묵향은 애송이의 검술을 구경하기 위해 이럴지 저럴지 망설이며 따라다니면서 상대의 몸동작 하나하나를 세심히 관찰해 나갔다. 상대의 몸동작은 하나하나가 절 도가 있는 것이 과연 명문의 제자임이 확실하니, 묵향으로서는 더욱 오리무중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정파의 인물은 많지 않은데.. 젊은 나이에 저 정도의 검술 실력을 쌓으려면 상당한 인물이 지도한 것이 틀림없어.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대단한 실 력자, 실력자라……. 맞아! 혹시 저놈이 그 맹주라는 놈의 제자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죽여 없애는 게 울분을 삭이는 데 도움이 되지? 맹주란 놈의 제자 가 확실하면 먼저 분근착골을 한바탕한 후에, 손가락과 발가락의 뼈들을 자근자근 다 부숴 버리고, 음, 또 뭐가 있지? 그래! 가죽을 벗긴 다음, 아니지 다 벗겨 버리 면 오래 못 사니까 즐거움을 좀 더 지속하기 위해 먼저 한쪽 다리만 벗기자구. 그런 다음 소금을 뿌리는 거야. 그래, 그런 식으로 느긋하게 즐기면서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자.’

자신의 목숨이 어떤 모진 놈에게 위협받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천천히 주위의 경치를 구경하며 걷고 있는 애송이의 뒤를, 묵향이 느긋하게 따라다니며 자신 이 아는 한도 내에서 별의별 고문 방법을 다 생각하고 있었다. 고문을 시작하면 그놈의 생명이 쇠심줄처럼 질겨서 오래 버틴다 하더라도 3일 정도일 테니… 묵향은 곧 맛보게 될 희열을 상상하면서 기다림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교주는 요즘 들어 자신이 가진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남는 시간을 사냥에 쏟아 부으며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사냥은 매를 이용한 사냥이었다. 교주는 여러 종류의 잘 훈련된 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사냥을 하면 사냥개 몇 마리와 10여 명의 경공이 빠른 고수들이 몰이꾼을 했고, 그 외에 다섯 명의 전문적 인 매 사육사가 다섯 마리의 매를 이끌고 그를 따랐다. 다섯 마리의 매는 두건을 쓰고 있었지만 그중 교주의 손 위에 앉은 조금 덩치가 작은 한 마리는 두건을 쓰지 않고 있었다.

교주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 마리의 매들 중에서도 특히나 고려에서 수입한 두 마리의 송골매를 좋아했다. 그가 송골매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 적당히 잔인 하면서도 우아한 품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송골매의 비상(飛翔)은 마치 꿈처럼 더없이 완벽했다. 그리고 먹이를 향해 다가갈 때는 그 잔인한 성격으로 서두 르지 않고 천천히 달려들어 완벽하면서도 우아하게 상대의 숨통을 조이며 요리하는 것이다.

오늘 사냥에서도 송골매들을 두 번씩 사용했는데, 사냥감을 향해 멋지게 비상하여 천천히 우아하게 상대를 향해 압박을 가해 가다가 나중에는 그 목숨을 발톱을 이용해 멋지게 끊어 놓는 그 장면을 보며 교주는 언제나와 같이 갈채를 보냈다. 사실 교주 정도의 고수라면 표창 몇 개만 가지고도 단시간에 토끼를 몇 마리고 잡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매 사냥이란 번거로운 방식을 즐기는 이유는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의 그 멋있는 눈요기 때문이었다.

몇 번 매를 날린 후 다시 수하들을 몰이하러 내보낸 다음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문득 어떤 소리에 정신을 차려 보니 수하 한 명이 길 옆 덤불 속을 가리키 고 있었다. 교주는 말을 멈추게 하고는 자신의 손 위에 앉아 있는 두건이 없는 혈전(血電)이라 부르는 새매의 발목 끈을 풀었다.

“지금.”

교주가 작은 음성으로 말함과 동시에 끈을 잡고 있던 수하 하나가 개들을 풀었다. 개들이 짖어 대며 달려들자 토끼는 덤불 속에서 튀어나와 숨을 곳을 찾아 달렸 다. 그 순간 교주는 혈전을 날렸다. 날개를 세차게 퍼덕이며 매는 마치 화살과도 같이 똑바로 제물을 향해 날아갔다.

앞쪽으로 25장(약 75미터)쯤에는 잡목 숲이 펼쳐져 있었다. 토끼는 엄청난 속도로 그쪽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혈전은 땅에서 불과 몇 척쯤의 높이로 나지막이 미 끄러지듯 날며 거리를 좁혀 가고 있었다. 다음 순간 혈전은 제물 바로 위에 이르러 아래로 몸을 덮쳐 갔다.

토끼는 그 순간 비명을 지르며 뒷발로 몸을 세웠다가 다시 날쌔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혈전은 실패한 것이 너무나 분한지 켁켁거리며 뒤를 쫓다가 토끼가 피신처 를 향해 마지막 달음박질을 치는 순간 그 발톱을 토끼의 목에 깊숙이 박았다. 새매가 날개를 접었다. 마지막 토끼의 꿈틀거림……. 새매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교주 를 오만하게 바라봤다.

교주는 다가가 말에서 내리며 미끼를 내밀었다. 순순히 혈전이 토끼의 시체를 떠나는 순간 재빨리 미끼를 감추자 매는 내뻗은 그의 장갑 낀 손 위에 앉았다. 그는 장갑에 달린 매의 발목 끈을 조이며 말했다.

“참 잘했다.”

이때 수하 한 명이 토끼 귀의 일부를 잘라 매에게 상으로 먹였다. 너무 많이 주어 배가 부르면 말을 안 듣기에 조금만 주는 것이다.

교주는 혈전이 오만하게 주위를 둘러본 후 만족스레 먹이를 먹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 훌륭하게 죽였어. 하지만 송골매와 같은 흥분감은 없었어. 새매는 새매일 뿐. 그 짧은 날개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든 죽이기 위해 태어난 새. 두건 을 쓰지 않고, 쓰려고도 하지 않으며, 그 날카로운 눈매로 오만하게 세상을 내려다보며, 때로는 좋은 친구가, 때로는 무서운 적이 되지. 기분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 는 광폭한 매. 그대와 같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 자주 드는구려. 묵향 부교주, 당신을 적으로 만든 것은 어쩌면 내 일생일대의 실수일지도 모르지.

묵향이 애송이를 따라다닌 지 어언 3일.. 손을 쓰면 금세 죽여 버릴 것이 뻔한 자신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지라 쉽사리 손을 안 쓰고 내일 내일 하 면서 미뤄 오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의 검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는 의외로 빨리 다가왔다. 그날도 애송이의 뒤를 느긋하게 뒤쫓으며 각종 고문 방법을 상상하면서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 애송이를 네 명의 괴한이 둘러싸는 것이 보였다. 이어서 들리는 괴한 중 한 명의 목소리.

“네놈이 다섯째를 병신으로 만든 놈이냐?”

애송이는 상대를 쭉 훑어보더니 담담하게 대꾸했다.

“당신들이 하남5괴(河南五怪)라면 바로 찾아오셨소.”

