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0권 2화 – 오크 풀 뜯어먹는 소리
오크 풀 뜯어먹는 소리
번쩍.
엄청난 마나의 파동과 함께 익숙한 존재감의 등장에 브로마네스는 만사를 제쳐놓고 레어 밖으로 달려 나왔다. 만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오~, 이게 누군가, 친구. 정말 오랜만일세.”
예전에 왔을 때는 틱틱거리더니, 전과 달리 환대하는 걸 보면 뭔가 속셈이 있음에 틀림없었다.
“이렇게 반갑다고 하는 놈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연락조차 하지 않았냐?”
“뭐야! 연락을 안 하기는 누가 안했다는 거야? 10년 전에 내가 보낸 마법통신을 씹은 건 네놈이었잖아!”
브로마네스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아르티어스는 찔끔 해서는 급히 사과했다.
“어, 그, 그랬나? 내가 그동안 좀 피곤해서…….”
아르티어스의 말에 브로마네스는 단번에 그 사정을 눈치 챘다.
“아항~, 자고 있었던 모양이군.”
아르티어스는 순순히 실토했다.
“그렇다네. 그러니 자네가 이해해 주게, 친구. 내가 그동안 좀 바빴나? 마음 같아서는 한 100년쯤 퍼자고 싶었지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억지로 몸을 일으킨 거라네.”
“어쨌거나 한숨 푹 잤다니 다행이군. 자, 들어가자구. 너한테 보여줄 것도 있고 말이야.”
브로마네스가 아르티어스를 끌고 간 곳은 높이 8미터 정도로 제작된 거대한 자신의 동상 앞이었다. 동상을 올려다보는 브로마네스의 얼굴은 흐뭇함과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어때, 대단하지?”
“대단하긴 하네. 제법 잘 만들었어.”
대답은 시큰둥하게 했지만, 마음은 정반대였다. 드래곤인 이상 아르티어스 역시 금은보석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동상을 바라보는 아르티어스는 너무 나도 배가 아팠다. 그만큼 대단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새하얀 상아로 뼈대를 만들고, 금과 은으로 몸통을 붙인 다음, 각종 보석으로 끝마무리를 해놨다. 문제는 브로마네스는 이걸 자신의 동상이라고 만든 모양인데, 전 혀 레드 드래곤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몸통에 붙인 금이 불빛에 번쩍거리는 것이 꼭 골드 드래곤처럼 보였다. 그리고 새하얀 상아와 은으로 인해 실버 드래곤처럼 보이기도 했다.
‘젠장, 이건 개발에 편자야. 이런 돌대가리의 레어에 놔두는 것보다는, 내 레어를 장식하는 게 훨씬 더 잘 어울릴 텐데…….’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그런 얘기를 꺼내 브로마네스의 기분에 초를 치지는 않았다. 아쉬워서 찾아온 것은 그였으니까.
연신 동상에 대한 자랑을 하면서도 ‘배 아프지’ 하는 표정으로 아르티어스를 곁눈질하던 브로마네스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내가 데리고 있는 드워프 좀 빌려줄까? 너는 필요할 때마다 주변에 있는 드워프놈들을 잡아다가 일을 시킨다며? 그래서는 안 돼. 놈들이 제대로 실력을 갖추도록 훈련도 시키고, 또 협박도 하면서 공을 들여야 하는 거야. 그래야 자기들이 알아서 째깍째깍 예술작품도 만들어 바치고…….”
아르티어스는 짜증스런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상대의 말을 막았다.
“됐어. 나는 현재로도 충분히 만족해.”
“이봐. 네가 그렇게 어정쩡하게 대하니까, 그놈들이 성심성의껏 일하지 않고 대충 시간만 때우고 마는 거란 말이야. 한두 놈 잡아다가 확실하게 맛을 보여 놓으 면…….?
“아아, 그건 됐어. 안 그래도 할 일도 많은데, 하찮은 드워프 따위에게 신경 쓸 시간 없어.”
화려한 보물을 싫어하는 드래곤은 없다. 그런데 이런 강한 부정이라니.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브로마네스는 의심스럽다는 듯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시간이 없다고? 너 혹시…, 아직도 그 호비트를 살리려고 뛰어다니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건 이미 끝난 일이야. 실은 그거…….”
브로마네스는 아르티어스의 말을 오해했다.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핫핫, 이제야 네가 정신을 차렸구나! 그래, 축하한다. 보내줄 놈은 보내줘야지. 좋아! 이런 기쁜 날에 술을 한잔 안 할 수가 없지.”
