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0권 11화 – 신관과 무녀
신관과 무녀
다음날 저녁, 중대원들과 함께 연병장에 도열해 있는 라이. 그는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는 달리 제법 쓸 만한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용병 생활을 시작한 지 2 개월이 넘다 보니, 그동안 통장에 쌓인 월급으로 비록 중고품이기는 했지만 갑옷부터 한 벌 장만했던 것이다.
“2소대, 총원 8명, 현재 인원 8명, 출동 준비 완료했습니다.”
“3소대, 총원 7명, 현재 인원 7명, 출동 준비 완료했습니다.”
소대장들은 아직도 술이 덜 깼는지, 약간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로 올란도에게 보고했다. 소대원들 중 술을 즐기지 않는 3명과, 지금껏 이곳에 죽치고 있었던 덕분 에 술독에 빠질 필요가 없었던 하리스와 라이. 이렇게 5명을 제외한 나머지 소대원들은 입을 열기만 해도 지독한 술 냄새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퍼마셔댔는지, 제대로 걸음을 옮길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출동을 하는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도보로 행군하는 게 아니라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이었으니까.
보고를 받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올란도가 투덜거렸다. 밤새도록 술을 퍼마신 그의 눈 역시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젠장, 신관 새끼는 아직도 안 왔냐?”
“아직 도착 안했습니다.”
“설마, 안 보내주는 것은 아니겠죠?”
소대장들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신관에 대해서만큼은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용병은 목숨을 걸고 일을 해야 하는, 무척이나 위험한 직업이다.
아무리 손쉬운 일거리라고 해도 재수가 없다보면 어처구니없게 죽는 일이 가끔 발생한다. 때문에 그럴 때 자신들을 살려줄 수 있는 신관은 용병들에게 있어서 절 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불안에 찬 소대장들의 말에 올란도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신관을 보내준다는 통보를 받았으니까.”
“하여튼 신관이라는 것들은 시간관념이 없어. 지금까지 제시간에 맞춰 도착하는 놈을 못 봤다니깐.”
소대장들이 투덜거리고 있을 때, 하리스가 올란도에게 슬쩍 다가오며 물었다.
“제 수당 3골드는 언제 주실 겁니까?”
그렇지 않아도 짜증스러운 상황인데 올란도는 마침 잘 걸렸다는 듯 하리스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자신이 하리스와 출동 전에 단단히 약조했다는 사실 정도는, 언 제든 쉽게 잊을 정도로 그야말로 얼굴 가죽이 두꺼운 인간이 올란도였다.
“이런 젠장! 출동하는 이 상황에서도 3골드 타령이냐? 어차피 통장에 입금시켜 준다고 해도, 지금 당장 쓸 수도 없는 상황이잖아.”
하지만 닳고 닳은 하리스는 느물느물 웃으며 이죽거렸다.
“에이, 이러다 나중에 중대장님이 모른다며 입을 싹 씻으시면 저만 손해잖습니까. 3골드가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
“안 떼먹는다니까 그러네! 너 설마 날 쫄따구 돈까지 착복하는 그런 악랄한 장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거야?”
“아, 아닙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식으로 말이 나오는 건데요?”
하리스가 당황해 하며 손사래를 치자 올란도가 더욱 강하게 압박을 가했다.
“너 혹시 내가 술에 취한 것을 보고, 어물쩍 넘어가자는 거 아냐? 저놈이 5급 실력이 됐을 만큼 훈련을 시켰다면서 말이야.” 돈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거짓말쟁이로 전락할 상황이 되자, 하리스는 욕설부터 내뱉으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이런 빌어먹을! 그러니까 제가 테스트 해보라고 말씀드렸었잖아요! 어제 기다리래서 기다렸더니 술집에 처박혀 있다가 이제야 돌아온 주제에, 정말이지 양심이 라고는 하나도 없다니까. 정 의심스러우시면 지금 당장 테스트해 보시죠. 신관 새끼가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으니까.”
“호오, 그렇게 자신 있어? 좋아! 만약 네놈 말과 달리 실력이 형편없다면 넌 오늘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마침 화풀이 할 곳을 제대로 찾아냈다는 듯, 살기 어린 미소를 짓는 올란도.