“클클클, 광오한 놈이군. 다섯째를 병신으로 만들어 놨으니 네놈도 병신이 되는 것이 정해진 도리. 네놈이 자진해서 자르겠느냐? 아니면 본좌가 손을 쓰랴?” “하하, 나를 그렇게 물컹하게 보다니…….”

그와 동시에 애송이가 검을 뽑았다. 검이 뽑혀 나오자 투명한 옥빛을 띤 보검에서 뻗어 나오는 예기(氣)가 사방을 뒤덮었다. 하남5괴도 상대가 예리한 보검을 뽑 자 모두들 뒤로 물러서며 저마다 가진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 애송이의 검을 본 순간 묵향은 경악했다.

“명옥검(明玉劍)!”

자신도 모르게 명옥검이란 말이 입속에서 새어 나옴과 동시에 그의 놀람은 곧이어 활화산 같은 분노로 폭발했다. 묵향의 신형은 거의 뇌전과 같은 기세로 쏘아져 들어갔다. 애송이는 옆에서 뭔가가 덮쳐 옴을 느끼고 대비하려고 몸을 옆으로 틀었으나 열여섯 개의 혈도가 순간적으로 제압당하면서 쓰러져 버렸다.

자신도 꽤나 고수라고 자부하고 있는 중이었기에 상대의 얼굴도 못 보고 혼혈이 짚이는 그 순간 애송이에게 떠오른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그의 사부에게 하늘 위 에 하늘이 있으니 언제나 조심할 것을 재삼 당부받았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로 실력 차이가 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묵향이 쓰러진 애송이를 잡아서 어깨에 들쳐 메고 떠나려는 것을 보고 하남5괴 중의 한 명이 이의를 제기해 왔다.

“잠깐만, 이놈은 우리들과 먼저 선약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방금 전 상대가 보여 준 무시무시한 무공으로 인해 하남5괴도 함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잘못 시비가 붙으면 오늘 목숨이 날아가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는 거죠. 우선 저희들이 놈의 팔 하나를 자를 테니, 헤헤… 그다음에 끌고 가시면 안 될까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묵향은 그의 제의를 딱 잘라 거절했다.

“안 돼. 네놈들이 감히 본좌의 즐거움을 방해하겠다는 거냐?”

그래도 상대는 아쉬움이 남는지 다시 한 번 더 사정했다.

“그대의 실력이라면 저희들이 어떻게 해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저희들도 그놈에게 구원(構怨)이 있는지라…….”

“네놈들의 원한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냥 잊거라.”

그러자 그중에서 가장 무공이 강하게 보이는 자가 잠시 생각하더니 침중하게 말했다.

“그럴 수는 없소. 지금은 실력이 딸려서 눈앞의 먹이를 양보할 수밖에 없지만, 그대가 사문을 밝힐 용기가 있다면 대를 이어서 오늘의 수모를 갚겠소.”

“흐음, 꼴에 밸이 있다 이거지. 좋아. 본좌는 천마신교의 부교주이니 죽이고 싶은 아들이 있으면 검을 줘서 십만대산으로 보내게나. 소원대로 모두 다 목을 따 줄 테니…….”

비웃는 듯한 그의 말에 경악해 있는 무리들을 뒤로하고 애송이를 어깨에 진 채로 묵향의 신형은 조용한 장소를 찾아 사라져 버렸다.

애송이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는 웬 허름한 흑의를 입은 남자가 자신의 검을 만지작거리면서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일어서려고 했지만 혈도가 제압당해 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움직이는 것을 포기하고 옆에 앉아 있는 남자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싸워 이기려면 상대를 알아야 한다고. 이 남자가 자신에게 암습을 가한 자라는 생각에 세심히 그를 뜯어봤는데 놀라운 것은 너무나도 젊다는 것이었다.

애송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낀 묵향이 씩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호오, 깨어나셨구만. 이리 초대를 한 이유는 이 검이 어디서 났느냐 하는 것을 물어보려는 의도에서지. 자, 좋은 말로 할 때 대답을 해 주실까?”

애송이는 상대가 부드러운 말투를 쓰는데도 이상하게 소름이 끼쳐 옴을 느꼈다.

‘정말 재수 없는 놈이군. 저놈이 나한테 암수를 쓴 놈인가? 아니면 또 다른 고수가 한 명 더 있나?”

“당신이 나한테 암수를 가했소?”

“그래, 본좌가 했지.”

그러자 애송이는 상대의 몸을 뚫어져라 훑어봤다. 껍데기는 젊게 보이지만 이자는 아마도 반로환동의 경지에 들어간 영감탱이 고수가 분명한 것 같았다. 자신의

사부인 청혜(淸慧)도 ‘네 연배에서는 아마도 네가 가장 검술에 대한 이해가 빠를 것’이라는 칭찬을 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때의 상황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정상적인 상태에서도 이기기 힘들 거야.’

상대가 가만히 있자 묵향이 또다시 질문을 했다.

“자, 빨리 대답을 해 주실까? 본좌는 인내심이 별로 없어서 말이야.”

사실 애송이한테는 그것이 뭐 숨겨야 할 치부 같은 것도 아니었기에 순순히 대답했다.

“그 검은 내가 알고 있는 한 무림인에게서 받은 것이오.”

“그래? 그 사람은 너와 어떤 관계지?”

“한 10년 정도 그분에게서 검술을 배웠소.”

“그럼 너의 사부인가?”

“아니오. 그냥 내가 마음에 든다면서 검술만 가르쳐 줬을 뿐.

“좋아, 그 사람 이름이 뭐지?”

“이름은 모르고 독고구패(獨孤九敗)라는 명호만 알고 있소.”

“독고구패? 좋아. 그놈이 환사검(幻邪劍) 유백(柳伯)을 죽였나?”

“에… 유백은 또 누구요?”

사부는 아니오.”

“유백은 본좌의 사부님 이름이지. 이 검은 사부님이 애지중지하던 검이었는데, 이걸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단 하나, 어떤 놈이 그분을 죽이고 뺏었다는 말밖에는 설 명이 되지 않지. 안 그래?”

“……”

“좋아. 그 독고구패란 놈은 어디 있지?”

“얼마 전에 돌아가셨소.”

“죽었다고? 옳아. 이제 알겠군. 그래서 이 검을 물려받았다 이거지?”

“그렇소.”

“크흐흐흐, 그놈이 정말 죽은 게 확실한가?”

“못 믿겠으면 관두슈.”

그와 동시에 묵향이 애송이의 혈도 몇 군데를 짚었다. 그러자 애송이의 온몸에서는 뚜뚝거리는 괴이한 음향이 터져 나왔지만 식은땀을 흘려 대면서도 악착같이 고 통을 참고 있었다. 가히 초인적인 인내력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2각 정도가 지나자 꽉 다문 입술 사이로 비명성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묵향은 더 이상 하면 사람 잡겠다는 생각에 3각 정도가 되자 분근착골의 수법을 해제했다. 그리고 계속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당하는 입장에서는 고문 을 하는 놈이 그와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말을 사용한다면 아주 기분이 나쁘리라…….

“어때? 온몸이 짜릿하니 평생 처음 느껴 보는 기분이겠지? 자, 좋은 말로 할 때 불어. 그놈은 지금 어디 있지?”

“헉헉, 돌아가셨소. 그분이 돌아가시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단 말이오.”