자신의 말이 도중에 씹힌 건 매우 짜증나는 상황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말이 도중에 씹힘으로 인해, 브로마네스가 더욱 큰 오해를 했다는 데 있었다. 아르티 어스로서는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아니, 그게…….”
“흐흐, 너하고 마시려고 괜찮은 포도주 좀 준비해 놨어. 뭐, 나는 포도주보다는 좀 더 화끈한 걸 좋아하지만 말이야.”
기분이 무척 좋은지 브로마네스는 곧바로 노예들에게 명령해서 술상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확실히 브로마네스는 노예를 다루는 재주가 탁월한 모양이다. 그의 명 령이 떨어지자마자 노예들이 사방에서 우르르 몰려나오더니 그들의 앞에다가 커다란 탁자 하나를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곧이어 여러 가지 음식들을 척척 가져오기 시작했다. 술안주로 먹는 것인 만큼 탁자 위에 차려진 것은 간단한 요리와 과자류, 그리고 고소한 견과류 종류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자, 앉아. 네가 그 호비트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래, 큰 결심했다.”
브로마네스는 술잔 가득히 포도주를 따라 아르티어스에게 건넸다.
“자네의 결단을 위하여!”
마지못해 술잔을 받아 쭉 들이켠 아르티어스의 얼굴은 떨떠름했다. 하지만 그에 비해 브로마네스의 얼굴은 무척 밝았다. 아니, 마음이 편치 않은 친구를 위해 일부 러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 죽은 놈은 죽은 놈이고… 친구, 나하고 유희 한판 하지 않겠나? 예전처럼 둘이서 함께 말이야.”
“다 늙어서 유희는 무슨 얼어죽을 유희.”
상대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고심하고 있는 아르티어스였기에, 그의 대응에는 짜증이 묻어있었다. 하지만 브로마네스는 그런 말투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허, 내 말을 먼저 잘 들어봐. 그럼 너도 흥미가 생길걸. 다란츠 해역(海域)에 꽤 많은 실버 일족들이 몰려 사는 건 너도 알고 있지?”
아르티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브로마네스는 급히 말을 이었다.
“그 녀석들이 이번에 꽤 커다란 일을 꾸미고 있다고 하더라고. 어때? 거기에 동참해 보는 것은?”
말을 듣던 아르티어스의 인상이 왈칵 일그러졌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녀석들이 일을 꾸미는 데 끼어들어 봐야 무슨 재미가 있겠냐? 게다가 우리들의 도움 따위는 필요로 하지도 않을 텐데……..
그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브로마네스는 피식 웃더니 장난기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흐흐, 내 말은 녀석들을 돕자는 게 아니라 훼방 놓자는 거야. 꽤나 재미있을 거 같지 않나, 친구?”
“훼방을 놓자고?”
순간, 아르티어스의 눈이 번쩍였다. 악동 기질이 다분한 그였기에, 이번 제안은 꽤나 구미가 당겼던 것이다.
아르티어스가 가장 싫어하는 일족이 무식한 레드라면, 그 다음 순위를 차지하는 게 힘만 센 실버였다. 바다에 사는 드래곤인 만큼 놈들은 육상 드래곤보다 월등한 덩치를 지니고 있었고, 그 덩치에 비례하는 타고난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실버 드래곤들은 육상에 서식하는 드래곤을 2류쯤으로 치부하며 깔봤다.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있는 아르티어스로서는 정말이지 열 받는 일이었던 것 이다.
그런 놈들을 골탕 먹이는 일이라면 틀림없이 즐거우리라. 그것도 친구와 함께이니까, 그 즐거움이 2배쯤 되지 않을까? 하지만 아쉽게도 아르티어스는 그 계획에 동참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까.
“자네가 틀림없이 관심을 가질 거라고 생각했다네, 친구.”
귀를 쫑긋하는 아르티어스의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브로마네스는 흐뭇하게 웃으며 포도주를 단숨에 들이키더니 말을 이었다. 브로마네스는 포도주를 음미하며 마시는 법이 없었다. 그 커다란 잔에 가득 채워서는 단숨에 털어 넣을 뿐..
“물론 그놈들이 한꺼번에 떼거리로 일을 벌인다는 건 아냐. 실버 일족의 체면이 있지,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냐. 간단하게 말해 유희를 즐기려는 어린놈을 하나 꼬 셔서, 그놈을 대리인으로 내세운 거야.”
