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0권 10화 – 실버 드래곤의 심술
실버 드래곤의 심술
출동한지 2개월 하고도 8일째가 되었을 때, 올란도가 거느린 중대원들이 전갈성으로 복귀했다. 처음 출동할 때만 해도 약 1개월 정도 걸릴 거라 예상했었지만, 도 중에 새로운 임무가 하달되는 바람에 이렇게 늦어지게 된 것이다.
2개월간 야외 생활을 한 다음이라, 모두들 후줄그레한 모습들이다. 짐을 줄이느라 옷가지도 거의 가져가지 않은 탓에, 그들의 몸에서는 노린내가 진동을 하고 있 었다. 중대원들은 도착하자마자 지금껏 입었던 냄새나는 옷들을 모아 작은 보따리를 만들었다. 곧이어 세탁소에서 일하는 노예들이 와서 그 보따리들을 가지고 갔 다.
도착하자마자 침대로 파고 들어가 늘어지게 잠에 빠진 사람은 겨우 한 명. ‘새침데기’ 모라이어스라고 불리는 미남자 한명 뿐이었다. 그 외에 나머지는 부랴부랴 옷장에서 새 옷을 꺼내 멋지게 차려입으며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이야, 뺀질이! 이제 너하고 하는 훈련도 끝이다. 룰루, 내 3골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하리스를 향해 라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모두 어디로 가려고 저러는 거죠?”
“뻔하잖아. 술 마시러 가는 거지. 임무 수행 중일 때는 술이라고는 거의 마시지 못하니까 말이야…….”
그러면서 하리스는 한쪽 손의 엄지와 검지로 작은 원을 만든 다음, 다른 손의 검지손가락으로 그 원 안을 슉슉 쑤시면서 음흉스런 어조로 말을 이었다.
“흐흐, 그리고 오랜만에 이 짓도 해야 할 테고.”
예전에는 저 행동이 뭘 뜻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올란도를 만난 후 그게 뭐를 뜻하는지 알게 된 라이다.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라이. 그 표정을 보며 하 리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뒤 이죽거렸다.
“허엇? 뺀질이! 겨우 이 정도 가지고 얼굴이 새빨개지다니, 너 혹시 숫총각이냐?”
“누, 누가 숫총각이라고 그래요?”
그러자 하리스는 무척 안타깝다는 듯 혀까지 차며 계속 이죽거렸다.
“쯧쯧, 척 보면 내가 다 안다. 설마 그 나이가 될 때까지 여자와 섹스 한번 못해본 못난이가 존재할 줄이야. 더군다나 그런 놈이 내 밑으로 기어들어오게 될 줄은 내 상상도 못했다.”
라이는 창피함에 시뻘게진 얼굴로 황급히 화제를 돌리려 애를 썼다.
“뭐, 어쩌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그건 그렇고, 용병이라고 하지만 여기도 엄연히 군기(軍紀)가 살아있는 군대잖아요? 그런데 저렇게 마음대로 술 마시러 다녀도 괜찮은 거예요? 더군다나 여자와 잠까지 자고…….
“어허, 이놈 은근슬쩍 말 돌리는 거 보게. 아주 능구렁이가 따로 없구먼. 누가 뺀질이 아니랄까 봐서……. 딴 놈들 신경 쓰지 말고, 네 녀석 얘기나 해보자. 너 여자 한테 관심이 없는 거냐?”
“설마 고자였던 거야?”
“누, 누가 고자라는 겁니까?”
발칵 성을 내는 라이의 양쪽 볼을 붙잡아 쭈욱 잡아 늘이며 하리스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에구, 귀여워라. 이런 숫총각이 내 직속 쫄따구로 들어올 줄이야. 좋아, 기분이다. 이번에 수당으로 3골드 받으면 네 총각 딱지를 떼게 해주마. 흐흐, 짜식. 넌 이런 마음씨 좋은 선배를 모시게 된 걸 행운이라고 생각해야 돼.”
“그,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얼굴이 새빨개져서 당황해 하는 라이가 귀여운지 계속 짓궂은 장난을 치던 하리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씻으러 나갔던 라이언 소대장이 얼굴을 닦으 며 막사로 들어오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그는 곧장 라이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지금 외출하실 겁니까?”
“응. 그런데 왜?”
“외출하기에 앞서 저 녀석 실력 테스트부터 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자 무슨 소리냐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는 라이언.