“흐음, 진짜 죽은 게 확실해?”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소.”

“좋아. 죽었다고 하기로 하지. 대신 내 사부를 죽여 놓은 놈에게서 검을 받았으니 네놈도 공범이야. 알겠어?”

“그건 억지요.”

“아니야, 본좌에게는 억지가 아니지. 너도 공범이니 미안하지만 내 화풀이 상대가 되어 주어야겠어. 가만있어 봐라, 분근착골은 했으니 그다음은… 발가락 뼈다귀 를 모조리 부술 차롄가? 참, 뼈를 부수는 그 충격에 기절이라도 하면 안 되지.”

그러면서 상대가 기절하지 않도록 몇 군데 혈도를 때리며 상대의 정신을 더욱 또렷하게 만들었다. 애송이는 도대체가 말이 통하지 않는 이 무뢰한이 도대체 다음 에는 무슨 짓거리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일말의 공포를 느끼며 자신의 사문을 들어 약간의 협박을 했다.

“이보시오, 나는 명문 화산파의 제자요. 나를 이렇게 핍박한 게 밝혀지면 당신도 편안한 생활은 하기 힘들 거요.”

“흐흐흐, 남 걱정하지 말고 네놈 걱정이나 해. 본좌는 남이 두려워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적은 없으니까…….”

그러면서 애송이의 옆에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손바닥이 호미라도 되는 모양인지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땅을 잘도 파내고 있었다. 묵향이 조금 수고 를 하자 비스듬하게 경사진 작은 구덩이가 생겼다. 묵향은 애송이를 그곳에 눕혔는데 머리가 아래쪽으로 가게 했다. 아무리 모진 고문을 가해도 머리를 심장보다 낮 은 위치에 두면 머리에 원활히 피가 공급되기에 아무리 기절하고 싶어도 기절이란 단어는 자신에게서 완전히 말 타고 멀리멀리 떠나 버리는 것이다.

상대의 하는 짓거리를 보고 애송이는 지금 뭣 때문에 이런 수고를 하고 있는지 눈치 챘다.

‘이놈이 아예 날 잡으려고 작정을 했군.’

“좋았어. 이 정도면 준비는 완벽하게 갖춰진 상태고, 이제부터 본론을 시작해야지. 원래가 분근착골은 오래하면 온몸의 근골(筋骨)과 신경이 망가지기 때문에 네 놈에게 오히려 고통의 시간을 단축시켜 주는 결과밖에 안 된다 이 말씀이야. 뼈를 자근자근 부수는 것은 제일 마지막에 해 주지. 자 그럼 이제부터 고전적인 방법을 써 봐야지.”

묵향은 상대의 허리에서 띠를 끌러 낸 뒤 상의를 벗겼다. 그런 다음 띠를 주워 들고 공력을 주입시키자 천으로 만들어진 띠가 꼿꼿하게 일어섰다. 묵향은 그걸 채 찍 대용으로 삼아 애송이의 몸을 자근자근 다져가기 시작했다.

퍽퍽퍽퍽!

이건 고문이라고 하기도 그렇다. 고문이란 것은 원래가 상대가 숨기고 있는 어떤 비밀을 불게 만들기 위해 육체적 또는 정식적 고통을 가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다. 하지만 애송이의 입장에서는 그놈의 검 하나 때문에 분풀이 상대로 자신이 잡혀 와서는 죽기 일보 직전까지 두들겨 맞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모른다. 상대가 휘두르는 띠는 그의 살가죽만을 후려치고 있었기에 그의 상체는 이제 거의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고통을 참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애송이의 입에서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차라리 날 죽여라.”

한참 비명성을 반주 삼아 두들겨 대다가 더 이상 하면 죽어 버릴 것 같자 묵향은 고문 아닌 고문을 멈췄다.

“헤헤헤, 오늘은 이쯤 하고. 그래! 소금하고 고춧가루가 어디 있지? 맞아, 거기다 놔뒀지.”

주섬주섬 꾸러미에서 그것들을 꺼내더니 둘을 섞어서 애송이의 상처에 뿌렸다.

“크아아악.”

또다시 터지는 비명 소리. 애송이가 비명을 질러 대다가 기진맥진해서 더 이상 비명 지를 힘도 없는지 잠잠해지자 묵향이 비웃듯 한마디 던졌다.

“이걸 뿌리면 상처 소독도 되고 좋지. 걱정 마. 빨리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독고구패란 놈은 유백에게 묵향이란 제자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했어야 했어. 내 손에 걸려서 살아 나간 놈이 거의 없거든. 독고구패가 죽었으니 너라도 나를 위해 몸으로 때워 줘야지.”

그러자 뻗어 있던 애송이가 헐떡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물어 왔다.

“끄으으으, 묵향…, 묵향이라고… 했소?”

“그렇다. 본좌가 묵향이란 나으리지.”

“어른의…, 구패 어르신의… 마지막… 제자가 묵향이라고… 했소.”

“뭐야?”

‘그럼 독고구패하고 환사검 유백 사부하고 동일 인물이란 건가? 저놈이 내가 마지막 제자란 것을 알 리는 없을 테니. 이런 실수가 있나.’

“이봐, 괜찮은 거야? 이런 빌어먹을! 가까운 의원이 어디에 있지?”

묵향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애송이를 어깨에 짊어지고는 의원을 찾아 몸을 날렸다.

일단 상대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란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며 기절했던 애송이가 깨어난 곳은 탕약 냄새가 진동하는 방이었다. 아마도 그 냄새로 유추해 보건 대, 이곳은 의원에 딸린 방인 모양이다. 그는 일어서려고 했지만 아무리 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겨우 그 정도 맞았다고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다니. 나도 정말 한심한 놈이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깨어났군. 보기보다 약골이야. 움직이려고 하지 말게나. 지금 침을 놓았기에 움직이지 못하게 혈도를 조금 건드려 놨으니…….”

“세상에 이 목소리는……?”

애송이는 갑자기 한기가 느껴지며 자신의 몸이 의지와 상관없이 부르르 떨리면서 갑자기 식은땀이 솟아나온다고 생각했다.

“이제 깼으니 뭐 잠결에 뒤척일 염려는 없을 테고 혈도를 풀어 주지.”

애송이는 자신의 몸 위로 미풍이 부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 순간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혈도가 풀린 것을 알 수 있었다. 상대는 허공을 격하 고 점혈과 해혈을 할 수 있는 엄청난 내공을 쌓은 무서운 고수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자, 이제 깨어났으니 우리 다시 즐거운 대화를 시작하기로 하지. 아 그렇게 떨지 말게나. 나도 가급적이면 말로 하고 싶으니까 말일세. 자네와 얘기가 어디까지 진 행되었었나 하면, 자네 사부인 독고구패의 마지막 제자가 묵향이라는 것까지였어. 거기서부터 시작하지. 그건 자네 사부의 입에서 들은 건가? 다시 말하건대 거짓 말이 있어서는 안 돼.”

“그렇소. 자신에게는 많은 제자가 있지만 마지막 제자인 묵향이 가장 강하다고 했었소.”

“그럼 그 묵향이란 놈이 그렇게 강하다는 건가?”

“그분의 말로는 그렇소. 자신이 가르친 제자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했소.”