실버 일족 전체도 아니고, 그 대상이 어린놈 한 마리라는 말에 아르티어스는 짜증이 왈칵 솟구쳤다. 브로마네스 혼자서도 놈을 가지고 놀 수 있을 게 뻔한데, 뭘 함 께 하자는 말인가?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솟구치는 짜증을 애써 억눌러야 했다. 놈에게 부탁하기 위해 찾아온 처지였으니까.
“친구, 나는 별로 흥미가 없으니 하고 싶으면 자네 혼자 하시게나.”
시큰둥한 아르티어스의 반응에 브로마네스는 김빠진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래? 나는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거 말고 내가 좀 더 재미있는 유희 거리를 하나 제안하지.”
그 말에 침울해 하던 브로마네스는 반색을 하며 급히 반문했다.
“오오, 좋은 건수가 있는 모양이군. 그게 뭔가? 친구. 자네 말만 들어도 벌써 구미가 동하는구먼.”
“이 일은 우리 드래곤으로서도 해내기 힘든, 아주 난이도가 높은 일이지.”
아르티어스가 짐짓 말을 끌자 브로마네스는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허, 이거 참! 내 성질 급한 걸 모르나? 빨리빨리 말해보게.”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호비트 아들을 ‘금단의 비술’이라는 마법을 사용하여, 다시금 환생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아르티어스의 말을 다 들은 브로마네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정말로 살려낸 거냐? 그 비술이라는 걸 사용해서?”
“마법은 분명히 실행되었어.”
브로마네스의 질문에 단호하게 대답한 아르티어스는 포도주를 한잔 더 입안에 털어 넣은 다음 말을 이었다.
“비술이 성공했으니, 그 아이는 분명히 다시 태어났을 거야. 문제는 그 아이를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찾아 낼 수가 없다는 거지. 그 망할 비술이라는 게, 자신을 죽 인 적으로부터 몸을 숨기는 것까지 옵션으로 딸려있었거든.”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 아르티어스를 빤히 쳐다보던 브로마네스는 곧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딴 건 몰라도 마법실력만 따진다면 네가 나보다 한수 위잖아?”
“그건 그렇지.”
“그런데 네가 못하는 일을 내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그것도 마법에 관계된 일을?”
“그래도 너는 나보다는 견문이 넓잖아. 아는 드래곤도 많고 말이야.”
오지랖이 넓어 낄 데 안 낄 데 가리지 못하는 성격 탓에 견문이 넓어진 것이었지만, 부탁을 해야 하는 입장인 아르티어스는 애써 단어를 순화해 말했다. 아르티어 스는 브로마네스를 그렇게 평했지만, 솔직히 브로마네스의 처지가 아르티어스 보다는 백배 나았다. 그에게는 사방에 원수들만이 즐비했으니까. 말토리오에 자리 잡았다가 그의 행패에 쫓겨난 드래곤들로…….
“내가 아는 드래곤이 많다고 해도 이런 경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네, 친구. 게다가 전생의 비술이라는 말은 오늘 처음 들어봤거든. 만약 그런 황당무계한 마법이 있는 줄 알았다면, 다른 드래곤들이 가만히 있을 줄 아나? 저능한 호비트 따위도 그런 방법을 이용해 생을 연장하는데 말이야.”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비술을 쓸 때 그 주변에 임신이 가능한 암컷이 있어야 하고, 또 일정한 시간 내에 수컷과 거시기를 해서 임신을 해야 만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거든. 그런 마법으로 생을 연장하기에는 우리 드래곤 종족의 인구수가 너무 적어.”
그 말에 브로마네스는 마치 김샜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런 짜증나는 제약이 있었군. 그 비술을 쓸 때, 일정거리 안에서 거시기를 하고 있을 동족이 과연 몇이나 있겠나?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
“그러니까 어린놈이나 괴롭히는 그런 시시한 짓거리는 집어치우고 어때? 내 일을 도와주는 것이. 네가 하려는 일보다, 훨씬 난이도도 높고 보람찬 일이 될 거야.”
“보람차기는 개뿔이…, 그건 네놈에게나 해당되는 말이겠지.”
“말을 그따구로 할래? 그리고 좀 도와주면 어디가 덧나냐?”
신경질적인 아르티어스의 말에 브로마네스는 냉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싫어. 보물을 찾는 것도 아니고, 호비트따위 찾는 건 재미 하나도 없다구.”
“그러지 말고 좀 도와주라.”
“싫다니까. 네놈 일을 훼방 놓는 거라면 또 몰라도……. 오호, 말하고 보니 그편이 훨씬 더 재미있겠는데. 흐흐흣.”