이때, 옆쪽에 서있던 라이언이 슬쩍 끼어들며 말했다.
“중대장님, 신관이 옵니다.”
올란도가 얼른 고개를 돌려보니, 연병장 저 끝에서 기세 좋게 말을 몰아 들어오고 있는 준수한 청년이 보였다. 신께서는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신다는 믿음 하에 신 관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증가시킬 수 있는 신성마법들이었다. 그 때문에 신관들 치고, 미남미녀가 아닌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청년은 신관이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신관복을 입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가벼운 가죽갑옷으로 단단하게 무장을 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신관복을 입고 있어 봐야 적들에게 나를 먼저 죽여주십쇼’ 하고 광고하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테스트를…….”
흥분한 하리스가 달려들었지만, 올란도는 그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곧바로 신관에게로 달려갔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에 뵙는군요, 신관님.”
단장에게 사정을 한 보람이 있었다. 용병단 내에 와 있는 신관들 중에서도 제법 쓸 만한 인물이 배정된 것을 보면 말이다. 임무 때마다 위쪽에서 임의로 배정되는 만큼, 신관들 중에는 예전에 임무를 함께 뛴 인물들도 많았다.
“제가 너무 늦은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아닙니다. 저희도 이제 막 출동 준비를 끝마친 참이었습니다.”
고개를 돌린 올란도는 중대원들에게 기세 좋게 명령했다. “전원, 승마!”
라이를 비롯한 중대원들은 모두 다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목적지까지 빠른 속도로 이동해야 하는 게 관건인 만큼, 말은 필수였다. 말이 없는 대원들에게 용병단에서는 말을 지원해 줬다. 물론 공 짜는 아니었다. 비록 액수가 저렴하긴 했지만 임대료를 지불해야 했고, 말이 죽는 경우에는 배상까지 해야만 했다.
“가시죠, 신관님.”
방금 전까지 욕설을 퍼붓고 있었던 주제에 신관 앞에서는 깍듯이 예우하는 용병들. 유사시에 신관에게 치료를 받아야 하는 처지인 만큼, 그건 어쩔 수 없는 결과였 다. 아무래도 친한 사람에게 좀 더 신경을 써주는 것은 인지상정이었으니까.
라이는 자신의 경험으로 미뤄 봤을 때, 사막을 통과하려면 적어도 1주일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새벽녘이 되었을 때, 밝아오는 여명과 함께 저 멀리 지 평선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시커먼 성벽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부지역 최대의 관문이라는 링카 성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링카 성이 이렇게 가까웠어요?”
“너 말 타고 오면서 졸았냐? 가깝기는 뭐가 가까워. 밤새도록 달려왔는데 말이야. 에구구, 허리야.”
짜증스럽다는 하리스의 반응에 라이는 자신이 올란도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했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떠그랄 놈! 하룻밤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일주일동안 사막을 박박 기게 만들었다 이거지? 어디 두고 보자. 꼭 복수하고 말테다.’
뒤끝 강한 올란도를 만나서인지, 라이도 서서히 그런 성품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니면 원래 그런 성격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성문 앞은 수많은 인파들로 붐비고 있었다. 짐을 잔뜩 실은 낙타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낙타 특유의 노릿한 냄새가 코 를 찔렀다.
“흐흐, 정말 끝내주는 모습이지? 저게 다 우리 돈줄이야. 저 대상(隊商)들 덕분에 우리 용병단이 먹고 산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니까. 아마 우리 용병단 수입의 절반 은 저들을 호위해 주는 것으로 벌어들이고 있을 걸?”
하리스의 말에 라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곧 질문을 던졌다.
“그럼 우리가 출동한 것이, 이들 대상에 대한 호위 임무 때문인가요?”
“그건 아니지. 설마 이런 시시한 일거리를 우리에게 맡기겠어? 우리는 이런 일보다 좀 더 거칠고 위험한 임무를 주로 수행하지. 그리고 힘든 일일수록 벌이도 좋 아. 수당을 많이 주거든.”