“좋아, 그럼 자네는 독고구패를 어디서 만났지?”

“화산(華山)에서 만났소.”

“화산?”

“본인의 사문은 화산이오. 10년 쯤 전에 본문의 옆에 한 무림인이 자리를 잡았소. 그는 화산에 있는 동굴 중 하나를 집으로 정했는지 그곳에 침상을 마련하고 몇 가지 살림 도구를 장터에서 사다가 보금자리를 꾸미더니 아예 떠날 생각을 안 했소. 그래서 본문에서는 혹시나 절기를 훔쳐보러 온 첩자인 줄로 오해하고 그와 간단 한 충돌을 벌였었는데, 그에게서 몇 가지 안 좋은 일 때문에 은거를 결심했고 또 은거할 장소로 경치 좋은 이곳 화산을 택했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소. 그리고 그의 검술 실력도 상상 이상으로 강했기에 다른 문파의 무공을 훔쳐 배우려는 인물로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그의 무공을 배웠지?”

“사실 10년 전 나는 별로 무공이 강한 편이 아니었소. 그날 장터에서 무뢰배 몇 명이 젊은 소저를 희롱하는 것을 보고 혈기만 믿고 달려들었다가 두들겨 맞고 있는 것을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그가 구해 줬소. 그는 한 번씩 마을로 내려와서 식량을 구입했는데, 그날 마침 그의 눈에 띈 것이지요. 그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한 가지 제의를 했소. 검술을 배워 볼 생각이 없느냐고 말이오.”

“그래서?”

“나는 안 된다고 했소. 사실 사문에서 나를 지도하던 사형은 별로 무공이 고강하지 못했기에 그런 고수의 지도를 받을 수 있다면 영광이겠지만, 사문을 등질 수는 없었기 때문이오. 그런데 상대는 사문을 바꿀 필요도 없고 자신을 사부로 여길 필요도 없다면서 자신이 만년에 이르러 깨달은 무공을 전수해 준 마지막 제자가 죽어 버렸기 때문에 자신이 죽으면 이 무공도 없어진다고 했소. 그러면서 그냥 자신의 무공이 후세에도 사용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자신의 무공을 익히고 싶으면 장문 인의 허락을 받고 나한테로 찾아오라고 했소. 그래서 나는 장문인을 찾아가 사정을 아뢰고 그의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소.”

“장문인이 허락을 해 주던가?”

“처음에는 해 주지 않았소. 상대가 누군지 몰랐기 때문이오. 장문인은 직접 그를 찾아가서 대화를 나눠 보고, 그가 근래 들어 뛰어난 무공으로 세상을 놀라게 만들 었던 독고구패 선배라는 것을 알고 나에게 허락해 줬소. 그래서 나는 틈틈이 그분을 찾아가 10여 년간 무공을 익혔소.”

“좋아. 이제 어떻게 되었는지 대강은 알겠군. 그런데 마지막 제자의 이름이 묵향이란 것은 어떻게 알았지? 그분이 얘기해 줬나?”

“그분은 나한테 검술을 가르쳐 주면서 묵향이란 사람 얘기를 많이 했었소. 아마도 묵향이 살아 있어서 너를 본다면 아주 좋아할 텐데, 하면서 말이오.”

“검술을 가르쳤다고 했는데, 무슨 검술을 배웠나?”

“무형검법(無形劍法)을 배웠소. 아주 배우기 까다로웠지만…….”

“무형검법? 그런 검법도 있었나?”

“거의 초식이 없는 검법이오. 그분도 그것을 근래에 이르러 완성했다고 하셨소. 초식이 아주 특이한 만큼 익히기는 까다롭지만 일단 연성하고 나면 대단한 위력을 가지게 되오.”

“그럼 독고구패란 사람은 무형검법이란 것을 그 자신이 직접 창안해 낸 것이군. 그리고 익히기도 힘들고……. 너는 얼마나 배웠지?”

“자질이 모자라서 그렇게 깊게까지 연성하지는 못했소.”

“좋았어. 그건 나중에 검을 섞어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고……. 이제 마음 푹 놓고 몸조리나 잘하라구. 나중에 몸이 완쾌되면 비무를 한번 해 보기로 하지. 만약 도중에 도망가다 나한테 걸리면 반쯤 죽여 놓을 테니 알아서 하게나.”

내상은 없었기에 몸은 빨리 치유되었고 애송이의 몸이 완쾌되자 묵향은 그를 밖으로 불러냈다. 묵향은 그가 가지고 다니던 상자 안에서 검을 꺼내 들고 밖에 서 있 었고, 애송이도 상대가 뭘 원하는 것인지 알기에 선배가 물려준 검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상대는 검집에서 검을 뽑지도 않고 느긋하게 말했다.

“자, 검을 뽑아라.”

애송이는 상대의 목적이 뭔지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었지만 일단 상대가 원하는 대로 나가기로 했다. 상대와의 거리는 2장……. 검을 뽑아 든 다음 상대의 출 수에 대비했다. 하지만 상대는 그냥 서 있었다.

‘관례에 따라 양보해 주겠다는 건가?”

원래가 비무인 경우 선배는 후배에게 3초를 양보해 준다. 동년배인 경우 각자에게 3초씩 양보한 후 본격적인 대결이 시작되는 것이다. 상대가 일단 원하는 게 뭔지 는 모르겠지만 한번 출수를 해 보기로 했다. 그는 비웃는 듯한 기분 나쁜 상대에게 신법을 펼쳐 급속도로 접근해 들어가며 검초를 펼쳤다.

“매화노방(梅花露芳)”

이것은 화산파(華山派)가 자랑하는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의 1초로, 비무이기 때문에 그 초식의 이름을 상대가 알 수 있도록 불러 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검초를 펼치자 묵향은 몸을 뒤로 틀어 몸통을 향해 날아오는 검초를 피하며 상대의 비어 있는 허벅지를 향해 발을 날렸다. 애송이는 놀랍다는 듯이 옆으로 신법을 써서 이동해 그것을 피하면서 바로 상대의 발을 베어 갔다. 이번에는 애송이는 초식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할 수가 없었다. 무형검법은 상대의 약점만을 골 라 공격하는 동귀어진(同歸御盡)의 수법이 주류를 이룬 독특한 검법이다. 초식은 없으되 기존의 초식을 응용하든지 아니면 속도를 위해 최대한 빠른 속도로 상대의 몸을 찌르거나 베어 가는 수법만이 존재할 뿐……

묵향은 상대의 검이 자신의 발을 향해 곧장 베어 오자 황급히 발을 후퇴시킨 다음 그제서야 검을 뽑아 발을 베어 가는 상대의 손을 향해 검을 날렸다. 놀라울 정도 로 빠른 발검술(拔劍術)……. 애송이는 밑으로 쳐 내리던 손을 뒤로 빼면서 상대의 검을 받았다.

챙!

상대는 검과 검이 부딪치는 그 반탄력을 이용해 뒤로 검을 빨리 회수해 다시 머리를 향해 날려 왔고, 애송이는 상대의 손목을 노리고 검을 날렸다. 지독하게도 물

고 물리는 대결. . 놀랍게도 둘의 검술은 상당한 유사점이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묵향의 검이 더 단순 무식하게 움직인다는 점이었고 상대의 검은 조금, 아주 조금 더 화려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물론 화려함을 가진다는 자체가 조금 더 동선(動線)이 크다는 말이니 속도가 조금 떨어짐은 당연한 결과다.