“뭔 테스트?”
“어허, 이거 왜 이러십니까? 저 녀석이 5급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 테스트부터 해보셔야죠. 그래야 제 수당 3골드를…….”
그제서야 라이언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2개월 동안 벼르고 있었던 말을 후련하게 토해냈다. 뒤끝이 강한 중대장 밑에서 구르다 보니, 그 또한 한 뒤끝 하는 성격
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봐, 상대를 잘못 골랐어. 아무 권한도 없는 나한테 테스트 받아봐야 뭐하겠나? 그런 거라면 중대장님에게로 가야지. 안 그래?”
라이언의 대꾸에 하리스는 몸이 후끈 달아 소리쳤다.
“정말 유치하게 이러시깁니까!”
라이언은 열 받은 하리스의 모습에 비릿하게 웃으며 이죽거렸다. 마치 십년 묵은 체증이 쑤욱 내려가 개운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못 믿겠다며? 그러니 믿음이 가는 중대장님에게 가서 테스트를 받아야지. 뭐, 중대장님이 오늘 시간을 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킥킥.”
그제서야 하리스는 라이언이 예전 일로 앙심을 품고 일부러 테스트를 안 해주는 것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그때 그 일을 아직까지 꽁하니 마음에 품고 있었단 말이지? 이런 썩을 새끼!’
“이, 이보십쇼, 소대장님. 그러지 마시고…….”
“아, 난 몰라, 몰라.”
라이언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잽싸게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런 망할! 덩치는 곰처럼 커다란 놈이, 어째 속은 저렇게 밴댕이처럼 좁으냐. 젠장, 어쩔 수 없지. 이봐, 중대장님 어디 계시지?”
“아마 중대장실에 계실 걸.”
그 말을 듣자마자 하리스는 쏜살같이 중대장실로 달려갔다.
똑똑!
“누구야?”
“하리스입니다.”
“들어와.”
하리스가 중대장실로 들어가 보니, 올란도 역시 다른 대원들처럼 냄새나는 옷을 벗어던지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있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야?”
“신참을 5급 실력으로 올려놓으면, 3골드 주기로 하셨지 않습니까?”
“내가 그랬던가?”
순간 맹한 표정으로 되묻는 올란도의 반응에 하리스는 울컥 했다. 안 그래도 이죽거리던 라이언의 행동에 신경질이 나서 미치겠는데, 중대장까지 이러다니. 하리 스는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콱 쏘아붙였다.
“아니, 정말 이러실 겁니까? 중대장님 돈으로 주는 것도 아니면서…….?”
그러자 올란도는 씨익 미소 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흐흐, 장난 좀 친 거야. 내가 그걸 잊을 리가 있나. 그래, 꼬맹이 실력을 제법 올려놓은 모양이지?”
“물론이죠. 지금 당장 테스트 해보셔도 좋습니다.”
하리스가 너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기에 도리어 올란도가 깜짝 놀랐다. 설마 그 비리비리한 놈이 겨우 두 달 만에 5급 실력이 됐단 말인가? 아니면 하리스 이 새끼 가 3골드에 눈이 멀어 자신에게 지금 뻥을 치고 있는 거든지.
몹시 궁금하긴 했지만, 아쉽게도 지금 그에게는 그걸 확인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지금 당장 테스트를 하긴 힘들겠군. 단장님께 보고를 드리러 가야 하니까. 젠장! 딴 놈들은 술 마시러 간다고 난리인데, 이놈의 장교 노릇도 못해먹을 짓이라니 까.”
그러면서 창문을 통해 술집으로 달려가는 부하들의 모습을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올란도. 그 역시 그 대열에 당장이라도 합류하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을 외 면할 수는 없었다.
“내 단장님께 보고하고 돌아올 테니까, 그 녀석 완전무장하고 대기하고 있으라고 해. 갔다 와서 바로 테스트 해볼 테니까.”
곧 3골드라는 거액이 통장에 입금될 거라는 생각에 하리스는 희희낙락하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준비시켜 놓겠습니다.”
“만약 테스트 해보고, 5급이 안 되기만 해 봐. 내 금쪽같은 시간을 뺏은 댓가를 치러야 할 거야.”
올란도의 협박에도 하리스는 능청스런 표정으로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아, 걱정 마시라니까요. 이 양반이 속고만 살았나.”