하리스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영구마법진이 구축되어 있는 건물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알카사스 내에는 영구적인 공간이동 마법진들이 두루 구 축되어 있었기에, 용병들은 될 수 있다면 마법진을 이용하여 이동했다.
가격이 다소 비싸기는 했지만 숙박비와 식비를 절약할 수 있는 데다가, 공간이동을 통해 절약한 시간을 활용하여 의뢰를 한건이라도 더 처리하면, 마법진 사용료 정도는 충분히 뽑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이런 일에 익숙한 듯 마법진을 이용한 용병단의 이동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목적지 근처에 위치한 도시로 공간이동한 후에야, 중대원들은 적당한 식당을 찾기 시작했다.
막대한 물자가 통과하는 링카 성과 달리, 변방의 도시는 한적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만큼 물가 역시 링카 성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저렴했다.
“식당에 들러서 밥이나 먹고 가죠.”
“그럴까?”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올란도가 중대원들을 이끌고 간 식당은, 이 근방에서는 가장 음식 맛이 괜찮은 곳이었다. 밤새도록 말을 타고 사막을 달려온 만큼, 중대 원들 모두 피곤에 지친 얼굴들이었다. 더군다나 빠르게 사막을 통과하기 위해 제대로 된 식사는 아예 생각도 못했고, 대충 건량(乾糧)을 씹어 허기를 채운 상태였기 에 더욱 그랬다.
그들이 주문한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식당 문이 열리더니, 손님 몇 명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손님들은 남자 넷에 여자 둘이었는데, 한눈에 봐 도 값비싸 보이는 갑옷으로 단단하게 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단단한 근육질 체격의 남자들도 꽤 잘 생긴 얼굴이었지만, 여자들의 미모는 이런 변방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아주 뛰어났다.
변방의 식당에서 이런 호화로운 차림새의 모험가 그룹과 마주치게 된 이유는, 이 식당이 이 근방에서는 가장 음식 맛이 뛰어난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올란도와 중 대원들은 워낙에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녀야 하는 처지였기에, 어디에 가면 어떤 식당이 가장 음식 맛이 좋은지 훤하게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눈이 부실 만큼 예쁜 여자가 갑옷을 입고 있는 모습은 처음 보았기에, 라이는 호기심에 자신도 모르게 정신없이 바라봤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하리스가 라이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뺀질이. 뭘 그렇게 침을 질질 흘리며 보고 있냐?”
“제가 언제 침을 흘렸다고 그래요?”
하리스는 힐끗 라이가 쳐다보고 있던 여자를 살펴본 뒤,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아무리 군침 흘려봐야 헛거다. 저 여자는 무녀(巫女)거든.”
“무녀요? 무녀가 뭔데요?”
“이런 무식한 놈. 어떻게 무녀를 모르다니……. 쉽게 말해 여자 신관을 무녀라 부른단 말이야.”
신관이라면 현재 중대원들과 함께 있는 청년도 있고, 또 그 전에도 몇 명 만나본 적이 있지 않던가.
“그런데, 그게 어때서요?”
“이런 무식한 놈! 신을 섬기는 신관은 결혼할 수 없다는 것도 모른다는 말이냐? 그래서 네가 아무리 군침을 흘려봐야 헛거라는 말이야.”
“그, 그렇습니까?”
저렇게 예쁜 여자가 결혼을 할 수 없다니,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분이 드는 라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있는 다른 여자는 아마 마법사일거야. 문양이 화려하게 수놓아진 고급갑옷이기는 하지만, 두께가 얄팍한 것이 한눈에 척 봐도 방어력이 대단 할 것 같아 보이지는 않지?”
“그건…, 그러네요.”
“무기를 봐도 회초리로 쓸 만한 저런 얄팍한 검으로 어떻게 몬스터들을 때려잡을 수 있겠냐? 그렇다고 활을 쓰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고……. 더군다나 사람이라 고 생각하기에는 미모가 너무 뛰어나잖아. 이런 경우 자연미인이 아니라, 인공미인일 가능성을 의심해 봐야 하는 거야.”