상대는 이상하게도 내공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애송이가 가진 공력으로도 충분히 상대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상대가 우 위를 점하지 못하는 이유가 한 가지 있었는데 그건 검의 길이가 이쪽이 5촌 정도 길다는 점이었다. 대신 상대의 검이 짧기에 공격해 들어오는 속도는 저쪽이 더욱 빨랐다. 상대는 그 자신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서 아주 다채로운 공격을 퍼부었고, 애송이는 그것을 받아 낸다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애송이는 무림에 출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자신이 살아오면서 맹세코 이런 이상한 검법을 구사하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하나하나가 자신의 빈틈 을 비집고 들어오는 일직선적인 공격, 한 초식 한 초식을 넘길 때마다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순간이 생명의 위기라 처음에는 못 느끼고 있었지만 나중에야 상대의 검법이 많이 눈에 익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의 검법 을 자신이 아주 잘 알고 있으며 놀랍게도 그런 검법을 쓰는 사람이 자신이 알기에도 저 사람 외에도 두 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나는 자신이었고, 또 하나는 돌아가신 독고구패 선배……. 그것을 눈치 챈 다음에는 상대에 대한 경이로움이 솟아 나왔다. 그의 검을 다루는 실력은 맹세코 자신을 가르친 독고구패 선 배의 아래가 아니었다.

둘은 거의 초식을 무시한 직선 공격을 주로 했으므로 순식간에 수백 초식이 지나갔다. 상대는 1천여 초를 주고받은 다음에 뒤로 훌쩍 3장이나 뛰어 공격권을 벗어 난 다음 천천히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제법 제대로 배웠군. 하지만 고작 그 정도 실력으로 무림에 돌아다닐 생각 하지 말고 문파로 돌아가서 더욱 수련을 하거라. 환사검의 제자가 별 볼일 없는 무리에 게 죽었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으니까………”

“당신은 누구요? 어째서 무형검법을 아는 거요?”

“내가 말 안 했던가? 내 이름은 묵향, 천마신교의 부교주지. 정사는 양립할 수 없다고 떠드는 놈들이 많으니 오늘의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도록 해라. 어르신 은 편안하게 돌아가셨나?”

묵향의 말을 들으면서 경이와 환희가 담겨졌던 애송이의 얼굴이 갑자기 뒤의 말을 들으면서 어두워졌다. 그걸 보고 묵향이 침중하게 말했다.

“그렇지 못하셨던 모양이군.”

“예, 돌아가실 때 대단히 괴로워하셨어요.”

“그건 사마외도(邪魔外道)를 걷는 무리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지. 산공(功)의 고통을 피하려면 탈마(脫魔)에는 올라서야 하는데……. 그분도 역시 탈마에는 오르지 못하셨구나. 그럼 네가 그분의 임종을 도와 드렸냐?”

“예? 무슨 말씀이신지?”

묵향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원래가 사파에서는 가는 분의 고통을 줄여 드리기 위해 가장 절친했던 인물이 산공의 고통이 시작되기 직전에 편안한 죽음을 선사하지. 네가 잘 몰라서 도와 드 리지 못한 것이니 어쩔 수 없구나.”

그 말을 끝으로 쓸쓸히 문밖으로 걸어 나가는 묵향을 향해 애송이가 외쳤다.

“다시 뵐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의 물음은 허공에 외친 듯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냥 허탈하게 그 자리에서 멀어지는 묵향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애송이는 자신이 한 번도 묵향 과 통성명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따라가 볼까. 하지만 따라가서 뭐라고 하지? 할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인연이 있다면 만날 수 있겠지. 선배의 말대로 화산에 돌아가서 수련 이나 하는 게 좋겠지. 정말 무서운 검법이었어. 무형검법을 만약 저 선배처럼 막강한 내공을 가진 사람이 펼친다면 어떤 모양이 될까? 너무나 궁금하군…….?

애송이가 따라가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가 너무 호되게 묵향에게 당했기에 그의 앞에만 서면 위축되는 자신을 느꼈기 때문이다. 둘의 만남은 언제나 다시 이루어질까?

애송이와 헤어지고 난 후 묵향의 기분은 정말 정말 좋지 못했다.

“제기랄.

자신에게 문제가 생겨 기억만 잃지 않았다면 사부를 그대로 죽게 만들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묵향을 더욱 괴롭게 했다. 현재 그의 실력이라면 별 고통 없이 사부 의 내공을 없애 버린 다음 북명신공을 이용해 산공이 생기지 않는 새로운 공력으로 채워 넣어 줄 수도 있었고, 어쩌면 사부가 극마의 경지에 올라 더욱 오래 살게 해 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일단 극마에 오르기만 한다면 탈마로 유도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그분이 고통받으며 죽지 않도록 일격에 목 을 베어 드릴 수도 있었다.

자신이 옆에 없었기에, 더구나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만 옆에 있었기에 묵향이 가장 존경했던 사부는 아마도 내공이 깊은 만큼 죽는 그 순간 지독한 고통을 아주 장시간 받았을 것이다. 자신도 마교에서 자라나 마교에서 생활했기에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더욱 괴로웠다.

‘속만 썩인다고 벌써 지나간 일이 바뀌지는 않지. 어디 가서 술이나 퍼마셔야겠군. 사부의 명복을 빌며…….’

묵향은 곧장 허름한 한 술집에 들어가서 박혔고 그 마을의 술을 동을 내려고 작정한 듯이 퍼마시기 시작했다.

이런 묵향을 지켜보는 눈들이 몇 개 있었다. 그들은 묵향이 눈치 채지 못하게 아주 멀직이서 바라보며 쑤군거렸다.

“겨우 찾았는데…, 아무래도 별로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인데요……. 어쩌죠?”

“표정을 보니 아주 기분이 더러운 모양이야. 괜히 가서 말붙였다가 저자의 성격이 소문대로라면 우리들 목이 날아갈지도…….”

“도대체 그 젊은 애가 뭐라고 했기에 실컷 비무를 잘한 다음에 결과가 이 모양이 됐죠? 그놈을 잡아다가 주리를 틀어 보면 뭔가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글쎄…….”

이들은 줄기차게 호북성에서부터 묵향을 뒤따라온다고 바닥을 기어 댔던 인물들이다. 그들이 묵향의 흔적을 놓친 곳은 어떤 마을이었는데, 거기서부터 묵향이 경 공술을 사용하는 바람에 흔적이 없어서 망연하던 차에 묵향의 발자국과 서로 연관이 있다고 추정되는 발자국들을 곧이어 찾아낼 수 있었다.

발자국들로 봐서 아마도 네 명인 것이 확실한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거의 한 시진을 추격한 결과 그들은 별 볼일 없는 무공을 믿고 민폐를 끼치는 걸로 유명 한 하남5괴의 네 명을 만날 수 있었다. 그놈들을 잡아서 족친 결과 묵향이 한 애송이를 끌고 기막힌 속도로 어딘가로 사라졌음을 알아냈다.