보고를 하러 들어온 올란도를 단장은 반갑게 맞이했다.
“도착했다는 보고는 들었네.”
“옛, 저희 중대에 하달된 3가지 임무를 완벽히 완수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3명이 전사하고…….”
올란도는 단장에게 그동안의 경과를 자세히 보고했다.
출동한 후, 마을에 들릴 때마다 용병길드에 반드시 들렸다. 현 상황을 상부에 보고할 겸, 상부에서 자신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하달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빼먹지 않고 보고를 올렸기에 71중대의 현 상황에 대해 단장이 잘 알고 있다는 건 올란도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규칙을 무시하고 보고를 생략해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보고를 다 올린 올란도는 단장에게 강하게 요청했다.
“다음에 나갈 때는 제발 제대로 된 신관을 배정해 주십시오.”
““왜 그러나?”
“2명 이상이 배정될 때는 실력이 형편없는 신관이 한 명쯤 섞여 있어도 상관없겠죠. 하지만 한 명만 보내주면서, 실력까지 형편없으면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씀입 니까? 제가 이런 말씀까지 드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번에 부하를 3명씩이나 잃게 된 것도 다 그놈의 빌어먹을 신관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단장은 난처하다는 듯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대꾸했다.
“나도 백방으로 수소문하고는 있네만, 이런 변방에까지 오겠다는 신관은 찾기가 힘들어서 말일세.”
대륙 각처에는 수많은 신전들이 있었고, 그곳에서 매년 배출되는 신관의 수는 가히 엄청났다. 수련을 거쳐야 하는 장소가 혹독한 곳일수록 경험치는 그에 비례해 서 증가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이곳 열사의 사막만큼 경험치 쌓기에 좋은 곳은 없으리라.
하지만 생각과 달리, 이곳 사막지대로 자원해서 들어오는 신관은 극히 드물었다. 왜냐하면 이곳은 너무나도 위험했으니까. 이곳에 서식하는 몬스터라든지, 산적 떼가 다른 곳에 비해 엄청나게 강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공간이동 마법의 사용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니, 공간이동 마법의 사용은 가능하지만, 드래곤이 장난질을 쳐놓은 덕분에 어디로 날아갈지 그걸 알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임무 수행 중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을 때 공간이동 마법을 쓸 수가 없기에, 타지에서는 거의 죽을 가능성이 없는 신관이나 마법사의 사망률이 비약적으로 증가하 는 곳이 바로 이곳 사막지대였던 것이다.
동쪽 대륙과 서쪽 대륙 간에 오고가는 화물의 양은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로 많다. 그렇기에 과거에는 양쪽 대륙을 연결하는 영구적인 이동마법진이 설치되어, 막 대한 양의 무역 물자들을 운송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어느 날, 실버 드래곤 한 마리가 사단을 일으켜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놈은 공간이동 마법을 쓸 수 없게 만들면, 운송비용이 비교적 저렴한 해 상을 통해 화물을 운반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점에 착안했다.
실버 드래곤이 시도 때도 없이 공간이동 마법의 진행을 방해하는 역장을 쳐대자, 인간들은 어쩔 수 없이 무역화물의 운송을 해로(海路)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역 장이 쳐진 상황에서 공간이동을 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데다가, 화물조차도 건질 방법이 없었으니까.
대량의 화물이 해로를 통해 이동할 때, 실버 드래곤은 또다시 살짝 장난을 쳤다. 몇몇 지점의 바다를 거칠게 만들자, 그걸 피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은 놈의 둥지가 있는 섬의 앞바다를 통과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려버렸다.
이때, 놈이 짠하고 나타나서 선주들을 협박했다.
“내 집 앞을 통과하면서 건방지게 통행세 한 푼 안 낼 거냐?”
당연히 선주들은 놈에게 통행세를 바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녀석의 장난질이 제대로 먹혀 들어가는 것을 보고, 주변에 사는 실버 드래곤까지 너도 나도 다 놈의 행동을 따라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통행세를 뜯어가는 놈들이 많아지자 당연히 운송료는 폭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사막을 통과하는 대상(隊商)들에게 물건을 맡기는 편이 저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까지 운송료가 올랐다. 그러자 무역상들은 곧 무역로를 사막을 관통하는 육로로 바꿔버렸다. 믿을 수 없는 드래곤을 상대하느니, 이쪽이 훨씬 마음이 편한 게 사실이었으니까.