자연미인이니, 인공미인이니 하는 말은 처음 들어봤기에 라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근데 자연미인은 뭐고, 인공미인은 또 뭡니까?”
“에휴, 그것도 모르냐? 정말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잘 들어. 태어날 때부터 아름다운 미모를 타고난 애들을 자연미인이라고 불러. 여기까지는 이해가 가지?”
“예.”
“인공미인이라는 것은 마법을 통해 얼굴을 원래보다 좀 더 아름답게 개조해 버린 걸 말하는 거야. 인간 같지도 않은 그런 엄청난 미인들을 만나게 되면, 인공미인 이라고 생각하면 대충 맞을 거다.”
라이는 여자가 마법사라는 사실보다, 어쩌면 인공미인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에 더욱 놀랐다. 아무리 마법이 대단하다고 해도, 어떻게 그런 일까지 가능하단 말인 가.
“헉! 마법으로 정말 그런 것도 할 수 있어요?”
깜짝 놀라는 라이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하리스는 더욱 신이 나서 입을 놀렸다.
“크크, 못할 건 또 뭐가 있겠냐. 내가 예전에 들은 건데, 아카데미 마법학부를 졸업하는 애들 중에서 3사이클 이상의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하더라. 그만큼 3사이클에 오르기 힘들다는 말이지. 너도 아카데미 졸업생 나이가 몇 살인지는 알지? 그러니까 마법사로서 한 사람 몫을 하려면 졸업 후, 선배 마법 사 밑에 들어가서 더욱 공부를 해야만 한다는 거야. 그런데 저 여자는 이제 겨우 20대 초반도 되지 않아 보이잖아. 당연히 뭔가 술수를 부렸다는 말이지.”
“오, 그렇군요.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의무복무 기간을 채우고 무사히 제대하려면 고참 말을 잘 들으라는 거야. 세상에는 네가 상상도 못할 그런 해괴한 일들이 아주 많거든. 알고 있으면 피 가 되고 살이 되는 지식들이지.”
“명심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올란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그쪽으로 걸어가는 게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한눈에 척 봐도 상당한 관록을 지닌 모험자분들이신 것 같군요.”
은근슬쩍 수작을 거는 올란도, 그들은 올란도를 힐끗 쳐다보더니, 곧바로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즉, 상대하기 싫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올란도는 전혀 개의치 않 고,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 근처에는 모험가분들이 처리할 만큼 대단한 일이 없는데…, 혹시 그륜드 마을 쪽으로 가십니까?”
무시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말을 걸자,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사내 중 하나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당장 꺼져. 여기 이 자리가 네놈 따위가 끼어들 자리라고 생각한 거냐? 어디 용병 나부랭이가 감히…….”
이때, 둘 사이를 가로막고 끼어든 사람이 있었다. 모험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기에, 무녀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되던 바로 그 여성이었다. “룬드그렌 경, 말씀이 너무 심하시네요.”
그녀는 올란도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륜드로 가시는 모양이죠? 거기에 무슨 일이라도 터졌나요?”
“오크들을 토벌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와서 말입니다.”
그 말에 룬드그렌이라는 사내의 얼굴에 비웃음이 어렸다. 그는 가소롭기 짝이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겨우 오크 따위를 가지고…….”
하지만 올란도의 별명이 달리 발정난 여우이겠는가. 그는 비웃는 사내 쪽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오로지 무녀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이렇게 노 골적으로 빤히 바라보는 남자도 흔치 않았기에, 무녀는 거북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20여 명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오크 떼를 상대하시려면 많이 힘드시겠네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녀님께서는 정말 마음이 고우시군요. 그런데 어느 종단에서 나오셨는지?”
“여명의 여신 오로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사내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올란도는 끝까지 무녀에게 수작을 건넸다. 하지만 그도 결국에는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기 때문이다. 얘기하는 동안 무녀는 싫다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올란도의 음식이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급히 말을 꺼냈다.
“저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식사가 나온 거 같은데요.”
“아, 그렇습니까?”
그제서야 자신의 자리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는 올란도.