하지만 그걸로는 추격이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어떻게 할까 궁리하며 식당에서 배를 채우고 있는데 묵향이 피투성이가 된 애송이를 업고 의원으로 가는 것이 발 견되었다. 아마도 묵향은 그 애송이를 족친 다음 다시 뭔가 사정이 있어 애송이를 치료하기 위해 마을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묵향이 계속 의원에서 한 발자국도 움 직이지 않고 애송이를 돌보고 있었기에 이제나 저제나 묵향과 면담을 할 기회를 노리던 중 드디어 오늘 아침에야 둘이서 나왔는데, 몸이 완쾌된 애송이와 눈부신 비 무를 한 후 서로 뭐라고 대화를 나누더니 갑자기 기분이 엉망이 되어 술집에 처박혀 버렸으니……

“하여튼 여기서 술 마시기 시작했으니 한동안은 머무를 게 분명해. 일단 사정을 알아야 말을 붙여 볼 수 있으니 네 말대로 그 애송이를 잡아다가 주리를 틀자. 아무 래도 그게 제일 안전할 것 같아…….”

“빨리 가요.”

애송이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요즘 들어 만나는 고수들마다 자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니 이거 억울해도 이만저만 억울한 게 아니다. 무림의 경험을 쌓기 위해 사문을 나설 때만 해도 지닌 바 실력에 자신이 있었는데…….

“으아아아아악!”

“이 자식아! 빨리 불어. 아까 그 검은 옷 입은 사람하고 무슨 말을 한 거야?”

우루루 쫓아오더니 첫 대면부터 묵향이라던 선배와의 일을 물어보는데,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아마도 그들은 묵향 선배를 해치려고 하는 무리들 같았기 때 문이었다. 사실 묵향 선배와 자신은 사형제(師兄弟)는 아니지만 그 비슷한 관계인 데다가, 그 선배가 자신은 마교인이기에 정파의 제자인 너와의 관계는 발설하지 말라고 했던 주의 때문에 그로서는 그들에게 답을 해 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정중하게 물어 오던 상대가 점점 심사가 뒤틀리는지 표정이 굳어져 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다짜고짜 출수(出手)를 해 왔다. 애석하게도 괴한의 무공은 자신보다 한참 위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점혈당해 쓰러진 자신에게 무지막지하게 고문부터 시작하니 이거 원,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고……. 힘없는 놈은 서러워서 살겠나.

“아무래도 맛을 덜 본 모양인데요. 입이 아주 질겨요. 오라버니, 분근착골을 사용하는 게 어떨까요?”

“알겠다. 나도 그편이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사내가 애송이의 혈도를 몇 군데 치자 애송이의 온몸에서 뚜뚝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악! 날 죽여라, 날 죽여…….”

살막의 무리들이 애송이로부터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은 것은 일곱 가지 고문을 가한 후였다. 거의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애송이로부터 대답을 듣자 살막의 인물 들은 먼저 걱정부터 앞서기 시작했다. 그래서 옆의 누이에게 전음으로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이거 큰일이군. 저놈의 말대로라면 사형제하고 거의 비슷한 관계잖아. 이놈을 족친 게 묵향의 귀에 들어가면 아주 귀찮아지겠는데……. 이놈을 죽여 버릴까?>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 저놈은 우리들의 정체도 모르는데. 그리고 저놈의 말대로라면 그와 더 이상 만나게 될 가능성도 없는 것 같은데요? 그냥 아까 그 의원 에 데려다 주면 어떨까요?>

<흐음, 괜히 쓸데없이 살인을 할 필요는 없지. 좋아, 네 말대로 하자.>

“얘들아.”

“예.”

그 사내는 만신창이가 되어 뻗어 있는 애송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놈이 아까 나왔던 의원에 저놈을 치료하라고 맡기고 치료비를 지불해라. 죽으면 안 되니까 잘 치료하라고 부탁하고.”

“옛!”

수하들이 애송이를 업고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사내가 투덜거렸다.

“짜식, 처음부터 좋게 말로 할 때 들었으면 서로 좋았잖아.”

애송이가 의원의 한 자그마한 방에 뻗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함에도 불구하고 퇴원하자마자 또다시 엉망이 되어 실려 온 탓에 엄청 열 받은 의생으로부터 갖은 핍박 을 받으며 치료받고 있는 이 시간, 묵향도 정신이 거의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물론 애송이처럼 고문의 후유증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단시간에 술을 너무 마셔서 그 런 것이다.

벌컥벌컥.

“큭! 좋군, 좋아. 세상천지가 빙빙 도는군…..

벌써부터 혀 꼬부라진 소리가 나오느냐고 할 사람은 이 식당에 아무도 없었다. 묵향의 옆에는 벌써 빈 병 열 개가 쌓여 있었고, 그다음에는 감질난다며 아예 독째 로 가져다가 마셔 댄 것이다.

사실 무림인이라면 술을 이 정도 마신다고 이렇게나 취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웅후한 내력으로 술기운을 억누르거나 좀 더 무공이 고강한 경우 술기운을 체외 (體外)로 방출해 버리기 때문이다. 입으로는 마시면서 술기운을 땀과 같은 형태로 방출할 바에는 왜 피 같은 돈 주고 술을 마시는지 이해하기 힘들지만……. 어쨌 든 대부분 그런 식으로 술기운을 처리하기에 무림인이 술이 취해 비틀거리는 꼴은 보기 힘들다.

묵향은 그에 비해 아예 취하자고 마셔 댔기에 두 가지 방법 중 그 어떤 것도 취하지 않았다. 그대로 술기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 형편이니 아무리 무공이 고강 하다고 해도 술기운에 정신이 오락가락할 수밖에..

다섯 대접의 고량주(高粱酒)를 더 마신 후 급기야는 탁자 위로 쓰러져 버리자 식당 주인이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쯧쯧, 내 평생 이 장사를 해 왔지만 저렇게 죽으려고 퍼마시는 놈은 처음이군.”

“헤헤, 그래도 선불 받았으니 걱정은 없잖아요.”

“떽! 잘못하다가 시체를 치우면 적자라구, 적자. 저놈을 들어다가 골방에 재워 줘라. 새파란 놈이 대낮부터 저렇게 퍼 마시다니……. 아무래도 계집 문제 때문인 모양인데, 아무리 계집이 좋다고 있는 대로 퍼마시고 목숨을 버리려고 들다니, 쯧쯧.”

“벌써 뻗어 버렸는데 어쩔 거예요?”

“글쎄, 세 가지 방법이 있겠지.”

“어떤 거요?”

“먼저 이틈을 이용해서 저놈을 죽여 버린 다음 무림맹에 공치사를 하는 거야. 그리고 두 번째는 이대로 놔두고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거고, 세 번째는 좀 더 좋은 여 관으로 옮겨 우리들의 호의를 보여 주는 것이지.”

“흐음, 그럼 우선 첫 번째를 시도해 보고 가능성이 없을 거 같으면 세 번째를 사용할까요?”

“그게 좋겠군. 네가 가지고 있는 팔황장천비(八荒長天比)를 빌려 다오.”

“오라버니도 좋은 검이 있잖아요?”

그러자 사내는 좀 쑥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내 것이 아무리 좋아도 10대기병(代奇兵)에 견줄 수 있겠냐? 내 거로는 영 자신이 없어서…….”