그러자 아르티어스는 울컥해서 소리쳤다.
“빨갱이, 너 자꾸 그딴 식으로 삐딱하게 말할래?”
아르티어스는 온갖 위협과 협박을 동원해서 브로마네스를 설득하려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브로마네스는 계속 자신을 그딴 일로 괴롭힌다면 작심하고 아르티어스의 수색 작업을 방해하겠다고 협박했다.
만약 그것도 안 된다면 말토리오 산맥 일대에 살고 있는 모든 호비트들을 씨몰살시켜 버릴 수도 있다는 위협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약이 바짝 오른 아르티어스는 만약 그딴 짓을 하기만 하면 브로마네스의 레어를 박살내 버리겠다고 맞받아쳤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그야말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공갈과 협박의 연속이었다.
결국 신경질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아르티어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으르렁거렸다.
“이런 망할 새끼! 내가 다시 한 번 더 네놈에게 부탁하는 일이 있다면, 내가 드래곤이 아니라 오크다.”
그러자 아르티어스 못지않게 열받은 상태인 브로마네스는 상대를 말리기는커녕 차갑게 대꾸했다.
“오크 풀 뜯어먹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잘 가라, 오크 새꺄. 다시는 오지 마!”
분기탱천한 아르티어스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부숴져라 이빨을 으드득 갈았다. 성질 같아서는 브로마네스의 둥지에다가 브래스라도 한방 날려버 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했다가는 브로마네스와는 완전히 끝장이라는 것을 그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둥지 밖으로 걸어 나가다 보니 입구 쪽에 세워져 있는 30여 개의 동상들이 보였다. 호비트는 물론이고 엘프, 드워프, 오크, 트롤, 오우거 등등……. 여러 종족들을 실물 크기로 제작해 놓은 것들이다.
입구 좌우로 도열해 있는 동상들은 마치 동굴을 통과하는 존재를 향해 예를 표하는 것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주인이 꼴 보기 싫다 보니 그놈의 동상들마저도 눈에 거슬렸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애써 참았다. 동상을 때려 부숴봐야 스트레스 해소도 별로 되지 않고, 브로마 네스와의 관계는 더더욱 악화될 게 뻔했으니까.
브로마네스가 예전에 이 동상들을 보여주며 자신에게 얼마나 자랑질을 했던가. 물론 지금도 아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것을 제작해 놨을 당시에는 무척 아 꼈던 기억이 있다.
씩씩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오던 그의 눈에 오크들이 보였다. 브로마네스의 레어 입구를 지키는 오크들이었다. 오크들은 잔뜩 겁에 질린 듯한 모습으로 황급히 아 르티어스를 향해 비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주인과 함께 레어 안으로 들어간 이 호비트가 사실은 드래곤이라는 것을 녀석들도 눈치 챈 것이다.
“휙!”
드래곤의 심사가 안 좋다는 것을 녀석들도 느꼈지만,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브로마네스로부터 동굴 입구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감 히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슬그머니 딴 데로 눈길을 돌리는 오크들.
“이놈의 새끼들은 제대로 인사도 못해!”
퍽!
“꾸에엑!”
아르티어스에게 발길질을 당한 오크는 땅바닥에 나뒹굴었다가 재빨리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오크의 얼굴은 이미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하얗게 변해있었다.
호전적인 오크가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기는 아주 어려운 일이었지만, 지금 입구 쪽에 모여 있는 오크들은 다들 똑같은 모습이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그저 아르티어스의 처분만 기다리며 달달 떠는 불쌍한 모습들. 상대가 대적 불가능한 드래곤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나타나는 반응이었다.
한대 더 쥐어박으려던 아르티어스는 그 모습에 신경질적으로 손을 내렸다. 반항도 제대로 못하는 놈들을 쥐어 패봐야 짜증만 날 뿐이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반항이라도 좀 해야 괴롭히는 재미가 있지.”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과거 아들놈들과 함께 다니던 호비트들은 꽤나 괴롭히는 재미가 쏠쏠했던 놈들이었다. 처음에는 절절 기더니, 나중에는 제법 개기기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그놈들을 괴롭히러 갈까? 아니, 그건 아니었다. 그놈들에게는 시킬 일이 있었으니까.
이때, 그의 뇌리를 번쩍 하고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손가락을 딱하고 튕기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맞아. 그놈이 있었지. 흐흐흐, 오랜만에 세상물정 모르는 손님이 오셨다 이거지? 내가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제대로 된 대접을 해드려야지.”