“그렇군요. 오늘 대화…, 정말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폐가 되지 않는다면 축도(祝禱)를 좀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러자 무녀는 난처하다는 듯 대답했다.
“축도를 해드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만, 오로라님을 섬기지 않으신다면 별 효력을 보시기 힘들 텐데요.”
“제가 예전에 오로라님을 섬기는 무녀님께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는데, 어찌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로 그날 오로라님을 제 주신(主神)으로 영접했었죠.”
그 말에 무녀는 이번에는 진심어린 미소를 활짝 지었다.
“오오, 그러셨나요? 그렇다면 당연히 축도를 해드려야죠. 자, 무릎을 꿇어 주세요.”
올란도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자신의 앞에 자리 잡자, 무녀는 가늘면서도 예쁜 손을 그의 머리 위에 살며시 올린 후 꾀꼬리처럼 예쁜 음성으로 축도를 읊어줬다. 무 녀는 진심으로 신께 축복을 청하고 있었지만, 올란도는 살짝 실눈을 뜨고 그녀의 젖가슴을 훔쳐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녀의 탐스러운 가슴어림이 자신의 바로 코 앞에 위치해 있었으니까. 문제는 그런 올란도의 뻔뻔스런 행태를 다른 모험가들이 눈치 채고는 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는 것이다.
“축도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저는 이만.
“안녕히 가세요. 오로라님의 축복이 언제나 함께 하기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느긋한 걸음걸이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올란도. 그가 그리 멀리 떨어지지도 않았음에도, 사내들 중 한 명이 약간 커다란 목소리로 무녀 에게 말했다.
“저런 쓰레기 같은 용병 따위에게까지,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무녀님.”
올란도보고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하지만 무녀는 그런 거에 개의치 않는다는 듯 상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덕분에 그륜드쪽 얘기도 들을 수 있었고요.”
하지만 그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올란도가 일개 용병대 중대장 노릇이나 하고 있을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올란도가 자리 잡은 식탁에는 2명의 소대장들과 신관이 함께 앉아 있었다. 장교급인 그들이 사병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자, 모두들 들지. 사제님께서도 어서 드십시오.”
그러자 라이온이 부럽다는 표정으로 급히 말을 건넸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중대장님.”
론도는 한술 더 떠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저런 미인과 다정하게 얘기를 하다니……. 난 말을 건넬 생각만 해도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데….
“쯧쯧, 미인이라고 뭐 별다른 거 있는 줄 아나? 그냥 눈만 즐거운 대상이야. 더군다나 무녀는 얘기 상대 외에 따로 써먹을 데도 없잖아?”
별거 아니라는 올란도의 대꾸에 론도가 신경질적으로 이죽거렸다.
“쳇, 저런 미인을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않으시는 분은 중대장님뿐일 겁니다. 중대장님이 여자를 나누는 기준은 딱 2가지잖습니까. 거시기를 할 수 있느냐, 없느 냐.”
“헛, 나를 그렇게 저급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니. 그건 아냐. 아니면 내가 왜 무녀님께로 가서 얘기를 나눴겠나. 그런 원초적인 것도 좋긴 하지만, 눈과 귀의 즐거움도 무시할 수 없는 법이거든. 특히 저 무녀는 얼굴도 예뻤지만, 목소리는 더욱 끝내줬지. 너는 못 들었겠지만, 그 가느다란 떨림이 정말 애간장을 살살 녹이더 만.”
“썅, 나도…….”
치밀어 오르는 부러움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지만, 론도는 잠시 망설이다가 곧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무녀가 속해있는 모험가 파티는 한눈에 봐 도 꽤나 실력 있는 무리들로 보였다. 올란도처럼 넉살좋은 인물이라면 몰라도, 자신으로서는 보는 것만으로도 위축이 되었던 것이다.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 말고, 빨리 밥이나 먹어.”
가볍게 타박하는 라이언을 한번 째려본 론도는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음식을 입안에 와구와구 퍼 넣기 시작했다. 올란도는 그들과 함께 여유롭게 식사를 하고 있 었지만, 그의 머리와 귀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모험가 파티원들이 주고받는 얘기를 엿듣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