“좋아요. 여기 있어요. 예민한 녀석이니 부드럽게 다뤄 줘요.”

여인은 품속에서 1척 정도 길이의 호화로운 단검을 사내에게 건넸다. 검신의 길이 7촌(약 21센티미터), 손잡이 3촌 반(약 10.5센티미터)의, 비수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긴 이 비수는 팔황장천비라는 근사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상대의 호신강기를 전문적으로 파괴하는 얇고 날카로운 검신(劍身) 덕분에 10대기병의 말석 (末席)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비수는 그녀의 선친이 천신만고 끝에 구한 것으로 그녀의 서른다섯 번째 생일에 선물한 것이었는데, 그 예리함에 반한 그녀는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녔다.

사내는 건네받은 비수를 왼손에 감춘 후 수하들과 함께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서자 쓰러진 묵향을 일으키려고 애쓰고 있는 점소이가 보였다. 그런데 아 무리 점소이가 흔들어 대도 줄기차게 뻗어 있던 묵향이 갑자기 튕기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뒤에 서 있던 점소이가 뒤로 벌렁 쓰러져 탁자에 부딪쳤다. 살기 를 품었던 무리들은 그것을 보고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무심을 가장해서 옆의 탁자에 우루루 앉았다. 그들을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던 묵향이 혀 꼬부라진 소 리로 입을 열었다.

“응? 이상하군……. 살기가 느껴진 것 같은데, 네놈들이냐?”

그들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지만 애써 태연을 가장하여 짐짓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투로 답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네놈들이, 네놈들이 감히 본좌에게 살기를 품었냐 이 말이다.”

“아, 아니올시다. 착각을 하셨겠죠…….?

“그런가…….”

털썩.

“…..”

묵향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탁자 위에 뻗어 버렸다.

‘휴, 살기를 최대한 억눌렀는데도 이 모양이니. 아무래도 내가 너무 긴장한 모양이야. 좀 마음을 안정시키고…….?’

“이봐, 여기 술하고 안주 좀 주게나.”

“예.”

뒤로 넘어졌던 점소이는 일단 묵향을 그대로 놔두고 주문한 음식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사내는 안주도 없이 술을 몇 잔 들이켜면서 긴장된 몸과 마음을 조금 느슨 하게 푼 다음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면서 사내는 죽어라고 마음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저건 통나무야. 저건 통나무야. 저건 통나무야…….?

뭔가를 죽인다는 기분을 조금이라도 가지면 끝장이었다. 저런 민감한 놈은 베는 그 순간까지……. 될 수 있다면 벤 후에도 살기가 없어야 한다. 사내는 묵향의 등 뒤로 슬며시 다가선 다음 살며시 왼손에서 비수를 아래로 내렸다. 사내는 자신이 익힌 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왼손에는 팔황장천비의 집을 잡고 또 손잡이는 오른손 으로 살며시 잡은 상태로 천천히 묵향의 등 뒤 가까이로 가져갔다.

미세한 살기까지도 감지하는 인물인 만큼 엄청난 예기(氣)를 뿜는 팔황장천비를 뽑은 상태로 그의 등 뒤에 가져갈 수는 없었다. 최후의 순간에 뽑음과 동시에 휘둘러야 했다. 그는 처음에는 쿵쾅거리며 움직이고 싶어 하는 심장을 정상적으로 돌리게 만드느라고 갖은 애를 썼지만 일단 먹이가 코앞에 위치하자 그것조차 잊 어버릴 정도로 목표에 정신을 집중했다. 통나무의 심장이 위치하고 있을 거라 생각되는 부분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상대가 절대로 눈치 채지 못하게 천천히 공력 을 약간만 모으면서 근육을 조금씩 긴장시켰다.

“이제 조금만…….?

그가 팔황장천비를 이용해 일(一)자로 베어 통나무를 두 토막 내려는 찰나, 죽은 듯이 뻗어 있던 통나무의 몸에서 강렬한 기가 방출되어 나왔다. 그와 동시에 허름 한 식당 안은 지독한 술 냄새로 꽉 차서 숨쉬기도 힘들 지경으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통나무처럼 뻗어 있던 묵향은 강렬한 기가 넘치는 살아 있는 사람으 로 변해 있었다.

‘이런!’

사내는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팔황장천비를 왼손에 황급히 밀어 넣었다. 사내가 숙달된 동작으로 순식간에 모든 증거를 인멸하고 모르는 척하고 있 는데, 모든 술기운을 순간적으로 체외로 밀어내 버린 묵향이 언제 취해 있었냐는 듯이 멀쩡한 안색으로 천천히 일어서면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상해..

그러면서 수하들과 여인이 앉아 있는 탁자로 다가갔다.

“이상하게 여기서 지속적으로 살기가 느껴진단 말이야.”

사실 막주는 살기를 초인적인 노력으로 감추는 데 성공했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수하 놈들이 상관을 지원하려고 준비를 늦추지 않은 것이 탈이었다. 묵향은 정작 막주의 살기가 아닌 그 수하들의 살기를 읽은 것이다.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감을 느낀 여인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방긋이 화사하게 웃으며 먼저 선수를 쳐 인사를 해 왔다.

“안녕하세요? 묵향 부교주님. 또다시 뵙는군요.”

“으응? 누구시더라?”

“저, 그때 살막에서.

“아아, 막주의 대리인이군.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근사한 제안이 있어서 막주님을 모시고 이리로 따라왔어요.” “막주?”

그때 사내가 묵향의 뒤에서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를 해 왔다.

“안녕하십니까? 홍진(洪搢)이라 합니다.”

“안녕하시오? 묵향이라 하오. 추격술이 대단하시군요.”

“과찬이십니다. 제가 부교주님을 따라온 이유는 그 제안에 동의하고자 함이지요.”

“그런데 아까 그 살기는?”

“그게…, 전에 부교주님의 놀라운 무예의 경지를 목격했던 수하들이 저희들의 안전을 생각해서 대비한 것이겠지요.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허허…….” “좋소. 그대들이 도와준다니 정말 고맙소.”

“다행히 이렇게 만났는데 저희들과 같이 술이나 한잔하심이 어떠하실는지요?”

“좋지.”

“전에는 소개를 못 드렸지만 저 아이는 제 동생인 홍청(洪淸)입니다. 무공은 보잘것없지만 지혜가 뛰어나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거의 살해 일보 직전까지 갔었지만 이상하게 반전되어 이런 식으로 화기애애한 술판이 벌어져 버렸다. 이 둘의 합체가 화(禍)가 될지 복(福)이 될지는 누 구도 장담할 수 없었지만 이것으로 두 단체의 합체는 이루어진다.

모두들 축배를 들며 담소를 나누다가 살막의 인물들은 떠나가고 묵향 혼자 식당에 남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참 술을 마시던 묵향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 했다. 사실 그가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들어서면서부터 발견했을 텐데, 그때는 사부의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그런대로 마음이 안정되자 자연히 눈 치챌 수밖에 없었다.

‘놀랍군.’

묵향은 탁자를, 정확히 말하면 탁자의 윗부분을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사부의 죽음도, 살막 합병에 대한 기쁨도 사라지고 없었다. 다 만 머릿속에 맴돌고 있는 것은 놀랍다는 감정 하나였다. 한참을 탁자를 살펴보던 묵향은 다음에는 의자들을 살피기 시작했고 그다음에는 다른 탁자들을 살펴봤다. 