결국 손가락만 빨게 되어버린 실버 드래곤들은 아직도 한 번씩 역장을 쏴대는 것으로 분풀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이유로 아직도 사막지대에서는 공간이동 을 한다는 것이 바로 목숨을 내건 행동이나 마찬가지였다.
모험도 좋고 쏠쏠한 경험치도 좋지만, 그래도 목숨까지 걸고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공간이동이라는 최후의 한수가 먹혀 들어가는 곳에서 모험을 해도 목숨을 잃 는 모험가들이 한둘이 아닌데 말이다. 그렇기에 마법사나 신관들이 이곳 사막지대로 들어오는 것을 꺼리고 있었던 것이다.
“알겠네. 신관을 한 명만 파견하게 될 경우, 조금 더 실력이 우수한 사람으로 배치해 주라고 지시를 내려 두겠네.”
“꼭 부탁드립니다, 단장님.”
“그런데 이거 참……. 이제 임무를 마치고 막 복귀한 자네에게 또다시 출동 명령을 내리기가 좀 미안하기는 한데…….”
또다시 출동을 하라는 뉘앙스가 물씬 풍기는 단장의 말에 올란도의 안색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감히 단장에게 뭐라 따지지는 못했다. 다만 그는 소심한 수준 에서 항의했을 뿐이다.
“그런 임무가 있다면 미리 길드를 통해 통보해 주셨으면 좋았을 거 아닙니까? 모두들 휴식을 취한다고…….”
궁시렁, 궁시렁…….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줄어들어, 뒷부분은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단장은 올란도가 뭐라고 불만을 말한 것인지 구태여
캐묻지는 않았다.
“오늘 당장 출발하라는 것은 아닐세. 푹 쉬고, 내일 저녁때 출발하게.”
내일 저녁 출발이니, 최소한 오늘 하루만큼은 술을 실컷 퍼마실 수 있다는 얘기였다. 올란도의 안색이 조금 누그러진다.
“수당은 얼마나 줍니까?”
“월급의 50%일세.”
50%밖에 안 된다는 말에 올란도의 안색이 원상태로 일그러졌다.
“겨우 50%요? 그걸 가지고 부하들에게 뭐라고 설명을…….”
“오크 토벌이니 며칠 걸리지도 않을 거야. 수고하는 시간에 비한다면 후한 액수라고 봐야겠지. 내 말이 틀렸나?”
“아, 오크 토벌이 임무였습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제가 단장님 수고스럽게 하지도 않았죠. 50%라면 오크 토벌 치고는 꽤나 보수가 후하군요.”
여기까지 말한 올란도는 단장의 안색을 살피며 슬그머니 물었다.
“저, 지시하실 사항은 그것뿐이십니까?”
지금까지 함께해 온 세월이 있다 보니, 올란도의 속마음을 단장이 모를 리 없었다. 단장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두르는 걸 보니, 술 생각이 간절한 모양이군.”
그러자 올란도는 당치도 않다는 듯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무슨 말씀을!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 그저 부하들에게 출동 소식을 한시라도 빨리 전해주기 위해서 그런 거죠.”
“그래? 그럼 가보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올란도는 잽싸게 군례를 올리며 소리쳤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단장님.”
“그래, 수고하게.”
완전무장한 채 연병장의 그늘에 주저앉아 있는 라이. 처음에는 막사 앞쪽에 서있었지만, 나중에는 햇볕을 피해 그늘 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급기야는 땅바 닥에 털썩 주저앉아 올란도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오시는 게 좀 늦네요.”
작금의 상황이 라이만큼이나 짜증나는 하리스다. 하지만 대놓고 뭐라 쏘아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중대장님이 돌아오는 대로 네 실력 테스트를 하겠다고 했으 니까, 완전무장하고 밖으로 나와.’ 하고 명령한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투덜거리는 라이를 살살 달래는 수밖에 도리가 없 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봐. 단장님과의 회의가 좀 길어지는 모양이지.”
두 사람은 해가 질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렸지만, 결국 올란도는 그날 만날 수가 없었다. 다음날에야 안 사실이지만, 단 1분 1초도 아까웠던 올란도는 중대로 돌아 오지 않고, 곧바로 술집으로 직행해 버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