‘정말 놀라워…….?’

급기야 묵향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점소이를 불렀다.

“이봐.”

“예, 나으리.”

“이 탁자는 어디서 구한 거냐?”

“예, 숲 속에 사는 진팔(振八)이란 목수가 만든 것입죠. 별로 볼품은 없지만 아주 튼튼합죠.”

“튼튼할 만도 하겠군. 그자가 사는 곳을 자세히 말해 보거라.”

그러면서 묵향이 다섯 냥의 동전을 쥐어 주자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진 점소이는 나불나불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묵향은 음식값을 지불한 다음 진팔이란 목수를 만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진팔의 집은 산 중턱쯤에 위치한 자그마한 초가였다. 초가의 앞에 있는 자그마한 텃밭 에는 아마도 진팔이라고 생각되는 젊은 목수가 곡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모든 작물을 다 거두고 새로운 소채들을 심기 위해서리라…….

묵향이 점점 다가가자 곡괭이가 땅을 치는 박자와 묵향의 걸음걸이가 이상하게도 일치하기 시작했다. 목수는 묵묵히 땅만을 바라보며 곡괭이를 놀리고 있었고 묵 향은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 묵향은 그 순간 응축되어 숨겨진 미세한 살기가 곡괭이 속에서 묻어 나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묵향이 목수에게 다가설수록 그 살기는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묵향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품속에 숨겨 두고 있던 묵영비(墨影比)의 손잡이를 더듬고 있었다.

묵향은 땅을 바라보고 있는 목수가 자신의 전신을 훑어보고 있다는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아래로 휘둘러지는 곡괭이가 자신의 온몸을 노리고 있다는 느낌 또한 받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묵향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다음 순간 묵향은 몸속의 모든 세포들이 지금의 상황 을 즐기며 폭발적으로 반응하고 있음을 느꼈다. 놀라운 쾌감이었다. 다음 순간 묵향은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목수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묵향이 목수에게 2장(약 6미터) 거리까지 접근했을 때 지금까지와는 달리 곡괭이가 막대한 기를 머금은 채로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묵향은 본능 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재빨리 뒤로 신형을 뺐다. 하지만 그보다도 목수의 곡괭이가 땅에 부딪친 것이 조금 빨랐다. 목수의 곡괭이가 땅에 부딪침과 동시에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다. 무시무시한 강기의 회오리가 생성되어 그곳을 기점으로 하여 구형(球形)으로 퍼져 나갔다.

강력한 강기가 퍼져 나옴을 느끼는 순간 묵향은 품속에서 묵영비를 꺼내어 순간적으로 아래로 그었다. 직검단천(直劍斷天)의 기세로 떨어져 내리는 그의 비수에 서는 검강의 회오리가 반월형(半月形)으로 형성되어 구형(求刑)으로 퍼져 나오는 상대의 강기와 부딪쳤다.

상호 간의 강기가 부딪침과 동시에 묵향은 지금 뻗어 오는 강기의 회오리가 무식할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지금의 강기는 상대의 필생의 깨달음 을 이용하여 방대한 공력으로 준비한 필살의 공격이리라. 그는 더 이상의 헛된 공격을 포기하고 외부에는 4장 3절, 망강(剛 : 강기의 사슬)을 이용하여 보호하고, 그 안에 최강의 수비식이랄 수 있는 1장 4절, 방(防)을 전개했다. 그와 동시에 상대가 퍼뜨린 강기의 회오리가 묵향을 덮쳤다.

지독한 강기의 회오리는 망강을 순식간에 허물고 들어와서는 방에까지 막강한 충격을 주어 뒤흔들었다. 곧이어 놀랍게도 여태껏 무너진 적이 없던 방까지 무너지 며 묵향의 호신강기에 강력한 힘으로 부딪쳐 왔다.

“크윽!”

‘정말 대단하군……!?

묵향은 목구멍에서 무엇인가가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꿀꺽 삼키면서 회심의 반격을 시작했다. 선수는 놓쳤지만 당하고 살 위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회오리가 지나감과 동시에 묵향은 4장 1절, 통강(通剛)을 4장 5절, 다강(多剛)의 법칙을 이용해 막강한 공력을 투입하여 뿜어냈다. 묵향이 다강을 응용하여 강기 를 전개한 적은 거의 없었다. 다강이란 수 개에서 수백 개에 이르는 강기를 한꺼번에 뿜어내는 요령을 이르는 것으로, 다강 하나만으로는 어떤 위력도 발휘할 수 없 다. 통상 절강이나 통강과 함께 응용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향해 찌르는 듯 겨눈 묵영비에서는 순식간에 수백 가닥의 검강 다발이 상대를 향해 뻗어 나갔다. 이때 상대는 묵향에게 일격을 먹인 후 마무리를 할 작정 인지 튕기듯이 뒤로 후퇴 중인 묵향에게 엄청난 속도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묵향의 공격은 상대에게 그대로 격중되었고, 상대는 묵향의 공격을 일부러 찾 아와서는 온몸으로 때우는 결과가 되어 버렸다.

상대는 묵향의 강기 수백 가닥이 뻗어 옴을 보고 눈이 약간 커지더니 곧이어 곡괭이를 떨어뜨리며 머리를 아래로 수그리고 발을 최대한 위로 끌어 올리면서 양손 으로 이(二)자 형식으로 만들어 몸 앞을 막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양팔에서는 시퍼런 강기의 막이 퍼져 나오며 그의 몸 앞부분을 두터운 방패와 같이 막아섰다. 쾅!

거의 지축을 울리는 듯한 굉음이 퍼져 나오며 상대는 그 반탄력에 의해 뒤로 날아갔다. 상대는 뒤로 튕겨 나가면서도 그의 열 손가락에서 각기 지강(指剛)을 쏘았 다. 역시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기 때문이다.

‘얄팍하게 시간을 벌려고 드는군.’

묵향은 순간적으로 1장 4절, 방을 이용하여 몸을 감싸면서 뒤로 튕겨 가는 상대가 준비할 시간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쫓아 들어갔다.

펑!

열 개의 지강이 방에 격중되는 순간 묵향은 상대의 지강이 상상 외로 강하다는 것에 놀랐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면 방이 깨지면서 다시금 호신강기에까지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강한 공격이었다.

지강들이 방에 격중되면서 발생한 강력한 반탄력에 의해 뒤로 밀리면서 묵향의 눈에는 상대방이 처음 가한 공격의 결과가 얼핏 눈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구형으로 퍼져 나간 상대의 강기 회오리는 곡괭이가 부딪친 곳에서부터 반경 50장(약 150미터)을 거의 평지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묵향은 상대의 공력이 자신보다 더욱 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묵향은 자신의 장기인 근접전을 펼칠 생각을 포기하고 곧바로 뒤로 몸을 빼면서 상대와의 거리를 더욱 벌렸다. 묵영비를 품속에 집어넣고 다급한 김에 공력을 이용해 상자와 무명을 순식간에 삼매진화로 태워 버리면서 묵혼을 꺼냈다. 묵혼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움켜쥐며 묵향은 다시금 필승 의 기세를 북돋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